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조심해!”누군가가 재빨리 그녀의 팔을 붙잡아 흔들림 없이 몸을 받쳐 주었다.주선웅이었다.귓가에서는 걱정하는 듯한 기색이 돋보이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수빈아...”최수빈은 온몸에 힘이 풀린 채 그의 품에 기대서서 끝내 참아왔던 눈물을 쏟아냈다.그 모습을 본 주기훈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주선웅, 당장 놔!”갑자기 주기훈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누가 들어도 엄하고 꾸짖는 톤이었다.“그 애는 전에 네 제수씨였던 사람이야. 그런데 그렇게 안고 있으면 돼? 이 일이 소문이라도 나면 주씨 가문 체면은 어떡하려고!”미간을 깊게 찌푸렸지만 주선웅은 손을 놓지 않았고 오히려 최수빈을 조금 더 단단히 부축했다.그러고는 주기훈을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아버지, 수빈이는 민혁이의 전처일 뿐만 아니라 제 동생이기도 해요. 오래전부터 저는 이미 수빈이를 제 친여동생처럼 생각해 왔습니다.”주기훈은 말문이 막힌 듯 잠시 굳어졌다. 얼굴은 분노로 인해 시퍼렇게 변했지만 당장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한편 옆에 서 있던 주민혁은 주선웅의 품에서 보호받고 있는 최수빈을 바라보았다.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심하게 떨며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할 만큼 울고 있는 모습이었다.그의 눈빛은 깊고 어두웠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찬 연못처럼, 누구도 알 수 없는 감정이 그 안에서 뒤엉켜 요동치고 있었으며 손끝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하지만 결국 주민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용히 몸을 돌려 복도 끝으로 걸어가 모두에게 등을 보인 채 잿빛으로 흐린 창밖을 바라보았다.병원 영안실 밖에는 긴 의자가 놓여 있었다.최수빈은 가장 구석진 계단에 앉아 무릎을 끌어안고 팔 사이에 얼굴을 묻은 채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눈물이 소매를 적시며 차갑게 스며들었지만 가슴속의 서늘함과 묵직한 통증은 조금도 가시지 않았다.주변은 고요했고 가끔가다 지나가는 발소리와 낮은 대화 소리만이 들려왔다.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계단 옆에 누군가가
육민성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더는 묻지 않았다.그는 최수빈과 주민혁 사이의 얽힌 사정이 너무 많아 몇 마디 말로 설명될 일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집에 돌아오자마자 최수빈은 그대로 소파에 몸을 던졌다.순식간에 온몸을 휘감는 피로감에 눈을 감았지만 머릿속에서는 주선웅의 말이 계속 맴돌았다.‘선웅 오빠가 한 게 아니라고? 그럼 주민혁인가?’생각하고 싶지도 않았고 굳이 밝혀내고 싶지도 않았다.주민혁과 관련된 모든 일은 엉켜버린 실타래 같아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어지러워졌다.그때 갑자기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화면에는 ‘저택’이라는 두 글자가 떠 있었다.최수빈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으며 급히 전화를 받았고 수화기 너머로는 울먹이는 본가 도우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수빈 씨, 빨리 돌아오셔야 해요! 어르신... 어르신께서 갑자기 쓰러지셨어요. 지금 구급차로 병원에 가는 중인데 의사 선생님 말씀이 상태가 좋지 않답니다...”최수빈의 몸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피가 한순간에 얼어붙는 느낌이었다.“어느 병원이죠?”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차마 억제할 수 없었다.“제일병원이요. 빨리 오세요!”전화를 끊자마자 최수빈은 비틀거리듯 집을 뛰쳐나와 차 키를 움켜쥐고 아래층으로 달려갔다.원금영은 늘 건강한 편이었다.‘연세가 있긴 하지만 지난달에 찾아뵈었을 때만 해도 웃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어떻게 갑자기 쓰러지신 거지?’차를 몰고 가는 내내 최수빈은 속도를 줄이지 못했다. 신호도 몇 번이나 무시했다.창밖 풍경이 빠르게 뒤로 흘러가고 심장은 터질 듯 뛰었으며 새하얘진 머릿속에 오직 하나의 생각만이 맴돌았다.‘할머니한테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안 돼.’원금영은 주씨 가문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에게 따뜻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막 주씨 가문에 시집가서 어른들에게 이런저런 구박을 받을 때도 원금영은 최수빈을 감싸주며 몰래 먹을 것을 쥐여 주고는 여자도 자기 힘을 가져야 한다고, 남들한테 무시당하면 안 된다고 말해주었었다.