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빈은 윤하경이 기침하는 소리에 곧장 몸을 일으켜 따뜻한 물 한 잔을 따라왔다. 그녀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부축하며 컵을 내밀었다. “조금이라도 마셔요.” 윤하경은 그가 내민 컵을 받아 천천히 한 모금 삼켰다. 뜨거운 기운이 목을 타고 내려가자 그제야 조금 숨이 트이는 듯했다.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른 후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배경빈은 피식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제야 고맙다는 말을 하네요?”그의 말투는 가벼웠지만 묘하게 신경 쓰이는 느낌이 들었다. 윤하경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러다 이내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럼 뭐라고 해야 하죠?”배경빈은 흥미롭다는 듯 눈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다가 바로 옆 의자에 털썩 앉았다. 팔짱을 낀 채 다리를 꼬고 앉는 모습이 제법 추궁하는 분위기였다. “그보다 왜 내 연락 씹었어요?” 그의 목소리는 가벼웠지만 묘하게 압박감이 느껴졌다. 윤하경은 순간 말문이 막혀 시선을 피했다. “그동안 좀 바빴어요.” 그 말 자체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바빴던 것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강현우. 그는 생각보다 속이 좁았다. 혹여 자신이 배경빈과 계속 연락을 주고받는다면 강현우가 무슨 일을 벌일지 몰랐다. 윤하경은 아직까지도 강현우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배경빈은 그녀의 대답이 못마땅한 듯 코웃음을 쳤다. “흥! 거짓말이잖아요.” 단정 짓듯 내뱉는 말투에 윤하경은 순간 당황해 입을 꾹 다물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던 순간 병실 문이 스르륵 열렸다. 들어온 사람은 배지훈.어둡게 드리운 눈빛이 무거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는 먼저 배경빈을 훑어보더니 이내 병상에 누워 있는 윤하경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미묘하게 표정이 굳었다. 마치 예상하지 못한 광경을 마주한 듯했다. 배경빈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네가 여긴 왜 와?”
그 시각, 강현우는 재무보고서를 보고 있었다. 책상 위에 놓인 핸드폰이 갑자기 진동을 울리며 그의 시선을 끌었다. 그는 화면을 확인하거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여자친구?’배지훈이 이런 식으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윤하경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손가락으로 화면을 쓸어내리며 메시지를 읽기 시작했다. 무언가 불편한 기운이 감도는 듯 그의 표정은 점마 굳어갔다. 그때 민진혁이 문을 열고 들어와 강현우를 한 번 흘낏 쳐다보았다. “대표님, 헤븐 쪽에서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확인해 보시겠습니까?”강현우는 잠시 말없이 화면을 응시한 뒤 천천히 고개를 들며 물었다. “무슨 일인데?” 옆에 있던 우지원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누군가 손을 댄 것 같아요. 경찰이 이미 출동해서 조사 중입니다.” 강현우는 잠시 아무 말 없이 거친 손끝으로 입술을 문질렀다. 시간이 지나고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알겠다. 나가자.” 민진혁은 당연히 강현우가 헤븐 쪽으로 향할 거라 생각하고 바로 차를 몰고 차고로 내려갔다. 하지만 차가 차고를 빠져나가자 뒤좌석에서 강현우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세레니티 병원으로 가.” 민진혁은 잠시 당황한 표정으로 미러를 보며 말했다. “병원요?” “혹시 몸이 안 좋으신가요?” 그는 뒷미러를 통해 강현우를 살짝 쳐다보았고 그 순간 강현우의 날카롭고 차가운 눈빛이 그대로 그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민진혁은 곧바로 그의 의도를 눈치채고 급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한 손으로 운전대를 쥐고 차를 급히 몰았다. 한편, 세레니티 병원에서. 윤하경은 흐릿하게 잠에 빠져 있었다. 열은 내려갔지만 여전히 머리가 무겁고 어지러웠다. 그녀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주미나는 칼을 들고 자신을 쫓아왔다. 구지호를 대신해 복수하겠다는 말을 남기며 그녀는 끊임없이 자신을 추격
