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현우는 윤하경의 말을 듣고 한숨을 쉬며 말없이 발걸음을 조금 늦췄다.소지연은 그제야 서둘러 따라갔고 그때 이미 강현우는 윤하경을 뒷좌석에 앉혀두고 있었다.소지연은 차에 올라타자마자 강현우의 차가운 눈빛과 마주했다.그녀는 어리석지 않아서 윤하경과 강현우 사이에 뭔가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차가운 눈빛을 마주하자 당황했고 그래서 그녀는 말하며 긴장을 풀려 했다.“하경이를 병원에 데려가야 해서.”강현우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고 시선만 돌린 채 운전석으로 가서 차를 몰기 시작했다.소지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뒤를 돌아보며 반쯤 누운 윤하경에게 물었다.“아파?”윤하경은 다소 비꼬는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내가 아프다고 했으면 좋겠어?”소지연은 크게 한숨을 내쉬며 사과했다.“미안해. 나 때문에...”윤하경은 고개를 돌리며 눈을 굴렸다.“네가 뭐 어쨌다고. 네 잘못 아니야, 지연아.”소지연은 윤하경이 다친 일을 떠올리며 마음이 무거웠다. 그녀는 윤하경의 상처를 소독하며 계단에서 크게 넘어져서 여러 군데 깊고 고통스러운 상처가 나 있다는 걸 봤다.소지연은 그런 윤하경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에 눈물이 고였다.윤하경은 그 모습을 보고 더 아픈 걸 참으며 얼굴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병원에 도착했을 때, 강현우는 여전히 윤하경을 안고 병원으로 들어갔다. 그들의 모습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고 윤하경은 강현우의 품에 고개를 숙인 채 다른 사람들의 눈길을 피했다.의사는 윤하경을 검사한 뒤 조심스럽게 말했다.“외상은 심하지 않지만 X선 검사를 통해 좀 더 자세히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혹시 모를 문제를 대비해서요.”강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그럼 해야 할 검사는 다 해 주세요.”일이 끝난 후, 강현우는 계산하러 나갔고 소지연은 윤하경의 병상에 앉아 그들을 보며 말을 던졌다.“강현우가 너 대신 이렇게 뛰어다니는 거 처음 봐.”소지연은 장난스럽게 물었다.“너희 사이 뭐 있어? 솔직히 말해.”윤하경은 짧고 간단하
윤하경은 강현우를 보자 잠시 멈칫했다가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다 끝났어요?”강현우는 윤하경을 몇 초 동안 조용히 바라보다가, 그녀가 불안해하고 있다는 걸 느끼고서야 다가갔다.소지연은 자연스럽게 한 발짝 물러섰고 강현우는 윤하경을 잠시 내려다보며 말했다.“나 먼저 갈게. 일 있으면 전화해.”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고마워요.”항상 윤하경은 이렇게, 겉으로는 밝고 사교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사실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았다. 강현우와 몇 번을 자고 나서도, 그녀가 그를 대하는 태도는 여전히 차가웠다.강현우는 입술을 꽉 다물고 무겁게 발걸음을 옮겼다.소지연은 조금 놀라며 윤하경에게 물었다.“강현우, 뭔가 화난 거 같지 않아?”윤하경은 고개를 들어 소지연을 바라보았다.“왜, 화났다고 생각해?”소지연은 한숨을 쉬며 답했다.“잘 모르겠어... 뭐, 됐어. 검사받으러 가자.”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휠체어에 앉았다. 검사 결과는 다행히 큰 외상은 없었지만 가벼운 골절이 있었다.수술은 필요 없었고 며칠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소지연은 윤하경이 자기 때문에 다쳤다고 생각하며 자진해서 돌봄을 자처했다.윤하경은 특별히 반대하지 않았고 회사 일도 처리하면서 입원 생활을 이어가기로 했다.다음 날 아침 일찍, 안현주와 유호천이 선물을 들고 병문안을 왔다.그때 윤하경은 막 일어나 얼굴도 씻지 않은 채, 조금 피곤해 보였다.유호천은 손에 과일 바구니를 들고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미안해, 내 잘못으로 네가 다쳤어.”소지연은 아침을 사러 아래층에 내려갔다.윤하경은 두 사람을 한번 쓱 훑어본 뒤,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정말 미안하다면 내 병원비나 내줘.”그녀는 전혀 미안해할 기색 없이 담담하게 말했다.이 일이 이렇게 된 건 원래 유호천이 제대로 처리하지 않아서였다. 자기 여자친구가 질투가 심한 걸 알면서도, 왜 굳이 소지연과 비밀리에 만나려 했던 걸까.결국 일이 이렇게 된 건 유호천의 책
