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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선택된 게 아니라, 당신이 나를 지켜본 겁니다

Author: 유월
last update Petsa ng paglalathala: 2026-09-23 23:45:56

루시앙 바렐이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Clone A와 같은 세션 안에서 발견됐지만, 유리는 그날 밤 그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L.VAREL은 분명 루시앙이 과거 Vela에서 사용했던 은퇴 임원용 아카이브 계정이었고, BORDERLINE_MASTER_1.0이 Vela에 도착하기 27분 전 그 계정이 활성화된 것도 사실이었다. 더구나 접속에 사용된 인증서가 Custodian Master Certificate의 Clone A였다. 하지만 계정 이름과 인증서가 한 화면에 있다고 해서 키보드 앞에 앉아 있던 사람이 루시앙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지난 몇 주 동안 너무 많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계정과 오래된 직책, 폐기된 인증서를 뒤집어쓰고 나타났다.

“연락은 증거 묶고 나서 해요. L.VAREL 계정의 원래 인증 방식, 마지막 정상 사용, 복구 요청, 접속 기기까지 전부 확인하고요.”

유리의 지시에 보안팀이 밤새 Vela 측과 자료를 맞췄고, 다음 날 오전 아홉 시가 조금 지나 첫 결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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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향사님, 선을 넘으셨습니다   파리의 첫 번째 아침

    다음 날 아침, 유리는 일곱 시에 눈을 떴다. 시차 때문에 중간에 몇 번 깼지만 예상했던 것보다는 잘 잤다. 창문 밖에는 흐린 하늘이 펼쳐져 있었고, 골목에서는 빵을 배달하는 차량이 지나가고 있었다. 유리는 커피를 내리고 간단하게 아침을 먹었다. 어제 사 온 빵은 조금 단단해졌지만 따뜻한 커피와 함께 먹으니 나쁘지 않았다.옷장 앞에서는 잠시 고민했다.첫 출근이니 단정한 정장을 입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파리 조향팀은 비교적 자유로운 복장이라고 들었다. 유리는 결국 아이보리색 블라우스와 짙은 회색 슬랙스를 골랐다. 머리는 느슨하게 묶고, 작은 귀걸이만 했다.향수는 뿌리지 않았다.BORDERLINE 002는 화장대 위에 그대로 두었다.대신 빈 시향지 케이스를 가방에 넣었다.거울 앞에 선 유리는 자기 모습을 한동안 바라봤다. 특별히 달라진 건 없었다. 서울에서 출근할 때와 비슷한 옷차림이었고, 얼굴도 그대로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낯설었다.이곳에서는 아무도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자세히 알지 못한다.BORDERLINE을 만든 조향사라는 사실은 알겠지만, 그녀가 어떤 실수를 했고 어떤 선택을 했는지까지는 모를 것이다. 누군가는 그녀를 능력 있는 외부 인재라고 생각할 테고, 누군가는 서울에서 성공한 프로젝트 하나를 들고 온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유리는 그 모든 시선이 조금 부담스러웠다.하지만 동시에.기대됐다.새로운 곳에서는.새로운 자신을 보여줄 기회도 있으니까.“잘 다녀오자.”유리는 거울 속 자신에게 말했다.그리고 가방을 들었다.메종 르비에 파리 조향실은 오래된 석조 건물의 안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외관은 차분했지만 내부는 현대적으로 정비돼 있었다. 유리는 안내 데스크에서 임시 출입증을 받은 뒤 담당자의 안내를 받아 연구동으로 이동했다. 복도에는 오래된 향료 병과 브랜드의 역사를 보여주는 자료들이 전시돼 있었고, 유리에게 익숙한 로고가 여러 곳에 새겨져 있었다.그런데 연구실 문이 열리는 순간, 익숙함보다 낯섦이 먼저 밀려왔다.서

