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향사님, 선을 넘으셨습니다

조향사님, 선을 넘으셨습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2
By:  유월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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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손목을 잡고 목 가까이 다가가는 건 조향사 한유리에게 그저 일이다. 하지만 메종 르비에의 신임 총괄이사 권재헌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다. 창립 20주년 향수 〈BORDERLINE〉을 함께 개발하게 된 두 사람. 유리가 아무렇지 않게 그의 넥타이를 잡아당길 때마다 재헌의 경계는 흔들리고, 급기야 유리의 전 남자친구까지 광고 모델로 합류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누구에게나 거리낌 없이 다가가던 유리가 어느 순간부터 재헌 앞에서만 물러서기 시작한다. “왜 피합니까?” “안 피해요.” “선을 먼저 넘은 건 조향사님이잖습니까.” 향으로 시작된 경계가 사랑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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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프롤로그. 원래 이렇게 가까이 갑니까?

처음 만난 남자의 넥타이를 잡아당기는 데는 정확히 삼십 분이면 충분했다.

물론 한유리에게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잠깐만요.”

회의실을 빠져나가려던 남자의 걸음이 멈췄다.

유리는 테이블 위에 흩어진 시향지 가운데 하나를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전까지 한 시간 가까이 이어졌던 회의 탓에 테이블 위에는 노트북과 태블릿, 반쯤 식은 커피, 수십 장의 시향지가 뒤섞여 있었다. 베르가못과 네롤리, 시더우드와 베티버. 여러 향이 공기 중에서 복잡하게 엉킨 탓에 평소라면 벌써 창문부터 열었을 공간이었다.

하지만 지금 유리의 관심은 그 어느 향료에도 없었다.

문 앞에 선 남자에게 있었다.

오늘 처음 만난 메종 르비에의 신임 총괄이사.

권재헌.

검은 슈트에 흐트러짐 없이 채운 셔츠, 지나치게 반듯해서 오히려 냉정해 보이는 넥타이까지. 오전 아홉 시부터 지금까지 두 시간 넘게 회의를 했는데도 처음 들어왔을 때와 달라진 게 거의 없었다.

딱 하나.

향이 달라졌다.

유리는 가늘게 눈을 좁혔다.

“권재헌 이사님.”

“말씀하시죠.”

“혹시 향수 쓰세요?”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재헌은 곧바로 대답했다.

“안 씁니다.”

“정말요?”

“향수를 담당하는 회사의 총괄이사가 향수를 안 쓰는 게 문제가 됩니까?”

“아뇨. 오히려 좋아서요.”

재헌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유리는 그 표정을 보지 못했다. 이미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회의 초반에는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아주 희미한 향이 느껴졌다. 향수처럼 완성된 향은 아니었다. 우디 계열이라고 단정하기에도 애매했다. 종이 냄새와 커피, 셔츠에 밴 세제 향 사이로 아주 옅게 남아 있는 체향.

이상한 건 그다음이었다.

그 향이 꽤 좋았다.

“손 좀 주실래요?”

재헌이 아무 말 없이 유리를 바라봤다.

“손이요.”

유리가 제 손을 내밀어 보였다.

“손목이면 더 좋고요.”

“…….”

“왜요?”

“한유리 조향사님.”

“네.”

“첫 회의가 끝난 지 삼 분도 안 됐습니다.”

“알아요.”

“그런데 제 손목을 달라고 하시는 겁니까?”

“네.”

유리는 조금도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대신 고개를 기울였다.

“제가 이상한 부탁 했나요?”

잠깐의 침묵.

재헌은 자신을 바라보는 여자의 얼굴에서 장난기를 찾으려 했다.

없었다.

한유리는 진심이었다.

“이사님한테서 조금 전에는 없던 향이 나서요.”

“향이요?”

“네. 향수는 아니고.”

유리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의 목 아래로 떨어졌다. 셔츠 칼라가 닿은 자리에서 다시 손목으로 이동했다.

“체향 같은데.”

그제야 재헌은 이 여자가 왜 자신을 붙잡았는지 이해했다.

동시에 이해했다고 해서 상황이 덜 이상해지는 건 아니라는 사실도 알았다.

“확인해야 합니까?”

“가능하면요.”

“싫다고 하면?”

“어쩔 수 없죠.”

유리는 미련 없이 대답했다.

“허락 없이 만질 수는 없으니까.”

재헌의 시선이 잠시 그녀에게 머물렀다.

그러다 결국 오른손을 내밀었다.

“짧게 하시죠.”

“네.”

유리는 자연스럽게 그의 손목을 잡았다.

그 순간이었다.

재헌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자신의 손목 안쪽을 감싸고 있었다. 악수할 때조차 필요 이상으로 상대에게 닿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그에게는 낯선 접촉이었다.

반면 유리는 태연했다.

조금도 긴장하지 않은 얼굴로 그의 손목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왔다.

재헌의 미간이 아주 조금 좁아졌다.

생각했던 것보다 가까웠다.

유리의 머리카락 끝이 그의 손등을 스쳤다. 희미하게 샴푸 향이 났다. 그녀가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따뜻한 숨결이 손목 피부에 닿았다가 사라졌다.

한 번.

그리고 다시 한 번.

유리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여기는 아니네.”

“…….”

“잠깐만요.”

손목을 놓은 유리가 이번에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재헌이 그녀를 내려다봤다.

“이번엔 뭡니까?”

“셔츠요.”

“셔츠 어디.”

“칼라 쪽이요.”

“…….”

유리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목 부근을 가리켰다.

“여기.”

