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님, 그 밤 기억나시죠

선배님, 그 밤 기억나시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2
By:  뽁뽁이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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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장 마지막 밤, 이름도 묻지 않은 남자와 하룻밤을 보냈다. 후회는 없었다. 다시 볼 일도 없으니까. 월요일. 그 남자가 우리 팀 신입으로 나타났다. "좋은 아침입니다, 선배님." 윤재하, 26세. 능글거리고, 눈치 빠르고, 일도 잘하고, 하필이면 내 스타일을 너무 정확히 안다. 마치 처음이 아닌 것처럼. 숨기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숨길수록 더 가까이 왔고, 나는 밀어낼수록 더 신경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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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화 - 바에서
바 안은 적당히 어두웠고, 지안은 그런 조명을 대체로 신뢰하지 않았다. 피곤한 티가 덜 나게 해주고, 괜찮지 않은 밤에도 괜찮은 척할 구실을 줬다. 오늘은 그 구실이 필요했다. 클라이언트와 저녁을 세 시간 넘게 붙어 있었고, 휴대폰에는 월요일 오전 회의 일정이 벌써 두 개나 들어와 있었다."독한 걸로 주세요."바텐더가 잠깐 지안을 봤다가 잔을 골랐다. 설명이 더 필요 없는 주문이 제일 좋았다. 지안은 의자에 반쯤 기대 앉아 립을 한 번 눌러 발랐다. 거울은 보지 않았다. 안 봐도 알았다. 멀쩡한 쪽에 가까울 거다. 오지안은 그런 데 강했다. 그게 장점이었고, 가끔은 지겨웠다."오늘 일 망했어요?"옆에서 걸린 목소리에 지안이 고개를 돌렸다.남자는 웃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눈매가 먼저 풀려 있었다. 셔츠 단추를 하나 풀어 둔 채 재킷은 의자 등받이에 걸쳐 두었고, 얼굴은 어려 보였는데 시선은 아니었다."멀쩡해 보여서 더 망한 쪽인가 했죠."지안이 잔을 받으며 되물었다."초면에 그런 말을 자주 해요?""반응 좋은 사람한테만요.""저 아직 반응 안 했는데.""방금 하셨잖아요."지안은 잔을 들었다. 유리 벽면이 차가웠다. 한 모금 넘기자 목 안쪽이 뜨겁게 쓸렸다. 나쁘지 않았다. 옆자리 남자는 잠깐 지안을 봤다. 그 시선이 거슬리지 않았다. 직업이 뭐냐, 어디 사람이냐, 혼자 왔냐. 그런 순서부터 밟는 남자들이 있었다. 지안은 그런 얼굴을 질릴 만큼 봤다."그쪽은요." 지안이 잔을 내려놓았다. "오늘 일 망했어요?""아뇨. 잘 끝났어요.""그럼 왜 여기 있어요.""잘 끝난 날도 술은 마시거든요.""건강하네요."그제야 웃었다. 짧게, 하지만 제대로."지금 칭찬하신 거예요?""네. 좀 아깝긴 한데."대답이 오가는 속도가 괜찮았다. 설명이 길어지지 않았고, 서로 한 박자씩만 더 내줬다. 지안은 그게 마음에 들었다. 마음에 든다는 사실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출장 마지막 밤에 그 정도 이율배반은 허용할 수 있었다.두 번째 잔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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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화 - 이름 없이
