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열아홉 살, 한이서는 아버지의 빚 대신 비밀 훈련소에 팔려 갔다. 그곳에서 약한 자는 버려지고, 살아남은 자는 살인 병기로 길러졌다. 유일하게 믿었던 첫사랑 백시온은 그녀를 배신했고, 잔혹한 총교관 서강혁은 그녀를 자신의 소유물로 만들려 했다. 그리고 어느 날, 이서에게 한 남자를 죽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유건우. 자신을 사람으로 대해 준 유일한 남자였다. “그 남자를 죽이면 널 자유롭게 해 주지.” 하지만 이서는 처음으로 명령을 거역했다. 그 순간, 그녀를 길러 낸 지옥 전체가 그녀의 적이 되었다. 사랑했던 남자는 그녀를 되찾으려 하고, 소유하려던 남자는 끝까지 놓아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몰랐다. 지옥에서 가장 위험한 괴물로 자란 여자가 이제 그 지옥을 무너뜨리려 한다는 것을.
더 보기한이서는 아버지가 자신을 팔아넘겼다는 사실을, 그가 낯선 남자에게 딸의 몸값을 흥정하는 순간 알았다.
“그럼 오백만 원만 더 주시오. 애가 어려서 그렇지 몸은 멀쩡합니다.”
“검사 결과에 따라 최종 금액이 달라집니다.”
“어디 아픈 데도 없고, 잔병치레 한 번 안 했어요. 어릴 때부터 일도 잘했고.”
거실에 들어선 이서의 손에서 비닐봉지가 떨어졌다.
방금 시장에서 사 온 계란이 깨지면서 누런 액체가 장판 위로 흘러내렸다. 하지만 식탁에 앉아 있던 두 남자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오히려 낯선 남자 쪽으로 몸을 숙이며 목소리를 낮췄다.
“내가 급해서 그렇지, 얘가 어디 가서 빠질 애는 아니에요. 얼굴도 반반하고, 시키는 일은 죽어라 합니다.”
“아버지.”
이서가 부르자 그제야 아버지가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보다 짜증이 먼저 떠올랐다.
“언제 왔어? 들어오면 인기척을 내야지.”
이서는 대답하지 못했다.
식탁 위에는 두툼한 현금 봉투와 계약서가 놓여 있었다. 서류 첫 장에 적힌 이름은 분명 자신의 것이었다.
한이서.
열아홉 살.
그 아래에는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회사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블랙제로.
“저게 뭐예요?”
아버지는 대답 대신 현금 봉투를 끌어당겼다.
“네가 잘된 일이야. 숙식도 제공하고 교육까지 시켜 준다니까 가서 열심히 해.”
이서는 식탁으로 다가가 서류를 집어 들었다.
국제 보안 인력 양성 프로그램.
보호자 채무 정산.
장기 교육 위탁.
마지막 장에는 아버지의 서명이 있었다.
그런데 자신의 서명란에도 누군가 이름을 적어 놓았다.
한이서.
필체가 달랐다.
“이거 제가 쓴 거 아니에요.”
서류를 들어 보이자 낯선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확인됐으니 돌려주시죠.”
“제 서명을 누가 했냐고요.”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휴대전화를 꺼내 짧게 통화했다.
“대상자 도착했습니다. 예정대로 진행하겠습니다.”
이서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대상자.
그 말이 자신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저 안 가요.”
아버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너 지금 무슨 소리야?”
“제가 왜 가요? 아버지가 빌린 돈이잖아요. 제가 갚겠다고 한 적도 없고요.”
“그 돈으로 너도 먹고살았어!”
아버지가 식탁을 내리쳤다.
현금 봉투가 흔들렸다.
“네가 뭘 안다고 큰소리야? 오늘 안 갚으면 그놈들이 날 죽인다고 했어!”
이서는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며칠 전부터 집에 찾아오던 사내들이 떠올랐다. 현관문을 발로 차고, 유리창을 깨고, 아버지에게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날 밤 아버지는 이서에게 말했다.
'조금만 참아라. 애비가 어떻게든 해결할 테니까.'
그 해결책이 자신이었다.
“그럼 저보고 대신 죽으라는 거예요?”
아버지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누가 죽인대? 가서 일만 하면 된다잖아!”
“어디서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잖아요!”
“그게 뭐가 중요해!”
아버지가 그녀의 팔을 거칠게 잡았다.
“네가 안 가면 내가 죽는다니까!”
붙잡힌 팔보다 그 말이 더 아팠다.
아버지는 딸이 어디로 끌려가는지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저 돈을 받았으니 순순히 따라가 주기만 바라고 있었다.
그때 현관문이 열렸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 둘이 들어왔다.
이서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싫어요. 저 안 가요.”
휴대전화를 꺼내자 사내 하나가 순식간에 다가왔다.
손목이 비틀렸다.
“아악!”
휴대전화가 바닥에 떨어졌다.
이서는 다른 손으로 사내의 얼굴을 밀어냈다. 그러나 곧 어깨가 붙잡혔고, 몸이 식탁 모서리에 부딪혔다.
숨이 턱 막혔다.