재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유리는 그것을 거절이라고 생각했다.

“불편하시면 안 해도 돼요. 그냥 제가 잘못 맡은 걸 수도 있으니까.”

그러고는 정말 물러나려고 했다.

그 순간 재헌이 말했다.

“하십시오.”

“네?”

“확인하고 싶다면서요.”

유리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

“그럼 잠깐만요.”

그리고 정말 잠깐이었다.

적어도 유리에게는.

그녀는 그의 재킷 라펠을 손끝으로 살짝 밀어냈다. 셔츠 깃 근처에서 향을 확인하려 했지만 남자가 너무 컸다. 구두 굽을 포함해도 머리 하나 가까이 차이가 났다.

유리는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 가장 간단한 방법을 선택했다.

재헌의 넥타이를 잡았다.

그리고 아래로 당겼다.

“…….”

재헌의 상체가 아주 조금 앞으로 기울었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아졌다.

유리는 여전히 아무렇지 않았다.

“조금만 숙여주세요.”

“지금도 충분히 숙여진 것 같은데요.”

“조금만 더요.”

재헌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지만 유리는 이미 그의 셔츠 깃 근처로 얼굴을 가져간 뒤였다.

아주 가까운 거리.

재헌은 움직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유리의 관자놀이에 입술이 닿을 것처럼 가까웠다. 그녀의 손가락은 아직 자신의 넥타이를 쥐고 있었다.

그 상태로 유리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아.”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여기네요.”

“뭐가 말입니까.”

“아까 그 향.”

유리가 한 번 더 향을 확인했다.

“시더우드 같기도 하고…… 아니, 그것보다 조금 더 따뜻한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목소리가 멈췄다.

그제야 유리는 이상한 걸 느꼈다.

향이 아니라 시선이었다.

고개를 들었다.

권재헌과 눈이 마주쳤다.

가까웠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하지만 놀란 건 유리뿐이었다.

재헌은 처음부터 그 거리를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 맡았습니까?”

낮은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떨어졌다.

“……네.”

“그럼.”

재헌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유리의 손도 따라서 내려갔다.

자신의 손가락이 여전히 그의 넥타이를 쥐고 있었다.

“이건 놔주시죠.”

“아.”

유리가 황급히 손을 놓았다.

넥타이가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죄송해요.”

“괜찮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재헌은 직접 넥타이 매듭을 고쳐 잡았다.

유리는 그 모습을 보다가 물었다.

“많이 불편하셨어요?”

“조금.”

“미리 말씀하시지.”

“말할 시간이 있었습니까?”

“있었죠.”

“제 넥타이를 잡기 전에 물어봤습니까?”

“…….”

유리가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니 그건 그랬다.

손목은 허락을 받았다.

셔츠도 허락을 받았다.

그런데 넥타이는 자연스럽게 잡아당겼다.

“그건 죄송해요. 습관이라.”

“습관.”

재헌이 그 단어를 천천히 반복했다.

이상하게도 마음에 들지 않는 단어였다.

“다른 사람에게도 이럽니까?”

“뭘요?”

“방금 같은 행동.”

유리는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향 확인하는 거요?”

“사람을 잡아당기고 이렇게 가까이 오는 것 말입니다.”

“아.”

그제야 알아들은 유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답이 너무 빨랐다.

재헌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달라졌다.

“누구에게나?”

“필요하면요.”

“남자한테도?”

“네.”

“…….”

“여자한테도 하고요.”

재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리는 조금 이상하다는 듯 그를 바라봤다.

“왜요?”

“아닙니다.”

“불편하시면 앞으로 이사님한테는 먼저 물어볼게요.”

“다른 사람한테도 물어보는 게 맞는 것 아닙니까?”

“당연히 물어보죠.”

“방금 저한테는 안 물어봤는데.”

“그러니까 죄송하다고 했잖아요.”

유리가 웃었다.

재헌은 웃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유리는 다시 테이블 쪽으로 돌아가 조금 전 사용했던 시향지를 집었다. 종이에 남은 향과 기억 속의 체향을 비교하듯 몇 번 향을 맡더니 고개를 저었다.

“역시 다르네.”

“무엇과 말입니까?”

“이거랑요.”

유리가 시향지를 흔들었다.

“아까 회의에서 이사님이 별로라고 하셨던 17번 샘플.”

“그것과 제 향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베이스가 비슷한 줄 알았어요.”

“아니었고요?”

“네. 훨씬 다르네요.”

유리는 잠시 생각하다 덧붙였다.

“이사님 쪽이 더 좋아요.”

재헌의 손이 멈췄다.

유리는 이미 시향지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런 말을 원래 아무렇지 않게 합니까?”

“무슨 말이요?”

“제 쪽이 더 좋다는 말.”

“향이요.”

유리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향 얘기인데요?”

알고 있었다.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방금 전 그 말은 조금 다르게 들렸다.

재헌은 미간을 눌렀다.

한국에 돌아온 지 사흘.

메종 르비에에 출근한 지 두 시간 삼십삼 분.

그리고 한유리를 만난 지 두 시간 남짓.

그 짧은 시간 안에 벌써 몇 번이나 자신의 페이스가 흐트러졌는지 모르겠다.

“한유리 조향사님.”

“네.”

“이번 프로젝트에 대해서 한 가지 확인하겠습니다.”

유리가 고개를 들었다.

재헌의 표정은 다시 처음 회의실에 들어왔을 때처럼 냉정하게 돌아와 있었다.

“오늘 발표한 17번을 최종 후보에서 제외하겠다고 했죠.”

“네.”

