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0시 10분.고위직 직원들로 가득 찬 호산 그룹 회의실 안이다.날이 날인만큼 유명훈과 고영란도 오늘 회사로 오게 되었다.주위를 둘러보던 고영란은 박민정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추경은에게 물었다.“민정이는?”추경은은 고개를 저었다.“저도 잘 몰라요. 새언니 아직 출근 전인 것 같아요.”“모른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너 민정 옆에 붙어 있지 않았어? 옆에서 민정이 챙겨줘라고 너 여기에서 출근하게끔 내가 해준거잖아.”고영란은 단도직입적으로 그 어떠한 체면도 돌보지 않은 채 말했다.그 말을 듣고서 추경은은 순간 서러움이 밀려왔다.“남준 오빠도 새언니도 모두 저를 싫어해요... 앞으로 두원 별장에서 지낼 생각하지 말라면서 단호하게 말까지 했고요. 그래서 저 요금 회사 근처에서 월세맡고 살고 있어요. 낮에는 회사에서 새언니 챙겨주고 있고요.”자기 자신을 완벽하게 포장하면서 유남준에게 약을 탄 사실에 대해서는 토씨 하나 꺼내지 않았다.고영란은 추경은의 대답을 듣고 난 뒤 더는 따지지 않았다.“근데 왜 민정이는 아직도 안 오는 거야?”10시 30분에 회의를 연다고 알고 있던 박민정과 달리 최현아는 다른 사람들에게 10시에 회의를 연다고 알렸던 것이었다.“혹시 새언니 부끄러워서 안 오는 거 아니에요? IM 그룹의 프로젝트를 빼앗아 오지 못했나 봐요.”추경은이 걱정하는 척하면서 물었다.그 말이 나오는 순간 고영란은 추경은을 째려보았다.“헛소리하지 마!”지금 이 자리에 고위직 직원들도 심지어 유명훈도 있었으니 말이다.만약 박민정이 최현아에게 지게 된다면 ‘첩’의 후손은 영원히 ‘처’의 후손 보다 못났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증명하기 때문이다.고영란의 호통에 추경은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고영란은 답답한 마음에 프런트 직원에게 박민정의 행방에 관해 물어보러 갔으나 아직 출근 전이라는 답을 듣게 되었다.어찌 된 영문인지 박민정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으나 바로 그때 최현아가 다가왔다.“숙모님, 이제 곧 회의 시작할 거예요. 어르신께서도 부르시
고영란의 말을 듣고서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계약서를 훑어보기 시작했다.과연 고영란의 말대로 IM 그룹에서 빼앗아 간 공급업체를 도로 빼앗아 온 것이었다.“정말이네요!”“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그 어려운 걸 해냈네요.”다들 아첨을 떠느라 정신이 없었다.실은 바보가 아닌 이상 고영란이 박민정을 도와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그뿐만 아니라 도로 빼앗아 온 공급업체는 그리 중요한 편도 아니었다.IM 그룹을 상대로 그 어떠한 바람도 일으킬 수 없는 미미한 존재였다는 것이다.옆에서 듣고 있던 최현아는 떨떠름하기만 했다.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난 뒤 최현아는 본격적으로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숙모님, 며느리한테 너무 잘해주시는 거 아니에요? 무려 100억이나 들여서 그 고객 다시 찾아온 거잖아요. 따지고 보면 호산 그룹에 뭔가를 안겨다 준 것 같지 않은데요.”최현아의 말에 회의실은 순간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지금 가장 당황스러운 사람은 고영란이다.‘어떻게 알았지? 내가 100억으로 다시 빼앗아 왔다는 거?’유명훈은 마침내 터지고 말았다.“그게 사실이냐! 이렇게까지 민정이 편을 들어주는 것이었냐! 설마 보잘것없는 고객 하나를 빼앗아 왔다고 현아 자리에 민정이를 앉힐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유명훈은 회의가 정식으로 시작되기 전부터 최현아를 통해 알게 되었었다.