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준 씨, 당신이 절 치료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김연아는 반짝거리는 큰 눈으로 진서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진서준은 김연아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당황했다.“만약 제가 김연아 씨 병을 치료하지 못했다면 김연아 씨는 다른 여자들처럼 결혼하고 아이를 낳을 수 없었을 거예요.”진서준이 솔직히 대답했다.“하지만 진서준 씨가 제 병을 치료한 뒤로 전 더는 다른 남자를 좋아하고 싶지 않은데요.”김연아는 무더운 여름날처럼 뜨거운 눈빛을 보냈다.게다가 고백과 다름없는 그녀의 말까지 더해지자 진서준은 더욱더 안절부절못했다.분위기는 다시 한번 어색해졌고 룸 안은 조용해졌다.진서준은 김연아의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진서준이 제일 처음 만났던 사람이 허사연이 아니라 김연아였다면, 그와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은 김연아였을지도 모른다.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누구세요?”진서준이 곧바로 고개를 돌려 물었다.문밖에서 고수빈 등 사람들은 방 안에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곧바로 문을 열었다.상대방이 말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진서준의 안색이 어두워졌다.“누구세요?”진서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자기 몸으로 김연아를 가렸다.“비켜요. 우리는 당신을 만나러 온 게 아니니까!”한 사람이 다가가서 진서준을 옆으로 밀쳤다.진서준은 눈빛이 차가워지더니 상대방이 자신에게 닿기 전 주먹을 뻗어 상대의 얼굴을 때렸다.퍽 소리와 함께 먼저 진서준을 때리려 했던 사람이 날아가서 벽에 부딪혔다.조금 취기가 올랐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정신을 차렸다. 다들 놀란 표정으로 진서준을 바라보았다.한 주먹에 80kg쯤 되는 성인을 날려버리다니, 얼마나 무시무시한 힘인가!고수빈도 당황했다. 진서준의 얼굴을 똑바로 보게 되자 그는 단번에 표정이 바뀌었다.“당신!”원수를 만나게 되자 고수빈은 순식간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진서준은 고수빈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초운산에서 고수빈이 진서준을 도발한 적이 있지만
김연아는 원래도 외모가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화장까지 하니 허사연보다 조금 더 예뻐 보였다.고수빈 등 사람들은 멍청한 얼굴로 침을 흘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많은 남자가 저열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김연아는 역겨움을 느끼는 동시에 몸에 소름이 돋았다.그녀는 진서준의 뒤에 숨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요. 제가 또 성가시게 했네요.”진서준은 그 말을 듣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이 사람들로는 성가시다고 하기도 부족하죠.”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듯이 고수빈과 어울리는 사람들이라면 다들 무능력한 인간일 것이다.진서준의 모욕에 고수빈 등 사람들은 흉악한 표정으로 진서준을 노려보았다.“진서준 씨, 여긴 당신 혼자예요. 만약 편하게 죽고 싶다면 지금 나한테 머리를 세 번 조아려요.”고수빈 등 사람들은 기껏해야 7, 8명 정도였다.고수빈이 보기에 진서준이 아무리 싸움을 잘한다고 해도 혼자서 이렇게 많은 사람을 이길 수는 없었다.“쓸데없는 말이 너무 많네요.”진서준이 차가운 눈빛으로 고수빈을 바라보았다.고수빈 같은 머리가 텅 빈 사람들이 항상 그의 신경을 긁었다.“X발, 같이 덤벼서 저 자식을 때려죽이자고!”고수빈은 말을 마친 뒤 테이블 위에서 술병을 집어 들어 진서준의 머리를 내리치려 했다.김연아는 진서준의 실력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술병이 날아오자 참지 못하고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진서준 씨, 얼른 비켜요!”고수빈 일행은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깨 고소한 얼굴로 진서준을 바라보았다.그들은 이미 진서준이 피바다에 누워있는 모습을 보는 듯했다.그러나 고수빈의 술병이 진서준에게 날아들기 전, 진서준이 발을 뻗었다.고수빈은 바닥에 드러누워 마치 잘 익은 새우처럼 몸을 웅크렸다.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고수빈은 숨 쉬는 것마저 힘들었다. 표저옫 순식간에 일그러졌다.“고수빈 씨, 괜찮아요?”고수빈의 친구들이 서둘러 그에게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다들 같이 덤비라니까요. 저 자식을 죽이라고요!”고수빈이 분노에 차
