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광도 이어 협박했다.“유정 씨, 유씨 가문의 세력이 작지는 않지만 여기는 경성입니다. 진씨 가문이 몰락했다고는 하나 그래도 여전히 4대 가문 중 하나입니다. 유씨 가문에서 두 가문을 동시에 상대할 실력을 갖추고 있나요?”이 시간 동안 유정도 유씨 가문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그녀도 평범한 사람에서 무인으로 변했다.대한민국 세력의 분포에 대해서는 유정이 진서준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실력으로 따지면 유씨 가문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 제일 가는 가문도 경성의 4대 가문과 비교할 수 없었다.재력으로 따진다면 명주의 마씨 가문 왕씨 가문만이 4대 가문에 비견할 수 있었다.어느 가문도 감히 경성의 4대 가문에 속해 있는 두 가문을 동시에 건드릴 수는 없었다.하지만 유정 마음속에서 진서준의 지위는 보통이 아니었다.유정은 절대 다른 사람이 진서준을 다치게 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그녀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진서준을 보호하려 했다.“그럼 우리 서씨 가문까지 합세하면?”서지은이 갑자기 걸어 들어왔다.임소룡과 진광은 서지은을 바라보며 낯이 익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서씨 가문? 설마 강남 서씨 가문 사람이에요?”임소룡이 미간을 찌푸렸다.“그래요. 서광문의 딸, 서지은입니다.”서지은이 진서준 곁으로 다가오며 그를 살폈다.“서준 씨, 안 다쳤죠?”“괜찮아. 피라미 같은 새끼들이 나를 다치게 할 리가.”진서준이 담담히 웃었다.그의 말을 들은 임소룡과 진광의 안색이 변했다.‘저 새끼는 어떻게 강남의 서씨 가문이랑도 인연이 있는 거야!’서지은과 유정이 진서준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모두 마음이 있는 것 같았다.‘설마 기생오라비인가? 여자들한테 빌붙어 산다고 해도 이건 너무 스케일이 큰 거 아닌가?’동시에 서씨 가문과 유씨 가문의 여자를 꼬셔 비호를 받는다는 것도 능력이었다.“서씨 가문도 이 일에 끼어들게요?”임소룡이 차가운 얼굴로 물었다.“진서준은 제 남자예요. 그의 일이 곧 제 일이죠.”서지은은 가감 없이 그녀와 진서준의 관계를 단도직입
너무 힘들었다.임소룡의 안색도 좋지 않았다.강남, 서남, 서북에 있는 제일 가는 가문들이 진서준을 위해 나섰다.임씨 가문이 아무리 난다 긴다 해도 세 가문의 체면을 세워줘야 했다.나아가 지의방 30위에 있는 서산객도 이 자리에 있었다.임소룡이 진서준을 놓아주고 싶지 않아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하지만 이렇게 진서준을 보내면 임씨 가문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아마 임씨 가문이 지방 가문들을 두려워한다는 소문이 퍼질지도 몰랐다.임서준이 난감한 표정을 짓자 진서준이 천천히 말했다.“임씨 가문 넷째 어르신의 체면을 봐서 한마디 해줄게. 이 일에는 손을 대지 않는 것이 좋겠다.”임소룡이 멈칫하고 진서준을 바라보았다.“우리 할아버지를 알아?”“말도 안 돼, 쟤가 어떻게 임씨 가문 넷째 어르신을 알아! 틀림없는 헛소리야.”눈이 벌겋게 달아오른 진광이 소리를 질렀다.임소룡이 이 자리를 떠난다면 오늘 밤, 진광은 편치 않을 것이었다.“아는지 모르는지, 전화 한번 해보면 알 수 있겠지.”진서준이 차분히 말했다.잠시 생각하던 임소룡이 핸드폰을 꺼내 임준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가 연결되자 임소룡이 물었다.“할아버지, 혹시 진서준이라는 젊은이를 아세요?”“왜? 설마 진서준이랑 마찰을 빚은 거야?”임준의 말투가 엄숙해졌다.그러자 임소룡은 놀라움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몇 년 동안 처음으로 할아버지가 자신에게 이런 말투로 말하는 걸 들어봤다.“마찰은 아니고요... 진서준이 덕안정에서 진광과 갈등을 빚어 싸우기도 했는데...”임소룡이 얼른 해명했다.“그들이 알아서 하라고 해. 사람만 안 죽으면 되니까 넌 끼지 마.”임준바로 임소룡에게 그 일에 끼지 말라고 했다.전화를 끊은 임소룡의 마음은 더 복잡해졌다.그는 지금 진서준의 정체에 대해 매우 궁금했다.지방에 있는 큰 가문의 여자들이 그를 쫓아다닐 뿐만 아니라 임준도 진서준의 편을 들고 있었으니 말이다.“진광아, 미안하지만 이 일은 할아버지도 끼어들지 말라고 하시네. 네가 알아서 해
