LOGIN서윤은 방문 손잡이를 잡고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
직접 열어 봐야 한다고 했다. 사진도, 측정값도 없었다.
복도 끝에서 도현이 휴대전화를 보고 있었다. 서윤은 문을 조금 더 열었다.
“대표님.”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서윤을 보자 휴대전화를 쥔 손이 내려갔다.
“제조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샘플은 나왔는데 내일 직접 열어 보라고 합니다.”
“문제가 있다는 뜻입니까?”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수치를 받아 보겠습니다.”
도현의 시선이 서윤의 휴대전화에 닿았다. 가까이 오지는 않았다. 서윤은 화면을 내밀려던 손을 멈췄다.
둘 사이에는 열린 문 하나만큼의 거리가 있었다.
“확인되면 공유해 주세요.”
낮은 목소리였다. 조용한 복도에서는 끝까지 또렷하게 들렸다.
“네.”
서윤은 객실로 들어왔다. 상자 위에 파일을 놓고, 외투도 벗지 않은 채 제조사 담당자에게 전화했다.
“열 때 걸리는 겁니까?”
“닫히는 건 괜찮습니다. 그런데 손으로 열기가 좀 뻑뻑합니다.”
“측정은요?”
“내일 오전에 하려고 합니다.”
“지금 여러 번 열지는 말아 주세요. 처음 여는 샘플도 따로 남겨 두시고요.”
통화를 마친 서윤은 시험표에 항목을 더했다. 낙하 뒤 닫힘 상태와 처음 여는 힘, 반복 사용 뒤 변화를 적었다. 도현에게도 내용을 보냈다.
답은 곧 왔다.
「내일 아침 식사 후 출발하겠습니다. 접수대 앞에서 뵙겠습니다.」
서윤은 가방에서 충전기를 꺼냈다. 짧게 답하고 휴대전화를 뒤집었다.
객실 벽 너머로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펜을 들던 손이 멈췄다. 복도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아직 귀에 남아 있었다.
「내일 또 보겠네.」
당연한 일을 새삼 생각했다.
서윤은 펜을 내려놓았다. 밴드 끝이 조금 들떠 있었다. 손끝으로 눌러 붙인 뒤 시험표를 다시 펼쳤다.
◇
3월 15일 아침, 시험실 작업대에 수정 샘플이 놓여 있었다.
담당자가 뚜껑 가장자리를 짚었다.
“걸리는 깊이를 늘렸습니다. 경사도 바꿨고요.”
“어제 실패한 샘플과 표시를 다르게 해 주세요.”
서윤은 샘플 번호를 확인했다. 도현은 작업대에서 떨어진 책상에 계약 자료를 내려놓았다.
자료를 놓던 도현이 서윤 쪽을 봤다. 서윤은 번호에서 눈을 떼다가 그 시선을 받았다. 먼저 고개를 돌린 건 서윤이었다.
내용물을 넣은 용기가 시험 높이까지 올라갔다.
바닥면이 먼저 닿았다. 뚜껑은 열리지 않았다.
새 샘플로 모서리 방향도 확인했다. 용기가 튀었다가 옆으로 누웠다. 체결부는 붙어 있었다.
서윤은 가까이 가서 틈을 살폈다.
“이쪽도 그대로입니다.”
시험 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은 샘플도 같은 조건으로 진행하겠습니다.”
반복한 시험에서도 뚜껑은 벌어지지 않았다. 담당자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
“이제 됐네요.”
서윤은 결과를 적었다.
“여는 것까지 보겠습니다.”
빈 용기와 내용물이 든 용기를 나눴다. 서윤은 빈 용기를 먼저 잡았다. 몸체를 누르고 뚜껑 끝을 들어 올렸다.
움직이지 않았다.
잡는 곳을 바꿨다. 손목을 더 꺾자 짧은 소리와 함께 뚜껑이 열렸다.
서윤은 뚜껑을 바로 내려놓았다. 손가락보다 손목 안쪽에 힘이 몰렸다.
“젖은 손으로도 해 보겠습니다.”
물을 묻히자 더 어려웠다.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그 자리를 다시 잡아야 했다.
