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정은 숨을 쉬기도 힘들었다.어젯밤 유남준이 이지원과 키스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는 그저 메스꺼웠다.차가운 벽을 등진 채, 박민정은 힘껏 유남준을 밀어냈다.유남준은 그저 고양이가 할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바로 자기 외투를 벗어 던졌다.“싫어...”박민정은 그가 뭘 하려는 지 알기에 얼른 거부했다.유남준은 박민정이 좋으면서 말로만 싫다고 하는 줄 알았다.박민정은 조급해져서 눈이 붉어졌다.그리고 그대로 유남준을 힘껏 물어버렸다.유남준은 약간 신음을 흘리더니 믿기 힘들다는 눈으로 박민정을 쳐다보았다.“뭐 하는 거야.”“날 놓아줘요!”박민정의 눈시울이 점점 붉어졌다.유남준은 손을 그녀의 얼굴에 대고 얘기했다.“싫어.”유남준은 박민정의 말을 귓등으로 듣고 계속 키스하려고 했다.어젯밤의 유남준과 이지원도 이랬을까. 그 생각에 박민정은 저도 모르게 유남준의 어깨를 잡고 손톱으로 그를 꼬집었다.하지만 유남준은 전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유남준! 날 놓아달라고요!”유남준은 여전히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이유는 모르겠지만 박민정이 반항하고 벗어나려고 할수록 그는 박민정을 더욱 깊게 새기고 자기 곁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방안이 열기로 후끈거리는 것 같았다.이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유남준이 멈추더니 불쾌한 듯 물었다.“누구야.”문밖에 서 있던 이혜림은 안의 소리를 듣고 얼굴이 붉어졌다. 부럽기도 하고 질투 나기도 했다.“도련님, 어르신이 부르십니다.”이혜림이 붉어진 볼을 만지며 얘기했다.“알았어.”유남준은 품의 박민정을 보더니 옷으로 그녀를 꽁꽁 감싸고 침대에 데려다 놓았다.“잘 쉬어.”해외에서 몇 년간 어떻게 살았길래 몸은 여전히 이토록 허약한 건지.박민정은 이불을 끌어 올리며 창백한 얼굴로 얘기했다.“네.”유남준은 옷을 갈아입고 가지 않고 박민정 앞으로 왔다. 그의 어깨에 박민정이 물었던 상처와 등에 있는 상처들이 선명하게 보였다.하지만 그는 정말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
귓가에 들려오는 조롱 섞인 여자의 목소리에 정신을 번쩍 차린 박민정은 고개를 돌려 이혜림을 바라봤다.반듯한 정장과 달리 훤히 드러난 그녀의 가슴골은 일부러 연출한 듯 자연스러웠고 계란형 얼굴과 얇은 눈썹, 살짝 찌푸린 눈에는 질투심이 가득했다.박민정은 그녀를 몇 번 만난 적이 있다.현실은 집사의 딸에 불과한데 마치 유씨 가문의 사모님처럼 행동하는 그 모습이 뇌리에 박혔었다.이혜림은 박민정이 대답이 없자 보청기를 착용하지 않은 줄 알고 제멋대로 행동하더니 바닥에 놓인 옷을 발로 차며 모욕적인 말들을 일삼았다.“정말 뻔뻔하네. 설마 장애인이라는 걸 잊은 건가? 예전에는 순직한 척이라도 하더니 이제는 남자를 유혹하려고 참 애쓰네. 옷차림이...”이혜림은 그녀가 함부로 행동하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있는 듯 바닥에 놓인 럭셔리한 옷들을 보란 듯이 발로 짓밟았다.과거에도 그랬듯이, 여전히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는 박민정을 마음껏 괴롭혀도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오늘날의 박민정은 더 이상 유남준을 위해 모든 것을 참고 견디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닌데 말이다.박민정은 외투를 걸치고 침대에서 내려와 한 걸음 한 걸음 이혜림에게 다가갔다.고개를 든 이혜림은 그녀의 귀에 보청기가 꽂혀 있는 걸 발견하고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렸다.“어머, 듣고 있었네요? 완전히 귀먹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가 봐요?”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박민정은 손을 들었고 곧이어 ‘짝’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이혜림의 뺨을 내리쳤다.갑작스러운 상황에 넋을 잃은 이혜림은 뺨이 얼얼한 채로 멍하니 서 있었다.“감히 날 때려?”박민정도 손이 따끔한 건 마찬가지였다.“때렸어요. 왜요?”화가 치밀어 오른 이혜림은 반격하려고 손을 들었으나 곧바로 박민정에게 손목이 잡혔고 박민정은 또다시 이혜림의 뺨을 후려갈겼다.이혜림은 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겁쟁이가 이렇게 변할 것이라고 결코 예상하지 못했다.하이힐을 신은 채 비틀거리던 그녀는 결국 바닥에 쓰러졌다.“박민정 씨, 그쪽은 이곳에
