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os los capítulos de 조향사님, 선을 넘으셨습니다: Capítulo 1 - Capítulo 10

12 Capítulos

프롤로그. 원래 이렇게 가까이 갑니까?

처음 만난 남자의 넥타이를 잡아당기는 데는 정확히 삼십 분이면 충분했다.물론 한유리에게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잠깐만요.”회의실을 빠져나가려던 남자의 걸음이 멈췄다.유리는 테이블 위에 흩어진 시향지 가운데 하나를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전까지 한 시간 가까이 이어졌던 회의 탓에 테이블 위에는 노트북과 태블릿, 반쯤 식은 커피, 수십 장의 시향지가 뒤섞여 있었다. 베르가못과 네롤리, 시더우드와 베티버. 여러 향이 공기 중에서 복잡하게 엉킨 탓에 평소라면 벌써 창문부터 열었을 공간이었다.하지만 지금 유리의 관심은 그 어느 향료에도 없었다.문 앞에 선 남자에게 있었다.오늘 처음 만난 메종 르비에의 신임 총괄이사.권재헌.검은 슈트에 흐트러짐 없이 채운 셔츠, 지나치게 반듯해서 오히려 냉정해 보이는 넥타이까지. 오전 아홉 시부터 지금까지 두 시간 넘게 회의를 했는데도 처음 들어왔을 때와 달라진 게 거의 없었다.딱 하나.향이 달라졌다.유리는 가늘게 눈을 좁혔다.“권재헌 이사님.”“말씀하시죠.”“혹시 향수 쓰세요?”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재헌은 곧바로 대답했다.“안 씁니다.”“정말요?”“향수를 담당하는 회사의 총괄이사가 향수를 안 쓰는 게 문제가 됩니까?”“아뇨. 오히려 좋아서요.”재헌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유리는 그 표정을 보지 못했다. 이미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이다.분명 회의 초반에는 없었다.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아주 희미한 향이 느껴졌다. 향수처럼 완성된 향은 아니었다. 우디 계열이라고 단정하기에도 애매했다. 종이 냄새와 커피, 셔츠에 밴 세제 향 사이로 아주 옅게 남아 있는 체향.이상한 건 그다음이었다.그 향이 꽤 좋았다.“손 좀 주실래요?”재헌이 아무 말 없이 유리를 바라봤다.“손이요.”유리가 제 손을 내밀어 보였다.“손목이면 더 좋고요.”“…….”“왜요?”“한유리 조향사님.”“네.”“첫 회의가 끝난 지 삼 분도 안 됐습니다.”“알아요.”“그런데 제 손목을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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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님을 향의 모델로 쓰겠습니다

다음 날 오전 아홉 시 십 분.권재헌은 자신이 잘못된 장소에 들어왔다고 생각했다.문 옆에는 분명히 ‘수석 조향사 한유리’라는 명패가 붙어 있었다. 일정표에도 오전 아홉 시부터 20주년 프로젝트 콘셉트 미팅이라고 적혀 있었고, 비서가 알려 준 장소 역시 이곳이었다.그러니 방을 잘못 찾은 건 아니었다.문제는 방 안이었다.재헌이 생각했던 회의실과는 거리가 멀었다.벽 한쪽을 가득 채운 선반에는 크기가 제각각인 갈색 유리병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고, 각각의 병에는 손으로 적은 라벨이 붙어 있었다. 베르가못, 네롤리, 아이리스, 샌들우드, 앰버, 통카빈. 창가 쪽에는 작은 화분 몇 개와 말린 꽃이 놓여 있었으며 중앙의 기다란 작업대에는 비커와 스포이트, 시향지와 메모지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그 한가운데에 한유리가 앉아 있었다.어제와 달리 머리를 느슨하게 하나로 묶고 흰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모습이었다. 코끝 가까이 가져간 시향지에 집중한 나머지 문이 열린 것도 모르는 듯했다.재헌은 문 앞에서 잠시 기다렸다.유리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시향지를 한 번 맡고, 메모를 남기고, 다시 다른 병을 열었다. 몇 방울을 떨어뜨리고 유리막대로 섞은 뒤 또다시 향을 확인했다.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제 회의실에서 자신의 넥타이를 잡아당기던 여자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그때는 지나치게 거리낌이 없었고, 지금은 주변에 누가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집중하고 있었다.재헌이 결국 입을 열었다.“한유리 조향사님.”반응이 없었다.“한유리 조향사님.”“……조금만요.”듣고 있었던 모양이었다.그런데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재헌의 눈썹이 올라갔다.“회의 시간이 지났습니다.”“알아요.”“알고 있는데 계속 이러고 있는 겁니까?”“네.”유리가 짧게 대답하더니 새로운 시향지를 꺼냈다.재헌은 손목시계를 내려다봤다.오전 아홉 시 십이 분.이 회사에서 자신에게 회의 시간보다 기다리는 시간을 먼저 제공한 직원은 한유리가 처음이었다.“얼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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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향, 저한테만 나는 것 같은데요