시험표 옆으로 작은 수건이 놓였다. 도현의 손이었다.
“손부터 닦으시죠.”
서윤은 수건을 집었다. 도현이 손을 거두는 순간, 손끝이 가까워졌다. 닿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서윤은 수건을 바로 펴지 못했다.
「손만 닦으면 되는데.」
손바닥을 꾹 눌렀다. 젖은 손의 차가운 감각이 조금 가셨다.
도현의 시선은 서윤의 손목에 잠깐 머물렀다. 서윤이 고개를 들자 샘플 쪽으로 옮겨갔다.
담당자가 말했다.
“단단하게 잠기게 했으니 이 정도는 감수해야 하지 않을까요?”
“손목을 꺾어야 열리는 상태로는 어렵습니다.”
“다시 깎으면 낙하 시험에서 열릴 수 있습니다.”
“맞물리는 깊이는 유지하겠습니다.”
서윤은 도면을 당겼다.
“손이 들어가는 곳과 잠금부가 너무 가깝습니다. 여길 들어 올리면 바로 이 부분이 버팁니다.”
담당자가 표시한 곳을 들여다봤다.
서윤은 민재가 보낸 사진을 열었다. 손가락이 미끄러진 자리에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여기를 잡고 열 수 있게 잠금부 위치를 옮겨 보면 어떨까요?”
“끝으로 더 보내자는 겁니까?”
“네. 몸체 규격 안에서요. 깊이는 그대로 두고 열리는 순서를 바꾸고 싶습니다.”
금형 직원이 시험용 부품을 돌려 봤다.
“지금 부품으로 위치를 달리해서 비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럼 나머지 조건은 그대로 두겠습니다.”
서윤은 도면의 표시를 사진으로 남겼다.
“바뀌는 부분이 섞이지 않게 해 주세요.”
도현이 견적 요청서를 가져왔다.
“추가 작업 범위부터 적어 주시면 확인하겠습니다.”
요청서를 내려놓는 손이 서윤의 도면 옆에서 멈췄다. 서윤은 종이를 조금 당겼다. 도현의 소매 끝이 시야에 들어왔다.
도현은 서윤이 손을 거둔 뒤에야 요청서를 밀어 놓았다.
담당자는 도면과 요청서를 나란히 뒀다. 서윤은 시험표에 새 샘플 번호를 적었다. 펜 끝을 내려다보는데도 가까이 서 있던 도현의 기척이 느껴졌다.
◇
샘플을 기다리는 동안 서윤은 전날 기록을 정리했다.
시험 직원이 젖었던 종이표를 투명 봉투에 넣어 왔다.
“마르긴 했는데 글씨가 번진 곳이 있습니다.”
서윤은 새 표와 번호를 맞춰 봤다.
“사진이 있으니까 같이 남기면 됩니다.”
직원이 봉투를 붙이다 테이프를 비뚤게 잡았다. 서윤이 봉투 아래쪽을 눌러 줬다.
“천천히 하세요.”
“제가 어제 바로 집었으면 덜 젖었을 텐데요.”
“열린 상태를 봐야 했어요. 덕분에 위치가 같다는 걸 확인했고요.”
직원이 서윤을 봤다.
“그럼 이 표도 같이 보내겠습니다.”
“네. 샘플 상자 안쪽에 넣어 주세요.”
직원은 봉투 위에 번호를 다시 적었다. 이번에는 한 글자씩 확인했다.
도현은 맞은편에서 비용 내역을 읽고 있었다. 직원이 돌아간 뒤에도 시선은 서윤 쪽에 남아 있었다.
서윤은 자료를 모으다 고개를 들었다.
“왜 그러십니까?”
도현이 바로 답하지 않았다. 서윤은 종이 모서리를 쥔 손에 힘을 줬다.
“기록 정리가 끝났는지 확인하려고 했습니다.”
“여기까지는 끝났습니다.”
서윤은 묶어 둔 자료를 밀었다. 도현이 받아 첫 장을 넘겼다.
종이를 잡은 손가락이 보였다. 조금 전 수건을 놓아 주던 손이었다.