비록 코트를 입고 있었지만 서늘한 찬바람이 불어오자 여전히 춥게만 느껴졌다.정민기는 주변의 CCTV에 주의를 기울이며 그녀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야윈 모습의 박민정이 나타났고 그는 곧바로 차에서 내려 문을 열어줬다.“고마워요.”박민정은 앞으로 나서며 고맙다고 인사를 전했다.차에 올라탄 정민기는 자상하게 히터를 켰다.박민정이 해외로 나간 이후로 줄곧 옆에서 지켜주며 시간을 보낸 덕분에 자연스레 그녀가 추위를 탄다는 걸 알게 되었다.“어디로 갈까요?”박민정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잠시 생각에 잠겼다.“두원 별장으로 가요.”그녀가 떠났다는 사실은 유남준도 곧 알게 될 것이기에 분명히 여기저기 들쑤시다가 찾아올 게 뻔하다.“알겠습니다.”정민기는 경치가 좋은 길을 택했다.차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던 박민정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입을 열었다.“지난번에 급한 일 있다며 집으로 돌아갔잖아요. 이제는 괜찮아요?”핸들을 꽉 움켜쥔 손과 달리 그의 목소리는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했다.“약혼녀랑 파혼했어요.”그의 말에 박민정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보디가드라는 직업 특성상 그들은 남에게 사적인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 하여 박민정은 그에게 약혼녀가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고, 갑작스럽게 듣게 된 파혼 소식에 당황함을 감추지 못하더니 난처한 기색을 드러내며 물었다.“일 때문인가요?”정민기처럼 책임감 있는 보디가드는 정말 흔치 않다. 그는 박민정이 찾는 한 늘 그녀의 곁을 지켰고 몇 시가 됐든 달려 나왔다.그는 눈을 질끈 감더니 뭔가를 망설이는 듯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대요.”이 말 한마디에 차 안은 쥐 죽은 듯한 정적이 찾아왔다.박민정은 그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죄송해요. 정말 몰랐어요...”하지만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벨이 울렸고 발신자를 확인해 보니 유남준이었다.순간 자신을 홀대하는 유씨 집안 사람들이 떠오른 박민정은 이를 무시한 채 벨소리를 무음으로 설정
부하들은 줄곧 그녀를 미행했으나 정민기가 운전하는 차가 택시여서 별다른 의심 없이 사실대로 말했다.“방금 택시를 탔고 두원으로 향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박민정이 아직 진주에 있다는 사실에 유남준은 긴장된 마음이 조금 풀리기 시작했다.하지만 갑자기 돌아가려는 그녀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왜 두원으로 가는지 알아?”“모르겠습니다.”줄곧 밖에서 뒤를 밟으며 미행하는 그들이 이유를 알 리가 없었다.유남준은 전화를 끊자마자 두원으로 갈 차를 준비했다.두원으로 향하던 중.그는 또다시 박민정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아무도 받지 않았고 다급한 마음에 기사에게 최대한 빨리 운전해달라고 부탁했다.같은 시각, 두원에 도착한 박민정은 정민기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곧바로 별장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멍하니 문 앞에 서 있었다.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며 어깨 위로 가랑비가 내렸고 그녀의 눈빛에서는 심란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얼마 후, 등 뒤로 차 한 대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랜드로버가 그녀를 향해 다가왔고 미처 반응을 하기도 전에 유남준이 달려와 그녀를 품에 꽉 끌어안았다.“왜 전화 안 받아?”박민정의 맑은 두 눈에는 실망이 가득했다.“따지려고 찾아온 거죠?”유남준은 뜬금없었다. 말없이 제멋대로 떠나고 전화도 받지 않았는데 따지는 게 당연한 일이 아닌가?그녀는 유남준을 밀어내더니 비를 맞으며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보름밖에 안 남았으니까 괜히 헛수고하지 말아요.”잔뜩 어두워진 눈빛으로 박민정을 따라 걸음을 옮긴 유남준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그게 무슨 뜻이야?”박민정은 가랑비 사이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왜 한 달 동안 부부로 지내자고 제안했는지 모르겠지만 뭐가 됐든 우리 사이는 변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윤우 돌려주고 이만 헤어져요.”유남준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봤다.“저택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그래? 나 때문에 화난 거야?”그의 손은 조심스럽게 박민정의 차가운
