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목소리를 듣고 박운기 일행은 눈살을 찌푸리며 불쾌한 표정으로 문 쪽을 바라보았다.곧이어 병실 문이 열리고 진서준 일행이 들어왔다.박운기 일행은 진서준과 초면이었다. 초면인 청년이 허사연 자매를 데리고 병실에 들어오는 것을 본 박운기 일행의 눈에는 분노가 번졌다.“방금 그 말, 네가 한 거야?”박운기가 이를 악물며 물었다.“그래, 내가 한 거야.”진서준은 박운기를 힐끗 본 뒤 바로 시선을 돌려 서정훈에게 인사했다.“서 시장님, 오랜만입니다.”진서준과 심해윤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 서정훈은 처음에는 멈칫했지만 곧바로 흥분이 가득한 표정을 지은 채 반가워했다.“서준아, 드디어 왔구나. 요즘 내가 너 때문에 허성태를 여러 번 찾아갔댔어.”서정훈은 진서준의 의술을 알고 있었기에 허성태가 진서준에게 사정할 수 있도록 여러 번 부탁했었다.하지만 진서준이 서울시에 없었기 때문에 허성태도 마음뿐, 실질적인 도움은 줄 수 없었다.그런데 기다리던 진서준이 돌아왔다고 하자 허성태는 이내 딸들에게 진서준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라고 시켰던 것이다.“죄송합니다, 서 시장님. 요즘 제가 외지에서 이런저런 일들이 많았습니다.”진서준이 사과의 뜻을 표했다.“괜찮다, 괜찮아. 네가 돌아온 것만으로도 좋아.”서정훈은 곧바로 진서준의 손을 잡았다.“서준아, 우리 집 이 녀석이 너와 예전에 사이가 좋지 않았던 건 알지만 그래도 딱 하나뿐인 내 아들이야. 네가 한번 무슨 병인지 봐줄 수 없겠어? 날 돕는 셈 치고 병을 치료해 보렴? 내가 너한테 크게 빚지는 거야. 치료하지 못한다고 해도 너한테 아무런 불만도 없을 거야.”같은 시간, 침대에 누워 있는 서현욱의 마음은 복잡했다.예전에 자기와 진서준 사이에 있었던 충돌은 아직도 머릿속에 선명했다.그런데 이제 와서 자기 병을 그 원수에게 맡겨야 한다니, 이건 너무 굴욕적인 일이었다.“걱정 마세요, 서 시장님. 아드님 병은 제가 최선을 다해 치료할 겁니다.”진서준이 담담하게 말했다.“이 망할 놈아, 어서 일어나 서준에
“내가 모셔 온 의사가 병신이라고 큰소리치는데, 그럼 네 대단한 실력을 보여줘 봐.”진서준은 박운기를 힐끗 보더니 바보를 상대하는 말투로 말했다.“너희가 여기서 방해만 하지 않았다면 난 벌써 치료를 시작했어.”박운기는 또다시 진서준의 말에 말문이 막혀 얼굴이 붉어지며 화를 참지 못하고 주먹을 꽉 쥐었다.옆에 있던 염소수염을 기른 노인은 박운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흔들었다.박운기는 그 모습을 보고 심호흡을 크게 내쉬고 마음속의 분노를 잠시 가라앉혔다.“서 시장님, 정말 이 녀석에게 아드님 병 치료를 맡길 건가요? 충신이 두 황제를 섬기지 않듯, 환자도 마찬가지로 두 의사에게 맡길 순 없습니다. 시장님 아드님 병이 이렇게 심각한데 이 녀석이 치료하지 못하면 병이 더 악화할 겁니다. 그러면 우 의사님이 아무리 날고뛰는 능력이 있어도 속수무책일 겁니다.”서정훈은 박운기의 말을 들으며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만약 진서준이 서현욱의 병을 고치지 못하고 그 병을 다시 우도운에게 넘긴다면 우도운도 치료하기 어려울 것이다.그래서 서정훈은 아들을 진서준에게 맡길지 아니면 우도운에게 맡길지 깊은 고민에 빠졌다.그때, 허사연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서 시장님, 그냥 진서준에게 치료를 맡기세요. 진서준 의술은 제가 보장할 수 있어요. 전에 우리 아빠가 병에 걸렸을 때 진서준이 책임지고 치료한 거예요. 지금 우리 아빠 건강 상태가 어떠신지 서 시장님도 지금 잘 아시지 않나요?”박운기는 불쑥 대회에 끼어든 허사연을 노려보며 한마디 덧붙였다.“서 시장님, 제 생각은 이러합니다. 서 시장님 스스로 잘 판단해 보세요.”선택은 여전히 서정훈의 몫이었다.서정훈은 한참을 고민한 후, 진서준을 향해 말했다.“서준아, 네게 부탁할게.”“맡겨만 주십시오.”진서준은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지만 우도운과 박운기의 얼굴은 급격히 어두워졌다.전문가인 자기를 믿는 대신 어디서 굴러온 청년을 믿는다니, 이는 우도운에 대한 모욕이었다.“흥, 두고 봐, 꼭