서윤은 노트북으로 눈을 내렸다.
「일하는 손을 보고 뭐 하는 거야.」
화면을 읽는데 읽던 줄에서 눈이 멈췄다. 맞은편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가 나고서야 다음 줄로 내려갔다.
잠시 뒤 수정 샘플이 도착했다.
서윤은 식히는 시간을 확인하고 용기를 잡았다. 이번에는 손목을 꺾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뚜껑 끝을 들어 올리자 잠금부가 차례로 풀렸다.
“같은 위치로 다시 해 보겠습니다.”
닫은 뒤 다시 열었다. 젖은 손으로도 확인했다. 손가락을 몇 번씩 고쳐 잡을 필요가 없었다.
측정값도 임시 기준 안에 들었다.
담당자가 화면을 돌렸다.
“처음 것보다 여는 힘이 낮습니다.”
“닫히는 힘도 적어 주세요. 낙하 시험은 새 샘플로 다시 하고요.”
내용물을 넣은 용기가 바닥에 떨어졌다.
뚜껑은 닫혀 있었다.
다른 높이의 몸체에도 같은 규격의 뚜껑을 끼웠다. 가장자리를 눌러 닫고 방향을 바꿔 확인했다. 젖은 손으로도 열어 봤다.
서윤은 마지막 결과 옆에 확인 표시를 했다. 펜을 놓으며 짧게 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들자 도현이 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서윤도 바로 눈을 피하지 않았다. 도현의 시선이 시험표로 내려갔다가 돌아왔다. 서윤은 손가락을 가볍게 폈다.
담당자가 의자를 당겨 앉았다.
“이 조건으로 소량 생산 견적을 다시 내겠습니다.”
“금형 수정 비용과 제품 단가는 나눠 주세요. 뚜껑 단품 포장 비용도 별도로요.”
“포장 쪽은 아직 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건 확인 중으로 두고, 확정된 것부터 보내 주세요.”
도현이 합의 내용을 확인하고 서명했다.
서윤은 박 팀장에게 결과를 보냈다. 통화로 낙하와 개폐력 결과를 설명하자, 박 팀장은 단가부터 물었다.
“견적이 와야 알 수 있습니다.”
“시험이 됐다고 원가까지 내려간 건 아니라는 거지?”
“네. 정식 수정 범위가 바뀌었습니다. 다시 비교하겠습니다.”
전화를 끊자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 있었다.
서윤이 노트북을 닫았다. 도현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식사하시죠.”
시험실에서 주고받던 말보다 목소리가 조금 낮았다. 서윤은 닫힌 노트북 위에 손을 둔 채 고개를 끄덕였다.
◇
공장 근처 식당에는 빈자리가 많았다.
서윤은 가방을 안쪽 의자에 놓고 앉았다. 맞은편에 앉은 도현이 물컵을 채웠다.
서윤은 컵에 닿으려던 손을 잠깐 거뒀다. 도현이 물을 다 따른 뒤에야 다시 잡았다.
“견적은 월요일에 받기로 했습니다.”
“확인했습니다.”
대화가 짧게 끝났다.
서윤은 물을 마셨다. 종일 샘플을 쥐었던 손가락이 뻐근했다. 컵을 감싼 손을 조금 느슨하게 폈다.
도현이 그 움직임을 봤다. 서윤은 컵을 내려놓았다.
직원이 음식을 가져왔다. 뜨거운 국그릇이 서윤 앞에 놓였다. 받침이 비뚤어져 그릇 한쪽이 테이블 끝에 가까웠다.
서윤이 손을 뻗었다.
도현의 손이 먼저 왔다.
“뜨겁습니다.”
서윤의 손끝이 그릇 앞에서 멈췄다. 도현은 받침을 잡아 안쪽으로 옮겼다. 손잡이도 서윤의 손이 닿지 않는 쪽으로 돌렸다.
가까이 온 도현의 손등을 서윤이 내려다봤다. 손을 거두는 동안 소매 끝이 받침 옆을 스쳤다.
수저를 들려던 손도 멈췄다.
학교 근처의 작은 식당에서도 그랬다.