그는 어느새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고 긴 다리를 꼰 채 태연하게 소파에 앉아있었다.아직 마르지 않은 젖은 머리와 또렷한 이목구비는 한눈에 시선을 사로잡았고 심연처럼 깊은 눈동자 속에는 착잡함이 담겨 있었다.“그냥 문 열고 들어왔는데?”여유롭게 말하는 그의 모습에 박민정은 저도 모르게 몸에 두른 가운을 꽉 조였다.“나가요.”유남준은 나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몸을 일으키더니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왜 화난 거야?”아직 이유를 알아내지 못했으니 박민정이 직접 말해주기를 기다렸다.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신경 쓰고 싶지 않은 듯 대충 핑계를 대며 둘러댔다.“아무 일도 아니니까 얼른 나가요. 옷 갈아입을 거예요.”유남준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처음 본 것도 아닌데 왜 그래.”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지만 어쩔 수 없이 유남준을 등지고 옷을 갈아 입었고 그는 다시 소파에 앉았다.시선은 박민정의 매끈한 등을 향했다. 그러다가 몸이 뜨거워지는 듯한 느낌에 재빨리 시선을 거두고 핸드폰을 꺼내 보디가드에게 연락했다.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보디가드에게 메시지가 왔다.[대표님,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한 끝에 알아냈습니다. 이한석 집사님의 딸인 이혜림 씨가 민정 씨를 모욕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어르신께 알리겠다고 협박하면서 유씨 가문에서 나가라고 강요했다고 합니다.]묵묵히 메시지를 읽고 난 후, 그의 살벌한 분위기가 한층 더 짙어졌다.[당장 데리고 와.]문자를 보낸 뒤 핸드폰을 끄고 다시 박민정을 바라봤을 때, 박민정은 이미 옷을 갈아입은 상태였다.“왜 나한테 직접 얘기하지 않는 거야?”그는 자기 아내를 쫓아낸 사람이 유씨 가문의 일개 도우미라는 사실이 크게 신경 쓰이지 않는 모양이다.박민정은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사실대로 얘기하면 믿어줄 거예요?”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유남준과 달리 박민정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내가 한 말을 믿든 안 믿든 그건 남준 씨의 선택이니까 강요하지 않을게요.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알아
“날 뭐로 보는 거야? 내가 우스워?”말을 마친 유남준은 그녀의 답을 듣지도 않은 채 침실을 나섰다.혼자 자리에 남겨진 박민정은 그가 했던 말을 되새기며 어딘가 불안한 듯 몸 둘 바를 몰랐다.이 일을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다는 확신이 들었다. 유남준과 한 달 동안 부부로 지낸다 한들 절대 그녀와 윤우를 놓아줄 사람이 아니었다.이렇게 된 이상 유남준과 얼굴을 붉히며 싸우고 윤우를 데려갈 수밖에 없다.또다시 연지석에게 신세지기 싫었던 박민정은 숨을 깊게 들이쉬면서 마음을 가다듬었고 윤우와 함께 떠날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쿵!아래층에서 유남준이 문을 박차고 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혼자 의자에 앉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유남준이 윤우와의 만남을 허락해야만 단둘이 정림원을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거나 다름없다.도망칠 기회를 얻었다 한들 진주를 벗어나는 것도 큰 산이다.이때 머릿속에 누군가가 떠오른 그녀는 정민기가 준 핸드폰에 낯익은 번호를 입력하고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곧 핸드폰 너머로 익숙한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변호사님, 저 민정이에요.”장명철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정말 민정이니? 살아있었어?”“네.”“그동안 어떻게 지낸 거야?”장명철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그건 나중에 제가 차차 설명해 드릴게요. 일단 저 좀 도와주시겠어요?”장명철은 박민정의 아버지가 생전에 가장 신임했던 변호자이자 진주시에서 꽤 많은 인맥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이다.“그래, 뭐가 됐든 말만 해.”“출국할 신분이 두 개 필요한데 구해주실 수 있나요? 그리고 이 일은 절대 아무에게도 알려서는 안 돼요.”사실 돈으로 얼마든지 주민등록증을 살 수 있지만 직접 사면 유남준이 무조건 의심하기에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언제쯤 필요한데?”“빠르면 빠를수록 좋아요.”“알겠어.”위조 주민등록증을 얻으려면 최소 일주일 이상이 소요되기에 무조건 일주일 내에 윤우를 데려올 방법을 생각해 내야만 한다.전
이한석이 허둥지둥 지하실로 달려갔을 때 유남준은 이미 없었고, 그곳에 남은 건 구석에 숨어서 벌벌 떨며 연신 머리를 조아리는 이혜림뿐이었다. 그는 걱정스럽게 물었다.“혜림아, 왜 그래?”옆에 있던 보디가드가 싸늘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이한석 집사님, 대표님께서 더 이상 혜림 씨를 유씨 가문에 들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오늘부로 당장 진주시를 떠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이한석은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해외로 보낼게요.”마음을 가라앉히고 정신을 차린 이혜림은 이한석의 다리를 붙잡고 간절하게 애원했다.“아빠, 전 떠나고 싶지 않아요.”곧이어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이게 다 박민정 때문이에요...”