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출장 마지막 밤, 이름도 묻지 않은 남자와 하룻밤을 보냈다. 후회는 없었다. 다시 볼 일도 없으니까. 월요일. 그 남자가 우리 팀 신입으로 나타났다. "좋은 아침입니다, 선배님." 윤재하, 26세. 능글거리고, 눈치 빠르고, 일도 잘하고, 하필이면 내 스타일을 너무 정확히 안다. 마치 처음이 아닌 것처럼. 숨기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숨길수록 더 가까이 왔고, 나는 밀어낼수록 더 신경 쓰였다.
View More바 안은 적당히 어두웠고, 지안은 그런 조명을 대체로 신뢰하지 않았다. 피곤한 티가 덜 나게 해주고, 괜찮지 않은 밤에도 괜찮은 척할 구실을 줬다. 오늘은 그 구실이 필요했다. 클라이언트와 저녁을 세 시간 넘게 붙어 있었고, 휴대폰에는 월요일 오전 회의 일정이 벌써 두 개나 들어와 있었다.
"독한 걸로 주세요."
바텐더가 잠깐 지안을 봤다가 잔을 골랐다. 설명이 더 필요 없는 주문이 제일 좋았다. 지안은 의자에 반쯤 기대 앉아 립을 한 번 눌러 발랐다. 거울은 보지 않았다. 안 봐도 알았다. 멀쩡한 쪽에 가까울 거다. 오지안은 그런 데 강했다. 그게 장점이었고, 가끔은 지겨웠다.
"오늘 일 망했어요?"
옆에서 걸린 목소리에 지안이 고개를 돌렸다.
남자는 웃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눈매가 먼저 풀려 있었다. 셔츠 단추를 하나 풀어 둔 채 재킷은 의자 등받이에 걸쳐 두었고, 얼굴은 어려 보였는데 시선은 아니었다.
"멀쩡해 보여서 더 망한 쪽인가 했죠."
지안이 잔을 받으며 되물었다.
"초면에 그런 말을 자주 해요?"
"반응 좋은 사람한테만요."
"저 아직 반응 안 했는데."
"방금 하셨잖아요."
지안은 잔을 들었다. 유리 벽면이 차가웠다. 한 모금 넘기자 목 안쪽이 뜨겁게 쓸렸다. 나쁘지 않았다. 옆자리 남자는 잠깐 지안을 봤다. 그 시선이 거슬리지 않았다. 직업이 뭐냐, 어디 사람이냐, 혼자 왔냐. 그런 순서부터 밟는 남자들이 있었다. 지안은 그런 얼굴을 질릴 만큼 봤다.
"그쪽은요." 지안이 잔을 내려놓았다. "오늘 일 망했어요?"
"아뇨. 잘 끝났어요."
"그럼 왜 여기 있어요."
"잘 끝난 날도 술은 마시거든요."
"건강하네요."
그제야 웃었다. 짧게, 하지만 제대로.
"지금 칭찬하신 거예요?"
"네. 좀 아깝긴 한데."
대답이 오가는 속도가 괜찮았다. 설명이 길어지지 않았고, 서로 한 박자씩만 더 내줬다. 지안은 그게 마음에 들었다. 마음에 든다는 사실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출장 마지막 밤에 그 정도 이율배반은 허용할 수 있었다.
두 번째 잔은 남자가 먼저 시켰다. 지안은 거절하지 않았다. 셋째 잔에서야 둘은 창가 쪽 작은 테이블로 옮겼다. 바깥 도로 위로 차들이 미끄러졌고, 유리창에 비친 자기 얼굴 옆으로 남자의 어깨선이 겹쳤다. 지안은 그 반사된 화면을 더 오래 봤다. 정면으로 보는 것보다 덜 노골적이라서였다.
"출장이에요?" 그가 물었다.
"네."
"힘든 쪽?"
"돈 받는 쪽은 원래 다 힘들죠."
"멋없는 대답인데요."
"멋있게 살 생각 없어요."
잔을 굴리다 말고 지안을 봤다. 이번엔 웃음기가 덜했다.
"그건 좀 아깝네요."
그 말이 가볍게 던져지지 않았다는 걸 알아차린 순간, 지안은 잔 대신 냅킨 모서리를 만졌다. 이런 타이밍이 제일 귀찮았다. 적당히 웃고 빠져나오면 되는 밤이어야 했다. 그게 쉬웠고, 후유증도 적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이름도 안 물었다.
