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정은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꼭 움켜쥐었다.유남준은 그녀가 경직된 것을 느끼고 큰 손으로 그녀의 작은 손을 감싸며 더 거칠게 키스를 퍼부었다.박민정은 등을 꼿꼿이 세운 채 그를 밀치고 싶은 감정을 최대한 억누르고 있었다. 윤우와 예찬이가 그녀가 돌아가기를 기다리고 있다...아이를 머릿속에 떠올린 그녀는 이대로 그에게 순종해 바로 아이를 가질 계획이다.여기까지 생각한 그녀는 서툰 행동으로 그의 움직임에 응하려고 했다.유남준은 살짝 멈칫했지만 이내 찌푸린 인상을 펴고 옷깃의 단추를 잡아당기며 허리띠를 풀었다.목욕을 방금 마친 박민정의 싱그러운 냄새가 그의 코를 파고들자, 그의 심장도 더 빨리 요동쳤다.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거실 소파에 박민정을 올려놓고는 그녀의 가운을 잡아당겼다.박민정은 두 손을 더 꽉 움켜쥐었다.그녀는 유남준의 눈을 똑바로 마주할 수도 없었고 마주하고 싶지도 않았다. 머리 위에 비치는 따뜻한 불빛으로 시선을 옮긴 그녀는 순간 머릿속에 과거 이지원이 자신에게 보낸 수많은 유남준과의 다정한 사진들이 맴돌았다. 그리고 귓가에는 이지원이 했던 말들이 울려 퍼졌다.“민정 씨, 남준 씨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한 적 있어요? 예전에 나에게는 자주 말했었는데.”남자의 뜨거운 체온이 점점 가까워짐을 느낀 그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유 대표님, 우리가 이러면 톱스타 이지원 씨가 질투해서 대표님께 따지지 않을까요?”이제 막 정점에 도달하려던 찰나, 흥을 깨는 박민정의 말에 유남준은 모든 행동을 멈췄다.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박민정! 계속 아무것도 모른 척할 거야?”박민정은 옆에 떨어진 가운을 주워 몸을 가리며 말했다.“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어요.”그녀의 이런 행동에 유남준은 저도 모르게 몇 년 전의 그날 밤을 떠올렸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키더니 손으로 박민정의 하얀 얼굴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다가갔다.“이번에 돌아온 목적이 뭐야?”4년 넘게 도망쳐 놓고 갑자기 돌아온 건
와인에 약을 탄 박민정은 어깨가 반쯤 드러나는 요염한 민소매 잠옷으로 갈아입고 유남준에게 다가가 술을 따랐다.“받으세요.”유남준은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한눈에 바라보며 그녀가 건네는 잔을 받아 들었지만 마시지 않았다.“열 살 때 고향에서 진주로 왔어. 그때 처음 만났고.”순간 박민정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유남준이 두 사람의 첫 만남을 기억하고 있을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하지만 그녀는 최대한 티를 내지 않고 술잔을 다시 그의 앞으로 밀었다.하지만 유남준은 그녀가 민 술잔을 다시 박민정 앞으로 들이밀며 말했다.“네가 먼저 마셔!”약을 탄 잔 속의 술을 보며 박민정은 순간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지만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잔을 들고 바로 마셨다. 목구멍으로 흘러 들어가는 술은 그렇게 맵고 쓸 수가 없었다.그녀는 만약 자기가 마시지 않으면 유남준이 분명 의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오랫동안 사업에 몸담은 유남준은 눈치가 빨라 조금이라도 허점을 보이면 바로 알아채기 때문이다.박민정은 다시 술잔에 술을 따라 유남준 앞에 놓았다.“유 대표님, 이제 당신 차례예요.”유남준은 손목 마디마디가 뚜렷이 보이는 긴 손으로 잔을 들어 살랑살랑 흔들었지만 계속 마시지 않았다.그는 여유 있는 눈빛으로 박민정을 바라보며 말했다.“뭐가 그리 급해, 우리 추억부터 먼저 회상해야지.”추억?십여 년의 추억을 어찌 하룻밤에 다 말할 수 있겠는가?박민정은 예쁜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실내는 분명 에어컨을 시원하게 켠 상태였지만 그녀의 이마에서는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있었다.그녀는 스스로 손바닥을 계속 꼬집으며 정신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녀는 맑은 눈으로 유남준을 깊이 바라보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앞으로 추억할 시간은 많아요. 오늘은 시간도 늦었는데 여기서 쉬다 가시지 않을래요?”박민정은 말을 하면서 백옥 같은 손으로 술잔을 들어 유남준의 앞에 내밀었다.그녀도 자기가 이렇게 행동하는 게 맞는지 확신이 없었다.하지만 어렵게 얻은 기회, 절대 이대로 놓치고
