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의 말은 마치 날벼락처럼 윤수철을 강타했다. 그는 한동안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책상을 쾅 내려치며 벌떡 일어섰다. “네?” 임 의사는 그의 반응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덤덤하게 말했다. “윤 회장님께서 제 진단을 믿지 못하시겠다면 다른 의사를 불러서 다시 확인해 보셔도 됩니다.” 그 말에 윤수철은 마치 힘이 빠진 듯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이건 그가 생각했던 최악의 상황보다도 훨씬 더 끔찍했다. 그의 덩치 큰 몸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린 듯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윤수철은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잠깐만요.” 그는 서랍을 열어 돈을 두툼하게 꺼내, 방금 전의 봉투까지 보태어 임 의사의 손에 쥐여주었다. “임 의사님, 이 일은 철저히 비밀로 해주세요.” 임 의사는 거절하지 않았다. 그녀는 수많은 재벌가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이런 일도 처음 겪는 것이 아니었기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윤 회장님. 저는 절대 입을 열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말한 뒤, 임 의사는 방을 나갔고 이제 방 안에는 윤수철 혼자 남았다. 그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한 채,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윤하경은 그 시간, 세상 편하게 단잠을 자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윤하경이 개운한 얼굴로 식탁에 앉았을 때, 윤수철은 이미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 앉아 아침을 먹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윤수철을 단 한 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윤수철은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네 동생이 그렇게 끔찍한 일을 당했는데 네가 언니로서 전혀 걱정되지도 않아?” “걱정?” 윤하경이 고개를 끄덕이며 태연하게 말했다. “당연히 걱정되죠.” 그녀의 말투는 전혀 진지하지 않았다. 그 태도에 윤수철은 이를 악물었고 화가 난 듯 젓가락을 탁 내려
윤하경의 무심한 태도에 윤하연은 거의 뒤로 넘어질 뻔했다. 어떻게 하면 사람이 이렇게까지 사람을 열받게 할 수 있을까? 윤하경은 그녀를 보며 천천히 걸어와, 위아래로 훑어보듯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오늘은 또 하나 가르쳐 줄게. 바로 ‘인과응보’야. 네가 한 짓은 결국 네게 돌아오는 법이지. 그러니까, 다시 한번 해볼 테면 해봐.” 윤하경의 목소리는 가볍고 여유로웠지만 그 속에 깔린 냉소는 분명했다. “이번에도 교훈이 부족하다면 또 한 번 직접 느껴봐.” 그녀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그러면서 손을 뻗어 윤하연의 턱을 살짝 쥐었다. “죽고 싶으면 계속 날 건드려 봐.” 말을 마치고 윤하경은 가볍게 돌아서 계단을 내려갔다. 윤하연은 서 있는 채로 이를 꽉 깨물다 홧김에 발을 세게 굴렀다. 그때 마침 집안일을 하던 집사가 다가왔다. “하연 씨, 회장님께서 몸을 잘 추스르라고 하셨습니다.” 윤하연은 그녀를 노려보았다. “시끄러워, 당장 샤워 준비해. 회사에 다녀올 거야.” “네? 지금이요?” 집사는 그녀의 처참한 몰골을 보고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었다. “몸이 안 좋은데 회사에 가실 건가요?” 그 말에 윤하연의 표정이 확 바뀌었고 눈빛이 날카롭게 빛나며 집사를 노려보았다. “내가 어떤 상태인데?” 그녀의 차가운 시선에 가정부는 움찔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에요. 지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집사는 황급히 욕실로 뛰어갔다. 윤하연은 이를 악물고 침착하려 애썼지만 속에서는 분노가 끓어올랐다. 그녀는 손으로 부스스한 머리를 쓸어 올리며 방으로 들어가려던 순간, 아래층에서 몰래 올라오는 익숙한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임수연은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며 위층으로 올라오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본 윤하연은 눈살을 찌푸렸다. 임수연은 잠시 윤하연을 바라보다가, 흠칫 놀란 듯 물었다. “하연아, 너...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윤하연은 짜증스럽게 말했다. “
