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식간에 클럽 안이 아수라장이 되었다.술병을 맞은 남자의 머리에서 피가 흘러내렸고 그는 비명을 지르며 윤하경을 노려보았다.“이 미친년이 감히 나를 쳤어?”윤하경은 그를 흘끗 쳐다보더니, 더 이상 상대하고 싶지 않아 무대를 내려가려 했지만 남자가 끈질기게 그녀를 붙잡았다.“X발, 사람을 때려놓고 그냥 가려고? 내가 호구로 보여?”중년 남자들은 대체로 이상한 자존심이란 게 있다. 남의 몸을 함부로 더듬을 땐 당연한 듯 굴더니, 정작 맞을 각오는 전혀 하지 않았다.윤하경은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노려봤다. 술에 취한 탓인지 눈이 약간 흐려졌지만 혼자라는 사실이 그녀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주위를 둘러본 뒤, 그녀는 최대한 차분한 척하며 말했다.“이제 놓지 않으면 내 친구가 오면 네가 더 곤란해질 텐데?”사실, 그녀는 허세를 부리고 있었다. 하지만 남자는 손에 묻은 피를 쓱 문지르더니 비웃었다.“웃기시네, 허세는.”“나, 너 처음 들어올 때부터 보고 있었어. 혼자였잖아.”그는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그러니까, 오늘 밤 나랑 잘 놀아보자고?”순간, 그녀는 도망칠 방법을 고민했다.그때 2층 쪽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보이자 그녀의 눈빛이 반짝였다. 비록 클럽 조명이 어두웠지만 그녀는 이곳에서도 강현우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그는 2층 VIP석 난간에 기대어 있었고 윤하경은 주저 없이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켰다.“내 남친이 저기 있는데?”남자는 그녀가 가리킨 곳을 힐끗 돌아보고 이내 비웃음을 터뜨렸다.“하! 내가 바보야? 내가 강현우를 몰라? 네가 감히 그 남자를 걸고 넘어가?”그 말에 윤하경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들어 강현우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제발, 나 좀 살려줘.’하지만 강현우는 그녀를 보고도 단 한 번도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심지어 그녀를 보지도 않은 채 자리로 들어가 버렸다.윤하경은 순간 얼어붙었다.‘아 맞다. 원래 그런 사람이었지.’게다가, 얼마 전 그를 화나게 했으니,
유 대표는 오늘은 완전히 상대를 잘못 골랐다는 걸 깨달았다.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가방에서 카드를 꺼내 윤하경에게 억지웃음을 지으며 내밀었다.“오늘은 내 실수였어. 미안하다는 뜻이야. 비밀번호는 000000이야.”하지만 윤하경은 카드를 받지 않고 그저 한쪽에 앉아 숨을 고르며 속으로 생각했다.‘오늘은 정말 재수가 없네. 괜히 나왔어.’그리고 그는 카드를 바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는 더 이상 말도 못 붙이고 황급히 클럽을 빠져나갔다.추성운이 그녀를 바라보며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하경 씨, 어떻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시려나?”윤하경은 잠시 고민하다가 짧게 대답했다.“성운 씨한테 한 번 신세를 졌네요.”추성운이 혀를 차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2층을 향해 시선을 돌렸고 윤하경도 무의식적으로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리고 마침 강현우가 2층에서 내려오는 모습을 보았다.그는 늘 그렇듯 여유롭게 걸음을 내디뎠다. 길고 곧은 다리로 가볍게 계단을 내려와서는 단 한 번도 멈추지 않고 클럽을 나가버렸다.그 모습을 보며 윤하경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고 추성운을 돌아보며 말했다.“오늘 도와줘서 고마워요. 다음에 필요하면 말해요.”윤하경은 머리가 지끈거려 손으로 관자놀이를 눌렀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섰다.클럽을 나서자, 바람이 한결 차가웠다. 그런데 문 앞에서 강현우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그녀는 본능적으로 그의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지만 마침 그의 차가 도착했고 그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은 채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윤하경은 몇 초간 고민하다가 결국 그의 차에 타버렸고 순간 강현우의 표정은 썩 기분 좋아 보이지 않았다.“내려.”그는 짧고 단호하게 말했다. 술기운이 살짝 올라 대담해진 윤하경은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문을 단단히 닫고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아까 왜 저 안 도와줬어요?”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질문이었지만 오늘은 꼭 묻고 싶었다.강현우는 도대체 어떻게 저렇게 냉정할 수 있는 걸까?강현우는 눈썹을 살짝