정민기는 얇은 잠옷을 입고 온몸이 흠뻑 젖은 채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박민정을 발견했다. 그녀의 손과 다리는 이미 새빨갛게 할퀸 상처들로 가득했다. 그는 재빨리 물을 잠그고 가운을 집어 박민정의 보일 듯 말 듯 한 몸을 가렸다.“괜찮으세요?”그의 목소리는 그리 낮은 편은 아니었으나 박민정의 귀에는 그저 희미하게 들릴 뿐이었다.뒤늦게 정신을 차린 박민정은 창백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괜찮아요”“제가 병원까지 모셔다드릴게요.”정민기가 허리를 굽혀 그녀를 안으려 하자 그녀는 옆으로 피하며 말했다.“안 돼요. 진주에 있는 모든 병원은 전부 김씨 가문의 손아귀에 있어요. 그리고 김인우도 내가 돌아온 것을 이미 알고 있고요. 혹시라도 내가 약을 먹은 것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김인우는 분명 유남준에게 말할 거예요. 유남준이 술에 약을 탔다는 걸 알면 앞으로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할 거예요.”그녀는 겨우겨우 긴 말을 끝냈다.4년 전, 그녀는 자기를 죽은 사람으로 만들었다.연지석의 도움이 없었다면 절대 김인우를 속일 수 없었을 것이다.연지석이 곁에 없는 지금, 그녀가 병원에 간다면 그쪽 사람들은 분명 김인우에게 가장 먼저 알릴 것이다.박민정이 병원을 가지 않고 혼자 이겨내겠다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정민기는 욕실에 들어오기 전, 거실 바닥에 쏟아진 술을 보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충 짐작하게 되었다. 그는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하지만 지금 민정 씨 몸 상태가...”“얼음 좀 가져다주세요.”“네. 알겠어요.”정민기는 주방에 들어가 냉장고에서 얼음을 가져왔다.얼음 한 봉지를 통째로 욕조 안에 넣자 살을 에는 듯한 차가움이 박민정의 달아오른 몸을 그나마 편하게 했다.정민기는 또 의약 상자를 가져와 그녀 옆에 놓았다.“고마워요.” 박민정은 진심 어린 말투로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정민기는 아무 말도 없이 욕실을 나가 그녀가 정리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면서 연지석에게 그녀의 안부도 전해줬다.몇 시간
이지원은 조금 전 유남준의 마지막 말을 듣고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워낙 생각이 많은 서다희는 그녀의 물음에 한두 마디 야유를 퍼부었지만, 박민정이 돌아왔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알리지 않았다.눈치 빠른 이지원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속으로 서다희를 욕하며 유남준에게 다가갔다.“오빠, 명절이 곧 다가온다고 어머님이 오늘 저녁에 같이 밥 먹자고 했어요.”이지원이 말하는 어머님은 바로 유남준의 어머니이다.분명 또 두 사람이 빨리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라는 말을 하기 위함일 것이다. 유남준은 고개도 들지 않고 한 마디 툭 내뱉었다.“알았어.”그의 대답을 들은 이지원은 사무실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저 오늘은 별일 없으니 여기서 기다릴게요.”하루 종일?유남준은 그녀를 힐끗 보며 한마디 했다.“그렇게 한가해?”이지원은 순간 멈칫했지만 이내 태연한 얼굴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편 유남준은 그녀의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말을 이었다. “나는 일할 때 남이 옆에 있는 거 안 좋아해.”그의 말에 이지원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그저 한마디만 내뱉었다.“그럼, 밖에서 기다릴게요.”유남준이 더 이상 대꾸하지 않자 이지원은 내키지 않은 얼굴로 대표이사실을 나섰다.유남준의 차갑게 거절하는 얼굴은 예전에 사귀던 시절이나 지금이나 늘 변함이 없었다.이런 사람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아마 박민정뿐일 것이다.기분 전환을 위해 밖으로 나간 이지원은 김인우의 사무실이 텅 비어 있는 것을 보고 비서에게 물었다.“인우 오빠 요즘 안 오나요?”“요즘 집안 어르신들이 김 대표님에게 결혼 준비를 하라고 해서 못 왔어요.”비서는 사실대로 대답했다.결혼?이지원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김인우는 이지원 때문에 집안 어르신들이 안배한 혼사를 거절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하지만 요즘 집안 어르신들이 한창 김인우의 결혼 준비를 한다는 말에 이지원은 왠지 모르게 마음이 씁쓸했다.“상대방이 누군데요?”이지원은 궁금한 마음에 비서에게 물었다.비서
고아로서 어릴 때부터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이었다.김인우의 말은 그녀가 처음 재벌 2세들과 합류했을 때 얼마나 많은 추태를 부렸는지, 몇 년 전에 얼마나 창피했는지를 상기시켜 주었다."내가 유씨 가문의 며느리가 되면 누가 나를 무시할지 보자!”이지원이 박민정을 언급하지 않은 걸 보니 그녀가 돌아온 걸 모르는 것 같았다.김인우는 9번 공관 밖에서 계속 기다렸다."도련님, 민정 씨는 오늘 내내 안 나오셨어요. 제가 가서 문을 두드려볼까요?"보디가드는 그를 기다리게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김인우는 거절했다."아뇨, 그냥 여기서 기다릴게요.”어제 박민정이 돌아왔다는 것을 알고 나서 그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설렘을 느꼈고 즉시 그녀를 찾아가 그해의 일을 묻고 싶었다.하지만 그가 박민정을 괴롭혔을 때를 생각하면 그는 감히 그녀를 찾을 수 없었다. 한번 기다리기 시작하니 벌써 두 시간이 지났다.