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우에게 귀싸대기를 맞은 임평지도 차분해지기 시작했다.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다. 구경꾼들도 각지에서 모여들었을 테니 오늘 일은 무조건 소문날 것이다.“하지만 사부님, 이걸 어떻게 참아요?”임평지가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평소에 수련을 게을리했으니 여자 하나 이기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지.”임진우가 차가운 말투로 호통쳤다.“죽은 너희 아버지만 아니었으면 진작에 나도 손 놓았어.”“더 쪽팔리기 전에 얼른 가자.”허사연에게 얻어터져서 도망가는 임평지를 보고 허윤진은 찢어질 듯이 기뻤다.“고작 그 실력으로 나와서 우쭐댄 거예요?”허윤진이 우쭐대며 비웃었다.“그쪽 사부님만 없었으면 여기서 제 발로 걸어 나가지도 못했을 거예요.”임평지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인생인데 두고 봐요.”이때 진서준이 임평지를 막아섰다.“아까 약속했잖아요. 지면 내 여자 친구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하기로.”“홀에 있는 사람 모두가 그쪽이 한 말을 증명할 수 있어요.”진서준이 덤덤한 표정으로 임평지를 바라봤다.“맞아요. 아까 우리도 다 들었어요. 이 아가씨에게 지면 머리를 조아리고 사과하겠다고요.”“남아일언 중천금인데 지켜야죠. 아니면 남자가 아니라고 인정하든지요.”“하얗고 깔끔하게 생긴 게 정말 그쪽일지도 몰라요.”사람들은 구경거리라도 났다는 듯이 임평지를 놀려대기 시작했다.임평지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는 이를 악물고 진서준을 바라봤다.“가끔은 여지를 남기는 게 좋을 때도 있는데.”“그쪽이 뭐라고 내가 여지를 남겨요?”진서준이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내 여자 친구를 희롱하고도 이 세상에 멀쩡히 살아있는게 나의 제일 큰 은혜에요.”허사연의 실력을 검증할 생각만 아니었다면 아까 바로 임평지를 손봐줬을 것이다.고작 내공 무인밖에 안 되면서 어디서 난 용기로 이렇게 우쭐대는지 살짝 궁금하기도 했다.진서준이 싸울 준비를 하자 구경꾼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는 아까부터 실력을 숨기고 가만히 서
“남주성의 진 마스터님처럼 요물이면 모를까. 대종사에게 함부로 덤비면 끝은 죽음밖에 없어.”진 마스터 얘기가 나오자 허사연과 그 일행이 웃음을 터트렸다.“웃긴 뭘 웃어요? 같은 진씨면 다 마스터가 될 수 있을 줄 알아요?”임평지가 비아냥댔다.“진 마스터님은 천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천재에요. 종사 단계에서 대종사와 대적해 이긴 사람이라고요.”“그쪽처럼 별 볼 일 없는 쓰레기는 진 마스터님 시중들기도 벅찰걸요?”다른 사람들도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남주성에서 진 마스터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종사 단계에서 이름만 들어도 알법한 대종사와 대적한 것도 모자라 검으로 한방에 일곱 명의 종사를 무찔렀다.무서울 정도로 강력한 실력은 정말 천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했다.“우습기 짝이 없네요. 진 마스터님을 우러러본다는 사람이 형부가 진 마스터라는 걸 모르잖아요.”허윤진이 낮은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진 마스터를 눈앞에 두고도 알아보기는커녕 진서준을 비웃고 있으니 그 꼴이 너무 우스웠다.진서준도 웃음을 터트렸다.“의외로 세상에는 이처럼 무식한 사람이 많아요.”이 말에 임평지는 안색이 변하더니 차갑게 말했다.“지금 누가 누구를 무식하다고 하는 거예요? 정말 무식한 사람은 그쪽이에요.”“한 번만 더 앞을 막는다면 사부님이 한 방에 쓰러트릴 수도 있어요.”이때 레스토랑 사장이 잽싸게 달려와 진서준과 임평지 사이를 막아섰다.“두 분 다 진정하세요. 사소한 일로 얼굴을 붉히지는 말자고요.”“레스토랑의 사장이 저이긴 하지만 진짜 주인은 임씨 가문이니 임씨 가문을 봐서라도 그만하세요.”레스토랑이 임씨 가문 소유라는 말에 사람들의 안색이 변했다. 임씨 가문이 경성 4대 가문인 건 다들 알고 있었다.누군가 임시 가문의 체면을 구긴다면 남은 건 죽음밖에 없을 것이다.임진우가 바로 이렇게 대꾸했다.“떠나려던 참이었는데 이자들이 앞길을 막고 못 가게 한 거예요.”사장이 진서준에게 말했다.“고객님, 임씨 가문의 체면을 봐서라도 먼저 보내주
