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사람의 손목을 잡고 목 가까이 다가가는 건 조향사 한유리에게 그저 일이다. 하지만 메종 르비에의 신임 총괄이사 권재헌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다. 창립 20주년 향수 〈BORDERLINE〉을 함께 개발하게 된 두 사람. 유리가 아무렇지 않게 그의 넥타이를 잡아당길 때마다 재헌의 경계는 흔들리고, 급기야 유리의 전 남자친구까지 광고 모델로 합류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누구에게나 거리낌 없이 다가가던 유리가 어느 순간부터 재헌 앞에서만 물러서기 시작한다. “왜 피합니까?” “안 피해요.” “선을 먼저 넘은 건 조향사님이잖습니까.” 향으로 시작된 경계가 사랑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View More처음 만난 남자의 넥타이를 잡아당기는 데는 정확히 삼십 분이면 충분했다.
물론 한유리에게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잠깐만요.” 회의실을 빠져나가려던 남자의 걸음이 멈췄다. 유리는 테이블 위에 흩어진 시향지 가운데 하나를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전까지 한 시간 가까이 이어졌던 회의 탓에 테이블 위에는 노트북과 태블릿, 반쯤 식은 커피, 수십 장의 시향지가 뒤섞여 있었다. 베르가못과 네롤리, 시더우드와 베티버. 여러 향이 공기 중에서 복잡하게 엉킨 탓에 평소라면 벌써 창문부터 열었을 공간이었다. 하지만 지금 유리의 관심은 그 어느 향료에도 없었다. 문 앞에 선 남자에게 있었다. 오늘 처음 만난 메종 르비에의 신임 총괄이사. 권재헌. 검은 슈트에 흐트러짐 없이 채운 셔츠, 지나치게 반듯해서 오히려 냉정해 보이는 넥타이까지. 오전 아홉 시부터 지금까지 두 시간 넘게 회의를 했는데도 처음 들어왔을 때와 달라진 게 거의 없었다. 딱 하나. 향이 달라졌다. 유리는 가늘게 눈을 좁혔다. “권재헌 이사님.” “말씀하시죠.” “혹시 향수 쓰세요?”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재헌은 곧바로 대답했다. “안 씁니다.” “정말요?” “향수를 담당하는 회사의 총괄이사가 향수를 안 쓰는 게 문제가 됩니까?” “아뇨. 오히려 좋아서요.” 재헌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유리는 그 표정을 보지 못했다. 이미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회의 초반에는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아주 희미한 향이 느껴졌다. 향수처럼 완성된 향은 아니었다. 우디 계열이라고 단정하기에도 애매했다. 종이 냄새와 커피, 셔츠에 밴 세제 향 사이로 아주 옅게 남아 있는 체향. 이상한 건 그다음이었다. 그 향이 꽤 좋았다. “손 좀 주실래요?” 재헌이 아무 말 없이 유리를 바라봤다. “손이요.” 유리가 제 손을 내밀어 보였다. “손목이면 더 좋고요.” “…….” “왜요?” “한유리 조향사님.” “네.” “첫 회의가 끝난 지 삼 분도 안 됐습니다.” “알아요.” “그런데 제 손목을 달라고 하시는 겁니까?” “네.” 유리는 조금도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대신 고개를 기울였다. “제가 이상한 부탁 했나요?” 잠깐의 침묵. 재헌은 자신을 바라보는 여자의 얼굴에서 장난기를 찾으려 했다. 없었다. 한유리는 진심이었다. “이사님한테서 조금 전에는 없던 향이 나서요.” “향이요?” “네. 향수는 아니고.” 유리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의 목 아래로 떨어졌다. 셔츠 칼라가 닿은 자리에서 다시 손목으로 이동했다. “체향 같은데.” 그제야 재헌은 이 여자가 왜 자신을 붙잡았는지 이해했다. 동시에 이해했다고 해서 상황이 덜 이상해지는 건 아니라는 사실도 알았다. “확인해야 합니까?” “가능하면요.” “싫다고 하면?” “어쩔 수 없죠.” 유리는 미련 없이 대답했다. “허락 없이 만질 수는 없으니까.” 재헌의 시선이 잠시 그녀에게 머물렀다. 그러다 결국 오른손을 내밀었다. “짧게 하시죠.” “네.” 유리는 자연스럽게 그의 손목을 잡았다. 그 순간이었다. 