이번 일에 고영란이 끼어들어서 커닝했다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유명훈의 호통 소리에 고영란은 순간 얼어붙고 말았다.애꿎은 두 손만 꼭 움켜쥐고서 최현아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하지만 그 또한 잠시 바로 아무런 소리로 하지 않은 채 시선을 거두었다.‘이게 무슨 개망신이야! 민정이 때문에 나까지! 가만히 회사나 다닐 것이니 내기는 왜 해서 이 난리야!’고영란은 모든 분노를 박민정에게 돌렸다.하지만 오늘 박민정은 고영란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 정반대로 오히려 체면을 세워주게 된다.“그럼, 계속...”최현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회의실 문이 밖에서 열렸다.순간 문
자기가 빼앗아온 프로젝트에 대해서 박민정은 자신감이 넘쳤다.IM 그룹에도 호산 그룹에도 극히 중요한 프로젝트이니 말이다.“이거 도시 중심에 있는 그 땅 아니에요? IM 그룹이 진주시에 오자마자 계약한 그 땅이잖아요.”이 땅은 IM 그룹이 호산 그룹의 프로젝트를 빼앗아 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IM 그룹에서 직접 맺은 프로젝트였다.박민정은 처음부터 IM 그룹에서 빼앗아 간 프로젝트를 다시 빼앗아 올 생각이 없었다.여러 번 반복되는 과정에서 모든 게 변해 있을 것이라고 이미 예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렇게 할 바에는 차라리 IM 그룹의 프로젝트를 빼앗아오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던 박민정이었다.“도시 중심의 그 땅이 맞습니다! 박 비서님께서 정말로 해내셨네요!”“설마요. IM 그룹에서 가만히 있을 것 같지 않은데요?”“IM 그룹에서도 알고 있습니까?”조금 전까지 박민정을 무시하던 호산 그룹의 에이스 직원들은 계약서를 훑어보면서 감격해 마지 못했다.순간 박민정에 대한 모든 색안경이 벗겨지게 되었다.고영란은 지금, 이 상황이 마냥 이상할 따름이었다.“도시 중심의 땅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2달 전에 허가를 받게 된 땅인데, IM 그룹에서 엄청난 돈으로 그 땅을 살 수 있게 됐다고 들은 바가 있어요. 본사에서도 나서고 싶었지만, 그땐 유 대표님께서 임직하신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럴 만한 시간도 정력도 없으셨거든요.”어느 한 고위직 직원이 고영란에게 설명해주었다.순간 고영란은 의문이 탁 트이면서 그동안 내내 좋지 않은 시선으로 봐 왔었던 박민정이 자기 체면을 살려준 것이라며 웃음꽃이 활짝 피게 되었다.유명훈과 최현아 역시 지금 믿어지지 않아 입이 떡 벌어져 있다.“계약서라니 설마 위조한 거 아니죠? 나도 좀 봐봐요.”최현아는 손을 내밀었고 어느 한 고위직이 계약서를 건네주면서 일깨워주었다.“위조한 거 아니에요. 회사 인장도 박혀 있고 절대 틀림없을 거예요.”최현아는 그 말에 상대하지 않고 바로 계약서를 훑어보았다.그 결과
오늘 고영란과 박민정은 같은 라인에서 ‘적’과 맞서고 있다.최현아는 고영란의 말에 말문이 턱 막혔고 어느새 얼굴도 화끈 달아올랐다.“제가 아무리 그래도 마케팅 총 팀...”하지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고영란이 바로 공격을 날렸다.“근데 지금은 단지 마케팅 5팀의 팀장이잖아.”“...”“그 자리에 걸맞은 실력이든 아니든 난 너야말로 가장 바닥에서 천천히 배워야 한다고 생각해. 모두가 알다시피 우리 남준이랑 남우 회사에 들어오자마자 가장 무거운 짐을 어깨에 메고서 천천히 일떠선 거야.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어떤 사람은 타고난 천재이고 어떤 사람은 가장 기초부터 닦을 수 없어. 아니면 평생 기초만 닦으면서 살든가 말이야.”고영란의 말에 최현아는 더더욱 얼굴을 들 수 없었다.갈 길을 잃은 최현아는 유명훈을 바라보면서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유명훈은 지금, 이 상황에서 최현아의 편을 들어주기가 그러했다.“현아야, 계약서까지 체결한 이상 그냥 계약서에 적힌 대로 하여라.”