권재헌의 향 모델 테스트는 예상보다 훨씬 까다로운 조건으로 시작됐다.정확히 말하면 향 때문이 아니었다.사람이 까다로웠다.“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월요일 오전 여덟 시 사십 분.평소보다 이십 분 일찍 출근한 유리는 자신의 조향실 한가운데 서 있는 권재헌을 바라보며 팔짱을 꼈다.재헌은 출근하자마자 이곳으로 왔음에도 이미 완벽한 차림이었다. 짙은 차콜색 슈트, 흰 셔츠, 검은 넥타이. 머리카락도 흐트러진 곳 하나 없었다.문제는 그가 들고 온 종이였다.A4 용지 한 장.상단에는 반듯한 글씨로 적혀 있었다.〈BORDERLINE 체향 모델 테스트 관련 준수 사항〉.유리는 그것을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첫째, 신체 접촉이 필요한 경우 사전에 접촉 부위와 목적을 고지한다.”“네.”“둘째, 업무상 불필요한 접촉은 하지 않는다.”“당연하죠.”“셋째, 테스트는 사전에 협의한 시간 내에 진행한다.”“이것도 이해했고.”유리가 종이를 조금 내렸다.“넷째.”재헌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유리가 읽었다.“넥타이는 잡아당기지 않는다.”잠깐의 침묵.유리는 결국 참지 못하고 웃었다.“이걸 진짜 넣었어요?”“필요한 사항이니까.”“제가 또 잡아당길까 봐?”“한 번 한 사람이 두 번 못 한다는 보장이 있습니까?”“안 한다고 했잖아요.”“구두 약속보다 문서가 확실합니다.”“이사님.”“왜요.”“혹시 계약서 쓰는 게 취미예요?”“분쟁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됩니다.”“향 맡는 데도?”“특히 한유리 조향사님을 상대할 때는.”유리는 종이 너머로 그를 빤히 바라봤다.“저 그렇게 신뢰가 없어요?”“신뢰의 문제가 아닙니다.”“그럼요?”재헌의 시선이 아주 잠깐 그녀의 손으로 향했다.“거리 감각의 문제죠.”유리는 입을 다물었다.틀린 말은 아니었다.“알았어요.”결국 종이를 작업대 위에 내려놓았다.“지킬게요.”“좋습니다.”“대신 이사님도 제가 하라는 건 따라주세요.”“합리적인 범위 안에서.”“벌써 조건 붙이네.”“무조건 따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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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제가 확인하겠습니다