윤하경은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조차 몰랐다.그저 온 세상에 버려진 것 같은 기분이었고 뭔가, 자신을 붙잡아 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대상이 강현우라면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라고 생각했다.운전기사는 눈치껏 차에서 내렸고 술기운 때문인지 오늘의 윤하경은 평소와는 사뭇 달랐다.차 안은 어둡고 조용해서 그녀는 미처 보지 못했지만 강현우의 눈빛은 한없이 어두웠다.그렇게 한참을 지나, 완전히 기진맥진해진 윤하경은 결국 정신을 잃듯이 잠이 들었다.다음 날 아침. 눈이 천천히 뜨고 몸을 살짝 움직이려던 순간, 손끝에 뜨겁고 단단한 감촉이 느껴졌다.‘뭐지?’윤하경은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곧바로, 옆에 누운 강현우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아직 깊은 잠에 빠진 듯 보였지만 살짝 찌푸려진 눈썹이 어젯밤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하...”그녀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고 그냥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어젯밤, 대체 왜!’그녀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정신을 가다듬으려던 찰나, 손가락 사이로 차가운 시선이 느껴졌다.손가락 틈으로 슬쩍 바라보니, 이미 깨어난 강현우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아침에 막 깬 사람이라고 하기엔, 눈빛이 너무 선명하고 차가웠다. 그는 가볍게 코웃음을 치더니, 팔을 머리 뒤로 받친 채 게으르게 물었다.“그 표정은 뭐야? 어제 일은 까먹은 거야?”그녀는 괜히 입을 열면 더 바보 같은 말이 나올 것 같아서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강현우가 다시 한마디 덧붙였다.“어제 먼저 덤빈 건 너였잖아.”윤하경은 이를 악물었다.‘이 남자는 도대체 왜 이렇게 말로 사람을 후려치는 걸까.’“책임지라고 한 것도 아니잖아요.”그녀는 차갑게 한마디 던지고는, 이불을 치켜올리며 자리에서 내려오려 했다.하지만 그 순간 스르르. 이불이 흘러내리며 그녀의 맨살이 그대로 드러났다.찰나의 순간, 정적이 흘렀고 뒤에서 강현우의 비웃음이 들려왔다.그녀가 다시 몸을 숙여 이불을 끌어 올리려던 순간 강
“벗어.”강현우의 시선은 그녀의 허벅지 라인에 고정되어 있었고 어딘가 못마땅해 보이는 표정이었다.윤하경은 그를 돌아보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아니, 옷 한 벌 가지고 그렇게 아까워할 일인가요?”분명 이 옷이 비싼 건 알지만 강현우 정도 되는 사람이 이걸로 뭐라 할 줄은 몰랐다.“네 옷은 거실에 준비해 뒀어. 직접 가서 입어.”그는 그렇게 말한 뒤, 욕실로 들어갔고 곧 샤워기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윤하경은 인상을 찌푸렸다.“진짜 너무 깐깐한 거 아니야?”그러면서도 결국 거실로 나가보았다. 거실 한쪽에 옷걸이가 세워져 있었고 그 위에는 여러 벌의 옷이 걸려 있었다.정장, 원피스, 다양한 스타일의 옷들. 전부 그녀에게 잘 어울릴 법한 것들이었고 게다가 전부 명품 브랜드였다.그녀는 잠시 멍해졌다. 방금까지 그를 짠돌이라고 욕한 게 너무 성급한 판단이었나?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강현우는 이미 방에서 나와 있었다.“저 먼저 가볼게요.”윤하경은 최대한 예의 바르게 인사했지만 그는 단 한 번도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역시 강현우답네。’윤하경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 집을 나섰다.회사에 도착하니, 이미 소지연은 출근한 지 한참 된 상태였고 그녀를 보자마자 한숨을 쉬었다.“우리 대표님, 이제는 예약이라도 해야 만날 수 있는 거야?”윤하경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그 말은 또 뭐야. 아이고 우리 지연이 수고했어. 연말에 보너스 챙겨줄게.”“됐어!”소지연은 툴툴거리며 그녀에게 결재 서류를 건넸다. 그러더니 갑자기 망설이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하경아, 아까 윤하연이 널 찾으러 왔었어.”윤하경이 서명을 하던 손이 멈췄고 곧바로 미간을 찌푸렸다.“걔가 나한테 무슨 볼일이야?”“글쎄, 표정을 보니까 좋은 일은 아니겠더라. 네가 없다고 하니까, 좀 있다가 다시 온대.”소지연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너 또 가족이랑 싸운 거야?”예전 같았으면 이런 일들을 소지연에게 다 털어놓았을