순간 최현아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네...”회의 내내 최현아는 몸 둘 바를 몰라 했다.회의가 끝나고 나서도 고위직들은 박민정을 향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대단하다면서 위험을 무릅쓰고 용감하게 도전했다면서...밖에 듣고 있던 추경은은 박민정이 이번 내기에서 이기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면서 나지막이 중얼거리기도 했다.“난 또 얼마나 대단한 줄 알았네! 박민정 하나도 이기지 못하는 주제에 참!”한편, 고영란은 박민정을 사무실에 남겨두었다.처음으로 그리고 진심으로 박민정을 탄복하고 있는 고영란이다.“이번 일은 아주 완벽히 잘했어. 근데 너무 위험한 일이었다는 건 사실이야. 만약 최현아한테 지게 되었다면 호산 그룹에 발 들여놓기 힘들었을 거야.”고영란은 마침내 어른다운 모습으로 말했다.박민정도 그제야 고영란이 자기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하지만 오늘 너무 잘했어. 아주 최고였어
어깨를 으쓱거리고 있는 유남준의 모습에 서다희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우리 대표님 아주 사랑에 푹 빠지셨구나.’어느새 퇴근 시간이 다가오자 유남준은 박민정에게 달려가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문을 나서려고 할 때 그만 어느 한 의자에 부딪히고 말았다.서다희는 부랴부랴 의자를 옮기면서 사과했다.“죄송합니다. 조금 전에 손님이 오셔서 내놓은 의자였는데, 원래 자리로 옮긴다는 것을 깜빡했습니다.”유남준은 화를 내지 않고 김인우의 말이 떠올랐다.가능한 한 수술을 이른 시일 안에 받아야 한다는 것.만약 계속 지체하게 되면 머릿속의 유리 파편을 빼내기도 어려울 것이고 뺀다고 하더라도 시력을 회복하기 어렵다고 말이다.앞으로 어쩌면 평생 캄캄한 세상에서 살 수도 있다는 생각에 유남준은 급 기분이 가라앉았다.“괜찮아. 가자.”“네.”...호산 그룹.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박민정은 유남준의 차를 보고서 바로 달려가서 차에 올랐다.“남준 씨, 나 왔어요. 저녁에 뭐 먹고 싶어요?”소리만 들어도 무척이나 흥분하여 있다는 것을 유남준은 느낄 수 있었다.하지만 그 예쁜 얼굴을 볼 수 없었다.“난 뭐든 좋아. 네가 추천하는 대로 가자.”유남준의 정서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박민정은 근처에 있는 맛집을 찾기 시작했다.이윽고 어느 한식당의 리뷰가 눈에 들어왔다.“이 한식당으로 가요.”“그래.”한식당의 음식들은 보통 정갈하고 맛도 좋으며 건강하기까지 하다.목적지에 이른 뒤 박민정은 유남준의 손을 꼭 잡고 부축해 주었다.“계단 조심해요.”왠지 모르게 유남준은 속이 점점 답답해졌다.만약 실명된 게 아니었다면 ‘계단 조심해’라는 말은 유남준이 박민정에게 했었을 것이니 말이다.먼저 앞장서서 박민정을 보호하고 있었을 것이니 말이다.그렇게 서로 다른 감정으로 어렵게 자리에 앉게 되었다.여러 가지 음식을 주문하고 난 뒤, 유남준은 그만 참지 못하고 박민정에게 물었다.“뭐 하나만 물어볼게.”박민정은 물 한 모금을 마시고 물었다.“뭔데요?”“만약
박민정은 이제는 유남준을 상대하고 싶지도 않아 음식에 온갖 정신을 몰두하기 시작했다.어느덧 아이를 품은 지 4개월이 넘다 보니 식욕이 폭증하고 뭐나 먹고 싶고 뭐나 맛있게 먹게 되었다.오늘 저녁은 밖에서 먹고 들어간다고 이미 박윤우에게도 알린 박민정이다.외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 두 사람은 각자 바삐 돌았다.박민정이 아이랑 놀아주고 있을 때 유남준은 결심이라도 한 듯이 밖으로 나와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수술시간 좀 알아봐 줘.”“진심이야?”“응.”“형수한테는 말했어?”보통 일도 아니고 박민정이 알고 있는 것이 맞는다고 판단한 김인우이다.“아니, 우리 둘만 알고 있어. 그냥 아무도 모르게 수술하자.”유남준의 말을 듣고서 김인우는 걱정이 밀려왔다.“그건 좀 아니지 않아? 혹시라도... 