“잡아도 됩니까?”유리는 순간 대답하지 못했다.이상한 일이었다.정말 아무것도 아닌 질문이었다. 자신은 사람의 손목을 하루에도 몇 번씩 잡았다. 조향실에서는 향료병이나 시향지를 건네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행동이었고, 상대가 허락하기만 하면 피부 발향을 확인하기 위해 손등이나 손목 안쪽을 만지는 것도 특별할 게 없었다.그런데 지금은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왜냐하면 잡는 사람이 권재헌이었으니까.정확히는, 그가 너무 멀쩡한 얼굴로 자신에게 허락을 구하고 있었으니까.재헌은 손을 내민 채 기다렸다.재촉하지도 않았다.유리는 괜히 자신의 오른쪽 손목을 내려다봤다. 어제 그가 잡았던 자리였다. 이미 아무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은데 이상하게 그 순간의 감각만 선명했다.“왜 제 손목을 잡고 싶은데요?”결국 먼저 나온 질문은 허락도 거절도 아니었다.재헌의 눈썹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아까 본인이 말하지 않았습니까.”“뭘요?”“제가 한유리 조향사님에게 반응하는 건지 확인하고 싶다고.”유리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었다.“그 표현 좀 잊으면 안 돼요?”“본인이 한 말입니다.”“향 얘기였어요.”“압니다.”“알면서 자꾸 그렇게 말하잖아요.”“제가 어떻게 말했는데요.”“그냥.”유리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설명하려니 더 이상해질 것 같았다.재헌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그걸 본 유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또 웃었죠?”“아닙니다.”“웃었어요.”“그럼 업무 중에 웃으면 안 됩니까?”“어제는 업무 중이라 안 웃는다고 했잖아요.”재헌이 잠깐 멈췄다.유리의 눈이 반짝였다.잡았다.“말 바꿨네요.”“한유리 조향사님.”“네.”“손목 얘기로 돌아가죠.”“불리하면 자꾸 업무로 돌아가시네.”“허락합니까?”이번에는 재헌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유리는 괜히 숨을 한번 들이마셨다.“……네.”“확실합니까?”“네.”“그럼 잡겠습니다.”재헌의 손이 움직였다.유리는 처음부터 그 손을 보고 있었다.그래서 언제 닿을지 알고 있었다.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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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은 감정을 숨기지 못한다

차선우의 세 번째 시향이 끝났을 때, 한유리는 자신이 평소보다 훨씬 많은 것을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손목을 어느 각도로 잡는지.얼마나 가까이 얼굴을 가져가는지.향을 맡기 위해 몇 초나 머무르는지.원래는 생각조차 하지 않던 것들이 하나하나 의식됐다.그리고 그 이유는 아주 분명했다.권재헌이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유리는 선우의 손목을 놓으며 마지막 기록을 남겼다.“3번이 제일 낫네.”선우가 손목을 내려다봤다.“어떤데?”“첫 향은 시트러스가 너무 가볍고, 2번은 우디가 피부에서 너무 마르게 올라와. 3번이 제일 자연스러워.”“그럼 합격?”“향 테스트만 보면.”“다른 건?”“이미지, 카메라 테스트, 소비자 반응까지 봐야지.”“까다롭네.”“20주년이잖아.”유리는 시향지를 정리했다.그때 선우가 느긋하게 몸을 뒤로 기대며 물었다.“근데.”“왜.”“저 사람 너 좋아하냐?”유리의 손이 멈췄다.“누구?”선우가 굳이 이름을 말하지 않고 시선만 옆으로 보냈다.유리는 따라 보지 않았다.“헛소리하지 마.”“왜, 너무 티 나는데.”“뭐가.”“보는 눈.”유리는 시향지 몇 장을 괜히 다시 맞춰 정리했다.“이사님 원래 저런 얼굴이야.”“무슨 얼굴.”“그냥.”“내가 보기엔.”선우가 웃었다.“내 손목 잘라버리고 싶은 얼굴인데.”유리가 결국 선우를 쳐다봤다.“과장 좀 하지 마.”“진짠데.”“네가 괜히 신경 쓰는 거야.”“왜 내가 신경을 써.”선우는 아주 태연했다.“난 너랑 끝난 지 삼 년 됐고,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은데.”그 말을 듣는 순간 유리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선우도 알아차렸다.“봐.”“뭘.”“넌 내가 아직 미련 있는 것처럼 보일까 봐 걱정하잖아.”“그런 게 아니라.”“그럼?”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선우가 웃음을 거뒀다.“유리야.”“왜.”“저 사람한테 마음 생겼어?”이번에는 장난기가 없었다.유리는 바로 아니라고 말하려 했다.그런데 입이 생각보다 늦게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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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면 먼저 피하는 사람