우도운은 강한 자존심 때문에 자기 의술이 진서준보다 뒤처질 리 없다고 확신했다.우도운은 어려서부터 서양 의학을 배웠고 열일곱 살에 해외 유학을 떠나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대학에서 공부하며 남성 의학 분야에서 노벨상까지 받은 바 있었다.그런 자기와 진서준 같은 애송이가 비교되는 것 자체가 용납되지 않았다.우도운은 연신 고개를 저으며 갑자기 서현욱 앞으로 다가갔다.“뭐 하는 거야?”거의 정신이 나간 듯한 우도운의 돌발 행동에 서현욱은 깜짝 놀랐다.허사연 자매는 우도운이 무슨 짓을 할지 알아차린 듯 서둘러 고개를 돌려 몸을 피했다.찌지직...서현욱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우도운은 그의 바지를 확 벗겨버렸다.평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던 서현욱의 소중한 부위는 지금 깃발 대처럼 곧게 서 있었다.이 장면을 목격한 우도운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멍하니 서 있었다.“당신 변태야? 내 바지를 왜 벗겨? 나 경찰에게 신고해 널 감옥에 처넣을 거야.”서현욱은 황급히 바지를 올리며 우도운을 분노에 찬 눈으로 노려보았다.“이... 이게 어떻게 된 거지?”우도운은 혼란에 빠져 중얼거리다가 진서준을 향해 몸을 돌리더니 날카로운 눈으로 노려보며 말했다.“너, 대체 뭘 한 거야?”진서준은 우도운을 흘깃 쳐다보며 덤덤하게 대답했다.“네가 알 필요 없어.”“분명 무슨 속임수를 쓴 거야. 네 의술이 나보다 뛰어나다고는 믿을 수 없어.”여전히 자기 의술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한 우도운의 태도에 진서준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믿든 말든 네 마음이지.”진서준은 자기 의술을 증명하기 위해 굳이 이방인의 인정 따위를 받을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한편 박운기는 우도운보다 더 분통이 터졌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강서구 절반 이상의 땅을 손에 넣을 계획이었지만 지금은 단 한 평도 얻지 못하게 될 상황이었다.박운기의 눈에는 살기가 어렸고 그는 이미 마음속으로 진서준을 없애버릴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서 시장님, 아드님의 병이 나으셨다니 축하합니다.”박운기는
박운기가 염소수염 노인을 데리고 왔을 때, 그 노인에 대해 소개한 적이 없었다.“서준아, 너 1황과 2박에 대해 들어봤어?”서정훈이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물론 알죠. 1황은 우리나라 최고 부자고, 2박 중 한 명은 북쪽, 한 명은 남쪽에서 활동하는 국내에서 굉장히 유명한 기업가들 아니겠습니까?”진서준은 눈빛을 번쩍이며 물었다.“설마 저 박운기가 그 박씨 가문 사람인가요?”“맞아. 박운기는 명주시에 있는 애리 그룹 박씨 가문 출신이야.”“근데 이상하네요. 애리 그룹은 인터넷 관련 사업만 하지 않았나요? 왜 갑자기 공장을 세우려고 하죠?”진서준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애리 그룹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다시피 인터넷 업계의 선두 주자였다.공장을 세운다는 소문은 단 한 번도 떠돌아다닌 적이 없었다.“나도 처음엔 애리 그룹이 서울시에 첨단 산업을 들여오려는 줄 알았어. 근데 환경 오염을 유발하는 공장을 세우겠다고 해서 난 단칼에 거절했지.”서정훈이 덤덤하게 말했다.서울시는 인구가 적고 신규 산업도 별로 없는 작은 도시였다.박씨 가문의 거대 기업이 서울에 자리 잡으면 도시 발전이 비약적으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았다.하지만 박운기가 원하는 건 경제적 이익을 위해 환경을 희생시키는 것이었다.서정훈은 그런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서울시는 서정훈의 고향이었다.그러니 서정훈은 자연스레 고향이 외부인의 욕심으로 황폐해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이 공장 때문에 서울시가 진짜 발전한다고 해도 서정훈은 동의할 수 없었다.“경고하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진서준의 목소리가 무거워졌다.“설마 저 사람들이 내게 복수라도 하겠다는 건가?”서정훈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걱정 마. 난 이래 봬도 서울시 시장이야. 그렇게 대놓고 날 건드릴 순 없을 거야.”도시 시장을 상대로 복수를 한다는 건 국가를 상대로 대적하는 셈이었다.박씨 가문이 아무리 대단해도 그런 무모한 짓을 할 리가 없다고 서정훈은 믿고 있었다