윤하경의 말은 분명히 윤하연을 겨냥한 것이었지만 윤하연은 웬만한 말로는 상처받지 않는 타고난 후안무치였다.윤하경은 문이 열리는 순간, 강현우를 보았고 순간적으로 눈빛이 흔들렸다.비록 윤씨 가문이 예전만큼의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지금이지만 강한 그룹의 이름은 그녀도 익히 알고 있었다.그리고 강현우는 각종 경제지와 미디어에서 다룰 만큼, 이미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다.그런 남자가 윤하경과 협업을 한다고? 그녀의 작은 회사가 강한 그룹과 거래를 한다고?윤하연은 빠르게 윤하경에게 다가가, 눈물을 머금은 채 손을 꼭 붙잡았다.“언니, 내가 잘못했어. 뭐든 내 잘못이야. 하지만 아빠가 병원에 계셔. 진짜로 언니를 보고 싶어 해. 한 번만... 한 번만 가서 봐주면 안 돼?”말 한마디 한마디가 마치 효녀 연기를 펼치는 듯했다. 자신을 희생하며 가족을 걱정하는 착한 딸처럼 보이려는 것처럼 말이다.그녀가 연기를 잘하는 것은 알지만 만약 그녀의 눈길이 계속 강현우에게 흘깃거리지 않았다면 연출이 훨씬 자연스러웠을 것이다.‘결국엔 강현우에게 얼굴을 비추고 싶다는 거겠지.’윤하경은 피식 웃었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윤하연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그녀는 일부러 더 크게 웃으며 말했다.“윤하연, 귀머거리야? 내가 지금 일하는 거 안 보여?”순간, 강현우의 얼굴이 살짝 굳어지는 것이 보였지만 윤하경은 애써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당장 강현우의 비위를 맞추는 게 가족들 신경 쓰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했으니까.그녀는 일부러 지루하다는 듯 하품을 하며 말했다.“아니, 너희 가족 셋이서 날 내쫓았잖아? 이제 와서 왜 날 찾는 건데?”윤하경은 비서를 향해 손짓했다.“보안팀 불러서 내보내. 앞으로 이 사람이 다시 찾아와도 문턱 하나 못 넘기게 해.”윤하연의 눈이 붉어졌다.“언니, 제발 그러지 마.”윤하경은 윤하연의 ‘연기’가 거슬렸지만 애써 고개를 돌리고는 강현우를 향해 밝은 미소를 지었다.“죄송해요, 강 대표님. 이쪽으로 가시죠.”소지연
“뭐야?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자기 팀이 전문가라고 떠들더니 결국 이런 허접한 기획안으로 날 속이려는 거예요?”강현우는 길고 날렵한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윤 대표님, 이럴 거예요?”그의 말이 끝나자 회의실 안 공기는 순간 얼어붙었다.팀원들은 당황한 듯 서로를 바라보며 일제히 윤하경의 반응을 살폈다.윤하경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손에 쥐고 있던 파일을 살짝 움켜쥐었지만 겉으로는 평정심을 유지하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강 대표님께서 부족한 점이 있다고 느끼신다면 얼마든지 의견을 주시면 됩니다. 최대한 고객의 요구에 맞춰 완벽한 결과를 내도록 하겠습니다.”일에 있어서는, 윤하경은 언제나 진지하고 철저했다. 이 회사는 결코 쉽지 않은 길을 걷고 있기에 어떤 프로젝트든 잡아야 살아남을 수 있다.하지만 강현우는 마치 그녀를 일부러 곤란하게 만들려는 듯했다. 그는 시계를 한 번 확인하더니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렇게 다 제가 지시해야 한다면 굳이 돈을 들여 당신 팀을 고용할 이유가 없죠. 다음번에는 만족할 만한 기획안을 가져오세요.”하지만 강현우는 그녀에게 더 이상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일행을 이끌고 먼저 자리를 떠났다.멀어지는 강현우의 뒷모습을 보며 윤하경은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소지연은 고객을 배웅하러 나갔고 윤하경은 혼자 회의실에 남아 서 있었다.‘역시, 강현우란 사람은 상대하기 어려워.’이 프로젝트는 그녀와 팀이 밤을 새워 가며 준비한 것이고 기획안의 완성도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강현우는 계속 불만족스러워했다. 대체 뭐가 문제일까?그녀가 파일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팀원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다들 실망감에 빠진 모습에 윤하경은 한숨을 삼키고는 팀원들을 향해 자신감 있는 미소를 지었다.“괜찮아. 우리가 수없이 고민하고 준비한 프로젝트야. 수정할 부분이 있으면 보완하면 돼.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일단 다들 나가
윤하경이 휴대폰을 들고 내려왔을 때 마침 강현우와 윤하연 사이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그녀는 흥미롭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이 상황을 감상하기로 했다.윤하연은 늘 청순하고 착한 여동생 이미지를 유지해 왔기에 아마도 이렇게 대놓고 굴욕을 당한 건 처음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강현우 이 남자 꽤 재미있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강 대표님...”한참을 멍하니 서 있던 윤하연이 드디어 정신을 차린 듯 억지로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제가 혹시 강 대표님께 실례되는 행동이라도 한 걸까요? 제가 뭘 잘못했는지...?”하지만 강현우는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무심히 손목시계를 올려다보았다.그 모습만으로도 명백한 불쾌함이 드러났다. 