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남준의 낯빛은 별로 수그러지지 않았다.어색함을 달래기 위해 박민정이 물었다.“출근한 거 아니었어요?”그러자 그의 잘생긴 얼굴에 불쾌한 내색이 더 훤히 드러났다.집밖에 나가지도 않았는데 출근은 무슨.“오늘 출근 안 해도 돼.”“아, 그래요? 그럼 푹 쉬어요.”박민정이 일어나자 유남준은 그의 앞을 떡하니 가로막았다.“뭐 할 말 더 없어?”어젯밤 일이 떠오른 박민정은 서둘러 대답했다.“없어요. 나 일해야 되니까 이만 나갈게요.”말을 마치고 방을 나가려는데 유남준이 그녀를 품에 꼭 감싸 안았다.그의 목울대가 약간 울렁였다.“민정아. 기억해, 난 유남우가 아니야. 또한 영원히 그러한 사람이 될 수 없어.”박민정이 멈칫하며 그를 올려다봤다.“다 기억해 낸 거예요?”“아니.”그의 큰 손바닥이 박민정의 볼을 부드럽게 쓸었다.“네가 날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는 거 싫어, 난.”박민정은 그의 눈길을 피하며 말했다.“그런 거 아니에요. 그저 잠시 말실수한 거예요.”“그래? 그래야 할 거야.”유남준의 말에는 경고의 의미가 다분했다.그의 말투가 왜 갑자기 이리 퉁명스러워졌는지. 박민정이 채 반응하기도 전에 유남준의 휴대폰이 울렸다.그가 전화를 받는 틈을 타 박민정은 재빨리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방에서 나온 뒤, 그녀는 얼른 작업실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곡을 쓰기 시작했다.품 안이 텅 비자 유남준은 심기가 불편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야.”“대표님, 대표님이 살고 계신 집 밖에 최근 자꾸 수상한 놈들이 기웃거리는데 오늘 드디어 한 놈을 잡아서 족쳤더니 사모님께서 보냈다고 합니다.”저편에서 경호원이 보고했다.유남준은 눈을 가늘게 떴다.“왜 보냈대?”“아이 하나 감시하라고 했다는데요.”아이라...지금 이 집에 아이라곤 예찬이밖에 없는데, 고영란이 왜 예찬이를 감시하라고 했을까.잠깐 생각하다 유남준은 휴대폰으로 지시했다.“그놈 어머니 앞에 내다 버려.”...유앤케이.온몸에 두들겨 맞아 피멍이 든 한 남자가
호산그룹.유남우가 사람을 보내 윤소현을 배웅하게 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비서 홍주영이 기분 나쁜 표정으로 다가오며 말했다.“도련님, 진짜 저 여자랑 약혼하실 거예요?”윤소현이 비록 이력 상으로는 흠잡을 데 없이 훌륭하지만 오만하고 도도한 데다가 지나치게 공리주의적인 성품을 지녀 유남우한테 어울리는 여자가 아니라고 홍주영은 생각했다.컵에 담긴 따뜻한 물을 한 모금 마시며 유남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나도 이제 나이가 찼으니 결혼 해야지.”그와 같은 나이면 진작에 결혼해 아이가 유치원을 다니고도 남는다.“하지만 결혼을 목적으로 마음에도 없는 사람과 결혼하는 건 너무...”“가서 일해.”홍주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남우는 그녀의 말을 끊었다.홍주영은 분에 겨워 살짝 붉어진 눈시울로 하는수 없이 떠나갔다....약혼식 청첩장은 금방 하객들한테 전달되었고, 유남준도 물론 받게 되었다.한창 일 하고 있던 유남준은 서다희가 유남우와 윤소현의 약혼식 소식을 알리자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말이 없었다.“안 간다고 할까요?”유남준이 그의 친동생에 대해 별로 좋은 감정은 아니라는 걸 알고 서다희가 제안했다.“약혼한다는데 당연히 참석해야지.”유남준은 며칠 전 박민정이 자신을 보며 유남우의 이름을 불렀던 일을 떠올렸다. 유남우의 약혼식에서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그는 궁금했다.집에 돌아가자 유남준은 청첩장을 박민정한테 내밀었다.예기치도 않은 소식에 박민정은 충격과 당혹감에 휩싸였다.슬프다고 할 수는 없지만 너무 갑작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런데 왜 나한테 이걸...”“우린 부부니까 당연히 같이 참석해야 할 거 아니야.”박민정은 듣자마자 거절하려고 하는데, 곁에 있던 은정숙이 입을 열었다.“네가 형수님인데 참석하는 게 예의상 맞는 거야.”은정숙이 웬일로 유남주의 편을 드는지 박민정은 얼떨떨했다.“알겠어요. 그럼 선물을 준비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녀가 이리 쉽게 승낙할지는 유남준도 예상치 못한 일이지만 이왕 선물 얘기
