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사람의 손목을 잡고 목 가까이 다가가는 건 조향사 한유리에게 그저 일이다. 하지만 메종 르비에의 신임 총괄이사 권재헌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다. 창립 20주년 향수 〈BORDERLINE〉을 함께 개발하게 된 두 사람. 유리가 아무렇지 않게 그의 넥타이를 잡아당길 때마다 재헌의 경계는 흔들리고, 급기야 유리의 전 남자친구까지 광고 모델로 합류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누구에게나 거리낌 없이 다가가던 유리가 어느 순간부터 재헌 앞에서만 물러서기 시작한다. “왜 피합니까?” “안 피해요.” “선을 먼저 넘은 건 조향사님이잖습니까.” 향으로 시작된 경계가 사랑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View More처음 만난 남자의 넥타이를 잡아당기는 데는 정확히 삼십 분이면 충분했다.
물론 한유리에게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잠깐만요.” 회의실을 빠져나가려던 남자의 걸음이 멈췄다. 유리는 테이블 위에 흩어진 시향지 가운데 하나를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전까지 한 시간 가까이 이어졌던 회의 탓에 테이블 위에는 노트북과 태블릿, 반쯤 식은 커피, 수십 장의 시향지가 뒤섞여 있었다. 베르가못과 네롤리, 시더우드와 베티버. 여러 향이 공기 중에서 복잡하게 엉킨 탓에 평소라면 벌써 창문부터 열었을 공간이었다. 하지만 지금 유리의 관심은 그 어느 향료에도 없었다. 문 앞에 선 남자에게 있었다. 오늘 처음 만난 메종 르비에의 신임 총괄이사. 권재헌. 검은 슈트에 흐트러짐 없이 채운 셔츠, 지나치게 반듯해서 오히려 냉정해 보이는 넥타이까지. 오전 아홉 시부터 지금까지 두 시간 넘게 회의를 했는데도 처음 들어왔을 때와 달라진 게 거의 없었다. 딱 하나. 향이 달라졌다. 유리는 가늘게 눈을 좁혔다. “권재헌 이사님.” “말씀하시죠.” “혹시 향수 쓰세요?”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재헌은 곧바로 대답했다. “안 씁니다.” “정말요?” “향수를 담당하는 회사의 총괄이사가 향수를 안 쓰는 게 문제가 됩니까?” “아뇨. 오히려 좋아서요.” 재헌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유리는 그 표정을 보지 못했다. 이미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회의 초반에는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아주 희미한 향이 느껴졌다. 향수처럼 완성된 향은 아니었다. 우디 계열이라고 단정하기에도 애매했다. 종이 냄새와 커피, 셔츠에 밴 세제 향 사이로 아주 옅게 남아 있는 체향. 이상한 건 그다음이었다. 그 향이 꽤 좋았다. “손 좀 주실래요?” 재헌이 아무 말 없이 유리를 바라봤다. “손이요.” 유리가 제 손을 내밀어 보였다. “손목이면 더 좋고요.” “…….” “왜요?” “한유리 조향사님.” “네.” “첫 회의가 끝난 지 삼 분도 안 됐습니다.” “알아요.” “그런데 제 손목을 달라고 하시는 겁니까?” “네.” 유리는 조금도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대신 고개를 기울였다. “제가 이상한 부탁 했나요?” 잠깐의 침묵. 재헌은 자신을 바라보는 여자의 얼굴에서 장난기를 찾으려 했다. 없었다. 한유리는 진심이었다. “이사님한테서 조금 전에는 없던 향이 나서요.” “향이요?” “네. 향수는 아니고.” 유리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의 목 아래로 떨어졌다. 셔츠 칼라가 닿은 자리에서 다시 손목으로 이동했다. “체향 같은데.” 그제야 재헌은 이 여자가 왜 자신을 붙잡았는지 이해했다. 동시에 이해했다고 해서 상황이 덜 이상해지는 건 아니라는 사실도 알았다. “확인해야 합니까?” “가능하면요.” “싫다고 하면?” “어쩔 수 없죠.” 유리는 미련 없이 대답했다. “허락 없이 만질 수는 없으니까.” 재헌의 시선이 잠시 그녀에게 머물렀다. 그러다 결국 오른손을 내밀었다. “짧게 하시죠.” “네.” 유리는 자연스럽게 그의 손목을 잡았다. 그 순간이었다. 재헌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자신의 손목 안쪽을 감싸고 있었다. 