박민정은 어젯밤에 얼음물에 샤워해서 오늘 감기에 걸린 듯 머리가 어지러웠다. 정민기가 그녀에게 약을 사줬는데 마신 후에도 여전히 몸이 좋지 않았다. 그녀는 외투를 걸치고 어제의 긁힌 상처를 가리고 밖에서 기분 전환을 하려고 공관을 나왔다. 여름인데도 긴 옷에 긴 바지를 입고 있는 그녀는 덥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의사는 어젯밤 일로 그녀를 다시 병원에 입원시킬 뻔했다고 말했다. 앞으로 천천히 신중하게 의논해야 할 것 같다고 하셨다.멀지 않은 곳에 주차된 차를 눈치채지 못한 박민정이 그대로 지나가려 하자 김인우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달려들었다."어... 민정아.”박민정은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며 멍하니 있었다.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김인우는 곧장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입가에 이르러서는 다 사라져 버렸다."그동안 잘 지냈니?”‘잘 지냈냐고?'그녀가 마음속으로 냉소를 지었다.‘내가 잘 못 지내지 않기를 가장 바라는 사람이 아닌가?'그녀는 입술을 꼭 오
박민정은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은혜를 원수로 갚는 남자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죄송합니다만 몇 년 전에 아팠던 적이 있어서 많은 사람과 일을 기억하지 못해요.”말을 마친 박민정은 돌아서서 공관으로 돌아갔다. 김인우의 큰 몸집은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기억이 안 난다고?'그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감명을 받지 못했다. 보디가드도 도련님이 이렇게 넋이 나가시는 걸 처음 보기 때문에 앞으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공관으로 돌아와 소파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박민정은 에스토니아 공항에서 절친 조하랑이 미리 비행기 표를 끊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오늘 밤이면 진주시에 도착할 것이었다. 그리고 박예찬도 인터넷에서 같은 비행기 표를 사서 몰래 비행기에 올랐다.저녁 7시에 조하랑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박민정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 그녀는 트렁크 높이도 안 되는 운동복 차림에 마스크와 모자까지 쓴 박예찬이 뒤따라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자신보다 더 큰 캐리어를 끌고 있었다. 다른 이들의 이상한 시선에 조하랑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사람들의 비난 소리가 높았다."엄마가 어떻게 아이한테 저렇게 큰 가방을 끌고 다니게 할 수 있지.”"90년대 엄마들은 기가 막히네.”"저런 사람은 엄마가 될 자격이 없어.”‘이상하네, 왜 다들 날 잡아먹으려는 것 같지?'박예찬의 진지하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나서야 그녀는 큰일이 났다는 것을 알았다."엄마, 걸을 때 전화하면 안 돼요.”조하랑은 자신이 언제 아들을 낳았는지 궁금했다. 커다란 상자를 끌고 마스크와 모자를 쓴 채 빛이 나는 순진한 눈망울을 돌아보던 그녀는 하마터면 발을 동동 구를 뻔했다.욕을 하고 싶은데 할 수 없었다. 만약 박민정이 그녀의 아들이 몰래 따라온다는 것을 알았다면 미쳐버릴 것이 틀림없었다.공항의 많은 사람은 몰랐지만 그의 말을 듣고 순간 마음이 아프면서 사랑스럽기도 했다."귀여워, 철이 든 아가야.”"내 아들이었으면 좋겠다.”"이렇게 무책임한 엄마
"...... "‘이 녀석은 꼬맹이가 아니야.'박예찬은 조하랑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이미 왔는데 걱정하지 마, 이모. 내가 엄마에게 가서 사과할게.”조하랑은 울고 싶었지만 눈물이 나지 않았다. 어린아이한테 당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혼자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 녀석이 혼자 비행기를 타고 돌아가도 안전하다고 생각하지만 말이다."너 말 잘 듣고 여기 있어. 민정이한테 전화하고 올게. 그렇지 않으면 민정이랑 할머니가 널 걱정하겠어.”"걱정 마, 내가 할머니랑 같이 가자고 메모 남겨놨어.""..."그녀는 휴대전화를 들고 박민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한편, 박민정은 따뜻한 물 한 잔을 들고 베란다에 앉아 전화를 받았다."하랑아.”조하랑은 뭔가 찔리는 듯한 표정으로 옆에 있는 박예찬를 바라보았다."민정아, 그, 그게…. 서프라이즈 해 주고 싶었는데 그만...”"왜 그래?""나 진주시로 돌아왔어. 지금 공항인데... 예찬이가 날 따라왔…네? 아하하…”박민정의 마음이 덜컹 내려앉았다.조하랑이 박예찬에게 휴대전화를 건네며 입모양으로 "스스로 해명해"를 외쳤다."엄마, 이모 탓하지 마. 내가 몰래 항공권을 끊고 따라온 거야.”"엄마 혼자 진주시에 있으니까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혼자 몰래 비행기 티켓을 샀다고?'박예찬이 똑똑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어린아이가 혼자서 공항에 갈 줄은 몰랐다."박예찬! 엄마가 너한테 했던 말 잊었어?”"엄마가 보고 싶은 걸 어떡해. 걱정도 되고.”박예찬은 대답 대신 이렇게 말했다.박민정은 갑자기 목이 메어 대답하지 못했다. 조하랑도 박예찬이 한 말에 놀라 몸을 웅크리고 앉아 휴대전화를 가져와서 말했다."민정아, 걱정하지 마. 내가 예찬이를 데리고 있을게. 유남준이 예찬이를 발견하지 못하게.”지금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전화를 끊기 전에 그들은 한 음식점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조하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박예찬을 바라보았다. 두 그림자가 함께 공항 밖으로 걸어 나갔다.