산양수염은 말을 마친 후, 두 손을 모아 박운기와 우도운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제스처를 취하며 주문 같은 무언가를 중얼거렸다.십여 초 후, 산양수염이 갑자기 눈을 부릅뜨며 큰 소리로 외쳤다.“여기로 와!”노인의 말이 끝나자 병원을 떠나려던 서정훈의 눈앞이 갑자기 어두워지며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갑작스러운 상황에 심해윤과 서현욱은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여보, 괜찮아요?”심해윤이 급히 서정훈을 부축했다.“어머니, 아버지는 그냥 피곤해서 쓰러진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서현욱은 별일 아닌 듯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심해윤은 그런 아들을 쏘아보며 명령했다.“당장 의사 불러, 멍하니 뭐 하고 있어?”“알았어요.”서현욱은 바로 돌아서서 의사와 간호사들을 데리러 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서현욱은 대량의 의료진과 함께 서정훈을 응급실로 옮길 준비를 했다.그때, 서정훈이 갑자기 깨어났다.하지만 서정훈의 눈빛은 멍해졌고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마치 누가 조종하는 인형처럼 영혼이 이탈된 것 같았다.“여보, 왜 갑자기 쓰러졌어요? 병원 가서 검사받아보세요, 뭔가 이상한 것 같아요.”심해윤은 서정훈의 손을 잡고 말했다.하지만 서정훈은 심해윤의 손을 힘껏 뿌리치고는 그대로 병원 밖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갔다.“여보, 어디 가세요?”심해윤의 얼굴에 초조함이 스쳤다.심해윤은 뭔가 서정훈이 평소와 다르게 변한 느낌을 받았지만 구체적으로 어디가 이상한지는 콕 집어 말할 수 없었다.서정훈은 아무 말도 없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계속 밖으로 나갔다.“어머니, 아버지가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서 그런 거예요. 그냥 두세요, 밖에 좀 나가 산책하면 나을 거예요.”서현욱은 어머니를 끌어당기며 말렸다.“네 아버지가 평소랑 달라진 거 못 느꼈어?”심해윤은 화가 나서 아들을 꾸짖었다.“다르긴 뭐가 달라요? 아버지는 평소에도 저런 스타일이었잖아요?”서현욱은 별생각 없이 유유하게 대답했다.서현욱은 사실 서정훈과 거의 접촉하지 않아서 서정훈의
“사모님!”진서준은 급히 심해윤을 제지했다.“서준아, 아직 안 갔어? 정말 다행이구나. 우리 서 시장을 좀 봐줄 수 없겠어? 아무리 봐도 상태가 이상해서 그래.”심해윤은 진서준을 보고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 그의 팔을 꽉 붙잡으며 부탁했다.“저도 차 안에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어요. 사모님, 나머지는 시름 놓게 제게 맡기세요.”진서준이 심해윤을 진정시켰다.“그래도...”서정훈을 전적으로 진서준에게 맡기자니 심해윤은 조금 불안해졌다.“사모님, 저를 믿어 주세요. 아까 제가 아드님의 병도 치료했잖아요?”진서준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알았어, 너만 믿을게.”심해윤은 진서준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서준아, 서 시장 안전을 부탁할게.”진서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돌아 서정훈을 따라갔다.서정훈은 혼이 빠져나간 듯한 모습이었지만 걷는 내내 지나가는 사람과 부딪히지 않았고 심지어 차에도 부딪히지 않았다.진서준은 그렇게 서정훈을 따라가다가 결국 한 호텔에 도착했다.그 후, 둘은 8층까지 계단을 올라갔고 서정훈은 한 호텔 방 앞에서 멈췄다.서정훈이 문을 두드리자 방문이 벌컥 열렸다.“서 시장님, 오셨군요.”서정훈의 아무런 표정도 없는 얼굴을 보고 박운기는 교활한 미소를 지었다.서정훈이 들어가자 문은 곧바로 닫혔다.“병원에서 제대로 말씀드리려 했는데 제 말을 듣지 않더군요. 그럼 제가 이런 비상 수단을 사용할 수밖에 없죠.”방 안에서 박운기는 이미 준비된 계약서를 꺼내며 서정훈 앞으로 걸어갔다.“자, 계약서에 사인하고 손도장도 찍어주세요. 다 하시면 돌아가도 좋습니다.”서정훈은 마치 로봇처럼 계약서와 펜을 받아 들고 계약서에 서명한 후 손도장까지 찍었다.모든 것이 끝난 후, 박운기는 서정훈의 얼굴을 툭툭 치며 말했다.“처음부터 이렇게 말을 들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오다 선생님, 이제 됐습니다.” 박운기가 웃으며 산양수염 노인에게 말했다.쾅!갑자기 누군가 발차기를 날려 꼭 닫혀 있던 방문을 열어젖혔다.