진중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두 재벌 집 도련님은 지금 아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두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 있었던 다 한 사람 때문이었다.그 사람은 바로 진서준이었다. 진서준이 두 사람의 인생을 바꾼 것이다.진서준의 인생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진서준과 유지수가 이지성을 만나지 않았더라도 진서준은 다른 일로 감옥에 들어갔을 것이다.“사부님, 저는 이 친구와 잠깐 얘기 좀 나누고 올게요. 오래 안 걸려요.”이지성이 곽기린에게 말했다.“그래. 사고만 치지 마. 경성에는 보는 눈이 많아.”곽기린이 당부했다. 사급 대종사인 그도 어떤 사람은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다.“네, 새겨들을게요.”이지성은 강성준과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향해 룸을 잡고 옛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다 무인이었고 똑같은 종사 단계였다.하지만 한 사람은 무도 종사였고 한 사람은 횡련 종사였다.강성준은 이지성이 조금 부러웠다.“이지성 씨, 정말 대단하네요. 어떻게 반년 사이에 횡련 종사가 된 거예요?”“다 진서준 덕분이죠. 진서준이 우리 가족을 몰살하지만 않았다면 이렇게 노력할 일도 없었을 거예요.”진서준 얘기만 나오면 이지성은 온몸으로 살기를 뿜어냈다. 봉호전만 끝나면 남주성으로 건너가 진서준을 죽이고 그 앞에서 허사연과 허윤진을 더럽힐 생각이었다. 진서준이 자기 가족에게 손댄 걸 뼈저리게 후회하게 해주고 싶었다.“저도 같아요. 때가 되면 같이 복수해요.”강성준의 눈빛도 살기로 가득했다.반년간 강성준도 혈운 조직에 몸을 담고 있는 대종사를 따라 수련했고 수련의 강도는 예전보다 수십 배는 더 강했다. 불굴의 의지가 없었다면 아마 수련하는 도중에 죽었을지도 모른다.“그래요. 같이 복수하고 허사연과 허윤진 자매를 사이좋게 나눠서 갖고 노는 걸로 하죠.”이지성이 이렇게 말하더니 술을 한 모금 크게 들이마셨다.“아참, 손승호 씨는 어디 갔어요? 허윤진에게 관심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이지성이 물었다.“그건 저도 모르겠어요.”강성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입구에는 대종사 레벨의 호국사 네 명과 실탄을 장전한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다.“여기가 원래 경성의 군사기지였나 봐요.”“봉호전이 시작되면서 안에 있는 사람들을 전부 산에서 내보냈대요.”임준의 설명에 진서준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신분을 증명할 서류를 보여주고 진서준은 일행과 함께 산 중턱으로 향했다.산 중턱의 공터는 진서준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컸고 축구장 3개 정도는 될 것 같았다.셀 수 없이 많은 불빛이 공터를 환하게 비춰줬다. 이 공터에는 합금으로 이루어진 링이 13개 세워져 있었고 링 하나당 10만 킬로그램의 힘을 이겨낼 수 있었다.대종사 6단계라고 해도 링을 부수기엔 무리일 것 같았다.“봉호전은 3일간 열릴 거예요. 오늘 바로 시작할 생각이에요?”임준이 진서준에게 물었다.“네. 빨리 시작해서 빨리 끝내고 얼른 돌아가서 더 수련해야죠.”진서준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옆을 스쳐 지나가는 무인들을 관찰했다.종사만 백 명이 넘었고 대종사는 서른 이상인 것 같았다. 그 외 진서준은 두 갈래의 강력한 기운을 느꼈다.그 기운은 접때 강남에서 마주쳤던 왕안석보다 훨씬 섬뜩했다.“어르신, 호국 장군도 오신 거 아니에요?”진서준이 물었다.“맞아요. 봉호전이 열릴 때마다 호국 장군 한 분은 꼭 참석하곤 했죠.”임준이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이번에는 한 분 더 오신 것 같네요.”임준이 낮은 소리로 말을 이어갔다.“진씨 가문 사람인 걸로 알고 있어요.”진서준이 눈살을 찌푸렸다. 진씨 가문에 호국 장군이 있을 줄은 몰랐다.“진서훈 씨. 촌수로 따지면 아마 진서준 씨의 작은 증조할아버지일 거예요.”임준이 설명했다.진서훈은 진혁의 작은 아버지였고 100세 고령이 다 된 나이었다. 한국의 크고 작은 전쟁에도 다 참여한 적이 있었다.“제 신분은 알고 있나요?”진서준이 물었다.“서준 씨 사진을 본다면 무조건 알아볼 거예요.”임준이 말했다.나이가 든 사람들은 진서준을 보면 거의 진요한으로 생각했다. 진광이 진서준을 알아보지 못한 건
‘저 사람이 진 마스터님이라고?’임평지는 넋을 잃고 말았다.어제 레스토랑에서 진서준에게 진 마스터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떠들어댔던 게 떠올라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허사연에게 진 것보다 오히려 더 쪽팔렸다.“임평지 씨, 왜 그러세요?”스태프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임평지를 보고 툭 건드렸다.“괜찮아요... 전 괜찮아요...”임평지는 연신 고개를 저었다. 이젠 진서준을 쳐다볼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봉호전 불참해도 되나요?”임평지가 씁쓸한 표정으로 물었다.