"지금 내려도 돼요." 그가 말했다."내릴 생각 없어요.""다행이네요.""좋아하긴 일러요.""좋아한다는 말 안 했는데."지안이 픽 웃었다. 택시 창에 비친 자기 입꼬리가 생각보다 풀려 있었다. 남자의 손등이 이번엔 정말로 스쳤다. 아주 짧게. 피할 수 있었는데 지안은 피하지 않았다. 대신 다리를 꼬려다 말았다. 그 어정쩡한 멈춤이 대답이 된다는 걸, 둘 다 알아버린 채였다.***호텔 방 문이 닫히자 둘 다 바로 키스하지는 않았다. 그게 더 질이 나빴다.지안은 카드키를 콘솔 위에 내려놓고 돌아섰다. 남자는 문 앞에 기대 선 채 지안을 보고 있었다. 객실 조명은 더 솔직했다. 그럼에도 괜찮았다. 아니, 그쪽이 더 괜찮았다."지금이라도 물어볼래요?" 지안이 물었다. "이름.""말해 줄 거예요?""아뇨.""그럼 굳이."지안이 먼저 웃었다. 그 웃음이 끝나기도 전에 남자가 다가왔다. 저렇게 기다리는 게 예의인 건지, 잔인한 건지 잠깐 헷갈렸다. 지안이 그의 셔츠 앞섶을 잡아당겼다. 그제야 키스가 붙었다. 처음은 생각보다 느렸고, 두 번째부터는 아니었다.입술이 겹칠 때마다 술 냄새보다 체온이 먼저 밀려들었다. 남자의 손이 지안의 허리를 짚었다가, 허락을 묻듯 아주 잠깐 멈췄다. 지안은 대답 대신 그의 어깨를 밀어 침대 쪽으로 걸음을 옮기게 했다. 구두가 카펫 위로 둔하게 스쳤고, 코트가 바닥에 떨어졌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셔츠 단추가 빠르게 풀렸다."성격 급하시네." 남자가 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그 말투가 거슬렸어야 했다. 거슬리지 않아서 문제였다."실망했어요?""전혀."대답 끝에 다시 입술이 붙었다. 이번엔 더 깊었다. 지안은 그의 목을 짚고 각도를 바꿨다. 혀끝이 닿을 때마다 목덜미가 먼저 뜨거워졌다. 심장이 뛰었다는 식의 뻔한 자각보다, 블라우스 단추를 푸는 자기 손이 평소보다 서툴러졌다는 사실이 먼저 들어왔다.남자가 손등으로 지안의 옆구리를 쓸어내리자 짧은 숨이 새었다. 그가 그 소리를 들은 표정을 했다. 지안은 괜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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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화 - 진한 립
월요일은 왔다. 지나치게 성실하게.알람 세 개를 다 끄고, 샤워를 두 번 하고, 진한 립을 평소보다 한 번 더 눌러 발라도 토요일 새벽의 체온은 안 가셨다. 지안은 그 사실이 제일 짜증났다. 이름도 묻지 않았고, 번호도 남기지 않고, 다시 볼 일도 없게 끝낸 밤이었다. 그러면 끝이어야 했다. 주말 내내 침구를 갈고, 출장 캐리어를 비우고, 밀린 메일을 처리하면서도 자꾸 호텔 복도 조명 같은 게 떠오르는 건 규칙 위반이었다.그래도 출근은 출근이었다. 애드리프트 사무실 유리문이 열리고 익숙한 냉기가 목덜미를 스쳤을 때, 지안은 거의 안심했다. 회사는 대체로 사람을 현실로 끌어내리는 데 능했다. 월요일 아침부터 메일은 열다섯 통이 쌓여 있었고, 오늘 오전 회의는 두 개였고, 클라이언트는 주말이 끝났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빨리 받아들이는 종류의 인간들이었다."야."서연이 옆자리 파티션 너머로 얼굴을 내밀었다. 안경 너머 눈이 대놓고 사람 상태를 훑고 있었다."왜 그렇게 봐.""출장 가더니 혼을 두고 왔냐?""월요일 아침에 할 말이 그거야?""아니면 혼이 널 두고 온 거냐."지안은 노트북 가방을 의자에 걸며 서연 쪽을 봤다."박서연.""응.""커피 마시기 전에 입 좀 풀지 마."서연이 킥 웃었다. "맞네. 뭔가 있네." 그러곤 지안 책상 위에 종이컵 하나를 툭 올려놨다. "네 거. 탕비실 첫 포트 막 끓였다."지안은 컵을 들었다. 뜨거웠다. 다행이었다. 뜨거운 게 손에 있으면 나머지가 좀 멀쩡해지는 기분이었다."오늘 아침 회의 팀장님 들어오시기 전에 자료 한번만 더 볼래?" 서연이 물었다."봤어.""오늘 신입 오는 건 들었고?"지안이 메일함을 넘기던 손을 멈추지 않은 채 대답했다."디자인 쪽 경력직.""얼굴은?""내가 인사팀이야?""소문엔 괜찮다던데.""월요일 아침부터 그런 정보가 왜 필요해.""회사 다닐 맛."지안은 종이컵을 내려놓고 파일을 열었다. 회의 자료 마지막 장 숫자가 어긋나 있었다. 그걸 고치는 일은 좋았다. 누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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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화 - 윤재하