“이유가 뭡니까?”

유리도 금세 업무적인 표정으로 바뀌었다.

“좋은 향이지만 르비에의 향은 아니니까요.”

“판매 가능성은 높습니다.”

“알아요.”

“소비자 테스트에서도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습니다.”

“그것도 알아요.”

“그런데 버리겠다는 겁니까?”

“네.”

재헌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감각만으로요?”

유리의 표정에서도 웃음기가 사라졌다.

조금 전까지 그의 넥타이를 잡아당기던 여자와는 완전히 다른 얼굴이었다.

“이사님.”

“말씀하시죠.”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대답하는 향과 돈을 주고 다시 사고 싶은 향은 달라요.”

“그걸 수치로 증명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제가 증명하려고요.”

“어떻게.”

유리가 테이블 위에 놓인 프로젝트 자료를 집었다.

표지에는 아직 가제로 적힌 신제품 개발 계획서가 있었다.

창립 20주년 기념 시그니처 퍼퓸 프로젝트.

유리는 검지를 그 위에 올렸다.

“처음부터 다시 만들죠.”

“일정은 넉 달입니다.”

“충분해요.”

“기존 샘플을 전부 폐기하고?”

“네.”

“지금까지 들어간 개발비가 얼마인지 압니까?”

“압니다.”

“그런데도요?”

“그러니까 더 이상 돈을 낭비하면 안 되죠.”

재헌의 눈이 가늘어졌다.

유리는 피하지 않았다.

“20주년이라고 과거의 르비에를 예쁘게 포장해서 병에 담는 건 싫어요. 앞으로 르비에가 어떤 브랜드가 될 건지를 보여주는 향이어야죠.”

“추상적이군요.”

“향은 원래 추상적인 걸 구체적으로 만드는 일이에요.”

이번에는 재헌이 대답하지 못했다.

유리는 자료를 그의 앞에 내밀었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벌써 조건까지 겁니까?”

“이사님도 방금 제 방식에 조건 걸었잖아요.”

“그건 업무 방식에 대한 지적이었습니다.”

“저도 업무 얘기예요.”

유리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번 프로젝트, 저한테 완전히 맡겨주세요.”

“불가능합니다.”

즉답이었다.

유리가 눈을 깜빡였다.

“왜요?”

“제가 총괄 책임자니까.”

“그럼 이사님은 예산이랑 일정 관리하시고.”

“상품 전략도 제가 봅니다.”

“향은 제가 만들고요.”

“시장성이 없으면 통과시키지 않습니다.”

“향이 별로면 제가 안 만들어요.”

“판매 데이터를 무시하면 중단시키겠습니다.”

“조향에 간섭하면 쫓아낼 거예요.”

“누구 마음대로요?”

“제 조향실에서만요.”

두 사람 사이에 잠깐 정적이 흘렀다.

먼저 웃은 건 유리였다.

“우리 안 맞죠?”

“놀라울 정도로.”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다행이군요.”

“그런데.”

유리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래서 재밌을 것 같은데요.”

재헌의 시선이 손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뭡니까?”

“악수요.”

“확실합니까?”

“이번엔 손목 안 잡아요.”

재헌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손을 잡았다.

이번 접촉은 정상적이었다.

적당한 거리.

적당한 힘.

그리고 몇 초 뒤 자연스럽게 떨어지는 손.

그런데 이상하게도 재헌에게는 조금 전보다 이쪽이 더 신경 쓰였다.

유리는 이미 아무렇지도 않게 자료를 챙기고 있었다.

“그럼 내일부터 다시 시작하죠.”

“무엇부터 말입니까?”

“콘셉트부터요.”

“기존 콘셉트는 버리고?”

“네.”

“생각해 둔 게 있습니까?”

유리가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조금 전 자신과 재헌 사이에 있었던 거리를 떠올렸다.

손목을 잡았을 때.

넥타이를 당겼을 때.

조금만 더 가까워졌으면 서로의 숨이 닿았을 거리.

넘어도 되는 것과 넘으면 안 되는 것 사이.

그 애매한 경계.

“경계.”

유리가 말했다.

재헌이 그녀를 바라봤다.

“무슨 뜻입니까?”

“사람에게는 누구나 선이 있잖아요. 여기까지는 괜찮고, 여기부터는 안 되는 거.”

유리는 손가락으로 테이블 위에 보이지 않는 선을 그었다.

“그 선 바로 앞에서 나는 향.”

재헌의 시선이 그 손끝을 따라갔다.

“너무 추상적입니다.”

“아까 향은 원래 그런 거라고 말씀드렸는데.”

“상품명이 필요합니다.”

“그것도 지금 생각났어요.”

유리가 펜을 들었다.

프로젝트 계획서 위에 적혀 있던 임시 제목에 두 줄을 그었다.

그리고 그 아래 새로운 단어 하나를 적었다.

BORDERLINE.

재헌이 그 글자를 내려다봤다.

“경계선.”

“네.”

“마음에 안 드는데요.”

“왜요?”

재헌의 시선이 천천히 올라왔다.

그리고 조금 전 자신의 넥타이를 아무렇지 않게 잡아당겼던 여자를 바라봤다.

“이미 누군가가 너무 쉽게 넘는 것 같아서.”

유리가 눈을 깜빡였다.

몇 초 뒤에야 뜻을 알아차렸다.

“아.”

웃음이 터졌다.

“아직 그거 신경 쓰고 있었어요?”

“안 쓰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알았어요. 앞으로 안 그럴게요.”

“뭘 말입니까?”

“이사님 선 넘는 거.”