이한석은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했으나 눈빛만큼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그 시각 별장 밖. 차에 올라탄 유남준은 서다희의 업무 보고를 들으며 옆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연지석 씨의 프로젝트를 제외하면 모든 일이 정상적으로 진행되고 있지만 밑지는 장사인 만큼 주주들 사이에서는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서다희는 눈치를 살피더니 쭈뼛거리며 말했다.유남준이 데이트하느라 자리를 비운 틈에 회사 임원들은 자기가 주인이 된 것처럼 이것저것 꼬투리를 잡으며 면박을 줬다.“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유남준의 질문에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예전이라면 자신 있게 예측했겠지만, 연지석 씨의 뒤를 지키는 그룹들이 워낙 뼈대가 굵어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평범한 외국계 회사라면 유남준의 공격 속에서 반년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을 것이다.하지만 연지석은 무려 5년을 버텼다.물론 유남준도 이를 잘 알고 있었지만, 손해가 두렵지 않은 듯 여전히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계속 진행해. 그 철옹성 같은 장벽이 언제 무너지는지 궁금하네.”그는 연지석이 해외에서 몇 번이나 암살당할 뻔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까지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는 건 뒤에서 지켜주는 세력이 많다는 뜻이기도
박민정은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몸을 살짝 떨었다.그제야 그녀가 잠들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유남준은 흠칫 놀라더니 그대로 행동을 멈췄다.어느새 박민정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잔뜩 고였고, 그가 멈추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깊은 밤.박민정을 품에 안고서도 여전히 잠이 오지 않았던 유남준은 아예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이른 아침, 그녀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유남준은 더 이상 곁에 없었다.어젯밤의 모든 일이 마치 꿈처럼 공허하게 다가왔지만 신경 쓰지 않고 씻으러 갔다.거울 앞에 서서 감정을 추스르려고 애쓰던 박민정은 한참이 지나서야 침실을 나섰고, 서재 앞을 지나며 열린 문틈으로 고개를 돌리자 반듯하게 의자에 앉아있는 유남준이 한눈에 들어왔다.그는 평소의 싸늘함을 되찾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서류를 훑어보고 있었다.순간 계획이 떠오른 박민정은 자존심을 내려놓고 앞으로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무슨 일이야?”유남준은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어제는 내가 실수했어요.”박민정은 뜬금없이 사과했다.“너무 억울해서 본의 아니게 그런 말을 한 것 같아요.”손에 서류를 든 유남준의 시선은 줄곧 첫 번째 단어에 머물러 있었고 전혀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곧이어 그는 서류를 내려놓더니 고개를 들어 박민정을 바라봤다.사복을 입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있었고 거기에 헝클어진 머리까지 더해지자 괜스레 측은지심을 불러일으켰다.이런 모습은 예전과 매우 흡사하면서도 어딘가 달랐다.뭐가 다른지 말로 형용할 수 없지만 그냥 본능적으로 그런 느낌이 들었다.“이리 와.”박민정은 그에게 다가갔다.“이제 그만 저택으로 돌아가요. 혜림 씨한테 사과하고 싶어요.”유남준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훑어보더니 얇은 입술을 깨물며 입을 열었다.“사과하고 싶은 게 맞아? 뭔가 이상한데?”박민정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솔직히 말하면 사과하고 싶지 않은데 남준 씨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해야죠.”그는 주의깊게 박민정을 훑어보았다.예전에는 그녀의 비굴한 모습