그걸 눈치챈 그의 비서는 곧바로 앞으로 나서서 정중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저기요, 계속 길을 막고 계시면 보안팀을 부를 수밖에 없겠어요.”그 말과 함께 비서도 짧게 쓴웃음을 지었는데 그 눈빛엔 은근한 조롱이 서려 있었다.그도 강현우를 따라다니며 여러 부류의 여자들을 봐왔지만 이렇게 조악한 수작은 실소가 나올 정도였다. 그제야 윤하연도 더 이상 버티는 게 무리라는 걸 깨달은 듯 결국 얼굴을 감싸 쥐고 울먹이며 뛰쳐나갔다. 그 모습이 꽤 볼만했다.하지만 강현우는 단 1초도 그녀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피곤하다는 듯 긴 다리를 뻗어 차에 올라탔고 아무런 감정 없이 조용히 말했다.“출발해.”하지만 차가 출발하기도 전에 누군가가 창문을 두드렸다. 강현우가 고개를 돌리자 창문 밖에서 윤하경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녀는 대놓고 재미있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강현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어쨌든 창문을 내리고 물었다.“또 뭐야?”윤하경은 대답하는 대신 태연하게 차 문을 열고 들어와 버렸다. 운전기사와 비서는 익숙하다는 듯 조용히 차에서 내려 주위를 비워줬다. 강현우는 그런 그녀를 보며 다소 짜증 섞인 어조로 물었다.“할 일 없어?”그 말투는 마치‘네가 이렇게 한가한 인간이었나?’같은 뉘앙스를 풍겼다. 하지만 윤하
윤하경은 순간적으로 그 사람을 떠올렸고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차분하게 답했다.“아뇨, 그냥 요즘 바빠서요.”전화기 너머, 그 남자는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이미 제가 드린 정보가 사실이라는 걸 확인하셨겠죠? 저는 지금 돈이 급합니다. 만약 윤 대표님이 이 거래를 원하지 않는다면... 저도 다른 길을 찾아야겠죠. 하지만 그게 당신이나 저, 우리 둘 모두에게 좋은 선택은 아닐 겁니다. 다만 저는 지금 너무 절박하거든요.”최근에 일어난 수많은 사건으로 인해, 윤하경은 이 남자의 존재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 다시 연락한 이상, 그냥 넘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그녀는 짧게 숨을 들이마신 후, 결정을 내렸다.“지금 시간 괜찮아요. 만나죠.”“좋아요. 30분 후, 글로벌 센터에서 봅시다.”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짧고 간결하게 약속을 잡으며 전화를 끊었다.윤하경은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지만 이내 빠르게 마음을 정리한 뒤 사무실로 향해 차 키를 챙겼다.그 모습을 본 소지연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불렀다.“조금 있다가 미팅 있는데 어디 가?“윤하경은 차 키를 돌리며 말했다.“잠깐 볼 일이 있어서 나갔다 올게. 미팅은 내가 돌아와서 다시 진행하자.”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덧붙였다.“그리고 오늘 점심, 다 같이 맛있는 거 시켜서 먹자. 오늘 오전에 강현우한테 제대로 까였잖아. 우리 팀 분위기도 살릴 겸.”소지연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메뉴는 내가 알아서 정할게.”한 시간 후, 글로벌 센터.윤하경이 약속한 카페에 도착했을 때 그 남자는 이미 와 있었다.이전과 달리 이번에는 온몸을 꽁꽁 싸매진 않았다. 선글라스를 쓰고 챙 넓은 모자를 눌러쓴 중년 남성, 그의 입가에는 길게 흉터가 나 있었다.윤하경은 우아하게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한 번 훑어본 뒤 카푸치노를 주문했다.그리고 곧바로 시선을 돌려 그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어떻게 부르면 될까요?“그 남자는 살짝 입술을 씹더니 귀찮다는
윤하경은 잠시 발걸음을 멈췄고 눈앞의 장면에 잠시 갈등했지만 결국 아무 일도 없었던 척 고개를 돌렸다.소지연은 당황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저 신인아라는 애, 강현우랑 무슨 사이야?”윤하경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몰라. 나도.”“그럼 너랑 강현우는...”“가자.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고.”윤하경은 짧게 말한 뒤 차로 발걸음을 옮겼다.그 모습을 보고 있던 강현우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민진혁에게 말했다.“신인아 데려다줘.”신인아는 고개를 들고 살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오빠는... 같이 안 가세요?”강현우는 그녀를 보며 차분하게 답했다.“괜찮아. 너 먼저 가. 시간 나면 갈게.”신인아는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럼 조심히 오세요.”그렇게 말하고는 민진혁에게 출발하라고 고개를 끄덕였다.윤하경이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려던 찰나, 갑자기 조수석 문이 열렸다.