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님, 당신의 어린 비서가 도망쳤습니다.

회장님, 당신의 어린 비서가 도망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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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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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그룹의 절대 권력자, 차갑고 오만한 회장. 그의 곁을 지키던 어린 비서는 누구보다 완벽했고, 누구보다 순종적이었다. 적어도 그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그에게 비서는 언제나 자신의 곁에 있어야 할 여자였다. 하지만 그녀가 남긴 것은 짧은 사직서 한 장뿐. 처음으로 통제할 수 없는 여자를 만난 남자는 그녀를 찾기 위해 모든 것을 움직인다. “도망치면 내가 포기할 줄 알았어?” 그녀를 되찾으려는 집착은 점점 광기로 변하고, 감춰졌던 비밀과 위험한 사랑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도망쳐야만 하는 여자와 절대로 놓아줄 수 없는 남자. 두 사람의 잔혹하고도 치명적인 사랑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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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1화

“차 세워.”

차태건이 내뱉은 한마디에 달리던 세단이 급격히 속도를 줄였다. 오승재 실장이 안전벨트에 몸을 부딪치며 돌아보았지만, 태건은 이미 태블릿 화면에 얼굴을 가까이 댄 채였다.

“찾았다.”

그의 목소리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낮았다. 그러나 화면을 움켜쥔 손은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태블릿 속에는 청담동 호텔 연회장에서 촬영된 사진이 떠 있었다. 베이지색 정장을 입은 여자가 계약서에 서명하고 있었다. 귀 뒤로 넘긴 짧은 머리카락, 펜을 쥘 때 조금 굽어지는 검지, 상대의 말을 들을 때 한쪽 눈썹을 먼저 들어 올리는 버릇까지.

윤세린이었다.

그가 다섯 해 동안 찾아 헤매다 끝내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여자였다.

태건은 화면을 확대했다. 여자가 웃었다. 사진에 소리가 있을 리 없는데도 그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숨을 들이마시자 가슴 안쪽이 날카롭게 저렸다.

살아 있었다.

다섯 해 전 마지막으로 본 얼굴보다 조금 성숙해졌을 뿐, 그녀는 분명 살아 있었다.

그가 달려갔던 영안실에서 흰 천을 들춰 보던 순간의 냉기가 아직도 손끝에 남아 있었다. 다행히 그 아래에 세린은 없었다. 낯선 나라의 거리에서 세린과 닮은 뒷모습을 붙잡았다가 사과했던 밤에도, 그녀는 거기 없었다. 끊어진 번호에 수천 번 전화를 걸고, 그녀의 생일마다 포장을 뜯지 않은 선물을 쌓아 두고, 비어 있는 침대의 한쪽을 바라보며 새벽을 맞아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저렇게 웃고 있었다.

태건은 사진 속 여자의 옆자리를 보았다. 젊은 남자가 그녀의 의자를 빼 주고 있었다. 세린은 자연스럽게 그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무언가를 말했다. 낯선 남자에게 허물없이 웃는 얼굴이 태건의 눈을 찔렀다.

“어디야.”

“로얄크라운 호텔입니다. 온결이라는 브랜드의 백화점 입점 계약 행사에 참석했습니다.”

오승재는 다른 화면을 띄웠다. 법인 대표 윤세린. 회사 설립 삼 년. 제품 사진과 기사, 대표 인터뷰까지 차례로 나타났다.

“본인이 확실해?”

“확인했습니다. 현재도 본명을 쓰고 있습니다. 다만 이전 거주 기록은 아직 확인 중이고…….”

“호텔로 가.”

승재가 운전기사에게 행선지를 전했다. 태건은 이미 통화를 시작하고 있었다. 수행차량을 보내라는 지시를 내리다 잠시 말을 멈췄다. 화면 속 세린의 왼손을 확대했기 때문이었다.

반지가 없었다.

그제야 굳어 있던 턱이 조금 풀렸다. 하지만 곧 옆자리 남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저 남자.”

“강지후 대표입니다. 온결의 초기 투자자이자 공동 사업 파트너로 알려져 있습니다.”