임수연의 손을 거칠게 뿌리친 윤하연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엄마, 설마 밖에서 수상한 짓이라도 하는 거 아니야?” 그 말에 임수연은 마치 꼬리를 밟힌 고양이처럼 날카롭게 반응했다. “네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 거야!”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이 모든 걸 누구를 위해 하고 있다고 생각해?” “날 위해서?” 윤하연은 비웃으며 팔짱을 꼈다. “나를 위해서라면서 내가 한빛 그룹 부대표 자리에 앉는 것도 못 도와주잖아.” “애초에 오늘 환영회도 원래는 나를 위한 자리여야 했어.” 그녀는 여전히 그 사실이 못마땅했다. “그건 네가 실력이 부족한 탓이지. 네가 확실한 성과만 냈어도, 네 아버지가 널 거절했겠어?” 모녀는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았고 곧 말다툼으로 번질 듯한 분위기였다. 그러다 윤하연이 한숨을 내쉬며 말을 끊었다. “됐어,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 “돈 없어. 나도 지금 빠듯해서 줄 게 없다고. 필요하면 아빠한테 직접 가서 받아.” 그녀는 그렇게 말한 뒤, 방으로 들어가며 문을 쾅 닫아버렸다. 임수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럼 네가 가진 주얼리라도 나한테 줘. 급한 불부터 끄게.” “뭐?” 윤하연은 어이없다는 듯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엄마, 설마 내 주얼리를 팔 생각이야?” “사회에서 사람을 만나고 다니려면 격식은 차려야 하잖니.” 임수연은 필사적으로 변명을 늘어놓았다. “이건 정말 중요한 일이야, 네가 날 좀 도와줘야 해. 안 그러면 우리 둘 다 한빛 그룹에서 쫓겨날 수도 있어.” 그녀는 윤하연의 손을 꽉 잡고 애원하듯 바라보았다. 오늘이 마지막 기한이었다. 100억을 채우지 못하면 곧 윤수철에게 그 수치스러운 영상과 사진이 넘어가게 된다. 이미 그녀는 지금까지 모은 재산을 거의 다 처분했지만 여전히 부족했다. 마지막으로 몇십억 정도가 더 필요했다. 윤하연의 눈빛이 흔들렸다. “
기현수는 윤하경의 표정을 보며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왠지 모르게, 지금 그녀의 이 묘한 미소가 강현우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어떤 일이든 쉽게 넘어갈 것 같지 않은, 그런 표정이었다.하지만 감히 입 밖에 내지는 못하고 그냥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시며 애써 웃었다.“윤 부사장님 말씀대로죠.”그가 아무리 계약서에 이름을 올렸어도, 사실상 그는 그냥 얼굴마담에 불과했다.이 자리는 윤하경을 위한 것이었고 그는 단순히 그녀를 돕는 역할일 뿐이었다.조용히 커피를 마시며 기다리던 기현수는, 윤하경이 손목시계를 흘끗 확인하는 순간 긴장했다.윤하경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시간 됐네요. 이제 가죠.”그렇게 두 사람은 한빛 그룹으로 향했다.한빛 그룹에 도착하자, 윤하경은 건물 곳곳이 새로 단장된 듯한 것을 눈치챘다.깔끔하게 정리된 로비며 반짝거리는 대리석 바닥까지, 아무리 봐도, 오늘을 위해 꽤 공을 들였다는 걸 알 수 있었다.‘아버지가 새로 오는 부대표를 위해 이 정도까지 준비하다니.’윤하경은 속으로 비웃으며 천천히 걸어갔다. 하지만 진짜 재미있는 건 이제부터였다.과연 윤수철이 자신을 보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 그녀는 기대가 됐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바로 눈앞에 윤수철이 서 있었고 그는 손을 내밀며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어서 오...”하지만 그의 표정은 단 한 순간에 굳어버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나온 사람이 윤하경이라는 걸 확인한 순간, 그의 얼굴이 마치 멈춘 듯 경직되었다.“네가 여길 왜 왔어?”목소리에는 분노가 스며들어 있었지만 윤하경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어깨를 으쓱였다.“왜긴요? 출근했죠.”그녀는 천연덕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오늘부터 한빛 그룹에서 일하게 됐거든요.”윤수철의 눈빛이 차가워졌다.“내가 직접 너한테 회사 오라고 했을 때는 거절하더니 지금 와서 무슨 속셈이야?”그는 주변에 있던 임원들이 듣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쏘아붙였지만 윤하경의 얼굴엔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윤수철은 표정을 굳힌 채 먼저 앞장서 걸었다. 하지만 돌아서는 순간, 그의 얼굴은 어둡게 가라앉았다. 자신의 딸이 자신의 회사에 입사하는데 정작 본인은 마지막까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뼈아프게 다가왔다. 더군다나, 윤하경이 외부의 힘을 이용해 회사에 들어왔다면 앞으로 그 영향력이 어디까지 미칠지 장담할 수 없었다. 순간 그녀에게 주도권을 빼앗길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한빛 그룹에서 준비한 부대표 취임식은 상당히 성대했다. 마치 작은 연회를 연 듯, 최상층 사무실이 파티장으로 꾸며져 있었다. 중앙에는 와인 바와 핑거푸드가 놓여 있었고 윤수철이 이 새로운 부대표를 환영하기 위해 꽤 공을 들였다는 것이 한눈에 보였다. 