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지원후의 결혼은 애초부터 비밀이었다. 결혼한 3년 동안 나는 그의 아내로서 얼굴도 들고 다닐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지원후는 연협병원 최고의 의사로 쉽게 넘볼 수 없는 존재다. 그러나 나는 그의 곁을 따라다니는 미천한 마취과 실습생에 불과했다. 수많은 날 밤, 나는 썰렁한 별장 안에서 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내가 노력만 하면 그가 나를 좋게 봐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내 뺨을 때린 것과 다름없었다. “그 여자 안 만나면 안 돼요?” 나는 그의 옷자락을 잡고 애원했다. 그러나 그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픽 비웃었다. “계약자 주제에 내 아내라도 된 줄 알아?” ... 그렇게 하루하루 지나고, 나는 지원후의 연애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봐야 했다. 어느 날 나는 말없이 이혼협의서만 남기고 돌아섰다. 그날 연경시는 거위털 같은 눈으로 뒤덮였다. 세상 대단한 지 교수는 눈밭에 무릎을 꿇고 나에게 애원했다. “여보, 이혼 안 하면 안 돼?” 그의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은 싸늘하게만 보였다. 나는 덤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본인이 연극 주인공이라도 되는 줄 알아요? 미안하지만 나는 같이 연기할 마음이 없네요. 계약은 끝났어요. 내가 좋으면 가서 줄부터 서요.”
View More사실 주량이 센 편이 아니었다. 게다가 로열 살루트처럼 도수가 높은 위스키를 마신 탓에 두 잔만에 목이 따끔거리는 느낌이 들었다.하지만 술자리 게임은 분위기를 띄우기 위한 것이며 벌칙을 피하겠다고 몸을 사리면 흐름이 깨지기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두 번째 게임에서도 내가 걸리게 되었고, 연속되는 벌주에 어느새 네다섯 잔을 마셨다.한장미가 술을 권하던 찰나 흥을 돋우느라 바쁜 정다은이 불쑥 입을 열었다.“선배님이 벌써 여러 잔 마셨는데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지원후 덕분에 이 자리에서 정다은의 입김이 제일 셌다. 아니나 다를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술을 마시라고 강요하던 인턴이 갑자기 선심을 쓰는 척했다.“그래, 다은 씨 말대로 이번 벌주는 봐주는 거로 할게.”나는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게임이 끝나고 다시 정다은이 뽑을 차례가 되자 그녀는 카드를 훑어보더니 한참을 망설인 끝에 한 장을 콕 집었다.다이아몬드 9.마침 벌칙 대상이라 술을 마셔야만 했다.정다은은 혀를 날름거리며 멋쩍게 웃었다.“운이 안 좋네.”말을 마치고 나서 술잔을 들었는데 한장미에게 제지당했다.“넌 알코올 알레르기 있잖아. 마시지 마.”정다은이 커다란 눈을 깜빡이더니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아니야, 룰은 지켜야지. 억지 부리면 되겠어?”간드러진 목소리는 고집스럽게 들리기도 했다. 심지어 나도 걱정될 지경이었다.이내 거의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고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정다은의 술잔을 빼앗아 가는 지원후를 발견했다.그렇게 연속 세 잔을 대신 마셨다.지원후는 정다은을 위해 흔쾌히 벌칙을 수행했다.여느 남자친구처럼 모두의 앞에서 사랑하는 여자를 지켜주었다.그녀를 살갑게 챙겨준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심장이 왜 이렇게 아픈 걸까?조금 전 연속으로 술을 털어 넣은 걸 생각하자 코끝이 시큰하며 눈물이 저절로 차올랐다.아마도 취해서 그런 것 같았다.찢어질 듯한 가슴과 쓰라린 위, 결국 입을 가린 채 조용히 룸을 나섰다.화장실에 도착하자 나