[알겠어.]마침내 일을 그만둔 그를 본 이지원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아줌마가 재촉하셨어요?”유남준의 얇은 입술이 가볍게 열리며 말했다."아니야.”그녀는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다 입을 닫았다. 그리고는 그의 시선이 창밖으로 간 것을 발견했다. 차량은 금월호텔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벤틀리 한 대에서 한두 명이 내렸다.유남준의 시선은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있어 잘 보이지 않지만 말할 수 없는 익숙함이 느껴지는 그 작은 소년에게로 쏠렸다. 그는 두 사람이 식당 입구에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유남준은 운전 기사에게 말했다."차 세워.”이지원은 좀 이상해서 물었다."무슨 일 있어요?"그는 대답도 하지 않고 문을 밀고 곧장 내려갔다.조하랑이 박예찬을 데리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화장실이 급해서 박민정에게 전화를 걸어 데리러 오라고 했다. 그녀가 문을 나서자 양복 차림의 빳빳한 유남준이 곧장 자신을 향해 걸어왔다.순간적으로 손바닥에 땀이 줄줄 흘러서 그녀는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돌아섰다."우연이네."유남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박민정은 피할 수 없었다. 그녀는 조하랑과 박예찬이 지금 올라오지 않기를 기도했다."유 대표님도 여기 식사하러 오셨나요?"그녀가 한마디 대꾸했다."전 아직 일이 좀 있어서 방해하지 않을게요.”"민정아."막 가려는데 조하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박민정의 가슴이 뜨끔했다. 유남준은 계단을 등지고 있었기 때문에 조하랑과 박예찬은 계단을 올라왔을 뿐 유남준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인사를 한 것이었다.그는 소리를 듣고 조하랑과 박예찬을 바라보았다. 박예찬은 마스크를 쓰고 있지만 그의 까만 눈동자는 유남준에게 이상한 익숙함을 줬다.사방이 갑자기 고요해졌다. 조하랑이 완전히 굳어 있었다. 박민정은 아들이 자신을 부를까 봐 숨을 죽였다."민정 이모, 안녕하세요.”말을 마치고 그는 조하랑의 손을 잡았다."엄마, 배고파. 빨리 이모랑 밥 먹자.”조하랑은 정신을 차렸다."가자, 민정아.”그녀는 박예찬의 손을
유남준은 그제야 진정하고 서둘러 밖으로 나온 뒤 그녀의 머리를 다시 살펴봤다.그러자 박민정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하나도 안 아프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그리고 제정신이 아닌 사람을 굳이 상대해서 뭐 해요?”“그래.”유남준은 담담하게 답했지만 속으로는 당장에라도 이지원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사실 박민정도 애써 쿨한 척 괜찮다고는 했지만 방금 눈앞에서 본 이지원의 모습은 어딘가 이상했다.그런 눈빛은 진짜로 미친 사람 외에는 절대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 생각될 만큼 충격적이었다.박민정은 돌아가기 전 원장에게 물었다.“혹시 이지원 씨는 평소에도 많이 폭력적이었나요?”그러자 원장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아니요. 여기에 온 이후로는 말도 잘 듣고 다른 환자분들과도 아주 잘 지내고 있습니다.”“만약 그런 환자가 들어오면 오히려 자발적으로 피하더라고요.”박민정은 그제야 뭔가 알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감사합니다.”“아닙니다. 설마 방금 사모님께 손을 댔나요?”그의 물음에 박민정은 굳이 숨길 필요가 없을 것 같아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네, 안정이 필요해 보이더라고요.”“알겠습니다.”원장은 재빨리 간호사에게 알렸다.“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게 있는데요. 제 지인도 이쪽 분야의 전문가 의사인데 이런 환자한테는 같은 병을 앓고 있는 환자가 곁에 있으면 좋다고 했거든요.”사실 원장도 진작에 김인우를 통해 이지원이 저질렀던 악행들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하여 박민정의 말이 끝나자마자 빠르게 답했다.“저희가 한번 알아보겠습니다.”두 사람은 그제야 그곳을 빠져나왔고 원장은 그들이 떠나가자마자 이지원의 병실에 비교적 폭력 성향이 센 환자를 안배해 뒀다.박민정이 차에 올라타자 유남준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에게 물었다.“어때 보였어? 이지원이 진짜로 정신이 이상해진 것 같았어?”그러나 박민정은 대답 대신 그를 한참 동안 빤히 바라보다 되물었다.“남준 씨는 어땠는데요? 뭔가 이상한 점 못 느꼈어요?”그러자 유남준