진서준 일행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진광의 아버지는 전화를 받고 즉시 진광을 데리고 병원으로 향했다.“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왜 내 아들이 너희 가게에서 기절했을까?”진광 아버지 진명철이 매니저를 향해 호통쳤다.매니저도 어쩔 수 없어서 있었던 일을 있는 그대로 얘기했다.사건의 자초지종을 들은 진명철의 안색이 갑자기 돌변했다.“내 아들이 다른 사람의 협박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매니저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네. 당시 소룡 도련님도 자리에 계셨습니다. 나중에 세 명의 여자가 더 왔는데 모두 지역 가문의 사람이었고 소룡 도련님도 더 이상 이 일에 관여하지 않으셨습니다.”진명철이 이를 악물며 말을 이었다.“비록 아들의 잘못도 있지만, 상대방도 너무 했어!”이들은 체면을 제일 신경 쓰고 있었다.이 일이 밖에 퍼진다면 진씨 가문 사람들은 틀림없이 다른 가문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었다.“그 청년 이름이 뭐라고?”진명철은 체면을 되찾기로 결심했다.“제가 알아요. 진서준이라고 합니다. 남주성 사람이에요.”오인혁이 얼른 답했다.그는 진씨 가문이 가만있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진명철을 따라 병원으로 왔다.상대방도 진씨라는 말에 진명철은 미간을 찌푸렸다.“남주성? 설마...”예전에 중부 삼성의 소년 진 마스터에 대해 진명철도 들은 적이 있었다.그래서 진명처은 자기 아들을 때린 사람이 진 마스터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측했다.“그 사람이라면 봉호전에서 볼 수 있겠지.”진명철은 봉호전에서 체면을 찾을 생각이었다.그때면 대한민국의 천교가 거의 다 모일 것이다.마침 체면을 되찾을 절호의 기회였다.유지수는 내내 진서준에게 들러붙으며 진서준 일행을 따라 임씨 가문에서 제공해 준 숙소로 향했다.“와, 어전 별장이라니... 진서준아, 진서준. 정말 부자구나?”유지수가 별장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유지수가 별장의 이름을 바로 부르자, 진서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진서준은 갑자기 유지수에게 다가가 그녀를 죽일 듯이 주시했다.깜짝 놀란 유지수가
자주 가던 식당은 시간이 아무리 오래 지났더라도 기억에 남는 법이었다.설마 정말 유지수가 아니란 말인가?그렇다면 눈앞에 있는 그녀는 또 누구일 것인가.“잊었어? 그럼 네 목뒤에 있던 그 모반은? 수술해서 지운 거야?”진서준이 싸늘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쳐다보았다.잠시 침묵을 지킨 유지수가 이내 싱글벙글 웃으며 진서준을 바라보았다.“언제 내가 가짜라는 걸 안 거야?”유지수가 바로 인정하자 허사연 일행도 넋이 나갔다.“정말 유지수가 아니라고? 그럼 왜 똑같이 생긴 거야?”“친동생이니까.”유지수가 웃으며 답했다.“진서준,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데 언제부터 내가 유지수가 아니라고 의심한 거야?”그녀는 자신이 시종일관 유지수를 잘 연기해 왔다고 생각했다.유지수를 완벽하게 따라 하기 위해 그녀는 많은 공을 들였다.“고양시에서 만나 네가 세 가지 임무를 주겠다고 했을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비록 자신을 바꾸려고 노력했지만, 유지수 특유의 분위기와는 아직 거리가 먼 것 같네. 유지수는 평범한 사람이었어. 이지성에게 시집갔다 해도 분위기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 하지만 너는 일거수일투족에 상류층 사람이 풍길 법한 분위기를 풍겼지. 이건 오랜 세월 동안 겪어야만 가질 수 있는 분위기야.”진서준이 유지수를 바라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답했다.“대학 시절 유지수와 3년을 함께 했는데 그녀의 습성은 내가 너보다 더 잘 알아. 정말 유씨 가문 가주의 딸이라고 해도, 한순간 백조로 탈바꿈할 수는 없어. 하지만 너는? 사연이랑 김연아랑도 조금의 불편함도 없이 자연스럽게 어울렸지. 그리고 별장의 이름을 바로 말할 때는 더 이상했어.”진서준의 설명을 들은 유지수가 어깨를 으쓱했다.“하... 역시 완벽한 복제는 불가능하네.”진서준이 캐물었다.“유지수는? 어디 갔어?”진서준은 유지수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유씨 가문에서 또 어떤 망신스러운 일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눈앞에 있는 이 유지수는 틈만 나면 진서준을 꼬셨다.만에 하나라도 진서준이 참
유연비는 유지수보다 더 대담했다.유지수는 지난 시간 동안 진서준과 재결합하고 싶어도 이렇게까지 대담한 말은 한 적이 없었다.“역시 친자매네. 하나같이 낯이 두꺼워.”허윤진이 진서준을 자기 뒤로 끌어당기며 유연비가 닿지 못하도록 막았다.“그래? 대체 누가 뻔뻔하단 거야? 너랑 허사연은 친자매 아니야? 하지만 같은 남자를 좋아하고 심지어 그 사람을 함께 섬길 계획을 하고 있지 않아?”유연비는 화내기는커녕 오히려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 말에 서지은도 깜짝 놀랐다.‘허윤진도 진서준을 좋아한다고? 하지만 진서준과 허사연이 커플인데... 허윤진은 허사연의 친동생이고... 이게...’보수적인 사상을 지닌 서지은은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무슨 헛소리야!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하면 네 입을 갈기갈기 찢을 거야.”