다크 네이비 슬림핏 슈트에 검은색 캐시미어 스웨터를 매칭한 남자는 귀족 티가 나면서도 젊고 활기찬 느낌이었다.평소 딱딱한 정장 차림과 사뭇 달랐다.옆에 서 있는 정다은과 묘하게 조화를 이루었다.그녀를 위해 이런 모임에 참석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니.아까만 해도 북적거리던 룸은 지원후의 등장으로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안절부절못하는 인턴들도 있었고, 다들 찍소리조차 못 냈다.그가 나타나기만 하면 사람들은 무시무시한 아우라에 압도당했다.긴장감이 흘러넘치는 분위기 속에서도 정다은은 당당하게 지원후 옆에 서서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선배님, 여긴 전부 병원에서 제가 사귄 친구들이에요.”지원후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앉으세요.”간단명료한 한 마디,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는 남자였다. 심지어 표정마저 변함이 없었다.정다은이 나를 챙겨준답시고 커다란 눈망울을 깜빡이며 말했다.“선배님은 여기 앉아요.”지원후 오른쪽, 사이에는 정다은과 한장미가 있었다.테이블에서 상석 다음 자리였기에 떠나기는 글렀다.현장의 분위기는 마치 학과장이 회의를 열었을 때처럼 너무 진지해서 재미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아마도 토론은 생략될 가능성이 컸다.조금 전 나대기 급급했던 한장미는 몸을 사리며 정다은에게 몰래 눈짓했다.정다은이 활짝 웃었다.“다 도착한 것 같으니 분위기 띄울 겸 게임이나 할까요? 선배님, 괜찮죠?”“네 맘대로 해.”비록 한 마디에 불과했지만 그녀를 향한 배려에 애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한장미가 잽싸게 카드를 꺼냈다.“교수님도 동의 했겠다... 왕 게임 어때요?”그녀는 분위기를 띄우는 데 특화된 지라 말이 끝나자마자 긴장감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게임 룰은 간단했다. 조커를 제외하고 임의로 카드 한 장을 뽑아 왕을 정한 다음 벌칙을 수행하면 끝이다.웨이터가 음료와 과일 안주를 가져오자 한장미는 지원후와 정다은에게 카드를 뽑으라고 했다. 지원후는 주저하지 않고 한 장을 뽑았지만 왕 카드가 아니
갑작스러운 등장에 우리 둘은 흠칫 놀랐다. 게다가 대뜸 사적인 질문부터 하다니?기껏해야 동창에 불과할 뿐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니었다.대체 무슨 대답을 해야 한단 말인가?남자친구는 없지만 남편은 있다고, 더욱이 명의상 배우자가 본인이 선배님이라고 졸졸 따라다니는 그 지원후라고?정다은은 아마도 우리의 대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엿들었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이런 말을 입 밖에 꺼내는 순간 논란이 불거지기 마련이다.내가 부인하려던 찰나 수간호사가 먼저 나서서 화제를 돌렸다.“신경외과에 새로 온 수재가 너구나? 우리 다빈 씨랑 아는 사이야?”정다은이 순순히 대답했고 나를 빤히 쳐다보며 작은 단서 하나라도 놓치지 않을 기세였다.“의과대학에 있을 때 선배님은 제 우상이었거든요.”“다은이가 시도 때도 없이 언급했던 분이 바로 선배님이셨군요.”옆에 있던 신입 간호사가 나를 훑어보더니 눈웃음을 지었다.“역시 남다르네요.”그녀는 신경외과에 새로 온 간호사였고 이름은 한장미였다. 어제 화장실에서 정다은과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이 아닐까 짐작되었다.간단한 인사를 끝으로 대화가 오가자 ‘남자친구’에서 자연스럽게 다른 화두로 넘어갔다.화장실에서 나와 우리는 각자 자기 부서로 돌아갔다. 잠시 후, 정다은과 한장미가 쫓아오더니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참, 오늘 인턴들이 모여서 뒤풀이하는데 선배님도 오실래요?”