엘리베이터 문이 닫힌 뒤에도 한유리는 한동안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정확히는 움직일 수 없었다.오른쪽 손목이 지나치게 선명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권재헌이 잡았던 자리.맥박 위를 눌렀던 엄지.그리고 마지막으로 물었던 말.무슨 감정인지.유리는 손목을 다른 손으로 감싸 쥐었다.“……미쳤나.”누가 보면 뭔가 대단한 일이라도 있었던 줄 알겠다.키스를 한 것도 아니고.껴안은 것도 아니고.고작 손목 한 번 잡혔다.자신은 그보다 더 가까운 거리에서 수도 없이 향을 맡았다. 재헌의 넥타이도 당겼고, 목 가까이 얼굴을 가져간 적도 있었다. 그때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그런데 지금은.그가 자신에게 한 걸음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숨이 조금 늦어졌다.유리는 괜히 복도 끝 창문으로 걸어갔다.찬 유리창에 손바닥을 댔다.조금 식혀야 할 것 같았다.자신이 먼저 시작했다.그건 인정해야 했다.손목을 잡은 것도 자신.목 가까이 간 것도 자신.향을 핑계로 거리를 무너뜨린 것도 자신.그런데 재헌이 똑같은 행동을 돌려주기 시작하자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유리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불공평하잖아.”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른 채 중얼거렸다.자신에게인지.권재헌에게인지.아니면 사람 마음이라는 것 자체에게인지.휴대전화가 울렸다.세아였다.— 선배 어디예요? 전략팀에서 광고 계약 확정됐대요.유리는 화면을 내려다봤다.차선우.결국 그가 최종 모델이 됐다.— 지금 내려가.답장을 보내고도 한참 동안 화면을 보고 있었다.이상했다.평소였다면 계약 확정 소식을 먼저 반겼을 것이다. 향과 이미지가 잘 맞았고, 글로벌 인지도까지 고려하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그런데 지금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다른 사람이었다.권재헌.그가 이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일지.자꾸 그 생각부터 들었다.유리는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었다.“진짜 정신 차리자.”이번에는 조금 크게 말했다.그리고 몸을 돌렸다.⸻차선우의 광고 계약은 그날 오후 공식적으로 확정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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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한다는 걸 인정하고 나면

좋아한다.그 단어 하나를 인정하는 데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아니.정확히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한유리는 집에 돌아온 뒤에도 몇 시간째 소파에 앉아 같은 생각을 반복하고 있었다.권재헌.좋아한다.권재헌을.좋아한다.말로 붙여놓고 보니 더 이상하게 느껴졌다.“아니.”유리는 쿠션을 끌어안았다.“아직 좋아하는 건 아닐 수도 있지.”호감.흥미.신경 쓰임.그 정도일 수도 있었다.자꾸 생각난다고 해서 좋아하는 건 아니고.가까이 오면 심장이 뛴다고 해서 꼭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질투하는 것처럼 보이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해서 반드시—유리는 생각을 멈췄다.쿠션에 얼굴을 묻었다.“아, 진짜.”이쯤 되면 변명도 성의가 없었다.자신이 조향사라는 게 이런 순간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평소라면 아주 작은 향의 차이도 구분할 수 있었다.베르가못과 비터 오렌지의 차이.건조한 시더우드와 크리미한 샌들우드의 차이.같은 머스크라도 피부 위에서 어떻게 다른 온도로 올라오는지.그런데 자기 마음 하나는 왜 이렇게 구분이 안 되는지 모르겠다.아니.사실은 구분이 됐다.그래서 더 문제였다.유리는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테이블 위에는 오늘 가져온 〈BORDERLINE〉 샘플이 놓여 있었다.작은 유리병.아직 완성되지 않은 향.유리는 손목에 한 방울 떨어뜨렸다.처음은 차가웠다.시트러스와 그린 노트.선명하고 가벼운 시작.그러다 몇 분 뒤 아이리스가 올라왔다.조금 부드러워지고.조금 가까워지고.마지막에는 우디 머스크.체온 가까이 붙는 향.유리는 자신의 손목을 맡다가 눈을 감았다.그리고 떠올랐다.권재헌.처음에는 차갑고.선을 분명히 긋고.가까이 오지 말라고 말하던 사람.그런데 자신이 자꾸 그 선을 건드렸고.어느 순간부터는.그가 한 걸음씩 다가오기 시작했다.유리는 눈을 떴다.“……이거.”향이 문제였다.아니.더 정확히는 자신이 만든 향이 지나치게 솔직해지고 있었다.요즘 조정한 〈BORDERLINE〉은 유리 자신도 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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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말라는 말은 못 하면서

