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주승엽은 잠시 멍해졌다.이런 대답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듯, 한동안 멍한 눈으로 윤하경을 바라봤다.윤하경은 그런 주승엽의 맑은 눈을 보다가, 괜히 자기 생각을 너무 세게 말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윤하경은 손을 들어 코끝을 살짝 문지르며 말했다.“승엽 씨 성격에 그런 일까지 할 사람은 아니란 건 저도 알아요. 다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하나예요. 누가 잘못했는지는 분명한데, 잘못한 사람이 책임져야지 승엽 씨가 모든 걸 다 끌어안고 있을 필요는 없다는 거예요.”윤하경 눈에는 주승엽이 아직도 깊은 죄책감을 안고 있는 게 뻔히 보였다.아마도 친어머니의 죽음 때문일 것이다.겉으로는 화려한 재벌 가문이라도, 한 꺼풀만 벗겨 보면 안을 들여다보면 속은 하나같이 추하고 엉망진창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주씨 가문이라고 해서 다를 리 없었고 윤하경은 전혀 놀랍지 않았다.주승엽은 윤하경의 말을 듣고 한동안 그 자리에 굳어 선 채, 아무 반응도 하지 못했다.이렇게 많은 세월 동안 주승엽은 어머니의 죽음을 줄곧 자신의 탓으로만 돌려 왔다.그날 이지아를 집에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그날 그 방문을 열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어머니는 살아 계셨을 거라고 여겼다.주승엽은 이를 악물고 턱을 굳게 다물었다. 온몸에서 기운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어깨가 축 처져 보였다.윤하경은 주승엽이 지금 많이 힘들다는 걸 느끼고, 잠시 말없이 서 있다가 다가가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다른 생각을 너무 많이 하지 말아요. 승엽 씨는 스스로를 너무 몰아붙이는 것 같아요.”윤하경이 보기에는 주승엽은 아마 어릴 때부터 철저히 보호받으며 자란 사람일 것이다.이런 재벌 가문의 한가운데서 자라면서도 주승엽처럼 착한 성정을 유지하는 사람은 드물었다.돈과 권력이 모든 것 위에 있는 자리에서 자라다 보면, 다른 사람을 벌레처럼 여기는 게 더 자연스러울 수도 있었다.그런데도 주승엽은 그 사건이 터진 뒤 도망치듯 집을 떠나 스스로를 벌했고, 아버지가 병들어 쓰러진 지금조차, 친아들에게 당당
“승엽아.”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리자 윤하경과 주승엽이 동시에 뒤를 돌아봤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두 사람을 원망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이지아가 서 있었다.처음 봤을 때와 같은 치마 차림에 어깨에는 숄만 하나 더 둘렀고 정원 한가운데 서서 두 사람을 향해 묘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승엽아, 넌 윤하경 씨랑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니?”주승엽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우리가 어디에 있든 일일이 보고라도 해야 합니까?”이지아의 얼굴에는 금세 상처받은 기색이 스쳤다.“승엽아, 넌 나한테 꼭 그렇게 말해야 하니? 난 그냥 물어본 것뿐이야.”윤하경은 그 모습을 보다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둘의 사이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단순한 모자 관계만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게다가 아까 주민성이 했던 말까지 떠올리자, 머릿속에는 순식간에 재벌 가문의 막장 드라마 한 편이 쫙 그려졌다.윤하경은 조용히 한발 물러섰다.하지만 주승엽이 그 기척을 눈치채고 손을 뻗어 윤하경을 자기 쪽으로 잡아끌었다. 그러더니 윤하경의 허리를 감싸안고는 이지아 앞까지 걸어 나갔다.“어머니, 저랑 제 약혼자가 어떻게 지내든 상관하지 마세요. 앞으로는 본인 신분만 기억하시면 됩니다.”딱 잘라 말한 주승엽은 더 이상 이지아에게 말할 틈을 주지 않고 윤하경을 이끌고 정원을 벗어났다.허리에 주승엽의 팔이 둘러져 있으니 윤하경은 조금 불편해 몸을 살짝 비키려 했다.그러자 주승엽의 손이 오히려 더 단단히 조여졌다.“미안해요.”주승엽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이번에도 저 좀 도와줬다고 생각해 주세요.”윤하경은 그대로 참고 걸음을 맞췄다.그다음 순간, 뒤쪽에서 이지아의 날카로운 외침이 터져 나왔다.“승엽아! 윤하경!”목소리에는 분노와 함께 이상한 떨림과 거의 절규에 가까운 절망이 섞여 있었다.윤하경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생각했다.‘지금 내가 정말 막장 드라마 한가운데에 들어와 있는 건가.’복도를 한 번 꺾자, 등에 와 닿던 이지아의 뜨거운 시선이 비로소 사라