악수할 때조차 필요 이상으로 상대에게 닿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그에게는 낯선 접촉이었다. 반면 유리는 태연했다. 조금도 긴장하지 않은 얼굴로 그의 손목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왔다. 재헌의 미간이 아주 조금 좁아졌다. 생각했던 것보다 가까웠다. 유리의 머리카락 끝이 그의 손등을 스쳤다. 희미하게 샴푸 향이 났다. 그녀가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따뜻한 숨결이 손목 피부에 닿았다가 사라졌다. 한 번. 그리고 다시 한 번. 유리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여기는 아니네.” “…….” “잠깐만요.” 손목을 놓은 유리가 이번에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재헌이 그녀를 내려다봤다. “이번엔 뭡니까?” “셔츠요.” “셔츠 어디.” “칼라 쪽이요.” “…….” 유리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목 부근을 가리켰다. “여기.” 재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유리는 그것을 거절이라고 생각했다. “불편하시면 안 해도 돼요. 그냥 제가 잘못 맡은 걸 수도 있으니까.” 그러고는 정말 물러나려고 했다. 그 순간 재헌이 말했다. “하십시오.” “네?” “확인하고 싶다면서요.” 유리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 “그럼 잠깐만요.” 그리고 정말 잠깐이었다. 적어도 유리에게는. 그녀는 그의 재킷 라펠을 손끝으로 살짝 밀어냈다. 셔츠 깃 근처에서 향을 확인하려 했지만 남자가 너무 컸다. 구두 굽을 포함해도 머리 하나 가까이 차이가 났다. 유리는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 가장 간단한 방법을 선택했다. 재헌의 넥타이를 잡았다. 그리고 아래로 당겼다. “…….” 재헌의 상체가 아주 조금 앞으로 기울었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아졌다. 유리는 여전히 아무렇지 않았다. “조금만 숙여주세요.” “지금도 충분히 숙여진 것 같은데요.” “조금만 더요.” 재헌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지만 유리는 이미 그의 셔츠 깃 근처로 얼굴을 가져간 뒤였다. 아주 가까운 거리. 재헌은 움직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유리의 관자놀이에 입술이 닿을 것처럼 가까웠다. 그녀의 손가락은 아직 자신의 넥타이를 쥐고 있었다. 그 상태로 유리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아.”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여기네요.” “뭐가 말입니까.” “아까 그 향.” 유리가 한 번 더 향을 확인했다. “시더우드 같기도 하고…… 아니, 그것보다 조금 더 따뜻한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목소리가 멈췄다. 그제야 유리는 이상한 걸 느꼈다. 향이 아니라 시선이었다. 고개를 들었다. 권재헌과 눈이 마주쳤다. 가까웠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하지만 놀란 건 유리뿐이었다. 재헌은 처음부터 그 거리를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 맡았습니까?” 낮은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떨어졌다. “……네.” “그럼.” 재헌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유리의 손도 따라서 내려갔다. 자신의 손가락이 여전히 그의 넥타이를 쥐고 있었다. “이건 놔주시죠.” “아.” 유리가 황급히 손을 놓았다. 넥타이가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죄송해요.” “괜찮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재헌은 직접 넥타이 매듭을 고쳐 잡았다. 유리는 그 모습을 보다가 물었다. “많이 불편하셨어요?” “조금.” “미리 말씀하시지.” “말할 시간이 있었습니까?” “있었죠.” “제 넥타이를 잡기 전에 물어봤습니까?” “…….” 