  • 조향사님, 선을 넘으셨습니다   파리의 첫 번째 아침

    조향사에게 자신을 소개할 향을 고르라는 말은 어떤 사람에게 가장 좋아하는 책 한 권을 고르라고 하는 것과 비슷했다. 좋아하는 향은 많았다. 오래 사용한 원료도 있었고, 자신이 직접 만든 포뮬러도 있었다. BORDERLINE을 가져가면 가장 명확한 답이 될 수 있었다. 지금의 유리를 설명하는 데 그보다 적절한 작품도 없을 것이다.하지만 이상하게 바로 손이 가지 않았다.유리는 캐리어에서 BORDERLINE 002를 꺼냈다. 세아가 파리 첫 출근 때 뿌리라며 건네준 병이었다. 유리는 병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한동안 바라봤다. 투명한 유리 안에 담긴 향은 서울에서의 시간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첫 시향과 수정 과정, 재헌과의 수많은 대화, 세아가 맡아 완성한 생산 기준까지.그 향을 가져가면 사람들은 한유리를 BORDERLINE을 만든 조향사로 기억할 것이다.틀린 소개는 아니었다.하지만.그게 전부는 아니었다.유리는 병을 다시 내려놓았다.그리고 노트북 옆에 놓인 빈 시향지 케이스를 바라봤다.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휴대전화를 들었다.한국은 새벽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재헌에게 연락하기로 했지만, 지금 전화하면 잠을 깨울지도 몰랐다. 유리는 메시지를 보내려다가 멈췄다. 그러다 먼저 짧게 적었다.유리: 혹시 아직 안 자요?답장은 예상보다 빨리 왔다.재헌: 안 잡니다.유리는 눈을 크게 떴다.유리: 왜요?재헌: 유리 씨 연락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유리는 그 문장을 보고 웃었다. 그리고 곧바로 영상통화를 걸었다.화면이 켜지자 재헌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는 집 서재에 앉아 있었다. 넥타이는 풀었지만 아직 셔츠 차림이었고, 책상 위에는 몇 장의 서류가 펼쳐져 있었다.“안 자고 뭐 해요?”유리가 물었다.“일 조금 정리하고 있었습니다.”“또 일해요?”“이제 끝났습니다.”“거짓말.”재헌이 웃었다.“정말입니다.”유리는 화면 속 그의 얼굴을 한동안 바라봤다. 불과 하루 전까지는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화면 너머에 있었

  • 조향사님, 선을 넘으셨습니다   파리의 첫 번째 아침

    파리에 도착한 첫날, 한유리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덜 낭만적인 모습으로 새로운 도시와 마주했다.비행기에서 제대로 잠들지 못한 탓에 눈은 뻑뻑했고, 장시간 앉아 있었던 다리는 묵직했다. 입국심사를 마치고 수하물 두 개를 찾아 공항 밖으로 나왔을 때는 커피보다 따뜻한 물 한 잔이 더 간절했다. 공항 픽업 담당자는 유리의 이름이 적힌 태블릿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고, 그녀는 서툴지 않은 프랑스어로 인사를 건넨 뒤 차량에 올랐다.차창 밖으로 파리의 풍경이 흘러갔다. 낮은 건물과 오래된 석조 외벽, 좁은 발코니와 가로수들이 이어졌다. 관광객이었을 때는 그 모든 것이 특별해 보였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앞으로 이곳에서 출근하고 장을 보고 세탁소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자 아름다운 풍경 사이로 생활에 필요한 것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어느 골목에 슈퍼마켓이 있는지, 지하철역은 얼마나 가까운지, 밤늦게 돌아와도 길을 찾기 어렵지 않을지 같은 것들.유리는 창밖을 보다가 휴대전화를 켰다. 한국은 이미 늦은 밤이었다. 재헌에게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보내려던 순간, 화면에 먼저 알림이 떠 있었다.재헌: 비행기 도착한 것 확인했습니다. 입국심사 끝나면 연락하십시오.유리는 웃었다. 도착 예정 시간을 확인하고 있었을 모습이 쉽게 상상됐다. 자신에게 빨리 답장하라고 재촉하지 않으면서도 비행기 도착 여부만큼은 확인했을 것이다.유리: 입국심사 끝났어요. 지금 숙소 가는 중.메시지를 보내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려는데 곧바로 답장이 왔다.재헌: 무사히 도착해서 다행입니다. 많이 피곤합니까?유리: 엄청요. 지금 얼굴 보면 놀랄걸요.재헌: 보고 판단하겠습니다.유리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유리: 영상통화는 안 돼요.재헌: 아직 요청하지 않았습니다.유리: 요청할 것 같아서 미리 말했어요.잠시 뒤 답장이 왔다.재헌: 그럼 숙소 도착하면 물부터 마시고 쉬십시오. 내일 연락해도 됩니다.유리는 그 문장을 한동안 바라봤다. 보고 싶다는 말이 먼저 나올 줄 알았는데 재헌

