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신경 쓸 필요 없어.”진서준은 설명할 생각이 없었다.설명해 봤자 상대방이 이해할 리도 없어 괜히 입만 아플 뿐이다.“이제 네 머릿속 독충도 없애줬으니 대체 누가 너희한테 조슬기를 잡아 오라고 시켰는지 말할 수 있겠지?”진서준이 무심하게 말하자 장강수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좋아, 말할게. 대신 우리 셋은 살려줘야 해.”“미리 말해둘게. 목숨은 살려줄 수 있어도 너희 단전은 박살 낼 거야.”은청준이 끼어들었다.이건 은청준의 마지노선이었기에 절대 양보할 수 없었다.진서준도 그 제안을 반대하지 않았다.이 세 놈을 그냥 풀어줬다간 서남 지역의 백성들이 또다시 고통받을 것이기에 차라리 폐인으로 만들어버리는 게 나을 것이다.“좋아, 하지만 우리도 조건이 하나 있어. 우리 단전이 파괴되었다는 사실을 절대 외부에 알리지 마. 그렇지 않으면 난 죽는 한이 있어도 끝까지 입을 닫겠어.”장강수의 목소리는 결연했다.장강수 일행은 서남 지역에서 수많은 유명 인사의 원한을 샀다.만약 장강수 일행이 더 이상 무인이 아니라는 소문이 퍼지면 원수들에게 쫓겨 개죽음당할 게 뻔했다.“그 정도는 약속하지.”은청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우리에게 조슬기 씨를 납치하라고 시킨 사람은...”장강수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갑자기 문이 거칠게 걷어차였다.곧이어 남사 종문의 제자들이 무리 지어 방 안으로 밀려들었다.선두에 선 청년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곧바로 장강수를 노려보며 외쳤다.“이 악당 놈들이 감히 숭산까지 쫓아와? 오늘은 절대 그냥 못 넘어가!”그러고는 주위 사람이 반응할 틈도 없이 단숨에 장강수의 목을 비틀어버렸다.그 움직임은 아무런 주저도 없이 너무 신속했다.이 장면에 진서준은 눈을 가늘게 뜨며 속으로 비웃었다.일찍 올 수도, 늦게 올 수도 있었는데 하필이면 우리가 막 배후를 밝혀내려던 순간에 나타나 대뜸 목을 꺾어버리다니, 이걸 우연이라고 믿으라고?진서준은 발가락으로라도 믿을 수 없었다.이 자식 몸에서 수상한 냄새가 진하게 났다.“도
하지만 종문을 모욕하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붙어보자고? 얼씨구, 내가 너희를 무서워할 것 같아?”은청준은 전혀 주눅이 들지 않았다.하지만 은청준 뒤에 있는 곤륜 제자들은 살짝 주춤했다.“선배, 오늘은 그냥 넘어가죠. 나중에 더 좋은 날 잡아서 제대로 붙으면 되잖아요.”한 제자가 뒤에서 조용하게 속삭였다.“지금 우리 다들 심하게 다쳤는데 이 자리에서 정식으로 붙는 건 어리석은 짓입니다.”은청준은 미간을 찌푸린 채 제자들을 돌아봤다.이 제자의 말이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 다들 상처가 생각보다 꽤 심했다.이 상태에서 싸웠다가는 손해 보는 건 곤륜 제자들뿐이었다.게다가 돌아가면 이장로에게 한 소리 들을 게 뻔했다.4대 종문 간의 충돌은 무조건 정식적인 도론 대회에서 해결해야 하지 사적으로 해결하는 건 절대 금지였다.만약 몰래 싸우려고 마음먹었다면 상대에게 고자질할 기회조차 주지 말고 그 자리에서 깔끔하게 숨통을 끊어놓아야 했다.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특별했다.이틀 뒤가 4대 종문 대회인데 지금 여기서 곤륜 제자들이 죽으면 대충 조사해도 바로 남사 짓이라는 게 드러날 게 뻔했다.이런 상황에 놓이게 되면 곤륜과 남사는 한쪽이 전멸할 때까지 목숨 걸고 싸울 것이다.“왜, 은청준? 겁먹었어?”도권우가 비웃으며 도발했다.은청준도 절대 무지하고 덤벙대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태연하게 콧방귀를 끼며 대응했다.“도권우, 이틀 후 대결에서 널 완전히 박살 내주지.”“좋아, 기대하고 있을게.”도권우 역시 코웃음 쳤다.“아, 그리고 하나 더. 내 약혼녀 잘 보호해. 너희가 제대로 못 지키겠으면 내가 직접 지켜줄 테니까.”도권우는 바로 부드러운 눈빛으로 조슬기를 바라봤다.“슬기야, 나랑 같이 가는 게 어때?”하지만 조슬기의 표정은 차가웠다.“도권우 씨, 우리 약혼은 20년 전에 어른들이 그냥 한 말일 뿐이에요.”“그냥 한 말이라니? 우리 아버지가 그러는데, 그땐 결코 농담이 아니었다는데?”도권우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슬기