이후 주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퍼졌고 몇 개의 시선이 자신의 쪽으로 쏠리자 그 비서의 얼굴에는 잠깐 우쭐한 기색이 스쳤다. 막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현장의 소란을 얼음송곳처럼 단번에 꿰뚫는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누가 운이 좋아 여기까지 왔다고요?”검은 정장 차림의 주선웅은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그는 단 몇 걸음 만에 그 비서 앞까지 다가가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방금 저 주선웅의 여동생을 감히 그 입에 올린 겁니까?”“여, 여동생이요?”비서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주씨 가문의 장남에게, 그것도 공개적인 자리에서 지목당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주, 주선웅 씨... 저는 그냥 한번...”이미 이혼한 사이인데도 주씨 가문 사람이 이렇게 나서서 최수빈을 감쌀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그럼 박하린은 대체 뭐가 된다는 말인가.“그냥 한 번이요?”주선웅이 피식 비웃었다. 그 목소리는 고요해진 회장 전체에 또렷이 울렸다.“수빈이의 모든 연구 성과에는 공개된 논문과 특허가 있습니다. 수빈이가 이끈 팀이 넘은 기술적 난관은 항공우주 분야 전문가들조차 극찬했죠.”주선웅은 냉정한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봤다.“남에게 붙어 기어 올라온 주제에 그쪽이 무슨 자격으로 수빈이를 평가하죠?”그러더니 주변을 한 번 훑고 나서 주선웅은 단호하게 말했다.“오늘 여기서 분명히 말해두죠. 최수빈은 저 주선웅의 동생입니다. 또다시 수빈이를 무시하는 말이 나오면 그건 곧 저 주선웅을 무시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봐주지 않을 겁니다.”현장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해져 공기마저 얼어붙은 듯했다.이를 지켜보던 정부 관계자가 곧바로 경호원에게 신호를 보냈고 낮은 목소리로 그 비서를 질책한 뒤 신속히 자리를 떠나게 했다.작은 소동은 그렇게 마무리됐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서로 다른 흔적이 남았다.최수빈은 여전히 무대 위에서 프로페셔널하게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최수빈은 옅게 미소 지었다.“아니에요, 오빠가 오해한 거예요. 저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았어요.”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려는 듯한 그녀를 바라보며 주선웅은 가볍게 입술을 다물었다가 말했다.“내가 바래다주는 게 그렇게 부담스러운 일도 아니잖아. 내 시간 뺏길 정도도 아니고 한 번 태워다주는 거로 이렇게까지 사양할 필요는 없지 않나? 우리 그렇게 낯선 사이도 아니잖아.”결국 최수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예린을 데리고 주선웅의 차에 올랐다.운전대를 잡은 주선웅이 말을 건넸다.“내일 정부기업 합동 대회에서 연설한다면서? 예전의 그 어린애 같던 모습은 다 벗었네. 점점 더 대단해지고 있어.”최수빈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작은 성과일 뿐이에요. 대단할 것까지는 아니죠.”주선웅은 웃기만 하고 더 말을 잇지 않았다.집 앞에 도착해 차에서 내릴 때, 주선웅이 주예린에게 장난감 몇 개를 건네자 아이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고마워요, 큰아빠.”주선웅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별말씀을요, 공주님.”주예린은 그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빠의 형이었고 아빠와 너무도 닮은 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다만 그 눈빛은 아빠와는 또 어딘가 달랐는데 아직 어린 주예린은 그 차이를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뿐이었다.최수빈은 주선웅과 더 이야기를 나누지 않고 딸의 손을 잡은 채 집으로 올라갔다....다음 날.늦가을의 바람이 서늘한 기운을 머금고 불어왔다.최수빈은 회의장에 도착했다.정부 주요 인사들과 업계 거물들이 한자리에 모인 연례 정상회의, 고급 제조업과 기술 혁신을 주제로 한 이번 회의에서 항공우주 공학은 핵심 중의 핵심으로 오전 메인 세션에 배치돼 있었다.최수빈은 무대 뒤에 서서 무의식적으로 연설 원고의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매만졌다.아이보리 톤의 정장 투피스가 반듯한 체형을 더욱 돋보이게 했고 긴 머리는 흐트러짐 없이 뒤로 묶여져 이마와 또렷한 턱선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무대에서 쏟아지는 조명이 객석을 덮으며 아래를 어둑하게 만들었지만 유독