윤하경은 문득 자신이 한 질문이 어리섞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지훈이 이미 왔으니 자신이 병원에 있다는 사실은 분명 강현우에게 전달됐을 것이다. 강현우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네 표정 보니까 내가 오지 않기를 바란 거냐?” 윤하경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정말?” 강현우는 의심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가 방금 그토록 연약한 모습을 보였던 것이 떠오르자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병실은 잠시 정적에 휩싸였다. “꾸르륵...” 윤하경은 갑자기 자신의 배에서 나는 소리에 멈치했다. 그녀는 순식간에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점심 이후로 거의 아무것도 먹지 않았고 지금은 한밤중이니 배고픈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강현우 앞에서 이렇게 배가 고픈 소리를 내다니 마음 한 구석이 꺼림척했다. 그때 강현우는 미세하게 눈썹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어두운 병실에는 윤하경만 남아 있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침대 옆에 있는 불을 켜고 핸드폰을 꺼내 배달 음식을 주문하려 했다. 하지만 오늘은 만사가 꼬였다. 핸드폰의 배터리가 다 닳아 있었고 더 불운하게도 충전기도 없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침대에 몸을 뉘었다. 눈을 감고 천장을 바라보았지만 배고픔 때문에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배고픔을 잊으려 애쓰던 찰나 병실 문이 다시 열렸다. 본능적으로 이불 속으로 몸을 움츠린 그녀는 그제서야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이 강현우라는 것을 확인했다. 강현우는 우아한 기운을 뿜어내며 병실에 들어섰고 그의 존재는 그 좁은 병실을 더 좁게 만들었다. 윤하경은 그가 다시 돌아온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그때 민진혁이 여러 개의 도시락을 들고 들어왔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뜨며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강현우를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니까 아까 현우 씨가 말없이 나갔던 건 나한테 먹을 걸 사다주려고 나
윤하경은 손이 살짝 떨었다. 숟가락이 죽 그릇에 빠질 뻔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강현우를 바라보았다. 겉으로는 무표정했지만 눈빛 깊은 곳에 서린 냉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등을 타고 서늘한 기운이 내려앉는 걸 느꼈다. 이전의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와 맞설 때마다 결코 좋은 일이 없었으니까. 윤하경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황급히 말했다. “무슨 남자친구요? 그건 그냥 사람들이 오해한 거예요.” “오해?”강현우는 느긋하게 젓가락을 들어 연근 한 조각을 집어 그녀의 그릇에 올려놓았다. 반찬은 분명 먹음직스러웠다. 하지만 윤하경은 쉽게 손을 뻗지 못했다. 그의 말투가 너무 묘했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였지만 은근히 비꼬는 느낌이 섞여 있었다. 순간,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이 상황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면...그녀는 입술을 다물고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조심스럽게 말했다. “정말이에요. 제가 오후에 병원에 왔을 때 마침 배경빈 씨를 만난 거예요. 제가 갑자기 쓰러졌는데 그분이 의사를 불러준 것뿐이에요. 아마 의사 선생님 우리 관계를 착각한 것 같아요.” “그래?” 강현우는 가볍게 한쪽 눈썹을 올리며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눈빛이었다. 윤하경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쉬었다.정말이지, 이 남자는 너무 까다로웠다. ‘어떻게 해야 납득을 시킬 수 있을까?’그녀는 잠시 고민하더니 결국 손을 들어 맹세하듯 말했다. “정말이에요. 거짓말이면 제가 벌을 받을게요.” 강현우는 미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날카롭게 좁혀지던 눈이 조금 느슨해졌다. 그제야 그는 천천히 턱을 들어 올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먹어.” 윤하경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일단 이 위기는 넘긴 모양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난 뒤 그녀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침대에 누웠다. 이미 새벽 세 시를 넘긴 시각이었다. 그런데 옆을 돌아보니 강현우는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떠날