재헌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자신의 손목 안쪽을 감싸고 있었다. 악수할 때조차 필요 이상으로 상대에게 닿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그에게는 낯선 접촉이었다. 반면 유리는 태연했다. 조금도 긴장하지 않은 얼굴로 그의 손목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왔다. 재헌의 미간이 아주 조금 좁아졌다. 생각했던 것보다 가까웠다. 유리의 머리카락 끝이 그의 손등을 스쳤다. 희미하게 샴푸 향이 났다. 그녀가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따뜻한 숨결이 손목 피부에 닿았다가 사라졌다. 한 번. 그리고 다시 한 번. 유리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여기는 아니네.” “…….” “잠깐만요.” 손목을 놓은 유리가 이번에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재헌이 그녀를 내려다봤다. “이번엔 뭡니까?” “셔츠요.” “셔츠 어디.” “칼라 쪽이요.” “…….” 유리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목 부근을 가리켰다. “여기.” 재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유리는 그것을 거절이라고 생각했다. “불편하시면 안 해도 돼요. 그냥 제가 잘못 맡은 걸 수도 있으니까.” 그러고는 정말 물러나려고 했다. 그 순간 재헌이 말했다. “하십시오.” “네?” “확인하고 싶다면서요.” 유리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 “그럼 잠깐만요.” 그리고 정말 잠깐이었다. 적어도 유리에게는. 그녀는 그의 재킷 라펠을 손끝으로 살짝 밀어냈다. 셔츠 깃 근처에서 향을 확인하려 했지만 남자가 너무 컸다. 구두 굽을 포함해도 머리 하나 가까이 차이가 났다. 유리는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 가장 간단한 방법을 선택했다. 재헌의 넥타이를 잡았다. 그리고 아래로 당겼다. “…….” 재헌의 상체가 아주 조금 앞으로 기울었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아졌다. 유리는 여전히 아무렇지 않았다. “조금만 숙여주세요.” “지금도 충분히 숙여진 것 같은데요.” “조금만 더요.” 재헌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지만 유리는 이미 그의 셔츠 깃 근처로 얼굴을 가져간 뒤였다. 아주 가까운 거리. 재헌은 움직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유리의 관자놀이에 입술이 닿을 것처럼 가까웠다. 그녀의 손가락은 아직 자신의 넥타이를 쥐고 있었다. 그 상태로 유리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아.”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여기네요.” “뭐가 말입니까.” “아까 그 향.” 유리가 한 번 더 향을 확인했다. “시더우드 같기도 하고…… 아니, 그것보다 조금 더 따뜻한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목소리가 멈췄다. 그제야 유리는 이상한 걸 느꼈다. 향이 아니라 시선이었다. 고개를 들었다. 권재헌과 눈이 마주쳤다. 가까웠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하지만 놀란 건 유리뿐이었다. 재헌은 처음부터 그 거리를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 맡았습니까?” 낮은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떨어졌다. “……네.” “그럼.” 재헌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유리의 손도 따라서 내려갔다. 자신의 손가락이 여전히 그의 넥타이를 쥐고 있었다. “이건 놔주시죠.” “아.” 유리가 황급히 손을 놓았다. 넥타이가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죄송해요.” “괜찮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재헌은 직접 넥타이 매듭을 고쳐 잡았다. 