진서준이 진 마스터라는 걸 알았다면 절대 허사연을 희롱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사부님도 진 마스터의 상대가 못 되는데 고작 내공경 무인인 그는 어림도 없을 게 뻔했다.“임평지 씨, 신청서에 이름을 적었으니 반드시 참여해야 합니다.”스태프가 말했다.진서준은 그런 임평지를 경멸햇다.“나를 때려죽이겠다던 기세는 어디 가고 이제 와서 깨갱거리는 거예요?”“링에서는 사람을 죽여도 괜찮으니 걱정하지 마요.”이 말에 임평지는 더 큰 불안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진서준은 분명 그를 죽일 생각으로 신청서를 작성했을 것이다.옆에 선 호국사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진 마스터님, 이 사람은 누구예요? 설마 이 사람도 어린 나이에 대종사의 경지까지 달성한 거예요?”대종사만큼의 실력도 없이 진서준에게 덤빈 거라면 자살 행위에 불과했기에 호국사도 임평지의 신분과 실력이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진 마스터님, 제가 주제도 모르고 함부로 나댔습니다. 한 번만 살려주세요.”임평지가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하며 울먹였다.“어제 분명 기회를 줬는데 걷어찼잖아요.”진서준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표정에서는 그 어떤 연민도 보이지 않았다. 이 모든 건 다 임평지가 자초한 일이었다.“사부님, 사부님. 살려주세요.”임평지가 얼른 임진우 뒤로 달려갔다.임진우는 남자가 돼서 울먹거리는 임평지를 보고 차가운 표정으로 훈계했다.“남자가 어찌 눈물을 함부로 보여? 부끄럽지도 않아?”임평지
“저 젊은이는 누구지? 죽고 싶어서 환장하지 않은 이상 어떻게 임진우와 붙을 생각을 해?”“저 노인네가 임진우야? 나도 이름은 들어봤어. 실력이 만만치 않을 것 같은데.”“대종사가 내공경 무인을 괴롭히는 건데 볼 필요도 없겠네.”구경꾼들이 진서준에게 야유의 눈길을 보냈다.방금 그들을 안내하던 호국사가 웃음을 터트렸다.“지금 링 위에서 선 분이 누군지 알기나 해요?”“누군데요?”“남주성의 진 마스터님이에요.”이 말에 진서준을 비웃던 사람들의 웃음이 그대로 굳어버렸다.남주성에서 진 마스터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젊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저... 저 사람이 진 마스터님이라고? 호국사가 농담한 거 아니야?”“아니야. 진 마스터님이 저렇게 젊을 리가 없잖아.”“정말 진 마스터님인 것 같은데? 전에 무도 커뮤니티에서 진 마스터님의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저 사람과 아주 닮은 것 같아.”호국사가 웃으며 말했다.“농담이 아니에요. 곧 알게 될 거예요.”그 시각, 링.임진우는 정신이 온통 진서준에게 쏠려 있어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임진우도 진서준이 진 마스터라는 걸 알았다면 아마 임평지처럼 바로 사과했을 것이다.“진서준 씨, 혹시 뭐 유언 같은 거 남길 거 없어요?”임진우가 차갑게 물었다.“내가 시간이 별로 없어서 후딱 끝내죠?”진서준이 덤덤하게 말했다.연속으로 13승을 거두려면 시간이 부족하긴 했다.눈에 뵈는 게 없는 진서준의 태도에 임진우가 불같이 화를 내더니 총알처럼 진서준을 향해 질주했다.대종사의 실력은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임진우의 발이 닿을 때마다 마치 누군가 큰 쇠망치로 링 바닥을 크게 두드리는 것처럼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강기가 임진우 앞에 모여들기 시작했고 칼처럼 앞에 있는 공기를 사정없이 휘저었다.구경꾼들은 진서준이 어떻게 맞서나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호국사가 비록 진서준이 진 마스터라고는 했지만 사람들은 아직 잘 믿지 못했다.진서준은 말이 안 될 정도
“당... 당신이 진 마스터님이라고요?”임진우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눈을 부릅뜬 채 진서준을 뚫어져라 쳐다봤다.“그게 중요한가요? 어찌 됐든 당신은 내 상대가 못 돼요.”진서준은 임진우를 힐끔 쳐다보더니 더는 상대하지 않고 아까 자신에게 말을 건 사람을 돌아봤다.구경꾼의 시선도 따라서 그쪽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머리가 하얗게 센 늙은이가 하얀 도포를 입고 서 있었는데 아우라가 남달랐다.그러다 한 중년 남자가 얼굴 근육을 파르르 떨며 감탄을 내뱉었다.“원현성 마스터님이잖아.”젊은이들은 원현성이 누군지 모르는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60대 이상의 늙은이들은 일제히 황송한 표정으로 한걸음 물러섰다.“저 사람이 도대체 누군데요?”누군가 낮은 소리로 물었다.“원현성은 인의방 일 순위에 오른 사람이야. 지의방의 수호자기도 하지. 