직원이 놓고 간 그릇을 도현이 먼저 옮겼다. 서윤이 괜찮다고 하면 받침만 잡으면 된다며 웃었다. 밥을 먹다가도 뜨거운 그릇이 가까이 오면 손부터 뻗었다.
지금 도현은 웃지 않았다.
받침을 놓고 자기 물컵을 당겼다.
서윤은 그 손이 멀어지는 걸 봤다.
「이런 건 그대로네.」
“손목은 괜찮습니까?”
서윤이 눈을 들었다.
“네. 잠깐 힘이 들어간 겁니다.”
“많이 쓰셨습니다.”
“확인하려면 열어 봐야 하니까요.”
대답을 마치고 수저를 들었다. 국을 조금 떠서 식혔다. 뜨거운 김 너머로 도현의 시선이 느껴졌다.
서윤이 한 숟가락 먹은 뒤에야 도현도 수저를 들었다.
잠시 수저 소리만 났다.
말이 없으니 작은 움직임이 더 눈에 들어왔다. 도현이 컵을 잡았다 놓는 손. 국을 뜨기 전에 잠깐 멈추는 수저.
서윤은 그쪽을 보지 않으려 밥으로 시선을 내렸다.
도현이 서윤 앞의 받침을 봤다.
“그때도 이런 그릇이었는데.”
서윤은 수저를 내려놓았다.
그릇 가장자리에 닿아 작은 소리가 났다.
도현의 말이 멈췄다. 서윤은 물컵을 잡았다. 목이 마르지 않은데도 한 모금 마셨다.
컵 너머로 도현과 눈이 마주쳤다. 서윤은 먼저 눈을 내렸다.
“식기 전에 드세요.”
도현이 말했다. 조금 전보다 목소리가 낮았다.
서윤은 컵을 놓고 다시 수저를 들었다.
묻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건 기억하면서.」
그런 장면은 기억하면서 왜 연락은 하지 않았는지. 아무 설명 없이 떠난 사람도 그 식당을 떠올렸는지.
「왜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어요.」
입 밖으로는 내지 않았다. 서윤은 밥을 조금 덜어 국에 넣었다.
도현도 더는 지난 일을 꺼내지 않았다. 직원이 빈 반찬 접시를 가져가려 하자 테이블 끝으로 옮겨 줬다.
도현의 팔이 잠깐 서윤 앞을 가로질렀다. 서윤은 수저를 쥔 손을 멈췄다. 팔이 곧 거둬졌다.
좁아졌던 거리가 다시 벌어졌다. 서윤은 그제야 수저를 움직였다.
식사를 마치고 나올 때 도현이 문을 잡았다.
서윤은 문 안쪽에 잠깐 섰다. 문을 잡은 손과 도현의 얼굴을 차례로 봤다.
“먼저 가시죠.”
도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더 열었다.
서윤은 그 옆을 지나 밖으로 나갔다. 가까워진 어깨에 신경이 쓰여 걸음을 조금 조심했다. 도현은 서윤이 다 나갈 때까지 손을 놓지 않았다.
◇
귀경하는 차 바닥에는 샘플 상자가 놓였다.
서윤은 안전띠를 매고 시험표를 펼쳤다. 도현은 옆자리에서 자료철을 꺼냈다. 앞자리의 운전기사가 출발을 알렸다.
서윤은 민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낙하랑 여는 힘 모두 확인했어. 월요일에 견적 다시 받기로 했고.」
곧 답이 왔다.
「다행이다. 밥은?」
「먹었어. 지금 출발해.」
「시험 자료는 월요일에 같이 보자. 오늘은 좀 쉬고.」
서윤은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었다.
창밖으로 공장 건물이 멀어졌다. 옆에서는 도현이 자료를 넘기는 소리가 났다.
서윤은 시험표의 빈칸을 채웠다. 손을 움직일 때마다 밴드 끝이 종이에 스쳤다. 펜을 놓고 느슨해진 부분을 눌렀다.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자료는 돌아가서 정리하셔도 됩니다.”
“잊기 전에 적을 것만 쓰겠습니다.”