숨이 아니라 손이 먼저 멈췄다. 들고 있던 펜 끝이 자료 위에 눌려, 잉크 점 하나가 동그랗게 번졌다."윤재하 씨입니다."이름이 뒤늦게 들어왔다. 윤재하. 이름 없는 밤에 두고 온 줄 알았던 남자가 월요일 오전 회의실 문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잘 부탁드리겠습니다."목소리는 아는 톤이었다. 다만 온도가 달랐다. 금요일 밤보다 훨씬 공손했고, 훨씬 깔끔했고, 오히려 모르는 사람 같았다. 재하는 팀장 옆에 선 채 회의실을 한번 둘러봤다. 그 시선이 지안에게 닿았을 때 아주 짧게 멈췄다.한 박자.길지도 않았다. 모르면 지나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지안은 알았다. 처음 보는 팀 선배를 찾는 눈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대놓고 아는 척하는 눈도 아니었다. 태연한 척하는 사람의 눈. 더 정확히는, 태연한 척이 너무 능숙해서 사람을 더 열받게 만드는 쪽.서연이 옆에서 아주 작게 숨을 삼켰다."와."지안이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낮게 말했다."입 다물어.""왜. 잘생겼는데.""회의실이야.""그래서 속으로 말했잖아."팀장은 모른 척 재하 쪽을 손바닥으로 가리켰다."이전 회사에서도 FMCG 쪽 많이 했고요. 이번에 우리 쪽이랑 잘 맞을 것 같아서 모셨습니다. 자리는 크리에이티브팀 쪽이지만 당분간 영업1팀이랑 붙어 있을 거예요."'붙어 있을 거예요.'문장이 유독 또렷했다. 지안은 자료 모서리를 너무 세게 잡고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리고 손에 힘을 풀었다. 서연이 옆에서 슬쩍 팔꿈치로 건드렸다. 무슨 반응이냐고 묻는 힘이었다. 지안은 컵 대신 펜을 잡아 들었다. 손에 뭘 쥐고 있지 않으면 표정관리가 안될 것 같았다."오대리님."팀장이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출장 내용이랑 이번 주 수정 포인트만 공유해 주시죠. 재하 씨도 들어야 하니까."지안은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들었다. 재하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하필 지안 정면에서 두 자리 옆이었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가 더 불쾌했다. 고개만 들면 보이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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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화 - 오른쪽이요
눈이 전혀 후배답지 않았던 남자는, 그날 오후 지안의 숨통까지 정확히 조여 왔다.회의실에서 나온 뒤 지안은 재하 쪽을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질 거 같아서가 아니라, 이미 진 기분이 들어서였다. 이름 없는 밤에 두고 온 줄 알았던 얼굴이 사원증까지 달고 사무실을 돌아다니는 것도 짜증났는데, 하필 저 눈으로 선배님이라고 부르는 건 반칙에 가까웠다."야."서연이 팔짱을 낀 채 지안 책상 옆에 섰다."왜.""설명.""없어.""그럼 만들어서라도 해."지안은 노트북을 켜며 고개도 들지 않았다. "지금 바빠.""방금까지 안 바빴잖아.""이제 바빠졌어."말이 끝나기 무섭게 메신저 알림이 세 개 연달아 떴다. 클라이언트, 팀장, 제작팀. 지안은 제일 위 창부터 눌렀다. 오전에 공유한 수정안 방향이 뒤집혔다. 핵심 카피를 바꾸고, 메인 비주얼을 교체하고, 저녁 여섯 시 전에 PT 자료를 새로 들고 들어오란다. 월요일 오후에 제일 듣기 싫은 문장이 깔끔하게 세 줄로 정리돼 있었다.지안은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떴다."왜." 서연이 표정을 읽었다. "설마.""설마 맞아. 오늘 PT 다시 잡혔어.""미친.""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지안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의실 비워. 제작팀이랑 크리에이티브팀 다 불러. 브리프 다시 깔아야 해.""지금?""응. 지금."서연이 욕을 삼키며 메신저를 켰다. 지안은 팀장 방으로 향하다가 복도 끝에서 재하와 마주쳤다. 막 자리 배치를 끝낸 사람처럼 노트북을 들고 있었다."