윤하경은 자신이 언제 잠들었는지도 몰랐다. 그저 눈을 떴을 때 강현우는 이미 병실을 떠난 뒤였다.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멀찍이 앉아 있던 민진혁이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윤하경 씨, 깨어나셨군요.” “네...” 윤하경은 아직 멍한 머리를 가볍게 문지르며 물었다. “현우 씨는요?” “대표님께서 아침 일찍 회사에 회의가 있어 가셨습니다. 대신 제가 남아 윤하경 씨를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이어서 말했다. “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상태가 많이 좋아지셔서 오늘 퇴원하셔도 된다고 합니다. 퇴원 수속부터 밟을까요 아니면 아침 식사부터 하시겠습니까?” 어젯밤 늦게 먹은 탓인지 윤하경은 전혀 배가 고프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담담하게 말했다. “퇴원할게요. 집에 가고 싶어요.” 어제 하루 집을 비웠더니 어떤 상태일지 모르겠고 회사도 이틀이나 나가지 못했다. 이제 더 이상 병원에서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윤하경의 대답을 들은 민진혁은 즉시 병실을 나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와 공손하게 물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직접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그의 태도는 한없이 정중했고 말투 역시 지나칠 정도로 예의를 갖췄다. 윤하경은 순간 멈칫하더니 이내 조용히 말했다. “굳이 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돼요. 저 혼자 가도 괜찮아요.” “안 됩니다. 대표님께서 반드시 모셔다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민진혁의 단호한 태도에 윤하경은 더 이상 거절하지 않았다. 괜히 신경 쓰느니 그냥 받아들이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고마워요.”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열 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윤하경은 옷만 갈아입고 곧장 회사로 가려 했다. 하지만 문을 열고 집 안에 들어선 순간 그대로 굳어버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집이 엉망진창이었다. 가구며 장식품이 죄다 어지럽혀져 있었고 윤수철이 아끼던
윤하경의 목소리는 제법 컸다. 덕분에 폭주하던 윤수철도 잠시나마 이성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간 뿐 그는 다시금 분노에 휩싸여 윤하경을 노려봤다. “왜 왔어? 설마 나 비웃으러 온 거냐?” “꺼져!” 그는 또다시 손에 잡히는 것을 윤하경에게 집어 던졌다. 윤하경은 몸을 살짝 틀어 피했지만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한 걸음 한 걸음 윤수철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눈동자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고 어떠한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렇게 하면 화가 풀리신다면 저한테 던지셔도 돼요.” “어차피 저는 죽어도 상관없잖아요. 아버지는 아직 건강하시니 다시 낳으면 그만이겠네요.” 윤하경의 빈정거리는 말투에 윤수철은 이를 악물었다. 이빨이 갈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그는 분노에 찬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며 낮게 내뱉었다. “네가 감히... 내가 못 할 거 같아?” “아버지라면 할 수 있겠죠.” 윤하경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버지가 그렇게 아끼던 윤하연은 사라졌고 이제 저까지 없어지면 아버지는 이 집에서 완전히 혼자가 되겠네요.”윤하경은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그러면 조용하긴 하겠어요.” 윤수철은 콧방귀를 뀌며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윤하경의 한마디가 그의 화를 어느 정도 누그러뜨린 듯했다. 그녀는 그가 더는 난동을 부리지 않는 걸 확인한 후 소파 위에 널브러져 있던 책을 치우고 털썩 앉았다. 그리고 태연하게 물었다. “이제 말해 보세요. 뭐 때문에 이렇게 화가 나신 거예요?” 윤수철은 그녀를 돌아보았다. 저 뻔뻔할 정도로 여유로운 태도가 더 괘씸했다. “어디 감히 네가 어른들 일에 끼어들어?” “당장 꺼져!” 윤하경은 어깨를 으쓱이며 무심하게 말했다. “그런데 아버지, 잊으신 거 아니죠?” “제가 아니었으면 아버지는 아직도 자기 머리 위에 그럴듯한 장식이 얹힌 걸 몰랐을 텐데요.” 그녀는 상대의 아픈 곳을 찌르는 법