유리는 그 모습을 보다가 물었다. “많이 불편하셨어요?” “조금.” “미리 말씀하시지.” “말할 시간이 있었습니까?” “있었죠.” “제 넥타이를 잡기 전에 물어봤습니까?” “…….” 유리가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니 그건 그랬다. 손목은 허락을 받았다. 셔츠도 허락을 받았다. 그런데 넥타이는 자연스럽게 잡아당겼다. “그건 죄송해요. 습관이라.” “습관.” 재헌이 그 단어를 천천히 반복했다. 이상하게도 마음에 들지 않는 단어였다. “다른 사람에게도 이럽니까?” “뭘요?” “방금 같은 행동.” 유리는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향 확인하는 거요?” “사람을 잡아당기고 이렇게 가까이 오는 것 말입니다.” “아.” 그제야 알아들은 유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답이 너무 빨랐다. 재헌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달라졌다. “누구에게나?” “필요하면요.” “남자한테도?” “네.” “…….” “여자한테도 하고요.” 재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리는 조금 이상하다는 듯 그를 바라봤다. “왜요?” “아닙니다.” “불편하시면 앞으로 이사님한테는 먼저 물어볼게요.” “다른 사람한테도 물어보는 게 맞는 것 아닙니까?” “당연히 물어보죠.” “방금 저한테는 안 물어봤는데.” “그러니까 죄송하다고 했잖아요.” 유리가 웃었다. 재헌은 웃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유리는 다시 테이블 쪽으로 돌아가 조금 전 사용했던 시향지를 집었다. 종이에 남은 향과 기억 속의 체향을 비교하듯 몇 번 향을 맡더니 고개를 저었다. “역시 다르네.” “무엇과 말입니까?” “이거랑요.” 유리가 시향지를 흔들었다. “아까 회의에서 이사님이 별로라고 하셨던 17번 샘플.” “그것과 제 향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베이스가 비슷한 줄 알았어요.” “아니었고요?” “네. 훨씬 다르네요.” 유리는 잠시 생각하다 덧붙였다. “이사님 쪽이 더 좋아요.” 재헌의 손이 멈췄다. 유리는 이미 시향지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런 말을 원래 아무렇지 않게 합니까?” “무슨 말이요?” “제 쪽이 더 좋다는 말.” “향이요.” 유리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향 얘기인데요?” 알고 있었다.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방금 전 그 말은 조금 다르게 들렸다. 재헌은 미간을 눌렀다. 한국에 돌아온 지 사흘. 메종 르비에에 출근한 지 두 시간 삼십삼 분. 그리고 한유리를 만난 지 두 시간 남짓. 그 짧은 시간 안에 벌써 몇 번이나 자신의 페이스가 흐트러졌는지 모르겠다. “한유리 조향사님.” “네.” “이번 프로젝트에 대해서 한 가지 확인하겠습니다.” 유리가 고개를 들었다. 재헌의 표정은 다시 처음 회의실에 들어왔을 때처럼 냉정하게 돌아와 있었다. “오늘 발표한 17번을 최종 후보에서 제외하겠다고 했죠.” “네.” “이유가 뭡니까?” 유리도 금세 업무적인 표정으로 바뀌었다. “좋은 향이지만 르비에의 향은 아니니까요.” “판매 가능성은 높습니다.” “알아요.” “소비자 테스트에서도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습니다.” “그것도 알아요.” “그런데 버리겠다는 겁니까?” “네.” 재헌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감각만으로요?” 유리의 표정에서도 웃음기가 사라졌다. 조금 전까지 그의 넥타이를 잡아당기던 여자와는 완전히 다른 얼굴이었다. “이사님.” “말씀하시죠.”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대답하는 향과 돈을 주고 다시 사고 싶은 향은 달라요.” “그걸 수치로 증명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제가 증명하려고요.” “어떻게.” 유리가 테이블 위에 놓인 프로젝트 자료를 집었다. 표지에는 아직 가제로 적힌 신제품 개발 계획서가 있었다. 창립 20주년 기념 시그니처 퍼퓸 프로젝트. 