나는 모임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이때, 한장미가 말을 보탰다.“여러 부서에서 참석하는 만큼 이참에 얼굴을 익혀두면 앞으로 일할 때도 도움이 될 거예요.”하긴, 마취과는 거의 모든 진료과에서 필요로 하는 만큼 매일 같이 마주치기 마련이다. 비록 공식적인 모임은 아니지만 편하고 자유로운 분위기일 테니 인맥을 넓힐 겸 참석해도 무방했다.“그럼 주소 보내줄게요.”정다은이 신이 나서 말했다.“이따가 저녁 7시에 봬요.”위치를 확인해보니 모임 장소가 X-club일 줄이야.물론 지원후가 계산하는지는 몰랐다.하지만 교수급이 고작 인턴들의 뒤풀이에 참석하
그게 무슨 소리지?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시선이 다시 지원후의 손에 있는 연고를 향했고 그제야 이해가 갔다.이는 경고였다.순간 불쾌한 나머지 비아냥거리며 말했다.“아쉽네요. 주차장에서 마주쳤을 때 증거 삼아 휴대폰으로 사진이라도 찍죠.”마지막 한 마디는 누가 들어도 조롱하는 말투였다.지원후의 동공이 살짝 흔들렸다. 마치 내가 되받아칠 줄은 예상하지 못한 듯 표정마저 굳었다.그가 넋을 잃은 와중에 나는 다시 손을 뻗어 연고를 빼앗아 면전에서 뚜껑을 열었다.어쨌거나 화상을 입은 건 사실이라 고작 기분이 나쁘다고 해서 자기 몸을 혹사시킬 수는 없지.3년 동안 고분고분 참아줬는데도 마음을 열어주지 않았으니 이제는 나 자신을 위해 살기로 결심했다.이내 화상 연고를 조심스럽게 상처 부위에 발랐다.하지만 목뒤라서 거울을 보며 두 번이나 시도했지만 골고루 바르는 데 실패했다.혼자서 끙끙거리며 애를 쓰고 있을 때 문득 허리를 조이는 느낌이 들더니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고, 지원후에게 안겨 세면대에 걸터앉은 꼴이 되었다.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곧이어 목덜미가 서늘했고, 굳은살이 박힌 손가락이 피부를 훑어내리자 익숙하면서 낯선 감촉에 소름이 돋았다.지원후가 약을 발라주다니?결국 주먹을 움켜쥐고 말없이 시선을 돌렸지만 양 볼은 저도 모르게 화끈 달아올랐다.대체 무슨 속셈이지? 그나저나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에 괜히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손만 뻗으면 닿을 듯싶었고,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였다. 게다가 고개만 살짝 들어도 옷깃 사이로 탄탄한 가슴이 보일 듯 말 듯 했다.머릿속으로 남녀가 얽히고설킨 장면이 스쳐 지나갔고 호흡 또한 점점 가빠졌다.“고마워요.”나는 지원후의 손길을 피하며 애써 태연한 척 말했다. 하지만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당황한 티를 고스란히 드러냈다.이내 눈을 질끈 감았고 속눈썹이 저도 모르게 떨렸다. 이때, 지원후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별말씀을.”의미심장한 말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곧이어
네 사람이 한 공간에 나타나는 순간 최근에 마주치는 횟수가 너무 많은 건 아닌지 싶었다.특히 맞은편의 남자, 즉 명의상 배우자인 지원후와 헤어진 지 고작 1시간밖에 안 되었다.너무 자주 봐서 불편할 지경이었다.어색한 건 옆에 서 있는 양재원도 매한가지였다. 얼마나 뻘쭘했으면 얼굴에 티가 날 정도일까.반면 순진한 정다은은 아무런 눈치를 못 채고 내 손에 있는 연고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어디 다쳤어요? 재원 씨가 선배님을 위해 일부러 연고까지 가져다줬나 보네요.”차라리 모른 척이라도 하지, 괜히 언급해서 모두의 시선이 오른손에 쥔 연고에 집중되었다.양재원이 잽싸게 대답했다.“마침 여분이 있어서 나빈 씨한테 줬어. 화상을 입었거든.”그는 더듬거리며 말을 이어갔고 중간중간 지원후를 힐끔거렸다.