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레스토랑 입구에 도착했을 때, 윤하경은 강현우가 낯선 여자와 함께 걸어오는 모습을 보았다.여자는 밝게 웃으며 강현우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윤하경은 순간적으로 옆으로 비키려 했지만 곧 스스로를 비웃었다.‘내가 왜 피해야 하지? 괜히 졸지 말자.’강현우 역시 윤하경을 알아봤고 그녀와 눈이 잠시 마주치자 차가웠던 시선이 살짝 흔들리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금세 고개를 돌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시선을 거두었다.주미나는 강현우를 보자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어머, 현우 씨도 오셨네요. 이렇게 만나다니 정말 우연이네요.”강현우는 짧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여유롭고 세련된 태도였다. 반면 구지호는 윤하경의 손을 슬쩍 잡아챘다.그녀가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구지호는 손에 힘을 더 강하게 주며 놓아주지 않았다.강현우는 그 모습을 보더니 고개를 살짝 들며 물었다.“지호 씨, 퇴원했나 보네요.”구지호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덕분에 살았죠. 죽이지 않고 살려줘서 고마워요.”윤수철은 강현우와 친분을 쌓아볼 생각이었지만 강현우가 사고의 당사자라는 걸 듣고 한쪽에 서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강현우는 구지호의 비꼬는 말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가볍게 웃었다.그는 여유 있는 표정으로 주미나를 쳐다보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혹시 후유증 같은 게 남았다면 바로 연락하세요. 제 책임이니까요.”주미나는 급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괜찮아요. 이제 다 나았어요.”“그럼 다행이네요.”강현우는 짧게 대답하고 옆에 있던 여자의 어깨를 자연스럽게 감싸며 말했다.“그럼 우리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들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주미나는 그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윤하경과 윤수철이 함께 있는 상황에서 끝내 말을 삼켰다.윤하경은 구지호에게 손을 잡힌 채 답답함이 점점 커졌다.겨우 자리에 앉자마자 구지호는 바짝 다가와 그녀를 물끄러미 보며 물었다.“하경아, 요즘 뭐 했어?
윤하경은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거울 속에 비친 얼굴은 다름 아닌 강현우였다.그녀는 순간적으로 멈칫하며 손을 내렸고 세수하던 것도 잊은 채 그를 쳐다봤다.“여기 웬일이에요?”놀란 마음을 가라앉히며 그녀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데이트 중 아니었어요?”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현우는 뒤돌아 화장실 문을 닫더니, 한순간에 그녀를 세면대에 밀착시키고 거침없이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그의 차가운 기운과 익숙한 향기가 동시에 밀려들며 윤하경의 심장이 한순간 멎는 듯했다. 그녀는 황급히 손으로 그를 밀쳐냈다.“여기서 이러지 마세요.”윤하경은 가쁜 숨을 내쉬며 말했다.“사람들 다니잖아요.”하지만 강현우는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그녀를 화장실 칸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이 고급 레스토랑은 화장실마저 세련되고 칸마다 독립적으로 나뉘어 은밀하고 안전했다. 그는 그녀를 칸 문에 밀어붙이고 손으로 문을 단단히 닫았다.윤하경은 그제야 상황이 믿기지 않는 듯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여긴 여자 화장실이에요.”그러나 강현우는 그녀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녀의 턱을 잡아 올렸다.“그래서 구지호랑 다시 잘해보기로 한 거야?”윤하경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아니에요.”그녀가 말을 더 하기도 전에 강현우는 다시 그녀의 입술을 덮쳤고 그의 손길이 점점 대담해졌고 등이 드러난 그녀의 드레스를 점점 더 파고 들어갔다. 차가운 손이 윤하경의 피부를 스치자 본능적으로 몸이 움츠러들었고 그녀는 깔끔하게 다림질된 그의 셔츠를 힘껏 움켜쥐었다.비록 함께한 시간이 많지 않았지만 강현우는 마치 본능적으로 이런 상황을 다룰 줄 아는 사람처럼 그녀를 휘어잡았고 그녀가 저항할 틈을 주지 않았다.그러나 그 순간 화장실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하경아, 너 거기 있어?”구지호의 목소리였다.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걸로 보아 화장실 입구에 서 있는 듯했다.윤하경은 정신이 번쩍 들었고 숨을 고르며 상황을 정리하려 애썼다.강현우는 그런
