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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Author: 서리배
발판이라는 말이 지원후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나는 목이 막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맞다, 처음에 아빠가 목숨값 명목으로 두 집안의 혼인을 요구한 건 분명히 무례했다. 하지만 아빠는 그날 이후 요양원에 3년째 누워 있다.

그리고 나는 어떻게 되었는가? 계약서는 그의 요구대로 다 서명했고, 양가를 빼면 우리가 결혼한 사실을 아는 사람도 없다.

결혼반지는 학교 근처 기념품점에서 급히 골랐고, 혼인신고도 없었으며, 결혼식은커녕 웨딩사진조차 그의 바쁘다는 한마디에 끝났다. 오늘까지 우리 둘이 함께 찍은 유일한 사진은 결혼 절차를 위한 증명사진뿐이다.

그렇다면 내가 지씨 집안에서 실질적으로 챙긴 게 있기나 한가? 없다.

아, 연경 최고의 집에서 지낸 걸 혜택이라 친다면, 지난 3년간 내가 빨래, 밥, 청소 다 한 것으로 꽤 맞추면 될 거다.

8년 짝사랑 끝에 돌아온 대답은 발판뿐이었다.

쓴맛이 목젖까지 올라왔다. 나는 고개를 숙여 번지는 쓰라림을 눌렀다.

“내일 필기는 시간을 맞춰 갈 거예요.”

그리고 지원후의 예리한 눈매를 마주 보며 낮게 덧붙였다.

“지 교수님이 신경 쓸 일은 없어요.”

다음 날 아침.

나는 정시에 연협병원 인사팀으로 도착했다. 막 자리에 앉았을 때, 옆에서 달콤한 목소리가 들렸다.

“선배님, 이렇게 보네요.”

고개를 들어 보니 정다은이 앉아 있었다. 연한 하늘색 셔츠에 베이지색 수트, 양쪽이 다른 컬러의 메리제인 힐까지. 어린 얼굴과 살짝 어긋났지만 성실함이 풍겼다.

‘얘도 오늘 필기 대상이었어?’

정다은은 신경외과 학생이었다. 이번 연협병원 추천 인원이 고작 여섯인데, 생각보다 뛰어난 후배였던 모양이다.

“그제는 죄송했어요, 선배님.”

정다은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원후 선배님을 챙기느라 제대로 배웅도 못 했네요.”

‘원후 선배님...’

다정하고도 자연스러운 호칭이 귀에 박혔다. 두 사람은 내 예상보다 가까운 모양이다.

생일 파티에서 둘이 웃고 떠들던 장면이 스치고 지나갔다.

“괜찮아요.”

나는 짧게 답했다.

더 말을 이어가려던 정다은은 막 들어온 담당자의 안내에 말끝을 삼켰다.

1시간 뒤, 시험이 종료됐다.

시험지를 걷어 가는 담당자가 우리 줄로 오자, 정다은이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망했어요... 마지막 문제를 제대로 못 쓴 것 같아요.”

불안하고 억울한 목소리에 눈가까지 붉어져 안쓰러움이 절로 느껴졌다.

‘지원후가 이런 스타일을 좋아했구나. 그러니 내가 8년을 애써도 눈에 들지 못했지.’

“와, 저기 신경외과 스타 지원후 선배님 아니야? 어떻게 온 거지?”

웅성거림이 들려 고개를 들었다. 흰 가운에 은테 안경, 평범한 두 가지가 그의 몸에서는 차분하고도 금욕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칭찬 세례에도 눈길 한번 안 준 채 지원후는 곧장 걸어왔다.

심장이 요동쳤다. 가까워지는 키 큰 그림자를 보며 나는 펜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그가 신사답게 멈춰 선 곳은 정다은의 앞이었다.

쿵.

보이지 않는 금이 가슴속 어딘가를 쩍 하고 갈랐다.

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 있어?”

맑은 저음이었지만 묘하게 따뜻했다.