재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유리는 그 침묵을 동의로 받아들였다.

“그럼 내일부터 잘 부탁드려요, 이사님.”

자료를 품에 안은 유리가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혔다.

혼자 남은 재헌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손을 들어 자신의 넥타이를 만졌다.

한유리가 잡았던 자리였다.

당연히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데 조금 전의 감각만은 이상할 만큼 선명했다.

가느다란 손가락.

짧아진 거리.

목 가까이 닿았던 숨.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자신보다 제 향이 더 좋다고 말하던 목소리.

재헌은 천천히 손을 내렸다.

“……조향사라.”

오늘 처음 알았다.

상당히 피곤한 직업이었다.

그날 오후.

재헌은 대표이사실에서 르비에의 지난 5년간 실적 자료를 검토하고 있었다.

똑똑.

“들어오세요.”

브랜드전략팀장이 들어왔다.

“이사님. 오전에 말씀하신 20주년 프로젝트 팀 명단입니다.”

재헌은 서류를 받아들었다.

맨 위에 한유리의 이름이 있었다.

수석 조향사 한유리.

그 아래에는 프로젝트 참여 인력과 협업 부서가 적혀 있었다.

재헌은 빠르게 페이지를 넘기다가 마지막 장에서 멈췄다.

광고 모델 후보군.

국내외 배우와 모델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중 가장 높은 선호도를 받은 이름.

차선우.

“이 배우가 현재 1순위입니까?”

“네. 브랜드 조사에서도 반응이 가장 좋았습니다. 특히 한유리 조향사와도 개인적인 친분이 있어서 촬영이나 향 테스트 협조가 쉬울 것 같습니다.”

재헌의 손이 멈췄다.

“개인적인 친분?”

“아.”

팀장이 잠깐 망설였다.

“예전에 두 분이 교제했다고 들었습니다.”

재헌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누구와 누가요?”

“한유리 조향사하고 차선우 씨요.”

짧은 침묵.

재헌은 다시 서류를 내려다봤다.

차선우.

32세.

배우.

그리고 한유리의 전 남자친구.

별로 중요한 정보는 아니었다.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었다.

프로젝트에 적합하면 쓰면 된다.

재헌은 그렇게 생각하며 다음 장을 넘기려 했다.

그러다 문득 오전의 대화가 떠올랐다.

다른 사람에게도 이럽니까?

네.

남자한테도?

네.

여자한테도 하고요.

재헌의 손가락이 페이지 모서리에서 멈췄다.

“팀장님.”

“네, 이사님.”

“향 테스트할 때 조향사가 모델에게 직접 접촉하는 경우가 많습니까?”

“네?”

뜬금없는 질문에 팀장이 눈을 깜빡였다.

재헌은 무표정했다.

“업무상 확인하는 겁니다.”

“아…… 경우에 따라서는요. 피부 발향을 봐야 할 때도 있으니까요.”

“손목을 잡고.”

“그렇죠.”

“목 가까이 가기도 하고.”

“그럴 수도 있습니다.”

“넥타이도 잡아당깁니까?”

“……네?”

재헌이 입을 다물었다.

팀장의 표정이 묘해졌다.

“아닙니다.”

“네.”

“나가보세요.”

팀장이 조심스럽게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자 재헌은 서류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처음으로 아주 사소하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생각을 했다.

차선우가 모델이 되면.

한유리는 그 남자에게도 그렇게 가까이 갈까.

손목을 잡고.

목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필요하면 넥타이까지 잡아당기면서.

재헌의 미간이 서서히 좁아졌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아주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날 권재헌은 아직 몰랐다.

선을 넘지 말라고 가장 먼저 말한 사람이,

결국 그 선을 가장 많이 넘게 되리라는 것을.

그리고 한유리 역시 몰랐다.

누구에게나 아무렇지 않게 가까이 갈 수 있었던 자신이,

언젠가 단 한 사람의 손길 앞에서만 도망치게 되리라는 것을.

두 사람 사이에 그어진 경계는 아직 선명했다.