“바보야, 그렇게 신통한 의사가 어딨어.”박민정이 농담한다는 걸 당연히 알고 있는 은정숙은 그녀의 손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너무 오래 살고 싶지 않아. 늙은이야, 오래 살아봤자 젊은 사람의 미움이나 받지. 이만큼 산 것도 충분해.”박민정은 눈시울이 젖어 들었으나 애써 눈물을 삼켰다.“무슨 말씀이에요... 살아 계셔서 예찬이랑 윤우가 자라는 모습도 지켜보고 결혼해서 애 낳는 것도 보셔야죠. 그러면 외증조할머니가 되시는 거예요.”그녀의 말을 들으며 은정숙은 눈에 희망이 어렸다. 그때까지 살 수만 있으면 너무나 좋으련만 자신이 몸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친딸보다 더 친한 아이를 얻게 됐으니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유일하게 시름이 놓이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박민정을 혼자 두고 떠나는 것이었다. 은정숙은 며칠 전부터 유남준이 일부 기억을 되찾았다는 것을 눈치챘다. 빚을 졌다는것도 거짓말이거니와 그가 박민정의 곁에 남고 싶어 한다는 것도 알아챘다.비록 대부분의 시간을 방에서 보내고 있지만, 박민정이 구했다는 해외 전문가도 유남준의 도움이 있어서 가능했다는 걸 알고 있다.그 일을 제외한 다른 일에서도 유남준이 정말로 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응, 그래. 내가 오래오래 살아서 애들이 결혼하는 걸 지켜보마.”“네.”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그럼 전문가분들한테 모레 오라고 할게요.”“그래.”박민정은 그제야 안심하고 은정숙이 잠드는 모습을 지켜보다 방을 나와 전문가한테 연락을 취했다.그녀가 나간 후 누군가 또 방문을 두드렸다.은정숙은 눈을 떴다.“들어와요.”유남준이 방안에 들어섰다.“고마워요, 아주머니.”그는 누구한테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드린 적이 드물었다.은정숙이 그를 대하는 낯빛은 여전히 그리 좋지 않았다.“고맙다는 말은 넣어둬요. 유남준 씨를 도우려는 게 아니니까.”박민정이 유남준한테 일말의 감정이 남아 있다는 걸 보아낼 수 있었고, 유남준도 변했기에 그녀가 나선 것이다.“
유남준의 준수한 외모를 보고 어떤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다.“잘생기니까 참 좋네. 눈이 멀어도 스폰해 주는 사람이 있고.”“여자가 스폰해 준다고 어떻게 단정해? 저 여자도 예쁘게 생긴 거 같은데.”“그것도 그렇네? 그럼 남자가 여자를 스폰해 주는 건가? 아니, 굳이 왜 장님한테?”물건 사는 여자 몇 명이 조심스럽게 의논하고 있었다.그녀들의 대화가 유남준의 귀에 속속들이 박혀 들어왔다. 말끝마다 장님, 장님 하는 통에 유남준은 온몸으로 찬 기운을 내뿜었다.“민정아, 나 잠시 나갔다 올게.”“내가 도와줘요?”“아니, 괜찮아.”유남준은 혼자 나가기로 했다. 길은 다 기억하고 있지만 사람과 부딪힐까봐 걱정이었다.이때 매장 여직원이 얼른 유남준의 곁에 가서 부축하며 홀딱 반한 얼굴로 물었다.“손님, 어디로 가세요? 제가 모셔다드릴까요?”그러나 그녀의 방글방글 웃는 얼굴은 겨우 3초밖에 유지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유남준이 그녀의 손을 홱 뿌리쳤기 때문이다.유남준은 지극히도 불쾌한 어조로 짧게 한마디 했다.“꺼져!”여직원은 놀라서 뒷걸음질을 치다가 몸을 잘 가누지 못하고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매장안은 삽시에 조용해졌다. 박민정도 이쪽으로 눈길을 돌렸다.유남준이 화를 내는 모습은 기억을 잃고 나서 이번이 처음이었다.그녀는 얼른 다가가서 바닥에 주저앉은 여직원을 부축하며 일으켜 세웠다.“죄송해요. 이 사람이 낯선 사람이 만지는 걸 싫어해요.”여직원은 유남준의 사나운 반응에 놀라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아, 네. 괜찮아요.”그제야 박민정은 유남준의 팔을 잡으며 비난했다.“왜 그래요? 무슨 일이든 말로 하면 되지, 왜 여자를 밀치고 그래요?”방금 여직원한테 팔이 잡혀 속이 엄청 불편한 데다가 박민정이 이렇게 얘기하니 유남준은 더 화가 치밀어올랐다.“난 밀친 게 아니라 그저 손을 뿌리쳤을 뿐이야.”“그래도 좀 신사답게 행동해요, 네?”박민정이 소리를 낮추어 타이르자 유남준은 마지못한 얼굴로 대답했다.“알았어.”신
윤소현!그 이름을 듣는 순간 박민정은 온몸이 경직되었다.그녀를 품에 안고 있는 유남준은 그녀의 감정 변화를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왜 그래?”박민정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니에요, 아무것도.”유남준의 미간을 찌푸리며 좋았던 기분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네가 가기 싫으면 나 혼자 갈게.”“아줌마가 얘기했잖아요. 내가 형수니까 반드시 가야 한다고요.”유남우의 형수임을 인정하는 그녀의 말을 듣고 나서야 유남준은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집에 돌아가서 산 선물들을 다시 한번 점검하고 박민정은 소파에 쓰러져 휴식을 취했다.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벨이 울렸다.전화를 받아 누군지 묻기도 전에 전화기 저편으로부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민정아, 나 남우야.”그 한마디 말에 박민정은 일순 가슴이 조여오는 것만 같았다. 이전에 두 사람이 만나긴 했었지만, 사적인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다. 관계상 두 사람이 지켜야 하는 선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무슨 일이에요?”