지의방에 들어가려면 일단 원현성과 두수 이상은 겨뤄보고 원현성이 오케이 해야 지의방에 들어갈 수 있어.”“하지만 원현성은 나서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이런 장소에 잘 나타나지 않지.”칠십은 넘어 보이는 백발의 늙은이가 이렇게 설명했다.“아까 진 마스터님을 부르지 않았나요? 진 마스터 님을 데리로 온 것 같은데요?”“아마 진 마스터에게 복수하려고 일부러 찾아온 것 같은데?”“그러면 진 마스터님 위험한 거 아니에요? 인의방 일 순위를 어떻게 이겨요?”아래에서 지켜보던 구경꾼들이 연신 감탄을 뱉어냈다.비록 원현성은 인의방 일 순위였지만 실력으로 따지면 지의방 톱 팔십 안에는 무조건 들 수 있었다.진서준은 최근에 소문이 자자하긴 했지만 아직 너무 어렸다. 승패는 이미 정해진 것 같았다.링 가장자리로 걸어간 원현성은 고작 20대인 진서준을 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진 마스터님, 드디어 뵙네요.”진서준은 전에 원현성 아들의 단전을 망가트려 반병신으로 만들어 놓았다. 원현성은 어떻게든 이 원수를 갚고 싶었다.진서준은 링 밖에 서 있는 호국사를 보며 이렇게 물었다.“첫 번째 라운드는 승패가 이미 갈린 것 아닌가요? 선포
“저... 저분 현천 진군인 것 같은데?”누군가의 감탄에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그쪽으로 쏠렸다.백발이지만 동안인 늙은이가 천천히 안으로 입장하자 순간 긴장감이 감돌았다.“세상에.”진서훈 뒤로 또 한 명의 늙은이가 보였는데 그 늙은이는 호국 장군이자 청연 진군인 최현우였다.두 호국 장군의 등장에 사람들이 숙연한 표정으로 존경심을 드러냈다.이 두 사람은 천의방에 오른 거물이었다. 25년 전 무도의 난을 겪은 사람들이기도 했다.두 사람은 지금도 여전히 한국이 외세의 침략을 받지 않게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봉호전은 예전부터 호국 장군이 관리하고 있었지만 현장에 나타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늘 한꺼번에 두 명이나 참석한 것도 모자라 같이 등장하니 정말 놀라울 따름이었다.“걸음도 참 빠르시네요. 저 좀 기다려주세요.”이 목소리에 구경꾼들이 다시 넋을 잃고 말았다. 아우라가 남다른 늙은이가 잰걸음으로 두 호국 장군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대박. 천자 진군까지 오셨어... 오늘 도대체 무슨 날이야? 한꺼번에 세 명의 호국 장군이 한자리에 모인 거 아니야...”현장에 있는 여러 대종사, 그리고 원현성까지도 표정이 어두워졌다.‘설마 진서준 때문인가?’진서준이 국안부 상경인 건 원현성도 알고 있었다.이렇게 젊은 사람이 국안부의 상경이 되었다는 건 실력이 만만치 않다는 소리였다.국안부는 지금 한국의 자랑이면서 보물이기도 했다.만약 이 세 사람이 진서준을 지키려 한다면 원현성은 복수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진서준의 시선도 세 명의 호국 장군에게 향해 있었다.세 사람 다 기운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래도 진서준은 그들 체내에 있는 무서운 힘을 느낄 수 있었다.만 년 전에 있었던 천고 괴물처럼 보는 사람을 섬뜩하게 했다.마침 고개를 든 진서훈은 진서준과 시선이 마주치자 가볍게 웃어 보였다. 진서훈이 입을 열지는 않았지만 진서준은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봉호를 따내면 얘기 좀 하자.”진서훈은 선천의 힘으로 하고 싶은 말을 전달하고 있었다
“뭐라고? 불법적인 일이 우리 가게에서 일어난다고? 말도 안 돼.”성현도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넌 전신전 소속이잖아. 그런데 네 오빠인 내가 어떻게 법률을 어기는 일을 하겠어?”“그럼 이 사람들은 왜 부른 거야? 집단 폭력도 불법이거든.”성미영은 차가운 시선을 보이며 성현도와 따졌다.“미영아, 이건 내가 싸우려던 게 아니야. 저 녀석이 일부러 시비 걸러 온 거라고.”성현도는 진서준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이놈이 일부러 우리 찻집에 난입해 행패를 부리고 상철을 두들겨 패서 머리에 혹이 다 나버렸어. 난 단순히 정당방위를 위해 부른 거라고.”성미영이 등장하자 성현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솔직히 실력만 놓고 보면 성현도는 성미영보다 한참 부족했다.게다가 성미영은 전신전 소속인지라 저 남녀가 군부 조직인 전신전을 적으로 돌릴 리 없었다.군대를 건드리는 순간, 무조건 좋은 결과는 있을 수 없었다.“진서준, 도대체 무슨 일이야?”성미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어라? 너희 둘이 아는 사이야?”성현도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방금 내려놨던 마음이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난 사람을 찾으러 왔어. 