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세린이나 안정음이나 하경준에겐 별 차이가 없었다.그냥 예쁜 여자이기만 하면 하경준은 만족했다.“안세린은 내가 직접 고른 거야.”하인학이 차갑게 말했다.“근데 안씨 가문에서 마음대로 바꾸면 우리 하씨 가문의 체면이 설 것 같아? 오늘 새 제안을 허락해 주면 내일 안씨 가문에서 더 무리한 요구를 할 거야. 우리 하씨 가문에서도 딸을 시집보내라고 요구할 수도 있어. 너희 형을 죽인 진범이 누구인지 지금까지도 아무런 단서가 없어. 안씨 가문에서 시체는 보냈지만 난 그 자식들이 자작극을 벌인 게 아닌지 의심스러워.”하경준은 그 말을 듣고 머리가 좀 복잡해졌다.“아빠, 안씨 가문에서 결혼을 거부하면 어쩌죠?”하경준은 사실 이 문제에 관한 관심이 가장 컸다.“그놈들이 그럴 배짱은 없을 거야.”하인학의 눈빛이 서늘해졌다.“네 셋째 삼촌은 르벨 군부 부사령관이야, 무시무시한 권한을 쥐고 있는 인물이야. 안씨 가문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고집을 부리면 네 삼촌이 군대를 이끌고 안씨 가문을 쓸어버릴 거야.”“네? 르벨 군부 부사령관이라고요? 진짜 대단하네요.”하경준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게다가 네 사촌 동생은 대한민국 전신전에 소속한 사람이야. 비록 보통 병사지만 이미 장관급 병사야.”하인학이 자랑스럽게 말했다.“전신전에서 나와서 일반 부대에 가면 적어도 중대급 장교는 될 거야.”“네?”하경준은 놀라서 말을 잇지 못했다.“이제까지 집안의 모든 일을 네 형이 맡았지. 그런데 이제 네 형이 없잖아.”하인학이 하경준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그러니 네가 이제 그 책임을 져야 해. 내가 이 기간에 네게 사업에 관한 걸 배워 줄 거야. 네가 장사하는 데 소질이 없다면 이 중대한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맡길 거야.”이 말을 들은 하경준은 즉시 다짐했다.“아버지, 걱정 마세요. 제가 꼭 잘 배울게요. 하씨 가문의 앞날을 위해 모든 힘을 다 바칠 겁니다.”“좋아, 날 실망하게 하지 마. 이제 가보렴.”하경준이 나가자 하인학은 전화를 꺼내
“어때, 둘째야? 하씨 가문에서 허락했어?”안진천이 벌떡 일어나 물었다.“허락은 개뿔!”안진아는 얼굴이 시뻘게져 있었다.“그 하인학이라는 놈은 진짜 똥통 속 돌멩이야. 성격은 더럽고 고집은 누구보다 더 세. 내가 이득이랑 조건 다 내밀었는데도 절대 안 된다고 했어. 꼭 자기 아들 하경준이랑 안세린이 결혼해야 한대.”안정음도 얼굴과 몸매가 다 빠지지 않는 미녀였다.하지만 하인학은 콧방귀도 안 뀌고 무조건 안세린 타령만 했다.안정음도 표정이 썩었고 속으론 분해서 죽을 지경이었다.‘대체 왜 안세린이냐고? 내가 뭐가 모자라서?’“그리고 하인학 그 자식이 이런 소리도 했어. 우리가 결혼을 안 받아들이면 결혼식 당일에 자기 셋째 동생이 군대 끌고 와서 우리 안씨 가문을 쓸어버리겠대.”안진아가 이를 바득바득 갈며 말을 이었다.“그 셋째 동생이란 사람은 뭐 하는 인간인데?”안진천이 물었다.“듣자 하니 르벨 군부 부사령관이래. 사실상 사령관만 제외하면 모든 사람의 사령관이지.”안진아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그 말에 다들 술렁이기 시작했다.르벨은 아주 특별한 지역이라 독자적인 통치 체계를 갖고 있었다.국내 최상층 몇 명 말고는 르벨 사령관에게 명령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게다가 르벨의 부사령관은 르벨 군부의 세 번째 인물로 군대 지휘권까지 갖고 있었다.하씨 가문에서 진짜 군대를 동원하면 안씨 가문은 손 쓸 틈도 없이 밀릴 수도 있었다.“하씨 가문이 미친 거 아니야? 군대까지 동원하겠다고?”안진아의 말은 모두를 놀라게 했다.다들 하씨 가문이 어느 정도 눈치껏 제안을 받아줄 줄 알았다.하씨 가문은 안씨 가문이 자세를 낮추고 대화하려는 태도만 보이면 양보할 줄 알았는데 하인학은 끝까지 고개를 안 끄덕였다.‘정말 이해할 수 없네. 하인학은 왜 그렇게 고집이야? 내가 안세린보다 못한 게 뭐라고?’안정음은 분을 못 이겨 이를 깨물었다.여자로서 자세를 낮춰 주동적으로 찾아갔는데 상대는 체면을 하나도 안 세워주고 온갖 험한 말만 퍼부었다.심