묻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갑자기 입을 열려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만나서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유남우가 물었다.전에 박민정을 여러 번 만나고 싶어 했지만 전부 그녀한테 거절당하여 이번에는 직접 전화할 수밖에 없었다.그녀가 자신을 만나기를 원하는지 그도 확실하지 않았다.박민정은 어렸을 때 유남우가 항상 자신을 도왔다는 생각에 거절하기가 미안하여 대답했다.“좋아요.”“그럼 너희 집에서 우회전하고 200미터 되는 곳으로 와. 내가 거기서 기다릴게.”유남우는 박민정이 사는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그가 벌써 근처에 와있을 줄 생각지도 못한 박민정은 전화를 끊자마자 외투를 가지고 나갔다.유남준은 서재에서 일을 보느라 그녀가 나간 것을 모르고 있었다. 유남우가 이곳까지 찾아 올 줄은 그도 전혀 예상 못 한 일이었다.박민정은 외투를 걸치고 우산을 쓰고 나갔다. 밖에서는 눈이 펑펑 내리고 있어 눈앞이 온통 하얀 세상이었다.걸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한 허
유남우는 마침내 그녀가 묻자 얇은 입술을 살짝 벙긋했다.“민정아, 너 아주 어릴 때부터 유씨 가문에 왔잖아. 유씨 가문에 쌍둥이가 있다는 거 들었어?”박민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유남준에게 쌍둥이 형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착각한 건 아닌지 궁금해했을 것이다.하지만 부모님 손에 이끌려 진주로 온 이후 가끔 유씨 가문에 드나들었다.남들 입에서조차 유남준이 쌍둥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나는 심각한 병을 가지고 태어나서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햇볕을 무서워해서 어릴 때 거의 모든 시간을 중환자실에서 보냈어. 가족들은 심지어 내가 살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내 존재를 외부에 알릴 수가 없었어. 상태가 조금 호전된 후에야 유씨 가문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몸이 너무 약해 외부와의 교류가 거의 없었고, 너 외에는 거의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지.”유남우는 말을 이어갔다.“애초에 내가 형인 유남준이라고 말한 이유는 네가 큰 병을 앓는 나를 싫어할까 봐, 그리고 유씨 가문에서 나 같은 놈이 사람들 앞에 나타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어.”박민정은 묵묵히 이야기를 들으며 그의 고초를 깨달았다.“미안해요, 전 이런 사실을 전혀 몰랐어요. 일부러 남우 씨를 만나지 않고 모른 척하려던 게 아니라 어떻게 대면해야 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을 뿐이에요. 어렸을 때 남우 씨가 나를 도와주고 곁에 있어 주던 모습 아직도 기억해요.”박민정은 붉어진 눈으로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한때 자신을 오빠보다 더 아껴주던 사람과 이런 이유로 멀어진 자신이 갑자기 바보처럼 느껴졌다.유남우가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아주자 박민정은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다.그의 손이 허공에 멈췄다.“민정아, 우리 약속 기억해?”박민정은 그를 올려다보았다.“나 돌아오면 결혼하기로 약속했잖아, 기억나?”유남우가 분명하게 묻자 박민정의 몸이 약간 굳어지고 얼굴이 창백해졌다.그때 그녀는 그를 구하기 위해 칼에 찔렸다.그는 그녀
박민정은 멈칫하며 유남우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다.“저 이미 결혼했어요.”당황한 그녀의 눈빛에 담긴 거부감이 유남우의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유남우는 목이 메어왔지만 한참이 지난 후에야 손을 거두었고 그의 눈에는 쓸쓸함이 가득했다.“그럼 우리 앞으로도 친구로 지낼 수 있는 거야?”박민정은 진정하고 그를 바라보며 가볍게 말했다.“네, 이제 우린 그냥 친구가 아니라 가족이죠. 약혼식에 저도 참석하러 갈게요.”“알았어, 네가 올 때까지 기다릴게.”유남우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더 이상 할 말 없으면 이만 갈게요.”박민정은 눈을 밟으며 다시 걸어갔다.유남우는 차 옆에 서서 그녀의 뒷모습이 눈앞에서 조금씩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기만 했다.마치 박민정은 깊은 눈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진주.홍주영은 유남우가 사무실로 돌아오지 않자 의아했다.유남우의 행방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전화를 걸었다.“도련님, 지금 어디예요?”