하씨 가문 하경범이 이 위층에 있다고 들었는데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겠어.”진서준이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그리고 또 하나, 저 위에서 불법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도 하더군.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르겠어.”이 말에 성현도의 표정이 단숨에 험악해졌고 즉시 반박에 나섰다.“헛소리 마. 우리 가게는 단순한 찻집이야. 불법적인 일 따윈 없어. 근거없는 소문을 왜 털어놓고 난리야?”“미영아, 저 녀석한테 속지 마. 난 네 사촌 오빠야. 내가 그런 불법적인 짓을 할 사람이겠어?”성미영이 곧바로 진서준에게 물었다.“진서준, 너 증거 있어?”“직접 올라가 보면 다 알게 될 거잖아?”진서준이 가볍게 말했다.“오빠, 위층으로 가자.”성미영이 단호하게 말했다.“그, 그건 좀 곤란해. 위층엔 귀
순간, 장내는 숨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모든 시선이 진서준에게 쏠렸고 사람들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다들 진서준을 그냥 얼굴만 반반한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진짜 고수였다.성현도의 부하 중 최고 실력자조차 상대가 되지 않았다.성현도의 얼굴은 시퍼렇게 질렸고 상철을 향해서 욕설을 날렸다.“쓰레기 자식, 이런 애송이 하나도 못 이겨?”부하가 지면 망신당하는 건 결국 성현도 자신이었다.이대로 체면을 구긴 채 끝낼 수는 없었다.이대로 넘어가면 앞으로 르벨 재벌 2세들 사이에서 조롱거리가 될 게 뻔했다.“이봐, 네 실력이 괜찮은 건 인정할게.”성현도가 싸늘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근데 너 혼자서 백 명을 상대할 수 있어? 천 명은? 잘 들어. 내 부하는 수도 없이 많아. 너 같은 놈 하나 처리하는 데 전화 한 통이면 충분해.”진서준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여전히 같은 말을 반복했다.“다시 말하지만 난 그냥 하경범을 찾으러 온 거야. 그 녀석만 넘기면 오늘 일은 없던 걸로 해주지.”“없던 걸로 한다고?”성현도가 그 말에 어이없어 헛웃음이 나왔다.“너 지금 누굴 상대로 협상하려 드는 거야? 난 성씨 가문의 직계야. 날 건드리면 상대해야 할 건 나 하나가 아니라 우리 가문 전체라고.”그때,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곧이어 검은색 전투복을 입은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왔다.이 남자들은 전부 성씨 가문의 경호원이었고 실력도 만만하지 않았다.그것도 한둘이 아니라 무려 50명 이상이었다.한순간에 텅 비어 있던 로비가 사람들로 꽉 찼다.“저 자식 끝났네. 이 정도 성씨 가문 인원이라면 아무리 강해도 버틸 수가 없지.”“그러게 말이야.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없잖아.”“왜 쓸데없이 성현도를 건드린 거지? 스스로 무덤을 판 거잖아.”구경꾼들은 이 광경에 각자 다른 감정을 보였다.누군가는 동정을, 누군가는 아쉬움을, 또 누군가는 짙은 흥미를 보였다.“사연아, 넌 좀 쉬어. 이놈들은 내가 처리할게.”진서준이 앞으로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키가 거의 2미터에 달하는 거구의 사내가 찻집 안으로 들어왔다.남자는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졌다.“상철아, 저놈 다리 하나 부러뜨려서 내던져.”성현도가 진서준을 가리키며 명령했다.“알겠습니다.”상철은 간단하게 대답하고는 진서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서준아, 내가 할게.”허사연의 눈에는 불꽃 같은 전투욕이 타올랐다.“조심해. 저 녀석은 횡련 종사야.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진서준이 조용히 귀띔했다.“알았어. 설령 못 이긴다고 해도 어차피 네가 있잖아?”허사연이 장난스럽게 웃었다.진서준이 곁에 있는 한, 허사연은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이봐, 사내자식이 여자 뒤에 숨는 게 말이 돼?”상철이 눈썹을 추켜세우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이봐, 껑충이. 여자를 얕보지 마. 일단 이기고 나서 말해.”허사연이 상철을 도발했다.“아가씨, 그런 기생오라비 말고 날 따르지 그래? 밤마다 널 천국으로 보내줄 수 있는데?”상철이 음흉하게 웃었다.“죽고 싶어 환장했구나.”얼굴이 싸늘해진 허사연이 주먹을 날렸다.강렬한 펀치가 공기를 가르며 폭발음을 일으켰고 그 위력은 철판도 뚫을 수 있을 정도였다.하지만 상철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내가 가만히 서 있어도 넌 날 어쩔 수 없어.”“닥쳐!”허사연이 분노에 차 주먹을 그대로 상철의 얼굴로 내리꽂았다.상철은 일부러 머리를 숙이며 대머리 정수리로 받아냈다.쿵!둔탁한 충돌음이 울려 퍼졌다.주먹이 상철의 머리를 강타했으나 대머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허사연이 몇 걸음 물러섰다.순간 손에 뜨거운 통증이 밀려왔고 뼈가 부서질 것 같았다.손을 확인하자 하얀 피부였던 손등이 새빨갛게 부어올랐다.상철은 자기 머리를 한번 쓸어내리더니 빙그레 웃었다.“아가씨, 이제 내 실력을 알겠지?”그 모습에 허사연의 승부욕이 다시 불타올랐고 콧방귀를 뀌며 다시 달려들었다.이번에는 다리를 높이 들어 올려 상철의 머리를 내려찍었다.‘머리가 단단하다고 자랑하