‘그래서였구나. 어젯밤 나를 시험 자리에서 떼어 놓으려 안간힘 쓰던 이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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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교수의 비밀 아내   제40화

    사실 주량이 센 편이 아니었다. 게다가 로열 살루트처럼 도수가 높은 위스키를 마신 탓에 두 잔만에 목이 따끔거리는 느낌이 들었다.하지만 술자리 게임은 분위기를 띄우기 위한 것이며 벌칙을 피하겠다고 몸을 사리면 흐름이 깨지기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두 번째 게임에서도 내가 걸리게 되었고, 연속되는 벌주에 어느새 네다섯 잔을 마셨다.한장미가 술을 권하던 찰나 흥을 돋우느라 바쁜 정다은이 불쑥 입을 열었다.“선배님이 벌써 여러 잔 마셨는데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지원후 덕분에 이 자리에서 정다은의 입김이 제일 셌다. 아니나 다를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술을 마시라고 강요하던 인턴이 갑자기 선심을 쓰는 척했다.“그래, 다은 씨 말대로 이번 벌주는 봐주는 거로 할게.”나는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게임이 끝나고 다시 정다은이 뽑을 차례가 되자 그녀는 카드를 훑어보더니 한참을 망설인 끝에 한 장을 콕 집었다.다이아몬드 9.마침 벌칙 대상이라 술을 마셔야만 했다.정다은은 혀를 날름거리며 멋쩍게 웃었다.“운이 안 좋네.”말을 마치고 나서 술잔을 들었는데 한장미에게 제지당했다.“넌 알코올 알레르기 있잖아. 마시지 마.”정다은이 커다란 눈을 깜빡이더니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아니야, 룰은 지켜야지. 억지 부리면 되겠어?”간드러진 목소리는 고집스럽게 들리기도 했다. 심지어 나도 걱정될 지경이었다.이내 거의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고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정다은의 술잔을 빼앗아 가는 지원후를 발견했다.그렇게 연속 세 잔을 대신 마셨다.지원후는 정다은을 위해 흔쾌히 벌칙을 수행했다.여느 남자친구처럼 모두의 앞에서 사랑하는 여자를 지켜주었다.그녀를 살갑게 챙겨준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심장이 왜 이렇게 아픈 걸까?조금 전 연속으로 술을 털어 넣은 걸 생각하자 코끝이 시큰하며 눈물이 저절로 차올랐다.아마도 취해서 그런 것 같았다.찢어질 듯한 가슴과 쓰라린 위, 결국 입을 가린 채 조용히 룸을 나섰다.화장실에 도착하자 나

  • 지교수의 비밀 아내   제3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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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교수의 비밀 아내   제3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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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교수의 비밀 아내   제37화

    그게 무슨 소리지?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시선이 다시 지원후의 손에 있는 연고를 향했고 그제야 이해가 갔다.이는 경고였다.순간 불쾌한 나머지 비아냥거리며 말했다.“아쉽네요. 주차장에서 마주쳤을 때 증거 삼아 휴대폰으로 사진이라도 찍죠.”마지막 한 마디는 누가 들어도 조롱하는 말투였다.지원후의 동공이 살짝 흔들렸다. 마치 내가 되받아칠 줄은 예상하지 못한 듯 표정마저 굳었다.그가 넋을 잃은 와중에 나는 다시 손을 뻗어 연고를 빼앗아 면전에서 뚜껑을 열었다.어쨌거나 화상을 입은 건 사실이라 고작 기분이 나쁘다고 해서 자기 몸을 혹사시킬 수는 없지.3년 동안 고분고분 참아줬는데도 마음을 열어주지 않았으니 이제는 나 자신을 위해 살기로 결심했다.이내 화상 연고를 조심스럽게 상처 부위에 발랐다.하지만 목뒤라서 거울을 보며 두 번이나 시도했지만 골고루 바르는 데 실패했다.혼자서 끙끙거리며 애를 쓰고 있을 때 문득 허리를 조이는 느낌이 들더니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고, 지원후에게 안겨 세면대에 걸터앉은 꼴이 되었다.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곧이어 목덜미가 서늘했고, 굳은살이 박힌 손가락이 피부를 훑어내리자 익숙하면서 낯선 감촉에 소름이 돋았다.지원후가 약을 발라주다니?결국 주먹을 움켜쥐고 말없이 시선을 돌렸지만 양 볼은 저도 모르게 화끈 달아올랐다.대체 무슨 속셈이지? 그나저나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에 괜히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손만 뻗으면 닿을 듯싶었고,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였다. 게다가 고개만 살짝 들어도 옷깃 사이로 탄탄한 가슴이 보일 듯 말 듯 했다.머릿속으로 남녀가 얽히고설킨 장면이 스쳐 지나갔고 호흡 또한 점점 가빠졌다.“고마워요.”나는 지원후의 손길을 피하며 애써 태연한 척 말했다. 하지만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당황한 티를 고스란히 드러냈다.이내 눈을 질끈 감았고 속눈썹이 저도 모르게 떨렸다. 이때, 지원후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별말씀을.”의미심장한 말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곧이어