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오다 하유가 당황해서 어쩔 바를 모르는 모습을 본 진서준은 유유하게 말을 이었다.“맞아, 내가 그놈을 죽였어.”잠시 충격에 빠졌던 오다 하유는 곧바로 고개를 흔들며 강력하게 부인했다.“아니야, 절대 그럴 리가 없어! 너 같은 애송이가 어떻게 우리 형을 죽일 수 있어? 우리 오다 가문에서도 그렇고, 섬나라에서라도 우리 형 검술 실력은 상위 20위 안에 드는 수준이야.”오다 하유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섬나라에서 오다 신유의 실력이 뛰어난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라서 설령 고필두가 그를 만났다고 해도 정면으로 대결하는 걸 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섬나라 사람들은 오다 신유가 국안부 사람에게 죽었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고 구체적으로 누가 했는지는 잘 모르고 있었다.“이 자식 허풍에 속아 넘어갈 뻔했군.”오다 하유는 음침한 눈빛으로 살기를 내뿜으며 진서준을 노려봤다.옆에 있던 박운기가 눈살을 찌푸리며 끼어들었다.“오다 선생님, 이 애송이와 긴말할 필요 없습니다. 그냥 빨리 처단해 버리고 서정훈을 돌려보내죠. 서정훈이 여기 오래 있으면 저쪽에서 의심할 수도 있을 겁니다.”오다 하유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두 손으로 인결을 맺으며 주문을 중얼대기 시작했다.순식간에 오다 하유의 주위에 검은 안개 같은 기운이 피어올랐다.이 검은 안개는 빠른 속도로 모여지더니 거의 2미터에 달하는 검은 색의 무사 형태로 변했다.방이 충분히 높아서 다행이지 이 검은 무사가 손을 들면 천장이 뚫릴 뻔했다.갑자기 나타난 검은 무사를 보고 우도운은 깜짝 놀랐다.해외에서 한 가지 분야의 학문을 열심히 연구한 고학력자인 우도운은 신령이나 귀신 같은 건 믿지 않았다.그래서 자연스레 대한민국의 전통 의학을 조금 무시하기도 했다.하지만 지금 검은 안개가 무사로 변해 나타나는 걸 보고 우도운은 지금까지의 세계관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 들었다.박운기는 우도운을 흘끗 보며 평온한 표정으로 말했다.“오다 선생님은 섬나라의 음양술에 능한 분입니다. 지금 이 검은 무사는
호흡을 한 번 하는 사이에 2미터 높이의 검은 무사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며 몸이 서서히 붕괴하기 시작했다.자줏빛 번개가 칼날처럼 검은 무사의 몸에 스쳐 지나가며 온몸을 순식간에 뒤덮었다.날카로운 외마디 비명을 끝으로 검은 무사는 온몸이 공기 중의 검은 안개로 변했고 창문을 통해 불어오는 바람에 휩쓸려 사라져 버렸다.검은 무사가 사라지자 오다 하유는 비명을 지르며 시뻘건 피를 왈칵 토했고 옷은 순식간에 섬뜩한 붉은색으로 물들었다.옆에서 진서준이 어떻게 갈기갈기 찢질지 지켜보려던 박운기와 우도운은 차가운 숨을 들이마시며 얼굴이 창백해졌다.“이... 이 자식이 이겼다고?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도대체 이 자식은 인간이야? 귀신이야?”두 사람은 마주 보며 서로의 눈에서 공포를 읽어냈다.음양술이 깨지자 서정훈에 체내에 심어놨던 표식도 자연스레 함께 사라졌다.방에 들어온 순간부터 멍하니 있던 서정훈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주변의 낯선 광경을 보고는 무척 혼란스러워했다.“여기는 어디지?”서정훈이 정신을 차리자 박운기와 우도운의 이마에서 콩알만 한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서울시는 작은 도시긴 하지만 대한민국의 수많은 도시 중 하나였다.그런데 박운기 일당이 서울시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서정훈 시장에게 이런 몹쓸 짓을 한 것이었다.서정훈이 이들이 저지른 일에 죄명을 씌우고 세 사람을 체포한다면 사형일 가능성이 엄청나게 높을 것이다.서정훈은 진서준과 박운기 일행을 보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서준아, 내가 왜 여기 있지?”“서 시장님, 제가 아까 병원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시장님 몸에 저놈이 심어 놓은 표식이 있었습니다. 저놈이 그 표식을 이용해 시장님을 조종해 여기로 데려와 계약서에 사인하고 손도장을 찍게 했습니다.”진서준이 자세하게 상황을 설명했다.“뭐라고?”서정훈은 진서준의 말이 믿기지 않았지만 지금 눈앞의 상황이 그 무엇보다도 확실하게 진서준의 말이 사실이란 걸 증명해 주고 있었다.“너희들 간탱이가 부어도 단단히 부었구나.”