돌아가는 길에 진서준이 질문을 던졌다.“조슬기 씨, 아까 그 도권우라는 사람은 대체 뭐 하는 사람이죠?”조슬기와 약혼한 사람이라면 남사의 일반 제자일 수 없었다.조슬기가 시무룩하게 대답했다.“남사 종문의 종주 아들이에요.”“어쩐지 그렇게 당당하더라고요.”진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신분상으로 보면 조슬기와 도권우는 꽤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하지만 결혼이라는 건 결국 개인의 선택이다.지금 세상은 자유연애가 대세다.부모가 정해준 결혼 같은 건, 이제 시대에 뒤떨어진 유물이나 다름없었다.조슬기가 도권우에게 전혀 마음이 없다는 건 누가 봐도 뻔한 사실이었다.문제는 도권우 쪽이 조슬기에게 관심이 지나치게 많아 보인다는 사실이었다.그러니 참 난감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한쪽은 결혼하고 싶지 않은데 다른 한쪽은 어떻게든 결혼하고 싶어 했다.게다가 이건 양쪽 부모끼리 정한 것이라서 조슬기가 쉽사리 거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아가씨, 저는 아까 그 사람 영 마음에 들지 않아요.”신수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조금 전 배후를 막 알아낼 뻔했는데 그 녀석이 딱 들어오자마자 증인을 죽였잖아요? 이거 누가 봐도 입막음이에요.”은청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 그 녀석에게 아무 문제 없다곤 도저히 못 믿겠어. 우린 각자 다른 길로 시내에 갔는데 그 녀석이 어떻게 우리가 노래 부르는 걸 알았지? 게다가 우리가 위험에 처했다는 건 또 어떻게 알았고?”그때, 진서준이 뜬금없이 물었다.“너희 4대 종문끼리는 암암리에 서로를 암살하고 그래?”진서준은 4대 종문에 관한 정보가 많지 않았다.게다가 국안부 문서에도 관련 기록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당연하지. 그런 상황이 없었으면 뭐 하러 4대 종문 대회랑 논도 대회를 벌이겠어?”은청준이 눈을 부릅뜨며 대꾸하자 진서준이 흥미를 보였다.“논도 대회는 또 뭔데?”“너 질문 진짜 많다? 뭐 어린아이도 아니고 궁금한 게 왜 그리 많아?”은청준이 짜증 난 듯 쏘아붙였다.그러자 진서준은
“맞아. 해준 선배가 나서지 않았으면 너 벌써 그 세 악당에게 처참하게 죽었을 거야.”“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무조건 사람 구해줘야 해.”모두가 입을 모아 진서준을 비난했다.그 말에 진서준은 웃음을 터뜨렸다.“이 자식이 날 구했다고? 자기가 실력이 부족해서 단전이 파괴된 게 아니고? 너희가 날 조롱하느라 여념이 없더니 이제 와서 구해달라고 하면 내가 그 말을 들을 것 같아? 나 김평안이 그렇게 만만해 보여?”진서준의 표정은 점점 더 싸늘해졌다.“김평안 씨...”“조슬기 씨, 저 사람을 옹호하려고 하지 마세요.”진서준은 손을 들어 조슬기의 말을 끊었다.“죄는 지은 대로 가고 덕은 닦은 대로 간다고 했어요. 저 녀석들이 날 어떻게 무시했는지 난 제대로 기억하고 있습니다.”이 말에 곤륜 제자들은 크게 분노해 언성을 높였고 신수란 역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넌 우리가 변경에서 만난 그 애송이랑 정말 똑같아. 속이 왜 그렇게 좁아?”“맞아, 난 속이 원래 좁아.”진서준이 쌀쌀하게 받아치자 은청준의 얼굴이 굳어졌다.“정말 우리 후배를 치료하지 않을 거야?”“네 제자에게 무릎 꿇고 내게 세 번 머리 조아리면 뼈를 치료해 줄게.”진서준이 조건을 제시하자 주해준이 갑자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꿈 깨! 난 여기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너 같은 놈에게 무릎 꿇고 구걸하진 않을 거야.”“김평안, 너 요구가 너무 지나치구나.”은청준이 이를 악물었다.자고로 남자는 경솔하게 남에게 무릎 꿇지 않는다고 했다.주해준이 진서준에게 무릎을 꿇고 사죄한다면 설령 뼈가 회복될 수 있어도 더 이상 곤륜에서 고개를 들고 떳떳하게 살 수 없을 것이다.“이게 내가 원하는 전부야. 너희가 동의 안 해도 상관없어.”진서준이 평온하게 말했다.“청준 선배, 저 녀석에게 구걸하지 마세요. 나중에 성약당에 가서 장로님께 도움을 청하면 될 거예요.”주해준이 단호하게 자기 생각을 밝혔다.그때 은청준이 갑자기 배수정을 쳐다보았다.“평온 씨, 듣기로는 소림 금
“김평안 씨!”주자청은 예의 있게 문을 두드렸다.“들어오세요.”주자청이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진서준은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김평안 씨,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주자청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조건은 방금 그 녀석에게 말했어요.”진서준이 담담하게 말했다.“뼈를 모두 붙이려면 세 번 머리 조아리는 조건입니다.”그 말을 듣자 주자청은 한숨을 푹 쉬었다.“제가 우리 제자들에게 항상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 녀석들은 도무지 듣질 않아요. 김평안 씨가 조건을 제시하셨다면 저도 더 이상 설득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김평안 씨에게 부탁드릴 일이 하나 더 있습니다.”“무슨 일이죠?”진서준은 조금 호기심을 보였다.보통 주자청이 진서준을 찾는 이유는 사람을 구하기 위한 일이었기 때문이다.