유남준이 무언가 더 말하려던 찰나, 차가 병원 입구에 도착했다.“내일 봐요.”“응, 그래요.”박민정은 손을 가볍게 흔들며 작별 인사를 건넨 뒤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병실로 들어서자, 간병인이 다가와 말했다.“오늘 사모님께서 한 번도 안 깨시고 푹 주무셨어요.”“그래요? 다행이네요. 감사합니다.”“별말씀을요, 이제 얼른 들어가서 쉬세요.”“네, 고생 많으셨어요.”박민정은 엄마 정수미를 위해 몇 명의 간병인을 고용해 두었고, 이 아주머니는 야간 근무 담당이었다.박민정은 옆방에서 조용히 잠자리에 들었다.이튿날 아침, 박민정은 엄마와 함께 소소한 아침 식사를 마쳤다.그때, 정민기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조사 결과가 나왔다는 것이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말은 충격적이면서도 어쩐지 예상한 그대로였다. 박민호는 최근 엄청난 빚을 지고 있었고, 유주아와의 결혼만 성사되면 상당한 지참금을 받아 그 빚을 메우려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박민정은 헛웃음을 지었다.‘박민호가 갑자기 성실하게 사업을 한다고 해서 의아했는데, 결국엔 이런 속셈이었구나.’한때 여유롭게 살던 박씨 가문의 재산을 모조리 말아먹은 장본인이 바로 박민호였다. 그런 그가 이제 와서 남의 귀한 딸을 아내로 삼겠다고 하니, 박민정은 헛웃음이 나왔다.“알겠어요. 수고했어요.”짧게 대답한 뒤 박민정은 전화를 끊었다.그녀는 이쯤에서 박민호에게도 뼈저린 대가를 한 번쯤은 치르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안 그러면 박민호는 계속 이렇게 무책임하게 살 것이 뻔했었다. 게다가 유주아 같은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하니, 박민정은 박민호에게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제대로 느끼게 해 줄 예정이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유남준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그녀는 그제야 오늘 혼인신고를 하기로 했다는 걸 떠올렸다. 그리고 마침 이번 기회에, 박민호에게 맡겼던 회사의 실권도 유남준에게 전부 회수해달라고 얘기할 참이었다.박민정이 병원 밖으로 나오자, 유남준이 차 옆에 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유남준은 깊고
“크윽...!”심홍원은 제대로 피하지도 못한 채 가슴팍을 얻어맞고는 그대로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리고 숨을 헐떡이며 연신 기침을 토해냈다.“켁, 켁... ”아빠의 분노에 심홍원은 한마디 반항도 못 하고 있었다.그는 이 모든 게 억울하기만 했었다. 그는 원래 오늘 밤 자신이 맞았다고 모욕당했다고 제대로 복수를 해달라고 아빠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러 돌아온 것이었다. 그런데 돌아오자마자 오히려 아빠한테 뺨도 아니고 발길질을 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이 멍청한 놈! 오늘 네가 건드린 사람들, 누군지나 알고 이러는 거냐?”심홍원의 아빠는 이성을 잃은 듯 아들에게 소리쳤다.“네?”심홍원은 얼빠진 얼굴로 되물었다.“그중 한 명은 방성원의 아내고, 또 한 명은 유남준의 아내야! 거기다 김씨 가문의 며느리까지! 너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심홍원의 아빠는 분노로 가슴이 죄어오더니 심근 경색이 발작될 지경이었다.“그중에서도 네가 말한 그 여자, 박민정이라는 여자 말이야. 누군 줄 알아? 바로 지엔 그룹의 대표야! 우리 이씨 집안이 몇 년째 거래하고 있는 지엔 그룹 말이다! 그런 사람을 네가 감히 건드려? 제정신이야!”“뭐라고요?”순간 심홍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생각해 보니, 그 자리의 여자들은 하나같이 남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말투며 눈빛이며 전부 만만치 않은 아우라가 느껴졌고 게다가 빼어난 미모에 대단한 용기까지 가지고 있었다.만약 심홍원이 미리 그 다섯 여자의 신분을 알았더라면 감히 근처에도 가지 못했을 것이었다.“그럼, 저...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그의 아빠는 울화통이 터진 듯, 이를 꽉 깨물고 손가락으로 아들의 이마를 콕 찔렀다.“뭘 어떻게 해? 가서 무릎 꿇고 사과해!”“우리가 그나마 지금까지 무사한 건 다 네 형 덕분이야. 너 하나만 믿었다면 이 집안은 진작에 말아먹었어.”심홍원은 억울한 듯 입술을 달싹였다.“...아빠는 늘 형만 좋아하시죠. 아빠가 형만 편애하시지 않았더라면 제가 이런 무리수까지 뒀겠어요?”짝!심홍원의 말이
“그 인간, 단순히 능글맞은 것도 모자라서 범죄까지 저지르려던 사람이에요. 아까 어떤 여자를 강제로 차에 태우려 했다니까요. 누가 봐도 수상했어요.” 진서연이 여전히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한 채 말했다.그 말을 듣고 방성원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누군지 내가 직접 확인해 봐야겠어요.”감히 자기 구역에서 이 소란을 피우다니, 방성원은 그 남자가 분명 제정신이 아닐거라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아까 분명 자기 아내에게도 집적거렸던 놈이니, 방성원은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방성원은 즉시 호텔 매니저를 불러 CCTV 영상을 확인하게 했다.그리고 그가 호텔에 도착한 지 10분도 채 안 돼 문제의 남자가 심홍원임을 알아냈다.그는 망설임 없이 곧장 심씨 가문에 연락을 취했다.한편, 유주아는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와 현관문을 열었다. 하지만 막상 거실에 들어서자, 부모님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소파에 앉아 있었다.그 모습에 유주아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지금 저... 