“그래요. 그러면 지금 당장 호텔 경비원을 불러올게요. 그들이 와도 당신이 이렇게 건방지게 굴 수 있을까요?”말을 마친 뒤 고수빈은 힘겹게 바닥에서 일어나 경비원을 찾으러 가려 했다.진서준은 눈빛이 서늘해지더니 손가락을 살짝 튕겼다.다음 순간, 허공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룸 안에서 울려 퍼지면서 무언가가 고수빈의 종아리를 꿰뚫었다.피가 철철 흐르고 뼈가 드러났다.룸 안의 사람들은 그 광경을 본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고수빈은 돼지 멱 따는 소리를 내면서 바닥에 쓰러져 끊임없이 경련했다.“내가 말했죠.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리지 않는다면 여기서 나갈 생각하지 말라고.”진서준은 의자에 앉아 평온한 얼굴로 차를 한 모금 마셨다.다들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 복도에 서 있던 종업원이 들어왔다.종업원은 룸 안의 광경을 보더니 깜짝 놀랐다.“얼른 여기 경비원 불러요. 이 자식이 사람을 죽이려고 해요!”룸 안의 사람들은 종업원을 보자 마치 구세주를 본 것처럼 곧바로 큰 목소리로 외쳤다.종업원은 그 말을 듣더니 곧바로 무전기를 들었다.“얼른 702번 룸으로 와요. 여기 싸움이 났어요.”김연아는 상황을 보더니 황급히 진서준에게 말했다.“진서준 씨, 우리 얼른 가요. 만약 김씨 일가의 심기를 거스른다면 일이 복잡하게 돼요!”김연아는 김씨 일가가 진서준의 은혜를 입었다는 걸 모르고 있었기에 조급해했다.“무서워하지 말아요. 김씨 일가 사람이 온다면 오히려 내게 사과할지도 모르니까요.”진서준은 포도 한 알을 먹으면서 웃으며 말했다.진서준의 덤덤한 태도에 김연아도 자리에 앉았다.호텔 직원은 진서준의 거만한 말을 듣고 같잖다는 듯이 입을 비죽였다.이내 호텔 경비원이 삼단봉을 들고 진서준이 있는 룸 앞에 도착했다.“어떻게 된 일이에요?”경비팀장은 피비린내를 맡더니 미간을 구겼다.유일 호텔은 새로 개업한 호텔이라 이런 일이 있으면 안 됐다.“누가 때린 거죠?”겉으로 보기에 단순히 질문하는 것 같아도 사실 경비팀장은
5성급 호텔의 경비팀장이 되려면 능력도 있어야 하지만 집안 배경도 좋아야 했다.눈앞의 거대한 몸집을 가진 경비팀장은 원경휘라고 하는데 김풍과는 아주 먼 친척이었다.만약 그가 여러 친척을 동원해서 김풍을 귀찮게 굴지 않았더라면 김풍은 원경휘에게 경비팀장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을 것이다.“귀에 문제가 있다면 병원에 가봐요.”진서준이 덤덤히 말했다.원경휘는 진서준의 거만한 모습을 보자 화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경비팀장이 된 지 꽤 됐는데 감히 진서준처럼 그에게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원경휘는 사람들이 자신을 무서워하는 게 아니라 이 호텔 뒷배경인 김씨 일가를 두려워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X발, 맞고 싶은가 보네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당신을 때리고 싶어 하죠!”고수빈은 원경휘도 진서준과 갈등이 생기자 속으로 매우 기뻐했다.김씨 일가까지 건드리다니, 진서준은 이곳에서 틀림없이 죽을 것이다.“여기 사장님은 고객에게 그렇게 말하라고 가르치던가요?”진서준은 흐려진 안색으로 말했다.“어떻게 가르쳤는지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예요?”원경휘는 삼단봉을 꺼내 벽을 향해 힘껏 휘둘렀다.흠집 하나 없던 벽에 검은색 흔적이 남았다.“지금 나랑 싸우겠다는 건가요?”진서준이 차갑게 말했다.“내가 봐주려 했는데 당신이 그 기회를 걷어차 버린 거예요.”원경휘가 차갑게 웃었다.진서준은 경비원들과 싸우고 싶지는 않아서 휴대전화를 꺼냈다.“뭐 하려는 거예요? 전화해서 사람을 부르기라도 할 거예요?”원경휘는 경멸에 차서 웃었다.“경고하는데 당신이 오늘 누구를 부르든 상관없어요!”서울에서 김씨 일가와 견줄 수 있는 곳은 드물었다.원경휘는 그 가문들이 눈앞의 진서준 때문에 김씨 일가와 척지려 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진서준은 전에 김명진의 번호를 저장한 적이 있었다.전화가 몇 분 울린 뒤 김명진이 전화를 받았다.“서준 형님, 무슨 일이세요?”전화 건너편에서 김명진의 호쾌한 웃음소리가 들렸다.“유일 호텔 김명진 씨 집안에서 운영하는 호텔 맞지?”진서