기현수가 단상에 올라 짤막한 인사와 함께 윤하경을 소개하고 마이크를 넘겼다. 윤하경은 자연스럽게 무대 위로 걸어나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녀의 눈빛은 여유로웠고 입꼬리는 가볍게 올라갔다. “한빛 그룹에서 일하게 되어 기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다들 오늘 와인 많이 즐기시고요.” 그렇게 짧고 간결한 인사 후, 윤하경은 무대를 내려왔다. 그리고 내려오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윤하연은 취임식장에 들어서자마자, 사람들 사이에서 윤하경을 발견하면서 순간적으로 눈이 휘둥그레졌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기도 전에, 그녀는 곧 옆에 서 있는 기현수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그 순간, 윤하연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그녀는 시선을 살짝 돌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 뒤, 자연스럽게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다가갔다. “아빠.” 그러면서 은근히 기현수에게 쳐다보며 웃었다. 하지만 윤수철은 예상치 못한 방문에 곧바로 미간을 찌푸렸다. “몸도 안 좋은데 왜 나왔어?” “오늘 부대표님 취임식이라면서요? 그래도 우리 회사 부대표님인데 제가 빠지면 좀 그렇잖아요.”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기현수에게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윤하연이라고 합니다. 신임
“아빠,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저한테 설명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윤하연은 윤수철이 자신을 편애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오늘만큼은 그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설명? 무슨 설명을 원해?” 하지만 화가 너무 난 나머지, 그녀는 윤수철의 얼굴이 이미 굳어 있다는 사실도 알아채지 못했다. 평소 아빠 앞에서 연출하던 순종적인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녀는 책상 위에 손을 짚고 계속 따져 물었다. “왜 윤하경이 회사의 부대표가 된 거죠? 그리고 왜 저한테 한마디도 안 해주셨어요? 저도 회사에서 일한 지 오래됐잖아요. 아무리 실적이 없다 해도, 나름 고생한 건 인정해 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언니가 저보다 유능한 건 인정하지만 그래도 미리 한마디 정도는 해주셨어야죠!” 윤수철은 살짝 눈을 가늘게 뜨며 윤하연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특히, 어젯밤 의사가 한 말이 떠오르자 더욱 불편해졌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그는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나는 어제 있었던 일 때문에 네가 충격을 받았을까 봐 걱정했는데. 보아하니 괜한 걱정을 한 모양이군.” 그는 원래 윤하연이 겪은 일을 고려해 당분간 회사에서 쉬게 할까도 생각했다. 충격이 컸을 테니 기분 전환도 할 겸 여행이라도 보내줄까 했는데 이렇게 기운 넘치게 회사까지 찾아와 따지는 걸 보니 그의 배려가 얼마나 쓸데없는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아빠의 말에 윤하연은 그제야 자신이 너무 감정적으로 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급히 표정을 누그러뜨리고 마치 기운이 빠진 사람처럼 팔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저... 아무리 힘들어도, 일은 소홀히 하지 않을 거예요.” “그래?” “네.” 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띠며 덧붙였다. “아빠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제야 윤수철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사실 나도 윤하경이 회사에 올 줄 몰랐어.” “네?” 윤하연은 멍해졌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이 아빠의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윤수철은 미간을 찌푸리고 잠시 침묵한 후 윤하연을 향해 말했다. “당분간 집에서 푹 쉬어라.” “왜요?” 윤하연은 상처받은 듯한 얼굴로 윤수철을 바라보았다. “설마 언니가 회사에 왔다고 해서 아빠는 저를 보고 싶지 않으신 거예요?” “네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내가 굳이 말해야겠어? 집에서 몸이나 잘 추슬러라. 하루 종일 회사에 와서 창피한 짓 하지 말고.” 이렇게까지 강한 어조로 말한 건, 아마도 지금까지 윤수철이 윤하연에게 했던 말 중 가장 날카로운 것이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윤하연의 눈에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아빠, 저... 