유리가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니 그건 그랬다. 손목은 허락을 받았다. 셔츠도 허락을 받았다. 그런데 넥타이는 자연스럽게 잡아당겼다. “그건 죄송해요. 습관이라.” “습관.” 재헌이 그 단어를 천천히 반복했다. 이상하게도 마음에 들지 않는 단어였다. “다른 사람에게도 이럽니까?” “뭘요?” “방금 같은 행동.” 유리는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향 확인하는 거요?” “사람을 잡아당기고 이렇게 가까이 오는 것 말입니다.” “아.” 그제야 알아들은 유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답이 너무 빨랐다. 재헌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달라졌다. “누구에게나?” “필요하면요.” “남자한테도?” “네.” “…….” “여자한테도 하고요.” 재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리는 조금 이상하다는 듯 그를 바라봤다. “왜요?” “아닙니다.” “불편하시면 앞으로 이사님한테는 먼저 물어볼게요.” “다른 사람한테도 물어보는 게 맞는 것 아닙니까?” “당연히 물어보죠.” “방금 저한테는 안 물어봤는데.” “그러니까 죄송하다고 했잖아요.” 유리가 웃었다. 재헌은 웃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유리는 다시 테이블 쪽으로 돌아가 조금 전 사용했던 시향지를 집었다. 종이에 남은 향과 기억 속의 체향을 비교하듯 몇 번 향을 맡더니 고개를 저었다. “역시 다르네.” “무엇과 말입니까?” “이거랑요.” 유리가 시향지를 흔들었다. “아까 회의에서 이사님이 별로라고 하셨던 17번 샘플.” “그것과 제 향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베이스가 비슷한 줄 알았어요.” “아니었고요?” “네. 훨씬 다르네요.” 유리는 잠시 생각하다 덧붙였다. “이사님 쪽이 더 좋아요.” 재헌의 손이 멈췄다. 유리는 이미 시향지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런 말을 원래 아무렇지 않게 합니까?” “무슨 말이요?” “제 쪽이 더 좋다는 말.” “향이요.” 유리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향 얘기인데요?” 알고 있었다.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방금 전 그 말은 조금 다르게 들렸다. 재헌은 미간을 눌렀다. 한국에 돌아온 지 사흘. 메종 르비에에 출근한 지 두 시간 삼십삼 분. 그리고 한유리를 만난 지 두 시간 남짓. 그 짧은 시간 안에 벌써 몇 번이나 자신의 페이스가 흐트러졌는지 모르겠다. “한유리 조향사님.” “네.” “이번 프로젝트에 대해서 한 가지 확인하겠습니다.” 유리가 고개를 들었다. 재헌의 표정은 다시 처음 회의실에 들어왔을 때처럼 냉정하게 돌아와 있었다. “오늘 발표한 17번을 최종 후보에서 제외하겠다고 했죠.” “네.” “이유가 뭡니까?” 유리도 금세 업무적인 표정으로 바뀌었다. “좋은 향이지만 르비에의 향은 아니니까요.” “판매 가능성은 높습니다.” “알아요.” “소비자 테스트에서도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습니다.” “그것도 알아요.” “그런데 버리겠다는 겁니까?” “네.” 재헌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감각만으로요?” 유리의 표정에서도 웃음기가 사라졌다. 조금 전까지 그의 넥타이를 잡아당기던 여자와는 완전히 다른 얼굴이었다. “이사님.” “말씀하시죠.”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대답하는 향과 돈을 주고 다시 사고 싶은 향은 달라요.” “그걸 수치로 증명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제가 증명하려고요.” “어떻게.” 유리가 테이블 위에 놓인 프로젝트 자료를 집었다. 표지에는 아직 가제로 적힌 신제품 개발 계획서가 있었다. 창립 20주년 기념 시그니처 퍼퓸 프로젝트. 유리는 검지를 그 위에 올렸다. “처음부터 다시 만들죠.” “일정은 넉 달입니다.” “충분해요.” “기존 샘플을 전부 폐기하고?” “네.” “지금까지 들어간 개발비가 얼마인지 압니까?” “압니다.” “그런데도요?” “그러니까 더 이상 돈을 낭비하면 안 되죠.” 재헌의 눈이 가늘어졌다. 유리는 피하지 않았다. “20주년이라고 과거의 르비에를 예쁘게 포장해서 병에 담는 건 싫어요. 