“우리 곤륜의 제자들은 전부 내상을 입어 이틀 후의 대회에 출전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때는 은청준 혼자밖에 없는데 그 녀석이 다섯 경기 연승을 하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김평안 씨가 잠시 우리 곤륜의 진영에 합류해 주셨으면 합니다. 곤륜이 최종 승리를 거두면 보상으로 천년병제련을 김평안 씨께 드리겠습니다.”진서준의 동공이 살짝 흔들렸다.이 제안은 진서준의 구미를 끌만 한 제안이었다.진서준이 이번에 숭산에 온 이유는 바로 천년병제련 때문이었다.이 마지막 약초를 얻으면 진서라의 체내 독을 깔끔하게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4대 종문 제자들은 전부 실력이 평범치 않은 고수인지라 진서준 혼자서 다섯 경기를 이기려면 확실히 어려울 것이다.게다가 신농 사람들이 대회에서 진서준을 노리고 있을 게 뻔했다.유지수도 대회에 등장할 거라고 예고한 이상, 진서준도 확실히 도우미가 필요했다.“장로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진서준이 말을 이었다.“저는 잠시 당신들 곤륜 종문에 합류해 이 대회를 승리로 이끌겠습니다.”“진짜 다행이네요. 김평안 씨가 곤륜에 합류하신다면 이번 승리는 확실할 겁니다.”주자청이 웃으며 가슴을 쓸어내렸
진서준은 신속하게 눈길을 한 바퀴 돌렸다.임배, 은범, 그리고 용전.다들 친숙한 얼굴이었다.맨 앞에 앉은 그 여자는 진서준의 예상대로 바로 유지수였다.유지수를 본 순간, 진서준의 눈에서 분노가 피어올랐다.허사연의 상처는 모두 이 여자가 남긴 것이었고 이 원한은 진서준이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지현민 주지님, 후배 유지수입니다. 저희 신농 장로들이 경지를 돌파하는 중이라 이번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유지수가 입을 열어 설명했다.“괜찮습니다, 유지수 시주님, 여기 오시느라 고생하셨으니 제가 제자를 시켜 시주님들을 숙소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지현민의 말에 유지수 일행이 자리에서 일어섰다.“감사합니다, 지현민 지주님.”진서준은 몰래 그들을 따라가 그들의 숙소에 도착했다.“다들 편히 쉬어. 내일 대회에서 우리 신농 풍모를 제대로 보여주어야 해.” 유지수가 신농 제자들에게 당부하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습니다.”이 장면을 본 진서준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은범과 그 일행이 유지수의 말을 따르는 모습은 마치 명령을 따르는 듯했다.유지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사람이었다.1년 넘게 수련했다고 해서 실력이 어마어마하게 강해질 수는 없을 것이다.게다가 유지수가 수련한 건 선법도 아니었다.진서준은 그 의문을 마음속에 깊이 묻어두었다.모든 사람이 방으로 돌아가자 진서준은 창문을 통해 조용히 유지수의 방에 침입했다.“유지수!”진서준은 유지수를 살기가 번뜩이는 눈빛으로 유지수를 노려보며 소리쳤다.“어라?”유지수는 자리에서 돌아서서 몰래 방에 들어온 진서준을 바라보았다.“진서준? 너 정말 여기 온 거야? 믿을 수 없네?”진서준을 바라보는 유지수의 표정은 두려움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오히려 얼굴에 조롱 섞인 미소가 떠올랐다.“너 서라에게 독을 놓고 날 위협한 뒤, 이번에는 사연도 사정없이 때렸지? 넌 절대 용서할 수 없어!”진서준은 화산이 폭발하듯이 분노를 터뜨렸다.“그럼 어디 한번
“우리 아버지는 신농 금지구역에 갇혀 있어. 근데 내가 어떻게 네가 아버지를 잡고 있다는 말을 믿을 수 있어?”진서준은 싸늘한 눈빛으로 유지수를 쏘아봤다.“믿지 않아도 좋아. 그럼 얼른 날 한 방에 쳐 죽여.”유지수는 실실 웃으며 굳이 해명하려고 하지 않았다.지금 주도권은 유지수의 손에 있었다.유지수는 진서준을 위협할 무언가가 있으면 진서준이 자기를 공격하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유지수 네 이놈!”진서준이 주먹을 꽉 잡자 뼈마디 소리가 굵직하게 났다.진서준은 당장이라도 유지수를 한 방에 쳐서 죽이고 싶었지만 굳이 리스크를 안고 싶지 않았다.만약 유지수가 정말 아버지를 공제하고 있다면 진서준의 충동으로 아버지의 생명이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왜 그래? 점점 나한테 빠져드는 거야?”유지수가 여유롭게 웃으며 진서준을 도발했다.“내 손에 네 약점이 잡히지 않길 기도하는 게 좋을 거야.”진서준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 더 싸늘했다.“네가 내 부탁 세 가지를 들어주기 전까진 난 절대 네게 약점을 잡히지 않을 거야.”유지수는 태연하게 앉아 스스로 물을 따랐다.“진서준, 네가 날 이길 수 없는 이유가 뭔지 알아? 