권재헌은 파리 본사에서 온 메일을 세 번 읽었다.내용은 길지 않았다.메종 르비에 창립 20주년 프로젝트 〈BORDERLINE〉의 개발 과정에서 보여준 한유리의 조향 방향성과 감각을 높이 평가한다는 말.그리고 파리 본사 연구소에서 진행 중인 차기 글로벌 라인의 수석 조향사 후보로 그녀를 검토하고 싶다는 내용.아직 공식 제안은 아니었다.사전 인터뷰.역량 확인.향후 이동 가능성에 대한 의사 파악.그 정도였다.그런데 마지막 문장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장기적으로 파리 상주 가능 여부 확인 예정.재헌은 화면을 가만히 바라봤다.파리.상주.한유리.단어 세 개가 묘하게 거슬렸다.정확히는 마지막 두 개가 함께 붙어 있는 게.비서는 그의 표정을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아직 확정된 건 아닙니다.”“압니다.”“본사에서도 우선 인터뷰부터 진행하려는 것 같습니다.”“언제.”“다음 주 화요일 화상 미팅 가능 여부를 물어왔습니다.”재헌은 화면을 끄지 않았다.“한유리 조향사님한테도 갔습니까?”“네. 개인 메일과 회사 메일 둘 다 전달된 걸로 확인됐습니다.”“답변은.”“아직 공식 회신은 없습니다.”재헌의 시선이 멈췄다.아직.그 말에 이상하게 안도했다.하지만 바로 불쾌해졌다.자신이 왜 안도하는지 너무 잘 알아서.“본사에서 이 정도까지 보는 줄은 몰랐군요.”비서가 말했다.“이번 프로젝트 반응이 꽤 좋습니다. 특히 초기 샘플 리뷰에서 방향성이 좋다고—”“알고 있습니다.”재헌은 말을 끊었다.한유리가 잘하는 건 알고 있었다.누구보다.회의실에서 수치로만 향을 보는 사람들과 싸울 때도.샘플 17을 버리자고 했을 때도.사람이 좋아한다고 말하는 향과 실제로 돈을 내고 다시 사는 향은 다르다고 했을 때도.처음에는 고집스럽다고 생각했다.지금은 안다.그녀는 고집을 부리는 게 아니라 자기 향을 지키는 사람이었다.그래서.파리에서도 탐낼 것이다.당연했다.재헌은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조건이 좋겠죠.”비서는 질문처럼 들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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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허락부터 받겠습니다