“언제부터?”

“최소 사 년 전부터 교류한 것으로 보입니다.”

태건은 태블릿을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자신이 세린의 흔적 하나 찾지 못해 밤마다 미쳐 가던 시간에, 저 남자는 그녀와 사 년을 보냈다. 세린이 무슨 음식을 좋아하게 됐는지, 잠들기 전에 어떤 표정을 짓는지, 울 때 누구를 찾는지 알 수도 있었다.

“승재야.”

“예, 회장님.”

“호텔 출입구부터 확인해. 경호원은 거리를 두고 대기시키고.”

태건은 잠시 말을 멈췄다. 화면 속 세린이 다른 남자에게 웃어 보이는 모습을 다시 확인하자 입술이 굳어졌다.

“그 여자가 다시 내 눈앞에서 사라지게 두지 마.”

오승재는 대답을 망설였다. 다섯 해 동안 태건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으로서 그 눈빛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다.

“회장님, 윤 대표님이 원하지 않으시면…….”

“원하지 않으면?”

태건이 고개를 들었다. 차창에 비친 그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또 보내라고?”

그는 다시 화면을 바라보았다. 사진 속 세린은 아무것도 모른 채 웃고 있었다.

“이번에는…… 눈앞에서 사라지게 둘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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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차 세워.”차태건이 내뱉은 한마디에 달리던 세단이 급격히 속도를 줄였다. 오승재 실장이 안전벨트에 몸을 부딪치며 돌아보았지만, 태건은 이미 태블릿 화면에 얼굴을 가까이 댄 채였다.“찾았다.”그의 목소리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낮았다. 그러나 화면을 움켜쥔 손은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태블릿 속에는 청담동 호텔 연회장에서 촬영된 사진이 떠 있었다. 베이지색 정장을 입은 여자가 계약서에 서명하고 있었다. 귀 뒤로 넘긴 짧은 머리카락, 펜을 쥘 때 조금 굽어지는 검지, 상대의 말을 들을 때 한쪽 눈썹을 먼저 들어 올리는 버릇까지.윤세린이었다.그가 다섯 해 동안 찾아 헤매다 끝내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여자였다.태건은 화면을 확대했다. 여자가 웃었다. 사진에 소리가 있을 리 없는데도 그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숨을 들이마시자 가슴 안쪽이 날카롭게 저렸다.살아 있었다.다섯 해 전 마지막으로 본 얼굴보다 조금 성숙해졌을 뿐, 그녀는 분명 살아 있었다.그가 달려갔던 영안실에서 흰 천을 들춰 보던 순간의 냉기가 아직도 손끝에 남아 있었다. 다행히 그 아래에 세린은 없었다. 낯선 나라의 거리에서 세린과 닮은 뒷모습을 붙잡았다가 사과했던 밤에도, 그녀는 거기 없었다. 끊어진 번호에 수천 번 전화를 걸고, 그녀의 생일마다 포장을 뜯지 않은 선물을 쌓아 두고, 비어 있는 침대의 한쪽을 바라보며 새벽을 맞아도 돌아오지 않았다.그런데 지금,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저렇게 웃고 있었다.태건은 사진 속 여자의 옆자리를 보았다. 젊은 남자가 그녀의 의자를 빼 주고 있었다. 세린은 자연스럽게 그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무언가를 말했다. 낯선 남자에게 허물없이 웃는 얼굴이 태건의 눈을 찔렀다.“어디야.”“로얄크라운 호텔입니다. 온결이라는 브랜드의 백화점 입점 계약 행사에 참석했습니다.”오승재는 다른 화면을 띄웠다. 법인 대표 윤세린. 회사 설립 삼 년. 제품 사진과 기사, 대표 인터뷰까지 차례로 나타났다.“본인이 확실해?”“확인했습니다. 현재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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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윤세린은 계약서에 마지막 서명을 마친 뒤에야 손바닥에 맺힌 땀을 닦았다.온결의 첫 전국 백화점 입점. 지난 반년 동안 공장과 매장을 오가며 수정한 샘플, 새벽까지 고쳐 쓴 제안서, 대금을 맞추느라 잠을 설친 날들이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회의실을 나서는 순간 휴대전화가 울렸다. 강지후가 보낸 사진이었다. 다섯 살 하람이 거실 바닥에 엎드려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종이 위에는 세 사람이 손을 잡고 있었다. 엄마, 하람이, 그리고 지후 삼촌.[하람이가 엄마 케이크 기다립니다. 축하할 준비는 다 끝났어요.]세린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딸기 케이크 사 갈게요. 조금만 기다리라고 해주세요.]