넌 네 주변 사람들을 너무 신경 써.”유지수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눈빛 속에 살기를 내비쳤다.“나처럼 주변 사람들을 다 도구로 써야 해. 그래야 한 걸음씩 올라가서 결국 이 세상의 정상에 설 수 있는 거야.”“넌 감정 없는 미친년일 뿐이야.”진서준의 태도는 여전히 냉랭했다.“맞아, 난 감정이 없어. 감정이 있던 난 네가 감옥에 갔을 때 이미 죽었거든.”유지수는 진서준의 쌀쌀한 눈빛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직시했다.유지수의 눈에도 차가운 냉기가 가득했다.“이 세상은 약육강식이야. 내가 약하면 강한 놈들이 날 짓밟기 마련이야. 그러니까 강해져야 해. 난 그냥 살아남고 싶을 뿐이야. 그게 뭐가 잘못됐지?”유지수가 변명을 늘어놨다.“살아남기 위해서라고? 그럼 서울에서 사연을 공격한 건 뭐야?”진서준이 분노에
“지수 선배, 들어가도 괜찮을까요?”여기는 오래 있을 곳이 아니라고 판단한 진서준은 유지수를 빤히 쏘아보며 손가락질한 후, 창문을 통해 몸을 날렸다.“들어와.”유지수가 차갑게 대답하자 은범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지수 선배, 얼굴이 왜 그래요?”은범은 유지수의 뺨에 남은 손자국을 단번에 알아챘다.“설마 누가 지수 선배한테 따귀를 날린 겁니까? 어느 미친놈이에요? 제가 가서 바로 혼내줄게요!”유지수는 호들갑을 떠는 은범을 바라보며 무덤덤하게 말했다.“아냐, 방금 모기 잡다가 실수로 얼굴을 친 거야.”“네? 모기요?”그 말에 은범은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누가 모기 잡다가 자기 얼굴에 손자국에 남을 정도로 세게 후려치지?하지만 유지수가 굳이 진실을 밝히려고 하지 않자 은범은 억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날 찾은 이유가 뭐야?”유지수가 화제를 돌렸다.“아, 한 사람 때문에 왔어요.”은범이 본론으로 들어갔다.“누구 얘기야?”“은청준이요.”은청준의 이름을 뱉자마자 은범의 눈빛이 불타오르듯 강렬해졌다.“그놈은 우리 사촌 형인데 예전부터 쭉 날 무시했어요. 지금 어렵게 그놈과 링 위에서 싸울 기회가 생겼는데, 난 이 소중한 기회를 꼭 내게 줬으면 합니다.”명문대가에서 내부 투쟁은 흔히 보는 일이었다.은범도 예외는 아니었다.아주 오래전부터 은청준은 은씨 가문에서 공인하는 천재였다.반면 은범은 재능이 평범했기에 두 사람 사이의 차이는 하늘과 땅 사이처럼 컸다.하지만 지금 은범은 신농에서 서서히 두각을 드러냈다.지금 은범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은 바로 은청준을 짓밟아 오랜 세월 동안 무시당했던 모든 이들에게 자기 실력을 증명하고 싶었다.“좋아. 그럼 네가 그 녀석과 한 판 붙어.”유지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승낙했다.“감사합니다, 지수 선배!”은범이 고마움을 연달아 표현하고는 바로 자리를 떠나지 않고 우물쭈물 해하며 뭔가 더 말하려 했다.”“할 얘기 더 있어? 뭐든지 바로 말해.”유지수가 담담하게
“뭐라고? 불법적인 일이 우리 가게에서 일어난다고? 말도 안 돼.”성현도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넌 전신전 소속이잖아. 그런데 네 오빠인 내가 어떻게 법률을 어기는 일을 하겠어?”“그럼 이 사람들은 왜 부른 거야? 집단 폭력도 불법이거든.”성미영은 차가운 시선을 보이며 성현도와 따졌다.“미영아, 이건 내가 싸우려던 게 아니야. 저 녀석이 일부러 시비 걸러 온 거라고.”성현도는 진서준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이놈이 일부러 우리 찻집에 난입해 행패를 부리고 상철을 두들겨 패서 머리에 혹이 다 나버렸어. 난 단순히 정당방위를 위해 부른 거라고.”성미영이 등장하자 성현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솔직히 실력만 놓고 보면 성현도는 성미영보다 한참 부족했다.게다가 성미영은 전신전 소속인지라 저 남녀가 군부 조직인 전신전을 적으로 돌릴 리 없었다.군대를 건드리는 순간, 무조건 좋은 결과는 있을 수 없었다.“진서준, 도대체 무슨 일이야?”성미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어라? 너희 둘이 아는 사이야?”성현도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방금 내려놨던 마음이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난 사람을 찾으러 왔어. 하씨 가문 하경범이 이 위층에 있다고 들었는데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겠어.”진서준이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그리고 또 하나, 저 위에서 불법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도 하더군.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르겠어.”이 말에 성현도의 표정이 단숨에 험악해졌고 즉시 반박에 나섰다.“헛소리 마. 우리 가게는 단순한 찻집이야. 불법적인 일 따윈 없어. 근거없는 소문을 왜 털어놓고 난리야?”“미영아, 저 녀석한테 속지 마. 난 네 사촌 오빠야. 내가 그런 불법적인 짓을 할 사람이겠어?”성미영이 곧바로 진서준에게 물었다.“진서준, 너 증거 있어?”“직접 올라가 보면 다 알게 될 거잖아?”진서준이 가볍게 말했다.“오빠, 위층으로 가자.”성미영이 단호하게 말했다.“그, 그건 좀 곤란해. 위층엔 귀