  • 조향사님, 선을 넘으셨습니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유리는 알람이 울리기 삼십 분 전에 눈을 떴다.처음에는 자신이 왜 이렇게 일찍 깨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희미한 새벽빛도 평소와 같았고, 침대 옆에서 느껴지는 체온도 익숙했다. 재헌은 아직 잠들어 있었다. 한쪽 팔은 유리의 허리 아래에 놓여 있었고, 다른 손은 베개 옆에 느슨하게 펼쳐져 있었다. 유리는 잠시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침대 맞은편에 세워둔 캐리어를 발견했다.아.오늘이구나.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가슴이 조금 내려앉았다. 어제까지는 출국을 앞두고 있다는 생각을 했지만, 오늘은 정말 비행기를 타야 했다. 몇 시간 뒤면 이 방을 나서고, 공항으로 향하고, 여권과 탑승권을 내밀어야 한다. 그렇게 익숙한 풍경들을 하나씩 지나면 어느 순간 서울은 비행기 창밖으로 멀어질 것이다.유리는 조심스럽게 몸을 돌렸다. 재헌을 깨우지 않으려던 것이었는데 허리에 놓인 팔에 힘이 들어왔다.“어디 갑니까.”잠이 덜 깬 목소리였다.유리는 고개를 돌렸다. 재헌은 눈도 제대로 뜨지 않은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 회사에서 보던 단정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앞머리는 조금 흐트러져 있었고, 목소리는 낮게 잠겨 있었다. 유리는 그 얼굴을 보자 괜히 웃음이 났다.“화장실.”“몇 시입니까?”“여섯 시 조금 넘었어요.”“아직 시간 있습니다.”“알아요.”재헌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팔을 풀었다. 유리는 침대에서 내려오려다가 다시 멈췄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재헌의 품으로 들어갔다.“왜요?”그가 물었다.“그냥.”유리는 그의 가슴에 이마를 기댔다.“조금만 더.”재헌은 대답 대신 이불을 끌어올려 그녀의 어깨를 덮어주었다. 유리는 그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어젯밤에는 오늘 아침이 오면 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아침이 되니 눈물보다 이상한 평온함이 먼저 찾아왔다. 어쩌면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아서일 수도 있었다.“재헌 씨.”“네.”“나 오늘 진짜 가요.”“알고 있습니다.”“당신은 안 가고.”“네.”유리는