윤하경이 알았다고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 나가보세요.”그녀는 손을 들어 머리를 문질렀다. 일이 점점 더 복잡해지면서 그녀는 무력감을 느꼈는데 마치 모든 일이 자신의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 같았다.얼굴을 찌푸리고 고민하던 그때, 핸드폰에 전화가 걸려와 확인해 보니 비서였다.전화를 받자 비서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안 부대표님, 회장님이 전화 연락이 안 돼요. 오늘 중요한 비즈니스 파티가 있는데 혹시 부대표님께서 저녁에 한빛 그룹을 대표해 참석할 수 있어요?”윤하경은 마음이 답답해서 거절하려고 물었다.“취소할 수 있어요?”비서가 난감해하며 말했다.“어렵습니다. 오늘 파티의 주최 측은 현재 우리의 최대 고객인데 그렇지 않아도 계약을 해지 의향이 있는 상태라... 만약 우리가 가지 않는다면 더 좋지 않을 거예요. 또 사전에 미리 초대장을 보냈고 저희도 간다고 했어요. 그런데 회장님께서 연락이 안 되네요. 다른 사람은... 부대표님만큼의 위상이 안 되어서요.”윤하경은 입술을 깨물고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알겠어요. 주소를 보내주세요.”말을 마친 후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마침 점심때라 저녁 파티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있었다.그녀는 약간 어지러운 머리를 문지르면 소지연에게 문자를 보냈다. 요즘 일이 많아 소지연에게 연락할 생각을 못 했는데 이제야 상황을 물어보게 되었다.문자를 보낸 지 오래 지났어도 답장이 없자 그녀는 저녁에 일이 끝난 후 소지연의 집에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파티 시간이 다가오자 윤하경은 옷을 갈아입었다. 한빛 그룹을 대표해 이런 만찬에 참석하는 건 처음이라 신경이 많이 쓰였다.옷을 입어 너무 가볍게 보이지도, 너무 공식으로 보이지도 않게 하려고 그녀는 고민 끝에 실크 스트랩 원피스를 선택했고 밖에는 같은 소재로 만든 양복 외투를 걸쳤으며 액세서리로는 진주로 된 장신구를 골랐다.진주와 실크의 질감이 조화를 이루었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았는데 안색은 여전히 창백하여 보이자 진한
“오 팀장님.”그녀는 다가가서 오건우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오건우는 즉시 손을 내밀지 않고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가 내민 손을 훑어보다가 눈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비쳤다.윤하경은 가까이서 그의 표정을 똑똑히 보았는데 아마 오늘 밤 그에게 아부하러 파티에 온 여자로 생각한 모양이다.“저는 한빛 그룹의 신임 부대표 윤하경이에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그녀의 자기소개를 듣고서야 오건우는 눈썹을 살짝 올리며 그제야 손을 내밀어 악수했다.“오건우예요.”그의 목소리는 차갑고 사람을 깔보는듯한 느낌을 주었다.윤하경은 약간 긴장되었다. 오기 전에 오건우의 자료를 보지 않고 그저 말투로 보아도 이분은 결코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보아냈다.이제 이 사람과 계약을 체결해야 한다는 생각에 윤하경은 정신을 바짝 차렸다.“오 팀장님, 시간 되시면 이야기 좀 나눠 볼 수 있을까요?”오건우는 손을 들어 손목시계를 한 번 보고는 다시 고개를 들어 윤하경을 바라보았는데 그의 두 눈은 물처럼 조용했다.“죄송한데 시간이 없네요.”윤하경은 그가 이렇게 단호하게 거절할 줄 생각지도 못했다.오건우는 말을 마치자마자 윤하경을 에돌아 자리를 떠났고 비서가 다가와 속삭였다.“윤 부대표님, 어떻게 할까요? 우린 이미 오 팀장님과 여러 번 약속을 잡았지만 모두 거절당했어요. 다음 달이면 계약이 끝나는데 이번에 계약을 달성하지 못하면 우리는...”비서가 말을 다 하지 않았지만 윤하경은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취임하자마자 이미 회사의 재무제표를 보았는데 만약 한빛 그룹에서 최대 고객사인 오 팀장을 잃으면 아마 회사 운영이 어려워질 것이다.강현우도 비록 적지 않은 자금을 투입했지만 결국 한계가 있었다.그렇다고 앉아서 밑천만 바라고 놀고먹으면 언젠가 망하기 일쑤였다.“괜찮아요. 오늘 저녁에 기회를 찾아봐야죠.”비서는 한숨을 내쉬었다.“그랬으면 좋겠어요.”비서는 믿을 수 없다는 말투였다. 윤하경은 입술을 깨물며 바로 가서 샴페인 한 잔을 들고 구석진 자리를 찾아 앉았지만
윤하경은 잠시 발걸음을 멈췄고 눈앞의 장면에 잠시 갈등했지만 결국 아무 일도 없었던 척 고개를 돌렸다.소지연은 당황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저 신인아라는 애, 강현우랑 무슨 사이야?”윤하경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몰라. 나도.”“그럼 너랑 강현우는...”“가자.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고.”윤하경은 짧게 말한 뒤 차로 발걸음을 옮겼다.그 모습을 보고 있던 강현우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민진혁에게 말했다.“신인아 데려다줘.”신인아는 고개를 들고 살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오빠는... 같이 안 가세요?”강현우는 그녀를 보며 차분하게 답했다.“괜찮아. 너 먼저 가. 시간 나면 갈게.”신인아는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럼 조심히 오세요.”그렇게 말하고는 민진혁에게 출발하라고 고개를 끄덕였다.