저 정말 어제 아무 일도 없었어요.” “아직도 나한테 거짓말할 거야?” “이미 임 의사한테 다 들었어. 네가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소용없어.” 윤수철은 거짓말을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윤하연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말해. 그놈들 대체 누구야?” 윤하연의 표정이 굳어졌다. ‘설마 임 의사가 전부 다 말했을 줄이야... 분명 입단속을 시켜놨었는데.’ 윤하연은 잠시 눈을 내리깔고 고민하더니 결국 모든 책임을 윤하경에게 떠넘기기로 마음먹었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는 말했다. “저... 제가 말할 수 없는 건, 윤씨 가문에 누가 될까 봐서예요. 게다가 저 사람들, 저도 모르는 사람들이었어요. 그저 언니가 그곳에 가보라고 해서 갔을 뿐인데 누가 알았겠어요...” 마지막 말을 끝으로, 윤하연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마치 세상에서 가장 큰 억울함을 당한 사람처럼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은 반은 진실, 반은 거짓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윤수철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진짜로 하경이가 그렇게 시켰다는 거야?” “만약 아빠가 못 믿겠다면 언니랑 직접 대질신문을 하셔도 좋아요. 그저... 언니가 저를 그렇게까지 미워할 줄은 몰랐어요.” 윤하연은 흐느끼며 촉촉해진 눈으로 윤수철을 바라보았고 눈에는 온통
윤하연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백정연은 쉴 새 없이 불평을 쏟아냈다. “걔가 있는 부서는 우리 회사에서 퇴사율 1위야. 부서장이라면서 팀원들 챙기기는커녕... 맨날 네 아빠만 믿고 직원들 실적이나 가로채고 있지. 사람을 아무리 뽑아도 모자랄 지경이라니까. 진짜 지긋지긋해.” 보통 백정연은 회사에서 웬만한 일에는 신경도 안 쓰는 성격이었지만 윤하경 앞에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비웃듯이 웃으며 말했다. “근데 윤 대표 덕분에 다들 싫어하면서도 아무 말 못 하고 있었거든. 이제 네가 왔으니까, 걔도 오래 못 버틸걸?” 윤하경은 미소를 지으며 한쪽 눈썹을 살짝 올렸다. “저한테 그렇게 자신 있으세요? 혹시 제가 와서 대충 자리만 차지하고 놀면 어쩌시려고요?” “쯧.” 백정연이 피식 웃었다. “그럴 거였으면 벌써 나한테 이렇게 많은 자료를 요청하지도 않았겠지.” 그녀는 몸을 살짝 뒤로 기울이며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그래서 새로 부임한 부대표님께서는 첫 번째 불길을 어디에 지피실 건가요?” 윤하경은 의미심장하게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녀는 이곳에 오기 전부터 모든 계획을 세워두었다. 그녀가 온 이유는 단순히 ‘부대표’라는 직함을 가지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녀의 목표는 윤씨 가문을 완전히 손에 넣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윤수철이 계속 저렇게 방만하게 운영하다가는 회사 자체가 망가질 것이 뻔했다. “한 시간 후, 회사의 모든 중고위급 직원들에게 회의 공지를 보내 주세요.” 백정연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혹시 일부러 회의에 안 오는 사람들은 어쩌려고?”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런 거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일부러 제 체면을 깎아내리려는 사람이 있는 거 다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안 오면 간단하죠. 즉시 해고 절차를 밟으면 됩니다.” 그녀의 입가에 얕은 미소가 떠올랐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누구든 예외
윤하경은 잠시 발걸음을 멈췄고 눈앞의 장면에 잠시 갈등했지만 결국 아무 일도 없었던 척 고개를 돌렸다.소지연은 당황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저 신인아라는 애, 강현우랑 무슨 사이야?”윤하경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몰라. 나도.”“그럼 너랑 강현우는...”“가자.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고.”윤하경은 짧게 말한 뒤 차로 발걸음을 옮겼다.그 모습을 보고 있던 강현우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민진혁에게 말했다.“신인아 데려다줘.”신인아는 고개를 들고 살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오빠는... 같이 안 가세요?”강현우는 그녀를 보며 차분하게 답했다.“괜찮아. 너 먼저 가. 시간 나면 갈게.”신인아는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럼 조심히 오세요.”그렇게 말하고는 민진혁에게 출발하라고 고개를 끄덕였다.