여기 올 때만 해도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다.어떻게 말 한마디 하다가 갑자기 결혼 이야기까지 나오는 걸까.주승엽도 아버지가 뜬금없이 결혼을 꺼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눈치였다. 잠시 멍해 있다가 고개를 돌리자, 어리둥절해하는 윤하경과 눈이 마주쳤다.주승엽이 이마를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아버지, 갑자기 결혼이라니요?”주민성이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승엽아, 예전에 그 일은 내가 잘못했다는 거 나도 알아. 그래도 네가 이렇게 돌아와 준 것만으로도 고마워. 하지만 네가 네 삶의 행복을 찾아가는 모습은 한 번 보고 가야지, 그래야 아버지도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구나.”“콜록, 콜록...”말을 쏟아내던 주민성은 다시 심하게 기침을 했다.주승엽의 눈가에는 잠시 안쓰러움이 스쳤지만, 곧 차가워졌다.“그러니까 제가 결혼만 하면 그게 다 보상이라는 거예요? 예전에 제가 받은 상처들은 전부 없던 일이 되는 거고요?”평소 항상 온화해 보이던 주승엽의 목소리에는 냉기가 서렸다.윤하경은 그 모습을 처음 보며 마음이 조금 먹먹해졌다.주민성이 계속 기침하는 데도 가만히 있자니, 이대로 두는 것은 너무 냉정한 일 같았다.윤하경은 일어나 주승엽의 팔을 살짝 잡았다.“조금만 진정하세요.”그러고는 주민성 쪽으로 돌아서며 말했다.“회장님, 저랑 승엽 씨의 관계가 아직 그렇게 빨리 결혼까지 갈 만큼 깊지는 않아요. 지금은 억지로 서두르는 것이 오히려 좋지 않을 것 같아요.”말이 끝나기도 전에,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주승엽은 그대로 방을 나가 버렸다.“회장님, 조금만 진정해 보세요.”윤하경은 주민성에게 말을 덧붙인 뒤, 그대로 주승엽의 뒤를 따라 나갔다.주씨 가문 저택은 절대 작지 않았다. 넓은 장원 안에는 다섯 채의 별채가 들어서 있었고, 한가운데의 본채에 주민성이 머물고 있었으며 나머지 네 채가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본채를 나와 서쪽으로 조금만 가면 넓은 정원이 펼쳐졌고, 주승엽은 그 정원을 향해 달려갔다.윤하경이 정원
문 앞에 다다르자, 방 안에서 거친 기침 소리가 먼저 들려왔다.기침 소리가 심상치 않게 들리자, 윤하경은 옆에 선 주승엽을 곁눈질로 한 번 바라봤다.그러자 주승엽이 슬쩍 손을 들어 올리며 팔을 잡으라는 듯한 눈짓을 보냈다.윤하경은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손을 뻗어 주승엽의 팔짱을 가볍게 끼고, 함께 병상 앞으로 걸어갔다.“아버지.”주승엽이 낮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그제야 주민성은 천천히 눈을 떴다.그리고 윤하경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흐릿하던 눈빛이 아주 잠깐 맑아졌다.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이분이 바로 승엽이가 말하던 윤하경 씨겠구나?”“처음 뵙겠습니다. 주 회장님.”윤하경이 공손하게 인사했다.이번 일은 윤하경이 먼저 도와주겠다고 한 일이었고, 그렇다면 최대한 예를 갖추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다.윤하경은 침착한 표정으로 가볍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드렸다.주민성은 곧바로 옆에 서 있던 가사도우미를 불렀다.“하경 씨가 앉을 수 있게 의자 하나 가져다드려.”그러고는 다시 윤하경을 향해 미안하다는 듯 웃어 보였다.“하경 씨, 내가 지금 몸이 이 모양이라 직접 일어나서 맞이도 못 하고, 이렇게 침대 곁에서 말씀 나눌 수밖에 없구먼. 조금 불편해도 이해해 주겠나?”뜻밖의 낮은 자세에 윤하경은 살짝 놀랐다.이토록 실력 있는 주씨 가문에서 집안의 실권을 쥔 사람이 병들었다고 해도 이 정도로 몸을 낮춰 후배에게 말하는 경우는 흔치 않을 터였다.궁금한 마음이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그 속마음이 얼굴에 드러나게 둘 생각은 없었다.윤하경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제가 이렇게 회장님과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것만으로도 영광인데요. 그런 말씀은 오히려 제가 더 죄송해져요.”마침 그때, 가사도우미가 의자를 가져와 병상 옆에 놓았다.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에 앉았고, 담담한 눈빛으로 주민성을 마주 보았다.주민성은 윤하경을 바라보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내 평생 소원이 하나 있다면 승엽이