유리는 검지를 그 위에 올렸다. “처음부터 다시 만들죠.” “일정은 넉 달입니다.” “충분해요.” “기존 샘플을 전부 폐기하고?” “네.” “지금까지 들어간 개발비가 얼마인지 압니까?” “압니다.” “그런데도요?” “그러니까 더 이상 돈을 낭비하면 안 되죠.” 재헌의 눈이 가늘어졌다. 유리는 피하지 않았다. “20주년이라고 과거의 르비에를 예쁘게 포장해서 병에 담는 건 싫어요. 앞으로 르비에가 어떤 브랜드가 될 건지를 보여주는 향이어야죠.” “추상적이군요.” “향은 원래 추상적인 걸 구체적으로 만드는 일이에요.” 이번에는 재헌이 대답하지 못했다. 유리는 자료를 그의 앞에 내밀었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벌써 조건까지 겁니까?” “이사님도 방금 제 방식에 조건 걸었잖아요.” “그건 업무 방식에 대한 지적이었습니다.” “저도 업무 얘기예요.” 유리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번 프로젝트, 저한테 완전히 맡겨주세요.” “불가능합니다.” 즉답이었다. 유리가 눈을 깜빡였다. “왜요?” “제가 총괄 책임자니까.” “그럼 이사님은 예산이랑 일정 관리하시고.” “상품 전략도 제가 봅니다.” “향은 제가 만들고요.” “시장성이 없으면 통과시키지 않습니다.” “향이 별로면 제가 안 만들어요.” “판매 데이터를 무시하면 중단시키겠습니다.” “조향에 간섭하면 쫓아낼 거예요.” “누구 마음대로요?” “제 조향실에서만요.” 두 사람 사이에 잠깐 정적이 흘렀다. 먼저 웃은 건 유리였다. “우리 안 맞죠?” “놀라울 정도로.”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다행이군요.” “그런데.” 유리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래서 재밌을 것 같은데요.” 재헌의 시선이 손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뭡니까?” “악수요.” “확실합니까?” “이번엔 손목 안 잡아요.” 재헌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손을 잡았다. 이번 접촉은 정상적이었다. 적당한 거리. 적당한 힘. 그리고 몇 초 뒤 자연스럽게 떨어지는 손. 그런데 이상하게도 재헌에게는 조금 전보다 이쪽이 더 신경 쓰였다. 유리는 이미 아무렇지도 않게 자료를 챙기고 있었다. “그럼 내일부터 다시 시작하죠.” “무엇부터 말입니까?” “콘셉트부터요.” “기존 콘셉트는 버리고?” “네.” “생각해 둔 게 있습니까?” 유리가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조금 전 자신과 재헌 사이에 있었던 거리를 떠올렸다. 손목을 잡았을 때. 넥타이를 당겼을 때. 조금만 더 가까워졌으면 서로의 숨이 닿았을 거리. 넘어도 되는 것과 넘으면 안 되는 것 사이. 그 애매한 경계. “경계.” 유리가 말했다. 재헌이 그녀를 바라봤다. “무슨 뜻입니까?” “사람에게는 누구나 선이 있잖아요. 여기까지는 괜찮고, 여기부터는 안 되는 거.” 유리는 손가락으로 테이블 위에 보이지 않는 선을 그었다. “그 선 바로 앞에서 나는 향.” 재헌의 시선이 그 손끝을 따라갔다. “너무 추상적입니다.” “아까 향은 원래 그런 거라고 말씀드렸는데.” “상품명이 필요합니다.” “그것도 지금 생각났어요.” 유리가 펜을 들었다. 프로젝트 계획서 위에 적혀 있던 임시 제목에 두 줄을 그었다. 그리고 그 아래 새로운 단어 하나를 적었다. BORDERLINE. 재헌이 그 글자를 내려다봤다. “경계선.” “네.” “마음에 안 드는데요.” “왜요?” 재헌의 시선이 천천히 올라왔다. 그리고 조금 전 자신의 넥타이를 아무렇지 않게 잡아당겼던 여자를 바라봤다. “이미 누군가가 너무 쉽게 넘는 것 같아서.” 유리가 눈을 깜빡였다. 몇 초 뒤에야 뜻을 알아차렸다. “아.” 웃음이 터졌다. “아직 그거 신경 쓰고 있었어요?” “안 쓰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알았어요. 앞으로 안 그럴게요.” “뭘 말입니까?” “이사님 선 넘는 거.” 재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유리는 그 침묵을 동의로 받아들였다. “그럼 내일부터 잘 부탁드려요, 이사님.” 자료를 품에 안은 유리가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혔다. 