윤재하 씨.""네, 선배님."그 대답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지안은 이가 잠깐 맞물렸다."오후 PT 바로 투입입니다. 오리엔테이션은 나중에 받으세요."재하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네. 자료 어디서 볼까요.""지금 회의실로 오세요.""알겠습니다."대화는 딱 거기까지였다. 그런데도 지안은 돌아서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놀라지도 않고, 머뭇거리지도 않고, 첫 출근 첫날 오후 PT를 당연하다는 듯 받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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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화 - 처음인데
한 시간 뒤, 첫 시안이 올라왔다.지안은 재하가 넘긴 화면을 보다가 말없이 마우스를 잡았다. 카피 위치,시선 처리가 완벽하고 제품 샷 크기는 딱 한 끗 모자랐다. 이상할 만큼 자기 취향에 가까웠다. 가까운 정도가 아니라, 평소 지안이 수정할 때 마지막에 집요하게 건드리는 부분들이 이미 정리돼 있었다."이거." 지안이 화면을 확대했다. "가이드라인 아직 안 봤죠?""방금 받았습니다.""그런데 왜 여기 여백을 이렇게 뺐어요?"재하가 의자 등받이에 기대지도 않은 채 답했다."선배님은 답답한 거 싫어하시잖아요."지안의 손이 마우스 위에서 멈췄다.회의실 안은 바빴다. 서연은 통화 중이었고, 팀장은 뒤에서 클라이언트 일정 다시 잡고 있었고, 제작팀은 프린트를 뽑고 있었다. 그런데 그 한마디만 유독 또렷했다."제가요?"재하가 아주 잠깐 웃었다."광고가요. 답답한 거 싫어하시잖아요."말은 그렇게 고쳤는데, 고쳐진 쪽이 더 수상했다.지안은 더 묻지 않았다. 지금 따질 타이밍이 아니었다. 화면이 먼저였다."좋아요. 이 버전으로 가죠. 대신 제품명 채도만 한 톤 낮춰요. 서브 카피는 두 줄 넘어가면 죽으니까 압축하고.""네.""그리고 비주얼 오른쪽 그림자 조금만 빼요. 너무 계산한 티 나."재하의 손이 바로 움직였다."이 정도요?"지안은 수정되는 화면을 보다가 짧게 말했다."네. 그거예요."또 바로 맞았다.지안은 괜히 서류철을 집어 들었다. 손에 잡히는 게 필요했다. 이상했다. 일을 잘하는 건 좋다. 첫날부터 손발 맞는 디자이너면 더 좋다. 그런데 이건 손발이 아니라, 머릿속 순서까지 먼저 알고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그게 도움 되는데도 기분이 나빴다. 너무 잘 읽히는 건 좋은 일이 아니었다. 적어도 지안한테는.***PT는 오후 여섯 시 십 분에 시작됐다. 지안은 시작 오 분 전에 노트북을 연결하고, 출력본을 정리하고, 클라이언트 표정을 먼저 훑었다. 싫어하는 쪽 셋, 지친 쪽 둘, 아직 결정 안 한 쪽 하나.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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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화 - 탕비실에서
전혀 처음 같지가 않았다.그 생각은 집에 가는 택시 안에서도 내내 떠올랐고, 샤워를 하는 동안에도, 다음 날 아침 회사 로비 유리문 앞에 섰을 때까지도 멀쩡하게 따라붙어 있었다. 지안은 출근 카드 태그를 찍으면서 속으로 욕을 한 번 했다. 원나잇 상대가 회사 신입으로 들어온 것도 모자라, 일하는 방식까지 공교롭게 잘 맞는 건 너무 성실한 재앙이었다.그래도 회사에서는 업무를 해야한다. 메일은 와 있었고, 전날 PT 수정본 컨펌은 떨어져 있었고, 오전 열 시 전에 넘겨야 할 정리 파일도 있었다. 지안은 그 질서가 좋았다. 사람 미치게 하는 감정 같은 것보다 엑셀 줄 맞추기가 훨씬 믿을 만했다."야, 오지안."서연이 의자에 걸터앉듯 반쯤 기대며 물었다."왜.""너 어제 집 가서도 일 생각했냐.""보통은 그렇지.""아니. 일 말고."지안이 마우스를 클릭하던 손을 멈추지 않았다."박서연.""응.""말 돌리지 말고 용건만."서연이 피식 웃었다. "그래. 용건. 어제 PT 잘 끝났고, 팀장님 기분 좋고, 신입은 생각보다 훨씬 쓸 만하고.""그래서?""그래서 넌 왜 아직도 심기가 불편하냐고."