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한 생각하지 말고 내가 돌아오면 좋은 선물을 준비해 줄게.”“선물?”윤하경은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강현우가 주는 ‘선물’이라니 솔직히 그가 주는 건 늘 선물이라기보다 놀람에 가까웠다.그렇지만 굳이 태클을 걸지는 않았고 잠시 머뭇거리다가도, 결국 조용히 강현우 품에 안기며 대답했다.“알겠어요.”윤하경은 눈을 감고 그날 하루의 혼란과 피로 속에 스르르 잠이 들었다.그러다 한밤중, 악몽에 시달리다 깨어났다. 꿈속에서 강현우는 며칠 전 이명한의 다리를 부러뜨린 그 야구방망이를 들고 차갑게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신은 바닥에 쓰러져 온몸이 굳어 있었고 강현우의 표정에는 어둠과 섬뜩한 미소만이 가득했다.“윤하경, 넌 참 고집불통이야. 난 배신을 제일 싫어해.”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현우는 야구방망이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극도의 공포감에 숨이 턱 막혀버려, 윤하경은 정신이 번쩍 들어 눈을 떴으며 심장이 미친 듯 뛰었고 당장이라도 달아나고 싶을 만큼 그 두려움이 생생했다.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이내 자신이 그저 꿈을 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휴...”가볍게 한숨을 내쉰 뒤, 옆을 돌아본 윤하경은 강현우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남자는 숨소리가 거칠었고 윤하경이 조심스럽게 침대 옆 조명을 켜자, 어둑한 불빛 아래로 강현우의 미간이 심하게 찌푸려져 있는 게 보였다.강현우는 평소 잠귀가 밝아서 자신이 이 정도로 움직이면 금세 깨곤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현우 씨.”조심스레 불러봤지만 대답이 없었다. 결국 윤하경은 손을 뻗어 강현우를 흔들어보려 했지만 손끝이 그의 피부에 닿는 순간 본능적으로 움찔하며 손을 뗐다.강현우의 몸이 너무 뜨거웠고 살에 닿은 손끝이 화끈거릴 정도였다.“일어나 보세요.”불안한 마음에 다시 불렀지만 강현우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고 이마에 손을 올려보니 역시나 심하게 열이 올랐다.“혹시 상처에 감염이 된 건가?”윤하경은 강현우의 붕대로 감긴 팔을 바라보았더니 흰 거즈 사이로 핏자국이
윤하경은 고개를 들어 강현우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봤다.“왜요? 아까 저더러 옷 벗겨달라고 하셨잖아요?”조심스럽게 물었지만 강현우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만 띤 채 대답했다.“내일이면 나 경성으로 돌아가.”강현우가 느닷없이 그렇게 말하자, 윤하경은 순간 얼어붙었다.“정말요?”입에서 튀어나온 소리가 본인도 모르게 들떴던 탓에 자신도 당황스러웠다.역시나 강현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천천히 윤하경을 바라봤다.“내가 간다니까, 그렇게 좋은 거야?”‘당연하죠!’속으로는 그렇게 외치고 싶었지만 윤하경은 차마 그렇게 말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방금 다치신 분이 먼 길까지 가시는 게 걱정돼서요.”강현우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신경 써주는 것처럼 굴긴. 그럼 나랑 같이 갈래?”“네?”윤하경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당황해 잠시 멈칫했다.“가기 싫어?”강현우가 다시 물었다. 그 깊은 눈동자에는 별다른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너무나도 강렬한 시선이 윤하경을 꿰뚫고 들어왔고 그 시선에 괜스레 심장이 두근거렸다.잠깐 생각하던 윤하경은 조심스럽게 답했다.“저도 가고 싶어요. 그런데... 요즘 외할아버지께서 건강이 좀 안 좋으셔서....”윤하경은 말을 흐리며 강현우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런데 그는 입꼬리에 알 수 없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그래?”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네.”“좋아. 그럼 너는 여기서 얌전히 나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강현우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덧붙였다.“그리고 이상한 친구들이랑 커피 마시러 다니지 마.”윤하경은 마지막 단추를 풀던 손이 순간 움찔하며 멈췄다.‘혹시 무슨 걸 알아챈 건가? 아니면 누가 자기 움직임을 감시하고 있는 걸까?’이런 의심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혹시 더 무슨 말을 할까 싶었는데 강현우는 어느새 일어나 욕실로 걸어가고 있었다.욕실 문 앞에 멈춰서서 아직 멍하니 서 있는 윤하경을 돌아봤다.“거기서 멀뚱히 뭐 하고 있어