“그 사람이 오게 되면 알게 되겠죠.”진서준이 대답하지 않자 원경휘도 경거망동할 수 없었다.만약 진서준이 정말로 호텔 임원에게 연락했다면 그는 끝장이었다.원경휘 등 사람들이 김명진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이지성은 인내심이 닳았다.“이 자식들 왜 아직도 안 돌아오는 거야? 간 지가 언젠데!”이지성은 더는 참을 수 없어 지팡이를 짚으며 룸을 나섰다.룸에서 나오자마자 이지성은 702번 룸에 경비원들이 몰려있는 걸 보았다.이지성은 고수빈 등 사람들에게 문제가 생겼으리라고 예상하고 몰래 다가가 보았다.그는 제일 뒤에 서서 사람들 틈 사이로 바닥에 드러누운 고수빈 등 사람들을 보았다.“멍청한 것들, 여기서 소란을 피우네.”이지성은 낮게 욕하더니 의자에 앉아있는 사람을 보았다.그가 진서준이라는 걸 확인한 이지성은 안색이 종이처럼 창백하게 질려서는 지팡이를 잡은 두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진서준이 왜 여기 있지?”이지성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고개를 돌려 자리를 떴다.그는 지금 진서준에게 자신이 여기 있는 모습을 보여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되면 정말 끝장이었다.“고수빈 그 자식들이 내 이름을 말했을지 모르겠네. 상관없어. 내일 바로 우 종사님을 찾아가서 진서준을 죽여달라고 해야겠어!”이지성이 호텔을 떠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김명진이 경호원들을 데리고 부리나케 도착했다.“도련님!”김명진이 부랴부랴 달려오자 원경휘는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X발,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거야? 감히 우리 형님을 때리려 해?”김명진은 자신의 먼 친척인 원경휘를 보자마자 그에게 발차기를 날렸다.원경휘는 그에게 차여서 멀리 날아가 바닥에 쓰러졌고 배를 끌어안고 고통스럽게 신음했다.다른 경호원들은 그 광경을 보자 겁을 먹고 덜덜 떨었다.“서준 형님,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잘 가르치지 못한 탓입니다.”김명진은 빠르게 진서준의 앞으로 가서 허리 숙여 사과했다.진서준의 잔이 비어있는 걸 본 김명진은 서둘러 그에게 물을 따라줬다.그의 행동에 현장에 있
이지성은 서울에서 재벌가 자제에 불과했지만 재벌가 자제들 사이에도 차이가 있었다.김명진 같은 최고 재벌가 자제였기에 그의 주위에는 자산이 몇조 원인 친구들뿐이었다.이지성처럼 자산이 몇백억 밖에 되지 않는 가문 출신은 김명진과 같은 무리에 낄 자격이 없었다.그래서 고수빈이 이지성이라고 했을 때 김명진은 잠깐 멈칫했다.곰곰이 되짚어봤지만 그의 친구 중에 이지성은 없었다.“이름이 뭐라고요?”김명진의 질문에 고수빈이 다급히 대답했다.“이지성이요. 낙산컴퍼니 이씨 일가 이지성이요!”그 말에 진서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진서준은 전에 이혁진에게 경고한 적이 있었다. 이혁진도, 이지성도 절대 두 번 다시 서울로 돌아오지 말라고 말이다.만약 고수빈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번만큼은 절대 이지성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이지성 어디 있어요?”이지성이 어느 가문 자제인지 김명진이 고민하고 있을 때 진서준은 이미 고수빈의 앞에 섰다.“그... 706번 룸에 있습니다.”고수빈은 진서준이 거물이라는 걸 깨닫고 황급히 대답했다.이지성의 위치를 파악한 뒤 진서준은 곧바로 706번 룸으로 향했다.그러나 진서준이 도착했을 때 룸 안에 사람이 없었다.진서준의 처음 보인 반응은 고수빈이 자신을 속였을 거라는 것이다.“날 속인 거죠?”진서준은 돌아온 뒤 고수빈의 다리를 밟았다.“아!”고수빈은 밟혀서 앓는 소리를 내면서 끊임없이 눈물을 흘렸다.“진서준 씨, 전 정말 진서준 씨를 속이지 않았어요. 이지성 씨는 진짜 706번 룸에 있어요.”“조금 전에 가봤는데 없던데요!”진서준이 화를 내며 말했다.“떠났을 수도 있죠. 조금 전에 정말로 저희랑 같이 밥을 먹었어요. 믿기지 않는다면 물어보세요.”고수빈은 진서준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제발 자신을 살려달라고 하고 싶었다.다른 사람들은 고수빈의 비참한 모습을 보더니 본인도 그렇게 되고 싶지는 않아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조금 전에 저희는 이지성 씨랑 같이 밥을 먹었어요!”“밥 먹을 때 이지성 씨가 자
“별거 아닌데요, 뭘. 그러면 전 먼저 가보겠습니다. 두 분 편히 식사하세요.”김명진은 진서준을 향해 웃더니 자발적으로 룸에서 나갔다.진서준은 이지성의 일을 생각하느라 입맛이 떨어졌다.“연아 씨, 다 먹었어요?”“네.”김연아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면 이만 가요. 내가 바래다줄게요.”진서준이 말했다.진서준은 이지성이 이렇게 갑자기 떠난 이유가 이곳에서의 소란을 듣고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자신을 봤기 때문이라고 짐작했다.진서준의 짐작이 맞았다.이지성은 호텔을 나선 뒤 곧바로 택시를 타고 이혁진과 같이 묵는 호텔로 돌아갔다.“왜 그래? 왜 이렇게 허둥지둥거려?”침대에 누워 TV를 보던 이혁진은 이지성의 초조한 모습을 보고 불쾌한 듯 물었다.“아버지, 큰일났어요!”이지성이 지팡이를 짚으며 빨게 이혁진을 향해 다가갔다.“무슨 일 있어? 설마 진서준이랑 마주친 건 아니지?”