유남우는 차에 다시 앉아 얇은 입술을 살짝 움직였다.“일이 있어 밖에 나왔어. 오늘은 사무실에 안 돌아갈 거야.”“하지만 오늘 저녁 약속이 또 있는데...”“취소해.”홍주영은 적어도 10년 이상 유남우를 돌봐온 터라, 오늘 그의 목소리 톤에서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감지했다.“도련님, 고민이 있으면 참지 말고 저한테 말해요. 다른 사람한테는 절대 말 안 할게요.”고민이라...유남우의 눈 밑으로 자조 섞인 웃음이 스쳐 지나가며 그는 따뜻하게 말했다.“그런 일 없어. 난 괜찮아. 일이나 해.”그렇게 말한 뒤 그는 전화를 끊고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지금은 완치 판정을 받았지만 아직 후유증이 많이 남아있어 언제 재발할지 알 수 없었다.이날 유남우는 차를 몰고 돌아가는 대신 박민정의 집이 보이는 곳으로 차를 몰고 가서 계속 차에 앉아 저쪽을 바라봤다....한편 박민정은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돌아갔다.그녀가 문을 열자마자 주방 쪽에서 음식 냄새가 났다.유남준이 부엌에서 걸어
박민정은 어리둥절했고, 저쪽에서 조석천이 외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아이의 아빠가 누구야? 내가 죽여버릴 거다!!!”뒤이어 꽃병과 가구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박예찬도 그 소리를 듣고 급히 말했다.“엄마, 통화 그만해요. 하랑 이모 보러 가야겠어요. 할아버지한테 때리지 말라고 해야죠.”“... 그래.”박예찬은 전화를 끊고 방 안에서 나왔다.조하랑이 배 째라는 식으로 소파에 누워 있고, 조석천은 화를 내며 물건을 깨부쉈다.꽃병을 떨어뜨리긴 했지만 모두 주의를 기울여 딸을 다치게 하지 않았다.“아빠, 그만 물어봐요. 애 아빠가 누군지 나도 몰라요. 오며 가며 스치듯 만난 사람이에요.”조하랑이 하품을 했다.“그러니까 나한테 김인우 씨 소개시켜주는 거 그만하고 소개팅도 시키지 마요. 부잣집 도련님이 애가 있는 여자를 받아줄 리 없으니까요.”조석천은 아기의 아빠가 누군지도 모른다는 말에 체면이 바닥을 치는 것 같았다.“좋은 건 다 놔두고 나쁜 것만 배우네! 내가 이제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녀. 너 오늘 내가 죽인다! 저놈이 누구의 아이인지 모른다고 했지? 모르면 버려야지!”조석천이 손을 들어 조하랑의 얼굴에 내리치려던 순간 박예찬은 곧바로 앞으로 나아가 조석천의 외투를 잡아당겼다.“할아버지, 엄마 때리지 마세요. 화가 나면 차라리 저를 때리세요.”아이는 당당하게 가슴을 쑥 내밀며 말했고 조석천은 자신의 다리만큼도 크지 않은 아이가 어른스럽게 나서는 모습에 마음이 녹아내렸다.“아가야, 방으로 돌아가. 할아버지는 엄마를 때리려는 게 아니라...”조석천은 잠시 멈칫했다.“그냥 어깨를 두드려주는 거야.”말을 마친 그는 조하랑을 세차게 두드렸다.조하랑은 눈을 흘겼다. 늘 엄격하기만 했던 아빠가 예찬에게 이렇게 다정할 줄은 정말 몰랐다.“그럼 할아버지, 저를 보내실 거예요?”박예찬의 큰 눈이 조석천을 빤히 바라보았다.조석천이 이렇게 착한 아이를 어디다 버리겠나.“아가, 네가 잘못 들은 거야. 밖에 있는 길고양이를 말한 거지 너를
“지금, 이 나이니까 더 이혼하자는 거예요. 굳이 남은 인생을 당신한테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고영란은 말을 마치자마자 안방에 들어갔다.그러나 유지욱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러다가 문득 여태껏 이혼에 대해 거론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심술부리는 원인이 분명 아버지 재산 때문인 것 같았고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이튿날.유명훈의 장례식은 계속 진행되었고 박민정의 친구들도 모두 오게 되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손연서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씩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장례식의 침울한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최현아는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한쪽에서 사람들과 유명훈의 유언장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욱과 고영란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그렇게 유명훈의 장례는 총 3일 동안 진행 후 끝났다.고영란은 담담한 얼굴로 박민정과 유남준, 그리고 유남우에게 말했다.“나랑 네 아버지는 이만 갈라서려고 해.” 순간 모든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옆에 서 있던 유지욱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그는 원래 유명훈의 장례가 끝나면 계속해서 여행이나 다니려고 했었는데 뜬금없이 고영란한테서 이혼 통보를 받게 되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일시적으로 심술부리는 거라 생각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지금 애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 진짜 이혼하려고?”