밖으로 나오니 강현우는 이미 차에 올라타 있었고 윤하경이 반쯤 열린 창문 너머로 차 안을 들여다보니 안에는 연기가 자욱했다.아마 강현우가 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양이었다.윤하경이 다가가자, 강현우가 연기를 내뱉으며 창밖에 서 있는 그녀를 한번 쳐다봤다.“타.”윤하경은 잠깐 입술을 깨물었지만 조용히 차에 올라탔다.차에 타자마자 묘하게 어지러운 담배 냄새와 강현우 특유의 차가운 향기, 그리고 희미한 피 냄새가 섞여 코끝을 자극했다. 유쾌한 향기는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강하게 침투해 오는 느낌이었다.윤하경은 잠시 숨이 막히는 듯했으나, 이내 강현우를 한번 슬쩍 바라봤더니 차가운 이목구비에 어딘가 힘겨워 보이는 표정이었다. 다친 몸에 담배까지, 차마 하지 말라는 말이 나오려다 멈췄다.바로 그때, 민진혁이 조수석 문을 열고 들어왔다.“대표님, 안에 일은 다 정리됐습니다.”강현우는 특별한 표정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가자.”짧게 말하고는 의자에 몸을 깊이 기대며 눈을 감았다.그 동작이 너무 빨라서 윤하경은 그가 혹시 실신한 건 아닐까 싶어 조심스럽게 바라봤다. 하지만 곧, 강현우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는 걸 보고 그제야 이제야 정말로 ‘부상자’처럼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는 마치 고통을 전혀 느끼지 않는 사람 같았다.윤하경은 그 생각을 잠시 하다가, 조용히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고 머릿속에는 조금 전 이명한의 처참한 모습이 계속 맴돌았다. 강현우가 굳이 자신을 그 자리에 데려간 건, 분명 일종의 경고였다.차는 곧 강현우가 머무는 별장 앞에 도착했다. 강현우는 눈을 떴고 아무 말 없이 먼저 차에서 내렸다.윤하경은 바로 내리지 않고 잠깐 망설였다. 강현우가 멀리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서야 민진혁이 뒤를 돌아봤다.“하경 씨, 내려주세요.”윤하경은 그의 눈치를 보며 가볍게 기침을 했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저기... 현우 씨, 저한테... 정말 아무 일도 안 하겠죠?”강현우는 늘 표정이 무심하지만 그가 하는 일은
“이렇게까지 사람을 몰아붙이면 너도 오래 못 갈 거야.”이명한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윤하경이 소리에 이끌려 고개를 돌리자, 피투성이가 된 이명한이 천장에 매달려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지난번 요트에서 봤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지금의 이명한은 완전히 만신창이였다.온몸이 피투성이였고 강현우보다도 훨씬 심하게 다친 듯 보였지만 목소리만은 또렷해서 아무리 심하게 다쳤어도 당장 죽을 것 같진 않았다.강현우는 그런 이명한의 말을 듣고 입꼬리를 올렸고 장난기 섞인 미소였지만 그 안에 담긴 기운은 오히려 더 섬뜩했다.그가 손짓하자 민진혁이 바로 알아차리고 이명한을 천장에서 내려놓았다.강현우는 민진혁에게 손을 내밀었고 민진혁은 준비된 듯 곧장 그에게 야구방망이를 건넸다.“이제 네 목숨이 얼마나 질긴지, 직접 확인해 봐야지.”강현우의 목소리는 원래도 낮고 매력적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섬뜩함마저 느껴졌다.그는 바닥에 주저앉은 이명한 앞에 다가가,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그래도 혹시 모르지, 네가 여기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면 봐줄 수도 있고.”이명한은 갑자기 표정이 바뀌더니 방금 전까지 욕설을 퍼붓던 입으로 간절하게 사정하기 시작했다.“제발, 강 대표님... 잘못했어요. 제가 다른 사람이랑 짜고 대표님 해치려고 한 거 정말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살려주세요, 네? 제발요...”윤하경은 조용히 한숨을 쉬며 강현우가 절대 이명한 같은 사람을 용서하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강현우는 누구에게도 원한을 남기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자신에게도 한 번 눈 밖에 나면 끝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강현우는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 이명한의 총상 자국이 있는 다리를 힘껏 밟았다.이명한은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혔다.“쉿.”강현우는 다정하게 손가락으로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했다. 그러자 이명한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고통에 몸을 떨었다.“왜 이러세요? 아까는 살려준다면서...”강현우는 미소를 머금