윤하경은 절대 밀리지 않는 성격이었다.두 사람이 병실을 나가고 나서 드디어 조용해졌다. 소지연은 아무런 표정 없이 아침을 차려놓으며 말했다.“의사 선생님이 가벼운 음식을 먹으라고 하셔서 간단하게 죽하고 계란만 준비했어. 점심엔 뭐 먹고 싶어? 내가 주문할게.”윤하경은 소지연을 한 번 쳐다보았다. 소지연은 방금 유호천과 안현주를 마주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점심에도 죽 먹고 싶어.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주문해.”“알았어.”소지연은 윤하경에게 음식을 차려주고 그 후 바로 컴퓨터를 켜서 일을 시작했다.사실 소지연은 일에 몰두하는 타입이었다. 윤하경은 몇 번이고 그녀를 쳐다보았지만 소지연의 얼굴에 감정 변화는 전혀 없었다.윤하경은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안현주랑 유호천의 약혼식, 너 갈 거야?”소지연은 잠깐 멈칫하더니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니.”윤하경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소지연이 갑자기 그런 자리에 가서 상처를 받을까 봐 걱정했었다. 안현주의 성격은 너무 직설적이고 강해서 그런 자리에 소지연이 가면 분명 불편한 상황이 벌어질까 봐 걱정이었다.하지만 소지연이 가지 않겠다고 하니 이제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윤하경은 한 입 먹다가 문득 생각난 듯 말을 이어갔다.“이번에 회사 일은 네가 맡아줘. 나 다른 일로 바쁠 것 같아서.”“뭐 하려고?”소지연은 본능적으로 물었다.그러고 나서야 이 질문이 불필요한 거란 걸 깨닫고는 덧붙였다.“회사 일은 내가 맡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응.”윤하경은 핸드폰을 꺼내 부상 사진을 찍고 SNS에 올렸다.잠시 후, 전화가 걸려 왔다. 윤하경은 발신자를 보고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윤수철이 병실로 직접 찾아왔다. 병실에 들어서자 윤하경이 침대에 누워 있는 모습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어떻게 다쳤다고 말 한마디 없이 혼자 있을 수 있냐?”윤하경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그렇게 바쁘신 분인데 제가 굳이 왜 알려야 하는데요?
윤수철은 윤하경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그녀가 너무 상업적이라고 생각했다.윤하경은 어차피 윤수철이 자신을 어떻게 보든 상관없었기에 그런 시선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엄마가 그동안 쏟은 피와 땀의 결과물인 한빛 그룹이 윤씨 가문에 넘어가는 걸 그냥 두고 볼 생각은 없었다.지금 윤수철은 온갖 신경을 다 쏟아내며 윤하연과 임수연에게만 관심을 두고 있었다.윤하경은 그런 상황에서 모든 걸 내려놓고 윤씨 가문을 구하려는 바보가 되지는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건 엄마처럼 결국 앞 사람의 고생을 뒤에서 받는 꼴이 될 뿐이었다.윤수철은 고심하는 표정으로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그리고 눈살을 찌푸리며 윤하경을 쳐다보았지만 그 표정은 여전히 위압적이었다.그가 계산하는 모습이 어찌나 신경 쓰이던지 윤하경은 그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궁금해졌다.윤하경은 조금도 급할 것 없이 침대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괜찮아요. 천천히 생각하세요. 전 좀 쉬어야겠어요.”그녀는 어차피 지금 당장 급한 건 윤수철이지 자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윤수철은 짧게 눈살을 찌푸리며 일어났다.“네가 말한 조건도 나쁘지 않아.”그는 윤하경을 다시 한번 쳐다보며 말했다.“하지만 조건 하나가 있어.”윤수철은 여전히 고압적인 태도로 말을 이어갔다. 윤하경은 그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냥 그의 말을 듣기로 했다.“네가 한빛 그룹으로 돌아온다면 내 주식 일부를 너에게 넘길게. 하지만 회사 자금 문제는 전적으로 네가 책임지고 해결해야 해. 방법은 네가 알아서 해.”어차피 자기도 겨우 스물 몇 살인 여자에 불과한데 정상적인 아버지가 어떻게 친딸을 이렇게까지 몰아붙일 수 있는지 윤하경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정말 저를 높이 보시네요.”“윤하연도 아빠 딸이잖아요. 저보다 더 적합할 것 같은데 차라리 그 지분을 하연이에게 넘겨주세요. 윤하연은 당신이 키운 딸 아닌가요? 하연이가 더 적합할 것 같은데 차라리 그 지분을 그녀에게 넘겨주는 게 좋겠어요.”윤하경은 말이 끝난 뒤 더 이상 대
윤하경이 엄마가 남긴 물건을 당장 돌려달라고 요구했을 때, 윤수철은 자신이 지금까지 쥐고 있던 마지막 카드, 즉 윤하경을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빼앗기게 될 것임을 직감했다.그 물건을 내주면 윤하경은 더 이상 그에게 휘둘리지 않게 될 것이다. 이 사실을 떠올린 윤수철은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그는 이를 악물며 한참을 생각했고 윤하경이 윤수철이 결단을 내리지 못할 거란 걸 알았다. 그러자 윤하경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요. 천천히 생각하세요. 생각해 보시고 말씀해 주세요.”그녀는 팔을 쭉 뻗으며 하품을 하더니 침대에 몸을 누였다.“먼저 가세요. 저는 좀 쉬어야겠어요.”윤수철은 헛웃음을 한 번 짓고 그녀를 한 번 쏘아보며 아무 말 없이 떠났다.