화가 난 허윤진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이를 갈았다.이런 일은 모두가 마음속으로 알고만 있으면 되었다.직접 말하기에는 조금 수치스러웠다.“내가 헛소리하는 건지 아닌지는 여기 있는 사람들이 잘 알겠지.”유연비가 웃으며 답했다.“됐어. 너희랑 싸우기도 싫네. 간다.”“잠깐만. 이번 달 약 줘야지!”진서준이 얼른 유연비를 불러 세웠다.곧 월말인데 유연비는 아직 진서라의 약을 주지 않았다.“약을 원해? 그럼 애원해 봐.”유연비가 고개를 돌려 장난스럽게 진서준을 바라보았다.“안 줄 거면 오늘 여기서 나갈 생각하지 마.”허윤진이 바로 협박을 가했다.그녀는 유연비에게 인내심이 없었다.‘저 여자... 정말 가증스럽네.’“좋네. 어차피 죽는 것도 두렵지 않고, 가는 길에 진서라 같은 미인도 있으니 나야 좋지 뭐.”유연비가 생글생글 웃으며 받아쳤다.주먹을 불끈 쥔 진서준의 마음속에서 분노가 솟구쳤다.한 여자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느낌은 너무 괴로웠다.“정말 나쁜 년이네.”“칭찬 고마워.”유연비의 낯은 여간 두꺼운 게 아니었다.그녀는 허윤진의 욕설에 면역되었다시피 있었다.“내가 진서준 대신 빌게. 서라 약 좀
진서준이 허사연의 손을 잡으며 단호하게 말했다.“괜찮아요. 서준 씨랑 서라만 괜찮다면 된 거죠.”이때, 허윤진은 그녀와 허사연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다.그녀가 진서준에 대한 사랑은 이기적인 감정이었다.하지만 허사연이 진서준에 대한 사랑은 사심 없고 보답을 바라지 않는 것이었다.진서준이 기쁘면 허사연도 기쁜 것이었다.이 차이는 허윤진이 오랜 시간을 거쳐서야 메울 수 있을 것이었다.늦은 밤, 허사연은 진서준에게 오랜 시간 시달렸다.허사연이 용서를 빌 때에야 진서준은 멈췄다.“오늘 웬일이에요? 약 먹은 것 같은데요? 저녁에 있었던 일 때문에 그래요? 마음에 두지 마요. 서준 씨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거예요.”허사연이 진서준의 품에 안겨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사연아, 너를 만나서 정말 다행이야.”진서준이 허사연을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저도요.”봉호전 시작 하루 전이 되자 경성으로 입성하는 사람은 갈수록 많아졌고 모든 특급 호텔은 이미 꽉 차 있었다.일부 늦게 도착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기차역 근처 작은 모텔에서 묵어야 했다.국안부는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30명의 호국사를 파견했다.심지어 명주를 지키고 있던 현천진군마저 달려왔다.특급 식당 안, 식당은 사람들로 붐볐다.“정란아, 함부로 보지 마.”식탁에 정란이 한 젊은이와 한 노인과 앉아 있었다.지난번 정란 가족이 진서준 가족과 밥을 먹었을 때 그녀는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그 후 정란은 그녀의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진서준보다 더 강한 사람을 찾아 진서준에게 타격을 줘야겠다고 다짐했다.한 번의 타격을 겪은 후, 정란은 현재의 남자 친구를 만났다.이 남자 친구가 정란에게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해줬고 그녀에게 이 세상에 무인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평지 씨, 이 사람들은 전부 무인이에요?”정란이 주위에 있던 사람들을 보며 호기심에 겨워 물었다.“맞아. 모두 강한 실력을 지닌 무인들이야.”임평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평소에는 무인을 보기
“진서준이 왜 여기 있지.”정란은 원래 구정이 지나면 임평지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 진서준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돈 많은 여자 친구 찾은 게 뭔 대수인가? 무인인 평지 씨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할 거면서. 서울시에서 내놓으라 하는 사람들도 우리 평지 씨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데.’임평지가 잔잔하게 웃으며 말했다.“왜? 아는 사람이야?”“네. 사촌 오빠인데 옥살이하고 나와서 돈 많은 아줌마 만나고 나서는 우리 가문을 무시하기 시작하더라고요.”정란이 차갑게 웃었다.“돈 때문에 자존심까지 내려놓는 남자라면 옥살이해도 싸지.”임평지도 한마디 거들었다. 임평지는 진서준이 돈 때문에 뚱뚱하고 못생긴 아줌마와 붙어먹었고 그런 사람은 남자에도 속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사지가 멀쩡한데 왜 스스로 노력할 생각은 않고 여자에게 빌붙어 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내가 가서 데려올게요.”