윤하경이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려던 찰나, 갑자기 조수석 문이 열렸다.놀라서 발을 브레이크에 올린 윤하경이 고개를 돌리자, 강현우가 몸을 살짝 숙인 채 소지연에게 말했다.“미안. 윤하경한테 할 말이 좀 있어서.”소지연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차에서 내렸다.윤하경은 입술을 꾹 다물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현우 씨랑 저, 가는 길 다르잖아요.”명백한 거절의 뉘앙스를 담았지만 강현우는 개의치 않았다.그는 긴 다리를 자연스럽게 차 안으로 뻗고 앉더니 느긋하게 몸을 기대며 말했다.“운전해.”윤하경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저...”“아니면 내가 운전할까?”강현우가 고개를 기울이며 그녀를 바라봤다. 예전에 강현우가 몰았던 미친 듯한 속도가 생각나 윤하경은 말없이 시동을 걸었다.차가 조용히 주차장을 빠져나온 후, 강현우가 물었다.“신인아, 어떻게 알게 된 거야?”그 말투. 마치 자신이 신인아에게 일부러 접근이라도 한 것처럼 들렸고 윤하경은 속으로 혀를 찼다.“그 말, 제가 신인아한테 일부러 접근한 거라고 들리는데요?”강현우는 대꾸하지 않고 그저 창밖을 보
소녀는 말끝마다 볼이 희미하게 붉어졌다. 부끄러운 건지, 숨결 때문인지 얼굴이 희미하게 물들어 있었다.그제야 윤하경은 복잡한 생각을 털어내고 조용히 그녀를 엘리베이터 안으로 밀어 넣었고 소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정말 고맙습니다.”“별말씀을요.” 윤하경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나서도, 윤하경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멍하니 서 있었다.‘대체 저 애는 누구지? 송시안이 말했던, 강현우에게 중요한 여자라는 게... 설마?’“야, 너 왜 그래?”소지연이 옆에서 그녀 어깨를 툭 치며 말했고 윤하경은 고개를 저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아니야, 가자.”그렇게 다시 발걸음을 옮겼지만 윤하경의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하기만 했다.그런데 보석 매장 안에서 윤하경은 또다시 휠체어를 탄 소녀를 마주쳤다.진열대 앞에 앉은 그녀는 턱을 괴고 귀걸이들을 보고 있었고 표정은 어딘가 망설이고 있는 듯했다.윤하경은 모른 척하고 돌아서려 했지만 이번엔 신인아가 먼저 그녀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어머, 그 언니다! 또 보네요?”“그러게요.”윤하경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쇼핑하러 오신 거예요?”소녀는 여전히 밝은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그냥 좀 둘러보는 중이에요.” 윤하경이 대답하고는 소지연의 팔을 끌어 매장을 나가려 했지만 소녀는 다시 윤하경을 불러세웠다.“잠깐만요! 혹시 시간 되세요? 제가 얼마 전에 귀국해서 친구도 없고... 혹시 이 두 개 중에 어떤 커프스링크가 더 나은지 좀 봐주실 수 있을까요? 도저히 못 고르겠어요.”윤하경은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걸음을 멈췄다.하지만 그녀의 목에 걸린 곤륜 부적이 다시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윤하경은 결국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그때 소지연이 윤하경의 귀에 속삭였다.“너 원래 이렇게 남 일에 잘 끼어들었나?”윤하경은 못 들은 척하며 말했다.“어떤 두 개요?”신인아는 바로 점원에게 자신이 고른 두 가지를 꺼내달라고 했다.“이거랑 이거요.”윤하경은 커프스를 들여다
윤하경은 다시 한번 오건우가 보냈던 사진을 꺼내 봤다.흐릿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윤하경은 자조적으로 입꼬리를 살짝 비틀었다.‘내가 왜 이렇게 지질하게 굴지...’강현우와 자신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명분 없는 사이이고 떳떳할 것도, 묻고 따질 자격도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자신이 이렇게 사진 하나에 마음을 흔들리고 있다는 게 웃겼다.윤하경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휴대폰 화면을 꺼버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로 올라갔다.그런데 사무실에 도착한 순간, 그녀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배경빈 씨 오늘 안 나왔어?”윤하경은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우슬기를 바라봤고 우슬기는 책상에 기대앉아 어깨를 으쓱였다.“안 왔어요. 앞으로도 안 올 거 같은데요? 아까 어떤 남자가 와서 자기가 경빈 씨네 집 가사 도우미라며 대신 사직서 냈다더라고요.”“대표님, 경빈 씨 진짜 어디 대단한 집 도련님 아니죠?”윤하경은 우슬기의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잠시 바라보다,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신경 꺼.”