윤하경은 미소를 지으며 그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봤다.그녀의 조건은 분명히 너무 과한 요구였고 윤수철이 절대 동의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사실 그렇게 많은 걸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진짜 원하는 것은, 한빛 그룹에서 20%의 지분만이라도 손에 넣는 것이었다. 윤수철이 떠나자, 한쪽에서 계속 주춤하던 유 집사가 슬쩍 다가와 그녀를 만류했다.“하경 씨, 회장님과 잘 이야기하세요. 이렇게 갈등을 심화시키지 마세요. 여자는 결국, 자기가 의지할 곳이 있어야 해요.”윤하경은 유 집사의 말을 듣고 살짝 웃음을 지었다.“의지할 곳? 날 팔아넘겨 돈이나 벌려는 그런 집안에서 의지할 곳이라니요?”그녀는 한숨을 쉬며 다시 말없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어차피, 그때부터 나는 혼자였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남은 건 다 자신끼리 다 나눠 먹었으니까.'유 집사는 한숨을 내쉬며 방을 나갔다. 그들이 떠나자, 방문이 다시 열리며 새로운 사람이 들어왔다.윤하경은 처음에 윤수철이 다시 생각을 바꿔서 돌아왔다고 생각했지만 눈을 들어보니 그가 아니라, 강현우였다.그는 웃고 있는 듯한 표정으로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왔다.“참, 말도 잘하네. 안 아픈가 보네.”윤하경은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놀란 표정
윤하경의 말투가 어딘가 차가웠다.강현우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이런 말투로 말한 적은 거의 없었다.강현우는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짧게 대답했다.“그래.”그는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고 어떤 말이든 한 번이면 충분했다.윤하경의 생각이 무엇인지 대략 짐작이 갔기에, 더 이상 말하지 않았지만 윤하경은 오늘 했던 말 때문에 자신이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지 몰랐다.강현우가 떠난 후, 그는 일주일 동안 한 번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퇴원하는 날, 휴대폰을 켜서 메시지를 확인했다.강현우에게서 온 연락은 단 한 통도 없었다.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고민에 빠졌다.‘강현우가 날 버렸나?’그렇게 생각하며 혼자 고민하던 순간, 소지연이 병실로 들어왔고 손에는 퇴원 서류가 들려 있었다.“하경아, 의사 선생님이 퇴원해도 된대!”윤하경은 그 말을 듣자마자 기뻐했다. 원래부터 가만히 있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었기에, 일주일 동안 병원에 갇혀 있는 게 정말 답답했다.“잘됐네. 빨리 퇴원 절차 밟고 점심에 우리 샤부샤부 먹으러 가자! 병원 음식만 먹다가 미칠 뻔했어.”그녀는 신나서 침대에서 내려오려 했다. 그러자 소지연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의사 선생님이 당분간은 죽 같은 것만 먹으라던데.”그러다 문득 떠오른 듯, 얼굴이 빨개진 채 말을 덧붙였다.“그리고... 의사 선생님이 말했는데 당분간 그것도 조심하래.”“그것?”윤하경은 신발을 신다가 멈춰 서서 고개를 갸웃거렸다.“뭘 조심하라고?”소지연은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었다.“그러니까... 너랑 강현우, 그거... 좀 자제하래.”윤하경은 순간 멍해졌다가 이내 폭소를 터뜨렸다.“하하. 걱정하지 마. 강현우가 아무리 차가워 보여도 그렇게 막무가내는 아니야.”그녀가 말을 마친 순간, 병실 문 앞에서 낮고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내가 그렇게 온순한 사람으로 보였나 보네?”윤하경의 몸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문가에 서
윤하경은 진태호 문제를 해결하는 데 몇 개월은 걸릴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일이 진행되었다.차 안에서 강현우는 노트북으로 업무를 처리하며 덤덤하게 말했다.“진태호 가족들도 오늘 경찰서에 올 거야. 혹시 무섭다면 내 뒤에 숨어.”윤하경은 잠시 멈칫했다. 강현우가 이런 식으로 말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그 순간, 잠시 가슴이 뭉클해졌다.엄마가 돌아가신 이후, 누군가 자신을 지켜주겠다고 먼저 나서는 일이 거의 없었으니까.하지만 이내 표정을 가다듬고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그 정도로 약하진 않아요.”강현우는 노트북을 두드리던 손을 잠시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며 눈썹을 살짝 올렸다.“그렇긴 하지.”그러고는 천천히 시선을 내려 그녀의 아직 완전히 낫지 않은 상처를 바라보며 말했다.“자신을 괴롭히는 데는 아주 용감하더라고.”그의 말투에는 묘한 비꼼이 묻어 있었다.