정란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문 쪽으로 걸어갔다.진서준은 허사연, 그리고 다른 일행과 자리를 뜨려고 하던 참이었다. 밥 먹으러 왔는데 사람이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다.“진서준.”진서준이 몸을 돌려 나가려는데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 뒤돌아보니 정란이었다.진짜 신분을 알게 된 후로 진서준은 정란 일가가 그와 친척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그해 진서준의 어머니 임수련이 서울시로 도망 왔을 때 우연히 진짜 조희선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때 조희선은 거의 얼어 죽기 일보 직전이었고 임수련은 조희선이 자기와 외모가 퍽 닮은 걸 보고 조희선으로 위장했다.그때는 주민등록증이 생기기 전이었고 제대로 된 사진조차 없었다. 게다가 정란 일가는 조희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기에 임수련이 조희선으로 탈바꿈할 수 있었던 것이다.친척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지금 진서준도 더는 정란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아부밖에 모르는 친척은 둘 필요가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경성에는 왜 올라온 거야?”정란이 거들먹거리며 진서준을 쳐다봤다. 진서준이 못 올 데라도 온 것처럼 말이다.진서준도 정란의 말뜻
두 사람은 다 무인이었다. 그중 임진우 무도 대종사였다.진서준은 그제야 정란이 왜 밥을 사주겠다며 불렀는지 알 것 같았다. 작정하고 면박을 주려는 것이었다.“당연하죠. 식당을 통으로 예약한다 해도 끄떡없습니다.”임평지가 꽤 열정적으로 대꾸했다.정란도 예쁘게 생겼지만 허사연 그리고 그 일행과 비기면 천지 차이였다. 임평지는 그들의 외모에 이미 마음을 완전히 뺏겨버린 상태였다.“평지 씨, 지금 뭐 보는 거예요?”임평지는 정란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허사연과 그 일행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이에 정란은 기분이 매우 잡쳤다.임평지는 정란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웃으며 허사연에게 말했다.“안녕하세요. 저는 임평지라고 합니다. 내공경 무인입니다.”“아, 네.”임평지의 이글이글한 눈빛에 허사연은 몸에 소름이 돋아 역겹다는 표정으로 단답형으로 말했다.임평지는 허사연의 반응을 예상했다. 일반인은 무인이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르기에 이따가 강력한 실력만 보여주면 무조건 반해서 먼저 다가올 것이라고 믿었다.“내공경의 무인이 뭔지 모르죠?”“이렇게 설명하면 쉬우려나? 앞에 보이는 이 벽을 주먹 한 방에 구멍 낼 수 있다고 보면 돼요.”오만한 임평지의 말에 허사연이 어이없다는 듯 눈을 흘겼다.그녀가 내공경을 모른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내공경이라면 그녀와 비슷한 경지였다.남자가 돼서 실력이 비슷한 것도 모자라 그걸로 우쭐대고 있으니 정말 우스웠다.허사연도 만만한 성격은 아니었기에 바로 이렇게 쏘아붙였다.“그러면 나와 비슷하네요.”“네?”임평지는 자기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비슷하다고요? 무슨 그런 농담을.”허윤진이 콧방귀를 꼈다.“우리 언니 농담한 거 아니거든요. 그쪽은 우리 언니 상대도 못 돼요.”‘뭐야? 둘이 자매였어? 정란과는 비교도 안 되게 너무 예쁜데?’임평지는 침을 질질 흘릴 지경이었다.옆에 선 정란의 표정이 점점 굳었다. 원래는 임평지에게 진서준의 콧대를 납작하게 해달라고 할 참이었다.하지만 임평지는 오히려 그녀를
“뭐라고? 불법적인 일이 우리 가게에서 일어난다고? 말도 안 돼.”성현도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넌 전신전 소속이잖아. 그런데 네 오빠인 내가 어떻게 법률을 어기는 일을 하겠어?”“그럼 이 사람들은 왜 부른 거야? 집단 폭력도 불법이거든.”성미영은 차가운 시선을 보이며 성현도와 따졌다.“미영아, 이건 내가 싸우려던 게 아니야. 저 녀석이 일부러 시비 걸러 온 거라고.”성현도는 진서준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이놈이 일부러 우리 찻집에 난입해 행패를 부리고 상철을 두들겨 패서 머리에 혹이 다 나버렸어. 난 단순히 정당방위를 위해 부른 거라고.”성미영이 등장하자 성현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솔직히 실력만 놓고 보면 성현도는 성미영보다 한참 부족했다.게다가 성미영은 전신전 소속인지라 저 남녀가 군부 조직인 전신전을 적으로 돌릴 리 없었다.군대를 건드리는 순간, 무조건 좋은 결과는 있을 수 없었다.“진서준, 도대체 무슨 일이야?”성미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어라? 