이렇게 예쁘고 섹시한 여자가 싸움 실력이 이렇게 대단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완전 여성판 이소룡이었다.“너, 너희들 정말 너무 대담한 거 아니야? 여기가 어디인지 알기나 해? 어디서 대놓고 싸움질이야?”종업원은 순간 놀란 뒤 분노에 찬 얼굴로 진서준와 허사연을 가리켰다.찻집이 문을 연 이후로 이렇게 난동을 부리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고 진서준과 허사연이 첫 사례였다.주변의 구경꾼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싸움 좀 하면 뭐해? 여긴 성씨 가문의 구역이야. 성씨 가문에서 한마디만 하면 저 남녀는 오늘 밤중으로 사라지겠지.”“어휴, 저 여자 너무 아까워. 저렇게 예쁜데 왜 죽지 못해서 안달이지?”“여자는 살 수도 있겠지만 남자는 무조건 죽을걸.”사람들은 저마다 수군거리며 이미 진서준과 허사연의 결말을 예상하는 듯했다.“그럼 네 말대로라면 내가 널 때린다 해도 얌전히 맞고 있어야 한다는 거야?”허사연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종업원에게 다가갔다.“오지 마!”종업원은 겁에 질려 연신 뒷걸음질 쳤다.“어떤 미친놈이 내 구역에서 소란을 피우는 거야?”그 순간, 2층에서 한 사람이 내려왔다.모두가 일제히 시선을 돌려 그 사람을 확인하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성현도가 오늘 여기 있었네?”누군가 그 청년을 알아보았다.“저 둘 끝장났네. 성현도는 악명 높은 냉혈한이야.”그 청년은 바로 찻집의 사장인 성현도였다.성현도는 르벨 재벌 2세 사이에서 유명한 인물이었다.친구에게는 무조건 의리를 지키지만 적에게는 무자비했다.성현도의 고문 방법은 수도 없이 많았고 게다가 무인으로서 무공 실력도 상당했다.“사장님, 저 남녀가 와서 난동을 부렸어요.”종업원은 성현도를 보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사장이 나온 걸 확인한 허사연은 주먹 한 방에 종업원을 기절시켜 버렸다.“뭐야?”성현도의 눈이 가늘어졌고 표정이 험악해졌다.자기 앞에서 대놓고 부하를 때리다니, 이건 너무나도 명백한 도발이었다.“아가씨, 우리 처음 보는 사이 맞지? 우리
그리고 오후 2시가 되자 진서준은 허사연을 데리고 조호가 말한 천국찻집으로 향했다.겉모습만 보면 이 찻집은 진짜 전통찻집 같았고 규모도 꽤 컸다.하지만 막상 안에 들어가 보니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1층과 2층까지는 정말 평범한 찻집처럼 꾸며져 있었고 누가 봐도 이상한 점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하지만 3층으로 올라가려면 회원권이 있어야 하거나 사장이 직접 허락한 사람만 출입할 수 있었다.“손님, 아가씨, 이쪽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진서준과 허사연이 차를 마시러 온 줄 안 종업원이 빠르게 달려와 안내하려 했다.“그럴 필요 없어. 난 하경범을 찾으러 왔거든.”진서준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네?”종업원이 순간 얼어붙었다.“혹시 하씨 가문의 하 도련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맞아.”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손님은 누구신지...”종업원이 신중하게 물었다.진서준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그냥 복수하러 왔다고 전해.”그놈 아버지라고 하는 건 자기를 모욕하는 것과 같았고 친구라고 하기도 기분이 더러웠다.그 말에 종업원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손님, 여기서 장난치지 마세요.”하경범은 르벨에서 유명한 재벌 2세였다.이 찻집의 사장과도 막역한 사이였고 여기서 일하는 직원이라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왜? 못 믿겠어?”진서준이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손님, 하 도련님에게 복수하려던 사람은 단 하루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종업원이 경고하듯 말했다.“그런 농담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닙니다.”그 말을 듣자 진서준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럼 이렇게 전해. 그 하경범이 두들겨 맞고 나자빠지게 했던 진서준이 왔으니 당장 기어 나오라고 말이야.”진서준의 뻔뻔한 태도에 종업원은 어이가 없었다.“좋습니다. 손님이 그렇게 죽고 싶다면 제가 기꺼이 도와드리죠.”종업원은 바로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문제 발생했습니다. 난동자가 있습니다.”쿵! 쿵!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건장한 남자 스무 명이 들이닥쳤다.전부 검은