간호사가 문을 열고 대기실 안으로 들어오더니 원장한테 말했다.“원장님, 이지원 씨를 데려왔습니다.”그러자 원장은 고개를 끄덕인 뒤 자리에서 일어서며 박민정에게 최대한 공손하게 말했다.“저는 이만 나가볼 테니까 편하게 말씀 나누세요.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저를 불러주시면 되겠습니다.”“감사합니다.”그렇게 대기실 안에는 세 사람만이 남게 되었고 유남준과 박민정은 말없이 이지원을 빤히 바라보았다.이지원은 아직 두 사람을 보지 못한 듯 그저 고개를 수그린 채 자기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입으로 계속 뭔가를 중얼거렸다.“오빠, 진짜 나랑 결혼할 거야? 민정이가 알고 날 괴롭히면 어떻게 해?”박민정은 너무 어이가 없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이지원!”이지원은 그제야 고개를 들고 눈앞의 그녀를 바라보았는데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누구세요?”“내가 누구인지 기억 안 나? 나야, 민정이.”그녀의 이름이 들리는 순간 이지원은 순간 겁을 먹은 얼굴로 빌기 시작했다.“민정아, 내가 잘못했어. 다시는 그런 실수하지 않을게. 나도 많이 반성했으니까 한 번만 봐주라. 더 이상 거짓말도 하지 않을게... 우리 한때는 친구였잖아?”그리고 박민정의 손을 잡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난 윤소현 씨처럼 감옥에 들어가기 싫어.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살고 싶지도 않고. 이제부터 정신 차리고 연예계에서만 활동하면서 살 테니까 제발 나 한 번만 살려줘.”그녀의 간절한 애원에도 박민정의 얼굴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아직 덜 미쳤나 보네!”이지원은 순간 말뜻을 알아듣지 못한 듯 갑자기 표정이 돌변하더니 박민정을 매섭게 쏘아보며 말했다.“아니야! 넌 지금 나한테 거짓말을 하고 있어. 내가 진짜 박민정이라고!”박민정의 미간이 순간 찌푸려졌다.그러자 이지원은 차갑게 웃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네가 그 피도 눈물도 없는 이지원이잖아!”그리고 당장에라도 눈앞의 박민정을 때리려고 했다.“빌어먹을 X, 널 죽여버릴 거야!”다행히 옆에
이지원이 정신병을 앓고 있다는 말을 들은 유남준은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더니 역시나 믿지 못하는 얼굴이었다.워낙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여자라 분명 이번에도 쇼한다고 생각했다.특히 이런 병은 정확하게 진단해 내기 어렵다.“그래, 같이 가자.”유남준이 단번에 가겠다고 하자 박민정은 순간 장난기가 발동해 그에게 슬쩍 물어봤다.“이지원 씨가 신경 쓰여요?”순간 유남준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녀에게 되물었다.“뭐라고?”“남준 씨 첫사랑이었잖아요. 바로 가겠다는 걸 보니까 신경 쓰이는 게 아니면 걱정하는 건가?”말하다 보니 박민정도 슬슬 질투가 났다.그러자 유남준은 어이없다는 듯이 그녀의 볼을 꼬집으며 답했다.“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예전에도 말했잖아, 난 그 여자한테 아무런 감정도 없다고. 그런데 왜 신경이 쓰이고 걱정해?”박민정은 그의 단호한 발언에 그제야 마음이 살짝 놓였다가 다시 물었다.“그런데 왜 저랑 같이 가보려고 해요?”“단순 호기심.”그가 이런 일로 호기심이 생길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박민정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러고 보니 그녀도 궁금하긴 했다.“빨리 먹고 가요.”“그래.”그렇게 박민정은 아침밥을 다 먹은 뒤 유남준이 운전하는 차에 올라탔다.비록 집에 운전기사가 있지만 유남준은 박민정과 단둘이 드라이브하는 걸 좋아했다.이지원이 지금 입원해 있다는 병원은 집과 살짝 멀었는데 차로 대략 한 시간 정도 걸렸다.얼마간 달리다 보니 박민정은 저 멀리 하얀색 건물과 울타리 안에 환자복을 입은 사람들이 햇볕을 쬐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그리고 가까이 다가가서야 사람들 속에서 익숙한 한 여자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이지원도 흰색 환자복을 입고 있었고 긴 머리는 헝클어진 채 한눈에 봐도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이때 옆에 있던 환자가 갑자기 그녀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자 이지원은 뭐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으나 거리가 너무 멀어 정확하게 뭐라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입구에 도착해보니 병원 원장이 두 사람을 반갑게 맞이했