너희 둘이 아는 사이야?”성현도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방금 내려놨던 마음이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난 사람을 찾으러 왔어. 하씨 가문 하경범이 이 위층에 있다고 들었는데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겠어.”진서준이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그리고 또 하나, 저 위에서 불법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도 하더군.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르겠어.”이 말에 성현도의 표정이 단숨에 험악해졌고 즉시 반박에 나섰다.“헛소리 마. 우리 가게는 단순한 찻집이야. 불법적인 일 따윈 없어. 근거없는 소문을 왜 털어놓고 난리야?”“미영아, 저 녀석한테 속지 마. 난 네 사촌 오빠야. 내가 그런 불법적인 짓을 할 사람이겠어?”성미영이 곧바로 진서준에게 물었다.“진서준, 너 증거 있어?”“직접 올라가 보면 다 알게 될 거잖아?”진서준이 가볍게 말했다.“오빠, 위층으로 가자.”성미영이 단호하게 말했다.“그, 그건 좀 곤란해. 위층엔 귀
순간, 장내는 숨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모든 시선이 진서준에게 쏠렸고 사람들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다들 진서준을 그냥 얼굴만 반반한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진짜 고수였다.성현도의 부하 중 최고 실력자조차 상대가 되지 않았다.성현도의 얼굴은 시퍼렇게 질렸고 상철을 향해서 욕설을 날렸다.“쓰레기 자식, 이런 애송이 하나도 못 이겨?”부하가 지면 망신당하는 건 결국 성현도 자신이었다.이대로 체면을 구긴 채 끝낼 수는 없었다.이대로 넘어가면 앞으로 르벨 재벌 2세들 사이에서 조롱거리가 될 게 뻔했다.“이봐, 네 실력이 괜찮은 건 인정할게.”성현도가 싸늘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근데 너 혼자서 백 명을 상대할 수 있어? 천 명은? 잘 들어. 내 부하는 수도 없이 많아. 너 같은 놈 하나 처리하는 데 전화 한 통이면 충분해.”진서준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여전히 같은 말을 반복했다.“다시 말하지만 난 그냥 하경범을 찾으러 온 거야. 그 녀석만 넘기면 오늘 일은 없던 걸로 해주지.”“없던 걸로 한다고?”성현도가 그 말에 어이없어 헛웃음이 나왔다.“너 지금 누굴 상대로 협상하려 드는 거야? 난 성씨 가문의 직계야. 날 건드리면 상대해야 할 건 나 하나가 아니라 우리 가문 전체라고.”그때,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곧이어 검은색 전투복을 입은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왔다.이 남자들은 전부 성씨 가문의 경호원이었고 실력도 만만하지 않았다.그것도 한둘이 아니라 무려 50명 이상이었다.한순간에 텅 비어 있던 로비가 사람들로 꽉 찼다.“저 자식 끝났네. 이 정도 성씨 가문 인원이라면 아무리 강해도 버틸 수가 없지.”“그러게 말이야.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없잖아.”“왜 쓸데없이 성현도를 건드린 거지? 스스로 무덤을 판 거잖아.”구경꾼들은 이 광경에 각자 다른 감정을 보였다.누군가는 동정을, 누군가는 아쉬움을, 또 누군가는 짙은 흥미를 보였다.“사연아, 넌 좀 쉬어. 이놈들은 내가 처리할게.”진서준이 앞으로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키가 거의 2미터에 달하는 거구의 사내가 찻집 안으로 들어왔다.남자는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졌다.“상철아, 저놈 다리 하나 부러뜨려서 내던져.”성현도가 진서준을 가리키며 명령했다.“알겠습니다.”상철은 간단하게 대답하고는 진서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서준아, 내가 할게.”허사연의 눈에는 불꽃 같은 전투욕이 타올랐다.“조심해. 저 녀석은 횡련 종사야.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진서준이 조용히 귀띔했다.“알았어. 설령 못 이긴다고 해도 어차피 네가 있잖아?”허사연이 장난스럽게 웃었다.진서준이 곁에 있는 한, 허사연은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이봐, 사내자식이 여자 뒤에 숨는 게 말이 돼?”상철이 눈썹을 추켜세우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이봐, 껑충이. 여자를 얕보지 마. 일단 이기고 나서 말해.”허사연이 상철을 도발했다.“아가씨, 그런 기생오라비 말고 날 따르지 그래? 밤마다 널 천국으로 보내줄 수 있는데?”상철이 음흉하게 웃었다.“죽고 싶어 환장했구나.”얼굴이 싸늘해진 허사연이 주먹을 날렸다.강렬한 펀치가 공기를 가르며 폭발음을 일으켰고 그 위력은 철판도 뚫을 수 있을 정도였다.