혼자 남은 재헌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손을 들어 자신의 넥타이를 만졌다. 한유리가 잡았던 자리였다. 당연히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데 조금 전의 감각만은 이상할 만큼 선명했다. 가느다란 손가락. 짧아진 거리. 목 가까이 닿았던 숨.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자신보다 제 향이 더 좋다고 말하던 목소리. 재헌은 천천히 손을 내렸다. “……조향사라.” 오늘 처음 알았다. 상당히 피곤한 직업이었다. ⸻ 그날 오후. 재헌은 대표이사실에서 르비에의 지난 5년간 실적 자료를 검토하고 있었다. 똑똑. “들어오세요.” 브랜드전략팀장이 들어왔다. “이사님. 오전에 말씀하신 20주년 프로젝트 팀 명단입니다.” 재헌은 서류를 받아들었다. 맨 위에 한유리의 이름이 있었다. 수석 조향사 한유리. 그 아래에는 프로젝트 참여 인력과 협업 부서가 적혀 있었다. 재헌은 빠르게 페이지를 넘기다가 마지막 장에서 멈췄다. 광고 모델 후보군. 국내외 배우와 모델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중 가장 높은 선호도를 받은 이름. 차선우. “이 배우가 현재 1순위입니까?” “네. 브랜드 조사에서도 반응이 가장 좋았습니다. 특히 한유리 조향사와도 개인적인 친분이 있어서 촬영이나 향 테스트 협조가 쉬울 것 같습니다.” 재헌의 손이 멈췄다. “개인적인 친분?” “아.” 팀장이 잠깐 망설였다. “예전에 두 분이 교제했다고 들었습니다.” 재헌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누구와 누가요?” “한유리 조향사하고 차선우 씨요.” 짧은 침묵. 재헌은 다시 서류를 내려다봤다. 차선우. 32세. 배우. 그리고 한유리의 전 남자친구. 별로 중요한 정보는 아니었다.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었다. 프로젝트에 적합하면 쓰면 된다. 재헌은 그렇게 생각하며 다음 장을 넘기려 했다. 그러다 문득 오전의 대화가 떠올랐다. 다른 사람에게도 이럽니까? 네. 남자한테도? 네. 여자한테도 하고요. 재헌의 손가락이 페이지 모서리에서 멈췄다. “팀장님.” “네, 이사님.” “향 테스트할 때 조향사가 모델에게 직접 접촉하는 경우가 많습니까?” “네?” 뜬금없는 질문에 팀장이 눈을 깜빡였다. 재헌은 무표정했다. “업무상 확인하는 겁니다.” “아…… 경우에 따라서는요. 피부 발향을 봐야 할 때도 있으니까요.” “손목을 잡고.” “그렇죠.” “목 가까이 가기도 하고.” “그럴 수도 있습니다.” “넥타이도 잡아당깁니까?” “……네?” 재헌이 입을 다물었다. 팀장의 표정이 묘해졌다. “아닙니다.” “네.” “나가보세요.” 팀장이 조심스럽게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자 재헌은 서류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처음으로 아주 사소하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생각을 했다. 차선우가 모델이 되면. 한유리는 그 남자에게도 그렇게 가까이 갈까. 손목을 잡고. 목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필요하면 넥타이까지 잡아당기면서. 재헌의 미간이 서서히 좁아졌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아주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날 권재헌은 아직 몰랐다. 선을 넘지 말라고 가장 먼저 말한 사람이, 결국 그 선을 가장 많이 넘게 되리라는 것을. 그리고 한유리 역시 몰랐다. 누구에게나 아무렇지 않게 가까이 갈 수 있었던 자신이, 언젠가 단 한 사람의 손길 앞에서만 도망치게 되리라는 것을. 두 사람 사이에 그어진 경계는 아직 선명했다. 그러니 지금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 선의 이름이 곧, 사랑이 될 거라는 것을.“누가 들어온 거지.”유리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휴대전화 화면에는 여전히 자신의 이름이 떠 있었다.USER : HAN.YURI18:42:16BORDERLINE_MASTER_1.0PRINT : 1 COPY몇 번을 다시 봐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볼수록 기분이 이상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오늘은 좋은 것들로만 가득한 하루였다. 