윤하경이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려던 찰나, 갑자기 조수석 문이 열렸다.놀라서 발을 브레이크에 올린 윤하경이 고개를 돌리자, 강현우가 몸을 살짝 숙인 채 소지연에게 말했다.“미안. 윤하경한테 할 말이 좀 있어서.”소지연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차에서 내렸다.윤하경은 입술을 꾹 다물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현우 씨랑 저, 가는 길 다르잖아요.”명백한 거절의 뉘앙스를 담았지만 강현우는 개의치 않았다.그는 긴 다리를 자연스럽게 차 안으로 뻗고 앉더니 느긋하게 몸을 기대며 말했다.“운전해.”윤하경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저...”“아니면 내가 운전할까?”강현우가 고개를 기울이며 그녀를 바라봤다. 예전에 강현우가 몰았던 미친 듯한 속도가 생각나 윤하경은 말없이 시동을 걸었다.차가 조용히 주차장을 빠져나온 후, 강현우가 물었다.“신인아, 어떻게 알게 된 거야?”그 말투. 마치 자신이 신인아에게 일부러 접근이라도 한 것처럼 들렸고 윤하경은 속으로 혀를 찼다.“그 말, 제가 신인아한테 일부러 접근한 거라고 들리는데요?”강현우는 대꾸하지 않고 그저 창밖을 보
소녀는 말끝마다 볼이 희미하게 붉어졌다. 부끄러운 건지, 숨결 때문인지 얼굴이 희미하게 물들어 있었다.그제야 윤하경은 복잡한 생각을 털어내고 조용히 그녀를 엘리베이터 안으로 밀어 넣었고 소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정말 고맙습니다.”“별말씀을요.” 윤하경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나서도, 윤하경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멍하니 서 있었다.‘대체 저 애는 누구지? 송시안이 말했던, 강현우에게 중요한 여자라는 게... 설마?’“야, 너 왜 그래?”소지연이 옆에서 그녀 어깨를 툭 치며 말했고 윤하경은 고개를 저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아니야, 가자.”그렇게 다시 발걸음을 옮겼지만 윤하경의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하기만 했다.그런데 보석 매장 안에서 윤하경은 또다시 휠체어를 탄 소녀를 마주쳤다.진열대 앞에 앉은 그녀는 턱을 괴고 귀걸이들을 보고 있었고 표정은 어딘가 망설이고 있는 듯했다.윤하경은 모른 척하고 돌아서려 했지만 이번엔 신인아가 먼저 그녀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어머, 그 언니다! 또 보네요?”“그러게요.”윤하경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쇼핑하러 오신 거예요?”소녀는 여전히 밝은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그냥 좀 둘러보는 중이에요.” 윤하경이 대답하고는 소지연의 팔을 끌어 매장을 나가려 했지만 소녀는 다시 윤하경을 불러세웠다.“잠깐만요! 혹시 시간 되세요? 제가 얼마 전에 귀국해서 친구도 없고... 혹시 이 두 개 중에 어떤 커프스링크가 더 나은지 좀 봐주실 수 있을까요? 도저히 못 고르겠어요.”윤하경은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걸음을 멈췄다.하지만 그녀의 목에 걸린 곤륜 부적이 다시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윤하경은 결국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그때 소지연이 윤하경의 귀에 속삭였다.“너 원래 이렇게 남 일에 잘 끼어들었나?”윤하경은 못 들은 척하며 말했다.“어떤 두 개요?”신인아는 바로 점원에게 자신이 고른 두 가지를 꺼내달라고 했다.“이거랑 이거요.”윤하경은 커프스를 들여다
윤하경은 다시 한번 오건우가 보냈던 사진을 꺼내 봤다.흐릿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윤하경은 자조적으로 입꼬리를 살짝 비틀었다.‘내가 왜 이렇게 지질하게 굴지...’강현우와 자신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명분 없는 사이이고 떳떳할 것도, 묻고 따질 자격도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자신이 이렇게 사진 하나에 마음을 흔들리고 있다는 게 웃겼다.윤하경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휴대폰 화면을 꺼버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로 올라갔다.그런데 사무실에 도착한 순간, 그녀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배경빈 씨 오늘 안 나왔어?”윤하경은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우슬기를 바라봤고 우슬기는 책상에 기대앉아 어깨를 으쓱였다.“안 왔어요. 앞으로도 안 올 거 같은데요? 아까 어떤 남자가 와서 자기가 경빈 씨네 집 가사 도우미라며 대신 사직서 냈다더라고요.”“대표님, 경빈 씨 진짜 어디 대단한 집 도련님 아니죠?”윤하경은 우슬기의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잠시 바라보다,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신경 꺼.”