진서준과 허사연은 차를 타고 조호의 회사로 향했다.이 회사는 그냥 겉치레일 뿐, 진짜 돈이 들어오는 곳은 유흥업소들이었다.유흥업소를 얕잡아보면 안 된다.운 좋게 돈 많은 도련님들이라도 걸리면 하룻밤에 수억 원이 순식간에 손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진서준 씨!”진서준이 들어서자 조호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조호는 진서준 옆에 있는 허사연을 힐끗 쳐다본 뒤 고개를 숙이고 감히 더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잡담은 그만하고 하경범을 잡아가는 제일 좋은 타이밍만 말해.”진서준이 직설적으로 물었다.이 말에 조호는 속으로 크게 놀랐다.“매일 오후마다 하경범은 천국찻집이라는 곳에 갑니다.”조호는 재빨리 대답했다.“보통은 경호원 몇 명만 데리고 가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얼씨구? 저런 인간이 매일 차나 마시러 간다고?”진서준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그게... 진서준 씨, 사실 그곳은 이름만 찻집이지 실제로는...”조호는 옆에 여성이 있다는 걸 의식해서 말을 흐렸지만 진서준은 그 뜻을 단번에 알아챘다.“알겠어.”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차를 마시는 곳이 아니라 그냥 인기 많은 인터넷 셀럽이 가득한 고급 유흥업소일 것이다.“진서준 씨, 듣자 하니 그 찻집의 주인은 성씨 가문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진짜로 움직이실 거라면 하경범이 이동 중일 때를 노리는 게 좋을 겁니다.”조호가 조심스럽게 조언했다.“응? 성씨 가문이 이런 사업도 해?”진서준은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진서준은 오영수에게서 성미영에 대한 정보를 들은 적이 있었다.정의로운 성격의 성미영이 자기 가문에서 이런 유흥업소를 운영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터였다.“네, 듣기로는 성씨 가문의 한 직계 후손이 운영한다고 합니다. 여자에 미쳐 있는 놈이라 르벨의 돈 많은 도련님들과 꽤 친분이 깊다고 하더군요.”조호는 본인이 아는 정보를 전부 쏟아냈다.“좋아, 대충 알겠어.”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조호의 회사를 나온
진서준이 허사연의 캐리어를 들어주며 옆방으로 걸어갔다.그 뒷모습을 보며 도지아는 부러움이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인간은 원래 모여서 사는 걸 선호하는 동물이다.사회를 벗어나서 혼자 살아가는 건 생각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다.가족도 친구도 없이 너무 오래 지내다 보면 결국 감정 없는 시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그렇게 되면 사람과 짐승의 차이가 없어질 것이다.“어제 전화할 때 그랬었지? 이번에 너 자기 출신을 찾으러 온 거라고.”호텔 방으로 돌아온 후, 허사연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너 원래 경성 진씨 가문 사람이잖아?”“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어. 그런데 할아버지가 예전에 말해주셨어. 사실 우리 아버지는 어릴 때 길에서 주워 온 아이였다고.”진서준은 허사연에게 숨길 생각이 없었다.허사연은 진서준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허사연이라면 이 비밀을 절대 밖으로 흘리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었다.“뭐라고? 아버님이 주워 온 아이라고?”허사연이 깜짝 놀랐다.“그래. 하지만 이 사실을 아는 건 나뿐이야. 가족 중에서도 할아버지가 나한테만 알려주셨지.”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얼마 전, 오영수가 내 등에 있는 용을 보고는 내가 용맥의 일족이라고 했어. 그래서 오영수를 따라 여기 와서 오영수 셋째 삼촌에게 내 출신에 관해 알아보려 했던 거야.”“네 등에 용이 있다고? 난 한 번도 본 적 없는데?”허사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그동안 둘이 알몸으로 함께한 시간도 적지 않은데 허사연은 한 번도 본 기억이 없었다.“내가 체내 혈기를 모을 때만 그 용이 나타나거든.”진서준이 설명을 이어갔다.“그런데 오영수 삼촌이 아직 돌아오질 않아서 일단은 여기서 며칠 기다려야 해.”“아니, 그럼 오씨 가문에서 널 안 재워줬어?”허사연이 의아해했다.명문대가인 오씨 가문에 빈방이 없을 리가 없었다.“그날 오영수를 찾아갔는데 마침 오영수 할아버지가 위중했어. 그리고 그 집안엔 그 어르신을 그냥 보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었지.”진서준이 담담하게