이튿날, 아침 여덟 시쯤.박민정이 침대에서 일어나려 하자 유남준은 다시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품 안에 가뒀다.“왜 벌써 깼어?”유남준의 나른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려 퍼지자 박민정은 난감한 얼굴로 그의 팔을 풀려고 했지만 역시나 어림도 없었다.하여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다시 누워 그에게 말했다.“출근해야 하니까 빨리 이것 좀 풀어요.”그러자 유남준은 그녀를 더욱 세게 안았다.“더 자도 돼.”회사 대표가 굳이 제시간에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박민정이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잠이 안 와요.”순간 유남준의 눈이 갑자기 번쩍 뜨이더니 벌떡 일어나 한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채 물었다.“그러면 우리 재밌는 놀이나 더 할까?”그의 말에 깜짝 놀란 박민정은 빠르게 다시 눈을 감았다.“아, 아니요. 그냥 잠이나 계속 자요.”그러자 유남준도 싱긋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다시 누웠다.솔직히 오랜만에 이토록 개운하게 잤다.박민정은 그의 품 안에서 갇혀있는 상태로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지만 유남준이 원하니 어쩔 수 없이 불편해도 참아야 했다.아홉 시 반쯤 되자 박민정은 더는 누워있기 힘들어 유남준에게 거짓말했다.“남준 씨, 나 배고파요.”그러자 유남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그러면 아침밥부터 먹자.”“네.”그제야 자유로운 몸이 된 박민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침밥을 먹으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유남준네 셰프는 요리 솜씨가 아주 훌륭했고 아침부터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들었다.박예찬, 박윤우는 이미 학교에 갔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출근했다.박민정이 내려오는 모습을 본 셰프는 재빨리 그들이 먹을 아침밥을 다시 데워줬다.유남준은 그녀가 허겁지겁 맛있게 밥 먹는 모습을 한껏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가만히 바라보다가 한마디 했다.“체하지 않게 천천히 먹어.”“네.”한창 맛있게 먹고 있던 이때, 갑자기 박민정의 핸드폰이 울렸다.화면에 ‘김인우’라는 이름을 본 유남준은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설마 재검사받아야 하는 건가?’박민정은
“엄마, 아빠랑 이혼 잘하셨어요.”유남우는 말을 마치자마자 유남준 앞을 지나치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내가 능력이 없어서 이번에도 졌네.”유남준은 그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째려봤다.유남우는 사실 그가 어떻게 반격할지 걱정되기보다 이번에도 졌다는 게 더 분통했다.밖으로 나온 뒤 그는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라도 걸고 싶었지만 딱히 연락할 사람이 없었다.연락처를 훑어보다가 홍주영에서 멈칫하더니 결국에는 통화버튼을 누르지도 못한 채 핸드폰을 다시 꺼야 했다.실내 안.거실은 유난히 조용했고 유지욱은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남우가 왜 저렇게 변했는지 모르겠어. 예전에는 말도 잘 듣고 착한 아이였는데.”고영란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그가 말하는 ‘예전’이 정확하게 언제인지도 감이 오지 않았다.고영란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모습에 유지욱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왜 그래?”“아니에요.”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다시 말을 이었다.“이번 달은 될수록 어디 가지 말고 집에 있어요. 그리고 이혼 숙려기간이 끝나는 대로 다시 가서 마무리 지으면 될 것 같아요.”고영란은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이혼하고 싶은데 지금 이혼하려면 한 달씩이나 기다려야 했다.그리고 위층으로 올라가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그리고 이 한 달 동안에 아버지로서 해야 할 일이 뭔지 좀 생각해 보고요.”말을 마친 뒤 유지욱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한편.박씨 가문의 옛 저택.박민정은 유남준이 너무 걱정되어 한걸음에 집으로 돌아왔다.비록 서다희가 괜찮다고는 했지만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이때, 밖에서 들리는 차 소리에 박민정이 다급히 차창 밖을 내다보니 유남준의 차도 마침 도착해 있었다.박민정은 빠르게 차에서 내린 뒤 유남준에게 달려가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괜찮아요?”그러자 유남준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당연하지, 다희가 나 괜찮을 거라고 알려줬잖아.”박민정은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