“아버지! 경찰에 신고해요!”
아버지는 움직이지 않았다.
현금 봉투를 품에 안은 채 벽 쪽으로 비켜섰을 뿐이었다.
“아버지!”
이서가 다시 소리쳤다.
그제야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얘가 원래 좀 고집이 셉니다. 데려가서 잘 가르쳐 주세요.”
그 말에 이서는 저항하던 손을 멈췄다.
아버지는 낯선 사람들에게 자신을 때려도 된다고 허락하고 있었다.
사내가 그녀의 팔을 뒤로 꺾었다.
“조용히 따라오면 다칠 일 없어.”
그는 이서가 움찔할 때마다 잠시 손을 멈췄지만 괜찮으냐고 묻지는 않았다.세면실에는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만 이어졌다.이서가 먼저 입을 열었다.“오늘 식당에서 있었던 일, 들었어요?”시온은 소독약 병을 닫았다.“응.”짧은 대답이었다.그는 새 거즈를 꺼내 상처 위에 얹었다.이서는 그의 손을 내려다보았다.“다들 제가 잘못했다고 하던데요.”시온은 붕대를 감던 손을 멈췄다.잠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다시 손을 움직였다.“네가 잘못한 건 아니야.”이서는 입술을 깨물었다.그 말을 듣자 가슴 한구석이 이상하게 아파 왔다.하루 종일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그런데 막상 들으니 울음이 날 것 같았다.시온은 붕대 끝을 고정했다.“하지만 여기서는 잘못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널 지켜 주지 못해.”이서는 붕대 감긴 손을 내려다보았다.“그럼 어떻게 해야 해요?”시온은 남은 거즈를 봉투에 넣었다.그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세면실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복도에서 지나가는 발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기다렸다.“살아 있어야 해.”그가 낮게 말했다.“빼앗긴 걸 되찾든, 여기서 나가든, 살아 있어야 뭐라도 할 수 있으니까.”이서는 그 말을 곱씹었다.오늘 아침에는 죽 한 그릇을 지키려고 버텼다.그러다 온종일 처벌을 받았다.시온의 말대로라면 자신은 앞으로도 수없이 많은 것을 빼앗길 것이다.그때마다 싸워야 할까.아니면 살아남기 위해 참아야 할까.시온은 그녀의 손을 놓았다.“그리고 누구도 쉽게 믿지 마.”이서는 고개를 들었다.시온은 세면대 위에 남은 거즈를 정리하고 있었다.그의 표정은 담담했다.“여기서는 친절에도 이유가 있어.”이서는 그를 바라보았다.어제 처음 만난 남자였다.그런데 그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자신을 때리지 않았고, 음식을 나누어 주었으며, 지금은 몰래 상처를 치료해 주고 있었다.그 친절이 고마웠다.하지만 바로 그 친절 때문에 이상한 의문이 생겼다.이서는 붕대 감긴 손을 들어 보았다.“그럼 시온 씨도 믿으면 안
양팔은 감각이 둔해졌고, 어깨를 조금만 움직여도 날카로운 통증이 올라왔다. 무릎은 퉁퉁 부어 있었으며 손바닥에는 굳은 피가 달라붙어 있었다.복도에 들어서자 훈련생 몇 명이 그녀를 힐끗 바라보았다.누군가는 곧바로 시선을 피했고, 누군가는 못 본 척 지나갔다.이서는 벽에 손을 짚고 천천히 걸었다.숙소 문을 열자 민주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이서야!”그녀가 달려와 이서의 팔을 붙잡으려다가 상처를 보고 손을 멈췄다.“세상에…….”이서는 애써 웃으려 했다.그러나 입술이 찢어진 탓에 얼굴을 움직이는 것조차 아팠다.민주는 그녀를 침대에 앉힌 뒤 신발을 벗겨 주었다.그러고는 침대 아래에서 작은 천 보자기를 꺼냈다.보자기 안에는 삶은 감자 반쪽이 들어 있었다.이서는 그것을 알아보았다.아침 식당에서 바닥에 굴러갔던 감자였다.민주가 소매로 닦아 두었던 바로 그 감자.“이거라도 먹어.”이서는 감자를 바라보았다.껍질에는 흙이 조금 남아 있었고, 한쪽은 눌려 있었다.민주는 감자를 더 가까이 내밀었다.“저녁에 먹으려고 숨겨 놨는데, 네가 먹는 게 낫겠어.”이서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감자를 집는 순간 손바닥의 상처가 아려 왔다.민주가 급히 그녀의 손을 받쳤다.“천천히.”이서는 감자를 한입 베어 물었다.차갑고 퍽퍽했다.목구멍이 아팠다.그런데도 삼켰다.다음 한입을 베어 물었을 때는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민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이서가 감자를 떨어뜨리지 않도록 손을 받쳐 주었다.한참 뒤 이서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나 때문에 너까지 혼날 뻔했어.”민주는 고개를 저었다.그녀는 이서의 손에 남은 감자를 다시 쥐여 주었다.“내일은 같이 먹자.”이서는 감자를 내려다보았다.민주의 말이 얼마나 지키기 어려운 약속인지 알고 있었다.그래서 대답하지 않았다.다만 남은 감자를 반으로 나눠 민주에게 내밀었다.민주는 한동안 그것을 바라보다가 받아 들었다.두 사람은 침대에 나란히 앉아 차가운 감자를 나누어 먹었다.밖