강현우의 옆모습은 여전히 완벽했고 윤하경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니요. 없어요.”‘적어도 지금은...’윤하경은 자신이 이 남자 앞에서 왜 이렇게 늘 작아지는지 자책하며 고개를 살짝 저었고 입술을 깨물며 정신을 다잡은 뒤 화장실 칸을 나왔다.거울 앞에 서서 메이크업을 고치던 그녀는 거울 속에 약간 부어오른 자신의 입술을 보며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나도 한 방 먹였지.’그녀는 강현우 셔츠 카라에 묻은 립스틱 자국을 떠올렸다.그 여자가 그걸 보면 어떤 반응일까? 그 생각에 기분이 한결 좋아진 윤하경은 발걸음을 가볍게 화장실을 나섰다.강현우가 있는 방의 문을 지나치며 그녀는 무심한 듯 안쪽을 힐끗 들여다봤다.그는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옆에 앉은 여자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참 연기 잘하네.”윤하경은 조용히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방 안으로 들어서자 구지호의 아버지 구성수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윤하경은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깍듯하게 인사했다.“아저씨, 오랜만이네요.”구성수는 다정한 미소로 그녀를 맞았다.“하경이는 볼 때마다 점점 더 예뻐지네.”윤하경은 예의상 말했다.“아저씨도 여전히 젊어 보이세요.”그때 구지호가 방으로 들어오며 물었다.“하경아, 어디 갔었어? 화장실 갔는데 안 보이던데.”윤하경은 담담하게 대답하며 윤수철 옆에 자리를 잡았다.“잠깐 옆 슈퍼에 다녀왔어.”구지호는 안도한 듯 웃으며 그녀 옆자리에 앉았다. 음식이 차례로 나오기 시작했고 구지호는 그녀에게 다정한 척 음식을 덜어주었다.겉으로 보기에는 완벽한 남자 친구 같았지만 윤하경은 그가 덜어준 음식을 손도 대지 않았다.한편, 윤수철과 구성수는 사업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비록 윤수철의 인품은 별로였지만 사업에서 성공한 사람으로서 배울 게 나름 있었다.구씨 가문은 의류 사업을 하고 있었고 윤수철은 최근 그쪽에 손을 대보고 싶어 둘은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눴다. 윤하경이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어도 두 사람은
윤하경이 무언가 말하려던 순간 윤수철이 먼저 말을 꺼냈다.“좋아, 좋아. 하경이 오후에 시간 비어 있어.”두 가문의 어른들은 윤하경의 생각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일사천리로 대화를 진행했다.윤하경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지만 윤수철은 웃는 얼굴로 그녀를 한쪽으로 끌고 가며 은근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하경아, 너랑 지호 이 결혼은 꼭 성사돼야 해.”그는 짧게 뜸을 들이더니 날카로운 한마디를 덧붙였다.“네 엄마가 남긴 물건이 아직 내 손에 있다는 거 잊지 말고.”분명한 위협이었고 그 말을 들은 윤하경은 속에서 울컥 치미는 화를 겨우 억누르고 있었다.윤수철은 그녀의 차가운 표정을 의식한 듯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달래는 척했다.“그리고 네가 지호를 그렇게 오래 좋아했잖아. 여자란 원래 좀 투덜대다가도 금방 풀리는 거야. 너무 까탈스럽게 굴지 마.”그 말을 듣자 윤하경은 헛웃음이 터졌다.‘와. 이게 친아버지라는 사람이 할 소리야?’그녀는 차갑게 웃으며 물었다.“그렇게 윤하연이 좋으면 하연이를 지호랑 결혼시키지 그러세요? 딱 어울리잖아요.”윤수철의 얼굴이 단번에 굳어지더니 목소리가 살짝 다급해졌다.“헛소리하지 마! 하연이가 지호랑 결혼하다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이것 보라니깐.’윤수철도 구지호가 믿을 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윤하연은 안 되고 자신은 된다는 게 정말 우스웠다.윤하경은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눈빛으로 말했다.“내가 지호를 좋아해서 결혼하라 하시는 건가요? 아니면 지호가 문제가 많다는 걸 알아서 하연이는 안 된다는 건가요?”그녀의 직설적인 물음에 윤수철은 순간적으로 눈길을 피했고 그의 얼굴에는 당혹스러움이 드러났고 얼버무리듯 말했다.“지호는 괜찮은 아이야. 헛소리하지 마.”그는 그녀와 더 이상 말다툼을 하고 싶지 않다는 듯 그녀의 팔을 잡아끌고 구지호 앞으로 데려갔다.“지호야, 하경이는 너한테 맡길게. 얘가 좀 고집스러우니 잘 부탁해.”윤하경은 가방을 쥔 손가락에 힘을 주며 잠시 표정을 다
구지호는 기분이 좋은지 운전을 꽤 거칠게 했다.예전 같았으면 윤하경이 조심해서 좀 천천히 가라고 했겠지만 지금은 그저 옆 좌석 손잡이를 꼭 붙잡았다.‘스스로 사고가 나면 병원에 가겠지. 차라리 내 앞에서 안 보이는 게 나아.’하지만 그의 운전은 예상과 달리 아슬아슬했을 뿐 무사히 쇼핑몰에 도착했다.쇼핑몰 1층에는 보석 매장이 있었다.구지호는 기세 좋게 매장으로 들어가 직원에게 말했다.“가장 큰 다이아몬드부터 보여줘요.”직원은 대박 손님이 왔다며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잠시 후, 직원은 값비싼 보석 반지 몇 트레이를 가져왔다.다이아몬드, 사파이어, 자수정 등 다양한 보석들이 눈부시게 빛났다.윤하경은 보석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지만 크고 투명한 것이 더 비싸다는 건 알고 있었다.그녀는 구지호를 힐끔 보고는 트레이 위를 가볍게 살피다가 가장 큰 사파이어 반지에 손을 멈췄다.그녀는 반지를 집어 손가락에 끼워 보았고 반짝이는 사파이어가 그녀의 손에서 빛을 발했다.윤하경은 미소를 띠며 구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거 예뻐. 이걸로 하면 되겠네.”구지호는 순간 얼굴이 굳었고 잠시 멈칫하더니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아직 급하게 결정할 필요는 없잖아. 좀 더 보고 네가 진짜 마음에 드는 걸로 고르자.”‘대단하네. 돈 아끼는 말을 이렇게 깔끔하게도 표현하네.’윤하경은 속으로 피식 웃었고 구지호의 집안은 부유했지만 이 반지 가격이 몇십억 원대라는 걸 생각하면 그의 주머니 사정이 벌써 불편해졌을 게 분명했다.그녀는 그런 그의 표정을 보며 웃음을 참으려 했지만 반지를 빼지 않고 손목을 들어 조명에 반짝이며 말했다.“난 한 번 보고 마음에 들면 바로 골라야 좋더라. 이건 딱 내 스타일인데.”그러자 구지호는 표정 관리가 안 되기 시작했다. 윤하경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며 그가 무언가 말하려는 찰나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고 한숨을 쉬는 척하며 말했다.“근데 나 원래 보는 눈이 좀 별로라 가끔 겉만 번지르르한