놀리시는 거예요?”그녀의 목소리엔 억눌린 분노가 배어 있었다.“그렇게 안 했으면 네가 순순히 돌아왔겠니?”유주아의 엄마는 못마땅한 얼굴로 딸을 보며 말했다.“어른 와 봐라. 우리가 또 몇 명 골라놨어.”그 말을 들은 순간, 유주아의 머릿속에 심홍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참았던 분노가 한순간에 터져 나왔다.“내가 몇 번을 말했어요? 소개 안 받는다고요! 오늘 제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기나 하세요?”“무슨 일이 있었는데?”그녀의 엄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하마터면 엄마, 아빠가 소개해 준 그 심홍원이라는 남자한테... ”그녀는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아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그녀의 얼굴엔 수치심과 두려움이 뒤엉켜 있었다.그제야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한 유주아의 엄마가 급히 딸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조심스레 물었다.“무슨 일인데 그래? 주아야, 천천히 말해 봐.”유주아는 떨리는 숨을 가다듬으며, 그제야 진정된 목소리로 방금 있
심홍원은 잠시 당황한 얼굴로 세 여자를 번갈아 바라보며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곧 정신을 가다듬고 반박했다.“이건 나랑 내 여자친구 사이의 일이에요. 당신들은 참견하지 마세요.”“헛소리 하지 마! 내가 왜 네 여자친구야?”유주아가 발끈하며 소리쳤다.그녀는 박민정 일행을 찬찬히 바라보았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제우스 클럽 안은 조명이 어두워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기에, 이제야 박민정을 알아본 것이었다.하지만 박민정은 유주아를 단 한 번 본 적밖에 없어서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유주아는 박민정이 유남준의 아내라는 걸 알고 있었고, 가족 모임에서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그러나 그녀는 박민정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혹시라도 박민정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거나, 사람이란 게 속을 알 수 없는 법이니 먼저 다가갔다가 좋지 않은 결과를 낳을까 염려됐던 것이었다. 상류사회에선 소문이 빠르게 퍼지기에, 괜히 입방아에 오를 수도 있었으니까.“제발 도와주세요. 저희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유주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간절히 말했다.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심홍원을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못 들으셨어요? 저 여자가 당신 여자친구 아니라고 했잖아요.”그리고 다시 한번 경고했다.“좋게 말할 때 그만 놓으시죠.”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느낀 심홍원은 일이 커지기 전에 유주아를 끌고 차에 태우려 했다.하지만 그때, 진서연이 더는 참지 못하고 팔을 걷어붙이며 다가갔다.그녀는 단숨에 심홍원을 업어치기로 바닥에 메쳤다.쿵!심홍원은 땅에 처박히며 고통에 몸부림쳤고, 그의 경호원이 달려들려는 순간, 박민정의 경호원들이 재빠르게 나서 상황을 제지했다.그 순간, 심홍원의 경호원은 압도당한 듯 움직이지 못했고, 이내 심홍원 곁으로 가서 그를 부축했다.“도련님, 저쪽 인원이 많습니다.”경호원이 조심스럽게 말했다.하지만 심홍원은 전혀 이해할 마음이 없었다. 오히려 고래고래 소리치며 경호원을 몰아세웠다.“지
비록 유주아가 말로는 강하게 나왔지만, 사실 그녀도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상대는 남자였고, 힘도 훨씬 셌다. 심홍원의 손을 뿌리치려고 해도, 그녀에겐 역부족이었다.“알겠어요, 알겠어요. 화 풀고, 우리 이제 집에 가요.”심홍원의 머릿속에는 못된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는 유주아처럼 자존심이 강한 여자는 애초에 순순히 말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강압적으로 굴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심홍원이 눈짓을 보내자, 곁에 대기하던 경호원이 곧장 다가왔고, 심홍원은 망설임 없이 유주아의 입을 틀어막고, 그녀를 억지로 끌어안았다.“됐어요, 주아 씨. 다신 이런 데 안 온다고 약속할게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 화 좀 풀어요.”심홍원은 마치 유주아와 연인인 척 능청스럽게 연기하며 그녀를 바깥으로 질질 끌고 나갔다. 옆에 있던 경호원도 능숙하게 그를 거들었다.유주아는 여자인 데다 상대는 건장한 남자 둘이었다. 힘으로는 도저히 버틸 수 없었고, 결국 몸을 가누지도 못한 채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심홍원이 사람들 눈앞에서 이런 짓까지 벌일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었다.