“그럼 이건 제가 들겠습니다.”
도현이 좌석 사이에 걸쳐 둔 빈 파일을 받았다. 서윤이 쥐고 있던 모서리 바로 옆으로 손가락이 닿았다.
서윤은 손을 풀었다. 도현은 파일을 자기 자료 위에 놓았다. 팔꿈치 옆이 조금 넓어졌다.
“감사합니다.”
말을 마친 서윤은 시험표로 눈을 내렸다. 옆자리에서 들려오는 숨소리가 가까웠다.
「조금만 마저 쓰자.」
마지막 문장을 적었다.
낙하 뒤 체결 상태 유지. 젖은 손 개폐 가능.
펜 뚜껑을 닫자 도현이 말했다.
“오늘 시험 결과는 공통 검토 자료에 넣겠습니다.”
“견적이 나오면 비용 비교도 붙이겠습니다.”
“성능 확인과 수익성 검토는 구분해서 올려 주세요.”
“네.”
도현은 서윤의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까이서 본 옆얼굴에 서윤의 시선이 잠깐 머물렀다.
곧 눈을 내리고 파일을 돌려받으려 손을 내밀었다.
차가 굽은 길로 들어섰다.
도현의 무릎 위에서 자료철이 미끄러졌다. 도현이 한쪽을 눌렀지만, 끼워 둔 종이 몇 장이 좌석 사이로 흘렀다.
서윤은 가까운 종이를 잡았다.
맨 위에 미국 체류 자료라는 글씨가 있었다. 아래로는 경력과 주소가 적힌 서류 모서리가 보였다.
서윤은 내용 쪽을 보지 않고 종이 끝만 모았다.
“여기 있습니다.”
도현이 손을 뻗었다.
서윤은 모은 종이를 그쪽으로 기울였다. 도현의 손끝이 가까워졌다.
서류를 넘기려던 순간, 아래에 끼어 있던 종이의 제목이 드러났다.
서윤의 손이 멎었다.
「아버지 회사의 채무 정리」.
(10화 끝)
“월요일은 괜찮아.”서윤이 대답하자 민재가 가방 끈을 고쳐 잡았다.“저녁 먹으면서 얘기해도 되지?”“응. 어디로 갈까?”“너 자주 가는 데. 회사 뒤에 밥집.”“거긴 퇴근 시간에 사람 많잖아.”“안쪽 자리 있으면 앉고. 없으면 다른 데 가자.”평소 식사 약속을 잡을 때 하던 말이었다. 그런데 민재는 휴대전화를 꺼내지 않았다. 서윤을 한동안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월요일에 보자.”서윤도 고개를 끄덕였다.갈림길에서 민재가 먼저 손을 들었다. 서윤은 몇 걸음 가다가 돌아봤다. 민재는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눈이 마주치자 민재가 다시 손을 들었다.서윤은 이번에는 돌아보지 않았다. 가방 끈을 잡고 그대로 걸었다.◇3월 24일, 서윤은 출근하자마자 제조사 메일을 확인했다.재시험 일정은 아직이었다. 승인된 비용 안에서 진행할 항목을 정리했다는 답만 와 있었다.민재가 옆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았다.“답 왔어?”“일정은 오후에 준대.”“고객 자료는 오전에 다시 보낼게. 구매 이력 확인된 것만 먼저 묶었어.”“고마워.”민재는 자리에 앉았다. 서윤은 화면을 조금 당겼다. 두 사람 모두 금요일에 잡은 약속을 꺼내지 않았다.오전 회의가 끝나자 후배가 자료철을 안고 다가왔다.“대리님, 제가 지난주 조사 안내물을 추가 제작비에 넣었는데요.”서윤은 후배가 가리킨 항목을 봤다.&ld
“재시험을 빼면 수정한 조건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서윤은 승인 메일 옆에 빈 문서를 띄웠다.전화 너머로 종이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필수 시험과 추가 조사를 나눠서 보내 주시겠습니까?”“네. 비용이 이미 발생한 항목도 따로 적겠습니다.”“자료를 보내신다고 유지가 확정되는 건 아닙니다.”“알고 있습니다. 같은 항목이 두 번 삭감되지 않게 확인해 주세요.”통화가 끝났다.