그렇게 말은 했지만 책상에 앉아 커피잔을 집어 드는 순간, 윤하경 머릿속엔 어제 강현우가 툭 던졌던 질문이 스쳐 지나갔다.‘배경빈, 왜 자꾸 네 주변에 맴돌지?’강현우와 이 일이 무관할 리 없었다.하지만 한편으론 잘된 일이기도 했다. 배경빈이 나간 덕에 그녀의 사무실이 다시 조용해졌으니까 말이다.윤하경은 서류를 정리하며 정신을 다잡았고 겨우 집중하기 시작했을 무렵 오랜만에 소지연에게서 카톡이 왔다.[하경아, 오늘 시간 돼? 잠깐 얼굴 좀 보자.]지난번,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며 연락을 끊었던 소지연이었다.회사는 부하직원들에게 잠시 맡기고 있었다고 했지만 그 뒤로 소식이 없었기에 더는 그녀를 건드리지 않았다.이제야 겨우 마음을 추스른 듯했다. 윤하경은 반가운 마음에 흔쾌히 약속을 잡았고 근처 대형 쇼핑몰에서 만나기로 했다.카페에 도착했을 땐, 소지연이 먼저 와 있었다. 얼굴에 살짝 피곤기가 보였지만 화장은 또렷했고 입술에는 진한 레드 컬러가 눈에 띄
윤하경은 박소희와 다를 게 없이 놀랐다. 그녀 역시, 강현우가 다시 돌아올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강현우는 아무렇지 않게 윤하경의 허리를 감싸안은 채, 비죽 웃으며 박소희를 바라봤고 겉으론 웃고 있지만 눈빛만은 싸늘했다. 박소희는 그 눈빛에 순간 굳어버렸지만 이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하경 씨 말에 너무 화가 나서 잠깐 이성을 잃었어. 현우야, 그런 뜻은 아니었어. 나 진짜...”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러고는, 낮고 느린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다시 묻을게. 도대체 누가 누구 약혼자를 유혹했다는 거지?”박소희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윤하경 쪽을 힐끔 보더니 결국 강현우의 싸늘한 눈빛에 기가 죽은 듯 고개를 숙였다.“우리 곧 약혼하잖아. 약혼자로서 적어도 사람들 앞에서는 나한테 체면은 세워줘야 하는 거 아니야...?”강현우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그렇지? 근데 말이야...”“내가 언제 약혼했는데?”그 한마디는 전혀 준비되지 않은 폭탄처럼 박소희에게 직격했고 윤하경도 순간 숨을 멈췄다.그 말은, 눈앞에서 공개적으로 뺨이라도 맞은 듯한 충격을 안겨줬다.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이런 수모를 겪어본 적 없는 박소희는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누구도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없었는데 강현우만은 예외였다. 그리고 더 괴로운 건, 그런 그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현우야... 그건 네 어머님이랑 우리 아빠가...”“그래서?” 강현우는 가볍게 웃었다. “그럼 그 사람들이랑 따져. 나랑은 무슨 상관이야?”그 말에 박소희의 얼굴은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버렸고 윤하경은 강현우 품 안에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무슨 뜻이지? 그럼 진짜 약혼한 건 아니었던 거야? 그 곤륜 부적은?’윤하경의 시선이 무심코 박소희 쪽으로 옮겨졌고 그제야 깨달았다.박소희의 목에는 어젯밤 그 값비싼 곤륜 부적이 없었다.그녀의 성격상, 만약 강현우가 그걸 준 거라면 분명 자랑하듯 걸고 나왔을 텐데
윤하경은 아직 마음이 복잡해, 강현우가 탄 차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그런 그녀를 누군가가 부르자, 화들짝 놀라 돌아봤다.박소희를 보자 윤하경은 잠깐 당황한 표정이 스쳤지만 곧 웃으며 말했다.“소희 씨.”박소희는 턱을 살짝 들고 도도하게 물었다.“하경 씨, 시간 좀 있으세요? 아침이라도 대접하고 싶어서요.”“없어요.”윤하경은 단호하게 거절했고 박소희와는 굳이 엮이고 싶지 않았다.그런데 박소희는 물러서지 않았다.윤하경이 거절하자, 아예 그녀의 손목을 잡고 숲길 안쪽의 레스토랑으로 끌고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 박소희는 두 팔을 끼고 앉아 윤하경을 노골적으로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윤하경은 시계를 슬쩍 확인하곤 무표정하게 말했다.“하실 말씀 있으면 빨리하세요. 회사에 회의 있어서요.”박소희는 윤하경의 여유로운 태도에 불쾌감이 치밀었다. 분명히 자신은 정식 약혼자임에도, 눈앞의 여자는 전혀 죄책감도 없어 보였다.“참 뻔뻔하시네요.”박소희가 냉소를 머금고 말했다.“하경 씨는 부끄럽지도 않아요? 정식 약혼자가 있는 남자랑 엮여 있으면서.”윤하경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제가 왜 부끄러워해야 하죠?”늘 우아하던 박소희는 순간 이성을 잃었다. “윤하경! 너 윤씨 가문 딸 아니야? 경성에서 그 정도면 그럭저럭 이름 있는 가문인데 그런 여자가 감히 남의 약혼자랑 그렇게 엮여? 이런 자리에서 들키고도 창피한 줄도 몰라요? 양심 없어?”.아침 시간이라 사람이 많진 않았지만 커져가는 박소희의 목소리 때문에 레스토랑 안에 있던 직원들이 하나둘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고 다들 귀를 쫑긋 세우고 그쪽을 힐끔거렸다.윤하경은 그녀의 격앙된 모습을 지켜보다,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차분한 그녀의 태도는 분노에 휩싸인 박소희와 극명하게 대비됐다.원래부터 윤하경은, 누가 위에서 내려다보듯 가르치려 들면 질색이었다.더군다나 그녀의 오늘 하루는 애초에 좋지 않았고 지금 이 상황은 한 번쯤 터뜨릴 좋은 기회였다.“소희 씨.”윤하경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