이혁진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진서준과 마주친 것을 제외하면 이혁진은 다른 원인은 떠오르지 않았다.“맞아요!”이지성은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진서준이 널 봤어?”이혁진은 TV를 끄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뇨. 절 봤다면 절대 절 돌려보내지 않았겠죠.”이지성은 머금고 있던 물을 삼키며 계속해 말했다.“하지만 진서준은 이미 제가 서울에 왔다는 걸 알고 있어요. 아버지, 혹시나 시간을 끌면 뜻밖의 일이 벌어질 수도 있으니 내일 우 종사님께 진서준을 죽여달라고 해요!”이지성은 이미 진서준에게 마음속 깊이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진서준만 보아도, 또는 진서준이 그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만 알게 되어도 이지성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그래.”이혁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드러냈다.“우 종사님께서 조금 전에 날 만나러 왔어. 오늘 점심에 아주 대단한 분을 만나게 되었다고 하더라. 우 종사님이 진서준의 상대가 되지 않더라도 그분을 모시면 돼. 우 종사님 말씀을 들어보니 우 종사님 사부님보다 더 대단하다고 해.”우소영의 사부보
진서준은 김연아를 집으로 데려다준 뒤 허사연이 걱정되어 차를 타고 허씨 저택에 들렀다.“서준 씨, 여긴 어쩐 일이에요?”문을 연 건 허윤진이었다. 그녀는 머리카락이 젖어 있고 얇은 파자마를 입고 있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파자마 속 아름다운 몸 선이 보였다.진서준은 힐끗 본 뒤 시선을 거두어들였다.“사연 씨 보러 왔어요.”진서준이 허사연을 만나러 왔다고 하자 허윤진의 미소가 곧바로 사라졌다. 그녀는 코웃음을 친 뒤 고개를 돌리며 자리를 떴다.진서준은 어리둥절했다.“내가 뭘 어쨌길래 저러는 거지?”“언니 샤워 중이에요. 기다려요.”허윤진은 소파에 엎드려서 휴대전화를 봤다.그러면 이따금 진서준을 힐끔댔다.“성태 아저씨는요?”“아빠는 오늘 집에 없어요. 나랑 언니뿐이에요.”허윤진의 길고 늘씬한 두 다리가 움직이면서 매끈한 발목과 종아리가 보였다.평소 허성태가 집에 있을 때면 허윤진은 이렇게 입지 않았다.비록 부녀 관계라고 하지만 그래도 그러지 않는 게 좋았다. 혹시라도 다른 사람이 본다면 안 좋은 소문이 돌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서준 씨, 이틀 뒤에 권해철 씨 사문에 간다고 했죠?”허윤진이 갑자기 물었다.“네, 왜요?”진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같이 가도 돼요?”허윤진은 자리에 앉은 뒤 기대 가득한 얼굴로 진서준을 바라보았다.“어렸을 때부터 전 먼 곳에 놀라가 본 적이 없어요!”진서준은 그 말을 듣자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안 돼요. 전 권해철 씨랑 놀러 가는 게 아니에요. 아주 중요한 일 때문에 가는 거예요.”권해철은 그의 사문에서 쫓겨났었다. 그러니 이번에 그와 함께 산에 오른다면 권해철의 사문 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당할 수도 있었고, 심지어 싸울 수도 있었다.비록 진서준과 권해철 모두 실력이 강하다지만 정말로 싸우게 된다면 권해철은 자신을 보호할 수 있어도 허윤진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일반인이었기에 권해철 사문 사람들이 허윤진의 목숨으로 그를 위협한다면 위험했다.이번에는 어머니의 다리를 치료할 수
“뭐라고? 불법적인 일이 우리 가게에서 일어난다고? 말도 안 돼.”성현도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넌 전신전 소속이잖아. 그런데 네 오빠인 내가 어떻게 법률을 어기는 일을 하겠어?”“그럼 이 사람들은 왜 부른 거야? 집단 폭력도 불법이거든.”성미영은 차가운 시선을 보이며 성현도와 따졌다.“미영아, 이건 내가 싸우려던 게 아니야. 저 녀석이 일부러 시비 걸러 온 거라고.”성현도는 진서준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이놈이 일부러 우리 찻집에 난입해 행패를 부리고 상철을 두들겨 패서 머리에 혹이 다 나버렸어. 난 단순히 정당방위를 위해 부른 거라고.”성미영이 등장하자 성현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솔직히 실력만 놓고 보면 성현도는 성미영보다 한참 부족했다.게다가 성미영은 전신전 소속인지라 저 남녀가 군부 조직인 전신전을 적으로 돌릴 리 없었다.군대를 건드리는 순간, 무조건 좋은 결과는 있을 수 없었다.“진서준, 도대체 무슨 일이야?”성미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어라? 너희 둘이 아는 사이야?”