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그녀는 민주와 함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민주는 감자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한참 바라보았다.
“이거 먹고 오후까지 버티라는 거겠지?”
이서는 대답 대신 죽을 한 숟가락 떠먹었다.
따뜻한 죽이 목을 타고 내려가자 속이 조금 진정됐다.
그녀는 숟가락을 움직이는 속도를 높였다.
바로 그때 식탁 앞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신입.”
굵은 목소리였다.
고개를 들자 덩치가 큰 남자 훈련생이 서 있었다. 짧게 깎은 머리 아래로 이마에 오래된 흉터가 있었고, 그의 가슴에는 색이 바랜 번호표가 붙어 있었다.
남자는 이서의 식판을 내려다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손을 뻗었다.
이서는 반사적으로 그릇을 붙잡았다.
남자의 손이 멈췄다.
“놔.”
이서는 죽그릇을 자기 쪽으로 당겼다.
“제 밥이에요.”
남자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는 대답 대신 옆에 놓인 감자를 집어 들었다.
이서가 급히 손을 뻗었다.
“그것도 제 거예요.”
주변 식탁에서 숟가락 소리가 잦아들었다.
민주가 이서의 무릎을 살짝 건드렸다.
이서가 옆을 돌아보자 민주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제야 이서는 식당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보았다.
상급생들이 신입의 식판에서 빵과 감자를 가져가고 있었다.
어떤 남자는 자신의 죽을 반쯤 덜어 상급생의 그릇에 부었다. 또 다른 여자는 빼앗긴 감자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배식대 옆에는 교관 둘이 서 있었다.
그들은 그 광경을 보면서도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 교관은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식당 안을 천천히 둘러보고 있었다.
이서는 남자의 손에 들린 감자를 바라보았다.
“돌려주세요.”
남자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여기 규칙을 아직 모르나 본데, 신입 배급은 선배가 먼저 가져갈 수 있어.”
그가 몸을 숙였다.
가까이 다가온 입에서 오래된 담배 냄새가 났다.
“알겠으면 손 놔.”
이서는 식판을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어제부터 자신이 가진 것들은 하나씩 사라지고 있었다.
집도, 옷도, 어머니의 손수건도 빼앗겼다.
그런데 이제는 밥까지 내놓으라고 했다.
“못 줘요.”
남자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가 식판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이서도 놓지 않았다.
금속 식판이 식탁 위를 긁으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끼이익.
죽그릇이 기울면서 뜨거운 죽이 이서의 손등과 식탁 위로 쏟아졌다.
그녀가 놀라 손을 움츠리는 순간 남자가 식판을 낚아챘다.
그는 남은 죽을 자기 그릇에 부었다.
민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손에 쏟아졌잖아요!”
남자는 민주를 노려보았다.
“너도 뺏기고 싶어?”
민주가 굳어 버렸다.
이서는 화끈거리는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피부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런데 남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숟가락을 들고 있었다.
이서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남자의 식판을 붙잡았다.
“돌려주세요.”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이서는 손등의 통증을 참으며 식판을 당겼다.
“제 거니까 돌려달라고요.”
남자가 웃었다.
그 웃음이 끝나기도 전에 손바닥이 날아왔다.
짝!
고개가 옆으로 꺾였다.
입안에서 피 맛이 번졌다.
이서는 의자에 부딪혔다가 바닥으로 넘어졌다.
금속 식판이 요란하게 떨어지며 죽이 바닥에 흩어졌다.
삶은 감자가 굴러가더니 누군가의 군화 앞에서 멈췄다.
이서는 바닥에 엎드린 채 숨을 몰아쉬었다.
귀가 먹먹했다.
뺨이 뜨겁게 부어오르는 사이 남자는 그녀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여기는 네가 살던 집이 아니야.”
그는 이서의 턱을 잡아 들어 올렸다.
“시키는 대로 해야 밥이라도 얻어먹는 곳이라고.”
이서는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남자의 손가락이 턱을 더 세게 조였다.
그녀는 숨을 삼키며 그의 손을 밀어냈다.
“그러니까…….”
목소리가 갈라졌다.
“당신도 남의 밥 빼앗아 먹는 거잖아요.”
남자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가 다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때 식당 입구에서 호각이 울렸다.
“거기!”
교관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남자는 곧바로 일어나 자세를 바로잡았다.
이서는 바닥을 짚고 일어나려 했지만 한쪽 무릎이 말을 듣지 않았다.
교관은 그녀를 일으켜 주지 않았다.
먼저 쏟아진 죽을 살폈고, 그다음 바닥에 떨어진 식판을 내려다보았다.
“누가 소란을 피웠지?”
남자가 먼저 대답했다.
“117번이 배식 질서를 어겼습니다.”