윤하경은 조용히 입술을 다물었다가 다정하게 말했다.“현우 씨 바쁘시면 저 혼자 아침 먹을게요.”강현우는 그 말에 휴대폰을 거두며 그녀를 돌아봤다. 또렷하고 깊은 이목구비는 한 번 마주치면 쉽게 눈을 뗄 수 없는 인상이었다.“같이 먹기로 했잖아. 당연히 같이 먹어야지.”그는 단호하게 말한 뒤, 더 이상 휴대폰을 건드리지 않았다.윤하경은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고 사실 그녀는 그렇게까지 바라진 않았다.차는 숲길 끝에 도착했고 미리 연락이 되어 있었는지 둘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식탁 위에 아침이 한가득 차려져 있었고 여러 가지 다과와 차가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웠다.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강현우가 이렇게 신경 써서 아침 식사를 챙겨주는 상황이라면윤하경은 기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상하게도 입맛이 없었다.그래도 강현우가 옆에서 지켜보니 억지로라도 몇 입 먹었고 따뜻한 차가 목으로 넘어가자, 몸도 점점 따뜻해졌다.그런 둘의 모습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 지켜보고 있었다.안현주가 급히 옆방으로 뛰어들며 외쳤다.“소희야! 강현우한테 아침밥을 차릴 그럴 때 아니야.”조심스럽게 아침 식사를 도시락에 담고 있던 박소희의 손이 멈췄고 고개를 돌려 안현주를 흘겨봤다.“잔소리 좀 그만해. 너야말로 괜한 걱정은 하지 마. 회사 갈 때 내가 직접 들고 올라가면 되니까, 너는 밑에서 기다려.”안현주가 혀를 찼다.“너는 정식 약혼자랍시고 정성 다해서 도시락 싸고 있는데 지금 강현우랑 윤하경이랑 둘이서 다정하게 아침 먹고 있다니까?”안현주는 말하면서도 억울한 듯 코웃음을 쳤다.“진짜 강현우란 남자, 너 같은 사람 좋은 여자는 안 보이고 그 윤하경 같은 요상한 여자만 눈에 들어오나 봐.”박소희의 손이 살짝 떨렸다.“뭐라고?”안현주가 인상을 찌푸리며 되풀이했다.“네가 그렇게 마음 써주는 약혼자는 지금 윤하경이랑 사이좋게 조식 데이트 중이라고. 근데 너는 그 사람이 배고플까 봐 도시락까지 싸고 있고. 뭐, 아침 입맛 돋워줄 애피타이저는 이미 먹었을지
그 말을 끝으로 윤하경은 휴대폰 화면을 꺼버리고 조용히 욕실로 들어갔다.양치질을 하며 거울 속 자신의 멍한 얼굴을 바라보던 그녀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입안의 거품을 헹구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조용히 그녀를 안았고 보지 않아도 강현우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막 자라난 까칠한 수염이 그녀의 피부를 간질였고 윤하경은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다.그러나 강현우는 세면대 양옆에 팔을 짚어 그녀를 가둬버렸고 한 발짝도 도망갈 수 없는 거리였다.“왜, 어젯밤 내가 안 들어와서 화났어?”강현우는 손끝으로 윤하경의 콧등을 살짝 긁으며 말했다.“봐라, 또 이렇게 새침하게 굴고.”윤하경은 잠시 멈칫하다가 가볍게 웃어 보였다.“아니요, 안 화났어요.”강현우는 한쪽 눈썹을 살짝 올리며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윤하경은 그를 끌어안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현우 씨, 저 여기서 꽤 오래 지낸 것 같아요. 이제는 슬슬 나가서 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괜히 사진이라도 찍혀서 기사 나면 현우 씨 이미지에 안 좋잖아요.”강현우는 윤하경을 내려다보며 코웃음을 쳤다.“도망치고 싶은 거야?”그의 눈동자에 잠깐 스치는 날카로움이 그녀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고 윤하경은 그를 진정시키듯 그의 셔츠 단추를 매만지며 말랬다.“아니요, 진심으로 현우 씨 걱정해서 하는 말이에요. 강한 그룹 같은 대기업이면 주가에도 영향 줄 수 있는 문제니까요.”이 비슷한 말은 예전에도 한 적이 있었지만 오늘따라 그 말투에는 미묘한 날이 서 있었다.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내가 그런 걸 신경 쓰는 놈처럼 보여?”윤하경은 잠깐 손을 멈췄다가, 이내 한껏 순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현우 씨는 안 신경 쓰시더라도... 전 해야죠.”그 말에 강현우는 그녀의 턱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나지막이 묻는다.“진심이야?”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네.”강현우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