“네.”고영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고 지금처럼 사는 게 저는 너무 괴로워요. 지금 당장 법원에 갑시다.”고영란은 지금 그들의 의견을 구하려는 게 아니다.유지욱도 자존심이 꽤 센 사람이라 단번에 그러자고 하더니 두 사람은 법원으로 출발했고 두 아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자식들도 이미 다 컸고 자기 혼인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유남준과 같이 돌아가는 차 안
고영란도 유석진의 고함에 깜짝 놀라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여태껏 모든 집안일을 아내한테 떠넘긴 채, 홀로 밖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유지욱이 원망스럽기만 했다.한 사람에 대한 단념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이런 실망감이 천천히 쌓이면서 식어가는 것이다.보아하니 오늘 저녁에도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유지욱이 도착해보니 유씨 가문의 모든 친척이 다 모여있었다.그리고 이미 상복으로 갈아입은 고영란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왜 진작에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그의 물음에 고영란은 실망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제가 말해주지 않았다고요? 한 달 전에 전 분명히 아버님 건강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으니까 와서 회사 일 좀 도와드리라고 귀띔해 줬어요.”“난 네가 우리 아버지 재산 때문에 나더러 오라는 줄 알았지.”유지욱의 말에 고영란은 큰 충격을 받고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 두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유지욱 씨, 정말 어이없네요. 맞아요, 제가 빨리 돌아오라고 했던 원인이 아버님의 재산이 조금이라도 공평하게 지욱 씨한테도 나눠줬으면 했어요. 그런데 그 재산이 전부 아주버님한테 넘어갔네요?” 그러나 유지욱은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이었다.“그깟 돈 몇 푼 가지고 왜 그래? 우리가 모두 한 식구인데 주면 줬지.”유지욱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님들을 맞이하러 떠났다.그리고 유석진과도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에 고영란은 제대로 마음이 상했다.박민정도 손자며느리로서 유남준과 같이 손님들을 맞이하다가 우연히 시부모님이 서로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사실 유씨 가문에 시집온 이후로 시아버지인 유지욱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유지욱은 젊었을 때부터 고집불통에 집안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그저 매일 여행이나 다니면서 자유롭게 사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여 유지욱과 고영란은 1년 중에도 만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박민정은 유남준에게 살짝 다가가 그에게 말했다.“남준 씨, 가서 어머님 좀 위로해 주세요.”여자
유남준의 아버지, 유지욱은 계속 외국에서 살다보니 이 자리에 없었다.그러자 고영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지욱 씨는 지금 당장 오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방금 비행기 탔다고 했으니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릴 거예요.”그러자 유석진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그러면 지욱이가 도착하고 나서 다시 말할 테니까 외부인은 참견하지 말아요.”순간 고영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악물고 말했다.“이 집에 들어와서 아이를 둘씩이나 낳아줬는데도 제가 아직 외부인인가요? 저는 오늘 아버님께서는 왜 그리도 자식들을 편애하시지 꼭 물어봐야겠어요!”“제 아들들이 능력이 뛰어나면 이런 불공평한 대우도 다 받아들여야 하나요?”여태껏 유명훈은 많은 주식을 갖고 있었다.