윤하경이 자리를 떠나자마자 윤하연이 기다렸다는 듯이 기둥 뒤에서 나왔다.구지호는 그녀를 보자 순간 당황한 기색을 보였고 급히 윤하경이 갔던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하지만 윤하경은 이미 잘 숨은 상태였기에 구지호는 그녀를 발견하지 못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윤하연을 바라봤다. 그의 표정엔 짜증이 서려 있었다.“여기서 뭐 하는 거야?”윤하연은 금세 눈가에 눈물이 고이며 말했다.“지호 오빠, 정말 언니랑 약혼할 거야?”구지호는 귀찮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당연히 하경이랑 결혼해야지.”윤하연은 눈물을 참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난? 난 오빠한테 뭐였는데?”그녀의 물음에도 구지호의 표정엔 짜증 외에 다른 감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처음에 네가 먼저 나한테 다가온 거잖아. 하연아, 우린 그냥 잠깐 즐긴 거야. 그런데 지금 와서 왜 이러는 건데?”윤하연은 그의 차가운 태도에 충격을 받은 듯 눈물을 흘리며 물었다.“오빠... 나한테 이렇게 생각했던 거야?”“나는... 나는 진심으로 오빠를 좋아했는데.”멀찍이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윤하경은 그들의 대화 내용까지는 들을 수 없었지만 상황을 보며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윤하연, 연기 하나는 진짜 수준급이네. 역시 엄마한테 잘 배웠어.’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조용히 녹화 버튼을 눌렀고 구지호는 윤하연의 눈물에 점점 더 짜증이 나는 듯한 표정을 지었고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돈이 필요해?”윤하연은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중얼거렸다.“오빠... 어떻게 그런 말을 해?”구지호는 한숨을 쉬며 손목시계를 확인했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알았어. 오늘 밤에 만나. 평소에 만나던 그 장소로 와. 그때 얘기하자.”그는 이 상황이 윤하경에게 들킬까 봐 더 이상 시간을 끌고 싶지 않은 듯 보였다.윤하연은 밤에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말에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좋아. 나도 오빠한테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아.”말을 마친 윤하연은 아쉬운 듯 몇 번이나
윤수철은 탁자 위에 놓인 차 키를 집어 들더니 윤하경에게 건넸다.“이건 오늘 너를 위해 산 새 차야. 지난번에 네가 화난 것도 이해해. 네 차도 몇 년 탔으니까 이제 바꿀 때가 됐지. 네가 지호랑 약혼하기로 한 기념으로 아빠가 주는 선물이야.”윤하경은 그의 손에 든 차 키를 무심하게 바라봤다.‘오, 심지어 파나메라네.’윤하연의 차보다는 좀 고급이었지만 가격 차이는 크지 않았다.‘그래도 아빠라고 두 딸을 공평하게 챙기네.’그녀는 속으로 비웃었다.‘내 차가 작아서 바꾼 걸까? 아니면 구지호네가 날 학대한다고 생각할까 봐 체면 세우려고 산 걸까?’하지만 이런 건 사실 중요하지 않았고 윤하경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그의 팔짱을 끼고는 살짝 흔들었다.“고마워요. 아빠, 역시 아빠가 최고네요.”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그녀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애교를 부린 적이 거의 없었다.윤수철은 잠시 멈칫하더니 어색한 기침을 했다.윤하경은 고개를 숙인 채 잠시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왜 그래?”윤수철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고 윤하경은 코끝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아빠가 이제는 윤하연만 좋아하고 저를 신경 안 쓰는 줄 알았어요.”그의 표정이 약간 굳었지만 곧 부드러운 웃음을 지었다.“말도 안 돼. 넌 내 딸인데 내가 어떻게 널 안 좋아하겠니?”“정말이에요?”윤하경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고 윤수철은 확신에 차서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잠시 침묵하더니 조용히 말했다.“아빠, 저는 엄마가 살아 계셨을 때가 정말 그리워요.”그녀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엄마가 저한테 어른이 되면 성남에 있는 그 별장을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결혼해도 언제든 갈 수 있는 제 공간이 되게요.”그 말을 들은 윤수철은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었다.“아빠, 그 집에 정말 오랜만에 가보고 싶어요. 우리 나중에 같이 가요. 어때요?”윤하경은 말은 돌려 했지만 의도는 명확했다. 언제 집을 자신에게 넘길 건지 묻는 것이었다.그 집은 어머니가