어떻게 하려고 그래?”“민정이랑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제대로 준비하고 난 뒤에 수술받을 거야. 그러니 신경 쓰지 않아도 돼.”유남준은 거듭 당부했다.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김인우는 더는 말리지 않았다.한번 결정한 일을 절대 바꿀 리가 없는 유남준이니 말이다.“알았어.”김인우는 시간을 한번 체크하고 나서 유남준의 차트를 확인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보름 뒤에 하자.”“그래.”더는 물어보지 않고 유남준은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다음 날.유남준은 서다희에게 연락해서 변호사인 강연우와 연락이 닿았다.강연우의 사건에 대해서 알아보았는데, 믿을 만한 사람이고 본성은 악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유남준은 보통 박민정 때문에 이성을 잃어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외에 다른 사람을 상대로 하면 아주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그 사람이 믿음직한 사람인지 아닌지 말이다.“강 변호사, 저 유언장 좀 작성하려고요.”그 한마디에 서다희와 강연우는 두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지금 가장 당황하고 놀란 사람은 서다희이다.“대표님,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대표님 나이에 유언장을 작성하는 사람은 없습니다.”서다희는 유남준을
서다희는 유남준의 뜻을 알아들었다.“사모님은 알고 계십니까?”“아니, 모르게 진행할 거야.”박민정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그뿐만 아니라 유남준은 수술로 바보가 된다면 박민정이 자기를 포기하고 버리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아직 유남준의 의식 속에는 못난 자신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여자인 박민정에게 모든 걸 맡기고 기대어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말이다.“네.”...호산 그룹.오늘 박민정은 마케팅 5팀 팀장의 신분으로 출근하게 될 것이다.박민정이 오기 전부터 마케팅 5팀의 팀원들은 삼삼오오 수군거리고 있었다.“진짜 해낼 줄은 몰랐어!”“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최현아 그 사람이랑 다 똑같을 거야.”“난 그렇지 않다고 봐. 최현아랑 전혀 다른 사람인 것 같았어.”다들 의견이 분분했다.마케팅 부서는 본래 남자가 많고 여자가 적은 편이다.대부분이 박민정 역시 최현아와 비슷한 실력으로 관리 따위를 일절 모르고 오로지 배경으로 그 자리에 오른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박민정은 출근하자마자 가장 먼저 마케팅 5팀 팀원들에게 최현아가 오기 전의 모든 제도를 회복할 것이라고 알렸다.순간 마케팅 5팀 팀원들은 멍하니 있다가 환호하면서 박수까지 미친 듯이 쳤다.최현아의 제도에 비하면 그 전의 제도가 얼마나 좋았는지 팀원들은 제대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전의 제도하에 마케팅 5팀은 분기마다 마케팅 부서 전체를 통틀어서 일등을 차지하곤 했었으니 말이다.이윽고 박민정은 부팀장까지 임명하여 그에게 다시 마케팅 5팀의 명예를 회복하게끔 격려했다.박민정의 결정에 반대의 소리를 내거나 언짢아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오히려 전과 다른 눈빛으로 박민정을 바라보기 시작했다.“박 팀장님, 앞으로 저희 팀을 이끌고 가실 텐데 오늘 저녁에 저희끼리 환영식이라도 할까요?”“맞아요. 저희가 준비할게요.”“그럴 필요 없습니다. 이번 달에 열심히 달리셔서 매출액을 올리시기 바랍니다. 그럼, 전 그것으로 여러분의 환영을 받았다고 간주할 것입니다.”“네!