앞으로 르비에가 어떤 브랜드가 될 건지를 보여주는 향이어야죠.” “추상적이군요.” “향은 원래 추상적인 걸 구체적으로 만드는 일이에요.” 이번에는 재헌이 대답하지 못했다. 유리는 자료를 그의 앞에 내밀었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벌써 조건까지 겁니까?” “이사님도 방금 제 방식에 조건 걸었잖아요.” “그건 업무 방식에 대한 지적이었습니다.” “저도 업무 얘기예요.” 유리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번 프로젝트, 저한테 완전히 맡겨주세요.” “불가능합니다.” 즉답이었다. 유리가 눈을 깜빡였다. “왜요?” “제가 총괄 책임자니까.” “그럼 이사님은 예산이랑 일정 관리하시고.” “상품 전략도 제가 봅니다.” “향은 제가 만들고요.” “시장성이 없으면 통과시키지 않습니다.” “향이 별로면 제가 안 만들어요.” “판매 데이터를 무시하면 중단시키겠습니다.” “조향에 간섭하면 쫓아낼 거예요.” “누구 마음대로요?” “제 조향실에서만요.” 두 사람 사이에 잠깐 정적이 흘렀다. 먼저 웃은 건 유리였다. “우리 안 맞죠?” “놀라울 정도로.”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다행이군요.” “그런데.” 유리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래서 재밌을 것 같은데요.” 재헌의 시선이 손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뭡니까?” “악수요.” “확실합니까?” “이번엔 손목 안 잡아요.” 재헌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손을 잡았다. 이번 접촉은 정상적이었다. 적당한 거리. 적당한 힘. 그리고 몇 초 뒤 자연스럽게 떨어지는 손. 그런데 이상하게도 재헌에게는 조금 전보다 이쪽이 더 신경 쓰였다. 유리는 이미 아무렇지도 않게 자료를 챙기고 있었다. “그럼 내일부터 다시 시작하죠.” “무엇부터 말입니까?” “콘셉트부터요.” “기존 콘셉트는 버리고?” “네.” “생각해 둔 게 있습니까?” 유리가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조금 전 자신과 재헌 사이에 있었던 거리를 떠올렸다. 손목을 잡았을 때. 넥타이를 당겼을 때. 조금만 더 가까워졌으면 서로의 숨이 닿았을 거리. 넘어도 되는 것과 넘으면 안 되는 것 사이. 그 애매한 경계. “경계.” 유리가 말했다. 재헌이 그녀를 바라봤다. “무슨 뜻입니까?” “사람에게는 누구나 선이 있잖아요. 여기까지는 괜찮고, 여기부터는 안 되는 거.” 유리는 손가락으로 테이블 위에 보이지 않는 선을 그었다. “그 선 바로 앞에서 나는 향.” 재헌의 시선이 그 손끝을 따라갔다. “너무 추상적입니다.” “아까 향은 원래 그런 거라고 말씀드렸는데.” “상품명이 필요합니다.” “그것도 지금 생각났어요.” 유리가 펜을 들었다. 프로젝트 계획서 위에 적혀 있던 임시 제목에 두 줄을 그었다. 그리고 그 아래 새로운 단어 하나를 적었다. BORDERLINE. 재헌이 그 글자를 내려다봤다. “경계선.” “네.” “마음에 안 드는데요.” “왜요?” 재헌의 시선이 천천히 올라왔다. 그리고 조금 전 자신의 넥타이를 아무렇지 않게 잡아당겼던 여자를 바라봤다. “이미 누군가가 너무 쉽게 넘는 것 같아서.” 유리가 눈을 깜빡였다. 몇 초 뒤에야 뜻을 알아차렸다. “아.” 웃음이 터졌다. “아직 그거 신경 쓰고 있었어요?” “안 쓰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알았어요. 앞으로 안 그럴게요.” “뭘 말입니까?” “이사님 선 넘는 거.” 재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유리는 그 침묵을 동의로 받아들였다. “그럼 내일부터 잘 부탁드려요, 이사님.” 자료를 품에 안은 유리가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혔다. 혼자 남은 재헌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손을 들어 자신의 넥타이를 만졌다. 한유리가 잡았던 자리였다. 당연히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데 조금 전의 감각만은 이상할 만큼 선명했다. 가느다란 손가락. 짧아진 거리. 목 가까이 닿았던 숨.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자신보다 제 향이 더 좋다고 말하던 목소리. 재헌은 천천히 손을 내렸다. “……조향사라.” 오늘 처음 알았다. 