사진 속 아이는 짙은 눈썹을 모으고 입술을 내밀고 있었다. 저렇게 집중할 때면 누군가를 너무도 닮았다. 세린은 화면을 껐다. 오래전에 끝낸 일로 오늘의 행복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왔을 때는 벌써 저녁이었다. 세린은 차 열쇠를 꺼내며 직원에게 감사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그때 검은 세단 두 대가 통로를 가로막으며 멈췄다. 낯선 차에서 내린 경호원들이 주변을 살피는 모습에 세린은 본능적으로 발걸음을 늦췄다.뒷좌석 문이 열렸다. 검은 구두가 바닥에 닿고, 익숙한 체격의 남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세린의 손에서 열쇠가 떨어졌다. 콘크리트 바닥에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차태건.그 이름이 머릿속에 떠오른 순간, 심장이 내려앉았다. 다섯 해 동안 악몽에서조차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썼던 남자였다. 세린은 숨을 들이마셨지만 공기가 목에 걸렸다. 손끝이 저려 왔고, 무릎이 제멋대로 떨렸다.어떻게 여기까지 찾아왔지? 회사 주소를 알아낸 걸까? 하람이는? 설마 아이도 알고 있는 걸까?세린은 반사적으로 휴대전화를 움켜쥐었다. 잠금 화면에는 하람이가 그린 그림이 떠 있었다. 그녀는 화면이 보이지 않도록 휴대전화를 뒤집어 가방에 밀어 넣었다.태건은 그녀를 발견하자 차에서 내린 자세 그대로 굳었다. 희끗해진 관자놀이와 깊어진 눈가에도 그의 시선만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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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세린은 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출구를 가리켰다. 손끝이 떨려 손가락을 제대로 펼 수도 없었다. 태건은 그녀의 떨리는 손과 출구를 번갈아 보았다. 잠깐 길을 비켜 줄 듯했으나,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바닥에 떨어진 열쇠를 오승재가 주워 들고 다가왔다. 세린은 승재를 보자 한 걸음 다가섰다. 예전에 몇 번이나 얼굴을 마주쳤던 사람이었다.“실장님, 제발 도와주세요. 저 사람한테는 안 가요. 제 차 열쇠만 주세요.”승재는 열쇠를 건네려다 태건의 굳은 얼굴을 확인하고 손을 멈췄다. 그 망설임만으로도 세린은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자리에 서 있는지 깨달았다.그녀는 승재의 손을 기다리지 않고 가방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손가락이 자꾸 빗나가 통화 목록이 열리지 않았다. 태건이 화면을 내려다보자 세린은 곧바로 몸을 돌렸다.“가까이 오지 마세요.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태건은 손을 뻗지 않았다. 대신 주차장 통로를 막고 선 차량들을 바라보았다. 세린의 시선도 그쪽으로 향했다. 그녀는 다시 달릴 길을 찾고 있었다.“잠깐만 이야기하자. 다섯 해 동안 널 찾았어.”세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가 자신을 찾았다는 사실은 위로가 아니라 위협이었다. 오늘 여기서 빠져나가지 못하면, 태건은 하람이의 존재까지 알아낼지도 몰랐다.“저는 회장님을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어요.”그녀는 한 발씩 옆으로 물러서며 호텔 엘리베이터 쪽을 살폈다. 태건은 그 움직임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도망칠 틈을 재는 세린의 모습에 그의 턱이 서서히 굳어졌다.“제발 비켜주세요. 더는 할 말 없어요.”“제발, 내 말 좀 들어.”세린은 대답하지 않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몸을 돌렸다.태건은 다급해졌다. 멀어지는 그녀를 향해,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지난 시간을 쏟아 냈다.“죽었다는 말을 듣고 영안실까지 갔어. 네 생일마다 선물을 샀고, 전화가 끊긴 걸 알면서도 매일 걸었어. 살아 있기만 해 달라고, 한 번만 다시 보게 해 달라고 빌었어.”세린은 엘리베이터 호출 버튼을 누르려다 멈췄다. 뒤돌아보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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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세린은 그를 지나쳤다. 태건이 급히 손목을 붙잡았다.“그 남자를 사랑해?”세린은 잡힌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태건의 엄지가 맥박이 뛰는 자리를 누르고 있었다. 