윤하경이 자리에서 일어나 윤수철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아빠, 아줌마도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그 집은 대체 무슨 상황이죠? 이제 좀 들어보고 싶어요.”윤수철은 잠시 말없이 있다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쏘아보며 말했다.“하경아, 네 눈엔 내가 아빠로 보이긴 하니?”윤하경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반문했다.“그게 무슨 말씀이세요?”그녀는 속으로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직감했다.아마도 그 집에 얽힌 사연이 단순하지 않을 것이다.윤하경은 입을 다문 채 담담한 시선으로 윤수철을 응시하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윤수철은 입술을 꼭 다물고 있다가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내가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매일 내 것만 노리는 거냐? 그 집 이야기는 더 이상 꺼내지 말아. 내가 알아서 줄 때가 되면 줄 테니.”임수연은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더니 손을 뻗어 그의 팔을 살짝 잡아당겼다.그러나 윤수철은 그녀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는 씩씩거리며 위층으로 올라갔고 거실에는 윤하경과 임수연 둘만 남았다.윤수철이 자리를 떠나자 임수연도 더 이상 꾸밀 필요가 없다는 듯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참 우습네. 가족한테 얻어낼 생각만 하는 딸이라니.”윤하경은 미소를 지으며 여유롭게 받아쳤다.“그럼 이제 보셨겠네요.”“하지만 그건 제 부모님의 재산이에요. 그쪽하고는 상관없는 일 아닌가요?”그녀는 느긋하게 눈을 흘기며 손에 든 새 차 열쇠를 가볍게 흔들었다.“어쨌든 오늘 새 차를 받아서 기분이 좋으니 이번엔 넘어갈게요.”그 말을 마친 그녀는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며 문밖으로 나갔다.새 차는 저택 앞 도로에 주차되어 있었고 차를 발견하자마자 그녀는 차에 올라탔다.운전석에 앉은 윤하경은 소지연에게 전화를 걸었다.“지연아, 저녁에 나와서 같이 밥 먹자.”소지연이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좋은 일 있어?”윤하경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아빠가 새 차를 사줬어. 널 태우고 드라이브 해줄게.”“원하면 이 차로 훈남도 낚으러 다녀도 돼.”소지
윤하경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숨이 턱 막히는 듯한 감각을 안고 조용히 그 어두운 방에서 빠져나왔고 강현우도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서늘한 눈빛으로 임수연을 잠시 바라보더니 민진혁에게 말했다.“잘 감시해.”윤하경은 방을 나서자마자 바로 옆 화장실로 들어가더니 세면대에 다가가 물을 틀고 손으로 몇 번씩 물을 떠 얼굴에 끼얹었다. 그런데도 모자라다 느낀 그녀는 결국 얼굴 전체를 물속에 파묻었다.숨이 막히는 그 답답한 느낌이 이상하게도 편안했다.화장실 문 앞에 기대선 강현우는 자신을 괴롭히듯 물속에 얼굴을 처박는 윤하경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 어떤 제지도 하지 않았다.정말로 질식할 듯한 순간이 오기 전, 윤하경은 비로소 머리를 들었다.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마주하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은 금세 젖은 머리카락과 뒤섞여 초췌하게만 보였다.울고 싶지 않았지만 눈물은 말을 듣지 않았다. 자꾸만 흘러내렸고 아무리 손으로 닦아도 멈추질 않았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현우가 성큼 다가와, 젖은 머리 따위 개의치 않고 그녀를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저... 안 울었어요.”윤하경은 조용히 그의 품속에서 중얼거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고 작은 소리로 울먹거렸다.“아까 물 때문에... 불편해서 그런 거니까... 놓아줘.”“응.”강현우는 무심한 듯 대답했지만 그녀를 풀어 주지 않았다. 윤하경은 억지를 부렸지만 떨리는 목소리가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결국 그녀는 그 품 안에서 참지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했고 작은 손으로 강현우의 허리를 끌어안고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왜... 왜 하필 그 사람이야... 왜 우리 엄마를 죽인 사람이... 아빠인 거냐고...”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의 엄마를 죽였다는 진실. 그건 그 누구에게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윤하경은 수많은 일을 겪으며 단단해졌다고 믿었지만 막상 진실을 마주하니 무너져 내리는 건 한순간이었다.강현우는 말없이 그녀의 머리 위를 다독였다.