순간, 장내는 숨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모든 시선이 진서준에게 쏠렸고 사람들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다들 진서준을 그냥 얼굴만 반반한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진짜 고수였다.성현도의 부하 중 최고 실력자조차 상대가 되지 않았다.성현도의 얼굴은 시퍼렇게 질렸고 상철을 향해서 욕설을 날렸다.“쓰레기 자식, 이런 애송이 하나도 못 이겨?”부하가 지면 망신당하는 건 결국 성현도 자신이었다.이대로 체면을 구긴 채 끝낼 수는 없었다.이대로 넘어가면 앞으로 르벨 재벌 2세들 사이에서 조롱거리가 될 게 뻔했다.“이봐, 네 실력이 괜찮은 건 인정할게.”성현도가 싸늘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근데 너 혼자서 백 명을 상대할 수 있어? 천 명은? 잘 들어. 내 부하는 수도 없이 많아. 너 같은 놈 하나 처리하는 데 전화 한 통이면 충분해.”진서준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여전히 같은 말을 반복했다.“다시 말하지만 난 그냥 하경범을 찾으러 온 거야. 그 녀석만 넘기면 오늘 일은 없던 걸로 해주지.”“없던 걸로 한다고?”성현도가 그 말에 어이없어 헛웃음이 나왔다.“너 지금 누굴 상대로 협상하려 드는 거야? 난 성씨 가문의 직계야. 날 건드리면 상대해야 할 건 나 하나가 아니라 우리 가문 전체라고.”그때,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곧이어 검은색 전투복을 입은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왔다.이 남자들은 전부 성씨 가문의 경호원이었고 실력도 만만하지 않았다.그것도 한둘이 아니라 무려 50명 이상이었다.한순간에 텅 비어 있던 로비가 사람들로 꽉 찼다.“저 자식 끝났네. 이 정도 성씨 가문 인원이라면 아무리 강해도 버틸 수가 없지.”“그러게 말이야.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없잖아.”“왜 쓸데없이 성현도를 건드린 거지? 스스로 무덤을 판 거잖아.”구경꾼들은 이 광경에 각자 다른 감정을 보였다.누군가는 동정을, 누군가는 아쉬움을, 또 누군가는 짙은 흥미를 보였다.“사연아, 넌 좀 쉬어. 이놈들은 내가 처리할게.”진서준이 앞으로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키가 거의 2미터에 달하는 거구의 사내가 찻집 안으로 들어왔다.남자는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졌다.“상철아, 저놈 다리 하나 부러뜨려서 내던져.”성현도가 진서준을 가리키며 명령했다.“알겠습니다.”상철은 간단하게 대답하고는 진서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서준아, 내가 할게.”허사연의 눈에는 불꽃 같은 전투욕이 타올랐다.“조심해. 저 녀석은 횡련 종사야.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진서준이 조용히 귀띔했다.“알았어. 설령 못 이긴다고 해도 어차피 네가 있잖아?”허사연이 장난스럽게 웃었다.진서준이 곁에 있는 한, 허사연은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이봐, 사내자식이 여자 뒤에 숨는 게 말이 돼?”상철이 눈썹을 추켜세우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이봐, 껑충이. 여자를 얕보지 마. 일단 이기고 나서 말해.”허사연이 상철을 도발했다.“아가씨, 그런 기생오라비 말고 날 따르지 그래? 밤마다 널 천국으로 보내줄 수 있는데?”상철이 음흉하게 웃었다.“죽고 싶어 환장했구나.”얼굴이 싸늘해진 허사연이 주먹을 날렸다.강렬한 펀치가 공기를 가르며 폭발음을 일으켰고 그 위력은 철판도 뚫을 수 있을 정도였다.하지만 상철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내가 가만히 서 있어도 넌 날 어쩔 수 없어.”“닥쳐!”허사연이 분노에 차 주먹을 그대로 상철의 얼굴로 내리꽂았다.상철은 일부러 머리를 숙이며 대머리 정수리로 받아냈다.쿵!둔탁한 충돌음이 울려 퍼졌다.주먹이 상철의 머리를 강타했으나 대머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허사연이 몇 걸음 물러섰다.순간 손에 뜨거운 통증이 밀려왔고 뼈가 부서질 것 같았다.손을 확인하자 하얀 피부였던 손등이 새빨갛게 부어올랐다.상철은 자기 머리를 한번 쓸어내리더니 빙그레 웃었다.“아가씨, 이제 내 실력을 알겠지?”그 모습에 허사연의 승부욕이 다시 불타올랐고 콧방귀를 뀌며 다시 달려들었다.이번에는 다리를 높이 들어 올려 상철의 머리를 내려찍었다.‘머리가 단단하다고 자랑하