비록 유남준이 현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유명훈의 지분이 그대로 유석진네로 넘어가게 되면 유남준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더구나 유남우도 그의 재산이 필요한데 말이다!게다가 유명훈은 오랜 세월 동안 주식 말고도 분명 많은 재산을 모았을 텐데 그 돈마저 전부 저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고영란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유석진은 유명훈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여태껏 지욱이를 잘 붙잡아 두지 못한 제수 씨를 탓해야죠! 지욱이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소용없어요!” 고영란이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유남준이 그녀를 말렸다.“엄마, 그만해요.”여태껏 유명훈이 유석진네만 편애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던 그이기에 지금 아무리 그와 말싸움해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유남우도 불쾌했지만 애써 덤덤한 척 그녀에게 말했다.“엄마, 형 말이 맞아요. 할아버지께서 결정하신 대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싸울 필요 없어요.”이 시각, 침대에 누워있던 유명훈은 호흡이 점점 더 가빠져 헐떡거리기 시작했다.그런데도 눈앞에서 자식들이 자기 재산 때문에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씁쓸하기만 했다.“지욱이...”그는 힘겹게 유지욱을 불렀다.유지욱은 평소에도 그의 말을
최현아는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지만 박민정은 그저 냉담한 얼굴로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그러자 그녀는 뻘쭘해진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일은 무슨, 윤소현이 드디어 판결받았다고 해서 축하해주려고 왔지.”박민정은 분명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했다.지금 최현아와 그의 시아버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왠지 그럴수록 더 수상했다.“감사합니다. 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일 하러 갈게요.”말을 마치자마자 박민정이 뒤돌아서니 역시나 최현아가 빠르게 그녀의 팔을 부여잡았다.“민정아,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한 식구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박민정은 이제 와서 한 식구라는 그녀의 말이 그저 가소로웠다.“도대체 할 말이 뭔가요?”그리고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최근에 할아버지 건강이 점점 악화하면서 동서랑 남준 씨가 그립기도 하고 우리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도 보고 싶은가 봐. 혹시 오늘 밤 할아버지 뵈러 같이 가지 않을래?”최현아는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사실 박민정도 할아버지의 건강이 여태껏 좋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오늘 두 사람을 부른 이유도 아마 자신이 얼마 버티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네, 알겠어요.” 최현아는 그제야 박민정의 팔을 놓아줬지만 그녀가 떠나가자마자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그리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한껏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재수 없는 것, 운발로 지금 자리에 올라앉은 주제에.” 차에는 낯선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박민정한테 화낼 필요 없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무조건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할아버지의 주식이랑 모든 돈을 너한테 넘길 수 있도록 잘 구슬리는 거야.”그러자 최현아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나도 알아, 저번에 이미 할아버지랑 말해봤다니까? 유남준 씨랑 민정이는 괜히 고고한 척하면서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말한 상황이라 우리 쪽에 전부 몰리게 되어있긴 한데, 난 지금 성혁 씨 얼굴만 봐도 짜