상당히 피곤한 직업이었다. ⸻ 그날 오후. 재헌은 대표이사실에서 르비에의 지난 5년간 실적 자료를 검토하고 있었다. 똑똑. “들어오세요.” 브랜드전략팀장이 들어왔다. “이사님. 오전에 말씀하신 20주년 프로젝트 팀 명단입니다.” 재헌은 서류를 받아들었다. 맨 위에 한유리의 이름이 있었다. 수석 조향사 한유리. 그 아래에는 프로젝트 참여 인력과 협업 부서가 적혀 있었다. 재헌은 빠르게 페이지를 넘기다가 마지막 장에서 멈췄다. 광고 모델 후보군. 국내외 배우와 모델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중 가장 높은 선호도를 받은 이름. 차선우. “이 배우가 현재 1순위입니까?” “네. 브랜드 조사에서도 반응이 가장 좋았습니다. 특히 한유리 조향사와도 개인적인 친분이 있어서 촬영이나 향 테스트 협조가 쉬울 것 같습니다.” 재헌의 손이 멈췄다. “개인적인 친분?” “아.” 팀장이 잠깐 망설였다. “예전에 두 분이 교제했다고 들었습니다.” 재헌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누구와 누가요?” “한유리 조향사하고 차선우 씨요.” 짧은 침묵. 재헌은 다시 서류를 내려다봤다. 차선우. 32세. 배우. 그리고 한유리의 전 남자친구. 별로 중요한 정보는 아니었다.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었다. 프로젝트에 적합하면 쓰면 된다. 재헌은 그렇게 생각하며 다음 장을 넘기려 했다. 그러다 문득 오전의 대화가 떠올랐다. 다른 사람에게도 이럽니까? 네. 남자한테도? 네. 여자한테도 하고요. 재헌의 손가락이 페이지 모서리에서 멈췄다. “팀장님.” “네, 이사님.” “향 테스트할 때 조향사가 모델에게 직접 접촉하는 경우가 많습니까?” “네?” 뜬금없는 질문에 팀장이 눈을 깜빡였다. 재헌은 무표정했다. “업무상 확인하는 겁니다.” “아…… 경우에 따라서는요. 피부 발향을 봐야 할 때도 있으니까요.” “손목을 잡고.” “그렇죠.” “목 가까이 가기도 하고.” “그럴 수도 있습니다.” “넥타이도 잡아당깁니까?” “……네?” 재헌이 입을 다물었다. 팀장의 표정이 묘해졌다. “아닙니다.” “네.” “나가보세요.” 팀장이 조심스럽게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자 재헌은 서류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처음으로 아주 사소하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생각을 했다. 차선우가 모델이 되면. 한유리는 그 남자에게도 그렇게 가까이 갈까. 손목을 잡고. 목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필요하면 넥타이까지 잡아당기면서. 재헌의 미간이 서서히 좁아졌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아주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날 권재헌은 아직 몰랐다. 선을 넘지 말라고 가장 먼저 말한 사람이, 결국 그 선을 가장 많이 넘게 되리라는 것을. 그리고 한유리 역시 몰랐다. 누구에게나 아무렇지 않게 가까이 갈 수 있었던 자신이, 언젠가 단 한 사람의 손길 앞에서만 도망치게 되리라는 것을. 두 사람 사이에 그어진 경계는 아직 선명했다. 그러니 지금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 선의 이름이 곧, 사랑이 될 거라는 것을.조향사에게 자신을 소개할 향을 고르라는 말은 어떤 사람에게 가장 좋아하는 책 한 권을 고르라고 하는 것과 비슷했다. 좋아하는 향은 많았다. 오래 사용한 원료도 있었고, 자신이 직접 만든 포뮬러도 있었다. BORDERLINE을 가져가면 가장 명확한 답이 될 수 있었다. 지금의 유리를 설명하는 데 그보다 적절한 작품도 없을 것이다.하지만 이상하게 바로 손이 가지 않았다.유리는 캐리어에서 BORDERLINE 002를 꺼냈다. 세아가 파리 첫 출근 때 뿌리라며 건네준 병이었다. 유리는 병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한동안 바라봤다. 투명한 유리 안에 담긴 향은 서울에서의 시간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첫 시향과 수정 과정, 재헌과의 수많은 대화, 세아가 맡아 완성한 생산 기준까지.그 향을 가져가면 사람들은 한유리를 BORDERLINE을 만든 조향사로 기억할 것이다.틀린 소개는 아니었다.하지만.그게 전부는 아니었다.유리는 병을 다시 내려놓았다.