그녀는 강현우의 특유의 빈정거림에 더 이상 말을 이어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경찰서에 도착한 윤하경이 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한 여성이 갑자기 뛰어와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윤하경 씨, 제발, 제발 저희 아이를 봐서라도 용서해 주세요!”윤하경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몸을 움찔했다.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갑자기 한 커다란 그림자가 그녀 앞을 가로막았다.바로 강현우였다.그녀는 강현우의 뒤에서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며 여성을 살펴보았다.“누구시죠?”여성은 초췌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저는... 진태호의 아내입니다.”윤하경은 상황을 단번에 이해했고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남편이 저지른 일은 남편이 책임져야죠. 아내를 앞세워 해결하려는 건 말도 안 돼요.”그러고는 단호한 목소리로 덧붙였다.“우리 앉아서 차분히 이야기할 수는 있어요. 하지만 만약 감정에 호소하거나 도덕적으로 압박하려는 거라면 죄송하지만 그런 것으로는 저를 움직일 수 없어요.”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진태호의 아내는 잠시 말을 잃었다.그녀는 무언가
윤하경은 이미숙을 바라보며 짓궂게 말했다.“제 아이도 아는데 왜 제가 그래야 하죠? 처음부터 남편을 잘못 선택하셨네요. 아이에게 좋은 아버지를 찾아줬으면 좋았을 텐데요.”윤하경은 원래 직설적인 성격이라, 말이 바로 나왔다.다친 다리를 움켜잡고는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었지만 경찰서라기보다는 마치 해변에서 여유롭게 쉬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그 옆에 앉아 있는 강현우는 윤하경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뒤로 기울이며 손으로 턱을 문지르며 여유 있게 말했다.그의 시선은 여전히 윤하경을 향하고 있었고 그의 평소 차가운 표정마저 살짝 풀리면서 마치 뭔가 재미있는 장면을 보고 있다는 듯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하지만 윤하경은 그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맞은편의 이미숙에게 집중했다.그리고 마음속으로 이번 일로 인해 생긴 자신만의 손해를 차근차근 계산하고 있었다.윤하경은 결코 억울하게 손해 보기를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다. 이번 일로 인한 손해도 꽤 컸고 자동차만 해도 거의 몇억 원에 달하는 가격이었다.그뿐 아니라 그날 받은 정신적 충격까지 생각하면 생각보다 큰 손해를 본 셈이었다.잠시 고민한 윤하경은 몸을 뒤로 기대며 다시 한번 단호하게 말했다.“이미숙 씨, 먼저 보상 문제부터 이야기해 봐요. 당신 남편이 제 차를 부수고 물에 빠지게 만들었어요. 차는 완전히 망가져서 거의 몇억 원의 손해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정신적 피해에 대한 보상은 얼마가 적당할까요?”윤하경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 이미숙은 눈물 섞인 목소리를 멈추고 잠시 생각했다.“당신이 용서를 해주시면 저는 4억 원을 보상으로 드릴게요.”그녀는 다시 윤하경을 쳐다보며 가엾은 표정을 지었다.“이 돈이 적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게 제가 지금 내놓을 수 있는 전부입니다.”윤하경은 그녀의 말을 듣고 한동안 침묵을 지키며 생각에 잠겼다.이미숙이 까다로운 상대임을 알기에, 더 이상 쓸데없이 대화를 늘어놓고 싶지 않았다.“진태호가 그런 일을 저지른 이상, 그 결과를 감당
윤하경은 잠시 발걸음을 멈췄고 눈앞의 장면에 잠시 갈등했지만 결국 아무 일도 없었던 척 고개를 돌렸다.소지연은 당황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저 신인아라는 애, 강현우랑 무슨 사이야?”윤하경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몰라. 나도.”“그럼 너랑 강현우는...”“가자.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고.”윤하경은 짧게 말한 뒤 차로 발걸음을 옮겼다.그 모습을 보고 있던 강현우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민진혁에게 말했다.“신인아 데려다줘.”신인아는 고개를 들고 살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오빠는... 같이 안 가세요?”강현우는 그녀를 보며 차분하게 답했다.“괜찮아. 너 먼저 가. 시간 나면 갈게.”신인아는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럼 조심히 오세요.”그렇게 말하고는 민진혁에게 출발하라고 고개를 끄덕였다.윤하경이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려던 찰나, 갑자기 조수석 문이 열렸다.놀라서 발을 브레이크에 올린 윤하경이 고개를 돌리자, 강현우가 몸을 살짝 숙인 채 소지연에게 말했다.“미안. 윤하경한테 할 말이 좀 있어서.”