하지만 상철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내가 가만히 서 있어도 넌 날 어쩔 수 없어.”“닥쳐!”허사연이 분노에 차 주먹을 그대로 상철의 얼굴로 내리꽂았다.상철은 일부러 머리를 숙이며 대머리 정수리로 받아냈다.쿵!둔탁한 충돌음이 울려 퍼졌다.주먹이 상철의 머리를 강타했으나 대머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허사연이 몇 걸음 물러섰다.순간 손에 뜨거운 통증이 밀려왔고 뼈가 부서질 것 같았다.손을 확인하자 하얀 피부였던 손등이 새빨갛게 부어올랐다.상철은 자기 머리를 한번 쓸어내리더니 빙그레 웃었다.“아가씨, 이제 내 실력을 알겠지?”그 모습에 허사연의 승부욕이 다시 불타올랐고 콧방귀를 뀌며 다시 달려들었다.이번에는 다리를 높이 들어 올려 상철의 머리를 내려찍었다.‘머리가 단단하다고 자랑하
이렇게 예쁘고 섹시한 여자가 싸움 실력이 이렇게 대단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완전 여성판 이소룡이었다.“너, 너희들 정말 너무 대담한 거 아니야? 여기가 어디인지 알기나 해? 어디서 대놓고 싸움질이야?”종업원은 순간 놀란 뒤 분노에 찬 얼굴로 진서준와 허사연을 가리켰다.찻집이 문을 연 이후로 이렇게 난동을 부리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고 진서준과 허사연이 첫 사례였다.주변의 구경꾼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싸움 좀 하면 뭐해? 여긴 성씨 가문의 구역이야. 성씨 가문에서 한마디만 하면 저 남녀는 오늘 밤중으로 사라지겠지.”“어휴, 저 여자 너무 아까워. 저렇게 예쁜데 왜 죽지 못해서 안달이지?”“여자는 살 수도 있겠지만 남자는 무조건 죽을걸.”사람들은 저마다 수군거리며 이미 진서준과 허사연의 결말을 예상하는 듯했다.“그럼 네 말대로라면 내가 널 때린다 해도 얌전히 맞고 있어야 한다는 거야?”허사연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종업원에게 다가갔다.“오지 마!”종업원은 겁에 질려 연신 뒷걸음질 쳤다.“어떤 미친놈이 내 구역에서 소란을 피우는 거야?”그 순간, 2층에서 한 사람이 내려왔다.모두가 일제히 시선을 돌려 그 사람을 확인하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성현도가 오늘 여기 있었네?”누군가 그 청년을 알아보았다.“저 둘 끝장났네. 성현도는 악명 높은 냉혈한이야.”그 청년은 바로 찻집의 사장인 성현도였다.성현도는 르벨 재벌 2세 사이에서 유명한 인물이었다.친구에게는 무조건 의리를 지키지만 적에게는 무자비했다.성현도의 고문 방법은 수도 없이 많았고 게다가 무인으로서 무공 실력도 상당했다.“사장님, 저 남녀가 와서 난동을 부렸어요.”종업원은 성현도를 보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사장이 나온 걸 확인한 허사연은 주먹 한 방에 종업원을 기절시켜 버렸다.“뭐야?”성현도의 눈이 가늘어졌고 표정이 험악해졌다.자기 앞에서 대놓고 부하를 때리다니, 이건 너무나도 명백한 도발이었다.“아가씨, 우리 처음 보는 사이 맞지? 우리
그리고 오후 2시가 되자 진서준은 허사연을 데리고 조호가 말한 천국찻집으로 향했다.겉모습만 보면 이 찻집은 진짜 전통찻집 같았고 규모도 꽤 컸다.하지만 막상 안에 들어가 보니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1층과 2층까지는 정말 평범한 찻집처럼 꾸며져 있었고 누가 봐도 이상한 점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하지만 3층으로 올라가려면 회원권이 있어야 하거나 사장이 직접 허락한 사람만 출입할 수 있었다.“손님, 아가씨, 이쪽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진서준과 허사연이 차를 마시러 온 줄 안 종업원이 빠르게 달려와 안내하려 했다.“그럴 필요 없어. 난 하경범을 찾으러 왔거든.”진서준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네?”종업원이 순간 얼어붙었다.“혹시 하씨 가문의 하 도련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맞아.”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손님은 누구신지...”종업원이 신중하게 물었다.진서준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그냥 복수하러 왔다고 전해.”그놈 아버지라고 하는 건 자기를 모욕하는 것과 같았고 친구라고 하기도 기분이 더러웠다.그 말에 종업원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손님, 여기서 장난치지 마세요.”하경범은 르벨에서 유명한 재벌 2세였다.이 찻집의 사장과도 막역한 사이였고 여기서 일하는 직원이라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왜? 못 믿겠어?”진서준이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손님, 하 도련님에게 복수하려던 사람은 단 하루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종업원이 경고하듯 말했다.