놀라서 발을 브레이크에 올린 윤하경이 고개를 돌리자, 강현우가 몸을 살짝 숙인 채 소지연에게 말했다.“미안. 윤하경한테 할 말이 좀 있어서.”소지연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차에서 내렸다.윤하경은 입술을 꾹 다물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현우 씨랑 저, 가는 길 다르잖아요.”명백한 거절의 뉘앙스를 담았지만 강현우는 개의치 않았다.그는 긴 다리를 자연스럽게 차 안으로 뻗고 앉더니 느긋하게 몸을 기대며 말했다.“운전해.”윤하경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저...”“아니면 내가 운전할까?”강현우가 고개를 기울이며 그녀를 바라봤다. 예전에 강현우가 몰았던 미친 듯한 속도가 생각나 윤하경은 말없이 시동을 걸었다.차가 조용히 주차장을 빠져나온 후, 강현우가 물었다.“신인아, 어떻게 알게 된 거야?”그 말투. 마치 자신이 신인아에게 일부러 접근이라도 한 것처럼 들렸고 윤하경은 속으로 혀를 찼다.“그 말, 제가 신인아한테 일부러 접근한 거라고 들리는데요?”강현우는 대꾸하지 않고 그저 창밖을 보
소녀는 말끝마다 볼이 희미하게 붉어졌다. 부끄러운 건지, 숨결 때문인지 얼굴이 희미하게 물들어 있었다.그제야 윤하경은 복잡한 생각을 털어내고 조용히 그녀를 엘리베이터 안으로 밀어 넣었고 소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정말 고맙습니다.”“별말씀을요.” 윤하경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나서도, 윤하경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멍하니 서 있었다.‘대체 저 애는 누구지? 송시안이 말했던, 강현우에게 중요한 여자라는 게... 설마?’“야, 너 왜 그래?”소지연이 옆에서 그녀 어깨를 툭 치며 말했고 윤하경은 고개를 저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아니야, 가자.”그렇게 다시 발걸음을 옮겼지만 윤하경의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하기만 했다.그런데 보석 매장 안에서 윤하경은 또다시 휠체어를 탄 소녀를 마주쳤다.진열대 앞에 앉은 그녀는 턱을 괴고 귀걸이들을 보고 있었고 표정은 어딘가 망설이고 있는 듯했다.윤하경은 모른 척하고 돌아서려 했지만 이번엔 신인아가 먼저 그녀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어머, 그 언니다! 또 보네요?”“그러게요.”윤하경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쇼핑하러 오신 거예요?”소녀는 여전히 밝은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그냥 좀 둘러보는 중이에요.” 윤하경이 대답하고는 소지연의 팔을 끌어 매장을 나가려 했지만 소녀는 다시 윤하경을 불러세웠다.“잠깐만요! 혹시 시간 되세요? 제가 얼마 전에 귀국해서 친구도 없고... 혹시 이 두 개 중에 어떤 커프스링크가 더 나은지 좀 봐주실 수 있을까요? 도저히 못 고르겠어요.”윤하경은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걸음을 멈췄다.하지만 그녀의 목에 걸린 곤륜 부적이 다시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윤하경은 결국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그때 소지연이 윤하경의 귀에 속삭였다.“너 원래 이렇게 남 일에 잘 끼어들었나?”윤하경은 못 들은 척하며 말했다.“어떤 두 개요?”신인아는 바로 점원에게 자신이 고른 두 가지를 꺼내달라고 했다.“이거랑 이거요.”윤하경은 커프스를 들여다
윤하경은 다시 한번 오건우가 보냈던 사진을 꺼내 봤다.흐릿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윤하경은 자조적으로 입꼬리를 살짝 비틀었다.‘내가 왜 이렇게 지질하게 굴지...’강현우와 자신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명분 없는 사이이고 떳떳할 것도, 묻고 따질 자격도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자신이 이렇게 사진 하나에 마음을 흔들리고 있다는 게 웃겼다.윤하경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휴대폰 화면을 꺼버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로 올라갔다.그런데 사무실에 도착한 순간, 그녀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배경빈 씨 오늘 안 나왔어?”윤하경은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우슬기를 바라봤고 우슬기는 책상에 기대앉아 어깨를 으쓱였다.“안 왔어요. 앞으로도 안 올 거 같은데요? 아까 어떤 남자가 와서 자기가 경빈 씨네 집 가사 도우미라며 대신 사직서 냈다더라고요.”“대표님, 경빈 씨 진짜 어디 대단한 집 도련님 아니죠?”윤하경은 우슬기의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잠시 바라보다,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신경 꺼.”그렇게 말은 했지만 책상에 앉아 커피잔을 집어 드는 순간, 윤하경 머릿속엔 어제 강현우가 툭 던졌던 질문이 스쳐 지나갔다.‘배경빈, 왜 자꾸 네 주변에 맴돌지?’