그러니 지금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 선의 이름이 곧,

사랑이 될 거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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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난 남자의 넥타이를 잡아당기는 데는 정확히 삼십 분이면 충분했다.물론 한유리에게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잠깐만요.”회의실을 빠져나가려던 남자의 걸음이 멈췄다.유리는 테이블 위에 흩어진 시향지 가운데 하나를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전까지 한 시간 가까이 이어졌던 회의 탓에 테이블 위에는 노트북과 태블릿, 반쯤 식은 커피, 수십 장의 시향지가 뒤섞여 있었다. 베르가못과 네롤리, 시더우드와 베티버. 여러 향이 공기 중에서 복잡하게 엉킨 탓에 평소라면 벌써 창문부터 열었을 공간이었다.하지만 지금 유리의 관심은 그 어느 향료에도 없었다.문 앞에 선 남자에게 있었다.오늘 처음 만난 메종 르비에의 신임 총괄이사.권재헌.검은 슈트에 흐트러짐 없이 채운 셔츠, 지나치게 반듯해서 오히려 냉정해 보이는 넥타이까지. 오전 아홉 시부터 지금까지 두 시간 넘게 회의를 했는데도 처음 들어왔을 때와 달라진 게 거의 없었다.딱 하나.향이 달라졌다.유리는 가늘게 눈을 좁혔다.“권재헌 이사님.”“말씀하시죠.”“혹시 향수 쓰세요?”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재헌은 곧바로 대답했다.“안 씁니다.”“정말요?”“향수를 담당하는 회사의 총괄이사가 향수를 안 쓰는 게 문제가 됩니까?”“아뇨. 오히려 좋아서요.”재헌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유리는 그 표정을 보지 못했다. 이미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이다.분명 회의 초반에는 없었다.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아주 희미한 향이 느껴졌다. 향수처럼 완성된 향은 아니었다. 우디 계열이라고 단정하기에도 애매했다. 종이 냄새와 커피, 셔츠에 밴 세제 향 사이로 아주 옅게 남아 있는 체향.이상한 건 그다음이었다.그 향이 꽤 좋았다.“손 좀 주실래요?”재헌이 아무 말 없이 유리를 바라봤다.“손이요.”유리가 제 손을 내밀어 보였다.“손목이면 더 좋고요.”“…….”“왜요?”“한유리 조향사님.”“네.”“첫 회의가 끝난 지 삼 분도 안 됐습니다.”“알아요.”“그런데 제 손목을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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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님을 향의 모델로 쓰겠습니다
다음 날 오전 아홉 시 십 분.권재헌은 자신이 잘못된 장소에 들어왔다고 생각했다.문 옆에는 분명히 ‘수석 조향사 한유리’라는 명패가 붙어 있었다. 일정표에도 오전 아홉 시부터 20주년 프로젝트 콘셉트 미팅이라고 적혀 있었고, 비서가 알려 준 장소 역시 이곳이었다.그러니 방을 잘못 찾은 건 아니었다.문제는 방 안이었다.재헌이 생각했던 회의실과는 거리가 멀었다.벽 한쪽을 가득 채운 선반에는 크기가 제각각인 갈색 유리병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고, 각각의 병에는 손으로 적은 라벨이 붙어 있었다. 베르가못, 네롤리, 아이리스, 샌들우드, 앰버, 통카빈. 창가 쪽에는 작은 화분 몇 개와 말린 꽃이 놓여 있었으며 중앙의 기다란 작업대에는 비커와 스포이트, 시향지와 메모지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그 한가운데에 한유리가 앉아 있었다.어제와 달리 머리를 느슨하게 하나로 묶고 흰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모습이었다. 코끝 가까이 가져간 시향지에 집중한 나머지 문이 열린 것도 모르는 듯했다.재헌은 문 앞에서 잠시 기다렸다.유리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시향지를 한 번 맡고, 메모를 남기고, 다시 다른 병을 열었다. 몇 방울을 떨어뜨리고 유리막대로 섞은 뒤 또다시 향을 확인했다.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제 회의실에서 자신의 넥타이를 잡아당기던 여자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그때는 지나치게 거리낌이 없었고, 지금은 주변에 누가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집중하고 있었다.재헌이 결국 입을 열었다.“한유리 조향사님.”반응이 없었다.“한유리 조향사님.”“……조금만요.”듣고 있었던 모양이었다.그런데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재헌의 눈썹이 올라갔다.“회의 시간이 지났습니다.”“알아요.”“알고 있는데 계속 이러고 있는 겁니까?”“네.”유리가 짧게 대답하더니 새로운 시향지를 꺼냈다.재헌은 손목시계를 내려다봤다.오전 아홉 시 십이 분.이 회사에서 자신에게 회의 시간보다 기다리는 시간을 먼저 제공한 직원은 한유리가 처음이었다.“얼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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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향, 저한테만 나는 것 같은데요