이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이서는 아쉬운 표정으로 돌 세 개를 바라보았다.시온이 물병을 건넸다.“서두르지 마.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오래 버텨야 해.”이서는 물병을 가슴에 안았다.“그럼 오래 가르쳐 주세요.”시온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이서는 그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그저 오늘 처음으로 끝까지 달렸다는 사실이 기뻤다.시온은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돌아가자.”그가 먼저 걷기 시작하자 이서는 자연스럽게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이번에는 뒤에서 따라가지 않았다.두 사람은 나란히 좁은 흙길을 걸었다.숙소 건물이 보이자 시온이 걸음을 멈췄다.“여기부터는 따로 가.”이서는 고개를 끄덕였다.몇 걸음 걷다가 돌아보자 시온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그녀가 작게 손을 흔들었다.시온은 손을 들지 않았지만, 이서가 숙소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같은 시각, 블랙제로 본관 삼 층의 감시실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벽면을 가득 채운 화면마다 훈련소의 서로 다른 구역이 비치고 있었다. 운동장과 식당, 숙소 복도는 물론 창고 뒤편의 좁은 흙길까지 감시 카메라가 연결되어 있었다.감시 요원 하나가 기록을 정리하다가 화면을 멈췄다.어두운 흙길 위로 두 사람이 지나가고 있었다.한 사람은 117번 한이서.다른 사람은 상급 훈련생 백시온이었다.요원은 화면을 확대했다.두 사람이 나란히 걷는 모습이 선명해졌다.그때 감시실 문이 열렸다.서강혁이 들어왔다.요원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총교관님.”강혁은 대답하지 않고 모니터 쪽으로 걸어갔다.화면에는 이서가 시온에게 물병을 받아 드는 모습이 재생되고 있었다.이서는 웃고 있었다.강혁은 그 장면을 한동안 바라보았다.공개 처벌을 받으며 울던 여자였다.낮에는 장애물 앞에서 몇 번이고 떨어지던 여자였다.그런데 화면 속 이서는 웃고 있었다.강혁은 모니터 앞에 섰다.“언제부터지?”요원이 기록을 확인했다.“야간 이동 기록이 며칠째 반복되고 있습니다.”“누가 허가했나?”“허가 기록
그러나 막상 입을 열자 다른 말이 나왔다.“그냥 제가 언제 잘지, 뭘 먹을지, 그런 걸 제가 정하고 싶어요.”시온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다만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을 천천히 움켜쥐었다.이서는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빗줄기가 조금 잦아들자 시온이 먼저 일어났다.“돌아가자.”이서는 운동화를 다시 신었다.그가 처마 밖으로 나가자 그녀도 뒤따랐다. 빗물에 젖은 돌을 밟는 순간 발이 미끄러졌고, 몸이 옆으로 기울었다.시온이 돌아서며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이서가 중심을 잡자 그는 곧바로 손을 놓았다.“바닥 보고 걸어.”이서는 젖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보고 있었어요.”“그런데도 넘어질 뻔했잖아.”그의 목소리에 희미한 웃음기가 섞였다.이서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시온은 이미 앞을 보고 있었다.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작게 웃었다.블랙제로에 들어온 뒤 처음으로, 웃음이 억지로 나오지 않았다.***다음 날 오후, 이서는 마침내 통나무 벽 위에 한쪽 팔을 걸쳤다.아직 완전히 넘지는 못했다.손바닥은 아팠고 어깨는 떨렸지만, 전날까지 닿지 못했던 벽 위쪽을 붙잡는 데 성공했다.그녀는 발끝을 작은 돌출부에 걸고 무릎을 밀어 올렸다.몸이 조금 더 올라갔다.그 순간 뒤에서 호각이 울렸다.“시간 종료!”이서는 벽 위를 붙잡은 채 멈췄다.교관이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117번. 또 실패군.”이서는 천천히 내려왔다.이번에도 통과하지 못했지만, 어제보다 손이 높은 곳에 닿았다.교관은 기록표에 붉은 선을 그었다.“언제까지 이럴 거냐?”이서는 손바닥에 묻은 흙을 털었다.“다음에는 넘겠습니다.”교관이 비웃었다.“말은 누구나 하지.”그가 다른 훈련생을 부르자 이서는 대열로 돌아갔다.운동장 반대편에서 시온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이서는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시온도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그것으로 충분했다.***그날 밤, 이서는 숙소를 나서기 전에 민주에게 물었다.“나 너무 자주 나가는 것 같아?”민