서윤은 첫 줄에 재시험이라고 적었다. 낙하와 개폐력, 높이가 다른 몸체에 같은 뚜껑을 끼우는 시험. 확인한 것과 남은 것을 나눴다.책상 한쪽에 조사실에서 가져온 샘플이 있었다.큰 몸체 안에서 작은 몸체 두 개를 꺼냈다. 높이는 달라도 입구는 같았다. 뚜껑을 바꿔 끼워도 손끝에 걸리는 감각은 달라지지 않았다.「필요한 것만 살 수 있으면.」기록지에 적힌 말을 다시 읽었다. 서윤은 큰 몸체를 상자에 넣었다.◇3월 21일 아침, 민재는 의자에 앉기도 전에 서윤의 책상을 봤다.“밤에 구성 바꿨어?”“아직 제안이야. 자주 쓰는 크기 두 개로 시작하려고.”서윤은 용기를 민재 쪽으로 밀었다.“규격은 같고 높이만 달라. 뚜껑도 서로 바꾸어 쓸 수 있어.”“단품보다 이쪽이 나아?”“각각 포장하면 처음 사는 가격은 내려가도 비용이 많이 붙어. 두 개를 묶는 안으로 견적 요청했어.”민재가 작은 몸체를 들었다.“구성이 줄어도 공용 뚜껑을 써 볼 수 있겠네.”“응. 나중에 필요한 높이를 더 살 수 있고.”“추가로 살 거라고 계산에 넣은 건 아니지?”서윤이 손익표를 돌렸다.“입문 구성만으로 계산했어. 추가 구매는 따로 검증해야 해.”민재는 고개를 끄덕이고 종이 봉투를 내려놓았다.“그럼 이것도 입문 구성.”작은 빵 두 개가 들어 있었다.서윤이 민재를 봤다.“커피만 마셨을 것 같아서.”“아직 물도 안 마셨어.”“더 심하네.”민재는 자기 자리에서 물병을 가져왔다. 서윤은 병을 받고 빵 하나를 꺼냈다.먹는 동안 제조사 회신이 왔다. 두 용기를 묶으면 재료비는 줄었다.
도현은 태블릿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빈 의자 뒤에 머물던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손끝이 의자에서 떨어지는 순간까지 서윤은 보고 있었다.“회사에 온 이유를 묻는 겁니까?”“둘을 다르게 대답할 거예요?”서윤은 책상 모서리에 손을 대지 않았다. 손을 뻗으면 다시 일 이야기로 돌아갈까 봐 망설였다. 손가락을 가볍게 접었다.도현이 입술을 열었다가 닫았다. 대답 전에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가까워서 들리는 소리였다.“다르게 대답해야 합니다.”“그럼 오늘은 됐어요.”서윤이 몸을 돌렸다. 도현은 붙잡지 않았다. 그런데도 등 뒤에 시선이 남아 있었다.서윤이 의자를 당기기 전에 도현이 다시 말했다.“대답을 피하려는 건 아닙니다.”아까보다 목소리가 낮았다.서윤은 돌아보지 않았다.“지금 못 하는 대답이면 준비해서 해요.”의자에 앉자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반품 비용표가 떠 있었다. 서윤은 글자를 읽으려 했다. 읽던 줄에서 눈이 멈췄다.도현의 손이 태블릿 위에 닿았다. 바로 집어 들지는 않았다. 화면 가장자리에 놓인 손끝이 가만히 있었다.“한 대리.”서윤은 화면을 본 채 기다렸다. 대답하면 목소리가 달라질까 봐 입을 다물었다.“업무가 끝난 뒤에 시간을 부탁해도 되겠습니까?”서윤은 그제야 도현을 봤다. 도현은 태블릿이 아니라 서윤을 보고 있었다.「업무가 끝난 뒤.」그 짧은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목요일에 패널 시험이 잡히면, 결과부터 정리해야 해요.”“그 뒤라도 괜찮습니다.”도현은 재촉하지 않았다. 서윤이 답할 때까지 손도 움직이지 않았다.서윤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그제야 도현이 태블릿을 가져갔다. 책상 위에서 손이 멀어졌다. 서윤은 시선을 화면으로 돌렸다.발소리가 사무실 밖으로 멀어지고 나서야 등받이에 등을 댔다. 짧게 참고 있던 숨이 나왔다.화면 아래로 빵 포장이 조금 나와 있었다.서윤은 남은 빵을 꺼냈다. 포장을 접는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무슨 대답을 하려고.」한 입을 먹고, 식어 버린 물을 마셨다. 목