  • 지교수의 비밀 아내   제36화

    네 사람이 한 공간에 나타나는 순간 최근에 마주치는 횟수가 너무 많은 건 아닌지 싶었다.특히 맞은편의 남자, 즉 명의상 배우자인 지원후와 헤어진 지 고작 1시간밖에 안 되었다.너무 자주 봐서 불편할 지경이었다.어색한 건 옆에 서 있는 양재원도 매한가지였다. 얼마나 뻘쭘했으면 얼굴에 티가 날 정도일까.반면 순진한 정다은은 아무런 눈치를 못 채고 내 손에 있는 연고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어디 다쳤어요? 재원 씨가 선배님을 위해 일부러 연고까지 가져다줬나 보네요.”차라리 모른 척이라도 하지, 괜히 언급해서 모두의 시선이 오른손에 쥔 연고에 집중되었다.양재원이 잽싸게 대답했다.“마침 여분이 있어서 나빈 씨한테 줬어. 화상을 입었거든.”그는 더듬거리며 말을 이어갔고 중간중간 지원후를 힐끔거렸다.지원후는 아무 반응이 없었고, 오히려 옆에 있던 정다은이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덴 곳이 있어요?”나는 옷깃을 잡아당기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가벼운 상처라 걱정 안 해도 돼.”정다은은 생각보다 눈치가 빨랐다. 사소한 몸짓에도 화상 부위를 알아차리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재원 씨, 지 선배님한테 정말 지극정성이네요!”양재원은 흠칫 놀라더니 초조한 얼굴로 나를 힐끔거렸고 이내 지원후를 바라보았다.“선배, 뭐라도 말 좀 해봐요.”다급한 목소리는 자칫 오해라도 살까 봐 걱정하는 듯싶었다.지원후는 여전히 무덤덤한 모습으로 한참이 지나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나랑 상관도 없는 일에 할 말이 뭐 있어?”상관없는 일이라니?어안이 벙벙한 나는 잘못 들은 줄 알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정작 폭탄 발언한 남자는 마치 성인군자처럼 고고하게 서 있었다.법적 배우자로서 언제나 함께하고 서로 의존해야 하지만 지금은 옆에 있는 여자에게 충성을 다 하려고 명의상 아내를 다른 남자와 엮어주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대체 얼마나 사랑하면 가능할까?손톱이 어느덧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어이가 없는 와중에 어느 정도 납득은 갔고, 받아치려는