유석진의 입에서 갑자기 자기 둘째 아들의 이름이 거론되자 고영란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또한 왜 두 아들 사이에 지금 저런 모순이 생긴 건지 알 수 없었다.유남준도 괜히 고영란이 중간에서 난처하게 된 것 같아 일부러 유남우를 빤히 바라보며 유석진에게 말했다.“이번 일은 사과한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에요. 큰아빠가 아무리 남우랑 같이 벌인 일이라고 해도 이번만큼은 가만있지 않겠습니다.”별로 무겁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이상하게 위협감이 느껴졌다.순간 유석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이때, 그의 며느리인 최현아가 앞으로 한 발짝 나서며 끼어들었다.“남준 씨, 그래도 한 가족인데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그러자 유성혁도 한마디 거들었다.“남준아, 우리도 잘못했단 걸 알고 있어. 아버지가 이제 연세도 많아서 상황판단이 안 될 때가 많아.”유석진도 사실 지금 자존심을 부려서 될 일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지금 네가 원하는 게 뭔데? 말해주면 내가 다 들어줄게.”사실 유남준은 이 말만을 기다렸다.“금방 인수한 시내 중심에 있는 그 건물을 저한테 넘겨주세요.”그 땅은 유명훈의 땅이고 죽기 전 유석진에게 물려준 유산인데 지금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살 수 없을 정도로 값이 올랐다.유석진이 이 땅의 주인이 됨으로써 그곳의 상권을 손에 쥔 거나 다름없었는데 나중에 아무 건축물을 세워 올려도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건 안되지!”역시나 유석진이 단번에 거절했다.그가 오랫동안 눈독 들였던 땅이었는데 유명훈이 죽어도 물려주지 않으려 해서 여태껏 애를 먹고 있었다가 이제 겨우 손에 들어온 땅이고 또 자기만의 계획이 따로 있었다.“그러면 조만간 IM 그룹의 변호사를 만나셔야겠네요.”유남준은 더 이상 그와 얘기하고 싶지 않았고 유석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집안 도우미에게 외쳤다.“모셔다드려!”그렇게 도우미들은 그들을 전부 밖으로 내보냈고 거실에는 유남준 가족들만이 남게 되었다.유지욱과 고영란은 눈앞의 두 아들에게 뭐라고 말했으면 좋을지
유남준이 잡혀갔다는 소식에 유석진 가족들은 조용히 자축하고 있었다.최현아도 너무 기뻐했지만 유독 유성혁만 우울한 얼굴로 그들에게 물었다.“아빠, 그래도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인데 꼭 이래야 할까요? 남준이가 잡혀가도 우리한테 아무런 이득도 없잖아요. 그리고 만약 다시 풀려나서 우리가 한 짓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요.”그러자 유석진이 미간을 찌푸리고 답했다.“왜 쓸데없는 일을 벌써 걱정하고 그래? 간이 그리도 콩알만 해서 큰일 하겠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유성혁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다만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유지훈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저는 할아버지가 한 행동이 맞다고 봐요. 사람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그러자 유석진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껄껄거리며 웃었다.“하하, 역시 우리 손자가 똑똑하다니까. 네 말이 맞아. 사람은 무조건 자기가 일 순위여야 해. 절대 네 바보 같은 아빠를 닮아서는 안 된다.”그러자 유지훈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할아버지, 저도 알고 있어요.”그리고 유석진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그러나 그들은 너무 일찍 기뻐했던 게 오후가 되자마자 유남준은 바로 풀려났다.그길로 옛 저택으로 오게 되었고 동시에 유석진네 식구들과 유남우를 전부 집으로 불러 모았다.이 시각, 유지욱도 마침 그곳에 있다가 눈앞의 상황에 어리둥절해서 물었다.“남준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아빠, 제가 지금부터 저 사람들의 실체에 대해 다 밝히려고요.”그리고 서다희가 한 무더기의 자료와 증명서를 건네주자마자 그는 유석진네 식구들에게 뿌려줬다.종이들이 공중에서 흩날리다가 전부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유석진은 그중 한 장을 주워 읽어보고는 너무 황당한 나머지 코웃음을 치며 그에게 말했다.“남준아, 다 오해야. 우리가 왜 그런 짓을 하겠니?”그러자 유남준이 눈살을 찌푸리고 그에게 되물었다.“우리 회사에 심어둔 사람들을 제가 다 데려올까