“뭐라고? 불법적인 일이 우리 가게에서 일어난다고? 말도 안 돼.”성현도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넌 전신전 소속이잖아. 그런데 네 오빠인 내가 어떻게 법률을 어기는 일을 하겠어?”“그럼 이 사람들은 왜 부른 거야? 집단 폭력도 불법이거든.”성미영은 차가운 시선을 보이며 성현도와 따졌다.“미영아, 이건 내가 싸우려던 게 아니야. 저 녀석이 일부러 시비 걸러 온 거라고.”성현도는 진서준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이놈이 일부러 우리 찻집에 난입해 행패를 부리고 상철을 두들겨 패서 머리에 혹이 다 나버렸어. 난 단순히 정당방위를 위해 부른 거라고.”성미영이 등장하자 성현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솔직히 실력만 놓고 보면 성현도는 성미영보다 한참 부족했다.게다가 성미영은 전신전 소속인지라 저 남녀가 군부 조직인 전신전을 적으로 돌릴 리 없었다.군대를 건드리는 순간, 무조건 좋은 결과는 있을 수 없었다.“진서준, 도대체 무슨 일이야?”성미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어라? 너희 둘이 아는 사이야?”성현도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방금 내려놨던 마음이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난 사람을 찾으러 왔어. 하씨 가문 하경범이 이 위층에 있다고 들었는데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겠어.”진서준이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그리고 또 하나, 저 위에서 불법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도 하더군.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르겠어.”이 말에 성현도의 표정이 단숨에 험악해졌고 즉시 반박에 나섰다.“헛소리 마. 우리 가게는 단순한 찻집이야. 불법적인 일 따윈 없어. 근거없는 소문을 왜 털어놓고 난리야?”“미영아, 저 녀석한테 속지 마. 난 네 사촌 오빠야. 내가 그런 불법적인 짓을 할 사람이겠어?”성미영이 곧바로 진서준에게 물었다.“진서준, 너 증거 있어?”“직접 올라가 보면 다 알게 될 거잖아?”진서준이 가볍게 말했다.“오빠, 위층으로 가자.”성미영이 단호하게 말했다.“그, 그건 좀 곤란해. 위층엔 귀
순간, 장내는 숨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모든 시선이 진서준에게 쏠렸고 사람들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다들 진서준을 그냥 얼굴만 반반한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진짜 고수였다.성현도의 부하 중 최고 실력자조차 상대가 되지 않았다.성현도의 얼굴은 시퍼렇게 질렸고 상철을 향해서 욕설을 날렸다.“쓰레기 자식, 이런 애송이 하나도 못 이겨?”부하가 지면 망신당하는 건 결국 성현도 자신이었다.이대로 체면을 구긴 채 끝낼 수는 없었다.이대로 넘어가면 앞으로 르벨 재벌 2세들 사이에서 조롱거리가 될 게 뻔했다.“이봐, 네 실력이 괜찮은 건 인정할게.”성현도가 싸늘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근데 너 혼자서 백 명을 상대할 수 있어? 천 명은? 잘 들어. 내 부하는 수도 없이 많아. 너 같은 놈 하나 처리하는 데 전화 한 통이면 충분해.”진서준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여전히 같은 말을 반복했다.“다시 말하지만 난 그냥 하경범을 찾으러 온 거야. 그 녀석만 넘기면 오늘 일은 없던 걸로 해주지.”“없던 걸로 한다고?”성현도가 그 말에 어이없어 헛웃음이 나왔다.“너 지금 누굴 상대로 협상하려 드는 거야? 난 성씨 가문의 직계야. 날 건드리면 상대해야 할 건 나 하나가 아니라 우리 가문 전체라고.”그때,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곧이어 검은색 전투복을 입은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왔다.이 남자들은 전부 성씨 가문의 경호원이었고 실력도 만만하지 않았다.그것도 한둘이 아니라 무려 50명 이상이었다.한순간에 텅 비어 있던 로비가 사람들로 꽉 찼다.“저 자식 끝났네. 이 정도 성씨 가문 인원이라면 아무리 강해도 버틸 수가 없지.”“그러게 말이야.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없잖아.”“왜 쓸데없이 성현도를 건드린 거지? 스스로 무덤을 판 거잖아.”구경꾼들은 이 광경에 각자 다른 감정을 보였다.누군가는 동정을, 누군가는 아쉬움을, 또 누군가는 짙은 흥미를 보였다.“사연아, 넌 좀 쉬어. 이놈들은 내가 처리할게.”진서준이 앞으로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키가 거의 2미터에 달하는 거구의 사내가 찻집 안으로 들어왔다.남자는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졌다.“상철아, 저놈 다리 하나 부러뜨려서 내던져.”성현도가 진서준을 가리키며 명령했다.“알겠습니다.”상철은 간단하게 대답하고는 진서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서준아, 내가 할게.”허사연의 눈에는 불꽃 같은 전투욕이 타올랐다.