그렇게 말은 했지만 책상에 앉아 커피잔을 집어 드는 순간, 윤하경 머릿속엔 어제 강현우가 툭 던졌던 질문이 스쳐 지나갔다.‘배경빈, 왜 자꾸 네 주변에 맴돌지?’강현우와 이 일이 무관할 리 없었다.하지만 한편으론 잘된 일이기도 했다. 배경빈이 나간 덕에 그녀의 사무실이 다시 조용해졌으니까 말이다.윤하경은 서류를 정리하며 정신을 다잡았고 겨우 집중하기 시작했을 무렵 오랜만에 소지연에게서 카톡이 왔다.[하경아, 오늘 시간 돼? 잠깐 얼굴 좀 보자.]지난번,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며 연락을 끊었던 소지연이었다.회사는 부하직원들에게 잠시 맡기고 있었다고 했지만 그 뒤로 소식이 없었기에 더는 그녀를 건드리지 않았다.이제야 겨우 마음을 추스른 듯했다. 윤하경은 반가운 마음에 흔쾌히 약속을 잡았고 근처 대형 쇼핑몰에서 만나기로 했다.카페에 도착했을 땐, 소지연이 먼저 와 있었다. 얼굴에 살짝 피곤기가 보였지만 화장은 또렷했고 입술에는 진한 레드 컬러가 눈에 띄
윤하경은 박소희와 다를 게 없이 놀랐다. 그녀 역시, 강현우가 다시 돌아올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강현우는 아무렇지 않게 윤하경의 허리를 감싸안은 채, 비죽 웃으며 박소희를 바라봤고 겉으론 웃고 있지만 눈빛만은 싸늘했다. 박소희는 그 눈빛에 순간 굳어버렸지만 이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하경 씨 말에 너무 화가 나서 잠깐 이성을 잃었어. 현우야, 그런 뜻은 아니었어. 나 진짜...”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러고는, 낮고 느린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다시 묻을게. 도대체 누가 누구 약혼자를 유혹했다는 거지?”박소희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윤하경 쪽을 힐끔 보더니 결국 강현우의 싸늘한 눈빛에 기가 죽은 듯 고개를 숙였다.“우리 곧 약혼하잖아. 약혼자로서 적어도 사람들 앞에서는 나한테 체면은 세워줘야 하는 거 아니야...?”강현우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그렇지? 근데 말이야...”“내가 언제 약혼했는데?”그 한마디는 전혀 준비되지 않은 폭탄처럼 박소희에게 직격했고 윤하경도 순간 숨을 멈췄다.그 말은, 눈앞에서 공개적으로 뺨이라도 맞은 듯한 충격을 안겨줬다.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이런 수모를 겪어본 적 없는 박소희는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누구도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없었는데 강현우만은 예외였다. 그리고 더 괴로운 건, 그런 그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현우야... 그건 네 어머님이랑 우리 아빠가...”“그래서?” 강현우는 가볍게 웃었다. “그럼 그 사람들이랑 따져. 나랑은 무슨 상관이야?”그 말에 박소희의 얼굴은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버렸고 윤하경은 강현우 품 안에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무슨 뜻이지? 그럼 진짜 약혼한 건 아니었던 거야? 그 곤륜 부적은?’윤하경의 시선이 무심코 박소희 쪽으로 옮겨졌고 그제야 깨달았다.박소희의 목에는 어젯밤 그 값비싼 곤륜 부적이 없었다.그녀의 성격상, 만약 강현우가 그걸 준 거라면 분명 자랑하듯 걸고 나왔을 텐데
윤하경은 아직 마음이 복잡해, 강현우가 탄 차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그런 그녀를 누군가가 부르자, 화들짝 놀라 돌아봤다.박소희를 보자 윤하경은 잠깐 당황한 표정이 스쳤지만 곧 웃으며 말했다.“소희 씨.”박소희는 턱을 살짝 들고 도도하게 물었다.“하경 씨, 시간 좀 있으세요? 아침이라도 대접하고 싶어서요.”“없어요.”윤하경은 단호하게 거절했고 박소희와는 굳이 엮이고 싶지 않았다.그런데 박소희는 물러서지 않았다.윤하경이 거절하자, 아예 그녀의 손목을 잡고 숲길 안쪽의 레스토랑으로 끌고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 박소희는 두 팔을 끼고 앉아 윤하경을 노골적으로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윤하경은 시계를 슬쩍 확인하곤 무표정하게 말했다.“하실 말씀 있으면 빨리하세요. 회사에 회의 있어서요.”박소희는 윤하경의 여유로운 태도에 불쾌감이 치밀었다. 분명히 자신은 정식 약혼자임에도, 눈앞의 여자는 전혀 죄책감도 없어 보였다.“참 뻔뻔하시네요.”박소희가 냉소를 머금고 말했다.“하경 씨는 부끄럽지도 않아요? 정식 약혼자가 있는 남자랑 엮여 있으면서.”윤하경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제가 왜 부끄러워해야 하죠?”늘 우아하던 박소희는 순간 이성을 잃었다. “윤하경! 너 윤씨 가문 딸 아니야? 경성에서 그 정도면 그럭저럭 이름 있는 가문인데 그런 여자가 감히 남의 약혼자랑 그렇게 엮여? 이런 자리에서 들키고도 창피한 줄도 몰라요? 양심 없어?”.아침 시간이라 사람이 많진 않았지만 커져가는 박소희의 목소리 때문에 레스토랑 안에 있던 직원들이 하나둘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고 다들 귀를 쫑긋 세우고 그쪽을 힐끔거렸다.윤하경은 그녀의 격앙된 모습을 지켜보다,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차분한 그녀의 태도는 분노에 휩싸인 박소희와 극명하게 대비됐다.원래부터 윤하경은, 누가 위에서 내려다보듯 가르치려 들면 질색이었다.더군다나 그녀의 오늘 하루는 애초에 좋지 않았고 지금 이 상황은 한 번쯤 터뜨릴 좋은 기회였다.“소희 씨.”윤하경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