권재헌의 향 모델 테스트는 예상보다 훨씬 까다로운 조건으로 시작됐다.정확히 말하면 향 때문이 아니었다.사람이 까다로웠다.“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월요일 오전 여덟 시 사십 분.평소보다 이십 분 일찍 출근한 유리는 자신의 조향실 한가운데 서 있는 권재헌을 바라보며 팔짱을 꼈다.재헌은 출근하자마자 이곳으로 왔음에도 이미 완벽한 차림이었다. 짙은 차콜색 슈트, 흰 셔츠, 검은 넥타이. 머리카락도 흐트러진 곳 하나 없었다.문제는 그가 들고 온 종이였다.A4 용지 한 장.상단에는 반듯한 글씨로 적혀 있었다.〈BORDERLINE 체향 모델 테스트 관련 준수 사항〉.유리는 그것을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첫째, 신체 접촉이 필요한 경우 사전에 접촉 부위와 목적을 고지한다.”“네.”“둘째, 업무상 불필요한 접촉은 하지 않는다.”“당연하죠.”“셋째, 테스트는 사전에 협의한 시간 내에 진행한다.”“이것도 이해했고.”유리가 종이를 조금 내렸다.“넷째.”재헌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유리가 읽었다.“넥타이는 잡아당기지 않는다.”잠깐의 침묵.유리는 결국 참지 못하고 웃었다.“이걸 진짜 넣었어요?”“필요한 사항이니까.”“제가 또 잡아당길까 봐?”“한 번 한 사람이 두 번 못 한다는 보장이 있습니까?”“안 한다고 했잖아요.”“구두 약속보다 문서가 확실합니다.”“이사님.”“왜요.”“혹시 계약서 쓰는 게 취미예요?”“분쟁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됩니다.”“향 맡는 데도?”“특히 한유리 조향사님을 상대할 때는.”유리는 종이 너머로 그를 빤히 바라봤다.“저 그렇게 신뢰가 없어요?”“신뢰의 문제가 아닙니다.”“그럼요?”재헌의 시선이 아주 잠깐 그녀의 손으로 향했다.“거리 감각의 문제죠.”유리는 입을 다물었다.틀린 말은 아니었다.“알았어요.”결국 종이를 작업대 위에 내려놓았다.“지킬게요.”“좋습니다.”“대신 이사님도 제가 하라는 건 따라주세요.”“합리적인 범위 안에서.”“벌써 조건 붙이네.”“무조건 따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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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제가 확인하겠습니다
“잡아도 됩니까?”유리는 순간 대답하지 못했다.이상한 일이었다.정말 아무것도 아닌 질문이었다. 자신은 사람의 손목을 하루에도 몇 번씩 잡았다. 조향실에서는 향료병이나 시향지를 건네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행동이었고, 상대가 허락하기만 하면 피부 발향을 확인하기 위해 손등이나 손목 안쪽을 만지는 것도 특별할 게 없었다.그런데 지금은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왜냐하면 잡는 사람이 권재헌이었으니까.정확히는, 그가 너무 멀쩡한 얼굴로 자신에게 허락을 구하고 있었으니까.재헌은 손을 내민 채 기다렸다.재촉하지도 않았다.유리는 괜히 자신의 오른쪽 손목을 내려다봤다. 어제 그가 잡았던 자리였다. 이미 아무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은데 이상하게 그 순간의 감각만 선명했다.“왜 제 손목을 잡고 싶은데요?”결국 먼저 나온 질문은 허락도 거절도 아니었다.재헌의 눈썹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아까 본인이 말하지 않았습니까.”“뭘요?”“제가 한유리 조향사님에게 반응하는 건지 확인하고 싶다고.”유리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었다.“그 표현 좀 잊으면 안 돼요?”“본인이 한 말입니다.”“향 얘기였어요.”“압니다.”“알면서 자꾸 그렇게 말하잖아요.”“제가 어떻게 말했는데요.”“그냥.”유리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설명하려니 더 이상해질 것 같았다.재헌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그걸 본 유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또 웃었죠?”“아닙니다.”“웃었어요.”“그럼 업무 중에 웃으면 안 됩니까?”“어제는 업무 중이라 안 웃는다고 했잖아요.”재헌이 잠깐 멈췄다.유리의 눈이 반짝였다.잡았다.“말 바꿨네요.”“한유리 조향사님.”“네.”“손목 얘기로 돌아가죠.”“불리하면 자꾸 업무로 돌아가시네.”“허락합니까?”이번에는 재헌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유리는 괜히 숨을 한번 들이마셨다.“……네.”“확실합니까?”“네.”“그럼 잡겠습니다.”재헌의 손이 움직였다.유리는 처음부터 그 손을 보고 있었다.그래서 언제 닿을지 알고 있었다.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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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은 감정을 숨기지 못한다
차선우의 세 번째 시향이 끝났을 때, 한유리는 자신이 평소보다 훨씬 많은 것을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손목을 어느 각도로 잡는지.얼마나 가까이 얼굴을 가져가는지.향을 맡기 위해 몇 초나 머무르는지.원래는 생각조차 하지 않던 것들이 하나하나 의식됐다.그리고 그 이유는 아주 분명했다.권재헌이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유리는 선우의 손목을 놓으며 마지막 기록을 남겼다.“3번이 제일 낫네.”선우가 손목을 내려다봤다.“어떤데?”“첫 향은 시트러스가 너무 가볍고, 2번은 우디가 피부에서 너무 마르게 올라와. 3번이 제일 자연스러워.”“그럼 합격?”“향 테스트만 보면.”“다른 건?”“이미지, 카메라 테스트, 소비자 반응까지 봐야지.”“까다롭네.”“20주년이잖아.”유리는 시향지를 정리했다.그때 선우가 느긋하게 몸을 뒤로 기대며 물었다.“근데.”“왜.”“저 사람 너 좋아하냐?”유리의 손이 멈췄다.“누구?”선우가 굳이 이름을 말하지 않고 시선만 옆으로 보냈다.유리는 따라 보지 않았다.“헛소리하지 마.”“왜, 너무 티 나는데.”“뭐가.”“보는 눈.”유리는 시향지 몇 장을 괜히 다시 맞춰 정리했다.“이사님 원래 저런 얼굴이야.”“무슨 얼굴.”“그냥.”“내가 보기엔.”선우가 웃었다.“내 손목 잘라버리고 싶은 얼굴인데.”유리가 결국 선우를 쳐다봤다.“과장 좀 하지 마.”“진짠데.”“네가 괜히 신경 쓰는 거야.”“왜 내가 신경을 써.”선우는 아주 태연했다.“난 너랑 끝난 지 삼 년 됐고,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은데.”그 말을 듣는 순간 유리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선우도 알아차렸다.“봐.”“뭘.”“넌 내가 아직 미련 있는 것처럼 보일까 봐 걱정하잖아.”“그런 게 아니라.”“그럼?”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선우가 웃음을 거뒀다.“유리야.”“왜.”“저 사람한테 마음 생겼어?”이번에는 장난기가 없었다.유리는 바로 아니라고 말하려 했다.그런데 입이 생각보다 늦게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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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면 먼저 피하는 사람