이렇게 예쁘고 섹시한 여자가 싸움 실력이 이렇게 대단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완전 여성판 이소룡이었다.“너, 너희들 정말 너무 대담한 거 아니야? 여기가 어디인지 알기나 해? 어디서 대놓고 싸움질이야?”종업원은 순간 놀란 뒤 분노에 찬 얼굴로 진서준와 허사연을 가리켰다.찻집이 문을 연 이후로 이렇게 난동을 부리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고 진서준과 허사연이 첫 사례였다.주변의 구경꾼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싸움 좀 하면 뭐해? 여긴 성씨 가문의 구역이야. 성씨 가문에서 한마디만 하면 저 남녀는 오늘 밤중으로 사라지겠지.”“어휴, 저 여자 너무 아까워. 저렇게 예쁜데 왜 죽지 못해서 안달이지?”“여자는 살 수도 있겠지만 남자는 무조건 죽을걸.”사람들은 저마다 수군거리며 이미 진서준과 허사연의 결말을 예상하는 듯했다.“그럼 네 말대로라면 내가 널 때린다 해도 얌전히 맞고 있어야 한다는 거야?”허사연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종업원에게 다가갔다.“오지 마!”종업원은 겁에 질려 연신 뒷걸음질 쳤다.“어떤 미친놈이 내 구역에서 소란을 피우는 거야?”그 순간, 2층에서 한 사람이 내려왔다.모두가 일제히 시선을 돌려 그 사람을 확인하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성현도가 오늘 여기 있었네?”누군가 그 청년을 알아보았다.“저 둘 끝장났네. 성현도는 악명 높은 냉혈한이야.”그 청년은 바로 찻집의 사장인 성현도였다.성현도는 르벨 재벌 2세 사이에서 유명한 인물이었다.친구에게는 무조건 의리를 지키지만 적에게는 무자비했다.성현도의 고문 방법은 수도 없이 많았고 게다가 무인으로서 무공 실력도 상당했다.“사장님, 저 남녀가 와서 난동을 부렸어요.”종업원은 성현도를 보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사장이 나온 걸 확인한 허사연은 주먹 한 방에 종업원을 기절시켜 버렸다.“뭐야?”성현도의 눈이 가늘어졌고 표정이 험악해졌다.자기 앞에서 대놓고 부하를 때리다니, 이건 너무나도 명백한 도발이었다.“아가씨, 우리 처음 보는 사이 맞지? 우리
그리고 오후 2시가 되자 진서준은 허사연을 데리고 조호가 말한 천국찻집으로 향했다.겉모습만 보면 이 찻집은 진짜 전통찻집 같았고 규모도 꽤 컸다.하지만 막상 안에 들어가 보니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1층과 2층까지는 정말 평범한 찻집처럼 꾸며져 있었고 누가 봐도 이상한 점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하지만 3층으로 올라가려면 회원권이 있어야 하거나 사장이 직접 허락한 사람만 출입할 수 있었다.“손님, 아가씨, 이쪽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진서준과 허사연이 차를 마시러 온 줄 안 종업원이 빠르게 달려와 안내하려 했다.“그럴 필요 없어. 난 하경범을 찾으러 왔거든.”진서준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네?”종업원이 순간 얼어붙었다.“혹시 하씨 가문의 하 도련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맞아.”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손님은 누구신지...”종업원이 신중하게 물었다.진서준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그냥 복수하러 왔다고 전해.”그놈 아버지라고 하는 건 자기를 모욕하는 것과 같았고 친구라고 하기도 기분이 더러웠다.그 말에 종업원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손님, 여기서 장난치지 마세요.”하경범은 르벨에서 유명한 재벌 2세였다.이 찻집의 사장과도 막역한 사이였고 여기서 일하는 직원이라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왜? 못 믿겠어?”진서준이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손님, 하 도련님에게 복수하려던 사람은 단 하루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종업원이 경고하듯 말했다.“그런 농담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닙니다.”그 말을 듣자 진서준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럼 이렇게 전해. 그 하경범이 두들겨 맞고 나자빠지게 했던 진서준이 왔으니 당장 기어 나오라고 말이야.”진서준의 뻔뻔한 태도에 종업원은 어이가 없었다.“좋습니다. 손님이 그렇게 죽고 싶다면 제가 기꺼이 도와드리죠.”종업원은 바로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문제 발생했습니다. 난동자가 있습니다.”쿵! 쿵!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건장한 남자 스무 명이 들이닥쳤다.전부 검은