지원후는 아무 반응이 없었고, 오히려 옆에 있던 정다은이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덴 곳이 있어요?”나는 옷깃을 잡아당기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가벼운 상처라 걱정 안 해도 돼.”정다은은 생각보다 눈치가 빨랐다. 사소한 몸짓에도 화상 부위를 알아차리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재원 씨, 지 선배님한테 정말 지극정성이네요!”양재원은 흠칫 놀라더니 초조한 얼굴로 나를 힐끔거렸고 이내 지원후를 바라보았다.“선배, 뭐라도 말 좀 해봐요.”다급한 목소리는 자칫 오해라도 살까 봐 걱정하는 듯싶었다.지원후는 여전히 무덤덤한 모습으로 한참이 지나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나랑 상관도 없는 일에 할 말이 뭐 있어?”상관없는 일이라니?어안이 벙벙한 나는 잘못 들은 줄 알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정작 폭탄 발언한 남자는 마치 성인군자처럼 고고하게 서 있었다.법적 배우자로서 언제나 함께하고 서로 의존해야 하지만 지금은 옆에 있는 여자에게 충성을 다 하려고 명의상 아내를 다른 남자와 엮어주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대체 얼마나 사랑하면 가능할까?손톱이 어느덧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어이가 없는 와중에 어느 정도 납득은 갔고, 받아치려는
이내 감정을 추스르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갔다.지원후는 이미 떠났고 한정수와 몇몇 직원만 남아 있었다.“오늘 지 교수님이 제때 수습해서 천만다행이지.”한정수는 마치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처럼 안도했고 간사한 표정으로 나를 힐긋 쳐다보았다.“나중에 만나면 잊지 말고 고맙다고 해.”감사라.나는 속으로 곱씹었다. 화장실에서 엿들은 대화를 떠올리는 순간 콧방귀를 뀌었다.지원후는 정다은을 도와주기 위해 부랴부랴 달려왔고, 현장에 있던 다른 사람은 나한테 책임을 떠넘기려고 했는데 대체 왜 감사 인사를 전해야 한단 말인가?“나빈 씨도 오늘 마취과에 큰 공헌을 한 셈이야.”묵묵부답하는 나를 보자 한정수의 태도가 눈에 띄게 누그러졌다.“물론 억울하겠지만 마취과 의사로서 한 번쯤은 겪어야 할 일이니 경험이라고 생각해.”의미심장한 어조는 마치 정말로 걱정해줘서 하는 말처럼 들렸다.내가 오해했나?“아마도 많이 놀랐나 봐요.”다른 사람이 맞장구를 쳤다.“퇴근 시간도 다 됐는데 오늘은 일찍 돌아가서 쉬게 해요.”한정수는 나를 흘끗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이따가 시간 되면 퇴근해.”이렇게 사건은 일단락이 되었다.다만 차를 뒤집어쓴 게 충격이 꽤 큰 듯 엘리베이터가 지하 1층에 도착한 것도 몰랐다.공교롭게도 고개를 드는 순간 옆 엘리베이터에서 걸어 나오는 양재원을 발견했다.시선이 마주치자 통통한 남자는 흠칫 놀라더니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브라운 코듀로이 항공 점퍼에 베이지 라운드넥 캐시미어 스웨터, 흰 가운을 벗은 모습은 스타일리쉬하면서 캐주얼한 분위기를 연출했다.“여기서 나빈 씨를 보게 될 줄이야.”부드러운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고, 다정한 눈빛으로 한참을 쳐다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퇴근했어요?”나는 울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의사에게 야근은 흔한 일이다. 어쩌다 정시에 퇴근하게 된 것도 자칫 누명을 뒤집어쓸 뻔했다가 선심 쓰듯 얻은 복지이지 않은가?차마 입 밖에 꺼내기도 부끄러웠다.“마취과에서 작은 소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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