자기 전까지만 해도 박민정은 유남준이 자기랑 장난삼아 그런 소리를 하는 줄 알았었다.그러나 잠들기 직전에 유남준은 서류 하나를 꺼내 들었다.“읽어봐봐.”박민정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고 믿어지지도 않았다.“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잘 거예요.”“예전에 있었던 일을 하도 많이 잊어버려서 그래. 이른 시일 내로 모든 걸 알아야 하니 네가 좀 읽어줘.”너무 몰아붙이면 박민정이 의심할 수도 있으니 유남준은 다른 식으로 말머리를 돌렸다.과연 박민정은 성화에 못 이겨 읽기 시작했다.그렇게 한참을 읽다가 졸음이 밀려와서 그만 잠들고 말았다.소리가 끊기자 유남준은 박민정의 손에서 서류를 빼내서 잘 눕힌 뒤 품속으로 끌어안았다.그 뒤로 남은 시간 동안 유남준은 마치 엄숙한 선생님처럼 박민정을 스파르타 하게 가르쳤다.직원 관리는 어떻게 하는지 비즈니스 자리에서는 어떻게 소통을 해야 하는지 등 여러모로 말이다.가장 이른 시일 안에 박민정에게 모든 걸 가르쳐주고 싶다는 욕심이 가득했다.처음에 박민정은 그리 열심히 배우지 않았었다.그러던 어느 날 최현아가 호산 그룹으로 다시 오게 된 걸 보게 되었다.최현아는 득의양양한 모습으로 박민정에게 말했다.“내가 다시 복귀할 줄은 몰랐지? 나 앞으로 실적이 가장 좋은 마케팅팀에서 팀장으로 일해.”“...”박민정은 어이가 없었다.유명훈이 아무리 본처의 편을 든다고 하더라도 이건 너무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이대로 나가다가 호산 그룹이 망할 수도 있는데 말이다.최현아는 가기 전에 일부러 박민정에게 귀띔까지 해주었다.“참, 마케팅 부서 전체에 규칙 하나가 있어. 실적에서 꼴찌 한 팀은 바로 탈락이라는 규칙 말이야. 만약 앞으로 마케팅 5팀의 실적이 바닥이라면 너희 팀 전체가 회사에서 잘리게 될 거야. 그리고 회사에서는 호산 그룹 이미지와 능력에 알맞은 신인을 다시 뽑을 거야.”마케팅 5팀의 현재 팀장으로서 박민정 역시 잘리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박민정은 그 말을 듣고서 겁에 질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오기가 발
“지금, 이 나이니까 더 이혼하자는 거예요. 굳이 남은 인생을 당신한테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고영란은 말을 마치자마자 안방에 들어갔다.그러나 유지욱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러다가 문득 여태껏 이혼에 대해 거론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심술부리는 원인이 분명 아버지 재산 때문인 것 같았고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이튿날.유명훈의 장례식은 계속 진행되었고 박민정의 친구들도 모두 오게 되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손연서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씩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장례식의 침울한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최현아는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한쪽에서 사람들과 유명훈의 유언장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욱과 고영란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그렇게 유명훈의 장례는 총 3일 동안 진행 후 끝났다.고영란은 담담한 얼굴로 박민정과 유남준, 그리고 유남우에게 말했다.“나랑 네 아버지는 이만 갈라서려고 해.” 순간 모든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옆에 서 있던 유지욱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그는 원래 유명훈의 장례가 끝나면 계속해서 여행이나 다니려고 했었는데 뜬금없이 고영란한테서 이혼 통보를 받게 되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일시적으로 심술부리는 거라 생각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지금 애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 진짜 이혼하려고?”“네.”고영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고 지금처럼 사는 게 저는 너무 괴로워요. 지금 당장 법원에 갑시다.”고영란은 지금 그들의 의견을 구하려는 게 아니다.유지욱도 자존심이 꽤 센 사람이라 단번에 그러자고 하더니 두 사람은 법원으로 출발했고 두 아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자식들도 이미 다 컸고 자기 혼인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유남준과 같이 돌아가는 차 안
고영란도 유석진의 고함에 깜짝 놀라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여태껏 모든 집안일을 아내한테 떠넘긴 채, 홀로 밖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유지욱이 원망스럽기만 했다.한 사람에 대한 단념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이런 실망감이 천천히 쌓이면서 식어가는 것이다.보아하니 오늘 저녁에도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유지욱이 도착해보니 유씨 가문의 모든 친척이 다 모여있었다.그리고 이미 상복으로 갈아입은 고영란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왜 진작에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그의 물음에 고영란은 실망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제가 말해주지 않았다고요? 