주승엽의 집은 해성에 있었다.윤하경이 처음 주승엽을 알게 되었을 때, 그저 집안 형편이 꽤 넉넉한가 보다 정도로만 생각했을 뿐이었다.그런데 막상 해성에 도착해 보니, 눈앞에 펼쳐진 호화로운 저택이 윤하경을 제대로 놀라게 했다.“주승엽 씨 집은...”윤하경이 옆얼굴을 흘끗 바라보며 물었다.“이렇게 크다고는 한 번도 말씀하신 적이 없으셨는데요?”해성 역시 경성과 마찬가지로, 땅값이 하늘을 찌르는 도시였다.주승엽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어 보였다.“집이 크면 뭐해요. 저랑은 별 상관도 없는데요. 저는 그냥 저 혼자일 뿐입니다. 아버지께서 이렇게 위독하지 않으셨으면, 아마 저는 이번에도 안 왔을 거예요.”주승엽이 말을 이을 때 눈빛 깊은 곳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윤하경은 그 감정이 정확히 무엇인지 짐작이 되지 않았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큰 가문에서 사람들 사이 관계는 한 번 꼬이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복잡해지는 법이었다.듣다 보면 사람 마음만 괜히 더 피곤해질 뿐이었다.윤하경은 오늘 그저 하루 동안, 주승엽의 약혼자 역할을 대신해 주러 온 것뿐이었다.굳이 그 이상의 일까지 알고 싶지는 않았다.주민성 회장이 머무는 본채는 저택의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있었다.윤하경과 주승엽이 안으로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몸에 꼭 맞는 치파오를 입고 서 있는 젊은 여자였다.우아하게 잘록한 허리를 강조한 자태로 서 있는 그 사람은, 바로 주승엽의 새어머니였다.윤하경은 예전에 한 번 얼굴을 본 적이 있었다.첫 만남 때의 인상이 좋지는 않았기 때문에 오늘 인사도 그저 담담하게 고개만 살짝 숙였다.“아주머니.”그런데 그 한마디가, 마치 이지아의 신경을 건드리는 방아쇠라도 된 것 같았다.이지아의 표정이 순간 차갑게 굳었다.“지금 내가 나이 많다고 비꼬는 거니?”윤하경은 영문을 알 수 없어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매번 느끼지만 이지아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사람 같았다.“주승엽 씨 어머니시잖아요. 제가 아주머니라
잠시 침묵하던 윤하경이 고개를 끄덕였다.“언제 가면 돼요? 하민이부터 먼저 잘 맡겨 놔야 해서요.”윤하경의 말이 끝나자 주승엽은 바로 표정이 누그러지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하민이도 괜찮으면 같이 데리고 와요. 저는 상관없어요.”“아니에요.”윤하경은 굳이 윤하민을 데리고 장거리 이동을 하고 싶지 않았다.“하루만 다녀오는 걸로 해요. 오전에 갔다가 오후에 돌아올 수 있으면 좋겠어요.”계산해 보니 그렇게만 맞추면 충분히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럼 좋죠.”주승엽이 웃으며 말했다.“내일 아침 일찍 제가 데리러 올게요.”마침 그 말을 끝낼 즈음, 차는 윤하경이 사는 저택 앞에 멈춰 섰다.주승엽이 내려서 돌아가려 하자, 윤하경이 뒤돌아보며 말했다.“차는 두고 가세요.”주승엽이 순간 멈칫하자, 윤하경이 웃으며 덧붙였다.“내일 아침에 저 데리러 오셔야 하잖아요.”이곳은 시내 중심에서도 좀 벗어난 곳이라 대중교통이나 택시를 잡기도 불편했다.그 말을 듣고서야 주승엽이 미소를 보였다.“그렇네요. 알겠습니다.”집 안으로 들어갔을 때는, 이미 윤하민이 곤히 잠든 뒤였다.윤하경은 침대 곁에 앉아 한동안 윤하민만 바라보았다.작은 입술을 살짝 내밀고 자는 모습이 어찌나 평온한지 괜스레 마음이 짠해졌다.낮에는 동그랗게 빛나던 눈동자가 고요히 감겨 있으니, 훨씬 얌전하고 차분해 보였다.윤하경은 내일 또 윤하민을 집에 혼자 남겨 두고 하루를 비워야 한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쓰렸다.윤하경은 욕실에 들어가 씻고 나온 뒤, 잠든 윤하민을 꼭 끌어안고 그대로 잠에 들었다.다행히도 윤하민은 밤새도록 깊이 잠들어 있었고, 윤하경도 윤하민을 품에 안은 채로 다음 날 아침, 방숙희가 문을 두드릴 때까지 한 번도 깨지 않았다.“아가씨, 주승엽 씨가 오셨어요. 친구분이라고 하시네요.”“네, 지금 일어날게요.”윤하경이 느릿하게 눈을 뜨며 말했다.옆에 있던 윤하민도 함께 깨어나더니 윤하경에게 달라붙어 칭얼거렸다.“엄마, 조금만 더 자면 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