그 순간, 박민정 일행이 이 모습을 보고 뭔가 이상하다는 걸 직감했다.“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네.”진서연이 비아냥거리듯 중얼거렸다.민수아 역시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저 여자, 아무리 봐도 저 남자 여자친구 아닌 것 같지 않아?”박민정은 아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나도 그렇게 보여. 우리 따라가 보자.”유주아가 저 더러운 남자에게 무슨 짓이라도 당할까 걱정이 된 박민정은 마음이 급해졌다. 그렇게 박민정, 민수아, 진서연 세 사람은 곧장 클럽 밖으로 나갔다. 조하랑은 그 자리에 남았고, 설인하가 그녀 곁을 지키고 있었다.한편, 제우스 클럽 밖.심홍원은 유주아를 억지로 차에 태우려 하고 있었다. 그는 이제 유주아가 결혼할 생각이 없다는 걸 확실히 알게 되었고, 그래서 강제로 관계를 맺은 뒤, 언론에 기사를 퍼뜨릴 계획을 세
박민정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남자와 말다툼을 벌이는 진서연을 말렸다. 그러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그 남자를 쏘아보며 말했다.“충고하는데 말 좀 가려서 하세요. 누가 여자는 클럽에서 술 마시면 안 된다고 정하기라도 했어요? 클럽에서 술 마시는 여자는 다 나쁜 여자예요?”남자는 연달아 망신을 당하고 박민정에게까지 반박당하자 점점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그의 신사적인 태도는 한순간에 사라져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돌변했다.“너, 우리 아빠가 누군지 알기나 해?”“너희 엄마가 말 안 해줬어?”박민정은 똑같이 되받아쳤다. 그녀의 그 한마디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그러나 그 남자의 얼굴은 눈에 보일 정도로 시커멓게 변해갔다.“그래, 좋아. 어디 두고 봐.”남자는 한 마디 내뱉고 자리를 떠났다.하지만 박민정은 전혀 개의치 않았고 계속해서 술을 마셨다.그리고 곁에 있던 설인하가 먼저 입을 뗐다.“성원 씨한테 연락해서 대신 처리 좀 해달라고 할게요.”“그럴 필요 없어요. 우린 계속 놀던 대로 놀면 돼요. 여기 사람들도 많은데 그 남자가 더 이상 뭐 어떻게 할 수 있겠어요?”박민정은 밖에 경호원도 두고 있었기에 그 남자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박민정의 말에 설인하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안심했다.곁에 있던 진서연도 한마디 거들었다.“잊지 마세요. 저 싸움 잘해요.”설인하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맞네요, 맞네요. 깜빡할 뻔했어요. 저 인간 꼭 한 번 제대로 손 좀 봐줘야겠어요.”한편, 그 남자는 제자리로 돌아가는 길에 마침, 이 곳으로 놀러 온 유주아와 마주쳤다.순간, 남자는 얼굴빛이 확 변하더니 유주아에게 물었다.“주아 씨가 이런 곳엔 어쩐 일이에요?”유주아의 앞에 서 있는 이 남자는 그녀와 맞선을 본 남자 중 한 명으로, 이름은 심홍원이었다. 그의 아빠는 확실히 상업계에서 손꼽히는 인물로 유명 항공 그룹의 대표직을 맡고 있었다.유주아의 아빠는 늘 그녀에게 심홍원은 착실한 사람이라고 칭찬했었다.하지
제우스 클럽.조하랑도 한걸음에 달려왔다.박민정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하랑아, 너 아직 배에 아기가 있잖아. 어떻게 여기 왔어?”조하랑은 그녀의 팔을 붙잡고 애교를 부렸다.“걱정 마. 나 술 안먹잖아. 오랜만에 우리끼리 모이는 건데 나만 빼놓을 수 없잖아?”“그럼 약속한 거야. 조금 있다가 조심해야 해.”박민정은 그녀를 가장 안쪽 자리에 앉히며 사람들이 부딪히지 않도록 했다.“알겠어!”조하랑이 약속했다.그녀는 임신한 후로 사실 별로 불편한 것을 느끼지 못했다. 가끔 입덧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박민정은 그녀를 보호해야 할 동물처럼 여기며 그녀 옆에 앉았다.민수아, 설인하, 그리고 진서연은 신나게 놀았다.진서연은 원래 정민기를 부르려고 했지만, 다른 친구들이 한목소리로 거절했다.“절대 안 돼! 오늘은 우리의 날이니까 남자는 데려오지 마.”“알았어.”진서연은 약간 실망했다.그녀는 요즘 정민기가 점점 더 좋아졌다. 그의 진지한 모습도, 때로는 냉정한 모습도 좋았다. 매일 그와 함께 있고 싶었다.박민정 근처에 미녀들이 모여 있으니 자연스럽게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한 부잣집 아들이 다가와 말했다.“다섯 분 미녀분들, 오늘 술값은 제가 전부 쏘겠습니다.”“쏘신다고요?”민수아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남자는 그녀가 자신의 통 큰 모습에 감탄한 줄로 알고 말했다.“네, 마음껏 드세요. 전혀 부담 갖지 마시고요.”남자는 말하면서 시선은 설인하의 얼굴에 머물렀다.솔직히 다섯 명 중에서 설인하가 가장 예뻤다.만약 박민정의 얼굴에 흉터가 없었다면 설인하와 비견될 만했을 것이다.“아름다운 여성분, 저와 춤 한 곡 괜찮으세요?”그는 손을 내밀어 설인하에게 향했다.설인하는 조금 느끼한 그의 손을 차갑게 바라보며 말했다.“죄송하지만, 안 괜찮아요.”남자의 손은 공중에 멈췄다.옆에서 민수아는 그저 웃겼다. 저 남자는 누구지? 방성원 사모님도 못 알아보는 건가? 이곳 제우스 클럽은 바로 방성원의 소유였다.