한 달 전에 전 분명히 아버님 건강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으니까 와서 회사 일 좀 도와드리라고 귀띔해 줬어요.”“난 네가 우리 아버지 재산 때문에 나더러 오라는 줄 알았지.”유지욱의 말에 고영란은 큰 충격을 받고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 두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유지욱 씨, 정말 어이없네요. 맞아요, 제가 빨리 돌아오라고 했던 원인이 아버님의 재산이 조금이라도 공평하게 지욱 씨한테도 나눠줬으면 했어요. 그런데 그 재산이 전부 아주버님한테 넘어갔네요?” 그러나 유지욱은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이었다.“그깟 돈 몇 푼 가지고 왜 그래? 우리가 모두 한 식구인데 주면 줬지.”유지욱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님들을 맞이하러 떠났다.그리고 유석진과도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에 고영란은 제대로 마음이 상했다.박민정도 손자며느리로서 유남준과 같이 손님들을 맞이하다가 우연히 시부모님이 서로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사실 유씨 가문에 시집온 이후로 시아버지인 유지욱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유지욱은 젊었을 때부터 고집불통에 집안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그저 매일 여행이나 다니면서 자유롭게 사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여 유지욱과 고영란은 1년 중에도 만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박민정은 유남준에게 살짝 다가가 그에게 말했다.“남준 씨, 가서 어머님 좀 위로해 주세요.”여자
유남준의 아버지, 유지욱은 계속 외국에서 살다보니 이 자리에 없었다.그러자 고영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지욱 씨는 지금 당장 오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방금 비행기 탔다고 했으니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릴 거예요.”그러자 유석진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그러면 지욱이가 도착하고 나서 다시 말할 테니까 외부인은 참견하지 말아요.”순간 고영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악물고 말했다.“이 집에 들어와서 아이를 둘씩이나 낳아줬는데도 제가 아직 외부인인가요? 저는 오늘 아버님께서는 왜 그리도 자식들을 편애하시지 꼭 물어봐야겠어요!”“제 아들들이 능력이 뛰어나면 이런 불공평한 대우도 다 받아들여야 하나요?”여태껏 유명훈은 많은 주식을 갖고 있었다.비록 유남준이 현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유명훈의 지분이 그대로 유석진네로 넘어가게 되면 유남준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더구나 유남우도 그의 재산이 필요한데 말이다!게다가 유명훈은 오랜 세월 동안 주식 말고도 분명 많은 재산을 모았을 텐데 그 돈마저 전부 저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고영란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유석진은 유명훈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여태껏 지욱이를 잘 붙잡아 두지 못한 제수 씨를 탓해야죠! 지욱이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소용없어요!” 고영란이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유남준이 그녀를 말렸다.“엄마, 그만해요.”여태껏 유명훈이 유석진네만 편애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던 그이기에 지금 아무리 그와 말싸움해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유남우도 불쾌했지만 애써 덤덤한 척 그녀에게 말했다.“엄마, 형 말이 맞아요. 할아버지께서 결정하신 대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싸울 필요 없어요.”이 시각, 침대에 누워있던 유명훈은 호흡이 점점 더 가빠져 헐떡거리기 시작했다.그런데도 눈앞에서 자식들이 자기 재산 때문에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씁쓸하기만 했다.“지욱이...”그는 힘겹게 유지욱을 불렀다.유지욱은 평소에도 그의 말을
최현아는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지만 박민정은 그저 냉담한 얼굴로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그러자 그녀는 뻘쭘해진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일은 무슨, 윤소현이 드디어 판결받았다고 해서 축하해주려고 왔지.”박민정은 분명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했다.지금 최현아와 그의 시아버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왠지 그럴수록 더 수상했다.“감사합니다. 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일 하러 갈게요.”말을 마치자마자 박민정이 뒤돌아서니 역시나 최현아가 빠르게 그녀의 팔을 부여잡았다.“민정아,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한 식구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박민정은 이제 와서 한 식구라는 그녀의 말이 그저 가소로웠다.“도대체 할 말이 뭔가요?”