그러고 나서 그녀는 고개를 들어 주민혁을 바라봤다. 말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거리감이 담겨 있었다.“마음 정리되면, 언제든 진실을 말할 준비가 됐을 때 다시 나한테 와서 얘기해요.”이 말을 끝으로 그녀는 주예린의 손을 잡고 몸을 돌려 문 쪽으로 향했다.주예린은 걸음을 옮기다 말고 주민혁을 한 번 돌아봤다. 큰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끝내 참지 못하고 또르르 떨어졌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최수빈을 따라 병실을 나섰다.문이 조용히 닫혔다. 바깥세상과 완전히 단절되듯 주민혁이 밤낮으로 떠올리던 두 사람의 모습도 함께 사라졌다.주민혁은 아까의 자세 그대로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뜨겁게 달아오른 눈물 한 방울이 눈가에서 흘러내려 이불 위로 떨어지며 진한 얼룩이 번졌다....최수빈은 주예린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주예린의 표정은 밝지 않았고 기분 역시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이러한 딸의 상태를 느낀 최수빈은 몸을 낮춰 살며시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엄마가 말했잖아. 아빠는 네 질문에 대답해주지 않을 거라고.”그녀는 아이를 바라보며 물었다.“아빠랑 같이 놀러 다니고 같이 살고 싶다는 생각... 계속했지?”주예린은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아빠가 큰 잘못을 많이 했으니까 엄마가 아빠랑 같이 살지 않는 거겠죠. 전 엄마랑 같이 사는 게 좋아요. 그냥... 다른 친구들은 다 아빠가 있어서 조금 부러웠어요.”말끝이 떨렸고 아이는 감정을 꾹 누르며 애써 버티고 있었다.최수빈은 그런 딸의 모습이 너무나도 가슴 아팠다.아무리 더 보살피고 더 채워주려 해도 아빠의 빈자리는 대신해줄 수 없었다.결국 주예린이 마음속으로 바라던 존재는, 바로 주민혁이라는 차갑고도 먼 아빠였기 때문이다.“오늘 그 사람 보고 나니까 마음속에 답이 조금 생겼어요.”주예린이 다시 입을 열었다.“저도 다른 친구들처럼 아빠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긴 했어요. 그런데... 내 아빠가 저런 모습이면 안 될 것 같아요.”아이는 최수빈을 올려다보
주민혁의 심장이 세게 한 번 뛰었다. 거의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며 저도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들어오세요.”문이 열리자 가장 먼저 보인 건 최수빈의 모습이었다.그녀는 소박한 흰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긴 머리는 어깨 위로 자연스럽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얼굴빛은 다소 창백했으며 눈빛에는 여러 감정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그리고 최수빈의 곁에는 그녀의 손을 꼭 잡은 또 하나의 작은 그림자가 있었다.주예린이였다.이혼 후, 최수빈이 주예린을 데리고 주민혁을 찾아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주민혁은 목이 무언가에 막힌 듯, 하고 싶은 말이 수없이 밀려왔지만 정작 입 밖으로는 단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그래서 그저 딸을 바라보고 있었다. 깊고 어두운 눈동자 속에서 진득한 감정이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최수빈은 병상에 누워 있는 주민혁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병실 안에 있음에도 여전히 차갑고 냉담한 기운을 두르고 있었다.그녀는 생각했다. 이번에 벌어진 모든 일의 흐름이 전생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전생에서는 이 시점에 주민혁에게 어떤 병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었다. 그의 몸은 늘 건강해 보였으니 말이다.‘내가 전생에 너무 많은 걸 놓치고 있었던 걸까?’주민혁의 시선이 최수빈에게 머무르더니 서늘한 목소리가 천천히 흘러나왔다.“밥은 먹었어?”이런 아무 의미도 없는 질문에 답하고 싶지 않았기에 최수빈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그러고는 차가운 시선으로 주민혁을 바라보며 말했다.“민혁 씨, 일이 이 지경까지 됐는데도 아직 나한테 숨길 생각이에요? 도대체 무슨 병에 걸린 거예요?”모든 일이 빙빙 돌고 돌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만 잔뜩 남아 있었다.그리고 최수빈이 모르는 일들, 이해할 수 없는 일들 대부분을 주민혁은 알고 있었다.주민혁은 짙어진 눈빛으로 최수빈을 바라보다가 옅게 웃었다.“네가 날 보러 올 줄은 몰랐어.”최수빈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다시 한번 숨을 고르며 말했다.“난 그냥... 답이 필요해서 온 거예요.”하지만 이 질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