소지연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차에서 내렸다.윤하경은 입술을 꾹 다물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현우 씨랑 저, 가는 길 다르잖아요.”명백한 거절의 뉘앙스를 담았지만 강현우는 개의치 않았다.그는 긴 다리를 자연스럽게 차 안으로 뻗고 앉더니 느긋하게 몸을 기대며 말했다.“운전해.”윤하경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저...”“아니면 내가 운전할까?”강현우가 고개를 기울이며 그녀를 바라봤다. 예전에 강현우가 몰았던 미친 듯한 속도가 생각나 윤하경은 말없이 시동을 걸었다.차가 조용히 주차장을 빠져나온 후, 강현우가 물었다.“신인아, 어떻게 알게 된 거야?”그 말투. 마치 자신이 신인아에게 일부러 접근이라도 한 것처럼 들렸고 윤하경은 속으로 혀를 찼다.“그 말, 제가 신인아한테 일부러 접근한 거라고 들리는데요?”강현우는 대꾸하지 않고 그저 창밖을 보
소녀는 말끝마다 볼이 희미하게 붉어졌다. 부끄러운 건지, 숨결 때문인지 얼굴이 희미하게 물들어 있었다.그제야 윤하경은 복잡한 생각을 털어내고 조용히 그녀를 엘리베이터 안으로 밀어 넣었고 소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정말 고맙습니다.”“별말씀을요.” 윤하경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나서도, 윤하경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멍하니 서 있었다.‘대체 저 애는 누구지? 송시안이 말했던, 강현우에게 중요한 여자라는 게... 설마?’“야, 너 왜 그래?”소지연이 옆에서 그녀 어깨를 툭 치며 말했고 윤하경은 고개를 저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아니야, 가자.”그렇게 다시 발걸음을 옮겼지만 윤하경의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하기만 했다.그런데 보석 매장 안에서 윤하경은 또다시 휠체어를 탄 소녀를 마주쳤다.진열대 앞에 앉은 그녀는 턱을 괴고 귀걸이들을 보고 있었고 표정은 어딘가 망설이고 있는 듯했다.윤하경은 모른 척하고 돌아서려 했지만 이번엔 신인아가 먼저 그녀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어머, 그 언니다! 또 보네요?”“그러게요.”윤하경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쇼핑하러 오신 거예요?”소녀는 여전히 밝은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그냥 좀 둘러보는 중이에요.” 윤하경이 대답하고는 소지연의 팔을 끌어 매장을 나가려 했지만 소녀는 다시 윤하경을 불러세웠다.“잠깐만요! 혹시 시간 되세요? 제가 얼마 전에 귀국해서 친구도 없고... 혹시 이 두 개 중에 어떤 커프스링크가 더 나은지 좀 봐주실 수 있을까요? 도저히 못 고르겠어요.”윤하경은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걸음을 멈췄다.하지만 그녀의 목에 걸린 곤륜 부적이 다시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윤하경은 결국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그때 소지연이 윤하경의 귀에 속삭였다.“너 원래 이렇게 남 일에 잘 끼어들었나?”윤하경은 못 들은 척하며 말했다.“어떤 두 개요?”신인아는 바로 점원에게 자신이 고른 두 가지를 꺼내달라고 했다.“이거랑 이거요.”윤하경은 커프스를 들여다
윤하경은 다시 한번 오건우가 보냈던 사진을 꺼내 봤다.흐릿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윤하경은 자조적으로 입꼬리를 살짝 비틀었다.‘내가 왜 이렇게 지질하게 굴지...’강현우와 자신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명분 없는 사이이고 떳떳할 것도, 묻고 따질 자격도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자신이 이렇게 사진 하나에 마음을 흔들리고 있다는 게 웃겼다.윤하경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휴대폰 화면을 꺼버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로 올라갔다.그런데 사무실에 도착한 순간, 그녀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배경빈 씨 오늘 안 나왔어?”윤하경은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우슬기를 바라봤고 우슬기는 책상에 기대앉아 어깨를 으쓱였다.“안 왔어요. 앞으로도 안 올 거 같은데요? 아까 어떤 남자가 와서 자기가 경빈 씨네 집 가사 도우미라며 대신 사직서 냈다더라고요.”“대표님, 경빈 씨 진짜 어디 대단한 집 도련님 아니죠?”윤하경은 우슬기의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잠시 바라보다,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신경 꺼.”그렇게 말은 했지만 책상에 앉아 커피잔을 집어 드는 순간, 윤하경 머릿속엔 어제 강현우가 툭 던졌던 질문이 스쳐 지나갔다.‘배경빈, 왜 자꾸 네 주변에 맴돌지?’강현우와 이 일이 무관할 리 없었다.하지만 한편으론 잘된 일이기도 했다. 배경빈이 나간 덕에 그녀의 사무실이 다시 조용해졌으니까 말이다.윤하경은 서류를 정리하며 정신을 다잡았고 겨우 집중하기 시작했을 무렵 오랜만에 소지연에게서 카톡이 왔다.[하경아, 오늘 시간 돼? 잠깐 얼굴 좀 보자.]지난번,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며 연락을 끊었던 소지연이었다.회사는 부하직원들에게 잠시 맡기고 있었다고 했지만 그 뒤로 소식이 없었기에 더는 그녀를 건드리지 않았다.이제야 겨우 마음을 추스른 듯했다. 윤하경은 반가운 마음에 흔쾌히 약속을 잡았고 근처 대형 쇼핑몰에서 만나기로 했다.카페에 도착했을 땐, 소지연이 먼저 와 있었다. 얼굴에 살짝 피곤기가 보였지만 화장은 또렷했고 입술에는 진한 레드 컬러가 눈에 띄