성현도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방금 내려놨던 마음이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난 사람을 찾으러 왔어. 하씨 가문 하경범이 이 위층에 있다고 들었는데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겠어.”진서준이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그리고 또 하나, 저 위에서 불법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도 하더군.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르겠어.”이 말에 성현도의 표정이 단숨에 험악해졌고 즉시 반박에 나섰다.“헛소리 마. 우리 가게는 단순한 찻집이야. 불법적인 일 따윈 없어. 근거없는 소문을 왜 털어놓고 난리야?”“미영아, 저 녀석한테 속지 마. 난 네 사촌 오빠야. 내가 그런 불법적인 짓을 할 사람이겠어?”성미영이 곧바로 진서준에게 물었다.“진서준, 너 증거 있어?”“직접 올라가 보면 다 알게 될 거잖아?”진서준이 가볍게 말했다.“오빠, 위층으로 가자.”성미영이 단호하게 말했다.“그, 그건 좀 곤란해. 위층엔 귀
순간, 장내는 숨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모든 시선이 진서준에게 쏠렸고 사람들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다들 진서준을 그냥 얼굴만 반반한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진짜 고수였다.성현도의 부하 중 최고 실력자조차 상대가 되지 않았다.성현도의 얼굴은 시퍼렇게 질렸고 상철을 향해서 욕설을 날렸다.“쓰레기 자식, 이런 애송이 하나도 못 이겨?”부하가 지면 망신당하는 건 결국 성현도 자신이었다.이대로 체면을 구긴 채 끝낼 수는 없었다.이대로 넘어가면 앞으로 르벨 재벌 2세들 사이에서 조롱거리가 될 게 뻔했다.“이봐, 네 실력이 괜찮은 건 인정할게.”성현도가 싸늘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근데 너 혼자서 백 명을 상대할 수 있어? 천 명은? 잘 들어. 내 부하는 수도 없이 많아. 너 같은 놈 하나 처리하는 데 전화 한 통이면 충분해.”진서준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여전히 같은 말을 반복했다.“다시 말하지만 난 그냥 하경범을 찾으러 온 거야. 그 녀석만 넘기면 오늘 일은 없던 걸로 해주지.”“없던 걸로 한다고?”성현도가 그 말에 어이없어 헛웃음이 나왔다.“너 지금 누굴 상대로 협상하려 드는 거야? 난 성씨 가문의 직계야. 날 건드리면 상대해야 할 건 나 하나가 아니라 우리 가문 전체라고.”그때,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곧이어 검은색 전투복을 입은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왔다.이 남자들은 전부 성씨 가문의 경호원이었고 실력도 만만하지 않았다.그것도 한둘이 아니라 무려 50명 이상이었다.한순간에 텅 비어 있던 로비가 사람들로 꽉 찼다.“저 자식 끝났네. 이 정도 성씨 가문 인원이라면 아무리 강해도 버틸 수가 없지.”“그러게 말이야.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없잖아.”“왜 쓸데없이 성현도를 건드린 거지? 스스로 무덤을 판 거잖아.”구경꾼들은 이 광경에 각자 다른 감정을 보였다.누군가는 동정을, 누군가는 아쉬움을, 또 누군가는 짙은 흥미를 보였다.“사연아, 넌 좀 쉬어. 이놈들은 내가 처리할게.”진서준이 앞으로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키가 거의 2미터에 달하는 거구의 사내가 찻집 안으로 들어왔다.남자는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졌다.“상철아, 저놈 다리 하나 부러뜨려서 내던져.”성현도가 진서준을 가리키며 명령했다.“알겠습니다.”상철은 간단하게 대답하고는 진서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서준아, 내가 할게.”허사연의 눈에는 불꽃 같은 전투욕이 타올랐다.“조심해. 저 녀석은 횡련 종사야.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진서준이 조용히 귀띔했다.“알았어. 설령 못 이긴다고 해도 어차피 네가 있잖아?”허사연이 장난스럽게 웃었다.진서준이 곁에 있는 한, 허사연은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이봐, 사내자식이 여자 뒤에 숨는 게 말이 돼?”상철이 눈썹을 추켜세우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이봐, 껑충이. 여자를 얕보지 마. 일단 이기고 나서 말해.”허사연이 상철을 도발했다.“아가씨, 그런 기생오라비 말고 날 따르지 그래? 밤마다 널 천국으로 보내줄 수 있는데?”상철이 음흉하게 웃었다.“죽고 싶어 환장했구나.”얼굴이 싸늘해진 허사연이 주먹을 날렸다.강렬한 펀치가 공기를 가르며 폭발음을 일으켰고 그 위력은 철판도 뚫을 수 있을 정도였다.하지만 상철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내가 가만히 서 있어도 넌 날 어쩔 수 없어.”