윤하경은 조용히 입술을 다물었다가 다정하게 말했다.“현우 씨 바쁘시면 저 혼자 아침 먹을게요.”강현우는 그 말에 휴대폰을 거두며 그녀를 돌아봤다. 또렷하고 깊은 이목구비는 한 번 마주치면 쉽게 눈을 뗄 수 없는 인상이었다.“같이 먹기로 했잖아. 당연히 같이 먹어야지.”그는 단호하게 말한 뒤, 더 이상 휴대폰을 건드리지 않았다.윤하경은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고 사실 그녀는 그렇게까지 바라진 않았다.차는 숲길 끝에 도착했고 미리 연락이 되어 있었는지 둘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식탁 위에 아침이 한가득 차려져 있었고 여러 가지 다과와 차가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웠다.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강현우가 이렇게 신경 써서 아침 식사를 챙겨주는 상황이라면윤하경은 기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상하게도 입맛이 없었다.그래도 강현우가 옆에서 지켜보니 억지로라도 몇 입 먹었고 따뜻한 차가 목으로 넘어가자, 몸도 점점 따뜻해졌다.그런 둘의 모습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 지켜보고 있었다.안현주가 급히 옆방으로 뛰어들며 외쳤다.“소희야! 강현우한테 아침밥을 차릴 그럴 때 아니야.”조심스럽게 아침 식사를 도시락에 담고 있던 박소희의 손이 멈췄고 고개를 돌려 안현주를 흘겨봤다.“잔소리 좀 그만해. 너야말로 괜한 걱정은 하지 마. 회사 갈 때 내가 직접 들고 올라가면 되니까, 너는 밑에서 기다려.”안현주가 혀를 찼다.“너는 정식 약혼자랍시고 정성 다해서 도시락 싸고 있는데 지금 강현우랑 윤하경이랑 둘이서 다정하게 아침 먹고 있다니까?”안현주는 말하면서도 억울한 듯 코웃음을 쳤다.“진짜 강현우란 남자, 너 같은 사람 좋은 여자는 안 보이고 그 윤하경 같은 요상한 여자만 눈에 들어오나 봐.”박소희의 손이 살짝 떨렸다.“뭐라고?”안현주가 인상을 찌푸리며 되풀이했다.“네가 그렇게 마음 써주는 약혼자는 지금 윤하경이랑 사이좋게 조식 데이트 중이라고. 근데 너는 그 사람이 배고플까 봐 도시락까지 싸고 있고. 뭐, 아침 입맛 돋워줄 애피타이저는 이미 먹었을지
그 말을 끝으로 윤하경은 휴대폰 화면을 꺼버리고 조용히 욕실로 들어갔다.양치질을 하며 거울 속 자신의 멍한 얼굴을 바라보던 그녀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입안의 거품을 헹구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조용히 그녀를 안았고 보지 않아도 강현우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막 자라난 까칠한 수염이 그녀의 피부를 간질였고 윤하경은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다.그러나 강현우는 세면대 양옆에 팔을 짚어 그녀를 가둬버렸고 한 발짝도 도망갈 수 없는 거리였다.“왜, 어젯밤 내가 안 들어와서 화났어?”강현우는 손끝으로 윤하경의 콧등을 살짝 긁으며 말했다.“봐라, 또 이렇게 새침하게 굴고.”윤하경은 잠시 멈칫하다가 가볍게 웃어 보였다.“아니요, 안 화났어요.”강현우는 한쪽 눈썹을 살짝 올리며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윤하경은 그를 끌어안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현우 씨, 저 여기서 꽤 오래 지낸 것 같아요. 이제는 슬슬 나가서 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괜히 사진이라도 찍혀서 기사 나면 현우 씨 이미지에 안 좋잖아요.”강현우는 윤하경을 내려다보며 코웃음을 쳤다.“도망치고 싶은 거야?”그의 눈동자에 잠깐 스치는 날카로움이 그녀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고 윤하경은 그를 진정시키듯 그의 셔츠 단추를 매만지며 말랬다.“아니요, 진심으로 현우 씨 걱정해서 하는 말이에요. 강한 그룹 같은 대기업이면 주가에도 영향 줄 수 있는 문제니까요.”이 비슷한 말은 예전에도 한 적이 있었지만 오늘따라 그 말투에는 미묘한 날이 서 있었다.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내가 그런 걸 신경 쓰는 놈처럼 보여?”윤하경은 잠깐 손을 멈췄다가, 이내 한껏 순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현우 씨는 안 신경 쓰시더라도... 전 해야죠.”그 말에 강현우는 그녀의 턱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나지막이 묻는다.“진심이야?”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네.”강현우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