처음으로 회사 밖에서 재헌과 손을 잡았고, 별다른 목적도 없이 거리를 걸었고, 카페에 앉아 파리와 미래에 관해 이야기했다.그런데 이제 가장 선명하게 남는 숫자는 18시 42분이었다.재헌이 휴대전화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세아 씨는 아직 회사에 있습니까?”“네. 아카이브 확인하다가 발견한 것 같아요.”“혼자고요?”“아마도요.”재헌의 손이 곧바로 기어 쪽으로 향했다.유리가 그를 바라봤다.“회사로 가려고요?”“가야 합니다.”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유리는 잠깐 입술을 다물었다. 조금 전까지 데이트하던 남자와 지금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같은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차가워진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감정 때문에 판단이 흔들리지 않도록 일부러 더 단단해진 얼굴이었다.재헌이 시동을 걸기 전 유리를 돌아봤다.“유리 씨.”“네.”“지금부터는 제가 몇 가지를 물어볼 겁니다.”유리의 손끝이 미세하게 굳었다.재헌은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당신을 의심해서가 아닙니다.”“알아요.”대답했지만 목소리가 조금 딱딱했다.재헌은 바로 출발하지 않았다.“정말 압니까?”유리가 그를 봤다.“아까 제가 아니라고 했을 때 바로 믿어줬잖아요.”“그건 지금도 같습니다.”“그런데요?”“믿는 것과 조사하는 것은 다른 문제니까.”그 말이 정확해서 유리는 오히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재헌은 시선을 잠깐 화면으로 내렸다가 다시 그녀에게 돌렸다.“제가 당신을 믿는 것과 회사가 이 기록을 확인해야 하는 건 별개입니다. 오히려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제가 먼저
퇴근 시간보다 십오 분 먼저.한유리는 시계를 세 번째 봤다.17시 45분.별것도 아닌 숫자였다.평소라면 마무리해야 할 시향 기록이 남아 있으면 여섯 시가 넘든 일곱 시가 넘든 신경 쓰지 않았을 시간.그런데 오늘은 달랐다.오늘은.데이트가 있었다.그 단어 하나 때문에 평범한 퇴근 시간이 이상하게 특별해졌다.유리는 작업대 위에 놓인 마지막 시향지를 들었다.B-9.이제는 더 이상 B-9라고 부를 필요도 없었다.오늘 오후 회의에서 최종 확정된 〈BORDERLINE〉 마스터 포뮬러.첫 향에서는 베르가못과 쁘띠그랭의 차가운 초록빛이 열리고, 바이올렛 리프가 경계를 세운 뒤 아이리스가 그 선을 부드럽게 흐렸다. 마지막에는 시더우드와 아주 얇은 앰버, 피부 가까이에서만 살아나는 머스크가 남았다.멀리서는 차갑고.가까이 갈수록 따뜻한 향.유리는 시향지를 내려놓으며 아주 작게 웃었다.이 향을 만들기 시작했을 때는 몰랐다.결국 자신과 권재헌의 관계를 닮게 될 줄은.“선배.”옆에서 세아의 목소리가 들렸다.유리는 바로 표정을 정리했다.“왜.”“지금 웃었죠?”“안 웃었어.”세아는 노트북 화면 너머로 유리를 빤히 바라봤다.“요즘 선배가 제일 많이 하는 말이 그거예요.”“뭐.”“안 웃었다. 안 피했다. 안 빨갛다.”유리는 펜을 내려놓았다.“윤세아.”“네.”“퇴근 안 해?”“해야죠.”세아가 일부러 시계를 봤다.“근데 오늘은 선배가 더 급해 보여서.”“안 급해.”“오늘 데이트죠?”유리의 손이 잠깐 멈췄다.세아가 바로 웃었다.“맞네.”“목소리 낮춰.”“아무도 없어요.”“그래도.”세아가 의자에서 몸을 조금 당겨 앉았다.“어디 가는데요?”“몰라.”“네?”“그냥 저녁 먹고 걷고 커피 마시기로 했어.”세아의 표정이 순간 묘해졌다.유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왜.”“아니.”“말해.”“생각보다.”세아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엄청 평범해서.”유리의 눈썹이 올라갔다.“데이트가 원래 그런 거 아니야?”“이사