지안은 그제야 서연을 봤다."내가?""응. 네가."서연은 사람 얼굴 보는 데 귀신이었다. 남들 앞에서는 웃고 넘겨도 혼자 있을 때 컵을 얼마나 세게 내려놓는지, 메일 답장을 몇 초 만에 보내는지, 머리끈을 몇 번 다시 묶는지 같은 걸 이상할 만큼 잘 봤다. 지안은 그 재능이 가끔 고마웠고, 대부분은 성가셨다."월요일부터 화요일까지 클라이언트 셋이랑 붙어 있는데 심기가 좋겠냐.""논리적인 대답이네." 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어제부터 너 논리적인 대답만 해.""난 원래 논리적인 사람이야.""그건 맞는데, 지금은 너무 맞아."지안은 컵에 남은 커피를 다 마셨다. 미지근했다. 기분이 더 나빠졌다."오대리님, 공유 폴더 정리본 어디까지 올리면 될까요?"맞은편 자리 막내가 물어왔고, 지안은 곧장 화면을 돌렸다."수정 전 버전은 다 아카이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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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화 - 어느 정도가
"긴장했어요?" 지안이 물었다."많이요.""그렇게는 안 보였어요.""선배님도요."지안은 컵을 들다가 잠깐 멈췄다. 반격이 빠른 인간은 피곤하다."윤재하 씨.""네.""회사에서는 말 조심하세요."재하가 웃을 듯 말 듯 입꼬리를 움직였다."말실수한 거 없는데요.""있었으면 지금 이렇게 말 안 하죠.""그건 무섭네요."무섭다는 사람이 전혀 무서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즐기는 얼굴이라 더 열받았다. 지안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뜨거웠다. 혀끝이 살짝 데일 만큼. 그런데도 컵을 내려놓지 않았다. 손에 쥔 게 있어야 했다.재하가 자기 컵을 받으며 물었다."출장 자주 가세요?"지안은 컵을 든 채 그를 봤다.질문 자체는 아무 문제 없었다. 회사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다. AE가 출장 자주 가는지, 어느 정도 강도로 구르는지 묻는 건 자연스럽다. 그런데 질문이 떨어지는 타이밍이 전혀 자연스럽지 않았다."왜요?""그냥요.""그냥인데 출장 여부가 왜 궁금해요?""선배님은 밖에서 더 편해 보이셔서."심장이 아니라 손끝이 먼저 굳었다. 지안은 바로 컵을 내려놨다. 탁! 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났다."밖에서?!"재하는 아주 잠깐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들었다. 그 한 박자 때문에, 방금 자기 말이 회사 밖을 가리켰다는 걸 알고 있다는 게 더 분명해졌다."출장지요." 그가 부드럽게 고쳤다. "회사 말고 다른 데 나가면 좀 덜 날카로운 타입인가 해서."말은 고쳐졌는데 공기는 안 고쳐졌다.지안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남 분석하는 취미 있어요?""디자인하는 사람이라 관찰은 좀 하는 편입니다.""관찰이 아니라 무례한 거예요.""죄송합니다."사과는 바로 나왔다. 그런데 물러나진 않았다. 재하는 컵 뚜껑을 닫으면서도 지안을 보고 있었다. 그 눈이 꼭 선을 넘기 직전까지만 가 보고, 그다음 선은 상대가 긋게 놔두는 사람 같았다. 비겁한데 영리했다."근데." 재하가 낮게 덧붙였다. "어제 PT 때는 선배님이 더 편해 보였어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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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화 - TF 배정