그녀는 다른 손으로 그의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 냈다.“사랑하면요?”태건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세린은 손을 비틀어 빼냈다. 그의 눈앞에서 한 걸음 물러서며 또렷하게 말했다.“회장님은 저를 버린 분이에요. 제가 누구를 만나든 상관하실 자격 없습니다.”“내가 널 버렸다고?”그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세린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그날의 일이 여전히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몸을 돌려 자신의 차를 향해 걸었다.태건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다시 멀어지고 있었다. 다섯 해 전과 똑같이, 이번에도 돌아보지 않은 채.심장이 차갑게 식었다.“세린아.”그녀는 멈추지 않았다.“윤세린.”태건은 승재에게 시선을 돌렸다.“차 준비해.”승재가 망설였다. “회장님, 윤 대표님이 원하지 않으십니다. 이러시면…….”“열어.”세린이 뒤돌아섰다. 태건이 다가와 다시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오늘은 나랑 가.”“싫습니다.”“하루만. 이야기만 하자.”세린은 대답하지 않고 손목을 비틀었다. 그의 손이 따라 움직이자 그녀의 구두 굽이 콘크리트 바닥을 긁었다.그녀가 팔을 빼려 하자 태건은 놓치지 않으려 손에 힘을 주었다. 세린은 몸을 비틀었다. 서류철이 바닥에 떨어지며 계약서 몇 장이 흩어졌다.“차태건! 지금 뭐 하는 짓이에요?”그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주차장에 울렸다. 멀리 있던 호텔 직원이 고개를 돌렸다. 세린은 그쪽을 향해 소리쳤다.“도와주세요! 경찰 불러주세요!”태건의 얼굴이 굳었다. 승재가 급히 다가왔지만 그는 세린을 놓지 않았다.“미안해.”세린은 태건의 가슴팍을 밀쳤다. 미안하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을 놓지 않는 남자가 끔찍했다. 그의 코트 단추 하나가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다시 사라지게 둘 수 없어.”태건은 세린의 팔을 놓지 않은 채 세단 쪽으로 걸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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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세린은 태건의 손에서 휴대전화를 빼앗아 가방에 넣었다.세린은 휴대전화를 가방 깊숙이 넣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입술을 굳게 다문 모습만으로도 답은 충분했다.“적어도 그 사람은 제가 싫다는 일을 억지로 시키지 않아요.”태건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다섯 해 동안 가장 듣고 싶었던 것은 돌아와 달라는 대답이었다. 그런데 세린은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를 선택하고 있었다.“내가 없는 동안 그 남자랑 행복했어?”세린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가로등 아래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득했다. 대답을 기다리던 태건이 마른 입술을 축였을 때,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의 손이 무릎 위에서 굳었다.“네가 힘들 때도 그 남자가 옆에 있었겠지.”세린은 가방을 무릎 위로 끌어당겼다. 더 이상 그에게 자신의 지난 시간을 설명할 이유가 없었다.세린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등으로 닦았다.“그 사람은 제가 가장 힘들 때 저를 혼자 두지 않았어요.”태건은 고개를 돌렸다. 창문에 비친 그의 얼굴이 낯설었다. 평생 무엇이든 가질 수 있다고 믿었는데, 지금 눈앞의 여자 하나가 자신을 전혀 원하지 않았다.태건은 그녀가 손등으로 눈물을 닦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시선을 떨궜다. 다섯 해를 찾았다는 말조차 변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입 밖으로 나온 것은 결국 같은 고집이었다.“다시는 널 놓치지 않을 거야.”세린은 그를 돌아보았다.“그러면 저는 다시 떠날 방법을 찾을 거예요. 이번에는 회장님이 어떻게 하셔도요.”태건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가로등 불빛이 그의 굳은 얼굴 위를 지나갔다.***별장에 도착했을 때는 밤이 깊어 있었다.산길 끝에 세워진 집을 보는 순간 세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창가에 늘어선 나무, 현관 앞의 둥근 분수, 낮은 돌계단까지 기억 속 모습 그대로였다.