“닥쳐!”허사연이 분노에 차 주먹을 그대로 상철의 얼굴로 내리꽂았다.상철은 일부러 머리를 숙이며 대머리 정수리로 받아냈다.쿵!둔탁한 충돌음이 울려 퍼졌다.주먹이 상철의 머리를 강타했으나 대머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허사연이 몇 걸음 물러섰다.순간 손에 뜨거운 통증이 밀려왔고 뼈가 부서질 것 같았다.손을 확인하자 하얀 피부였던 손등이 새빨갛게 부어올랐다.상철은 자기 머리를 한번 쓸어내리더니 빙그레 웃었다.“아가씨, 이제 내 실력을 알겠지?”그 모습에 허사연의 승부욕이 다시 불타올랐고 콧방귀를 뀌며 다시 달려들었다.이번에는 다리를 높이 들어 올려 상철의 머리를 내려찍었다.‘머리가 단단하다고 자랑하
이렇게 예쁘고 섹시한 여자가 싸움 실력이 이렇게 대단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완전 여성판 이소룡이었다.“너, 너희들 정말 너무 대담한 거 아니야? 여기가 어디인지 알기나 해? 어디서 대놓고 싸움질이야?”종업원은 순간 놀란 뒤 분노에 찬 얼굴로 진서준와 허사연을 가리켰다.찻집이 문을 연 이후로 이렇게 난동을 부리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고 진서준과 허사연이 첫 사례였다.주변의 구경꾼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싸움 좀 하면 뭐해? 여긴 성씨 가문의 구역이야. 성씨 가문에서 한마디만 하면 저 남녀는 오늘 밤중으로 사라지겠지.”“어휴, 저 여자 너무 아까워. 저렇게 예쁜데 왜 죽지 못해서 안달이지?”“여자는 살 수도 있겠지만 남자는 무조건 죽을걸.”사람들은 저마다 수군거리며 이미 진서준과 허사연의 결말을 예상하는 듯했다.“그럼 네 말대로라면 내가 널 때린다 해도 얌전히 맞고 있어야 한다는 거야?”허사연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종업원에게 다가갔다.“오지 마!”종업원은 겁에 질려 연신 뒷걸음질 쳤다.“어떤 미친놈이 내 구역에서 소란을 피우는 거야?”그 순간, 2층에서 한 사람이 내려왔다.모두가 일제히 시선을 돌려 그 사람을 확인하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성현도가 오늘 여기 있었네?”누군가 그 청년을 알아보았다.“저 둘 끝장났네. 성현도는 악명 높은 냉혈한이야.”그 청년은 바로 찻집의 사장인 성현도였다.성현도는 르벨 재벌 2세 사이에서 유명한 인물이었다.친구에게는 무조건 의리를 지키지만 적에게는 무자비했다.성현도의 고문 방법은 수도 없이 많았고 게다가 무인으로서 무공 실력도 상당했다.“사장님, 저 남녀가 와서 난동을 부렸어요.”종업원은 성현도를 보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사장이 나온 걸 확인한 허사연은 주먹 한 방에 종업원을 기절시켜 버렸다.“뭐야?”성현도의 눈이 가늘어졌고 표정이 험악해졌다.자기 앞에서 대놓고 부하를 때리다니, 이건 너무나도 명백한 도발이었다.“아가씨, 우리 처음 보는 사이 맞지? 우리
그리고 오후 2시가 되자 진서준은 허사연을 데리고 조호가 말한 천국찻집으로 향했다.겉모습만 보면 이 찻집은 진짜 전통찻집 같았고 규모도 꽤 컸다.하지만 막상 안에 들어가 보니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1층과 2층까지는 정말 평범한 찻집처럼 꾸며져 있었고 누가 봐도 이상한 점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하지만 3층으로 올라가려면 회원권이 있어야 하거나 사장이 직접 허락한 사람만 출입할 수 있었다.“손님, 아가씨, 이쪽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진서준과 허사연이 차를 마시러 온 줄 안 종업원이 빠르게 달려와 안내하려 했다.“그럴 필요 없어. 난 하경범을 찾으러 왔거든.”진서준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네?”종업원이 순간 얼어붙었다.“혹시 하씨 가문의 하 도련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맞아.”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손님은 누구신지...”종업원이 신중하게 물었다.진서준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그냥 복수하러 왔다고 전해.”그놈 아버지라고 하는 건 자기를 모욕하는 것과 같았고 친구라고 하기도 기분이 더러웠다.그 말에 종업원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손님, 여기서 장난치지 마세요.”하경범은 르벨에서 유명한 재벌 2세였다.이 찻집의 사장과도 막역한 사이였고 여기서 일하는 직원이라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왜? 못 믿겠어?”진서준이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손님, 하 도련님에게 복수하려던 사람은 단 하루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종업원이 경고하듯 말했다.