윤하경은 박소희와 다를 게 없이 놀랐다. 그녀 역시, 강현우가 다시 돌아올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강현우는 아무렇지 않게 윤하경의 허리를 감싸안은 채, 비죽 웃으며 박소희를 바라봤고 겉으론 웃고 있지만 눈빛만은 싸늘했다. 박소희는 그 눈빛에 순간 굳어버렸지만 이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하경 씨 말에 너무 화가 나서 잠깐 이성을 잃었어. 현우야, 그런 뜻은 아니었어. 나 진짜...”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러고는, 낮고 느린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다시 묻을게. 도대체 누가 누구 약혼자를 유혹했다는 거지?”박소희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윤하경 쪽을 힐끔 보더니 결국 강현우의 싸늘한 눈빛에 기가 죽은 듯 고개를 숙였다.“우리 곧 약혼하잖아. 약혼자로서 적어도 사람들 앞에서는 나한테 체면은 세워줘야 하는 거 아니야...?”강현우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그렇지? 근데 말이야...”“내가 언제 약혼했는데?”그 한마디는 전혀 준비되지 않은 폭탄처럼 박소희에게 직격했고 윤하경도 순간 숨을 멈췄다.그 말은, 눈앞에서 공개적으로 뺨이라도 맞은 듯한 충격을 안겨줬다.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이런 수모를 겪어본 적 없는 박소희는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누구도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없었는데 강현우만은 예외였다. 그리고 더 괴로운 건, 그런 그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현우야... 그건 네 어머님이랑 우리 아빠가...”“그래서?” 강현우는 가볍게 웃었다. “그럼 그 사람들이랑 따져. 나랑은 무슨 상관이야?”그 말에 박소희의 얼굴은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버렸고 윤하경은 강현우 품 안에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무슨 뜻이지? 그럼 진짜 약혼한 건 아니었던 거야? 그 곤륜 부적은?’윤하경의 시선이 무심코 박소희 쪽으로 옮겨졌고 그제야 깨달았다.박소희의 목에는 어젯밤 그 값비싼 곤륜 부적이 없었다.그녀의 성격상, 만약 강현우가 그걸 준 거라면 분명 자랑하듯 걸고 나왔을 텐데
윤하경은 아직 마음이 복잡해, 강현우가 탄 차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그런 그녀를 누군가가 부르자, 화들짝 놀라 돌아봤다.박소희를 보자 윤하경은 잠깐 당황한 표정이 스쳤지만 곧 웃으며 말했다.“소희 씨.”박소희는 턱을 살짝 들고 도도하게 물었다.“하경 씨, 시간 좀 있으세요? 아침이라도 대접하고 싶어서요.”“없어요.”윤하경은 단호하게 거절했고 박소희와는 굳이 엮이고 싶지 않았다.그런데 박소희는 물러서지 않았다.윤하경이 거절하자, 아예 그녀의 손목을 잡고 숲길 안쪽의 레스토랑으로 끌고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 박소희는 두 팔을 끼고 앉아 윤하경을 노골적으로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윤하경은 시계를 슬쩍 확인하곤 무표정하게 말했다.“하실 말씀 있으면 빨리하세요. 회사에 회의 있어서요.”박소희는 윤하경의 여유로운 태도에 불쾌감이 치밀었다. 분명히 자신은 정식 약혼자임에도, 눈앞의 여자는 전혀 죄책감도 없어 보였다.“참 뻔뻔하시네요.”박소희가 냉소를 머금고 말했다.“하경 씨는 부끄럽지도 않아요? 정식 약혼자가 있는 남자랑 엮여 있으면서.”윤하경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제가 왜 부끄러워해야 하죠?”늘 우아하던 박소희는 순간 이성을 잃었다. “윤하경! 너 윤씨 가문 딸 아니야? 경성에서 그 정도면 그럭저럭 이름 있는 가문인데 그런 여자가 감히 남의 약혼자랑 그렇게 엮여? 이런 자리에서 들키고도 창피한 줄도 몰라요? 양심 없어?”.아침 시간이라 사람이 많진 않았지만 커져가는 박소희의 목소리 때문에 레스토랑 안에 있던 직원들이 하나둘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고 다들 귀를 쫑긋 세우고 그쪽을 힐끔거렸다.윤하경은 그녀의 격앙된 모습을 지켜보다,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차분한 그녀의 태도는 분노에 휩싸인 박소희와 극명하게 대비됐다.원래부터 윤하경은, 누가 위에서 내려다보듯 가르치려 들면 질색이었다.더군다나 그녀의 오늘 하루는 애초에 좋지 않았고 지금 이 상황은 한 번쯤 터뜨릴 좋은 기회였다.“소희 씨.”윤하경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