다섯 해 전 그녀가 사랑을 착각했던 곳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자리가 어디인지 뼈저리게 깨달았던 곳이기도 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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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태건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그는 그녀에게 손을 뻗으려다 멈췄다. 세린은 그 틈에 가방을 열었다. 휴대전화 화면에는 지후의 부재중 전화가 여러 통 남아 있었다.[세린 씨, 무슨 일 있어요? 하람이가 엄마 찾고 있어요. 전화 주세요.]세린은 가슴이 철렁했다. 하람이는 약속을 잘 기억하는 아이였다. 엄마가 케이크를 사 오겠다고 했으니 잠들지 않고 현관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그녀는 다시 통화 버튼을 눌렀다. 태건이 화면을 보고 다가왔다.“그 남자한테 또 전화해?”세린은 휴대전화를 가슴 쪽으로 감쌌다.“저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요. 정말 돌아가야 해요.”태건의 시선이 휴대전화 화면으로 떨어졌다. 그 위에 뜬 강지후의 이름을 확인하자 그의 얼굴에서 마지막 남은 온기가 사라졌다.세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하람이의 이름을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이 남자가 아이의 존재를 알게 되면 무슨 일을 벌일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태건은 그녀의 침묵을 다른 뜻으로 받아들였다.“그래. 그 남자겠지.”그는 천천히 넥타이를 풀었다. 손가락이 매듭을 한 번에 풀지 못하고 헛돌았다. 세린은 처음으로 그의 손이 떨리는 것을 보았다.“네가 다른 남자와 사는 걸 내가 어떻게 봐.”“보실 필요 없어요. 저희는 끝난 사이니까요.”태건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빛은 피곤하고도 사나웠다.“나는 끝낸 적 없어.”“끝내지 않은 건 회장님 혼자예요.”그는 가까이 다가와 세린의 뺨으로 손을 뻗었다. 세린이 고개를 돌리자 손이 허공에 멈췄다. 잠시 후 태건은 손을 천천히 내렸다.“다섯 해 동안 하루도 너를 잊지 못했어.”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처음엔 찾아내서 따지려고 했어. 왜 나를 버렸는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까 네가 살아 있는지만 확인할 수 있어도 좋겠더라.”세린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 말은 진심이었다. 그러나 진심이라고 해서 그가 저지르는 일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그렇게 그리웠다면 저를 놓아주세요.”태건은 현관 쪽을 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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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같은 시각, 강지후는 세린의 마지막 통화가 끊긴 시각을 다시 확인했다.호텔 보안팀과 통화한 뒤 경찰에 신고했고, 세린이 탔던 차량의 번호와 이동 방향을 확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통화가 끊기기 직전 들린 남자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었다.차태건.다섯 해 전, 세린이 작은 여행 가방 하나를 끌고 찾아왔을 때 끝내 이름을 말하지 않으려 했던 남자였다.거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지후 삼촌.”하람이가 곰 인형을 안고 서 있었다. 잠옷 소매가 손등까지 내려와 있었다.“엄마는?”지후는 아이 앞에 무릎을 굽혔다.“조금 늦어지고 있어. 삼촌이 데리러 갈게.”하람은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아직 숫자를 전부 읽지는 못해도 엄마가 돌아올 시간을 지나쳤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케이크 사 온다고 했는데.”“응. 엄마도 그 약속 기억하고 있을 거야.”아이는 곰 인형의 귀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다가 지후의 소매를 잡았다.“삼촌, 엄마가 전에 말했잖아.”“무슨 말?”“나쁜 아저씨가 찾아오면 절대 따라가면 안 된다고.”지후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하람이의 짙은 눈썹과 눈매가 노트북 화면 속 남자를 닮아 있었다.“혹시 그 아저씨가 엄마 데려갔어?”