이서는 그제야 그가 자신보다 훨씬 넓은 어깨로 좁은 공간을 가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순찰 요원이 가까워졌다.손전등 불빛이 배수로 가장자리를 훑었다.이서가 뒤로 물러나려다 발밑의 빈 깡통을 건드렸다.작은 금속음이 울렸다.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시온은 망설이지 않고 창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누구냐!”순찰 요원이 손전등을 겨누었다.시온은 두 손을 천천히 들어 보였다.“백시온입니다.”“이 시간에 여기서 뭐 하는 거야?”“야간 체력 보충 훈련 중이었습니다.”순찰 요원이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허가받았어?”시온은 대답하기 전에 창고 뒤편을 한 번 돌아보았다.이서는 어둠 속에서 입술을 깨물었다.그가 자신을 가리키기만 하면 모든 것이 끝날 터였다.그러나 시온은 다시 순찰 요원을 바라보았다.“제 개인 훈련입니다.”“개인 훈련을 이 시간에?”“낮 훈련 기록이 부족해서 보충하고 있었습니다.”순찰 요원은 못마땅한 얼굴로 기록 단말기를 꺼냈다.“상급 훈련생이라고 규정이 없는 줄 알아?”시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요원은 그의 번호를 확인한 뒤 단말기에 무언가를 입력했다.“이번은 경고다. 다음에 또 걸리면 총교관에게 직접 보고하겠어.”“알겠습니다.”시온은 고개를 숙였다.순찰 차량이 멀어질 때까지 그는 창고 앞에 서 있었다.이서는 그제야 벽에 기대었던 몸을 바로 세웠다.손바닥에 식은땀이 가득했다.시온이 돌아오자 그녀는 급히 입을 열었다.“저 때문에 경고받았잖아요.”그는 주변을 확인한 뒤 손전등을 집어 들었다.“다친 데는?”이서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저 때문에…….”“물어본 것부터 대답해.”그의 목소리가 낮아지자 이서는 입을 다물었다.“안 다쳤어요.”시온은 그녀의 팔과 발목을 확인한 뒤 손을 놓았다.“그럼 됐어.”그가 먼저 돌아서자 이서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조금 전까지 시온은 자신을 숨기기 위해 규정을 어겼고, 순찰 요원에게 경고까지 받았다.그런데도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이서는
이서가 운동화를 벗자 양말 뒤꿈치가 피부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양말을 떼어 냈지만 상처에서 다시 피가 배어 나왔다.시온의 표정이 굳었다.그는 천 주머니에서 깨끗한 거즈와 작은 소독약을 꺼냈다.“손대지 마.”이서가 무심코 상처를 만지려던 손을 멈췄다.시온은 무릎을 굽혀 앉아 상처 주변을 살폈다. 거즈에 소독약을 묻혀 조심스럽게 닦아 낸 뒤, 운동화 안쪽의 거친 솔기를 손끝으로 확인했다.“신발이 네 발보다 커서 계속 쓸리는 거야.”“지급받은 건데요.”“알아.”그는 거즈를 덧댄 뒤 신발 끈을 다시 묶는 방법을 보여 주었다.“발목을 이렇게 잡아. 앞쪽까지 조이면 발가락이 아프니까.”이서는 그의 손동작을 따라 했다.운동화를 다시 신고 몇 걸음 걸어 보자 뒤꿈치가 전보다 덜 흔들렸다.“조금 나아요.”“그럼 오늘은 끝.”이서는 아쉬운 얼굴로 흙길을 돌아보았다.시온은 그 표정을 보고도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내일 걷지도 못하면 오늘 훈련한 게 무슨 소용이야.”그는 천 주머니를 챙겨 일어났다.이서는 그제야 그가 가져온 물건들을 다시 바라보았다. 거즈와 소독약은 훈련생들에게 자유롭게 지급되는 물품이 아니었다.“시온 씨는 이런 걸 어디서 구해요?”시온은 손전등을 껐다.“그런 건 묻지 마.”그가 먼저 걸음을 옮기자 이서는 서둘러 운동화를 신었다.그는 숙소까지 돌아가는 동안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지만, 이서가 따라올 수 있을 만큼만 걸었다.***다음 날 이서는 또 달리기에서 낙오했다.그러나 전날보다 한 바퀴를 더 버텼고, 마지막 구간에서 속도가 떨어졌을 때도 곧바로 주저앉지는 않았다.교관은 여전히 기록표에 붉은 선을 그었다.“117번, 또 실패군.”이서는 고개를 숙였다.“죄송합니다.”“죄송하면 제대로 뛰어.”그가 다른 훈련생에게 시선을 돌린 뒤에도 이서는 한동안 결승선을 바라보았다.전날에는 저곳까지 가지도 못했다.오늘은 몇 걸음만 더 가면 닿을 수 있었다.아직 실패였지만, 자신이 조금 달라졌다는 사실