강현우는 낮은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 목소리가 크진 않았지만 반박할 수 없는 기운이 담겨 있었고 윤하경은 잠시 말없이 입술을 눌렀다.바로 그때 민진혁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대표님, 이명한은 어떻게 할까요?”이명한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윤하경은 저도 모르게 민진혁을 바라봤다.지난번 유람선에서 만났던 바로 그 남자였다. 총에 맞아 바다에 떨어진 걸로 끝난 줄 알았는데 아직 살아 있었다니 놀라움과 불길함이 동시에 밀려왔다.더구나 이 먼 곳, 모성까지 와 있다니 정말 예상 밖이었다.강현우는 윤하경의 시선을 느끼고는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어떻게 처리해야겠어?”그는 천천히 재킷 단추를 잠그면서 다시 물었다.“도망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민진혁이 눈썹을 살짝 올리고 대답했다.“이런 배신자는 원래 손발을 부러뜨려 강에 던지는 게 우리 방식이죠. 살아남으면 그게 그 사람 운이고요.”윤하경은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두 사람이 오가는 말이 꼭 이명한만 두고 하는 이야기 같지 않았다. 마치 자신까지 포함되어 있는 듯한 차가움이 등줄기를 타고 내렸다.이때 강현우가 짧게 웃었다.“그래, 평소대로 처리해.”그리고 윤하경을 바라보며 덤덤하게 물었다.“직접 구경할래?”그의 표정은 냉정하고 입가에 머금은 미소조차 섬뜩하게 느껴졌고 윤하경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아, 아니에요. 저는 괜찮아요.”이런 잔인한 광경은 차마 보고 싶지 않았다.강현우는 혀를 차며 윤하경이 하얗게 질린 얼굴을 바라봤고 장난스러운 듯, 입꼬리를 더 올리며 다가오더니 가볍게 윤하경의 턱을 잡고 낮게 웃었다.“이런 구경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나중에 아쉬워도 몰라.”그가 눈짓을 하자, 민진혁이 바로 눈치를 채고 말했다.“차 준비하겠습니다.”민진혁이 나가고 강현우는 다친 팔이 아닌 반대 손으로 윤하경의 어깨를 감싸며 문을 나섰다. 회관 문 앞에는 이미 민진혁이 차를 대기시키고 있었다.강현우가 차 앞에 서자, 윤하경은 잠깐 망설이다가 결국
윤하경이 아무 말 없이 서 있자, 강현우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불렀다.“여기 와서 총알 좀 빼줘.”또 총알이었다. 윤하경은 손에 든 가방끈을 꼭 쥐었고 예쁘게 정돈된 두 눈썹이 본능적으로 잔뜩 찌푸려졌다.“저... 그냥 의사 선생님이 하시는 게 어떨까요?”예전에 이런 일을 해본 적이 있지만 그때를 떠올릴 때마다 심장이 조여 왔다. 살 속에 손을 넣어 총알을 꺼내는 그 감각은, 보는 것도 만지는 것도 매번 너무 힘들었다.하지만 강현우는 원래 인내심이 없는 사람이었고 윤하경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얼굴을 찌푸렸다.윤하경은 상황을 눈치채고 곧장 의약 상자에서 집게와 소독 도구들을 꺼냈다.익숙하게 움직였지만 오랜만이라 마음은 여전히 불안했다.그녀가 제대로 준비하자 강현우는 조금 눈을 감으며 한숨을 내쉬었다.윤하경은 가까이 다가가 가위로 그의 셔츠 소매와 임시로 감아둔 붕대를 조심스레 잘랐다. 그러다 어느 순간, 무슨 실수를 한 건지, 강현우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윤하경의 손이 순간 멈췄고 강현우를 불안하게 올려다보며 작게 중얼거렸다.“죄송해요... 저, 실수했어요.”식은땀으로 젖은 강현우의 이마와 굳게 다문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자신이 아무리 해봤다지만 전문의도 아닌데 시간이 흐를수록 손이 떨렸다.강현우는 눈도 뜨지 않은 채, 낮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너무 오래 걸리면 피만 더 많이 나올 거야.”윤하경은 그 말에 입술을 살짝 깨물고 온 신경을 상처에 집중했다. 진한 피 냄새와 벌어진 상처가 보는 것만으로도 어지러웠지만 이제는 물러설 수도 없었다.집게를 천천히 상처 속으로 넣는 순간, 강현우가 날카롭게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윤하경은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철저히 집중해서 금속에 닿는 느낌을 느꼈다.손끝에 단단한 무언가가 닿자, 조심스럽게 집게를 빼내어 총알을 꺼냈고 본래 황금빛이던 총알이 이미 피로 물들어 있었다.윤하경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마치 힘이 다 빠진 사람처럼 강현우 옆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으며 숨을 거칠게 몰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