지후는 섣불리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아이를 안아 올려 소파에 앉혔다.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강지후 씨, 경찰입니다. 호텔 측 CCTV에 윤세린 씨가 도움을 요청하고 차량에 강제로 탑승하는 장면이 확인됐습니다. 현재 차량 동선을 확인 중입니다.”지후는 하람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통화를 이어 갔다. 그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보고 아이가 곰 인형을 더욱 꼭 끌어안았다.전화를 끊은 지후는 오래전 세린의 말을 떠올렸다.‘그 사람이 저를 찾으면 안 돼요. 제 아이가 있다는 걸 알면 더더욱요.’그때 지후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대신 세린이 아이를 낳고, 몸을 추스르고, 다시 일할 수 있도록 곁을 지켰다.그런데 결국 그 남자가 그녀를 찾아냈다.지후는 휴대전화를 다시 들었다. 경찰에게 차량 이동 방향을 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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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태건은 책상 위에 놓인 사진에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강지후의 곁에서 웃고 있는 세린의 얼굴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자신이 지난 다섯 해 동안 미친 듯이 찾아 헤매는 동안, 저 남자는 그녀의 곁에서 함께 웃고, 밥을 먹고, 평범한 일상을 나누었을 것이다.사진 속 세린은 낯설 만큼 편안해 보였다. 자신과 함께 있을 때는 늘 어딘가 불안한 얼굴이었다. 그때는 그 이유를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을 사랑하는 여자였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결국 곁에 남을 거라고 믿었다.그런데 세린은 떠났고,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저런 얼굴로 웃고 있었다.태건은 사진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오 실장, 온결의 주요 거래처부터 전부 파악해.”승재가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윤세린의 지난 행적을 조사하라는 지시를 받았는데, 이번에는 그녀가 어렵게 일으킨 회사였다.“온결에 투자를 검토하시려는 겁니까?”“투자는 무슨.”태건은 사진 속 지후의 얼굴 위에 손가락을 얹었다. 그 남자가 없었다면 세린은 자신에게 돌아왔을까. 적어도 오늘 밤처럼 다른 남자에게 의지하며 떠나지는 않았을 것이다.그렇게 생각하자 억눌렀던 분노가 다시 치밀었다.“온결이 지금 누구와 거래하고 있는지, 자금은 어디서 조달하는지 전부 확인해. 계약 하나가 끊어졌을 때 어디부터 문제가 생기는지도 알아보고.”승재의 표정이 굳어졌다. 단순히 회사의 경영 상태를 살펴보라는 지시가 아니었다. 태건은 세린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손에 쥐려 하고 있었다.“회장님, 윤 대표님이 이 사실을 아시면 지금보다 더 멀어지실 겁니다.”“멀어져?”태건이 낮게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에는 조금의 여유도 없었다.“오늘 봤잖아. 그 여자는 나한테서 도망칠 생각밖에 없어.”그는 사진을 뒤집어 놓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경찰관 앞에서 자신을 가리키던 세린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강제로 끌려왔다고 진술했다. 자신이 가까이 다가가자 겁에 질려 뒷걸음질 치던 모습도 생생했다.다섯 해 전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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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승재는 순간 말을 잃었다.태건은 책상 위에 놓인 서류철을 옆으로 밀어 놓았다.“온결의 유통망, 투자 유치 내역, 은행 대출, 진행 중인 납품 계약까지 전부 조사해. 강지후가 관여한 부분도 빠짐없이 확인하고.”“윤 대표님이 끝까지 도움을 거절하시면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태건은 대답하지 않은 채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원에는 아직도 세린이 도망치려 했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급하게 달려 나가다 미끄러졌던 잔디밭과 경호원들이 가로막고 섰던 대문이 보였다.그녀가 얼마나 필사적으로 자신에게서 벗어나려 했는지 알고 있었다.