강현우와 이 일이 무관할 리 없었다.하지만 한편으론 잘된 일이기도 했다. 배경빈이 나간 덕에 그녀의 사무실이 다시 조용해졌으니까 말이다.윤하경은 서류를 정리하며 정신을 다잡았고 겨우 집중하기 시작했을 무렵 오랜만에 소지연에게서 카톡이 왔다.[하경아, 오늘 시간 돼? 잠깐 얼굴 좀 보자.]지난번,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며 연락을 끊었던 소지연이었다.회사는 부하직원들에게 잠시 맡기고 있었다고 했지만 그 뒤로 소식이 없었기에 더는 그녀를 건드리지 않았다.이제야 겨우 마음을 추스른 듯했다. 윤하경은 반가운 마음에 흔쾌히 약속을 잡았고 근처 대형 쇼핑몰에서 만나기로 했다.카페에 도착했을 땐, 소지연이 먼저 와 있었다. 얼굴에 살짝 피곤기가 보였지만 화장은 또렷했고 입술에는 진한 레드 컬러가 눈에 띄
윤하경은 박소희와 다를 게 없이 놀랐다. 그녀 역시, 강현우가 다시 돌아올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강현우는 아무렇지 않게 윤하경의 허리를 감싸안은 채, 비죽 웃으며 박소희를 바라봤고 겉으론 웃고 있지만 눈빛만은 싸늘했다. 박소희는 그 눈빛에 순간 굳어버렸지만 이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하경 씨 말에 너무 화가 나서 잠깐 이성을 잃었어. 현우야, 그런 뜻은 아니었어. 나 진짜...”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러고는, 낮고 느린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다시 묻을게. 도대체 누가 누구 약혼자를 유혹했다는 거지?”박소희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윤하경 쪽을 힐끔 보더니 결국 강현우의 싸늘한 눈빛에 기가 죽은 듯 고개를 숙였다.“우리 곧 약혼하잖아. 약혼자로서 적어도 사람들 앞에서는 나한테 체면은 세워줘야 하는 거 아니야...?”강현우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그렇지? 근데 말이야...”“내가 언제 약혼했는데?”그 한마디는 전혀 준비되지 않은 폭탄처럼 박소희에게 직격했고 윤하경도 순간 숨을 멈췄다.그 말은, 눈앞에서 공개적으로 뺨이라도 맞은 듯한 충격을 안겨줬다.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이런 수모를 겪어본 적 없는 박소희는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누구도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없었는데 강현우만은 예외였다. 그리고 더 괴로운 건, 그런 그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현우야... 그건 네 어머님이랑 우리 아빠가...”“그래서?” 강현우는 가볍게 웃었다. “그럼 그 사람들이랑 따져. 나랑은 무슨 상관이야?”그 말에 박소희의 얼굴은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버렸고 윤하경은 강현우 품 안에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무슨 뜻이지? 그럼 진짜 약혼한 건 아니었던 거야? 그 곤륜 부적은?’윤하경의 시선이 무심코 박소희 쪽으로 옮겨졌고 그제야 깨달았다.박소희의 목에는 어젯밤 그 값비싼 곤륜 부적이 없었다.그녀의 성격상, 만약 강현우가 그걸 준 거라면 분명 자랑하듯 걸고 나왔을 텐데
윤하경은 아직 마음이 복잡해, 강현우가 탄 차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그런 그녀를 누군가가 부르자, 화들짝 놀라 돌아봤다.박소희를 보자 윤하경은 잠깐 당황한 표정이 스쳤지만 곧 웃으며 말했다.“소희 씨.”박소희는 턱을 살짝 들고 도도하게 물었다.“하경 씨, 시간 좀 있으세요? 아침이라도 대접하고 싶어서요.”“없어요.”윤하경은 단호하게 거절했고 박소희와는 굳이 엮이고 싶지 않았다.그런데 박소희는 물러서지 않았다.윤하경이 거절하자, 아예 그녀의 손목을 잡고 숲길 안쪽의 레스토랑으로 끌고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 박소희는 두 팔을 끼고 앉아 윤하경을 노골적으로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윤하경은 시계를 슬쩍 확인하곤 무표정하게 말했다.“하실 말씀 있으면 빨리하세요. 회사에 회의 있어서요.”박소희는 윤하경의 여유로운 태도에 불쾌감이 치밀었다. 분명히 자신은 정식 약혼자임에도, 눈앞의 여자는 전혀 죄책감도 없어 보였다.“참 뻔뻔하시네요.”박소희가 냉소를 머금고 말했다.“하경 씨는 부끄럽지도 않아요? 정식 약혼자가 있는 남자랑 엮여 있으면서.”윤하경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제가 왜 부끄러워해야 하죠?”늘 우아하던 박소희는 순간 이성을 잃었다. “윤하경! 너 윤씨 가문 딸 아니야? 경성에서 그 정도면 그럭저럭 이름 있는 가문인데 그런 여자가 감히 남의 약혼자랑 그렇게 엮여? 이런 자리에서 들키고도 창피한 줄도 몰라요? 양심 없어?”.아침 시간이라 사람이 많진 않았지만 커져가는 박소희의 목소리 때문에 레스토랑 안에 있던 직원들이 하나둘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고 다들 귀를 쫑긋 세우고 그쪽을 힐끔거렸다.윤하경은 그녀의 격앙된 모습을 지켜보다,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차분한 그녀의 태도는 분노에 휩싸인 박소희와 극명하게 대비됐다.원래부터 윤하경은, 누가 위에서 내려다보듯 가르치려 들면 질색이었다.더군다나 그녀의 오늘 하루는 애초에 좋지 않았고 지금 이 상황은 한 번쯤 터뜨릴 좋은 기회였다.“소희 씨.”윤하경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