윤하경은 조용히 입술을 다물었다가 다정하게 말했다.“현우 씨 바쁘시면 저 혼자 아침 먹을게요.”강현우는 그 말에 휴대폰을 거두며 그녀를 돌아봤다. 또렷하고 깊은 이목구비는 한 번 마주치면 쉽게 눈을 뗄 수 없는 인상이었다.“같이 먹기로 했잖아. 당연히 같이 먹어야지.”그는 단호하게 말한 뒤, 더 이상 휴대폰을 건드리지 않았다.윤하경은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고 사실 그녀는 그렇게까지 바라진 않았다.차는 숲길 끝에 도착했고 미리 연락이 되어 있었는지 둘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식탁 위에 아침이 한가득 차려져 있었고 여러 가지 다과와 차가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웠다.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강현우가 이렇게 신경 써서 아침 식사를 챙겨주는 상황이라면윤하경은 기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상하게도 입맛이 없었다.그래도 강현우가 옆에서 지켜보니 억지로라도 몇 입 먹었고 따뜻한 차가 목으로 넘어가자, 몸도 점점 따뜻해졌다.그런 둘의 모습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 지켜보고 있었다.안현주가 급히 옆방으로 뛰어들며 외쳤다.“소희야! 강현우한테 아침밥을 차릴 그럴 때 아니야.”조심스럽게 아침 식사를 도시락에 담고 있던 박소희의 손이 멈췄고 고개를 돌려 안현주를 흘겨봤다.“잔소리 좀 그만해. 너야말로 괜한 걱정은 하지 마. 회사 갈 때 내가 직접 들고 올라가면 되니까, 너는 밑에서 기다려.”안현주가 혀를 찼다.“너는 정식 약혼자랍시고 정성 다해서 도시락 싸고 있는데 지금 강현우랑 윤하경이랑 둘이서 다정하게 아침 먹고 있다니까?”안현주는 말하면서도 억울한 듯 코웃음을 쳤다.“진짜 강현우란 남자, 너 같은 사람 좋은 여자는 안 보이고 그 윤하경 같은 요상한 여자만 눈에 들어오나 봐.”박소희의 손이 살짝 떨렸다.“뭐라고?”안현주가 인상을 찌푸리며 되풀이했다.“네가 그렇게 마음 써주는 약혼자는 지금 윤하경이랑 사이좋게 조식 데이트 중이라고. 근데 너는 그 사람이 배고플까 봐 도시락까지 싸고 있고. 뭐, 아침 입맛 돋워줄 애피타이저는 이미 먹었을지
그 말을 끝으로 윤하경은 휴대폰 화면을 꺼버리고 조용히 욕실로 들어갔다.양치질을 하며 거울 속 자신의 멍한 얼굴을 바라보던 그녀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입안의 거품을 헹구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조용히 그녀를 안았고 보지 않아도 강현우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막 자라난 까칠한 수염이 그녀의 피부를 간질였고 윤하경은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다.그러나 강현우는 세면대 양옆에 팔을 짚어 그녀를 가둬버렸고 한 발짝도 도망갈 수 없는 거리였다.“왜, 어젯밤 내가 안 들어와서 화났어?”강현우는 손끝으로 윤하경의 콧등을 살짝 긁으며 말했다.“봐라, 또 이렇게 새침하게 굴고.”윤하경은 잠시 멈칫하다가 가볍게 웃어 보였다.“아니요, 안 화났어요.”강현우는 한쪽 눈썹을 살짝 올리며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윤하경은 그를 끌어안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현우 씨, 저 여기서 꽤 오래 지낸 것 같아요. 이제는 슬슬 나가서 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괜히 사진이라도 찍혀서 기사 나면 현우 씨 이미지에 안 좋잖아요.”강현우는 윤하경을 내려다보며 코웃음을 쳤다.“도망치고 싶은 거야?”그의 눈동자에 잠깐 스치는 날카로움이 그녀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고 윤하경은 그를 진정시키듯 그의 셔츠 단추를 매만지며 말랬다.“아니요, 진심으로 현우 씨 걱정해서 하는 말이에요. 강한 그룹 같은 대기업이면 주가에도 영향 줄 수 있는 문제니까요.”이 비슷한 말은 예전에도 한 적이 있었지만 오늘따라 그 말투에는 미묘한 날이 서 있었다.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내가 그런 걸 신경 쓰는 놈처럼 보여?”윤하경은 잠깐 손을 멈췄다가, 이내 한껏 순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현우 씨는 안 신경 쓰시더라도... 전 해야죠.”그 말에 강현우는 그녀의 턱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나지막이 묻는다.“진심이야?”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네.”강현우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