그런데도 보내 줄 수 없었다.“거절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면 되겠지.”승재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회장님, 그건 윤 대표님을 돕는 게 아닙니다. 그분이 힘들게 쌓아 올린 모든 걸 무너뜨리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알아.”태건은 망설이지 않았다.그 짧은 대답에 승재는 오히려 더 큰 불안을 느꼈다.“알면서도 그러시겠다는 겁니까?”태건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낯설었다. 눈가에는 깊은 피로가 내려앉아 있었고, 관자놀이에는 희끗한 머리카락이 늘어 있었다.다섯 해라는 시간이 자신에게 남긴 흔적이었다.“오 실장, 내가 여기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 같아?”승재는 대답하지 못했다.“세린이는 그 남자한테 돌아가겠지. 내일도, 모레도, 앞으로 남은 평생도 나 없이 살 거야.”태건은 창틀을 짚은 손에 힘을 주었다.“나는 그걸 못 보겠어. 그 여자가 다른 남자 옆에서 웃는 걸 더는 못 견디겠다고.”승재는 태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다섯 해 동안 세린을 찾아 헤매던 태건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이 자신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사랑하는 여자를 잃은 남자의 후회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흐르면 조금씩 나아질 거라고도 믿었다.하지만 태건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세린을 찾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더욱 예민해졌고, 그녀와 닮은 여자를 보았다는 제보 하나에도 모든 일정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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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태건은 사진 속 지후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렸다.“그 남자가 세린이 곁에 계속 있을 수 있을지 알아봐. 내가 가진 힘으로 어디까지 무너뜨릴 수 있는지도.”승재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그렇게 하시면 윤 대표님은 회장님을 평생 용서하지 않으실 겁니다.”태건의 손이 멈췄다.그는 한동안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세린이 자신을 향해 외치던 목소리가 다시 귓가에 울렸다.‘회장님은 저를 버린 분이에요.’‘제가 누구를 만나든 상관하실 자격 없습니다.’‘제 인생에서 다시 사라져 주세요.’태건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이미 용서하지 않고 있잖아.”승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오늘 그 눈을 봤어.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고, 가까이 가기만 해도 겁부터 내더군.”태건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가 다시 열었다.“그런데도 그 남자한테는 웃었어. 내가 다섯 해 동안 한 번만 더 보고 싶었던 얼굴로.”태건은 사진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내가 뭘 더 잃을 수 있겠어?”승재는 그 말을 듣고 등골이 서늘해졌다.태건은 이미 세린의 사랑을 잃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미움이 더 깊어지는 것쯤은 감수할 수 있다고 믿는 듯했다.그러나 승재가 보기에 태건은 아직 가장 중요한 것을 모르고 있었다.사람은 사랑하지 않는 상대에게서 멀어질 수 있지만, 자신을 두려워하게 만든 사람에게서는 목숨을 걸고 도망치기도 한다는 사실을.태건은 의자에 앉아 사진 속 세린의 얼굴을 손끝으로 쓸었다.“내가 다섯 해 동안 잘못 생각했어.”승재가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기다리면 돌아올 줄 알았지. 내가 얼마나 후회했는지 알게 되면, 언젠가는 한 번쯤 나를 만나 줄 거라고 생각했어.”태건은 낮게 웃었다.“그런데 아니더군. 그 여자는 나 없이도 잘 살 수 있어. 오늘 그걸 똑똑히 봤어.”그는 사진을 내려놓고 승재를 바라보았다.“그러니까 이제는 나 없이 살 수 없게 만들어야겠어.”승재의 얼굴이 굳어졌다.“회장님, 제발 다시 생각해 보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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