엘리베이터 문이 닫힌 뒤에도 한유리는 한동안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정확히는 움직일 수 없었다.오른쪽 손목이 지나치게 선명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권재헌이 잡았던 자리.맥박 위를 눌렀던 엄지.그리고 마지막으로 물었던 말.무슨 감정인지.유리는 손목을 다른 손으로 감싸 쥐었다.“……미쳤나.”누가 보면 뭔가 대단한 일이라도 있었던 줄 알겠다.키스를 한 것도 아니고.껴안은 것도 아니고.고작 손목 한 번 잡혔다.자신은 그보다 더 가까운 거리에서 수도 없이 향을 맡았다. 재헌의 넥타이도 당겼고, 목 가까이 얼굴을 가져간 적도 있었다. 그때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그런데 지금은.그가 자신에게 한 걸음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숨이 조금 늦어졌다.유리는 괜히 복도 끝 창문으로 걸어갔다.찬 유리창에 손바닥을 댔다.조금 식혀야 할 것 같았다.자신이 먼저 시작했다.그건 인정해야 했다.손목을 잡은 것도 자신.목 가까이 간 것도 자신.향을 핑계로 거리를 무너뜨린 것도 자신.그런데 재헌이 똑같은 행동을 돌려주기 시작하자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유리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불공평하잖아.”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른 채 중얼거렸다.자신에게인지.권재헌에게인지.아니면 사람 마음이라는 것 자체에게인지.휴대전화가 울렸다.세아였다.— 선배 어디예요? 전략팀에서 광고 계약 확정됐대요.유리는 화면을 내려다봤다.차선우.결국 그가 최종 모델이 됐다.— 지금 내려가.답장을 보내고도 한참 동안 화면을 보고 있었다.이상했다.평소였다면 계약 확정 소식을 먼저 반겼을 것이다. 향과 이미지가 잘 맞았고, 글로벌 인지도까지 고려하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그런데 지금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다른 사람이었다.권재헌.그가 이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일지.자꾸 그 생각부터 들었다.유리는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었다.“진짜 정신 차리자.”이번에는 조금 크게 말했다.그리고 몸을 돌렸다.⸻차선우의 광고 계약은 그날 오후 공식적으로 확정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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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한다는 걸 인정하고 나면
좋아한다.그 단어 하나를 인정하는 데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아니.정확히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한유리는 집에 돌아온 뒤에도 몇 시간째 소파에 앉아 같은 생각을 반복하고 있었다.권재헌.좋아한다.권재헌을.좋아한다.말로 붙여놓고 보니 더 이상하게 느껴졌다.“아니.”유리는 쿠션을 끌어안았다.“아직 좋아하는 건 아닐 수도 있지.”호감.흥미.신경 쓰임.그 정도일 수도 있었다.자꾸 생각난다고 해서 좋아하는 건 아니고.가까이 오면 심장이 뛴다고 해서 꼭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질투하는 것처럼 보이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해서 반드시—유리는 생각을 멈췄다.쿠션에 얼굴을 묻었다.“아, 진짜.”이쯤 되면 변명도 성의가 없었다.자신이 조향사라는 게 이런 순간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평소라면 아주 작은 향의 차이도 구분할 수 있었다.베르가못과 비터 오렌지의 차이.건조한 시더우드와 크리미한 샌들우드의 차이.같은 머스크라도 피부 위에서 어떻게 다른 온도로 올라오는지.그런데 자기 마음 하나는 왜 이렇게 구분이 안 되는지 모르겠다.아니.사실은 구분이 됐다.그래서 더 문제였다.유리는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테이블 위에는 오늘 가져온 〈BORDERLINE〉 샘플이 놓여 있었다.작은 유리병.아직 완성되지 않은 향.유리는 손목에 한 방울 떨어뜨렸다.처음은 차가웠다.시트러스와 그린 노트.선명하고 가벼운 시작.그러다 몇 분 뒤 아이리스가 올라왔다.조금 부드러워지고.조금 가까워지고.마지막에는 우디 머스크.체온 가까이 붙는 향.유리는 자신의 손목을 맡다가 눈을 감았다.그리고 떠올랐다.권재헌.처음에는 차갑고.선을 분명히 긋고.가까이 오지 말라고 말하던 사람.그런데 자신이 자꾸 그 선을 건드렸고.어느 순간부터는.그가 한 걸음씩 다가오기 시작했다.유리는 눈을 떴다.“……이거.”향이 문제였다.아니.더 정확히는 자신이 만든 향이 지나치게 솔직해지고 있었다.요즘 조정한 〈BORDERLINE〉은 유리 자신도 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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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말라는 말은 못 하면서
