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기록하면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전하.”엘라는 테오도르의 손에 들린 종이를 바라보았다.“그건 무엇입니까?”테오도르는 종이를 얼른 뒤집었다.“아무것도 아니야.”“아무것도 아닌 걸 왜 숨기십니까?”“숨긴 거 아니야.”“지금 뒤집으셨습니다.”“그냥 손목 운동.”엘라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테오도르도 엘라를 바라봤다.먼저 시선을 피한 건 테오도르였다.“왜 그렇게 봐.”“거짓말을 잘 못하십니다.”“너도 잘 못해.”“저는 지금 거짓말 안 했습니다.”“그게 더 얄미워.”테오도르는 결국 종이를 다시 펼쳤다.거기에는 익숙한 형식의 표가 그려져 있었다.수면 시간.식사량.공부 집중도.검술 훈련.기분.엘라의 눈이 조금 커졌다.“전하도 기록하십니까?”“응.”“왜요?”“아버지가 해보래.”“황제 폐하께서요?”“요즘 내가 피곤해 보인대.”엘라는 테오도르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눈 밑에 아주 옅은 그늘.평소보다 조금 무거운 눈꺼풀.“정말 피곤해 보이십니다.”“왜 이제 말해?”“오늘 처음 자세히 봤습니다.”“맨날 그렇게 사람 얼굴 보면서.”“전하는 너무 자주 봐서 오히려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테오도르가 잠시 멈췄다.“그게 무슨 말이야?”“늘 보면 작은 변화는 놓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엘라는 자신의 신성력 기록 수첩을 꺼냈다.“저도 처음에는 검은 점만 기록했습니다.”“응.”“그런데 교수님께서 주변 상황도 같이 적으라고 하셨습니다.”“그래서?”“그랬더니.”엘라는 수첩을 펼쳤다.수면 부족 없음.신성력 사용량 평소와 같음.전령통 오염 근처에서만 검은 점 확인.“조금씩 보이는 게 생겼습니다.”테오도르는 자신의 종이를 내려다보았다.“그럼 나도 뭘 알 수 있어?”“기록해 봐야죠.”“귀찮아.”“저도 그렇습니다.”“너는 잘 쓰잖아.”“잘 쓰는 것과 귀찮지 않은 건 다릅니다.”테오도르는 펜을 들었다.첫 번째 줄.어제 수면 시간 — 여섯 시간.엘라가 바로 말했다.“적습니다.”“보통 이 정도 자.”“아홉 살 때는 여
最終更新日: 2026-08-14
Chapter: 기다리는 것과 내버려두는 것은 다릅니다“오늘 수업은 취소됐습니다.”에드먼드 교수의 말에 교실 안이 조용해졌다.세드릭이 가장 먼저 물었다.“왜요?”“황궁 사정 때문입니다.”“무슨 일인데요?”“알려드릴 수 없습니다.”아이들의 표정이 동시에 시무룩해졌다.엘라는 교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어제보다 더 피곤해 보였다.눈 밑의 그늘도 짙었다.하지만 이번에는 바로 묻지 않았다.교수는 말할 수 없다고 했다.그러면 기다리면 된다.다만.“교수님.”“왜요?”“저희가 알아야 할 때가 오면 알려주십니까?”에드먼드 교수의 시선이 엘라에게 향했다.잠시 뒤.그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하겠습니다.”엘라도 고개를 끄덕였다.그것으로 충분했다.적어도 지금은.아이들은 갑자기 생긴 자유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세드릭은 곧장 훈련장을 가자고 했고.에런은 도서관을 원했다.릴리안은 과제를 끝내고 싶어 했다.노아는 마구간에 가야 한다고 했다.“다 따로 가면 되잖아.”테오도르가 말했다.세드릭이 그를 바라보았다.“같이 놀면 안 됩니까?”“뭘 하고 싶은데?”“검술 대련이요.”에런의 얼굴이 바로 굳었다.“저는 싫습니다.”“그럼 구경해.”“그것도 싫습니다.”세드릭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왜?”“재미없으니까.”“검술이 어떻게 재미없어?”“책 읽는 게 더 재밌어.”“그게 어떻게 재미있어?”둘의 표정이 동시에 심각해졌다.엘라는 한숨을 내쉬었다.“좋아하는 게 다를 수 있습니다.”세드릭이 말했다.“그래도 다 같이 놀고 싶습니다.”그 말에 에런도 조금 망설였다.“저도 같이 있는 건 싫지 않습니다.”“그럼 뭐 하지?”릴리안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정원 미로는요?”아이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황궁 서쪽 정원에는 낮은 생울타리로 만든 작은 미로가 있었다.어른들에게는 별것 아니었지만.아이들에게는 충분히 복잡했다.세드릭의 눈이 빛났다.“누가 먼저 나오는지 내기하자.”“또 순위입니까?”엘라가 물었다.“내기가 있어야 재미있잖
最終更新日: 2026-08-14