윤하경은 대답하지 않았다.그 모습을 본 강현우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왜, 마음에 안 들어?”윤하경은 눈썹을 살짝 모았다가, 속으로 맴도는 의문을 억누른 채 다시 환한 미소를 띠었다.“마음에 들어요.”강현우는 그녀의 말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또렷한 콧대 아래 옅은 미소가 스쳤고 그는 곧 민진혁에게 지시했다.“가자. 집으로.”그날 강현우는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침실로 들어간 그는 윤하경의 입술을 조심스레 물었다.윤하경은 살짝 그를 밀치고 그의 의아한 눈빛을 받으며 변명을 꺼냈다.“저기... 오늘 좀 더워서요. 샤워 좀 하고 올게요.”하지만 강현우는 그녀를 벽에 가두며 낮게 속삭였다.“난 안 덥던데.”그 말을 마치기 무섭게 다시 입을 맞췄고 윤하경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사실 강현우는 이런 쪽에 능숙했다. 지쳐도 어쩌면 즐길 수도 있는 관계, 적어도 몸만 놓고 보면 말이다.하지만 오늘은 왠지 모르게 거부감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할 새도 없이, 강현우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그녀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고 있었다.몸이 미세하게 떨릴 무렵, 갑자기 그의 휴대폰이 울렸고 진동 소리는 조용한 방 안에 유난히 크게 울렸다.윤하경은 조심스레 말했다.“전화 왔어요.”강현우는 이를 악물며 짜증 섞인 표정을 지었지만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했다.그런데 전화를 받지는 않고 오히려 윤하경의 입술에 짧은 키스를 남겼다.“얌전히 집에서 기다려. 금방 올게.”말투는 부드러웠고 어딘가 아이 달래듯 느껴졌다. 그 말에서 ‘집’이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 윤하경은 잠깐 멍해졌다.‘집?’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집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마음이 닿는 곳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임수연과 윤하연이 집에 들어온 이후 그곳은 더 이상 집이 아니었다.그런데 강현우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을 때, 이상하게도 가슴 한구석이 저릿했다.강현우가 나간 후, 윤하경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역시 강현우 같은
오건우는 그 남자가 다가오는 걸 보더니 더욱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하 대표님, 막 서울 오셨다고 들었는데요. 제가 소개 좀 드릴게요. 이쪽은 강현우 대표님이에요.”하 대표라는 남자는 생각보다 젠틀한 인상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강현우를 향해 손을 내밀며 정중히 웃었다.“반갑습니다. 평소 익히 들었습니다. 저는 하석호입니다. ”강현우는 무표정한 눈으로 하석호를 한번 쓱 훑어보고는, 그 손을 외면한 채 고개만 돌렸다.오건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이번엔 윤하경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리고 이쪽은 윤하경 씨입니다.”평소엔 권력자 곁에 있는 여자엔 별 관심 없는 하석호였지만 윤하경의 얼굴을 보자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윤하경 씨?”윤하경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우처럼 무시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니고 오건우와도 협업 중이었기에 말이다.“하 대표님, 반갑습니다.”말을 막 끝내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톡 건드렸다.“윤하경 씨, 혹시 예전에 모성에 가본 적 있으신가요?”모성은 국경 근처 외딴 도시였다.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가본 적 없어요.”하석호는 뭔가 더 묻고 싶은 듯했지만 강현우가 고개를 돌리며 그를 노려보듯 쳐다봤다.“하 대표님, 질문이 좀 많은 거 아닌가요?”하석호는 순간 당황한 듯했지만 금세 웃으며 넘겼다.“그러네요, 제가 좀 지나쳤나 봅니다.”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드디어 윤하경의 귀가 조용해졌지만 여전히 하 대표의 시선이 자기에게 꽂혀 있는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이윽고 본격적으로 경매가 시작됐고 초반엔 관심 가는 물건이 딱히 없었다. 그러다 한 쌍의 사파이어 귀걸이가 등장하자 강현우가 고개를 돌려 윤하경을 바라봤다.“어때, 마음에 들어?”강현우는 윤하경 같은 예쁜 여자는 당연히 장신구를 좋아할 거라 생각했지만 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그냥 그래요.”강현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지만 더 묻진 않았다.그때 사회자의 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