유남준은 사실 진작에 유남우와 유석진 쪽에 사람들을 붙여서 그들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었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파악하고 있었지만 도대체 무얼 하려는지 궁금해서 일단 내버려두고 있었다.이튿날, IM 그룹으로 세무국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그러자 서다희가 눈살을 찌푸리고 중얼거렸다.“대표님을 감옥에 보내려고 아주 별짓을 다 하네요. 이런다고 그 사람들한테 득이 되는 게 뭔지 정말 모르겠어요.”특히 유남우는 왜 자기 친형을 왜 이렇게까지 괴롭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조사해 보니 역시나 회사 장부에 문제가 있었고 회사 자금을 불법으로 돌렸다는 증거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다.그러나 이 모든 게 다 그들이 일부러 만들어낸 가짜 장부들이었다.그렇다고 해도 유남준은 회사 법인으로서 조사를 받아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연행되었다.가면서도 서다희에게 당부했다.“민정이한테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줘.”서다희는 한껏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굳이 말하지 않아도 뉴스에서 하루 종일 보도될 예정이라 아마 얼마 안 돼서 알게 될 것이다.역시나 박민정은 출근길에 그에 관한 뉴스 기사를 보게 되었다.“어떻게 이럴 수가?”이때, 고영란도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왔다.“민정아, 남준이한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그러나 박민정도 아직 무슨 상황인지 모르고 있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저도 방금 기사를 봐서 잘 모르겠어요. 제가 지금 당장 다희 씨한테 전화해 볼 테니까 어머님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그래.”고영란은 착잡한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유지욱과 이혼하겠다고 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아들한테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서다희는 빠르게 박민정에게 전화해서 유남준이 시킨 대로 알려줬고 모든 일은 다 대비되어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박민정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이때 서다희가 한마디 더 했다.“그런데 이 일은 절대 고영란 사모님한테 말하지 말아 주세요.”“알겠어요.”어쩌면 유남우 귀에도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나이니까 더 이혼하자는 거예요. 굳이 남은 인생을 당신한테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고영란은 말을 마치자마자 안방에 들어갔다.그러나 유지욱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러다가 문득 여태껏 이혼에 대해 거론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심술부리는 원인이 분명 아버지 재산 때문인 것 같았고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이튿날.유명훈의 장례식은 계속 진행되었고 박민정의 친구들도 모두 오게 되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손연서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씩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장례식의 침울한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최현아는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한쪽에서 사람들과 유명훈의 유언장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욱과 고영란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그렇게 유명훈의 장례는 총 3일 동안 진행 후 끝났다.고영란은 담담한 얼굴로 박민정과 유남준, 그리고 유남우에게 말했다.“나랑 네 아버지는 이만 갈라서려고 해.” 순간 모든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옆에 서 있던 유지욱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그는 원래 유명훈의 장례가 끝나면 계속해서 여행이나 다니려고 했었는데 뜬금없이 고영란한테서 이혼 통보를 받게 되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일시적으로 심술부리는 거라 생각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지금 애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 진짜 이혼하려고?”“네.”고영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고 지금처럼 사는 게 저는 너무 괴로워요. 지금 당장 법원에 갑시다.”고영란은 지금 그들의 의견을 구하려는 게 아니다.유지욱도 자존심이 꽤 센 사람이라 단번에 그러자고 하더니 두 사람은 법원으로 출발했고 두 아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자식들도 이미 다 컸고 자기 혼인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유남준과 같이 돌아가는 차 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