강현우는 윤하경의 말을 들은 순간, 마치 자기 등에 기대어 괜히 기세부려보는 여우를 보는 것처럼 피식 웃었다. 그리고 슬쩍 그녀의 허리에 손을 얹더니 말랑한 살을 가볍게 꼬집었다.윤하경은 몸이 순간 얼어붙었더니 고개를 홱 돌려 그를 노려보며 쏘아붙였다.그러자 강현우는 입꼬리를 비틀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이 남자,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거야?’여긴 어쨌든 강현우의 구역이었고 윤하경은 조용히 눈빛으로 그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제발... 제발 지금은 진짜 아무 짓도 하지 마.’그녀의 눈빛을 읽은 듯, 강현우는 피식 웃으며 손을 거뒀고 윤하경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일어나 임수연 앞으로 다가섰다.“그럼, 그날의 일. 전부 말씀해 주세요.”윤하경은 핸드폰을 꺼내 녹음기를 켜더니 조용히 바닥에 내려놓았다.“거짓말은 하지 마세요. 제가 묻는다는 건, 이미 손에 증거와 증인이 있다는 뜻이니까요.”그리고 싹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거짓말하면... 그땐 진짜 피곤해지실 거예요.”그녀의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미소는 차갑고 서늘했고 임수연의 목소리는 공포에 질린 듯 심하게 떨렸다.한참이나 입을 떼지 못하던 그녀는, 마침내 말하기 시작했다.“그래. 맞아. 네 엄마한테 손댄 건 나야. 하지만 그 여자는... 원래 죽어야 했어!”그녀는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어 윤하경을 노려보며 외쳤다.“그 여자가 아니었으면... 윤수철이 날 그렇게 버렸겠냐고?”짝!작은 방 안을 쩌렁쩌렁 울린 건, 단단한 뺨을 때리는 소리였다. 윤하경은 너무 세게 손을 내리친 나머지, 손끝까지 얼얼했다.“말, 똑바로 하세요.”윤하경의 목소리는 냉정했고 밝고 단정한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그 자체로도 상대의 숨통을 조이기에 충분했다.뺨을 맞고도 당황한 듯 멍하니 있던 임수연은, 피가 맺힌 입술을 닫고 잠시 침묵했다.“그때... 윤수철한테 버림받고 나서... 진짜 끔찍했어. 생활은 엉망이고 나... 임신까지 했었거든.”“결국 하는 일도 없는 건달이랑 결혼하
임수연의 몸 어딜 봐도 눈에 띄는 상처는 없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완전히 기진맥진한 모습이었다.그녀는 바닥에 풀썩 쓰러진 채, 일어날 힘조차 없는 듯 보였다.하지만 윤하경과 강현우가 방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임수연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들어 윤하경을 노려보았다.“윤하경... 너, 반드시 비참하게 죽을 거야!”방금 전 고함을 너무 질렀는지, 목소리는 이미 갈라져 있었지만 그 분노는 오히려 더 진하게 실려 있었다.윤하경은 무심하게 그녀 앞에 다가가 무릎을 굽혔고 눈동자엔 단 한 줌의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내가 비참하게 죽을지 아닐지는 모르겠어요.”그녀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잔잔하게 웃었다.“하지만 당신은... 아마 나보다 먼저 죽을지도 모르죠. 지금처럼 계속 입 다물고 있으면 오늘이 마지막 날일 수도 있으니까요.”강현우 곁에 오래 있다 보니 말투까지 점점 닮아가고 있었고 말끝에 서린 위압이, 익숙하면서도 묘하게 어울렸다.강현우는 그런 윤하경을 보며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들어 올렸고 입가엔 아주 옅은 미소까지 맴돌았다.임수연도 그 말이 허세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강현우가 작정하면 이 방에서 죽어도 세상 누구도 모를 수 있다는걸, 그 사실이 더없이 무서웠다.입술을 꾹 깨물며 이를 갈던 임수연은 결국 겁에 질린 눈빛으로 변했고 그 모습을 바라보며 윤하경은 여유롭게 웃었다.“아줌마, 그래도 인정할 건 인정해야죠. 말 안 하셔도 돼요. 아줌마부터 처리하고... 그다음엔 하연이에요. 그 애가... 당신처럼 버틸 수 있을 것 같나요?”윤하경의 말투는 여전히 차분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너무도 날카롭고 잔혹했다.그러자 임수연의 얼굴이 급격히 일그러졌고 진심으로 겁에 질린 눈빛이었다.윤하경은 그녀가 끝내 말을 하지 않자, 자리에서 일어나 강현우 쪽으로 돌아섰다.“강 대표님, 아마... 또 민진혁 씨 손 좀 빌려야 할 것 같아요.”“윤하경... 네가 어떻게 죽는지 꼭 볼 거야... 저주할 거야...”임수연의 외침은 절망에 찬 비명