그러나 숟가락을 들기도 전에 식당 반대편에서 접시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어제 이서의 배급을 빼앗았던 상급생이 이번에는 다른 신입의 감자를 집어 들고 있었다. 신입은 손을 뻗었다가 남자의 눈치를 보고 곧바로 거두었다.이서는 무심코 의자를 밀었다.민주가 식탁 아래에서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제발.”그 짧은 말에 이서는 움직임을 멈췄다.어제는 자신이 맞았고, 오늘은 다른 사람이 먹을 것을 빼앗겼다. 내일도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다.그 사실을 알면서도 지금의 이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그녀는 숟가락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손바닥의 상처가 당겼지만 놓지 않았다.적어도 내일은 오늘보다 오래 서 있고 싶었다.***야간 점호가 끝난 뒤에도 이서는 잠들지 못했다.숙소 안에서는 지친 훈련생들의 숨소리가 이어졌고, 창문 너머로는 감시탑의 탐조등이 일정한 간격으로 벽을 훑고 지나갔다.이서는 이불 속에서 손바닥을 펼쳐 보았다.낮에 다시 터진 상처는 붕대에 달라붙어 있었고, 발뒤꿈치에서는 운동화를 벗을 때마다 피가 묻어 나왔다.내일도 같은 훈련을 해야 했다.아침에 일어나 달리고, 장애물 앞에서 떨어지고, 저녁 배급을 빼앗기는 일을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는 정말 일어나지 못할지도 몰랐다.그녀는 창밖 운동장을 바라보다가 침대 아래에서 운동화를 꺼냈다.그때 맞은편 침대에서 민주가 몸을 일으켰다.“어디 가?”“잠깐 나갔다 올게.”민주는 운동화를 신는 이서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러다 침대 아래에서 물병을 꺼내 건넸다.“혼자 훈련하려는 거지?”이서는 대답하지 못했다.민주는 한숨을 쉬면서도 물병을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들키면 나도 모른다고 할 거야. 그러니까 제발 무사히 돌아와.”이서는 물병을 받아 들고 고개를 끄덕였다.숙소를 나온 뒤에는 감시 카메라가 반대편으로 돌아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계단을 내려갔다. 운동장으로 이어지는 철문 앞에 도착했을 때, 어둠 속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117번.”이서는 놀라 돌아섰다.
한이서는 그날도 달리기를 끝내지 못했다.운동장에 쓰러진 그녀를 내려다보던 교관은 구조 요청은커녕 기록표에 붉은 선부터 그었다. 젖은 흙바닥에 손을 짚은 이서가 겨우 고개를 들었을 때, 교관의 군화가 그녀의 손가락 바로 앞에 멈춰 섰다.“117번. 네가 죽으면 누가 대신 뛰어 주나?”이서는 대답하지 못했다. 입을 벌릴 때마다 마른기침이 터졌고, 밤새 굶주린 속에서는 신물이 올라왔다. 어제 죽 한 그릇을 지키려다 수백 명 앞에서 벌을 받은 몸으로 오늘도 새벽부터 달렸으니,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에 가까웠다.그러나 이곳에서는 그런 사정이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교관은 이서의 턱 아래로 기록표를 들이밀었다.“오늘도 낙오했으니 저녁 배급은 절반이다. 내일도 이러면 아예 굶겨 주지.”그가 돌아서자 이서는 흙 묻은 손을 천천히 거두었다. 어젯밤 백시온이 감아 준 붕대는 벌써 갈색으로 젖어 있었고, 손바닥을 펼 때마다 상처가 다시 벌어졌다.멀리서 민주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지만, 이서는 그녀가 도착하기 전에 일어나려고 애썼다. 자신 때문에 민주까지 벌을 받는 일만은 막고 싶었다.하지만 한쪽 무릎을 세우자마자 시야가 흔들렸고, 그녀는 결국 다시 땅을 짚었다.***오전 훈련은 끝나지 않았다.달리기에서 낙오한 훈련생들은 곧바로 장애물 코스로 이동해야 했다. 운동장 가장자리에는 젖은 통나무와 철조망이 놓여 있었고, 전날 내린 비 때문에 흙탕물이 발목까지 튀어 올랐다.이서는 철조망 아래를 기어가다가 오른쪽 팔꿈치가 꺾이는 바람에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어제 모래주머니를 들고 벌을 받았던 어깨가 아직 부어 있었기 때문이다.뒤따르던 훈련생이 그녀의 발목을 걷어찼다.“빨리 움직여. 너 때문에 다 밀리잖아!”이서는 비명을 삼키며 앞으로 기어갔다. 철조망 끝에 걸린 훈련복이 찢어졌지만, 옷을 확인할 여유도 없었다.다음 장애물은 사람 키보다 높은 통나무 벽이었다.앞선 훈련생들은 손을 걸고 몸을 끌어 올려 넘어갔지만, 이서는 벽에 매달리는 것조차 힘겨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