  • 조향사님, 선을 넘으셨습니다   떠나는 날에도 좋아할 겁니다

    출국까지 여덟 날이 남은 아침, 유리는 파리에서 온 메일을 읽다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유럽 테스트 론칭을 위한 광고 문구의 사전 소비자 반응 조사 결과였다. 세아가 제안했던 **Closer is a choice.**는 가장 높은 즉각 구매 의향을 기록한 문구는 아니었다. 오히려 ‘거부할 수 없이 가까워지는 향’이라는 표현을 조금 순화한 다른 후보가 첫인상 평가에서는 더 높은 점수를 받았다. 하지만 제품 설명을 읽은 뒤의 이해도와 향을 직접 맡은 뒤의 만족도에서는 결과가 달랐다. 세아의 문구를 본 소비자들이 향의 전개를 더 정확하게 이해했고, 자신이 예상했던 향과 실제 향 사이의 차이도 적게 느꼈다.유리는 자료를 끝까지 읽은 뒤 세아에게 전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맞은편 자리에서 키보드 소리가 빨라졌다. 세아는 결과표를 확대하고, 국가별 응답 차이를 확인하고, 정성 평가 문장들을 따로 추출했다. 유리는 그런 세아를 힐끗 바라보다가 다시 자기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렸다. 예전 같으면 같은 자료를 나란히 펼쳐놓고 누가 먼저 문제를 찾아내는지 경쟁하듯 이야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유리는 자신에게 필요한 부분만 확인했다. 마지막까지 모든 자료를 함께 검토하는 것이 좋은 인수인계라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십오 분쯤 지났을 때 세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선배, 잠깐 봐주세요.”유리는 의자를 돌렸다. 세아는 태블릿을 들고 와 결과표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프랑스와 독일의 응답에서는 ‘선택’이라는 단어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이탈리아 테스트 그룹에서는 문장이 지나치게 이성적이고 향수 광고답지 않다는 평가가 일부 있었다. 세아는 그 차이를 설명한 뒤, 국가마다 완전히 다른 문구를 쓰는 대신 메인 카피는 유지하고 보조 설명만 현지화하는 방안을 제안했다.“그렇게 하면 콘셉트는 지키면서도 표현의 온도는 조절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다만 이탈리아 쪽은 재테스트를 한번 더 해야 할 것 같고요.”“비용은?”“브랜드팀이랑 확인했어요. 기존 예산 안에서 가능

  • 조향사님, 선을 넘으셨습니다   마지막 결정은 당신이 하세요

    출국까지 열흘이 남은 월요일 아침, 유리는 연구실에 들어서자마자 자기 책상 위에 놓인 서류 봉투를 발견했다. 파리로 가져갈 자료는 이미 대부분 정리했고, 새로 시작하는 프로젝트도 없었으니 누군가 잘못 가져다 놓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봉투 앞면에는 분명히 한유리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발신인은 메종 르비에 파리 글로벌 브랜드팀이었다.유리는 가방을 내려놓고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BORDERLINE의 유럽 테스트 론칭을 위한 최종 캠페인 자료가 들어 있었다. 패키지 디자인과 제품 사진, 매장 진열 가이드는 서울에서 승인한 것과 거의 같았다. 문제는 마지막 페이지에 있었다. 유럽 소비자를 대상으로 새롭게 작성한 광고 문구가 검토 요청 표시와 함께 첨부돼 있었다.You can’t help coming closer.거부할 수 없이 가까워지는 향.유리는 문장을 두 번 읽었다. 처음에는 번역 과정에서 의미가 조금 달라졌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설명을 읽자 그런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글로벌 브랜드팀은 BORDERLINE의 차가운 첫 향과 피부에 가까워질수록 부드러워지는 잔향을 ‘본능적으로 상대에게 끌리게 되는 경험’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매력적인 문구인 건 맞았다. 짧고 기억하기 쉬웠으며, 소비자에게 즉각적인 기대를 줄 수 있었다. 다만 그 기대가 유리가 만든 향의 의도와 정반대라는 게 문제였다.“선배, 뭐 봐요?”커피를 들고 들어온 세아가 물었다. 유리는 말없이 마지막 페이지를 내밀었다. 세아는 처음에는 별생각 없이 읽다가, 세 번째 줄에서 눈썹을 찌푸렸다.“이거 이상한데요.”“어디가?”“가까워질 수밖에 없다는 말이잖아요. 우리 향은 그런 거 아닌데.”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세아가 끝까지 읽도록 기다렸다. 세아는 자료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원래 한국 캠페인의 문구가 적힌 모니터를 바라봤다.가까워질지는, 당신이 정합니다.두 문장은 얼핏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둘 다 거리와 가까워짐을 말하고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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