진서준과 허사연은 차를 타고 조호의 회사로 향했다.이 회사는 그냥 겉치레일 뿐, 진짜 돈이 들어오는 곳은 유흥업소들이었다.유흥업소를 얕잡아보면 안 된다.운 좋게 돈 많은 도련님들이라도 걸리면 하룻밤에 수억 원이 순식간에 손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진서준 씨!”진서준이 들어서자 조호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조호는 진서준 옆에 있는 허사연을 힐끗 쳐다본 뒤 고개를 숙이고 감히 더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잡담은 그만하고 하경범을 잡아가는 제일 좋은 타이밍만 말해.”진서준이 직설적으로 물었다.이 말에 조호는 속으로 크게 놀랐다.“매일 오후마다 하경범은 천국찻집이라는 곳에 갑니다.”조호는 재빨리 대답했다.“보통은 경호원 몇 명만 데리고 가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얼씨구? 저런 인간이 매일 차나 마시러 간다고?”진서준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그게... 진서준 씨, 사실 그곳은 이름만 찻집이지 실제로는...”조호는 옆에 여성이 있다는 걸 의식해서 말을 흐렸지만 진서준은 그 뜻을 단번에 알아챘다.“알겠어.”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차를 마시는 곳이 아니라 그냥 인기 많은 인터넷 셀럽이 가득한 고급 유흥업소일 것이다.“진서준 씨, 듣자 하니 그 찻집의 주인은 성씨 가문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진짜로 움직이실 거라면 하경범이 이동 중일 때를 노리는 게 좋을 겁니다.”조호가 조심스럽게 조언했다.“응? 성씨 가문이 이런 사업도 해?”진서준은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진서준은 오영수에게서 성미영에 대한 정보를 들은 적이 있었다.정의로운 성격의 성미영이 자기 가문에서 이런 유흥업소를 운영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터였다.“네, 듣기로는 성씨 가문의 한 직계 후손이 운영한다고 합니다. 여자에 미쳐 있는 놈이라 르벨의 돈 많은 도련님들과 꽤 친분이 깊다고 하더군요.”조호는 본인이 아는 정보를 전부 쏟아냈다.“좋아, 대충 알겠어.”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조호의 회사를 나온
진서준이 허사연의 캐리어를 들어주며 옆방으로 걸어갔다.그 뒷모습을 보며 도지아는 부러움이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인간은 원래 모여서 사는 걸 선호하는 동물이다.사회를 벗어나서 혼자 살아가는 건 생각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다.가족도 친구도 없이 너무 오래 지내다 보면 결국 감정 없는 시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그렇게 되면 사람과 짐승의 차이가 없어질 것이다.“어제 전화할 때 그랬었지? 이번에 너 자기 출신을 찾으러 온 거라고.”호텔 방으로 돌아온 후, 허사연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너 원래 경성 진씨 가문 사람이잖아?”“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어. 그런데 할아버지가 예전에 말해주셨어. 사실 우리 아버지는 어릴 때 길에서 주워 온 아이였다고.”진서준은 허사연에게 숨길 생각이 없었다.허사연은 진서준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허사연이라면 이 비밀을 절대 밖으로 흘리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었다.“뭐라고? 아버님이 주워 온 아이라고?”허사연이 깜짝 놀랐다.“그래. 하지만 이 사실을 아는 건 나뿐이야. 가족 중에서도 할아버지가 나한테만 알려주셨지.”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얼마 전, 오영수가 내 등에 있는 용을 보고는 내가 용맥의 일족이라고 했어. 그래서 오영수를 따라 여기 와서 오영수 셋째 삼촌에게 내 출신에 관해 알아보려 했던 거야.”“네 등에 용이 있다고? 난 한 번도 본 적 없는데?”허사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그동안 둘이 알몸으로 함께한 시간도 적지 않은데 허사연은 한 번도 본 기억이 없었다.“내가 체내 혈기를 모을 때만 그 용이 나타나거든.”진서준이 설명을 이어갔다.“그런데 오영수 삼촌이 아직 돌아오질 않아서 일단은 여기서 며칠 기다려야 해.”“아니, 그럼 오씨 가문에서 널 안 재워줬어?”허사연이 의아해했다.명문대가인 오씨 가문에 빈방이 없을 리가 없었다.“그날 오영수를 찾아갔는데 마침 오영수 할아버지가 위중했어. 그리고 그 집안엔 그 어르신을 그냥 보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었지.”진서준이 담담하게