Chapter: 미움받아도 해야 하는 말이 있습니다“공녀님이 싫습니다.”교실이 조용해졌다.엘라는 눈을 깜빡였다.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다.하지만 맞았다.맞은편에 앉아 있던 소녀는 분명히 말했다.“공녀님이 싫습니다.”그 말은 또렷했고.꽤 진심이었다.엘라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옆자리의 테오도르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지금 뭐라고 했어?”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소녀의 얼굴이 순간 굳었지만.이번에는 물러나지 않았다.“황태자 전하께 말씀드린 게 아닙니다.”“그래도 들었어.”“전하.”엘라가 테오도르의 소매를 잡았다.“잠깐만요.”테오도르가 그녀를 바라보았다.엘라는 고개를 작게 저었다.테오도르는 입을 다물었다.하지만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소녀의 이름은 릴리안 로제르.열 살.황실 예비교육반에 새로 들어온 아이였다.로제르 후작가의 막내딸.연분홍 머리카락에 커다란 청록색 눈을 가진 아이였다.말수가 많지는 않았지만.항상 수업 준비를 완벽하게 했고.시험에서도 높은 점수를 받았다.문제는 오늘 아침에 시작됐다.“답을 베꼈습니다.”엘라가 말했다.릴리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수업이 시작되기 전.아이들에게 짧은 과제가 하나씩 주어졌다.제국의 다섯 개 영지 가운데 하나를 고른 뒤.그곳에서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와 이유를 적는 것이었다.정답은 없었다.각자가 이유를 설명하면 되는 문제였다.엘라는 과제를 걷으며 하나씩 읽었다.세드릭은 서부의 도로 문제.노아는 북부의 말 사육 환경.에런은 남부 항구의 물류 문제를 골랐다.그리고 릴리안.그녀가 선택한 것은 동부였다.동부의 가장 큰 문제는 광산 노동자의 안전이다.붕괴 사고가 잦기 때문에 마력 탐지 장치를 추가해야 한다.좋은 답이었다.다만.엘라는 그 문장을 어제 읽은 적이 있었다.황실 교육청에서 참고자료로 나누어 준 논문.한 관리가 동부 광산 문제를 분석하며 쓴 문장과 거의 똑같았다.단어 순서까지.“제가 왜 베꼈다고 생각하십니까?”릴리안이 물었다.엘라는 논문과 과제를 나란히 놓았
最終更新日: 2026-08-14
Chapter: 알려주지 않는 것도 답일까요황궁은 이상하게 조용했다.평소와 같은 아침이었다.복도를 오가는 시종들.정원에서 가지를 다듬는 정원사.멀리서 들려오는 기사들의 훈련 소리.모든 것이 평소와 같아 보였다.그런데도 엘라는 느꼈다.무언가 다르다는 것을.“전하.”“응?”테오도르가 책에서 고개를 들었다.“오늘 황제 폐하께서 안 오셨습니다.”“원래 아침 수업에는 안 오시잖아.”“하지만 복도를 지나가실 때 한 번쯤은 보십니다.”“그랬나?”“네.”엘라는 창밖을 바라보았다.황제의 집무실이 있는 본궁 쪽.아직 이른 시간이었지만 창문 여러 개에 불이 켜져 있었다.밤새 꺼지지 않은 것처럼.“그리고 기사님들도 많아졌습니다.”테오도르도 그제야 창밖을 보았다.평소보다 경비 인원이 많았다.본궁과 동쪽 별궁 사이.둘을 연결하는 회랑 곳곳에 황실 기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무슨 일 있나?”“모르겠습니다.”엘라는 책상 위에 놓인 신성력 기록 수첩을 바라보았다.지난 며칠 동안 검은 점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그런데 황궁의 분위기는 점점 무거워졌다.북부에서 전령조가 온 뒤부터였다.“전하께서는 아무것도 못 들으셨습니까?”테오도르가 잠시 입술을 다물었다.“조금.”“무엇을요?”“북부가 안 좋대.”엘라가 고개를 들었다.“어떻게요?”“거기까진 몰라.”“왜요?”“아버지가 지금은 그것만 알면 된다고 했어.”엘라는 잠시 테오도르를 바라보았다.예전의 테오도르라면 분명 화를 냈을 것이다.‘왜 나는 못 알아?’‘황태자인데?’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조금 답답해 보이긴 했지만.그것을 억지로 숨기지도 않았다.“괜찮으십니까?”엘라가 물었다.“뭐가?”“궁금하지 않습니까?”“궁금하지.”“그런데 안 물어보십니까?”“물어봤어.”“그런데요?”“지금보다 상황이 나빠지면 알려준대.”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기다리시는군요.”테오도르는 책 모서리를 만지작거렸다.“응.”“잘하십니다.”“근데 싫어.”“무엇이요?”“기다리는 거.”엘라가 피식 웃었다.“저도 잘 못
最終更新日: 2026-08-13