권재헌은 파리 본사에서 온 메일을 세 번 읽었다.내용은 길지 않았다.메종 르비에 창립 20주년 프로젝트 〈BORDERLINE〉의 개발 과정에서 보여준 한유리의 조향 방향성과 감각을 높이 평가한다는 말.그리고 파리 본사 연구소에서 진행 중인 차기 글로벌 라인의 수석 조향사 후보로 그녀를 검토하고 싶다는 내용.아직 공식 제안은 아니었다.사전 인터뷰.역량 확인.향후 이동 가능성에 대한 의사 파악.그 정도였다.그런데 마지막 문장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장기적으로 파리 상주 가능 여부 확인 예정.재헌은 화면을 가만히 바라봤다.파리.상주.한유리.단어 세 개가 묘하게 거슬렸다.정확히는 마지막 두 개가 함께 붙어 있는 게.비서는 그의 표정을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아직 확정된 건 아닙니다.”“압니다.”“본사에서도 우선 인터뷰부터 진행하려는 것 같습니다.”“언제.”“다음 주 화요일 화상 미팅 가능 여부를 물어왔습니다.”재헌은 화면을 끄지 않았다.“한유리 조향사님한테도 갔습니까?”“네. 개인 메일과 회사 메일 둘 다 전달된 걸로 확인됐습니다.”“답변은.”“아직 공식 회신은 없습니다.”재헌의 시선이 멈췄다.아직.그 말에 이상하게 안도했다.하지만 바로 불쾌해졌다.자신이 왜 안도하는지 너무 잘 알아서.“본사에서 이 정도까지 보는 줄은 몰랐군요.”비서가 말했다.“이번 프로젝트 반응이 꽤 좋습니다. 특히 초기 샘플 리뷰에서 방향성이 좋다고—”“알고 있습니다.”재헌은 말을 끊었다.한유리가 잘하는 건 알고 있었다.누구보다.회의실에서 수치로만 향을 보는 사람들과 싸울 때도.샘플 17을 버리자고 했을 때도.사람이 좋아한다고 말하는 향과 실제로 돈을 내고 다시 사는 향은 다르다고 했을 때도.처음에는 고집스럽다고 생각했다.지금은 안다.그녀는 고집을 부리는 게 아니라 자기 향을 지키는 사람이었다.그래서.파리에서도 탐낼 것이다.당연했다.재헌은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조건이 좋겠죠.”비서는 질문처럼 들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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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허락부터 받겠습니다
다음에는 누가 방해해도 안 멈출 겁니다.한유리는 그 말을 정확히 스물세 번쯤 떠올린 뒤 세는 걸 포기했다.아침에 눈을 떴을 때 한 번.세수하다가 한 번.화장대 앞에서 립밤을 바르다가 두 번.회사로 가는 택시 안에서는 신호에 걸릴 때마다 생각났다.그리고 지금.조향실 문손잡이를 잡은 채 또 한 번.“미쳤다.”유리는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문을 열어야 했다.평소처럼 안으로 들어가 어제 조정해 둔 샘플을 확인하고, 오전 열 시 회의 전에 최종 시향 후보를 세 개로 줄이면 됐다. 권재헌이 오면 프로젝트 이야기를 하고, 향을 맡기고, 필요한 의견을 받는다.그게 전부였다.그런데 문제는.오늘 그 남자의 얼굴을 보면 어제 일이 떠오를 게 분명하다는 것이었다.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 있던 순간.자신의 등을 막고 있던 문.얼굴을 조금만 들면 닿을 것 같던 거리.그리고.다음에는 안 멈출 겁니다.유리는 손잡이에서 손을 떼었다가 다시 잡았다.“일하자.”문을 열었다.다행히 아무도 없었다.유리는 자신도 모르게 긴 숨을 내쉬었다.안도인지.실망인지.구분하고 싶지 않았다.조향실 안은 이른 시간 특유의 고요함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환기 장치가 낮게 돌아가는 소리와 냉장 보관함의 미세한 진동만 들렸다. 작업대 위에는 어제 마지막으로 조정한 세 개의 샘플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B-7.B-8.B-9.유리는 가운을 입고 머리를 단단히 묶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창문을 조금 열었다.향을 보기 전에는 공간을 비워야 했다.가능하다면 머릿속도.첫 번째 시향지를 집었다.B-7.차가운 베르가못과 쁘띠그랭.선명한 초록빛.십 초.이십 초.이후 아이리스가 올라오고, 시더우드와 머스크가 천천히 따라왔다.유리는 시향지를 코끝에서 떼었다.“아직 빨라.”따뜻해지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선을 넘기 직전의 향이라면 이렇게 쉽게 안심하게 해서는 안 됐다.다가가고 싶고.그런데 조금은 망설여지고.그 망설임 때문에 상대가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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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는 모르는 사이처럼
사귀기로 한 다음 날.한유리는 출근길부터 이상했다.정확히 말하면 모든 게 전날과 똑같은데 자신만 달라져 있었다.같은 길.같은 엘리베이터.같은 사원증.같은 조향실.그런데.권재헌이 이제 남자친구였다.남자친구.유리는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다가 괜히 입술을 꾹 눌렀다.아직도 그 단어가 낯설었다.어제 분명히 키스했고.좋아한다고 말했고.사귀기로 했다.심지어 비밀 연애 기간까지 정했다.그런데 자고 일어나니 갑자기 모든 게 꿈 같았다.휴대전화가 울렸다.유리는 화면을 내려다봤다.권재헌.이름만 떠도 심장이 반응했다.메시지는 짧았다.— 출근했습니까.유리는 잠깐 고민하다 답했다.— 지금 엘리베이터예요.몇 초 뒤.— 몇 층.유리는 눈을 깜빡였다.— 7층 가는 중인데요.— 내리면 기다리십시오.유리의 손이 멈췄다.왜.그 말을 묻기도 전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문이 열렸다.그리고.바로 앞에 권재헌이 서 있었다.유리는 거의 반사적으로 멈췄다.재헌은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이었다.짙은 슈트.단정한 넥타이.완벽하게 회사 사람 같은 모습.그래서 더 이상했다.저 사람이.어제 자기한테 키스한 사람이라고?유리는 순간 그의 입술을 봤다.아차 싶어 바로 시선을 올렸다.재헌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변했다.봤구나.유리는 괜히 헛기침했다.“왜 여기 있어요?”재헌이 주위를 한번 봤다.복도에는 아직 사람이 많지 않았다.“기다리라고 했잖습니까.”“그러니까 왜.”“보고 싶어서.”유리의 눈이 커졌다.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마치 오늘 회의가 몇 시냐고 묻는 것처럼.유리는 주변을 급히 확인했다.“회사예요.”“압니다.”“누가 들으면 어떡해요.”“아무도 없습니다.”“있을 수도 있잖아요.”재헌은 유리를 내려다봤다.“어제는 회사 밖에서는 비밀 아니라고 했습니다.”“지금은 안이잖아요.”“복도도 포함됩니까.”“당연하죠.”재헌의 눈썹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유리는 그 표정이 괜히 얄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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