촤악!차가운 물이 얼굴과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렸다.이서는 숨을 들이마시다가 사레가 들렸다.젖은 훈련복이 피부에 달라붙었고, 주머니는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교관이 빈 바가지를 통에 던졌다.“처음부터.”이서는 몸을 숙였다.그러나 손가락이 말을 듣지 않았다.두 번이나 주머니를 놓친 끝에 겨우 가슴에 끌어안았지만, 머리 위로 올리기도 전에 무릎이 꺾였다.그녀는 그대로 모래바닥에 쓰러졌다.입안으로 흙이 들어왔다.주변에서 누군가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이서는 팔을 움직였다.하지만 손바닥이 모래를 긁을 뿐 몸이 올라오지 않았다.다시 힘을 주자 팔꿈치가 꺾였다.눈앞이 어두워졌다.그때 교관이 그녀의 번호표를 붙잡았다.“일어나. 아직 안 끝났어.”이서는 목이 꺾일 만큼 거칠게 끌어 올려졌다.무릎이 바닥에 끌렸다.교관은 그녀를 다시 세우려 했지만 이서의 다리가 버티지 못했다.그녀는 교관의 손에서 미끄러져 주저앉았다.그 순간 훈련생들 사이에서 작은 움직임이 일었다.민주였다.그녀가 대열에서 반 발짝 앞으로 나왔다.“저 사람…….”말을 끝내기도 전에 옆에 있던 훈련생이 민주를 붙잡았다.“가만있어.”민주는 팔을 빼려 했지만 상대가 더 세게 잡았다.“너까지 저렇게 되고 싶어?”그 말에 민주가 멈췄다.이서는 흐릿한 시야 너머로 그 모습을 보았다.민주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눈물이 고인 얼굴이었다.이서는 입술을 움직였다.괜찮다고 말하고 싶었다.나오지 말라고, 너까지 다치면 안 된다고 말하고 싶었다.그러나 목구멍에서는 거친 숨소리만 새어 나왔다.그때 운동장 입구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무슨 일이지?”서강혁이었다.검은 제복의 남자가 대열 사이를 지나 운동장 중앙으로 걸어왔다.교관들이 일제히 자세를 바로잡았다.강혁은 바닥에 쓰러진 이서를 내려다보았다.그녀의 훈련복은 물과 흙으로 엉망이었고, 손바닥에서는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그는 그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교관의 기록판을 받아 들었다.
“저 사람이 제 밥을 빼앗았어요.”교관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그는 부어오른 뺨과 붉게 달아오른 손등을 보았다.그러나 상처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117번. 상급생 지시에 불복했나?”이서는 입술에 묻은 피를 손등으로 닦았다.“제 밥을 지키려고 했어요.”교관은 기록판을 꺼냈다.펜 끝이 종이 위를 움직였다.“117번. 배식 질서 교란. 상급생 지시 불복종.”민주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이서는 고개를 저었다.민주는 움직임을 멈췄다.교관은 이서의 팔을 거칠게 붙잡았다.“나와.”이서는 끌려가면서 뒤를 돌아보았다.민주가 바닥에 떨어진 감자를 주워 들고 있었다.그녀는 흙 묻은 감자를 자기 소매로 닦다가 이서와 눈이 마주치자 그대로 굳어 버렸다.식당 문이 닫혔다.***처벌은 운동장 한가운데에서 시작됐다.교관이 이서를 끌고 나오자 훈련생들이 달리던 걸음을 멈췄다. 장애물 위에 올라가 있던 사람들까지 내려와 대열을 갖췄다.수백 명의 시선이 이서에게 향했다.“117번. 배식 질서 교란 및 상급생 지시 불복종.”교관이 이서의 어깨를 눌렀다.그녀는 균형을 잃고 무릎부터 땅에 부딪혔다. 아침에 쓸린 상처가 다시 터지면서 훈련복 바짓단 안쪽으로 뜨거운 피가 번졌다.“고개 들어.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똑똑히 보여 줘야지.”이서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들었다.앞줄에 선 훈련생들은 무표정했다. 어떤 사람은 시선을 피했고, 어떤 사람은 군화 끝만 내려다보았다.민주도 그들 사이에 있었다.그녀는 입술을 깨문 채 이서를 바라보고 있었다.아침에 죽을 빼앗아 간 상급생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그가 옆 사람에게 무언가 속삭이자 두 사람이 낮게 웃었다.이서는 고개를 돌렸다.교관이 모래주머니 하나를 그녀의 앞에 떨어뜨렸다.둔탁한 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올라왔다.“들어.”이서는 주머니를 붙잡았다.손바닥의 상처가 거친 천에 쓸리면서 통증이 올라왔다. 가까스로 가슴 높이까지 들어 올리자 교관이 머리 위를 가리켰다.“팔 펴.”그녀는 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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