그리고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최근에 할아버지 건강이 점점 악화하면서 동서랑 남준 씨가 그립기도 하고 우리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도 보고 싶은가 봐. 혹시 오늘 밤 할아버지 뵈러 같이 가지 않을래?”최현아는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사실 박민정도 할아버지의 건강이 여태껏 좋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오늘 두 사람을 부른 이유도 아마 자신이 얼마 버티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네, 알겠어요.” 최현아는 그제야 박민정의 팔을 놓아줬지만 그녀가 떠나가자마자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그리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한껏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재수 없는 것, 운발로 지금 자리에 올라앉은 주제에.” 차에는 낯선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박민정한테 화낼 필요 없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무조건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할아버지의 주식이랑 모든 돈을 너한테 넘길 수 있도록 잘 구슬리는 거야.”그러자 최현아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나도 알아, 저번에 이미 할아버지랑 말해봤다니까? 유남준 씨랑 민정이는 괜히 고고한 척하면서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말한 상황이라 우리 쪽에 전부 몰리게 되어있긴 한데, 난 지금 성혁 씨 얼굴만 봐도 짜
조하랑은 그제야 화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그러면 왜 저 여자한테 찾아갔어요?”“당연히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러 갔죠. 그리고 이지원에 대해 정신감정도 의뢰했거든요. 만약 진짜로 정신에 이상이 있는 거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 모든 게 다 쇼하는 거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려고 했어요.”김인우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다가 조하랑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예전에 제가 지원이한테 어떻게 가스라이팅 당했는지 하랑 씨도 잘 알잖아요. 만약 저를 구해줬던 사람이 형수님이었단 사실을 진작에 알았다면 절대 그 애를 도와주지도 않았을 겁니다.”“지금은 그저 마땅히 받아야 할 벌만 받았으면 좋겠고요.”조하랑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제가 오해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인우 씨가 또 그새를 못 참고 다른 여자한테 찝쩍거린다고만 생각했어요.”그녀의 말에 김인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못 참고 되물었다.“하랑 씨,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순간 조하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누, 누가 질투한다는 거예요? 그저 저를 배신한 인우 씨한테 화나고 그런 사람을 좋아했던 나한테 실망했을 뿐이라고요!”“알겠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리고 의사도 임산부가 흥분하면 아이한테 안 좋다고 말했잖아요.”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는 다정하게 조하랑을 품에 안았는데 순간 그녀는 얼굴이 더욱 빨개진 채 온몸이 굳어버렸다.당연히 김인우도 눈치채고는 빠르게 물었다.“왜요, 부끄러워요?”“그, 그럴 리가요...”조하랑은 말까지 더듬으며 애써 덤덤한 척했다.“저도 안을 줄 알거든요?”그리고 똑같이 김인우를 꼭 안아줬는데 이번에는 김인우가 속으로 움찔했다.추운 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꼭 껴안아 줬는데 거리를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그들에게 멈춰졌다 가곤 했다.조하랑도 어느새 그걸 느꼈는지 재빨리 김인우를 밀쳐냈다.“됐어요. 이제 병실로 돌아가 봐야 하니까 인우 씨도 그만 돌아가요.”“저랑 같이 안 가고요?”김인우의
김인우는 유남준의 마지막 한마디까지 다 듣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그러면 지금 하랑 씨가 형수님이랑 같이 있다는 거지?”“응.”김인우가 왠지 자신이 방금 했던 말을 귀담아듣지 않은 것 같아 유남준은 다시 한번 주의를 줬다.“결혼 전에는 아무 여자나 끼고 놀아도 상관없겠지만 지금은 결혼도 했고 아이까지 있는 마당에 좀 조심해야 하지 않겠어?”김인우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황당하다는 듯이 그에게 답했다.“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 버릇 고친지가 언젠데, 예전의 내가 아니야.”“응, 그러면 다행이고.”“그러면 지금 하랑 씨는 병원에 있는 거야?”“응.”유남준은 대답하자마자 전화를 끊었는데 보아하니 오늘에도 독수공방해야 할 것 같았다.김인우는 그길로 빠르게 조하랑 보러 병원으로 달려갔다.그리고 가는 길에 방금 유남준이 했던 말을 곱씹어 보았다.‘설마 하랑 씨가 오해한 건가?’그러다가 눈이 번쩍 뜨이더니 무언가가 생각난 듯 자기 머리를 퍽퍽 내리쳤다.“이 멍청한 놈, 그때 통화하는 걸 분명 옆에서 다 들었던 거야!”그는 곧바로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이지원의 영상을 자기한테 보내라고 했다.드디어 병원에 도착했다.조하랑이 막 잠들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누구세요?”