“조심해. 저 녀석은 횡련 종사야.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진서준이 조용히 귀띔했다.“알았어. 설령 못 이긴다고 해도 어차피 네가 있잖아?”허사연이 장난스럽게 웃었다.진서준이 곁에 있는 한, 허사연은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이봐, 사내자식이 여자 뒤에 숨는 게 말이 돼?”상철이 눈썹을 추켜세우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이봐, 껑충이. 여자를 얕보지 마. 일단 이기고 나서 말해.”허사연이 상철을 도발했다.“아가씨, 그런 기생오라비 말고 날 따르지 그래? 밤마다 널 천국으로 보내줄 수 있는데?”상철이 음흉하게 웃었다.“죽고 싶어 환장했구나.”얼굴이 싸늘해진 허사연이 주먹을 날렸다.강렬한 펀치가 공기를 가르며 폭발음을 일으켰고 그 위력은 철판도 뚫을 수 있을 정도였다.하지만 상철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내가 가만히 서 있어도 넌 날 어쩔 수 없어.”“닥쳐!”허사연이 분노에 차 주먹을 그대로 상철의 얼굴로 내리꽂았다.상철은 일부러 머리를 숙이며 대머리 정수리로 받아냈다.쿵!둔탁한 충돌음이 울려 퍼졌다.주먹이 상철의 머리를 강타했으나 대머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허사연이 몇 걸음 물러섰다.순간 손에 뜨거운 통증이 밀려왔고 뼈가 부서질 것 같았다.손을 확인하자 하얀 피부였던 손등이 새빨갛게 부어올랐다.상철은 자기 머리를 한번 쓸어내리더니 빙그레 웃었다.“아가씨, 이제 내 실력을 알겠지?”그 모습에 허사연의 승부욕이 다시 불타올랐고 콧방귀를 뀌며 다시 달려들었다.이번에는 다리를 높이 들어 올려 상철의 머리를 내려찍었다.‘머리가 단단하다고 자랑하
이렇게 예쁘고 섹시한 여자가 싸움 실력이 이렇게 대단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완전 여성판 이소룡이었다.“너, 너희들 정말 너무 대담한 거 아니야? 여기가 어디인지 알기나 해? 어디서 대놓고 싸움질이야?”종업원은 순간 놀란 뒤 분노에 찬 얼굴로 진서준와 허사연을 가리켰다.찻집이 문을 연 이후로 이렇게 난동을 부리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고 진서준과 허사연이 첫 사례였다.주변의 구경꾼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싸움 좀 하면 뭐해? 여긴 성씨 가문의 구역이야. 성씨 가문에서 한마디만 하면 저 남녀는 오늘 밤중으로 사라지겠지.”“어휴, 저 여자 너무 아까워. 저렇게 예쁜데 왜 죽지 못해서 안달이지?”“여자는 살 수도 있겠지만 남자는 무조건 죽을걸.”사람들은 저마다 수군거리며 이미 진서준과 허사연의 결말을 예상하는 듯했다.“그럼 네 말대로라면 내가 널 때린다 해도 얌전히 맞고 있어야 한다는 거야?”허사연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종업원에게 다가갔다.“오지 마!”종업원은 겁에 질려 연신 뒷걸음질 쳤다.“어떤 미친놈이 내 구역에서 소란을 피우는 거야?”그 순간, 2층에서 한 사람이 내려왔다.모두가 일제히 시선을 돌려 그 사람을 확인하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성현도가 오늘 여기 있었네?”누군가 그 청년을 알아보았다.“저 둘 끝장났네. 성현도는 악명 높은 냉혈한이야.”그 청년은 바로 찻집의 사장인 성현도였다.성현도는 르벨 재벌 2세 사이에서 유명한 인물이었다.친구에게는 무조건 의리를 지키지만 적에게는 무자비했다.성현도의 고문 방법은 수도 없이 많았고 게다가 무인으로서 무공 실력도 상당했다.“사장님, 저 남녀가 와서 난동을 부렸어요.”종업원은 성현도를 보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사장이 나온 걸 확인한 허사연은 주먹 한 방에 종업원을 기절시켜 버렸다.“뭐야?”성현도의 눈이 가늘어졌고 표정이 험악해졌다.자기 앞에서 대놓고 부하를 때리다니, 이건 너무나도 명백한 도발이었다.“아가씨, 우리 처음 보는 사이 맞지? 우리
그리고 오후 2시가 되자 진서준은 허사연을 데리고 조호가 말한 천국찻집으로 향했다.겉모습만 보면 이 찻집은 진짜 전통찻집 같았고 규모도 꽤 컸다.하지만 막상 안에 들어가 보니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1층과 2층까지는 정말 평범한 찻집처럼 꾸며져 있었고 누가 봐도 이상한 점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하지만 3층으로 올라가려면 회원권이 있어야 하거나 사장이 직접 허락한 사람만 출입할 수 있었다.“손님, 아가씨, 이쪽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진서준과 허사연이 차를 마시러 온 줄 안 종업원이 빠르게 달려와 안내하려 했다.“그럴 필요 없어. 난 하경범을 찾으러 왔거든.”진서준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네?”종업원이 순간 얼어붙었다.“혹시 하씨 가문의 하 도련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맞아.”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손님은 누구신지...”종업원이 신중하게 물었다.진서준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그냥 복수하러 왔다고 전해.”