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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풍무상가(天風無常歌)
천풍무상가(天風無常歌)
Author: 고독한포켓

1화 바람의 시작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5 00:38:53

까마득한 옛날, 강호가 피로 물들던 시대가 있었다.

살육을 도(道)로 삼고, 피를 신념으로 삼았던 최악의 마인.

스스로를 하늘이 내린 살성이라 칭했던 천살마군(天殺魔君)이 강호를 공포로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정(正)과 사(邪)의 구분 없이 무수한 고수들이 그의 손에 목숨을 잃었고, 강호의 명문들은 핏빛으로 스러져 갔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오직 파괴와 절망만이 남았다.

위기감을 느낀 천하의 영웅들이 구름처럼 일어나 대항했으나, 천살마군의 절대적인 무력 앞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질 뿐이었다.

그가 머문 고을에서는 밤마다 곡성이 끊이지 않았고, 문을 닫아건 문파의 현판도 이튿날이면 피에 젖은 채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이름난 협객들은 서로 힘을 모으자며 격문을 돌렸지만, 천살마군에게 도전하러 간 이들 가운데 살아 돌아온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살아남은 자들마저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일을 꺼렸다.

모두가 절망하며 강호의 종말을 이야기하던 그때, 홀연히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오직 바람의 이치만을 탐구하던 풍씨 가문.

그들은 바람의 힘으로 마군의 혈기를 상쇄하고, 형태 없는 바람의 검으로 그의 마공을 베어 냈다.

기나긴 혈투 끝에 마침내 천살마군을 봉인하는 데 성공했지만, 풍가 또한 깊은 상처를 입었다. 결국 그들은 세속의 눈을 피해 다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시간이 흐르자 강호는 마군의 존재를 잊었고, 풍가의 희생도 전설처럼 아득해졌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는 혈교(血敎)의 뿌리가 끈질기게 살아남아 마군의 부활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 하나.

마군의 봉인을 풀고, 그 힘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열쇠.

텅 빈 하늘에서 풍운을 일으키는 궁극의 신공, 태허풍운공(太虛風雲功).

마침내 피에 굶주린 어둠의 손길이 바람의 후예들이 숨어 사는 고요한 성역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한 가문이 스러지는 비극의 서막이자, 새로운 바람이 강호에 휘몰아칠 운명의 시작이었다.

***

섬서(陝西)와 호북(湖北)의 경계. 무당산(武當山)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깊은 산자락에 풍월장(風月莊)이 자리 잡고 있었다.

강호인들 사이에서는 그저 '바람의 이치를 탐구하는 괴짜들이 모여 사는 곳' 정도로 알려진 곳이었다. 그러나 풍월장의 아침은 강호의 혈풍과 거리가 먼 청아한 기운으로 가득했다.

낮은 담장 너머로 산새 소리가 맑게 울렸고, 부엌에서는 아침밥을 짓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빗자루를 든 가솔들은 마당을 쓸다가 연무장 쪽을 힐끔거렸다. 풍진이 새벽마다 목검을 들고 나오는 모습을 이제는 누구도 특별하게 여기지 않았지만, 오늘은 유난히 같은 자리를 빙글빙글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후우..."

새벽이슬을 머금은 연무장 한가운데, 열다섯 살 소년 풍진(風進)이 목검을 든 채 길게 숨을 골랐다.

앳된 얼굴에는 진지함이 서려 있었으나 미간은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검을 바람처럼 휘두르라. 아버님의 말씀이다.'

'하지만 바람을 어떻게 잡을 수 있을까. 잡을 수도, 벨 수도 없는 것을.'

'아버님은 결국 그 깨달음 앞에서 검을 놓으셨던 걸까?'

'일찍이 검을 내려놓고 학자의 길을 걷고 계시니, 이제 그 뜻을 계승할 사람은 이 가문에서 나뿐이다.'

풍진의 손에서 목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해진 검로를 따르는 듯하다가도 이내 길을 잃은 나비처럼 허공을 헤맸다. 목검은 바람을 가르지 못한 채 그 흐름에 실려 부유했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그 속에는 기묘한 흐름이 깃들어 있었다. 온몸에서 힘을 빼고 바람의 움직임에 자신을 맡긴 듯한, 검무에 가까운 몸짓이었다.