조하랑은 그제야 화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그러면 왜 저 여자한테 찾아갔어요?”“당연히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러 갔죠. 그리고 이지원에 대해 정신감정도 의뢰했거든요. 만약 진짜로 정신에 이상이 있는 거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 모든 게 다 쇼하는 거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려고 했어요.”김인우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다가 조하랑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예전에 제가 지원이한테 어떻게 가스라이팅 당했는지 하랑 씨도 잘 알잖아요. 만약 저를 구해줬던 사람이 형수님이었단 사실을 진작에 알았다면 절대 그 애를 도와주지도 않았을 겁니다.”“지금은 그저 마땅히 받아야 할 벌만 받았으면 좋겠고요.”조하랑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제가 오해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인우 씨가 또 그새를 못 참고 다른 여자한테 찝쩍거린다고만 생각했어요.”그녀의 말에 김인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못 참고 되물었다.“하랑 씨,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순간 조하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누, 누가 질투한다는 거예요? 그저 저를 배신한 인우 씨한테 화나고 그런 사람을 좋아했던 나한테 실망했을 뿐이라고요!”“알겠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리고 의사도 임산부가 흥분하면 아이한테 안 좋다고 말했잖아요.”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는 다정하게 조하랑을 품에 안았는데 순간 그녀는 얼굴이 더욱 빨개진 채 온몸이 굳어버렸다.당연히 김인우도 눈치채고는 빠르게 물었다.“왜요, 부끄러워요?”“그, 그럴 리가요...”조하랑은 말까지 더듬으며 애써 덤덤한 척했다.“저도 안을 줄 알거든요?”그리고 똑같이 김인우를 꼭 안아줬는데 이번에는 김인우가 속으로 움찔했다.추운 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꼭 껴안아 줬는데 거리를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그들에게 멈춰졌다 가곤 했다.조하랑도 어느새 그걸 느꼈는지 재빨리 김인우를 밀쳐냈다.“됐어요. 이제 병실로 돌아가 봐야 하니까 인우 씨도 그만 돌아가요.”“저랑 같이 안 가고요?”김인우의
김인우는 유남준의 마지막 한마디까지 다 듣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그러면 지금 하랑 씨가 형수님이랑 같이 있다는 거지?”“응.”김인우가 왠지 자신이 방금 했던 말을 귀담아듣지 않은 것 같아 유남준은 다시 한번 주의를 줬다.“결혼 전에는 아무 여자나 끼고 놀아도 상관없겠지만 지금은 결혼도 했고 아이까지 있는 마당에 좀 조심해야 하지 않겠어?”김인우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황당하다는 듯이 그에게 답했다.“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 버릇 고친지가 언젠데, 예전의 내가 아니야.”“응, 그러면 다행이고.”“그러면 지금 하랑 씨는 병원에 있는 거야?”“응.”유남준은 대답하자마자 전화를 끊었는데 보아하니 오늘에도 독수공방해야 할 것 같았다.김인우는 그길로 빠르게 조하랑 보러 병원으로 달려갔다.그리고 가는 길에 방금 유남준이 했던 말을 곱씹어 보았다.‘설마 하랑 씨가 오해한 건가?’그러다가 눈이 번쩍 뜨이더니 무언가가 생각난 듯 자기 머리를 퍽퍽 내리쳤다.“이 멍청한 놈, 그때 통화하는 걸 분명 옆에서 다 들었던 거야!”그는 곧바로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이지원의 영상을 자기한테 보내라고 했다.드디어 병원에 도착했다.조하랑이 막 잠들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누구세요?”박민정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간호사인가? 내가 가볼게.”“응.”박민정이 슬리퍼를 신고 문어구에 다가가 문을 열어보니 눈앞에 김인우가 서 있었다.“형수님, 하랑 씨 여기에 있나요?”김인우는 다급하게 물었다.박민정은 그가 이렇게 빨리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해 살짝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네.”“제가 들어가도 될까요?”그러나 박민정이 대답하기도 전에 조하랑은 김인우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빠르게 다가와 차갑게 말했다.“아니요. 민정아, 너는 일단 먼저 자. 내가 나가서 말할게.”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를 한번 쏘아보더니 그대로 밖으로 나갔고 김인우도 서둘러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하랑 씨, 진짜 오해예요.”그러나 조랑