윤하경은 대답하지 않았다.그 모습을 본 강현우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왜, 마음에 안 들어?”윤하경은 눈썹을 살짝 모았다가, 속으로 맴도는 의문을 억누른 채 다시 환한 미소를 띠었다.“마음에 들어요.”강현우는 그녀의 말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또렷한 콧대 아래 옅은 미소가 스쳤고 그는 곧 민진혁에게 지시했다.“가자. 집으로.”그날 강현우는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침실로 들어간 그는 윤하경의 입술을 조심스레 물었다.윤하경은 살짝 그를 밀치고 그의 의아한 눈빛을 받으며 변명을 꺼냈다.“저기... 오늘 좀 더워서요. 샤워 좀 하고 올게요.”하지만 강현우는 그녀를 벽에 가두며 낮게 속삭였다.“난 안 덥던데.”그 말을 마치기 무섭게 다시 입을 맞췄고 윤하경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사실 강현우는 이런 쪽에 능숙했다. 지쳐도 어쩌면 즐길 수도 있는 관계, 적어도 몸만 놓고 보면 말이다.하지만 오늘은 왠지 모르게 거부감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할 새도 없이, 강현우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그녀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고 있었다.몸이 미세하게 떨릴 무렵, 갑자기 그의 휴대폰이 울렸고 진동 소리는 조용한 방 안에 유난히 크게 울렸다.윤하경은 조심스레 말했다.“전화 왔어요.”강현우는 이를 악물며 짜증 섞인 표정을 지었지만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했다.그런데 전화를 받지는 않고 오히려 윤하경의 입술에 짧은 키스를 남겼다.“얌전히 집에서 기다려. 금방 올게.”말투는 부드러웠고 어딘가 아이 달래듯 느껴졌다. 그 말에서 ‘집’이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 윤하경은 잠깐 멍해졌다.‘집?’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집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마음이 닿는 곳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임수연과 윤하연이 집에 들어온 이후 그곳은 더 이상 집이 아니었다.그런데 강현우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을 때, 이상하게도 가슴 한구석이 저릿했다.강현우가 나간 후, 윤하경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역시 강현우 같은
오건우는 그 남자가 다가오는 걸 보더니 더욱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하 대표님, 막 서울 오셨다고 들었는데요. 제가 소개 좀 드릴게요. 이쪽은 강현우 대표님이에요.”하 대표라는 남자는 생각보다 젠틀한 인상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강현우를 향해 손을 내밀며 정중히 웃었다.“반갑습니다. 평소 익히 들었습니다. 저는 하석호입니다. ”강현우는 무표정한 눈으로 하석호를 한번 쓱 훑어보고는, 그 손을 외면한 채 고개만 돌렸다.오건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이번엔 윤하경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리고 이쪽은 윤하경 씨입니다.”평소엔 권력자 곁에 있는 여자엔 별 관심 없는 하석호였지만 윤하경의 얼굴을 보자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윤하경 씨?”윤하경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우처럼 무시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니고 오건우와도 협업 중이었기에 말이다.“하 대표님, 반갑습니다.”말을 막 끝내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톡 건드렸다.“윤하경 씨, 혹시 예전에 모성에 가본 적 있으신가요?”모성은 국경 근처 외딴 도시였다.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가본 적 없어요.”하석호는 뭔가 더 묻고 싶은 듯했지만 강현우가 고개를 돌리며 그를 노려보듯 쳐다봤다.“하 대표님, 질문이 좀 많은 거 아닌가요?”하석호는 순간 당황한 듯했지만 금세 웃으며 넘겼다.“그러네요, 제가 좀 지나쳤나 봅니다.”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드디어 윤하경의 귀가 조용해졌지만 여전히 하 대표의 시선이 자기에게 꽂혀 있는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이윽고 본격적으로 경매가 시작됐고 초반엔 관심 가는 물건이 딱히 없었다. 그러다 한 쌍의 사파이어 귀걸이가 등장하자 강현우가 고개를 돌려 윤하경을 바라봤다.“어때, 마음에 들어?”강현우는 윤하경 같은 예쁜 여자는 당연히 장신구를 좋아할 거라 생각했지만 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그냥 그래요.”강현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지만 더 묻진 않았다.그때 사회자의 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