주변 시선 신경 안 쓰고 한껏 구경하겠다는 듯, 완전히 남 일 보듯이 바라보던 윤하경은 조용히 입술을 다물고 자리에 다가갔다.“제가 좀 타이밍이 안 좋았던 것 같네요? 먼저 위로 올라가 있을까요?”얼마나 센스 있는 배려인가. 하지만 강현우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흘깃 보더니 아무 말 없이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끌어당겼다.다음 순간, 윤하경은 그의 무릎 위에 앉아 있었다.단단한 허벅지 근육에 엉덩이가 아찔하게 찔려 아프기까지 했고 윤하경은 참지 못하고 작게 혀를 찼다.그 모습을 본 모연의 표정이 살짝 굳었고 방금까지 웃으며 말하던 그녀는 입술을 다물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그러자 강현우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모연 씨가 아까 하신 제안, 나름 흥미롭던데. 근데 내가 뭘 얻게 되는 건지 모르겠네.”모연은 애초에 강현우를 만나기 위해 일부러 이곳까지 나온 것이었다. 예전에 한창 주가를 올리다 찍히고 한순간에 사라졌고 지금은 다시 주목받기 위해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다.그런 의미에서 강현우는 분명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윤하경이 오기 전까지만 해도, 모연은 자신의 외모와 몸매로 승부를 볼 요량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강현우의 시선이 오롯이 윤하경에게만 가 있는 걸 보며 판단을 바꿨고 결국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강 대표님이 저한테 관심 가져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만약 저를 써주신다면... 강 대표님이 원하시는 조건이 있다면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선 뭐든 드릴 수 있어요.”말 그대로 배수진을 친 셈이었다. 강현우의 사업 스타일을 생각하면 뭐든 뽑아먹고도 버릴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강현우는 가볍게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연락할게.”거절이 아니란 말은,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었기에 모연은 피식 웃으며 잽싸게 일어나 깍듯이 인사하고 자리를 떠났다.자리가 비자, 윤하경은 무릎에서 내려가려 했지만 강현우는 그녀를 제자리에 그대로 앉히고 움직일 틈도 주지 않았다.윤하경은 주변에 다른
배지훈이 술병을 꾹 쥔 채 투덜댔다.“너희 둘 좀 사람 취급 좀 해주면 안 되냐?”강현우는 고개를 살짝 돌려 그를 쳐다보더니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사람 대우받으려면 일단 사람이긴 해야지.”그 말에 배지훈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마음 좀 달래볼까 하고 온 건데 이건 뭐 일부러 내 심기 건드리는 거지?”그러고는 짜증 섞인 한숨과 함께 술병을 들어 그대로 벌컥벌컥 들이켰다.윤하경은 그 모습이 꽤 상처받은 사람처럼 보여서 잠깐 시선을 돌렸지만 그 순간, 그녀의 고개는 강현우의 손에 의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다른 남자 쳐다보긴 왜 쳐다봐? 내가 훨씬 낫지 않아?”“그건 맞아요.”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솔직하게 대답했고 강현우는 그 말에 흡족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반면 배지훈은 이가 부서질 듯 이를 악물며 분을 삭였고 이 상황에서 자기가 뭐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그때 무대 위로 비키니 차림의 여자가 올라왔고 윤하경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저 사람, 설마...”분명 몇 년 전까지 꽤 유명했던 가수였다. 한동안 활동이 뜸하더니 어느 순간 완전히 모습을 감췄었다.‘이름이 뭐더라? 모연?’당시에 청순 콘셉트로 인기 끌던 인물이었는데 지금은 이런 클럽 무대에 서 있다니 정말 밑바닥까지 내려온 모양이었다.그런데 모연의 노래가 시작되자, 시끄럽던 공간이 서서히 조용해졌다.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맑고 청아했다. 노래가 끝나자 관중들은 박수갈채를 보냈고어떤 이들은 현금을 무대에 던지기까지 했다.모연은 그런 관객을 지나쳐 윤하경 쪽을 바라봤지만 윤하경은 그 시선을 느끼지 못한 채, 갑자기 화장실에 가고 싶어져 강현우에게 조용히 말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화려한 조명 아래 시야가 흐릿한 공간을 지나가다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쳤다.윤하경은 고개를 들어 조심스레 말했다.“죄송합니다...”말을 끝내기도 전에 낯익은 얼굴을 보고 멈칫했다.그 남자도 윤하경을 알아보고 반가운 듯 웃었다.“윤하경 씨 맞죠?”“하 대표님.”윤하경은 짧게