박민호는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외할머니,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그 집은 원래 제 것이었어요. 단지 나중에 경매에 넘어갔고 여러 사람을 거쳐 박민정 손에 들어갔다고요.”“그러면 그 애가 너한테 돌려줘야지. 딸이라니, 게다가 양녀인데 어떻게 박씨 집안의 집을 차지할 수 있어?”김말숙은 집과 재산은 아들에게 줘야 하는 것이지 딸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했다.박민호도 그녀가 나이가 많아 생각이 잘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외할머니, 어쨌든 앞으로 그 사람에게 함부로 대하시면 안 돼요. 지금은 정씨 가문의 유일한 상속자이고, 유남준 씨의 부인이잖아요. 외할머니 친손자인 저도 그 사람 덕분에 이렇게 잘 지내고 있다고요!”김말숙은 이 말을 듣고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그래, 알았다. 앞으로 그 애한테 함부로 안 할게. 그런데,”김말숙은 잠시 멈칫하다 말을 이었다.“유씨 집안의 그 아가씨를 마음에 두고 있다고 하지 않았니? 그 애가 결혼할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니? 내가 전에 유씨 집안이 갔었을 때 그 부부가 어찌나 얄밉던지.”박민호의 눈빛이 수상하게 변했다.“저희끼리는 안 되겠지만, 누나와 형부라면 분명히 해낼 수 있을 거예요.”그는 자기 주제를 알았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절대 유주아에게 장가들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의 누나는 지엔 그룹의 대표이고, 형부는 IM 그룹의 책임자였다. 두 사람이 도와준다면 유주아의 부모도 감히 거절하지 못할 것이라고 그는 믿었다.“그러면 다행이고. 그 유주아 부모라는 사람들 너무 거만하더라. 네가 그 집 딸을 데려오면, 나중에 걔네 집안을 아주 제대로 휘어잡을 수 있을 거야.”유주아 역시 외동딸이었다.그녀의 어머니는 그녀를 낳을 때 사고가 발생해서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유주아와 결혼하는 것은 곧 그 집안의 재산을 얻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것이 바로 박민호가 박민정에게까지 부탁한 이유였다.그는 이미 결혼할 나이가 되었고,
정호철은 그녀가 화를 내자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고개를 들자 그의 눈가가 온통 붉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정수미 역시 그것을 알아채고 마음이 아파졌다.“정 대표님, 화나게 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저는 정말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더 이상 설득하지 마세요.”정수미는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나 때문이지?”정호철은 목이 메었다.정수미는 단호하게 말했다.“내가 전에도 말했듯이, 나는 당신과 살 생각 없어.”정호철은 목에 바늘이 꽂힌 듯 고통스러웠다. 그는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아, 알아요.”“그럼 정말 평생 혼자 살거니?”정수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그렇게 분명하게 말했는데도 왜 그렇게까지 마음을 굳게 먹었는지.정호철은 정말 외골수였다. 그는 다시 한번 힘껏 고개를 끄덕이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혼자 사는 게 뭐가 나쁜지 모르겠어요. 대표님이 저를 좋아하지 않고, 함께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건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제가 결혼하지 않는 건 대표님 잘못이 아니에요.”“그리고, 따님과 약속했어요. 대표님 곁을 마지막까지 지켜드리고 나서, 제가 저지른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고요.”정수미는 베개에 기댄 채 숨을 쉬었다.“알겠어. 더 이상 강요하지 않을게.”정호철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리고 또 한 가지.”정수미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민정이가 이전 일은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기로 했으니 죄책감 느낄 필요 없어.”“안 됩니다!”정호철은 단호하게 거절했다.“당시 제가 따님과 예찬이를 거의 해칠 뻔했어요. 제가 멀쩡히 살아있다면 저 스스로도 용서할 수 없을 거예요!”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한번 결심한 일은 누구도 바꿀 수 없었다.정수미는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 이미 이만큼 나이를 먹었으니, 사람의 성격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알겠어. 하고 싶은 대로 해.”정호철은 그제야 다시 얌전히 앉아 그녀에게 물었다.“의사 불러드릴까요?”정수미는 의아해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