김인우는 집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조하랑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식은땀이 맺힌 채로 급히 박예찬과 김훈에게 달려가 물었다.하지만 김훈은 일부러 모른 척하며 그가 이번 기회에 정신 좀 차리길 바랐다.“나도 몰라. 하랑이가 방에 없다고? 화장실 간 거 아니야? 화장실은 찾아봤어?” 김훈이 일부러 태연하게 말하자 김인우는 인상을 찌푸렸다.“거기도 없어요.”“그거 참 이상하네.”김훈은 걱정스러운 척하며 말했다.“그럼 멀뚱멀뚱 서서 뭐 하는 거냐? 어서 찾아봐야지. 지금 임신 중이잖아.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가만두지 않겠다.”박예찬도 거들었다.“오늘 아줌마가 좀 안 좋아 보이긴 했어요. 혹시 가출하신 거 아니에요?”그 말에 김인우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그는 곧장 조하랑을 찾아 나섰다.한편, 조하랑은 이미 병원에 도착해 있었다. 박민정이 곁을 지키고 있었고 둘은 정수미와 잠깐 이야기를 나눈 뒤 병실로 들어가 조용히 대화를 이어갔다.“하랑아, 너 그냥 이렇게 온 거야? 가족한테는 말 안 했어?”조하랑은 고개를 저었다.“응. 그냥 조용히 나왔어. 지금은 누구 얼굴도 보기 싫어.”“그래도 집에 한 통은 전화해. 안 그러면 걱정하실 텐데.”박민정이 말했다.“괜찮아. 다들 내가 자는 줄 알 거야. 내일 아침에 슬쩍 들어가면 돼.”조하랑은 개의치 않는 듯 말했다.임신 후로 김인우와는 방도 따로 쓰고 있었기에 자신이 방에 없다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알겠어.”박민정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후 조심스레 물었다.“그런데, 하랑아. 너 아까 말한 그 여자, 혹시 누군지 짐작은 가?”조하랑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난 김인우 주변 사람들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어.”박민정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그럼 내가 남준 씨한테 한 번 물어볼게. 혹시 오해일 수도 있으니까.”“응, 좋아.”조하랑도 더 큰 싸움으로 번지는 건 원치 않았다.박민정은 조하랑 앞에서 유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유남준도 막
조하랑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걱정 마, 민정아. 나 그냥 좀 화가 났을 뿐이야. 아직은 냉정해.”그리고는 씁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야. 그냥... 기분이 나빠서 그래. 내가 지금 그 사람 아이까지 품고 있는데 저렇게 행동하면 기분이 어떻게 안 상하겠어.”박민정은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잠시 후, 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민정아, 나 네가 있는 곳으로 가도 될까?”“당연하지. 내가 데리러 갈게.”박민정은 임신한 친구의 감정이 요동칠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걱정된 마음에 바로 나섰다.하지만 조하랑은 코끝이 붉어진 채 대답했다.“아냐, 이미 차 탔어. 지금 가는 중이야.”그녀는 더 이상 그 집에 있고 싶지 않았다. 김인우가 눈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둘 수가 없었다.박민정은 그녀가 이렇게 단호하게 움직일 줄은 몰랐던 지라 속으로 적지 않게 놀랐다.“알겠어. 그럼 내가 문 앞에서 기다릴게.”“응, 고마워.”...한편, 김인우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길가에 있는 꽃집을 발견했다.그는 운전기사에게 차를 세우게 하고는 직접 차에서 내려갔다. 잠시 후, 그는 품에 형형색색의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돌아왔다.차에 다시 올라타자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가자. 좀 빨리 가 줘.”예전에도 김인우는 여자를 위해 꽃을 보낸 적이 있었지만 그건 대부분 비서가 대충 주문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꽃다발은 그가 직접 고르고 색을 맞춰 정성껏 고른 것이었다.운전기사도 그의 얼굴에서 어쩔 수 없이 번지는 미소를 보고는 감탄하듯 말했다.“사모님은 참 복도 많으시네요. 이사님께서 뭐든 다 챙기시니.”김인우는 입꼬리를 높이 올리며 웃었다.“당연하지. 내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사람이잖아. 그 정도는 해야지. 사실 하랑 씨가 임신하지 않았더라도 난 여전히...”하지만 마지막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그는 조하랑을 보기 위해 한 걸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