  • 지교수의 비밀 아내   제35화

    이내 감정을 추스르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갔다.지원후는 이미 떠났고 한정수와 몇몇 직원만 남아 있었다.“오늘 지 교수님이 제때 수습해서 천만다행이지.”한정수는 마치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처럼 안도했고 간사한 표정으로 나를 힐긋 쳐다보았다.“나중에 만나면 잊지 말고 고맙다고 해.”감사라.나는 속으로 곱씹었다. 화장실에서 엿들은 대화를 떠올리는 순간 콧방귀를 뀌었다.지원후는 정다은을 도와주기 위해 부랴부랴 달려왔고, 현장에 있던 다른 사람은 나한테 책임을 떠넘기려고 했는데 대체 왜 감사 인사를 전해야 한단 말인가?“나빈 씨도 오늘 마취과에 큰 공헌을 한 셈이야.”묵묵부답하는 나를 보자 한정수의 태도가 눈에 띄게 누그러졌다.“물론 억울하겠지만 마취과 의사로서 한 번쯤은 겪어야 할 일이니 경험이라고 생각해.”의미심장한 어조는 마치 정말로 걱정해줘서 하는 말처럼 들렸다.내가 오해했나?“아마도 많이 놀랐나 봐요.”다른 사람이 맞장구를 쳤다.“퇴근 시간도 다 됐는데 오늘은 일찍 돌아가서 쉬게 해요.”한정수는 나를 흘끗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이따가 시간 되면 퇴근해.”이렇게 사건은 일단락이 되었다.다만 차를 뒤집어쓴 게 충격이 꽤 큰 듯 엘리베이터가 지하 1층에 도착한 것도 몰랐다.공교롭게도 고개를 드는 순간 옆 엘리베이터에서 걸어 나오는 양재원을 발견했다.시선이 마주치자 통통한 남자는 흠칫 놀라더니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브라운 코듀로이 항공 점퍼에 베이지 라운드넥 캐시미어 스웨터, 흰 가운을 벗은 모습은 스타일리쉬하면서 캐주얼한 분위기를 연출했다.“여기서 나빈 씨를 보게 될 줄이야.”부드러운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고, 다정한 눈빛으로 한참을 쳐다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퇴근했어요?”나는 울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의사에게 야근은 흔한 일이다. 어쩌다 정시에 퇴근하게 된 것도 자칫 누명을 뒤집어쓸 뻔했다가 선심 쓰듯 얻은 복지이지 않은가?차마 입 밖에 꺼내기도 부끄러웠다.“마취과에서 작은 소동이

  • 지교수의 비밀 아내   제34화

    법적 책임을 추궁한다는 말은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을 충격에 빠뜨렸다.중재 담당 직원들은 입이 떡 벌어졌다.여전히 무뚝뚝한 지원후였지만 오늘 의료 분쟁을 처리할 때는 신중한 모습으로 강하게 밀어붙이며 차분히 대처했다.단 몇 마디에 조금 전의 막장 같은 상황을 종료시켰고, 중년 여성은 법적 책임을 추궁한다는 소리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입만 달싹일 뿐 끝내 아무 말도 못 했다.이때 한정수가 나서서 분위기를 수습했다.“보호자분, 방금 지 교수님이 하신 말씀 들으셨죠? 이분은 우리 병원 젊은 세대 중에서도 손꼽히는 유능한 외과 전문의라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돼요.”말을 마치고 나서 중재 담당 직원에게 눈짓하자 사람들이 서둘러 다가가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교수님께서 장담하셨으니 당분간 지켜보겠습니다.”중년 여성은 빠져나갈 구실을 찾으며 자리를 뜨려고 했다.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이때 지원후가 눈살을 찌푸리더니 대뜸 말했다.“잠깐만요.”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고 눈에는 의혹이 가득했다.곧이어 날카로운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남자의 새까만 눈동자에 불쾌함이 고스란히 드러났다.“잘못했으면 사과해야죠?”잘못 들었나?지금 보호자에게 사과하라고 한 건가?방금 중년 여성이 행패를 부리는 모습을 정녕 보지 못했단 말인가? 모두가 골칫덩어리를 무사히 돌려보내 겨우 한숨 돌린 상황에서 사과를 요구하다니?정말 예측불허한 남자였다.다만 감동적인 건 사실이었다.아주머니는 당연히 사과할 생각이 없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문 앞에 서서 나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지원후는 그녀의 속마음을 단번에 꿰뚫어 보았다.“병을 치료해주고도 이런 대접을 받는다면 앞으로 누가 진심으로 환자를 대하겠어요?”일리 있는 말에 중년 여성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나를 힐긋 쳐다보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사과했다.이렇게 상황은 일단락이 되었다.가운에 얼룩이 여전히 남아 있었고, 차를 한 잔 가득 뒤집어쓰는 바람에 옷이 흠뻑 젖었다.중년 여성이 떠나자마자 나는 화장실