“세린이 시집가면 우리 집안에도 큰 이득이 따를 거예요.”여자의 이름은 안정음이었고 안진아의 딸이었다.안정음은 안세린이 하씨 가문에 시집가는 걸 적극적으로 찬성하고 있었다.“아버지, 정음 말이 맞아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하씨 가문과 한 식구가 될 수 있다면 우리 안씨 가문 입장에선 엄청난 이익이죠.”안직각도 안정음을 거들었다.“지금 용왕이라는 놈이 우리 안씨 가문을 호시탐탐 엿보고 있다는 사실도 다들 잘 알죠? 우리 안씨 가문이 위기에 빠지면 용왕 일당이 과연 가만있을까요? 그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우릴 죽도록 물어뜯을 겁니다.”“맞습니다, 아버지. 하씨 가문도 만만한 집안이 아니에요. 들리는 말로는 군부 쪽에 고위 장교까지 있다던데요? 하씨 가문이 군대까지 동원한다면 우리 안씨 가문은 완전히 외나무다리 신세가 될 겁니다.”안진아의 얼굴도 점점 어두워졌다.다른 사람들도 여기저기서 자기 의견을 내놓았지만 대체로 안세린의 혼인을 찬성하고 안세린을 설득하려는 분위기였다.“너희가 말하는 건 다 이해해.”안국성이 천천히 입을 열어 냉정하게 말했다.“이번에 우리가 혼인을 빌미로 물러난다면 다음번에 하씨 가문이 또 괴롭히려고 하면 어떻게 할 건데? 또 다른 걸 핑계로 물러날 거야? 이번 양보는 잠깐의 평화일 뿐이야. 결국 하씨 가문 놈들이 우리를 우습게 보고 더 날뛸 거야. 아직 내가 살아있고 천기 위대 대원도 다 건재해. 지금 너희 몸에서 아직도 뜨거운 피가 끓는다면 차라리 하씨 가문이랑 정면으로 붙는 게 낫지 않겠어?”그 말에 안진아의 얼굴이 확 변했다.“아버지, 설마 천기 위대를 동원하시려는 겁니까?”“그래. 하씨 가문이 진짜 전쟁을 선포한다면 나도 그놈들에게 뼈에 사무치는 교훈을 줄 거야.”안국성의 얼굴엔 미동 하나 없었다.“할아버지,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요. 결혼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굳이 전쟁으로 끌고 갈 이유가 없잖아요?”안정음은 여전히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았다.“그럼 네가 안세린 대신 시집가는 건 어때?”진
“진서준, 이번엔 네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네가 없었다면 초아 어머니가 큰일 날 뻔했어.”병실을 나서며 도지아가 감탄하듯 말했다.“사람이 평생을 멀쩡히 사는 것도 참 어려운 일이야.”자연재해든 인재든 인간이 피하긴 참 힘든 법이다.과학이 발전하고 의료 기술도 나날이 나아지고는 있지만 여전히 치료할 수 없는 불치병이 많았다.“다른 건 장담하지 못해도 내가 옆에 있는 한 넌 병마에 안 시달릴 거야.”진서준이 담담하게 웃었다.“고마워, 진서준. 시간도 늦었는데 얼른 들어가서 좀 쉬어.”도지아는 병원 앞에서 진서준을 배웅했다....별일 없이 하룻밤이 지나갔다.다음 날 아침 식사를 마친 뒤, 진서준은 황현호와 허사연을 데리고 안씨 가문으로 향했다.방문 목적을 밝히자 안국성이 흔쾌히 수락했다.“거기 누구 없어? 황 도련님을 뒷마당으로 모시고 대련할 수 있는 사람들을 붙여라.”안국성은 바로 사람을 불러 지시를 내렸다.“그리고 세린도 불러. 그 계집애도 할 일을 좀 해야지.”얼마 지나지 않아 안세린도 도착했다.“안세린, 이쪽은 내 여자친구 허사연이야. 무도 쪽으로 좀 지도 부탁할게.”진서준이 소개했다.허사연의 압도적인 미모에 안세린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너 실력이 그렇게 뛰어난데 왜 나한테 여자친구 수련을 맡겨?”안세린은 진서준의 부탁을 이해할 수 없었다.“사연이 실전 경험이 부족해서 그래. 실력은 제법 있지만 상황 대처 능력이 좀 떨어져. 그래서 너랑 대련하면서 실전 경험을 쌓았으면 좋겠어.”진서준이 상황을 설명했다.“그렇구나.”안세린은 고개를 끄덕였다.“허사연 씨, 이쪽으로 오세요.”“부탁드릴게요, 안세린 씨.”허사연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별말씀을요. 저도 진서준한테 신세 진 게 있으니 이번에 갚는 셈이죠.”일행이 자리를 떠난 후, 진서준이 슬쩍 물었다.“어르신, 이번 하씨 가문과의 혼인 건에 관해 집안 사람들 생각은 어떻습니까?”“어휴...”안국성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대다수 식구가 세린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서재운이 희망이 없다고 했는데 불과 5분도 안 되는 사이에 환자의 상태가 눈에 띄게 안정한 상태에 들어갔다.“진서준 씨야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명의입니다. 저는 부끄러울 따름이죠.”