"왜요." 그가 낮게 물었다. "갑자기 표정이 바뀌었는데."
"그쪽이 이상해서."
"제가요?"
"보통은 먼저 묻잖아요. 이름이든, 직업이든."
"물어보면 알려줄 거예요?"
지안이 잠깐 멈췄다가 웃었다.
"아마 안 알려주겠죠."
"그럼 안 묻는 게 낫네요."
대답이 깔끔했다. 지안은 시선을 잠깐 내렸다가 다시 들었다. 이런 식이면 곤란했다. 아무것도 캐지 않는데도 대화가 이어지고, 경계가 자꾸 느슨해졌다. 적어도 지금 이 남자는 지안에게서 낮의 명함을 찾지 않았다. 그게 술보다 더 빨리 들어왔다.
***
가게 문을 나섰을 때 밤공기가 생각보다 차가웠다. 지안은 코트 깃을 여몄고, 남자는 한 걸음 늦게 따라 나왔다. 끝났으면 끝난 거고, 아니면 아닌 거였다. 애매한 배웅은 싫었다.
"여기서 들어가요." 지안이 먼저 말했다.
"택시 잡아드릴게요."
"혼자 잡을 수 있어요."
"그건 알아요."
그러고도 남자는 길가 쪽으로 먼저 섰다. 손을 들 때 셔츠 소매가 조금 더 올라갔다. 지안은 그 하찮은 장면을 왜 보고 있는지 잠깐 짜증이 났다. 택시 불빛이 서자 남자가 뒷문을 열었다.
"후회 안 해요?" 남자가 물었다.
지안이 문 손잡이를 잡은 채 그를 올려다봤다.
"뭘요."
"지금 그냥 가면요."
차 소리도 있었고 멀리서 웃는 소리도 났다. 그런데 그 질문만 이상하게 또렷했다. 지안은 대답 대신 남자의 목 언저리를 잠깐 봤다. 계산이 빨랐다. 이 밤은 내일로 끌고 갈 생각이 없고, 상대도 그걸 안다. 이름도 회사도 남기지 않으면 된다. 그 정도의 익명성은 안전했다.
"그쪽은요." 지안이 되물었다. "후회 안 해요?"
남자가 웃지 않은 채 말했다.
"지금은 전혀."
지안은 택시에 먼저 올라탔다. 남자는 잠깐 멈추더니 반대편으로 타 들어왔다. 문이 닫히자 바깥 소음이 한 겹 멀어졌다. 기사에게 호텔 이름을 말한 건 지안이었고, 그다음부터는 둘 다 잠깐 조용했다. 어색하지 않아서 더 위험했다.
남자의 손이 시트 위에서 한 번 멈췄다. 닿지는 않았으나 지안은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살짝 당기고, 남자는 그걸 봤다.
이제는 그럴 이유가 없었다.그래서 며칠 뒤 운영사무국 메일이 다시 도착했을 때도, 지안은 예전처럼 혼자 먼저 화면부터 가리지 않았다.메일 제목은 짧았다.`[한국대학생광고페스티벌 운영사무국] 검토 결과 안내`지안은 자기 자리에서 그 제목을 한 번 읽고, 맞은편을 봤다. 재하도 같은 메일을 받은 얼굴이었다.둘 다 바로 말을 걸진 않았다.팀장 자리엔 아직 사람이 있었고, 소율은 출력물 들고 회의실을 오가고 있었고, 서연은 이미 눈치챈 표정으로 자기 모니터만 보고 있었다.사무실은 평소처럼 돌아가는데, 이번엔 지안도 더 숨길 생각이 없었다."봐요."지안이 먼저 말했다.재하가 고개를 끄덕였다."네."메일 본문은 건조했다.조사 경과 — 제출 자료 대조, 원 발표자 확인 회신, 이정환 측 소명 기한 만료 — 가 항목별로 정리돼 있었고, 그 끝에 결과가 붙어 있었다.2018년 수상작은 공식 게재 목록에서 철회 처리 예정이고, 크레딧은 원 발표팀 기준으로 정정 등재된다는 확인. 이정환 측에도 동일한 결과가 통보되었다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접수 후 한 달 남짓 걸린 셈이었다.표현은 끝까지 딱딱했는데, 그래서 더 분명했다. 누가 뭘 가져갔고, 그게 이제는 넘어갈 수 없다는 뜻만 남기는 문장.지안은 끝까지 읽고 나서 마우스를 놓았다.크레딧 정정. 7년 만에 자기 이름이 제자리로 돌아온 거였다. 속이 후련하게 뚫리진 않았다.