강현우는 윤하경의 허리를 가볍게 감싼 채 일어나면서 무심하게 말했다.“말을 좀 안 들어. 잘 좀 챙겨줘.”그 말에 임수연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뭔가 말하려고 앞으로 다가섰지만 강현우는 이미 윤하경을 데리고 방을 나서고 있었다.문 앞에서 윤하경은 용천수와 마주쳤고 그는 지난번보다 상태가 훨씬 나아 보였다.역시 평소에 몸을 많이 써서인지 회복 속도가 일반인과는 달랐다.윤하경은 그를 힐끗 보고 시선을 거둔 채 강현우를 따라 밖으로 나왔지만 문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며 서 있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방 안에서 임수연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굳이 보지 않아도 짐작은 갔다.강현우 주변에 평범한 인물은 없었고 특히 용천수는 손이 빠르면서도 잔인한 성향이 있었다.그 소리에 잠시 멍하니 서 있던 윤하경은, 허리를 짚은 강현우의 손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분명 강현우는 차갑고 냉철한 얼굴을 가진 사람이었다. 눈빛부터가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분위기를 풍겼는데 문제는, 이 사람의 손은 왜 이렇게 항상 바쁘냐는 거였다.윤하경이 뭐라 한마디 하려던 찰나, 강현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그런 소리 뭐 하러 들어. 괜히 기분만 상해. 오늘 새로 들어온 애 중에 노래 꽤 잘하는 애가 있다던데 같이 가서 들어볼래?”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결 부드러웠다.딱 봐도 위로해 주려는 의도였고 윤하경도 그 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네.”그래서 결국,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헤븐’ 2층은 개방형으로, 일반 클럽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커다란 홀 중앙엔 높은 무대가 있었고 무대 위에선 가벼운 복장의 여자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강현우의 손에 이끌려 소파에 앉은 윤하경은, 그곳에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걸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그중에서도 눈에 띈 건, 배지훈이었다.그는 모르는 여자와 바짝 붙어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강현우가 들어서자 그제야 여자를 밀어내듯 떨어졌다.윤하경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배지훈과 진해리
윤하경이 조용히 입을 열자 바닥에 웅크린 채 앉아 있던 임수연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윤하경.”그녀가 이름을 부를 때, 두 눈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감격은 아니라 분명히 분노였다.윤하경의 뒤에 서 있던 강현우는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더니 옆 소파에 아무렇지도 않게 앉았다.길게 뻗은 다리를 느긋하게 꼬고 앉은 그는 마치 주변과는 다른 세상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고 손끝으로 코를 한번 문지르며 흥미롭다는 듯 임수연을 바라봤다.그 시선을 받은 임수연은 눈을 피하지 못했고 꽤 오랜 시간 버티던 기세도 점점 사그라졌다.임수연은 본능적으로 강현우 앞에선 감히 날뛸 수 없다는 걸 알아챈 듯했다.임수연은 이를 꾹 다물었고 야위어서 광대뼈만 도드라진 얼굴이 더 날카롭게 보였다.“네가 여길 왜 와?”소리는 작았지만 말끝엔 독이 잔뜩 묻어 있었다.윤하경은 예전부터 임수연과 윤하연 모녀의 단순한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없었다.항상 그렇게 정면으로, 무식할 만큼 솔직하게 나오는 그 태도 말이다.윤하경은 무릎을 굽혀 앉았고 어둑한 공간 속에서도 눈빛은 또렷했다.“왜요, 지금은 도망도 못 치는 신세인데 제가 오면 안 되는 자리라도 되나요?”임수연은 이를 악물며 낮은 목소리로 쏘아붙였다.“잘난 척하지 마. 결국 네가 날 잡은 건... 네 힘이 아니라 남자 힘 빌린 거잖아.”“맞아요.”윤하경은 의외로 순순히 인정했다.“맞아요, 현우 씨 도움 없었으면 못 잡았을지도 몰라요. 그런데요...”그녀는 고개를 기울이며 날카롭게 웃었다.“그럼 당신이 그렇게 믿고 의지했던 그 남자는요? 왜 당신을 끝까지 지켜주지 못했을까요?”윤하경의 말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임수연의 급소를 찔렀고 임수연의 얼굴이 새빨개졌다.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는 듯 어깨가 움찔했지만 강현우가 눈길 한 번 보내자 그 기세는 단숨에 꺾였다.윤하경은 그걸 놓치지 않고 똑똑히 지켜봤다. 강현우가 며칠간 그녀에게 어떤 방식으로 ‘가르침’을 주었는지 겁먹은 임수연의 눈빛을 보면 말하지 않아