그리고 노트북 옆에 놓인 빈 시향지 케이스를 바라봤다.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휴대전화를 들었다.한국은 새벽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재헌에게 연락하기로 했지만, 지금 전화하면 잠을 깨울지도 몰랐다. 유리는 메시지를 보내려다가 멈췄다. 그러다 먼저 짧게 적었다.유리: 혹시 아직 안 자요?답장은 예상보다 빨리 왔다.재헌: 안 잡니다.유리는 눈을 크게 떴다.유리: 왜요?재헌: 유리 씨 연락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유리는 그 문장을 보고 웃었다. 그리고 곧바로 영상통화를 걸었다.화면이 켜지자 재헌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는 집 서재에 앉아 있었다. 넥타이는 풀었지만 아직 셔츠 차림이었고, 책상 위에는 몇 장의 서류가 펼쳐져 있었다.“안 자고 뭐 해요?”유리가 물었다.“일 조금 정리하고 있었습니다.”“또 일해요?”“이제 끝났습니다.”“거짓말.”재헌이 웃었다.“정말입니다.”유리는 화면 속 그의 얼굴을 한동안 바라봤다. 불과 하루 전까지는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화면 너머에 있었
파리에 도착한 첫날, 한유리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덜 낭만적인 모습으로 새로운 도시와 마주했다.비행기에서 제대로 잠들지 못한 탓에 눈은 뻑뻑했고, 장시간 앉아 있었던 다리는 묵직했다. 입국심사를 마치고 수하물 두 개를 찾아 공항 밖으로 나왔을 때는 커피보다 따뜻한 물 한 잔이 더 간절했다. 공항 픽업 담당자는 유리의 이름이 적힌 태블릿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고, 그녀는 서툴지 않은 프랑스어로 인사를 건넨 뒤 차량에 올랐다.차창 밖으로 파리의 풍경이 흘러갔다. 낮은 건물과 오래된 석조 외벽, 좁은 발코니와 가로수들이 이어졌다. 관광객이었을 때는 그 모든 것이 특별해 보였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앞으로 이곳에서 출근하고 장을 보고 세탁소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자 아름다운 풍경 사이로 생활에 필요한 것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어느 골목에 슈퍼마켓이 있는지, 지하철역은 얼마나 가까운지, 밤늦게 돌아와도 길을 찾기 어렵지 않을지 같은 것들.유리는 창밖을 보다가 휴대전화를 켰다. 한국은 이미 늦은 밤이었다. 재헌에게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보내려던 순간, 화면에 먼저 알림이 떠 있었다.재헌: 비행기 도착한 것 확인했습니다. 입국심사 끝나면 연락하십시오.유리는 웃었다. 도착 예정 시간을 확인하고 있었을 모습이 쉽게 상상됐다. 자신에게 빨리 답장하라고 재촉하지 않으면서도 비행기 도착 여부만큼은 확인했을 것이다.유리: 입국심사 끝났어요. 지금 숙소 가는 중.메시지를 보내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려는데 곧바로 답장이 왔다.재헌: 무사히 도착해서 다행입니다. 많이 피곤합니까?유리: 엄청요. 지금 얼굴 보면 놀랄걸요.재헌: 보고 판단하겠습니다.유리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유리: 영상통화는 안 돼요.재헌: 아직 요청하지 않았습니다.유리: 요청할 것 같아서 미리 말했어요.잠시 뒤 답장이 왔다.재헌: 그럼 숙소 도착하면 물부터 마시고 쉬십시오. 내일 연락해도 됩니다.유리는 그 문장을 한동안 바라봤다. 보고 싶다는 말이 먼저 나올 줄 알았는데 재헌
유리는 알람이 울리기 삼십 분 전에 눈을 떴다.처음에는 자신이 왜 이렇게 일찍 깨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희미한 새벽빛도 평소와 같았고, 침대 옆에서 느껴지는 체온도 익숙했다. 재헌은 아직 잠들어 있었다. 한쪽 팔은 유리의 허리 아래에 놓여 있었고, 다른 손은 베개 옆에 느슨하게 펼쳐져 있었다. 유리는 잠시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침대 맞은편에 세워둔 캐리어를 발견했다.아.오늘이구나.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가슴이 조금 내려앉았다. 어제까지는 출국을 앞두고 있다는 생각을 했지만, 오늘은 정말 비행기를 타야 했다. 