서재운은 얼굴에 수치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감탄했다.“대박이야, 이게 가능하다고?”한 전문의는 입을 떡 벌린 채 멍하니 서 있었다.한 전문의는 서재운이 한의계의 끝판왕이라 생각했는데 진서준이 보여준 실력은 그 착각을 산산조각 냈다.진짜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었다.“됐습니다.”진서준이 손을 가볍게 휘두르자 은침들이 동시에 빠져나왔다.모두가 충격을 받아 멍하니 있는 사이, 귀부인이 가늘게 신음을 흘리며 천천히 눈을 떴다.“벌써 깨어났다고?”귀부인이 눈을 뜬 순간,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고 말문이 턱 막혔다.다들 귀부인이 오랜 시간 요양해야 한다고 여겼는데 불과 몇 분 만에 멀쩡해진 것이다.이건 공포를 넘어 기적의 수준에 가까웠다.진서준은 일반 사람이 아닌 신선과 가까운 존재인 것 같았다.“이건 뇌혈전이란 말이야...”한 전문의는 충격에 입을 닫지 못했다.의사들이 치료를 포기한 환자가 고작 은침 몇 개로 건강을 되찾았다.이건 드라마 작가도 감히 쓸 수 없는 시나리오였다.“엄마, 깨어났어? 이젠 진짜 괜찮아졌어!”동초아는 너무 기뻐 펄쩍펄쩍 뛰었다.동초아는 롤르코스터를 탄 것만 같았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절망의 늪에 빠져 허덕이고 있었는데 지금은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여보, 괜찮아? 어디 아픈 데는 없어?”동정혁이 다가와 다급히 물었다.“머리가 조금 어지러워요. 이게 무슨 일이죠?”귀부인은 고개를 살짝 흔들더니 자기가 병상에 누워있다는 걸 깨달았다.그리고 자기 주변엔 사람들이 가득했다.귀부인의 기억은 병원을 막 나선 지점에서 멈춰 있었고 본인이 몇 시간이나 기절했고 생사의 문턱을 넘나들었다는 사실도 전혀 몰랐다.“괜찮다니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동정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진서준에게 두 손 모아 인
“뭐라고? 그럼 지금 어쩌란 말입니까?”동정혁의 얼굴이 한순간 창백해졌다.최악의 상황이 현실이 되어버렸다.이제는 서재운이 아내의 상태만이라도 안정시켜주기를 바랄 뿐이었다.설령 아내가 식물인간이 되더라도 일단 살아만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죄송합니다, 동정혁 씨. 저로선 어쩔 수 없습니다. 이젠 기적이 나타나길 기대할 수밖에 없습니다.”서재운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엄마.”동초아는 그 말을 듣자마자 멘탈이 무너지며 눈물을 하염없이 흘러내렸다.병실 안의 분위기는 숨 막히는 절망에 빠졌다.귀에 들리는 건 동정혁의 아내가 고통스럽게 신음하는 소리뿐이었다.동정혁도 차마 서재운을 원망할 수 없었다.애초에 동정혁은 아내를 살릴 확률이 40퍼센트밖에 안 된다고 말했다.어쩌면 그 40퍼센트조차 부풀려진 숫자였을지도 모른다.“서 신의님, 제 아내가 더는 고통받지 않도록 편히 가게 해주십시오.”동정혁은 더 이상 신음을 듣기 힘들어 고개를 떨궜다.“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침을 빼겠습니다.”서재운이 다가가 침을 뽑으려는 순간, 문 쪽에서 천둥 같은 외침이 터졌다.“그만해!”모두가 고개를 돌려 확인하자 그 사람은 방금 화장실에서 돌아온 진서준이었다.“왜 제가 돌아오기도 전에 치료를 시작했습니까?”진서준은 병실에 들어서며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왜 기다려야 하냐고? 서 신의도 두 손 들었는데 네가 뭘 할 수 있단 말이야?”한 전문의가 짜증 섞인 말투로 쏘아붙였다.“내가 왜 치료할 수 없다고 단언하는 거야?”진서준이 되물었다.“쓸데없는 말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아. 근데 너희는 끝까지 내가 치료할 수 없다고 단정 짓는구나. 오만하긴 짝이 없네.”“너 내 친구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기나 해?”한 전문의가 언성을 높였다.“서 신의, 본인이 직접 말해 보세요. 누구 실력이 더 대단한가요?”진서준은 서재운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사실 이런 식으로 나오고 싶진 않았지만 한 전문의가 너무 물고 늘어지니 어쩔 수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