서윤은 메일을 끝까지 읽고 4층 버튼을 눌렀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파일을 받친 손가락에 종이 모서리가 눌렸다.설문만으로는 안 된다는 말은 맞았다. 서윤도 그 말을 했었다.그런데도 화면에서 눈을 떼는 데 조금 걸렸다.사무실에 돌아오자 민재가 의자를 돌렸다.“어떻게 됐어?”“검토 일정은 그대로래.”“원가가 낮아져도?”“실제로 팔린 건 아니니까.”서윤은 파일을 내려놓고 메일을 전달했다. 민재가 화면을 아래로 내렸다.“그럼 지금 판매부터 하라는 거야?”“품질 확인이 남았어. 그 순서는 못 바꿔.”“우리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찾자.”민재가 빈 문서를 열었다.서윤도 의자에 앉았다. 손을 올렸지만 바로 글자를 치지는 못했다.메일에서 읽은 말이 아직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틀린 말은 아니야.」서윤은 문서 제목부터 적었다.고객 패널 시험안.◇3월 18일 아침, 서윤은 시험안 첫 장에서 구매 의향이라는 말을 지웠다.옆에 적었던 예상 주문도 지웠다.민재가 가방을 내려놓으며 화면을 봤다.“아예 안 물어보게?”“물어볼 거야. 그냥 사고 싶냐고만 묻지는 않고.”서윤은 빈 용기와 뚜껑을 책상 위에 놓았다. 종이 가격표도 옆에 세웠다.“제품을 써 보고, 가격을 보고, 자기 집에 가져갈 구성을 고르게 할 거야.”“안 고르는 것도 가능하게?”“응. 지금 쓰는 걸 계속 쓰겠다는 선택도 있어야 해.”민재는 뚜껑을 집었다가 내려놨다.“좋다고 해 놓고 가격 앞에서는 안 고를 수도 있겠네.”“그걸 봐야 해.”진행 순서는 간단히 정했다. 평소 쓰는 용기를 확인한 뒤 샘플과 가격을 보여 준다. 마지막에는 선택을 바꾸거나 모두 취소할 수 있게 했다.민재가 마지막 칸을 가리켰다.“여기서 결제는 안 받고?”“안 받아. 주문으로 기록하면 안 돼.”“그럼 매출 증거는 여전히 없네.”“맞아. 매출을 대신할 수는 없어.”서윤은 문서 맨 위에 적었다.비판매형 시험. 결제와 주문 접수는 진행하지 않음.선택한 구성과 구매를 포기한 이유는 따로
서윤은 종이 끝을 쥔 손에서 힘을 뺐다.도현의 손이 바로 앞에 있었다. 서류를 건네면 손끝이 닿을 만큼 가까웠다.“여기 있습니다.”서윤은 흩어진 서류를 포갰다. 제목이 보인 종이를 따로 빼지도, 다시 들여다보지도 않았다.종이를 내미는 동안 도현은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서윤이 끝을 놓은 뒤에야 받아 갔다.손끝은 닿지 않았다. 서윤은 빈손을 무릎 위로 내렸다.도현은 서류를 자료철 안에 넣었다.“감사합니다.”가까이서 들으니 목소리가 낮았다. 서윤은 대답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차가 곧은 길로 들어섰다. 서윤은 무릎 위의 시험표를 내려다봤다. 마지막 줄까지 적었는데도 펜을 다시 꺼냈다.아버지 회사.알고 있던 이름 옆에 처음 보는 말이 붙어 있었다. 서윤이 모르는 도현의 시간이 그 자료철 안에 있었다.펜을 쥔 손가락을 고쳐 잡았다. 옆을 보면 도현의 얼굴부터 살필 것 같았다.「묻지 말자.」“한 대리.”펜 끝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 서윤은 고개만 조금 돌렸다.