윤하경은 조용히 입술을 다물었다가 다정하게 말했다.“현우 씨 바쁘시면 저 혼자 아침 먹을게요.”강현우는 그 말에 휴대폰을 거두며 그녀를 돌아봤다. 또렷하고 깊은 이목구비는 한 번 마주치면 쉽게 눈을 뗄 수 없는 인상이었다.“같이 먹기로 했잖아. 당연히 같이 먹어야지.”그는 단호하게 말한 뒤, 더 이상 휴대폰을 건드리지 않았다.윤하경은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고 사실 그녀는 그렇게까지 바라진 않았다.차는 숲길 끝에 도착했고 미리 연락이 되어 있었는지 둘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식탁 위에 아침이 한가득 차려져 있었고 여러 가지 다과와 차가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웠다.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강현우가 이렇게 신경 써서 아침 식사를 챙겨주는 상황이라면윤하경은 기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상하게도 입맛이 없었다.그래도 강현우가 옆에서 지켜보니 억지로라도 몇 입 먹었고 따뜻한 차가 목으로 넘어가자, 몸도 점점 따뜻해졌다.그런 둘의 모습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 지켜보고 있었다.안현주가 급히 옆방으로 뛰어들며 외쳤다.“소희야! 강현우한테 아침밥을 차릴 그럴 때 아니야.”조심스럽게 아침 식사를 도시락에 담고 있던 박소희의 손이 멈췄고 고개를 돌려 안현주를 흘겨봤다.“잔소리 좀 그만해. 너야말로 괜한 걱정은 하지 마. 회사 갈 때 내가 직접 들고 올라가면 되니까, 너는 밑에서 기다려.”안현주가 혀를 찼다.“너는 정식 약혼자랍시고 정성 다해서 도시락 싸고 있는데 지금 강현우랑 윤하경이랑 둘이서 다정하게 아침 먹고 있다니까?”안현주는 말하면서도 억울한 듯 코웃음을 쳤다.“진짜 강현우란 남자, 너 같은 사람 좋은 여자는 안 보이고 그 윤하경 같은 요상한 여자만 눈에 들어오나 봐.”박소희의 손이 살짝 떨렸다.“뭐라고?”안현주가 인상을 찌푸리며 되풀이했다.“네가 그렇게 마음 써주는 약혼자는 지금 윤하경이랑 사이좋게 조식 데이트 중이라고. 근데 너는 그 사람이 배고플까 봐 도시락까지 싸고 있고. 뭐, 아침 입맛 돋워줄 애피타이저는 이미 먹었을지
그 말을 끝으로 윤하경은 휴대폰 화면을 꺼버리고 조용히 욕실로 들어갔다.양치질을 하며 거울 속 자신의 멍한 얼굴을 바라보던 그녀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입안의 거품을 헹구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조용히 그녀를 안았고 보지 않아도 강현우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막 자라난 까칠한 수염이 그녀의 피부를 간질였고 윤하경은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다.그러나 강현우는 세면대 양옆에 팔을 짚어 그녀를 가둬버렸고 한 발짝도 도망갈 수 없는 거리였다.“왜, 어젯밤 내가 안 들어와서 화났어?”강현우는 손끝으로 윤하경의 콧등을 살짝 긁으며 말했다.“봐라, 또 이렇게 새침하게 굴고.”윤하경은 잠시 멈칫하다가 가볍게 웃어 보였다.“아니요, 안 화났어요.”강현우는 한쪽 눈썹을 살짝 올리며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윤하경은 그를 끌어안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현우 씨, 저 여기서 꽤 오래 지낸 것 같아요. 이제는 슬슬 나가서 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괜히 사진이라도 찍혀서 기사 나면 현우 씨 이미지에 안 좋잖아요.”강현우는 윤하경을 내려다보며 코웃음을 쳤다.“도망치고 싶은 거야?”그의 눈동자에 잠깐 스치는 날카로움이 그녀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고 윤하경은 그를 진정시키듯 그의 셔츠 단추를 매만지며 말랬다.“아니요, 진심으로 현우 씨 걱정해서 하는 말이에요. 강한 그룹 같은 대기업이면 주가에도 영향 줄 수 있는 문제니까요.”이 비슷한 말은 예전에도 한 적이 있었지만 오늘따라 그 말투에는 미묘한 날이 서 있었다.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내가 그런 걸 신경 쓰는 놈처럼 보여?”윤하경은 잠깐 손을 멈췄다가, 이내 한껏 순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현우 씨는 안 신경 쓰시더라도... 전 해야죠.”그 말에 강현우는 그녀의 턱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나지막이 묻는다.“진심이야?”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네.”강현우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