그놈 아버지라고 하는 건 자기를 모욕하는 것과 같았고 친구라고 하기도 기분이 더러웠다.그 말에 종업원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손님, 여기서 장난치지 마세요.”하경범은 르벨에서 유명한 재벌 2세였다.이 찻집의 사장과도 막역한 사이였고 여기서 일하는 직원이라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왜? 못 믿겠어?”진서준이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손님, 하 도련님에게 복수하려던 사람은 단 하루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종업원이 경고하듯 말했다.“그런 농담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닙니다.”그 말을 듣자 진서준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럼 이렇게 전해. 그 하경범이 두들겨 맞고 나자빠지게 했던 진서준이 왔으니 당장 기어 나오라고 말이야.”진서준의 뻔뻔한 태도에 종업원은 어이가 없었다.“좋습니다. 손님이 그렇게 죽고 싶다면 제가 기꺼이 도와드리죠.”종업원은 바로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문제 발생했습니다. 난동자가 있습니다.”쿵! 쿵!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건장한 남자 스무 명이 들이닥쳤다.전부 검은
진서준과 허사연은 차를 타고 조호의 회사로 향했다.이 회사는 그냥 겉치레일 뿐, 진짜 돈이 들어오는 곳은 유흥업소들이었다.유흥업소를 얕잡아보면 안 된다.운 좋게 돈 많은 도련님들이라도 걸리면 하룻밤에 수억 원이 순식간에 손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진서준 씨!”진서준이 들어서자 조호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조호는 진서준 옆에 있는 허사연을 힐끗 쳐다본 뒤 고개를 숙이고 감히 더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잡담은 그만하고 하경범을 잡아가는 제일 좋은 타이밍만 말해.”진서준이 직설적으로 물었다.이 말에 조호는 속으로 크게 놀랐다.“매일 오후마다 하경범은 천국찻집이라는 곳에 갑니다.”조호는 재빨리 대답했다.“보통은 경호원 몇 명만 데리고 가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얼씨구? 저런 인간이 매일 차나 마시러 간다고?”진서준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그게... 진서준 씨, 사실 그곳은 이름만 찻집이지 실제로는...”조호는 옆에 여성이 있다는 걸 의식해서 말을 흐렸지만 진서준은 그 뜻을 단번에 알아챘다.“알겠어.”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차를 마시는 곳이 아니라 그냥 인기 많은 인터넷 셀럽이 가득한 고급 유흥업소일 것이다.“진서준 씨, 듣자 하니 그 찻집의 주인은 성씨 가문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진짜로 움직이실 거라면 하경범이 이동 중일 때를 노리는 게 좋을 겁니다.”조호가 조심스럽게 조언했다.“응? 성씨 가문이 이런 사업도 해?”진서준은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진서준은 오영수에게서 성미영에 대한 정보를 들은 적이 있었다.정의로운 성격의 성미영이 자기 가문에서 이런 유흥업소를 운영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터였다.“네, 듣기로는 성씨 가문의 한 직계 후손이 운영한다고 합니다. 여자에 미쳐 있는 놈이라 르벨의 돈 많은 도련님들과 꽤 친분이 깊다고 하더군요.”조호는 본인이 아는 정보를 전부 쏟아냈다.“좋아, 대충 알겠어.”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조호의 회사를 나온
진서준이 허사연의 캐리어를 들어주며 옆방으로 걸어갔다.그 뒷모습을 보며 도지아는 부러움이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인간은 원래 모여서 사는 걸 선호하는 동물이다.사회를 벗어나서 혼자 살아가는 건 생각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다.가족도 친구도 없이 너무 오래 지내다 보면 결국 감정 없는 시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그렇게 되면 사람과 짐승의 차이가 없어질 것이다.“어제 전화할 때 그랬었지? 이번에 너 자기 출신을 찾으러 온 거라고.”호텔 방으로 돌아온 후, 허사연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너 원래 경성 진씨 가문 사람이잖아?”“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어. 그런데 할아버지가 예전에 말해주셨어. 사실 우리 아버지는 어릴 때 길에서 주워 온 아이였다고.”진서준은 허사연에게 숨길 생각이 없었다.허사연은 진서준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허사연이라면 이 비밀을 절대 밖으로 흘리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었다.“뭐라고? 아버님이 주워 온 아이라고?”허사연이 깜짝 놀랐다.“그래. 하지만 이 사실을 아는 건 나뿐이야. 