“그런 농담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닙니다.”그 말을 듣자 진서준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럼 이렇게 전해. 그 하경범이 두들겨 맞고 나자빠지게 했던 진서준이 왔으니 당장 기어 나오라고 말이야.”진서준의 뻔뻔한 태도에 종업원은 어이가 없었다.“좋습니다. 손님이 그렇게 죽고 싶다면 제가 기꺼이 도와드리죠.”종업원은 바로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문제 발생했습니다. 난동자가 있습니다.”쿵! 쿵!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건장한 남자 스무 명이 들이닥쳤다.전부 검은
진서준과 허사연은 차를 타고 조호의 회사로 향했다.이 회사는 그냥 겉치레일 뿐, 진짜 돈이 들어오는 곳은 유흥업소들이었다.유흥업소를 얕잡아보면 안 된다.운 좋게 돈 많은 도련님들이라도 걸리면 하룻밤에 수억 원이 순식간에 손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진서준 씨!”진서준이 들어서자 조호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조호는 진서준 옆에 있는 허사연을 힐끗 쳐다본 뒤 고개를 숙이고 감히 더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잡담은 그만하고 하경범을 잡아가는 제일 좋은 타이밍만 말해.”진서준이 직설적으로 물었다.이 말에 조호는 속으로 크게 놀랐다.“매일 오후마다 하경범은 천국찻집이라는 곳에 갑니다.”조호는 재빨리 대답했다.“보통은 경호원 몇 명만 데리고 가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얼씨구? 저런 인간이 매일 차나 마시러 간다고?”진서준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그게... 진서준 씨, 사실 그곳은 이름만 찻집이지 실제로는...”조호는 옆에 여성이 있다는 걸 의식해서 말을 흐렸지만 진서준은 그 뜻을 단번에 알아챘다.“알겠어.”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차를 마시는 곳이 아니라 그냥 인기 많은 인터넷 셀럽이 가득한 고급 유흥업소일 것이다.“진서준 씨, 듣자 하니 그 찻집의 주인은 성씨 가문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진짜로 움직이실 거라면 하경범이 이동 중일 때를 노리는 게 좋을 겁니다.”조호가 조심스럽게 조언했다.“응? 성씨 가문이 이런 사업도 해?”진서준은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진서준은 오영수에게서 성미영에 대한 정보를 들은 적이 있었다.정의로운 성격의 성미영이 자기 가문에서 이런 유흥업소를 운영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터였다.“네, 듣기로는 성씨 가문의 한 직계 후손이 운영한다고 합니다. 여자에 미쳐 있는 놈이라 르벨의 돈 많은 도련님들과 꽤 친분이 깊다고 하더군요.”조호는 본인이 아는 정보를 전부 쏟아냈다.“좋아, 대충 알겠어.”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조호의 회사를 나온
진서준이 허사연의 캐리어를 들어주며 옆방으로 걸어갔다.그 뒷모습을 보며 도지아는 부러움이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인간은 원래 모여서 사는 걸 선호하는 동물이다.사회를 벗어나서 혼자 살아가는 건 생각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다.가족도 친구도 없이 너무 오래 지내다 보면 결국 감정 없는 시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그렇게 되면 사람과 짐승의 차이가 없어질 것이다.“어제 전화할 때 그랬었지? 이번에 너 자기 출신을 찾으러 온 거라고.”호텔 방으로 돌아온 후, 허사연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너 원래 경성 진씨 가문 사람이잖아?”“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어. 그런데 할아버지가 예전에 말해주셨어. 사실 우리 아버지는 어릴 때 길에서 주워 온 아이였다고.”진서준은 허사연에게 숨길 생각이 없었다.허사연은 진서준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허사연이라면 이 비밀을 절대 밖으로 흘리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었다.“뭐라고? 아버님이 주워 온 아이라고?”허사연이 깜짝 놀랐다.“그래. 하지만 이 사실을 아는 건 나뿐이야. 가족 중에서도 할아버지가 나한테만 알려주셨지.”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얼마 전, 오영수가 내 등에 있는 용을 보고는 내가 용맥의 일족이라고 했어. 그래서 오영수를 따라 여기 와서 오영수 셋째 삼촌에게 내 출신에 관해 알아보려 했던 거야.”“네 등에 용이 있다고? 난 한 번도 본 적 없는데?”허사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그동안 둘이 알몸으로 함께한 시간도 적지 않은데 허사연은 한 번도 본 기억이 없었다.“내가 체내 혈기를 모을 때만 그 용이 나타나거든.”진서준이 설명을 이어갔다.“그런데 오영수 삼촌이 아직 돌아오질 않아서 일단은 여기서 며칠 기다려야 해.”“아니, 그럼 오씨 가문에서 널 안 재워줬어?”허사연이 의아해했다.명문대가인 오씨 가문에 빈방이 없을 리가 없었다.“그날 오영수를 찾아갔는데 마침 오영수 할아버지가 위중했어. 그리고 그 집안엔 그 어르신을 그냥 보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었지.”진서준이 담담하게