통쾌함보다 먼저 든 건 묘하게 빈 감각이었다.이제서야, 라는 자조 비슷한 것이 올라왔다가 금방 가라앉았다.너무 오래 지나온 일이라서, 이제 와서야 제자리로 돌아오는 게 오히려 늦게 도착한 우편물 같았다."왔네."서연이 옆에서 작게 말했다."응."지안은 짧게만 답했다."기분 이상하지?""응."그것밖에 안 됐다.좋다, 나쁘다, 시원하다, 허무하다. 어느 한 단어로도 설명하긴 어려웠다.다만 이제 더는 이 일을 상상으로만 붙들고 있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하나는 분명했다.맞은편에서 재하가 메일 창을 닫았다.그 손이
셔츠 단추가 풀렸다.재하가 먼저, 지안이 뒤이어. 블라우스가 벗겨지는 순간 재하 시선이 쇄골에서 멈췄다.그 눈이 너무 또렷해서 지안은 괜히 손으로 가리려다 말았다."왜 봐?""보고 싶었으니까요."그 말이 너무 담담해서 반박이 안 됐다.재하 입술이 목 옆을 따라 내려왔다. 쇄골 위에서 한 번 멈추고, 가슴 사이를 느리게 훑었다.입김이 닿을 때마다 피부가 오그라들었고, 지안은 시트를 움켜쥔 손에 힘이 저절로 들어갔다."천천히.."지안이 말했다. 명령이 아니라 부탁에 가까웠다."네."재하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대답했다.입술이 아래로 더 내려갔다. 배 위를 지나 허벅지 안쪽에 닿았을 때 지안은 숨을 참다가 결국 놓쳤다.짧은 소리가 새어나왔고, 그 소리에 재하 손가락이 허벅지 위에서 한 번 세게 눌렸다."그 소리."재하가 낮게 말했다."어?""좋아요."그 한마디가 목소리째로 피부 위에 닿는 것 같아 재하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평소의 판단력 같은 건 이미 어디 갔는지 모르겠고, 몸이 먼저 반응하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재하 손이 허벅지를 벌리고 입술이 더 깊이 닿았을 때 지안 허리가 시트에서 떠올랐다."재하, 잠깐—"멈추라는 게 아니었다.그걸 재하도 알았다. 속도를 조금 늦추되 멈추지 않았다.손가락이 먼저 천천히 들어왔고, 지안은 고개를 젖힌 채 천장을 봤다. 형광등 빛이 흐릿했다. 감각이 한 곳에 모이면서 나머지가 전부 먼 곳으로 밀려났다."괜찮아?"재하가 올려다보며 물었다. 존댓말이 완전히 빠진 목소리. 그 변화가 지안 몸을 한 번 더 떨리게 했다."괜찮아."지안이 눈을 감고 대답했다. 목소리가 생각보다 떨렸다.재하가 다시 올라왔다. 얼굴이 가까워졌고, 이마가 닿았다. 둘 다 숨이 거칠었다.그 상태에서 재하가 아주 조용히 말했다."지안아, 봐."눈을 뜨자 재하 얼굴이 바로 앞에 있었다.땀이 이마에 맺혀 있었고, 눈이 진지했다.장난기는 완전히 없었다. 이 사람의 진짜 얼굴.그 밤에는 어둠 속에서 봤고,
퇴근길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서연이 먼저 가방을 챙기면서 "둘이 알아서 가" 한마디를 놓고 나가자 지안은 노트북을 덮고 자리를 정리했다.소율은 이미 내려갔고, 사무실엔 재하와 둘만 남았다. 재하가 태블릿을 가방에 넣는 동작이 유난히 느렸다. 지안은 그걸 보다가 먼저 말했다."뭐 해?""가방 싸고 있잖아요.""세상에서 제일 느린 짐 싸기네."재하가 고개를 들어 웃었다. 능글거리는 쪽이 아니라 그냥 좋은 쪽의 웃음이었다. 지안은 괜히 이미 꺼진 모니터를 한 번 더 확인했다."우리 집 갈래?"말이 나가고 나서 조금 아차 싶었다. 아, 이거 예전에도 이렇게 말했지.그때는 횡단보도 앞이었다. 