"분위기가 이상한데?"서연은 그런 말을 던져 놓고 바로 기다리는 인간이었다. 대꾸가 나오든 안 나오든 상대 얼굴을 끝까지 보면서, 어디서 금이 가는지 확인하는 쪽.지안은 컵 뚜껑을 닫았다. 너무 천천히 닫으면 티 나고, 너무 빨리 닫아도 티 난다. 그래서 평소처럼 닫으려고 했는데, 그 평소가 정확히 뭔지 갑자기 모르겠어서 더 짜증이 났다."네가 이상하게 보는 거지.""그럴 수도 있지." 서연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너도 이상하게 반응했어.""신입이 선 좀 넘었고, 내가 선 그었고. 끝.""그 신입이 무슨 선을 어떻게 넘었는데?"지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질문 자체가 함정이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순간 끝이다. 무슨 말을 했고, 어디서 했고, 왜 그 타이밍이 거슬렸는지 풀어놓는 순간 박서연 같은 인간은 그걸 엮어서 결론까지 스스로 내린다."오지안.""왜.""너 지금 되게 말을 잘 골라.""원래 잘 골라.""아니. 평소엔 안 골라."지안은 한숨 대신 커피를 마셨다. 이미 식기 시작한 커피는 맛이 없었다. 오늘따라 모든 게 타이밍이 별로였다."일하자. 진짜 바빠.""그래, 뭐." 서연이 컵을 들며 어깨를 으쓱했다. "근데 나중에 안 끝났다고 하지 마.""안 해.""그 말이 제일 수상해."서연은 결국 더 캐묻지 않고 먼저 나갔다. 그게 오히려 무서웠다. 박서연은 정말 감이 왔을 때는 입을 닫고 지켜보는 쪽이었다. 지안은 컵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한 박자 늦게 탕비실을 나왔다. 복도 건너편으로 재하의 뒷모습이 보였다.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걸음이 느긋했다. 전혀 들킨 사람 같지 않았다.그게 또 열받았다.***오전은 정신없이 흘렀다. 전날 PT 후속 수정이 생각보다 빨리 마무리됐고, 클라이언트는 드물게 군말 없이 컨펌을 줬다. 그쯤 되면 숨 좀 돌릴 만한데, 회사라는 곳은 꼭 그 타이밍에 다른 걸 얹는다."열한 시 반에 소회의실 비워 주세요."팀장이 메신저에 공지를 올렸다."신규 프로젝트 TF 배정할 겁니다."서연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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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화 - 그림 좋다
회의실 문을 나서자 뒤에서 누군가 지나가며 말했다."영업1팀 이번 TF 또 그림 좋네.""오대리랑 신입 조합? 보기엔 좋지.""일도 잘 나올 것 같고."지안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냥 지나가는 말이었다. 사내연애를 의심하는 톤은 아니었다. 아직은. 그래도 저런 말은 씨앗이 된다. 보기 좋다, 그림 좋다, 둘이 합이 괜찮다. 회사는 일 얘기하다가도 금방 사람 얘기로 넘어간다.서연이 그걸 같이 들었는지 바로 낮게 말했다."벌써 시작하네.""뭐가.""사내 가십 기초 공사.""그만 좀 해.""내가 한 말 아니거든?""네가 제일 즐기고 있잖아.""그건 맞아."서연은 맞은편으로 휙 돌아서면서도 마지막 말을 남겼다."그래도 조심은 해. 회사 사람들은 일 잘 맞는 것도 금방 연애로 엮어."지안은 그 말에 대꾸하지 못했다.***오후부터 TF 공기가 본격적으로 돌기 시작했다. 킥오프 일정 잡고, 기존 캠페인 레퍼런스 추리고, 클라이언트 자료를 뜯고, 경쟁사 사례를 빼고, 소비자 반응 메모를 정리하고. 지안은 늘 하던 식으로 일감을 잘라 사람들한테 뿌렸다."서연, 이 브랜드 이전 실패 캠페인 반응만 따로 묶어 줘.""오케이.""윤재하 씨는 비주얼 레퍼런스 오늘 안에 세 갈래로만 정리해 주세요. 예쁜 거 말고 방향 보이는 걸로.""네.""그리고 이번 브랜드, 톤이 너무 귀엽게 가면 바로 죽어요. 타깃이 애매해서 더.""네. 무난하게 착한 쪽 말고, 조금 더 날렵한 버전으로 볼게요."지안은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 날렵한 버전. 방금 자기가 메신저 창에 적었다가 지운 표현이었다."...맞아요. 그렇게.""네."재하는 더 설명하지 않았다. 그게 또 이상했다. 대체 어디까지 맞춰 들어올 생각인지, 왜 그렇게까지 잘 읽히는지. 지안은 스스로가 예민해진 거라고 몇 번이고 결론 내리려 했다. 그런데 예민함만으로 설명 안 되는 순간이 자꾸 생겼다.오후 네 시쯤, 서연이 파일을 들고 지안 자리 옆에 와 섰다."나 궁금한 거 하나.""뭔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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