“진짜 예쁜 새색시 숨겨놓고 있었네?”허사연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누구라도 자기 남자 방에 예쁘고 몸매가 완벽한 여자 하나가 같이 있는 걸 보면 의심 안 할 수가 없었다.게다가 지금은 아침이었다.설마 이 여자가 아침에 막 찾아온 건 아니겠지?“사연아, 오해야. 내가 제대로 설명할게.”진서준은 머리가 띵해졌고 뇌가 지진이라도 난 것 같았다.“아가씨, 오해하지 마세요. 어제 저랑 진서준이 같은 방에서 잔 건 맞지만 진짜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저 밤새 한숨도 못 잤다니까요?”도지아가 황급히 해명에 나섰다.“네? 밤새 안 자고도 아무 일 없었다고요?”허사연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되물었다.“설마 밤새 불태우느라 못 잔 건 아니겠죠?”허사연의 농담과 진담이 뒤섞인 말에 진서준은 헛웃음만 나왔다.“사연아, 이쪽은 도지아야. 우리 진짜 그냥 친구야. 일단 들어와. 천천히 설명할게.”허사연이 방에 들어오자 진서준은 서로에게 소개했다.그러고는 이 방에서 일어난 상황을 설명했다.“도지아는 황예은이 소개해 준 환자야. 다리 치료를 부탁받았거든. 종아리를 봐봐. 이틀 전에 내가 직접 발라준 연고가 있어.”허사연이 내려다보자 확실히 연고가 발라져 있었다.“그리고 도지아가 밤새 안 잔 건 원기를 수련하느라 그랬던 거야. 너도 예전에 수련한다고 며칠씩 안 잔 적 있잖아?”허사연은 오해가 풀리자 그제야 빙그레 웃었다.“내가 뭐 어쨌다고 그렇게 호들갑이야?”“혹시라도 오해할까 봐 그러는 거잖아.”진서준이 빠르게 대답했다.“뭐야? 내가 그렇게 의심 많고 질투 많은 여자로 보여?”허사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아, 아니지. 우리 사연은 누구보다 속이 넓은 부드러운 여자지.”진서준이 급히 정정했다.“됐어, 너 겁먹은 거 너무 귀엽다.”허사연이 피식 웃었다.“넌 여기 좀 쉬고 있어. 내가 방 하나 잡고 올게.”진서준은 더 머뭇거릴 틈도 없이 벌떡 일어나 나가 버렸다.진서준의 뒷모습을 보며 허사연은 그제야 웃음을 터뜨렸다.“도지아 씨, 진서준이
“내가 가면 안 돼?”사실 진서준은 거절하려 했었다.르벨은 안개가 짙게 깔린 늪지대 같은 곳이라 진서준조차도 어디에 함정이 있을지 가늠하기 어려웠다.그러니 허사연이 온다면 다칠 가능성이 컸다.하지만 거절하면 허사연이 상처받을 게 뻔했다.“당연히 되지. 지금 위치 보낼게.”진서준은 단호하게 말하며 위치를 보냈다.자기 여자를 지킬 자신도 없으면서 강자들을 상대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자기야, 잘 자.”허사연이 애정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너도 일찍 자.”진서준이 다정하게 답했다.전화를 끊고 나니 진서준의 졸음이 싹 가셨다.진서준은 창가로 다가가 이 화려한 도시를 내려다봤다.“오씨 가문, 안씨 가문, 하씨 가문... 너희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든 난 전부 박살 낼 거야. 이번엔 반드시 나와 아버지의 정체를 밝혀내고 말겠어.”진서준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그렇게 별다른 사건 없이 밤이 지나갔다.다음 날 아침.진서준이 막 눈을 뜨자마자 도지아의 흥분한 외침이 들려왔다.“진서준, 됐어. 나 생겼어!”도지아는 눈 밑이 시커멓게 변해 있었는데 밤새 잠을 자지 않은 게 분명했다.진서준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너 아직 처녀 아니었어? 대체 어떻게 임신한 거야?”“미친놈아, 임신은 개뿔, 무슨 헛소리야?”도지아는 얼굴이 빨개지며 진서준을 노려봤다.“그럼 왜 아침부터 난리야?”진서준이 되물었다.보통 사람이라면 이렇게 아침부터 흥분해 날뛰지 않을 것이다.“어제 네가 준 수련법 기억나지? 나 벌써 원기를 형성할 수 있게 됐어.”자기가 대단하다고 여긴 도지아는 자랑스럽게 선언했다.고작 하룻밤 만에 원기를 형성한 건 확실히 대단한 일이었다.“뭐? 그렇게 빠르다고? 너 타고난 천재 맞네?”진서준이 다소 의아한 표정을 보였다.보통 무인은 원기를 익히는 데만 최소 1년이 걸리는데 그것도 매일 꾸준히 수련할 경우에만 발생하는 일이었다.심지어 재능 있는 자들도 한두 달은 족히 걸린다.그런데 도지아는 단 하룻밤에 이 어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