윤하경은 대답하지 않았다.그 모습을 본 강현우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왜, 마음에 안 들어?”윤하경은 눈썹을 살짝 모았다가, 속으로 맴도는 의문을 억누른 채 다시 환한 미소를 띠었다.“마음에 들어요.”강현우는 그녀의 말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또렷한 콧대 아래 옅은 미소가 스쳤고 그는 곧 민진혁에게 지시했다.“가자. 집으로.”그날 강현우는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침실로 들어간 그는 윤하경의 입술을 조심스레 물었다.윤하경은 살짝 그를 밀치고 그의 의아한 눈빛을 받으며 변명을 꺼냈다.“저기... 오늘 좀 더워서요. 샤워 좀 하고 올게요.”하지만 강현우는 그녀를 벽에 가두며 낮게 속삭였다.“난 안 덥던데.”그 말을 마치기 무섭게 다시 입을 맞췄고 윤하경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사실 강현우는 이런 쪽에 능숙했다. 지쳐도 어쩌면 즐길 수도 있는 관계, 적어도 몸만 놓고 보면 말이다.하지만 오늘은 왠지 모르게 거부감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할 새도 없이, 강현우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그녀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고 있었다.몸이 미세하게 떨릴 무렵, 갑자기 그의 휴대폰이 울렸고 진동 소리는 조용한 방 안에 유난히 크게 울렸다.윤하경은 조심스레 말했다.“전화 왔어요.”강현우는 이를 악물며 짜증 섞인 표정을 지었지만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했다.그런데 전화를 받지는 않고 오히려 윤하경의 입술에 짧은 키스를 남겼다.“얌전히 집에서 기다려. 금방 올게.”말투는 부드러웠고 어딘가 아이 달래듯 느껴졌다. 그 말에서 ‘집’이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 윤하경은 잠깐 멍해졌다.‘집?’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집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마음이 닿는 곳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임수연과 윤하연이 집에 들어온 이후 그곳은 더 이상 집이 아니었다.그런데 강현우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을 때, 이상하게도 가슴 한구석이 저릿했다.강현우가 나간 후, 윤하경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역시 강현우 같은
오건우는 그 남자가 다가오는 걸 보더니 더욱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하 대표님, 막 서울 오셨다고 들었는데요. 제가 소개 좀 드릴게요. 이쪽은 강현우 대표님이에요.”하 대표라는 남자는 생각보다 젠틀한 인상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강현우를 향해 손을 내밀며 정중히 웃었다.“반갑습니다. 평소 익히 들었습니다. 저는 하석호입니다. ”강현우는 무표정한 눈으로 하석호를 한번 쓱 훑어보고는, 그 손을 외면한 채 고개만 돌렸다.오건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이번엔 윤하경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리고 이쪽은 윤하경 씨입니다.”평소엔 권력자 곁에 있는 여자엔 별 관심 없는 하석호였지만 윤하경의 얼굴을 보자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윤하경 씨?”윤하경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우처럼 무시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니고 오건우와도 협업 중이었기에 말이다.“하 대표님, 반갑습니다.”말을 막 끝내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톡 건드렸다.“윤하경 씨, 혹시 예전에 모성에 가본 적 있으신가요?”모성은 국경 근처 외딴 도시였다.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가본 적 없어요.”하석호는 뭔가 더 묻고 싶은 듯했지만 강현우가 고개를 돌리며 그를 노려보듯 쳐다봤다.“하 대표님, 질문이 좀 많은 거 아닌가요?”하석호는 순간 당황한 듯했지만 금세 웃으며 넘겼다.“그러네요, 제가 좀 지나쳤나 봅니다.”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드디어 윤하경의 귀가 조용해졌지만 여전히 하 대표의 시선이 자기에게 꽂혀 있는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이윽고 본격적으로 경매가 시작됐고 초반엔 관심 가는 물건이 딱히 없었다. 그러다 한 쌍의 사파이어 귀걸이가 등장하자 강현우가 고개를 돌려 윤하경을 바라봤다.“어때, 마음에 들어?”강현우는 윤하경 같은 예쁜 여자는 당연히 장신구를 좋아할 거라 생각했지만 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그냥 그래요.”강현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지만 더 묻진 않았다.그때 사회자의 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