지금은 빈 사무실이었고, 숨길 이유도 없었다.재하가 가방 지퍼를 올리며 대답했다."안 간다고 하면 믿을 거예요?""아니.""그럼 가죠."밖은 저녁이었다.택시 안에서 재하는 지안 손을 먼저 잡지 않았다. 대신 무릎 위에 손을 올려두고 있었고, 그 손등이 지안 허벅지에서 손가락 두어 개 거리에 있었다.예전 같았으면 지안이 먼저 거리를 벌렸을 것이다.오늘은 그 거리를 그대로 뒀다.가로등 불빛이 유리창을 길게 지나갈 때마다 재하 손등 위로 빛이 한 번씩 미끄러졌다.지안이 먼저 손을 올렸다. 잡는 것도 아니고, 그냥 손등 위에 손가락을 얹는 정도. 재하가 그쪽을 보지 않고 아주 작게 웃었다.현관문이 닫혔을 때 둘 다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신발을 벗는 동작, 가방을 내리는 동작, 불을 켜는 동작.그 사이에 들어간 침묵이 어색하지 않았다.처음 이 집에 왔을 때는 현관에서 긴장이 먼저 올라왔다.비밀이었으니까.그다음에는 피로와 간절함이 뒤섞여 있었다. 지금은 달랐다 숨길 게 없는 사람들이 집에 같이 온 것. 그 단순한 사실만으로도 공기가 더 가벼웠다."물?"지안이 물었다."아뇨."재하가 웃지 않고 말했다."물 마시러 온 거 아니라서요."지안은 재킷을 소파 위에 놓다가 멈췄다."그럼 뭐하러 왔는데?"재하가 한 걸음 가까이 왔다. 좁은 거
"재하."이름이 입 밖으로 나간 뒤에도 회의실 공기는 바로 바뀌지 않았다.화가 다 풀린 것도 아니고, 바깥 문제가 끝난 것도 아니고, 몇 주를 건너온 마음이 한 번에 정리될 리도 없었다.그런데도 그 한 단어 이후로는 숨길 게 줄었다. 지안은 그걸 먼저 알았다. 더는 다시 모른 척할 수 없는 거리라는 걸.재하는 지안이 손을 놓을 때까지 그대로 서 있었다.섣불리 끌어안지도 않았고, 급하게 붙잡지도 않았다. 그게 지금은 맞았다.지안이 먼저 열었고, 그래서 재하도 그 속도를 그대로 받는 쪽을 고르는 게."가요."지안이 먼저 말했다."네."둘은 회의실 문을 나섰다. 복도는 퇴근 직전보다 더 조용해져 있었다.멀리서 팀장 목소리가 아직 회의실 안쪽에 걸려 있었고, 프린터 불빛만 하나 남아 있었다.예전 같으면 이 시간에 둘이 같은 복도를 나오는 것부터 신경 썼을 거다. 누가 보는지, 몇 걸음 차이 둘지, 엘리베이터는 따로 탈지. 그런데 오늘은 그런 계산이 올라오지 않았다.그냥 재하랑 나란히 걸었다.그 사실만으로도 웃길 정도였다.***다음 날 아침, TF는 사실상 끝난 분위기였다.최종본 전달은 마무리됐고, 남은 건 자잘한 수정 대응이랑 종료 정리 정도.팀장은 아침부터 유난히 얼굴이 펴져 있었고, 소율은 "이제 좀 살겠다"는 말을 세 번쯤 했고, 서연은 외부 공유 폴더 정리하면서 삭제해도 되는 버전들을 하나씩 골라냈다.지안은 자리에 앉자마자 커피 뚜껑을 열었다.맞은편에선 재하가 메일을 보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잠깐, 시선이 마주치다, 반사적으로 시선을 피하려다 멈췄다.예전 같았으면 바로 돌렸을 거리인데, 오늘은 안 돌려도 됐다. 그 차이가 아직 몸에 안 붙어서 좀 어색했다.그리고 재하는 평소처럼 묻는 대신, 아주 자연스럽게 말했다."커피 식기 전에 드세요."지안은 컵을 들다가 멈췄다.별거 아닌 말인데, 그걸 별거 아닌 얼굴로 듣는 게 낯설었다.예전 같으면 누가 들을까 먼저 봤을 텐데, 오늘은 그 반사 동작이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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