박민정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간호사인가? 내가 가볼게.”“응.”박민정이 슬리퍼를 신고 문어구에 다가가 문을 열어보니 눈앞에 김인우가 서 있었다.“형수님, 하랑 씨 여기에 있나요?”김인우는 다급하게 물었다.박민정은 그가 이렇게 빨리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해 살짝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네.”“제가 들어가도 될까요?”그러나 박민정이 대답하기도 전에 조하랑은 김인우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빠르게 다가와 차갑게 말했다.“아니요. 민정아, 너는 일단 먼저 자. 내가 나가서 말할게.”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를 한번 쏘아보더니 그대로 밖으로 나갔고 김인우도 서둘러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하랑 씨, 진짜 오해예요.”그러나 조랑
김인우는 집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조하랑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식은땀이 맺힌 채로 급히 박예찬과 김훈에게 달려가 물었다.하지만 김훈은 일부러 모른 척하며 그가 이번 기회에 정신 좀 차리길 바랐다.“나도 몰라. 하랑이가 방에 없다고? 화장실 간 거 아니야? 화장실은 찾아봤어?” 김훈이 일부러 태연하게 말하자 김인우는 인상을 찌푸렸다.“거기도 없어요.”“그거 참 이상하네.”김훈은 걱정스러운 척하며 말했다.“그럼 멀뚱멀뚱 서서 뭐 하는 거냐? 어서 찾아봐야지. 지금 임신 중이잖아.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가만두지 않겠다.”박예찬도 거들었다.“오늘 아줌마가 좀 안 좋아 보이긴 했어요. 혹시 가출하신 거 아니에요?”그 말에 김인우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그는 곧장 조하랑을 찾아 나섰다.한편, 조하랑은 이미 병원에 도착해 있었다. 박민정이 곁을 지키고 있었고 둘은 정수미와 잠깐 이야기를 나눈 뒤 병실로 들어가 조용히 대화를 이어갔다.“하랑아, 너 그냥 이렇게 온 거야? 가족한테는 말 안 했어?”조하랑은 고개를 저었다.“응. 그냥 조용히 나왔어. 지금은 누구 얼굴도 보기 싫어.”“그래도 집에 한 통은 전화해. 안 그러면 걱정하실 텐데.”박민정이 말했다.“괜찮아. 다들 내가 자는 줄 알 거야. 내일 아침에 슬쩍 들어가면 돼.”조하랑은 개의치 않는 듯 말했다.임신 후로 김인우와는 방도 따로 쓰고 있었기에 자신이 방에 없다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알겠어.”박민정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후 조심스레 물었다.“그런데, 하랑아. 너 아까 말한 그 여자, 혹시 누군지 짐작은 가?”조하랑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난 김인우 주변 사람들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어.”박민정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그럼 내가 남준 씨한테 한 번 물어볼게. 혹시 오해일 수도 있으니까.”“응, 좋아.”조하랑도 더 큰 싸움으로 번지는 건 원치 않았다.박민정은 조하랑 앞에서 유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유남준도 막
조하랑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걱정 마, 민정아. 나 그냥 좀 화가 났을 뿐이야. 아직은 냉정해.”그리고는 씁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야. 그냥... 기분이 나빠서 그래. 내가 지금 그 사람 아이까지 품고 있는데 저렇게 행동하면 기분이 어떻게 안 상하겠어.”박민정은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잠시 후, 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민정아, 나 네가 있는 곳으로 가도 될까?”“당연하지. 내가 데리러 갈게.”박민정은 임신한 친구의 감정이 요동칠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걱정된 마음에 바로 나섰다.하지만 조하랑은 코끝이 붉어진 채 대답했다.“아냐, 이미 차 탔어. 지금 가는 중이야.”그녀는 더 이상 그 집에 있고 싶지 않았다. 김인우가 눈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둘 수가 없었다.박민정은 그녀가 이렇게 단호하게 움직일 줄은 몰랐던 지라 속으로 적지 않게 놀랐다.“알겠어. 그럼 내가 문 앞에서 기다릴게.”“응, 고마워.”...한편, 김인우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길가에 있는 꽃집을 발견했다.그는 운전기사에게 차를 세우게 하고는 직접 차에서 내려갔다. 잠시 후, 그는 품에 형형색색의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돌아왔다.차에 다시 올라타자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가자. 좀 빨리 가 줘.”예전에도 김인우는 여자를 위해 꽃을 보낸 적이 있었지만 그건 대부분 비서가 대충 주문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꽃다발은 그가 직접 고르고 색을 맞춰 정성껏 고른 것이었다.운전기사도 그의 얼굴에서 어쩔 수 없이 번지는 미소를 보고는 감탄하듯 말했다.“사모님은 참 복도 많으시네요. 이사님께서 뭐든 다 챙기시니.”김인우는 입꼬리를 높이 올리며 웃었다.“당연하지. 내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사람이잖아. 그 정도는 해야지. 사실 하랑 씨가 임신하지 않았더라도 난 여전히...”하지만 마지막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그는 조하랑을 보기 위해 한 걸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