“진짜 예쁜 새색시 숨겨놓고 있었네?”허사연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누구라도 자기 남자 방에 예쁘고 몸매가 완벽한 여자 하나가 같이 있는 걸 보면 의심 안 할 수가 없었다.게다가 지금은 아침이었다.설마 이 여자가 아침에 막 찾아온 건 아니겠지?“사연아, 오해야. 내가 제대로 설명할게.”진서준은 머리가 띵해졌고 뇌가 지진이라도 난 것 같았다.“아가씨, 오해하지 마세요. 어제 저랑 진서준이 같은 방에서 잔 건 맞지만 진짜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저 밤새 한숨도 못 잤다니까요?”도지아가 황급히 해명에 나섰다.“네? 밤새 안 자고도 아무 일 없었다고요?”허사연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되물었다.“설마 밤새 불태우느라 못 잔 건 아니겠죠?”허사연의 농담과 진담이 뒤섞인 말에 진서준은 헛웃음만 나왔다.“사연아, 이쪽은 도지아야. 우리 진짜 그냥 친구야. 일단 들어와. 천천히 설명할게.”허사연이 방에 들어오자 진서준은 서로에게 소개했다.그러고는 이 방에서 일어난 상황을 설명했다.“도지아는 황예은이 소개해 준 환자야. 다리 치료를 부탁받았거든. 종아리를 봐봐. 이틀 전에 내가 직접 발라준 연고가 있어.”허사연이 내려다보자 확실히 연고가 발라져 있었다.“그리고 도지아가 밤새 안 잔 건 원기를 수련하느라 그랬던 거야. 너도 예전에 수련한다고 며칠씩 안 잔 적 있잖아?”허사연은 오해가 풀리자 그제야 빙그레 웃었다.“내가 뭐 어쨌다고 그렇게 호들갑이야?”“혹시라도 오해할까 봐 그러는 거잖아.”진서준이 빠르게 대답했다.“뭐야? 내가 그렇게 의심 많고 질투 많은 여자로 보여?”허사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아, 아니지. 우리 사연은 누구보다 속이 넓은 부드러운 여자지.”진서준이 급히 정정했다.“됐어, 너 겁먹은 거 너무 귀엽다.”허사연이 피식 웃었다.“넌 여기 좀 쉬고 있어. 내가 방 하나 잡고 올게.”진서준은 더 머뭇거릴 틈도 없이 벌떡 일어나 나가 버렸다.진서준의 뒷모습을 보며 허사연은 그제야 웃음을 터뜨렸다.“도지아 씨, 진서준이
“내가 가면 안 돼?”사실 진서준은 거절하려 했었다.르벨은 안개가 짙게 깔린 늪지대 같은 곳이라 진서준조차도 어디에 함정이 있을지 가늠하기 어려웠다.그러니 허사연이 온다면 다칠 가능성이 컸다.하지만 거절하면 허사연이 상처받을 게 뻔했다.“당연히 되지. 지금 위치 보낼게.”진서준은 단호하게 말하며 위치를 보냈다.자기 여자를 지킬 자신도 없으면서 강자들을 상대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자기야, 잘 자.”허사연이 애정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너도 일찍 자.”진서준이 다정하게 답했다.전화를 끊고 나니 진서준의 졸음이 싹 가셨다.진서준은 창가로 다가가 이 화려한 도시를 내려다봤다.“오씨 가문, 안씨 가문, 하씨 가문... 너희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든 난 전부 박살 낼 거야. 이번엔 반드시 나와 아버지의 정체를 밝혀내고 말겠어.”진서준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그렇게 별다른 사건 없이 밤이 지나갔다.다음 날 아침.진서준이 막 눈을 뜨자마자 도지아의 흥분한 외침이 들려왔다.“진서준, 됐어. 나 생겼어!”도지아는 눈 밑이 시커멓게 변해 있었는데 밤새 잠을 자지 않은 게 분명했다.진서준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너 아직 처녀 아니었어? 대체 어떻게 임신한 거야?”“미친놈아, 임신은 개뿔, 무슨 헛소리야?”도지아는 얼굴이 빨개지며 진서준을 노려봤다.“그럼 왜 아침부터 난리야?”진서준이 되물었다.보통 사람이라면 이렇게 아침부터 흥분해 날뛰지 않을 것이다.“어제 네가 준 수련법 기억나지? 나 벌써 원기를 형성할 수 있게 됐어.”자기가 대단하다고 여긴 도지아는 자랑스럽게 선언했다.고작 하룻밤 만에 원기를 형성한 건 확실히 대단한 일이었다.“뭐? 그렇게 빠르다고? 너 타고난 천재 맞네?”진서준이 다소 의아한 표정을 보였다.보통 무인은 원기를 익히는 데만 최소 1년이 걸리는데 그것도 매일 꾸준히 수련할 경우에만 발생하는 일이었다.심지어 재능 있는 자들도 한두 달은 족히 걸린다.그런데 도지아는 단 하룻밤에 이 어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