윤하경은 대답하지 않았다.그 모습을 본 강현우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왜, 마음에 안 들어?”윤하경은 눈썹을 살짝 모았다가, 속으로 맴도는 의문을 억누른 채 다시 환한 미소를 띠었다.“마음에 들어요.”강현우는 그녀의 말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또렷한 콧대 아래 옅은 미소가 스쳤고 그는 곧 민진혁에게 지시했다.“가자. 집으로.”그날 강현우는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침실로 들어간 그는 윤하경의 입술을 조심스레 물었다.윤하경은 살짝 그를 밀치고 그의 의아한 눈빛을 받으며 변명을 꺼냈다.“저기... 오늘 좀 더워서요. 샤워 좀 하고 올게요.”하지만 강현우는 그녀를 벽에 가두며 낮게 속삭였다.“난 안 덥던데.”그 말을 마치기 무섭게 다시 입을 맞췄고 윤하경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사실 강현우는 이런 쪽에 능숙했다. 지쳐도 어쩌면 즐길 수도 있는 관계, 적어도 몸만 놓고 보면 말이다.하지만 오늘은 왠지 모르게 거부감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할 새도 없이, 강현우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그녀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고 있었다.몸이 미세하게 떨릴 무렵, 갑자기 그의 휴대폰이 울렸고 진동 소리는 조용한 방 안에 유난히 크게 울렸다.윤하경은 조심스레 말했다.“전화 왔어요.”강현우는 이를 악물며 짜증 섞인 표정을 지었지만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했다.그런데 전화를 받지는 않고 오히려 윤하경의 입술에 짧은 키스를 남겼다.“얌전히 집에서 기다려. 금방 올게.”말투는 부드러웠고 어딘가 아이 달래듯 느껴졌다. 그 말에서 ‘집’이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 윤하경은 잠깐 멍해졌다.‘집?’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집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마음이 닿는 곳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임수연과 윤하연이 집에 들어온 이후 그곳은 더 이상 집이 아니었다.그런데 강현우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을 때, 이상하게도 가슴 한구석이 저릿했다.강현우가 나간 후, 윤하경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역시 강현우 같은
오건우는 그 남자가 다가오는 걸 보더니 더욱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하 대표님, 막 서울 오셨다고 들었는데요. 제가 소개 좀 드릴게요. 이쪽은 강현우 대표님이에요.”하 대표라는 남자는 생각보다 젠틀한 인상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강현우를 향해 손을 내밀며 정중히 웃었다.“반갑습니다. 평소 익히 들었습니다. 저는 하석호입니다. ”강현우는 무표정한 눈으로 하석호를 한번 쓱 훑어보고는, 그 손을 외면한 채 고개만 돌렸다.오건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이번엔 윤하경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리고 이쪽은 윤하경 씨입니다.”평소엔 권력자 곁에 있는 여자엔 별 관심 없는 하석호였지만 윤하경의 얼굴을 보자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윤하경 씨?”윤하경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우처럼 무시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니고 오건우와도 협업 중이었기에 말이다.“하 대표님, 반갑습니다.”말을 막 끝내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톡 건드렸다.“윤하경 씨, 혹시 예전에 모성에 가본 적 있으신가요?”모성은 국경 근처 외딴 도시였다.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가본 적 없어요.”하석호는 뭔가 더 묻고 싶은 듯했지만 강현우가 고개를 돌리며 그를 노려보듯 쳐다봤다.“하 대표님, 질문이 좀 많은 거 아닌가요?”하석호는 순간 당황한 듯했지만 금세 웃으며 넘겼다.“그러네요, 제가 좀 지나쳤나 봅니다.”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드디어 윤하경의 귀가 조용해졌지만 여전히 하 대표의 시선이 자기에게 꽂혀 있는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이윽고 본격적으로 경매가 시작됐고 초반엔 관심 가는 물건이 딱히 없었다. 그러다 한 쌍의 사파이어 귀걸이가 등장하자 강현우가 고개를 돌려 윤하경을 바라봤다.“어때, 마음에 들어?”강현우는 윤하경 같은 예쁜 여자는 당연히 장신구를 좋아할 거라 생각했지만 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그냥 그래요.”강현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지만 더 묻진 않았다.그때 사회자의 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