“그런 농담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닙니다.”그 말을 듣자 진서준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럼 이렇게 전해. 그 하경범이 두들겨 맞고 나자빠지게 했던 진서준이 왔으니 당장 기어 나오라고 말이야.”진서준의 뻔뻔한 태도에 종업원은 어이가 없었다.“좋습니다. 손님이 그렇게 죽고 싶다면 제가 기꺼이 도와드리죠.”종업원은 바로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문제 발생했습니다. 난동자가 있습니다.”쿵! 쿵!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건장한 남자 스무 명이 들이닥쳤다.전부 검은
진서준과 허사연은 차를 타고 조호의 회사로 향했다.이 회사는 그냥 겉치레일 뿐, 진짜 돈이 들어오는 곳은 유흥업소들이었다.유흥업소를 얕잡아보면 안 된다.운 좋게 돈 많은 도련님들이라도 걸리면 하룻밤에 수억 원이 순식간에 손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진서준 씨!”진서준이 들어서자 조호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조호는 진서준 옆에 있는 허사연을 힐끗 쳐다본 뒤 고개를 숙이고 감히 더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잡담은 그만하고 하경범을 잡아가는 제일 좋은 타이밍만 말해.”진서준이 직설적으로 물었다.이 말에 조호는 속으로 크게 놀랐다.“매일 오후마다 하경범은 천국찻집이라는 곳에 갑니다.”조호는 재빨리 대답했다.“보통은 경호원 몇 명만 데리고 가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얼씨구? 저런 인간이 매일 차나 마시러 간다고?”진서준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그게... 진서준 씨, 사실 그곳은 이름만 찻집이지 실제로는...”조호는 옆에 여성이 있다는 걸 의식해서 말을 흐렸지만 진서준은 그 뜻을 단번에 알아챘다.“알겠어.”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차를 마시는 곳이 아니라 그냥 인기 많은 인터넷 셀럽이 가득한 고급 유흥업소일 것이다.“진서준 씨, 듣자 하니 그 찻집의 주인은 성씨 가문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진짜로 움직이실 거라면 하경범이 이동 중일 때를 노리는 게 좋을 겁니다.”조호가 조심스럽게 조언했다.“응? 성씨 가문이 이런 사업도 해?”진서준은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진서준은 오영수에게서 성미영에 대한 정보를 들은 적이 있었다.정의로운 성격의 성미영이 자기 가문에서 이런 유흥업소를 운영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터였다.“네, 듣기로는 성씨 가문의 한 직계 후손이 운영한다고 합니다. 여자에 미쳐 있는 놈이라 르벨의 돈 많은 도련님들과 꽤 친분이 깊다고 하더군요.”조호는 본인이 아는 정보를 전부 쏟아냈다.“좋아, 대충 알겠어.”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조호의 회사를 나온
진서준이 허사연의 캐리어를 들어주며 옆방으로 걸어갔다.그 뒷모습을 보며 도지아는 부러움이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인간은 원래 모여서 사는 걸 선호하는 동물이다.사회를 벗어나서 혼자 살아가는 건 생각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다.가족도 친구도 없이 너무 오래 지내다 보면 결국 감정 없는 시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그렇게 되면 사람과 짐승의 차이가 없어질 것이다.“어제 전화할 때 그랬었지? 이번에 너 자기 출신을 찾으러 온 거라고.”호텔 방으로 돌아온 후, 허사연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너 원래 경성 진씨 가문 사람이잖아?”“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어. 그런데 할아버지가 예전에 말해주셨어. 사실 우리 아버지는 어릴 때 길에서 주워 온 아이였다고.”진서준은 허사연에게 숨길 생각이 없었다.허사연은 진서준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허사연이라면 이 비밀을 절대 밖으로 흘리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었다.“뭐라고? 아버님이 주워 온 아이라고?”허사연이 깜짝 놀랐다.“그래. 하지만 이 사실을 아는 건 나뿐이야. 가족 중에서도 할아버지가 나한테만 알려주셨지.”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얼마 전, 오영수가 내 등에 있는 용을 보고는 내가 용맥의 일족이라고 했어. 그래서 오영수를 따라 여기 와서 오영수 셋째 삼촌에게 내 출신에 관해 알아보려 했던 거야.”“네 등에 용이 있다고? 난 한 번도 본 적 없는데?”허사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그동안 둘이 알몸으로 함께한 시간도 적지 않은데 허사연은 한 번도 본 기억이 없었다.“내가 체내 혈기를 모을 때만 그 용이 나타나거든.”진서준이 설명을 이어갔다.“그런데 오영수 삼촌이 아직 돌아오질 않아서 일단은 여기서 며칠 기다려야 해.”“아니, 그럼 오씨 가문에서 널 안 재워줬어?”허사연이 의아해했다.명문대가인 오씨 가문에 빈방이 없을 리가 없었다.“그날 오영수를 찾아갔는데 마침 오영수 할아버지가 위중했어. 그리고 그 집안엔 그 어르신을 그냥 보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었지.”진서준이 담담하게