다음에는 누가 방해해도 안 멈출 겁니다.한유리는 그 말을 정확히 스물세 번쯤 떠올린 뒤 세는 걸 포기했다.아침에 눈을 떴을 때 한 번.세수하다가 한 번.화장대 앞에서 립밤을 바르다가 두 번.회사로 가는 택시 안에서는 신호에 걸릴 때마다 생각났다.그리고 지금.조향실 문손잡이를 잡은 채 또 한 번.“미쳤다.”유리는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문을 열어야 했다.평소처럼 안으로 들어가 어제 조정해 둔 샘플을 확인하고, 오전 열 시 회의 전에 최종 시향 후보를 세 개로 줄이면 됐다. 권재헌이 오면 프로젝트 이야기를 하고, 향을 맡기고, 필요한 의견을 받는다.그게 전부였다.그런데 문제는.오늘 그 남자의 얼굴을 보면 어제 일이 떠오를 게 분명하다는 것이었다.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 있던 순간.자신의 등을 막고 있던 문.얼굴을 조금만 들면 닿을 것 같던 거리.그리고.다음에는 안 멈출 겁니다.유리는 손잡이에서 손을 떼었다가 다시 잡았다.“일하자.”문을 열었다.다행히 아무도 없었다.유리는 자신도 모르게 긴 숨을 내쉬었다.안도인지.실망인지.구분하고 싶지 않았다.조향실 안은 이른 시간 특유의 고요함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환기 장치가 낮게 돌아가는 소리와 냉장 보관함의 미세한 진동만 들렸다. 작업대 위에는 어제 마지막으로 조정한 세 개의 샘플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B-7.B-8.B-9.유리는 가운을 입고 머리를 단단히 묶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창문을 조금 열었다.향을 보기 전에는 공간을 비워야 했다.가능하다면 머릿속도.첫 번째 시향지를 집었다.B-7.차가운 베르가못과 쁘띠그랭.선명한 초록빛.십 초.이십 초.이후 아이리스가 올라오고, 시더우드와 머스크가 천천히 따라왔다.유리는 시향지를 코끝에서 떼었다.“아직 빨라.”따뜻해지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선을 넘기 직전의 향이라면 이렇게 쉽게 안심하게 해서는 안 됐다.다가가고 싶고.그런데 조금은 망설여지고.그 망설임 때문에 상대가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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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는 모르는 사이처럼

사귀기로 한 다음 날.한유리는 출근길부터 이상했다.정확히 말하면 모든 게 전날과 똑같은데 자신만 달라져 있었다.같은 길.같은 엘리베이터.같은 사원증.같은 조향실.그런데.권재헌이 이제 남자친구였다.남자친구.유리는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다가 괜히 입술을 꾹 눌렀다.아직도 그 단어가 낯설었다.어제 분명히 키스했고.좋아한다고 말했고.사귀기로 했다.심지어 비밀 연애 기간까지 정했다.그런데 자고 일어나니 갑자기 모든 게 꿈 같았다.휴대전화가 울렸다.유리는 화면을 내려다봤다.권재헌.이름만 떠도 심장이 반응했다.메시지는 짧았다.— 출근했습니까.유리는 잠깐 고민하다 답했다.— 지금 엘리베이터예요.몇 초 뒤.— 몇 층.유리는 눈을 깜빡였다.— 7층 가는 중인데요.— 내리면 기다리십시오.유리의 손이 멈췄다.왜.그 말을 묻기도 전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문이 열렸다.그리고.바로 앞에 권재헌이 서 있었다.유리는 거의 반사적으로 멈췄다.재헌은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이었다.짙은 슈트.단정한 넥타이.완벽하게 회사 사람 같은 모습.그래서 더 이상했다.저 사람이.어제 자기한테 키스한 사람이라고?유리는 순간 그의 입술을 봤다.아차 싶어 바로 시선을 올렸다.재헌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변했다.봤구나.유리는 괜히 헛기침했다.“왜 여기 있어요?”재헌이 주위를 한번 봤다.복도에는 아직 사람이 많지 않았다.“기다리라고 했잖습니까.”“그러니까 왜.”“보고 싶어서.”유리의 눈이 커졌다.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마치 오늘 회의가 몇 시냐고 묻는 것처럼.유리는 주변을 급히 확인했다.“회사예요.”“압니다.”“누가 들으면 어떡해요.”“아무도 없습니다.”“있을 수도 있잖아요.”재헌은 유리를 내려다봤다.“어제는 회사 밖에서는 비밀 아니라고 했습니다.”“지금은 안이잖아요.”“복도도 포함됩니까.”“당연하죠.”재헌의 눈썹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유리는 그 표정이 괜히 얄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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