몇 시간 뒤면 이 방을 나서고, 공항으로 향하고, 여권과 탑승권을 내밀어야 한다. 그렇게 익숙한 풍경들을 하나씩 지나면 어느 순간 서울은 비행기 창밖으로 멀어질 것이다.유리는 조심스럽게 몸을 돌렸다. 재헌을 깨우지 않으려던 것이었는데 허리에 놓인 팔에 힘이 들어왔다.“어디 갑니까.”잠이 덜 깬 목소리였다.유리는 고개를 돌렸다. 재헌은 눈도 제대로 뜨지 않은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 회사에서 보던 단정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앞머리는 조금 흐트러져 있었고, 목소리는 낮게 잠겨 있었다. 유리는 그 얼굴을 보자 괜히 웃음이 났다.“화장실.”“몇 시입니까?”“여섯 시 조금 넘었어요.”“아직 시간 있습니다.”“알아요.”재헌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팔을 풀었다. 유리는 침대에서 내려오려다가 다시 멈췄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재헌의 품으로 들어갔다.“왜요?”그가 물었다.“그냥.”유리는 그의 가슴에 이마를 기댔다.“조금만 더.”재헌은 대답 대신 이불을 끌어올려 그녀의 어깨를 덮어주었다. 유리는 그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어젯밤에는 오늘 아침이 오면 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아침이 되니 눈물보다 이상한 평온함이 먼저 찾아왔다. 어쩌면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아서일 수도 있었다.“재헌 씨.”“네.”“나 오늘 진짜 가요.”“알고 있습니다.”“당신은 안 가고.”“네.”유리는
출국까지 여덟 날이 남은 아침, 유리는 파리에서 온 메일을 읽다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유럽 테스트 론칭을 위한 광고 문구의 사전 소비자 반응 조사 결과였다. 세아가 제안했던 **Closer is a choice.**는 가장 높은 즉각 구매 의향을 기록한 문구는 아니었다. 오히려 ‘거부할 수 없이 가까워지는 향’이라는 표현을 조금 순화한 다른 후보가 첫인상 평가에서는 더 높은 점수를 받았다. 하지만 제품 설명을 읽은 뒤의 이해도와 향을 직접 맡은 뒤의 만족도에서는 결과가 달랐다. 세아의 문구를 본 소비자들이 향의 전개를 더 정확하게 이해했고, 자신이 예상했던 향과 실제 향 사이의 차이도 적게 느꼈다.유리는 자료를 끝까지 읽은 뒤 세아에게 전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맞은편 자리에서 키보드 소리가 빨라졌다. 세아는 결과표를 확대하고, 국가별 응답 차이를 확인하고, 정성 평가 문장들을 따로 추출했다. 유리는 그런 세아를 힐끗 바라보다가 다시 자기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렸다. 예전 같으면 같은 자료를 나란히 펼쳐놓고 누가 먼저 문제를 찾아내는지 경쟁하듯 이야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유리는 자신에게 필요한 부분만 확인했다. 마지막까지 모든 자료를 함께 검토하는 것이 좋은 인수인계라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십오 분쯤 지났을 때 세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선배, 잠깐 봐주세요.”유리는 의자를 돌렸다. 세아는 태블릿을 들고 와 결과표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프랑스와 독일의 응답에서는 ‘선택’이라는 단어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이탈리아 테스트 그룹에서는 문장이 지나치게 이성적이고 향수 광고답지 않다는 평가가 일부 있었다. 세아는 그 차이를 설명한 뒤, 국가마다 완전히 다른 문구를 쓰는 대신 메인 카피는 유지하고 보조 설명만 현지화하는 방안을 제안했다.“그렇게 하면 콘셉트는 지키면서도 표현의 온도는 조절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다만 이탈리아 쪽은 재테스트를 한번 더 해야 할 것 같고요.”“비용은?”“브랜드팀이랑 확인했어요. 기존 예산 안에서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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