“진짜 예쁜 새색시 숨겨놓고 있었네?”허사연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누구라도 자기 남자 방에 예쁘고 몸매가 완벽한 여자 하나가 같이 있는 걸 보면 의심 안 할 수가 없었다.게다가 지금은 아침이었다.설마 이 여자가 아침에 막 찾아온 건 아니겠지?“사연아, 오해야. 내가 제대로 설명할게.”진서준은 머리가 띵해졌고 뇌가 지진이라도 난 것 같았다.“아가씨, 오해하지 마세요. 어제 저랑 진서준이 같은 방에서 잔 건 맞지만 진짜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저 밤새 한숨도 못 잤다니까요?”도지아가 황급히 해명에 나섰다.“네? 밤새 안 자고도 아무 일 없었다고요?”허사연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되물었다.“설마 밤새 불태우느라 못 잔 건 아니겠죠?”허사연의 농담과 진담이 뒤섞인 말에 진서준은 헛웃음만 나왔다.“사연아, 이쪽은 도지아야. 우리 진짜 그냥 친구야. 일단 들어와. 천천히 설명할게.”허사연이 방에 들어오자 진서준은 서로에게 소개했다.그러고는 이 방에서 일어난 상황을 설명했다.“도지아는 황예은이 소개해 준 환자야. 다리 치료를 부탁받았거든. 종아리를 봐봐. 이틀 전에 내가 직접 발라준 연고가 있어.”허사연이 내려다보자 확실히 연고가 발라져 있었다.“그리고 도지아가 밤새 안 잔 건 원기를 수련하느라 그랬던 거야. 너도 예전에 수련한다고 며칠씩 안 잔 적 있잖아?”허사연은 오해가 풀리자 그제야 빙그레 웃었다.“내가 뭐 어쨌다고 그렇게 호들갑이야?”“혹시라도 오해할까 봐 그러는 거잖아.”진서준이 빠르게 대답했다.“뭐야? 내가 그렇게 의심 많고 질투 많은 여자로 보여?”허사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아, 아니지. 우리 사연은 누구보다 속이 넓은 부드러운 여자지.”진서준이 급히 정정했다.“됐어, 너 겁먹은 거 너무 귀엽다.”허사연이 피식 웃었다.“넌 여기 좀 쉬고 있어. 내가 방 하나 잡고 올게.”진서준은 더 머뭇거릴 틈도 없이 벌떡 일어나 나가 버렸다.진서준의 뒷모습을 보며 허사연은 그제야 웃음을 터뜨렸다.“도지아 씨, 진서준이
“내가 가면 안 돼?”사실 진서준은 거절하려 했었다.르벨은 안개가 짙게 깔린 늪지대 같은 곳이라 진서준조차도 어디에 함정이 있을지 가늠하기 어려웠다.그러니 허사연이 온다면 다칠 가능성이 컸다.하지만 거절하면 허사연이 상처받을 게 뻔했다.“당연히 되지. 지금 위치 보낼게.”진서준은 단호하게 말하며 위치를 보냈다.자기 여자를 지킬 자신도 없으면서 강자들을 상대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자기야, 잘 자.”허사연이 애정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너도 일찍 자.”진서준이 다정하게 답했다.전화를 끊고 나니 진서준의 졸음이 싹 가셨다.진서준은 창가로 다가가 이 화려한 도시를 내려다봤다.“오씨 가문, 안씨 가문, 하씨 가문... 너희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든 난 전부 박살 낼 거야. 이번엔 반드시 나와 아버지의 정체를 밝혀내고 말겠어.”진서준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그렇게 별다른 사건 없이 밤이 지나갔다.다음 날 아침.진서준이 막 눈을 뜨자마자 도지아의 흥분한 외침이 들려왔다.“진서준, 됐어. 나 생겼어!”도지아는 눈 밑이 시커멓게 변해 있었는데 밤새 잠을 자지 않은 게 분명했다.진서준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너 아직 처녀 아니었어? 대체 어떻게 임신한 거야?”“미친놈아, 임신은 개뿔, 무슨 헛소리야?”도지아는 얼굴이 빨개지며 진서준을 노려봤다.“그럼 왜 아침부터 난리야?”진서준이 되물었다.보통 사람이라면 이렇게 아침부터 흥분해 날뛰지 않을 것이다.“어제 네가 준 수련법 기억나지? 나 벌써 원기를 형성할 수 있게 됐어.”자기가 대단하다고 여긴 도지아는 자랑스럽게 선언했다.고작 하룻밤 만에 원기를 형성한 건 확실히 대단한 일이었다.“뭐? 그렇게 빠르다고? 너 타고난 천재 맞네?”진서준이 다소 의아한 표정을 보였다.보통 무인은 원기를 익히는 데만 최소 1년이 걸리는데 그것도 매일 꾸준히 수련할 경우에만 발생하는 일이었다.심지어 재능 있는 자들도 한두 달은 족히 걸린다.그런데 도지아는 단 하룻밤에 이 어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