윤하경은 몸이 점점 힘없이 무너져 내리는 걸 느꼈고 마음은 아니라고 외치는데도, 이상하게 강현우 앞에만 서면 그녀의 몸은 늘 말을 듣지 않았다.윤하경의 작은 체구는 그에게 기대 그대로 녹아들 듯 풀어졌고 숨이 막힐 정도로 숨이 가빠질 무렵이 돼서야 강현우는 입술을 떼어냈다.입술이 떨어지는 순간, 차 안에 촉촉하고 은밀한 소리가 흘러나왔고 좁은 공간에서 그 소리는 유독 자극적으로 들렸다.겨우 정신을 되찾은 윤하경은 강현우를 향해 억눌린 분노가 담긴 눈빛을 던졌다.하지만 강현우는 그녀의 발그레해진 입술을 보며 여유롭게 웃었다.“질투했네. 다 티가 나. ”윤하경은 더욱 얼굴이 붉어졌다. 화가 나는 것도 모자라서 저런 말까지 들어야 한다니.그녀는 몸을 돌려 문을 열려 했지만 강현우는 그녀의 허리를 꼭 붙잡아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그 순간, 순찰 중인 경비원과 눈이 마주친 윤하경은 황급히 강현우에게 말했다.“놔요, 지금 누가 보고 있잖아요.”“진짜로?”“당연하죠.”강현우는 그녀를 붙잡고 있던 팔을 느슨하게 풀었고 윤하경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문을 열고 내리려 했다.그런데 그때였다.“임수연 보러 가기 싫은 모양이네.”“뭐라고요?”윤하경은 순간 멈춰 섰다. 방금 전까지 얼굴 가득하던 화가 단번에 사라졌고 그 자리를 반짝이는 기대감이 채웠다.“찾았어요? 진짜로?”강현우는 고개를 살짝 젖히며 천천히 대답했다.“응.”손에 쥐고 있던 담배를 끄고 그녀를 힐끔 보며 그렇게 한 마디 던지곤 턱으로 문밖을 가리켰다.“근데 뭐, 네가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지도 않더라? 내려.”그 말에 윤하경은 도로 앉더니 입술을 깨물며 강현우를 올려다봤다.“그게요. 전, 보고 싶어요.”강현우는 눈썹을 치켜올렸다.“뭐라고? 잘 안 들려.”윤하경은 눈을 질끈 감고 그의 귀에 입을 바짝 대더니 또렷이 말했다.“보고 싶다고요.”“야, 귀 터지게 말하면 어쩌자는 거야.”강현우는 그녀를 밀어내며 코웃음을 쳤지만 그 눈빛은 어딘가 부드러웠다.윤하경은 웃음을 흘렸
윤하경은 잠시 발걸음을 멈췄고 눈앞의 장면에 잠시 갈등했지만 결국 아무 일도 없었던 척 고개를 돌렸다.소지연은 당황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저 신인아라는 애, 강현우랑 무슨 사이야?”윤하경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몰라. 나도.”“그럼 너랑 강현우는...”“가자.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고.”윤하경은 짧게 말한 뒤 차로 발걸음을 옮겼다.그 모습을 보고 있던 강현우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민진혁에게 말했다.“신인아 데려다줘.”신인아는 고개를 들고 살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오빠는... 같이 안 가세요?”강현우는 그녀를 보며 차분하게 답했다.“괜찮아. 너 먼저 가. 시간 나면 갈게.”신인아는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럼 조심히 오세요.”그렇게 말하고는 민진혁에게 출발하라고 고개를 끄덕였다.윤하경이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려던 찰나, 갑자기 조수석 문이 열렸다.놀라서 발을 브레이크에 올린 윤하경이 고개를 돌리자, 강현우가 몸을 살짝 숙인 채 소지연에게 말했다.“미안. 윤하경한테 할 말이 좀 있어서.”소지연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차에서 내렸다.윤하경은 입술을 꾹 다물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현우 씨랑 저, 가는 길 다르잖아요.”명백한 거절의 뉘앙스를 담았지만 강현우는 개의치 않았다.그는 긴 다리를 자연스럽게 차 안으로 뻗고 앉더니 느긋하게 몸을 기대며 말했다.“운전해.”윤하경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저...”“아니면 내가 운전할까?”강현우가 고개를 기울이며 그녀를 바라봤다. 예전에 강현우가 몰았던 미친 듯한 속도가 생각나 윤하경은 말없이 시동을 걸었다.차가 조용히 주차장을 빠져나온 후, 강현우가 물었다.“신인아, 어떻게 알게 된 거야?”그 말투. 마치 자신이 신인아에게 일부러 접근이라도 한 것처럼 들렸고 윤하경은 속으로 혀를 찼다.“그 말, 제가 신인아한테 일부러 접근한 거라고 들리는데요?”강현우는 대꾸하지 않고 그저 창밖을 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