“파일 드리겠습니다.”도현이 빈 파일을 내밀었다. 파일 끝을 받으려던 서윤의 손이 잠깐 머뭇거렸다. 도현의 손가락이 접힌 부분을 잡고 있었다.서윤은 반대쪽을 받았다. 시험표를 끼우고 가방 안에 넣었다.“네.”묻지는 않았다.도현도 자료철을 닫았다. 좌석 사이에 놓였던 서류가 사라졌다. 두 사람의 손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서윤은 무릎 위에 손을 모았다. 도현의 소매 끝이 시야에 들어왔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보이는 거리였다.숨을 천천히 내쉬었다.서윤은 창 쪽으로 몸을 조금 돌렸다.◇3월 17일 오전, 제조사에서 새 견적서가 도착했다.서윤은 외투를 의자에 걸치다 말고 앉았다. 첨부 파일은 수정 견적서와 포장 변경안이었다.옆자리 민재가 모니터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왔어?”“응. 포장 비용까지.”“드디어 빈칸 없어지겠네.”서윤은 견적서를 열었다.완성품은 2,000세트 생산 조건이었다. 기존 몸체 금형을 쓰고 뚜껑 체결부만 수정했다. 조립과 기본 포장은
서윤은 방문 손잡이를 잡고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직접 열어 봐야 한다고 했다. 사진도, 측정값도 없었다.복도 끝에서 도현이 휴대전화를 보고 있었다. 서윤은 문을 조금 더 열었다.“대표님.”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서윤을 보자 휴대전화를 쥔 손이 내려갔다.“제조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샘플은 나왔는데 내일 직접 열어 보라고 합니다.”“문제가 있다는 뜻입니까?”“아직은 모르겠습니다. 수치를 받아 보겠습니다.”도현의 시선이 서윤의 휴대전화에 닿았다. 가까이 오지는 않았다. 서윤은 화면을 내밀려던 손을 멈췄다.둘 사이에는 열린 문 하나만큼의 거리가 있었다.“확인되면 공유해 주세요.”낮은 목소리였다. 조용한 복도에서는 끝까지 또렷하게 들렸다.“네.”서윤은 객실로 들어왔다. 상자 위에 파일을 놓고, 외투도 벗지 않은 채 제조사 담당자에게 전화했다.“열 때 걸리는 겁니까?”“닫히는 건 괜찮습니다. 그런데 손으로 열기가 좀 뻑뻑합니다.”“측정은요?”“내일 오전에 하려고 합니다.”“지금 여러 번 열지는 말아 주세요. 처음 여는 샘플도 따로 남겨 두시고요.”통화를 마친 서윤은 시험표에 항목을 더했다. 낙하 뒤 닫힘 상태와 처음 여는 힘, 반복 사용 뒤 변화를 적었다. 도현에게도 내용을 보냈다.답은 곧 왔다.「내일 아침 식사 후 출발하겠습니다. 접수대 앞에서 뵙겠습니다.」서윤은 가방에서 충전기를 꺼냈다. 짧게 답하고 휴대전화를 뒤집었다.객실 벽 너머로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펜을 들던 손이 멈췄다. 복도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아직 귀에 남아 있었다.「내일 또 보겠네.」당연한 일을 새삼 생각했다.서윤은 펜을 내려놓았다. 밴드 끝이 조금 들떠 있었다. 손끝으로 눌러 붙인 뒤 시험표를 다시 펼쳤다.◇3월 15일 아침, 시험실 작업대에 수정 샘플이 놓여 있었다.담당자가 뚜껑 가장자리를 짚었다.“걸리는 깊이를 늘렸습니다. 경사도 바꿨고요.”“어제 실패한 샘플과 표시를 다르게 해 주세요.”서윤은 샘플 번호를 확인했다. 도현은 작업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