Chapter: 같은 방법이 모두에게 맞지는 않습니다“오늘은 제가 수업을 맡습니까?”엘라는 교실 앞에 서서 에드먼드 교수를 바라보았다.교수는 평소처럼 책을 펼친 채 대답했다.“절반만.”“절반이요?”“문제를 내는 것은 제가 합니다.”“그럼 저는요?”“아이들이 해결하도록 돕는 겁니다.”엘라는 잠시 생각했다.“지난번과 비슷하군요.”“비슷하지만 다릅니다.”“어떻게요?”“오늘은 아이들마다 다른 문제가 주어질 테니까요.”엘라의 눈이 조금 커졌다.교실 안에는 지난번보다 많은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노아.세드릭.에런.그리고 새로 들어온 아이들까지.총 여덟 명.테오도르는 맨 뒤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이번에도 관찰자였다.정확히는 황태자 교육의 일부라는 이유로 빠져나가지 못한 상태였다.그는 턱을 괴며 작게 중얼거렸다.“또 엘라가 선생이네.”엘라가 뒤를 돌아보았다.“전하께서도 학생입니다.”“나는 황태자야.”“그 말로 빠져나갈 수 있는 수업은 없는 것 같습니다.”에드먼드 교수가 지휘봉으로 책상을 두드렸다.“두 분.”둘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교수는 아이들 앞에 여덟 개의 작은 상자를 내려놓았다.“오늘의 수업은 간단합니다.”아이들의 시선이 상자로 향했다.“각자 한 개씩 선택하십시오.”세드릭이 가장 먼저 상자를 집었다.노아는 조금 뒤에.에런은 모두가 고른 뒤 남은 것을 조심스럽게 가져갔다.엘라는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교수가 말했다.“상자를 열어보십시오.”딸깍.아이들이 상자를 열었다.안에는 서로 다른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세드릭의 상자에는 짧은 밧줄.노아의 상자에는 작은 나침반.에런에게는 여러 크기의 나무 조각.한 영애에게는 빈 유리병.다른 아이에게는 작은 종.테오도르가 눈썹을 찌푸렸다.“이걸로 뭘 하라는 겁니까?”교수가 칠판에 문장을 적었다.자신의 물건을 이용해 정원 반대편의 깃발에 도착할 것.아이들이 창밖을 바라보았다.별궁 뒤편 정원.그 끝에 붉은 깃발 하나가 꽂혀 있었다.하지만 그 사이에는 작은 장애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最終更新日: 2026-08-13
Chapter: 답을 알려주지 않는 선생님“제가요?”엘라는 자신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에드먼드 교수는 아주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습니다.”“제가 저 아이들을 가르칩니까?”“정확히는 도와주는 겁니다.”“같은 말 아닙니까?”“다릅니다.”“어떻게요?”“가르치는 사람은 답을 줄 수도 있지만.”노교수의 시선이 훈련장 한쪽으로 향했다.“도와주는 사람은 스스로 답을 찾게 해야 할 때도 있으니까요.”엘라는 교수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황궁 동쪽 별궁의 작은 정원.그곳에는 다섯 명의 아이가 앉아 있었다.황실과 가까운 귀족가의 자제들.아카데미 입학 전 황궁 예비 교육을 받는 아이들이었다.나이는 아홉 살에서 열한 살 사이.그중에는 익숙한 얼굴도 있었다.노아.세드릭.그리고 얼마 전 기사단 식당에서 엘라를 보고 인사했던 두 명의 귀족 영애.마지막 한 명은 처음 보는 소년이었다.엘라는 다시 교수에게 물었다.“왜 제가 해야 합니까?”“오늘 수업은 ‘협력’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그래서요?”“공녀가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했습니다.”엘라는 조금 의심스러운 얼굴로 교수를 바라보았다.“저를 시험하시는 겁니까?”에드먼드 교수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왜 그렇게 생각합니까?”“교수님께서는 그냥 시키지 않으십니다.”“…….”“항상 나중에 질문하십니다.”“관찰력이 좋아졌군요.”“역시 시험이군요.”교수는 대답하지 않았다.그게 답이었다.조금 떨어진 벤치에 앉아 있던 테오도르가 피식 웃었다.“걸렸네.”엘라가 그를 노려보았다.“전하께서는 안 하십니까?”“나는 관찰자래.”“편하시겠습니다.”“황태자니까.”“요즘 그 말을 자주 쓰십니다.”“쓸 수 있을 때 써야지.”엘라는 한숨을 쉬었다.하지만 거절하지는 않았다.아이들이 이미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정원 중앙으로 걸어갔다.다섯 명의 아이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공녀님을 뵙습니다.”“앉으셔도 됩니다.”아이들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엘라는 그 앞에 섰다.갑자기
最終更新日: 2026-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