가족 중에서도 할아버지가 나한테만 알려주셨지.”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얼마 전, 오영수가 내 등에 있는 용을 보고는 내가 용맥의 일족이라고 했어. 그래서 오영수를 따라 여기 와서 오영수 셋째 삼촌에게 내 출신에 관해 알아보려 했던 거야.”“네 등에 용이 있다고? 난 한 번도 본 적 없는데?”허사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그동안 둘이 알몸으로 함께한 시간도 적지 않은데 허사연은 한 번도 본 기억이 없었다.“내가 체내 혈기를 모을 때만 그 용이 나타나거든.”진서준이 설명을 이어갔다.“그런데 오영수 삼촌이 아직 돌아오질 않아서 일단은 여기서 며칠 기다려야 해.”“아니, 그럼 오씨 가문에서 널 안 재워줬어?”허사연이 의아해했다.명문대가인 오씨 가문에 빈방이 없을 리가 없었다.“그날 오영수를 찾아갔는데 마침 오영수 할아버지가 위중했어. 그리고 그 집안엔 그 어르신을 그냥 보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었지.”진서준이 담담하게
“진짜 예쁜 새색시 숨겨놓고 있었네?”허사연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누구라도 자기 남자 방에 예쁘고 몸매가 완벽한 여자 하나가 같이 있는 걸 보면 의심 안 할 수가 없었다.게다가 지금은 아침이었다.설마 이 여자가 아침에 막 찾아온 건 아니겠지?“사연아, 오해야. 내가 제대로 설명할게.”진서준은 머리가 띵해졌고 뇌가 지진이라도 난 것 같았다.“아가씨, 오해하지 마세요. 어제 저랑 진서준이 같은 방에서 잔 건 맞지만 진짜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저 밤새 한숨도 못 잤다니까요?”도지아가 황급히 해명에 나섰다.“네? 밤새 안 자고도 아무 일 없었다고요?”허사연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되물었다.“설마 밤새 불태우느라 못 잔 건 아니겠죠?”허사연의 농담과 진담이 뒤섞인 말에 진서준은 헛웃음만 나왔다.“사연아, 이쪽은 도지아야. 우리 진짜 그냥 친구야. 일단 들어와. 천천히 설명할게.”허사연이 방에 들어오자 진서준은 서로에게 소개했다.그러고는 이 방에서 일어난 상황을 설명했다.“도지아는 황예은이 소개해 준 환자야. 다리 치료를 부탁받았거든. 종아리를 봐봐. 이틀 전에 내가 직접 발라준 연고가 있어.”허사연이 내려다보자 확실히 연고가 발라져 있었다.“그리고 도지아가 밤새 안 잔 건 원기를 수련하느라 그랬던 거야. 너도 예전에 수련한다고 며칠씩 안 잔 적 있잖아?”허사연은 오해가 풀리자 그제야 빙그레 웃었다.“내가 뭐 어쨌다고 그렇게 호들갑이야?”“혹시라도 오해할까 봐 그러는 거잖아.”진서준이 빠르게 대답했다.“뭐야? 내가 그렇게 의심 많고 질투 많은 여자로 보여?”허사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아, 아니지. 우리 사연은 누구보다 속이 넓은 부드러운 여자지.”진서준이 급히 정정했다.“됐어, 너 겁먹은 거 너무 귀엽다.”허사연이 피식 웃었다.“넌 여기 좀 쉬고 있어. 내가 방 하나 잡고 올게.”진서준은 더 머뭇거릴 틈도 없이 벌떡 일어나 나가 버렸다.진서준의 뒷모습을 보며 허사연은 그제야 웃음을 터뜨렸다.“도지아 씨, 진서준이
“내가 가면 안 돼?”사실 진서준은 거절하려 했었다.르벨은 안개가 짙게 깔린 늪지대 같은 곳이라 진서준조차도 어디에 함정이 있을지 가늠하기 어려웠다.그러니 허사연이 온다면 다칠 가능성이 컸다.하지만 거절하면 허사연이 상처받을 게 뻔했다.“당연히 되지. 지금 위치 보낼게.”진서준은 단호하게 말하며 위치를 보냈다.자기 여자를 지킬 자신도 없으면서 강자들을 상대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자기야, 잘 자.”허사연이 애정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너도 일찍 자.”진서준이 다정하게 답했다.전화를 끊고 나니 진서준의 졸음이 싹 가셨다.진서준은 창가로 다가가 이 화려한 도시를 내려다봤다.“오씨 가문, 안씨 가문, 하씨 가문... 너희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든 난 전부 박살 낼 거야. 이번엔 반드시 나와 아버지의 정체를 밝혀내고 말겠어.”진서준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그렇게 별다른 사건 없이 밤이 지나갔다.다음 날 아침.진서준이 막 눈을 뜨자마자 도지아의 흥분한 외침이 들려왔다.“진서준, 됐어. 나 생겼어!”도지아는 눈 밑이 시커멓게 변해 있었는데 밤새 잠을 자지 않은 게 분명했다.진서준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너 아직 처녀 아니었어? 대체 어떻게 임신한 거야?”“미친놈아, 임신은 개뿔, 무슨 헛소리야?”도지아는 얼굴이 빨개지며 진서준을 노려봤다.“그럼 왜 아침부터 난리야?”진서준이 되물었다.보통 사람이라면 이렇게 아침부터 흥분해 날뛰지 않을 것이다.“어제 네가 준 수련법 기억나지? 나 벌써 원기를 형성할 수 있게 됐어.”자기가 대단하다고 여긴 도지아는 자랑스럽게 선언했다.고작 하룻밤 만에 원기를 형성한 건 확실히 대단한 일이었다.“뭐? 그렇게 빠르다고? 너 타고난 천재 맞네?”진서준이 다소 의아한 표정을 보였다.보통 무인은 원기를 익히는 데만 최소 1년이 걸리는데 그것도 매일 꾸준히 수련할 경우에만 발생하는 일이었다.심지어 재능 있는 자들도 한두 달은 족히 걸린다.그런데 도지아는 단 하룻밤에 이 어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