“진짜 예쁜 새색시 숨겨놓고 있었네?”허사연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누구라도 자기 남자 방에 예쁘고 몸매가 완벽한 여자 하나가 같이 있는 걸 보면 의심 안 할 수가 없었다.게다가 지금은 아침이었다.설마 이 여자가 아침에 막 찾아온 건 아니겠지?“사연아, 오해야. 내가 제대로 설명할게.”진서준은 머리가 띵해졌고 뇌가 지진이라도 난 것 같았다.“아가씨, 오해하지 마세요. 어제 저랑 진서준이 같은 방에서 잔 건 맞지만 진짜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저 밤새 한숨도 못 잤다니까요?”도지아가 황급히 해명에 나섰다.“네? 밤새 안 자고도 아무 일 없었다고요?”허사연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되물었다.“설마 밤새 불태우느라 못 잔 건 아니겠죠?”허사연의 농담과 진담이 뒤섞인 말에 진서준은 헛웃음만 나왔다.“사연아, 이쪽은 도지아야. 우리 진짜 그냥 친구야. 일단 들어와. 천천히 설명할게.”허사연이 방에 들어오자 진서준은 서로에게 소개했다.그러고는 이 방에서 일어난 상황을 설명했다.“도지아는 황예은이 소개해 준 환자야. 다리 치료를 부탁받았거든. 종아리를 봐봐. 이틀 전에 내가 직접 발라준 연고가 있어.”허사연이 내려다보자 확실히 연고가 발라져 있었다.“그리고 도지아가 밤새 안 잔 건 원기를 수련하느라 그랬던 거야. 너도 예전에 수련한다고 며칠씩 안 잔 적 있잖아?”허사연은 오해가 풀리자 그제야 빙그레 웃었다.“내가 뭐 어쨌다고 그렇게 호들갑이야?”“혹시라도 오해할까 봐 그러는 거잖아.”진서준이 빠르게 대답했다.“뭐야? 내가 그렇게 의심 많고 질투 많은 여자로 보여?”허사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아, 아니지. 우리 사연은 누구보다 속이 넓은 부드러운 여자지.”진서준이 급히 정정했다.“됐어, 너 겁먹은 거 너무 귀엽다.”허사연이 피식 웃었다.“넌 여기 좀 쉬고 있어. 내가 방 하나 잡고 올게.”진서준은 더 머뭇거릴 틈도 없이 벌떡 일어나 나가 버렸다.진서준의 뒷모습을 보며 허사연은 그제야 웃음을 터뜨렸다.“도지아 씨, 진서준이
“내가 가면 안 돼?”사실 진서준은 거절하려 했었다.르벨은 안개가 짙게 깔린 늪지대 같은 곳이라 진서준조차도 어디에 함정이 있을지 가늠하기 어려웠다.그러니 허사연이 온다면 다칠 가능성이 컸다.하지만 거절하면 허사연이 상처받을 게 뻔했다.“당연히 되지. 지금 위치 보낼게.”진서준은 단호하게 말하며 위치를 보냈다.자기 여자를 지킬 자신도 없으면서 강자들을 상대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자기야, 잘 자.”허사연이 애정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너도 일찍 자.”진서준이 다정하게 답했다.전화를 끊고 나니 진서준의 졸음이 싹 가셨다.진서준은 창가로 다가가 이 화려한 도시를 내려다봤다.“오씨 가문, 안씨 가문, 하씨 가문... 너희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든 난 전부 박살 낼 거야. 이번엔 반드시 나와 아버지의 정체를 밝혀내고 말겠어.”진서준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그렇게 별다른 사건 없이 밤이 지나갔다.다음 날 아침.진서준이 막 눈을 뜨자마자 도지아의 흥분한 외침이 들려왔다.“진서준, 됐어. 나 생겼어!”도지아는 눈 밑이 시커멓게 변해 있었는데 밤새 잠을 자지 않은 게 분명했다.진서준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너 아직 처녀 아니었어? 대체 어떻게 임신한 거야?”“미친놈아, 임신은 개뿔, 무슨 헛소리야?”도지아는 얼굴이 빨개지며 진서준을 노려봤다.“그럼 왜 아침부터 난리야?”진서준이 되물었다.보통 사람이라면 이렇게 아침부터 흥분해 날뛰지 않을 것이다.“어제 네가 준 수련법 기억나지? 나 벌써 원기를 형성할 수 있게 됐어.”자기가 대단하다고 여긴 도지아는 자랑스럽게 선언했다.고작 하룻밤 만에 원기를 형성한 건 확실히 대단한 일이었다.“뭐? 그렇게 빠르다고? 너 타고난 천재 맞네?”진서준이 다소 의아한 표정을 보였다.보통 무인은 원기를 익히는 데만 최소 1년이 걸리는데 그것도 매일 꾸준히 수련할 경우에만 발생하는 일이었다.심지어 재능 있는 자들도 한두 달은 족히 걸린다.그런데 도지아는 단 하룻밤에 이 어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