사귀기로 한 다음 날.한유리는 출근길부터 이상했다.정확히 말하면 모든 게 전날과 똑같은데 자신만 달라져 있었다.같은 길.같은 엘리베이터.같은 사원증.같은 조향실.그런데.권재헌이 이제 남자친구였다.남자친구.유리는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다가 괜히 입술을 꾹 눌렀다.아직도 그 단어가 낯설었다.어제 분명히 키스했고.좋아한다고 말했고.사귀기로 했다.심지어 비밀 연애 기간까지 정했다.그런데 자고 일어나니 갑자기 모든 게 꿈 같았다.휴대전화가 울렸다.유리는 화면을 내려다봤다.권재헌.이름만 떠도 심장이 반응했다.메시지는 짧았다.— 출근했습니까.유리는 잠깐 고민하다 답했다.— 지금 엘리베이터예요.몇 초 뒤.— 몇 층.유리는 눈을 깜빡였다.— 7층 가는 중인데요.— 내리면 기다리십시오.유리의 손이 멈췄다.왜.그 말을 묻기도 전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문이 열렸다.그리고.바로 앞에 권재헌이 서 있었다.유리는 거의 반사적으로 멈췄다.재헌은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이었다.짙은 슈트.단정한 넥타이.완벽하게 회사 사람 같은 모습.그래서 더 이상했다.저 사람이.어제 자기한테 키스한 사람이라고?유리는 순간 그의 입술을 봤다.아차 싶어 바로 시선을 올렸다.재헌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변했다.봤구나.유리는 괜히 헛기침했다.“왜 여기 있어요?”재헌이 주위를 한번 봤다.복도에는 아직 사람이 많지 않았다.“기다리라고 했잖습니까.”“그러니까 왜.”“보고 싶어서.”유리의 눈이 커졌다.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마치 오늘 회의가 몇 시냐고 묻는 것처럼.유리는 주변을 급히 확인했다.“회사예요.”“압니다.”“누가 들으면 어떡해요.”“아무도 없습니다.”“있을 수도 있잖아요.”재헌은 유리를 내려다봤다.“어제는 회사 밖에서는 비밀 아니라고 했습니다.”“지금은 안이잖아요.”“복도도 포함됩니까.”“당연하죠.”재헌의 눈썹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유리는 그 표정이 괜히 얄미웠다.
다음에는 누가 방해해도 안 멈출 겁니다.한유리는 그 말을 정확히 스물세 번쯤 떠올린 뒤 세는 걸 포기했다.아침에 눈을 떴을 때 한 번.세수하다가 한 번.화장대 앞에서 립밤을 바르다가 두 번.회사로 가는 택시 안에서는 신호에 걸릴 때마다 생각났다.그리고 지금.조향실 문손잡이를 잡은 채 또 한 번.“미쳤다.”유리는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문을 열어야 했다.평소처럼 안으로 들어가 어제 조정해 둔 샘플을 확인하고, 오전 열 시 회의 전에 최종 시향 후보를 세 개로 줄이면 됐다. 권재헌이 오면 프로젝트 이야기를 하고, 향을 맡기고, 필요한 의견을 받는다.그게 전부였다.그런데 문제는.오늘 그 남자의 얼굴을 보면 어제 일이 떠오를 게 분명하다는 것이었다.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 있던 순간.자신의 등을 막고 있던 문.얼굴을 조금만 들면 닿을 것 같던 거리.그리고.다음에는 안 멈출 겁니다.유리는 손잡이에서 손을 떼었다가 다시 잡았다.“일하자.”문을 열었다.다행히 아무도 없었다.유리는 자신도 모르게 긴 숨을 내쉬었다.안도인지.실망인지.구분하고 싶지 않았다.조향실 안은 이른 시간 특유의 고요함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환기 장치가 낮게 돌아가는 소리와 냉장 보관함의 미세한 진동만 들렸다. 작업대 위에는 어제 마지막으로 조정한 세 개의 샘플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B-7.B-8.B-9.유리는 가운을 입고 머리를 단단히 묶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창문을 조금 열었다.향을 보기 전에는 공간을 비워야 했다.가능하다면 머릿속도.첫 번째 시향지를 집었다.B-7.차가운 베르가못과 쁘띠그랭.선명한 초록빛.십 초.이십 초.이후 아이리스가 올라오고, 시더우드와 머스크가 천천히 따라왔다.유리는 시향지를 코끝에서 떼었다.“아직 빨라.”따뜻해지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선을 넘기 직전의 향이라면 이렇게 쉽게 안심하게 해서는 안 됐다.다가가고 싶고.그런데 조금은 망설여지고.그 망설임 때문에 상대가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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