  • 지교수의 비밀 아내   제33화

    “그게 중점이 아니잖니.”한정수는 대답을 회피했다.“이번 수술은 두 부서가 공동으로 완성한 결과야. 연협병원 일원으로서 환자 가족을 상대하는 역할을 맡는다는 자체만으로 영광인 줄 알아야지.”영광이라니?누명을 쓰고도 기뻐하는 바보가 어디 있냐는 말이다.나는 본능적으로 결코 가벼운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원하는 대답을 얻지 못한 한정수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더욱이 보호자가 생각하는 후유증은 마취하고 나서 생기는 정상적인 반응이야. 회복하려면 당연히 시간이 걸리는 법이지. 나빈 씨는 환자 가족한테 회복 기간에 관해 설명만 해주면 돼.”나는 의혹이 가득한 표정으로 한정수를 바라보았다.“그게 끝이에요?”“응, 다시 말해서 알기 쉽게 설득하는 거야.”한정수의 목소리는 단호하기 그지없었다.“이런 일은 마취과에서 매우 흔해. 인턴십 기간에 참여하면 일찍이 경험도 쌓고 좋잖아. 평가 항목에도 순발력이 있을 텐데 지금이야말로 능력을 발휘할 때야.”말을 마치고 나서 재촉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말에 결국 그를 따라나섰다.15분 후, 사무실에 도착해보니 수수한 옷차림에 초췌한 눈빛의 중년 부인이 앉아 있었고 얼굴에는 분노가 고스란히 드러났다.환자 가족인 건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한정수가 곧바로 다가가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보호자분, 인턴과 함께 사과드리러 왔어요.”이내 나를 향해 눈짓하자 즉시 알아차리고 다가가서 인사를 건넸다.중년 여성은 노려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환자 가족으로서 무슨 심정인지 이해하는지라 꾹 참고 말했다.“보호자분, 일단 화 좀 푸세요. 환자를 걱정하는 마음은 알고 있습니다. 사실 삽관 마취 후에는 일시적으로 목소리가 쉬는 증상이 나타날 수 있어요.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또 그 소리입니까?”중년 여성이 갑자기 끼어들더니 목소리를 높였고,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나랑 소통할 생각이 애초에 없었나 보네요.”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는 아주머니를 보며 나는 위로를

  • 지교수의 비밀 아내   제32화

    병원 식당을 드나드는 사람이 워낙 많았고, 게다가 간판스타라서 가는 곳마다 주목을 받았기에 갑작스러운 비난의 멘트는 내 자존심을 철저히 짓밟았다.결국 민망한 나머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지도 교수가 내준 숙제를 완수했을 뿐인데 어쩌다 환심을 사는 꼴이 되었지?혹시 정다은이 말한 영상과 관련이 있을까?한창 의아하던 찰나 분위기를 수습하려는 듯 청아한 목소리가 다시금 울려 퍼졌다.“선배님은 잘 모르겠지만 심 선배님은 의과대학에서 손이 야무지기로 소문이 났죠. 동료들도 칭찬이 자자했으니 명실상부 에이스였어요.”말을 마치고 나를 바라보았고 사슴 같은 눈망울로 민망한 듯 웃었다.아직 순진하군.지원후가 모르는 게 말이 안 되나? 살아 있는 전설로서 브리튼 대학으로 떠나기 전만 해도 교내에서 툭 하면 마주쳤고, 의대생 장기자랑 대회에서도 수도 없이 겨룬 사이인지라 내가 어느 정도인지는 속으로 뻔했을 것이다.지금은 단지 사람들 앞에서 망신 주려고 작정했을 뿐이다.순간 울컥한 마음에 짜증이 솟구쳤다.“손이 야무지면 뭐 해?”이때, 퉁명한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지원후는 싸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한 소리 했다.“의사는 환자를 치료하는 사람이지 재주꾼이 아니야. 어제 수술실에서 허둥대던 모습은 벌써 잊었나 보네.”비아냥거리는 말투와 거만한 태도, 그리고 말 한마디 한마디가 마치 비수처럼 가슴에 박혀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원수지간도 우리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부부가 되면 언젠가 정이 들기 마련일 텐데 정다은만큼 챙겨주지는 못할망정 사사건건 트집 잡을 필요까지 있을까?대체 나를 얼마나 싫어하면 이렇게 많은 눈이 지켜보는 가운데 면박을 줄 수 있지?물론 상대가 지원후였기에 인턴 하나쯤을 혼낸다고 해서 감히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나는 속상한 마음에 고개를 번쩍 들어 지원후의 시선을 마주한 채 되받아쳤다.“대체 무엇을 보고 실력을 과시한다고 여기는지 모르겠지만 마취과 인턴이자 신입으로서 아직 뽐낼 만한 재주가 없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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