휘익!

풍진이 허리를 틀며 목검을 내질렀다. 검 끝이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든 바람을 따라가는가 싶더니 엉뚱하게도 중심이 앞으로 쏠렸다. 그는 다급히 왼발을 내디뎌 넘어지는 것만은 피했다.

'또 놓쳤다.'

풍진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방금 전까지 손등을 간질이던 바람이 검을 휘두르는 순간 흔적도 없이 빠져나간 것 같았다. 손에 힘을 주면 흐름이 끊겼고, 힘을 빼면 검이 제멋대로 흔들렸다. 그 사이의 답을 찾으려 밤마다 가문의 기록을 읽었지만, 종이 위에는 '바람을 따르라'는 말만 되풀이되어 있었다.

"허허, 저 녀석. 또 딴생각에 빠졌구나."

연무장 한편의 정자에서 아들을 지켜보던 풍월장의 장주 풍계백(風啓伯)이 헛헛하게 웃었다.

그 옆에서는 단아한 기품을 지닌 부인 화란(花蘭)이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차를 따르고 있었다.

"여보, 진이는 아직 어리지 않습니까. 검보다는 바람과 노니는 일이 더 즐거울 나이지요."

"알고 있소. 하지만 풍가의 후계자가 언제까지고 바람과 숨바꼭질만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오."

말은 엄했으나 풍계백의 입가에는 옅은 웃음이 남아 있었다. 화란은 그런 남편을 흘겨보며 찻잔 하나를 더 꺼냈다.

"그러면서 진이가 수련을 마치면 가장 먼저 약과부터 챙겨 주시지 않습니까?"

"수련과 끼니는 별개의 일이오. 한창 클 나이에 배를 곯게 할 수는 없지."

화란이 작게 웃자 풍계백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연무장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은 풍진도 굳었던 입매를 잠시 풀었다. 조금 전의 실패가 분하기는 해도, 수련이 끝나면 세 사람이 함께 아침을 먹을 수 있었다. 늘 그랬고, 오늘도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

풍계백은 연무장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태허풍운공의 심법은 어느 정도 익혔으되, 그것을 검으로 풀어내는 법은 아직도 걸음마 수준이니..."

그의 목소리에 걱정이 묻어났다.

풍가는 무공 자체보다 바람이라는 자연의 이치를 탐구하는 학자적 기풍이 강한 가문이었다. 그들의 무공은 바람의 힘을 빌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바람이 되어 그 이치를 구현하는 경지를 목표로 삼았다.

그렇기에 타고난 자질만큼이나 깊은 깨달음이 중요했다.

풍진은 가문 역사상 전례가 없는 '풍친(風親)의 체질'을 타고났다. 바람의 기운을 피부로 느끼는 수준을 넘어, 마치 자신의 일부처럼 받아들이는 특별한 재능이었다.

그러나 그 재능은 오히려 정형화된 초식을 익히는 데 방해가 되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스아아아-

지금까지와는 다른, 비릿하고 음산한 바람이 풍월장 전체를 휘감았다. 살아 있는 짐승이 혀를 날름거리며 장원을 훑는 듯한 불길한 기운이었다.

춤사위를 닮았던 풍진의 검이 우뚝 멈췄다. 온몸의 솜털이 곤두섰다.

언제나 상쾌하고 자유롭던 바람이 처음으로 그에게 '공포'를 속삭이고 있었다.

정자에 앉아 있던 풍계백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나직이 읊조렸다.

"올 것이 왔군."

화란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지만, 아무 말 없이 남편의 손을 잡았다. 풍계백은 그 손을 가볍게 다독인 뒤 자리에서 일어나 연무장으로 향했다.

"진아. 어미와 함께 안으로 들어가 있거라."

"아버님...?"

풍진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묻자, 풍계백은 그저 인자한 미소를 보일 뿐이었다. 그 미소 뒤에 감춰진 비장함을 아들은 아직 알지 못했다.

그 순간, 풍월장의 사방 담벼락 위로 검은 그림자들이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렸으나 드러난 두 눈에서는 삭풍보다 차가운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들의 등에는 기괴한 핏방울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평화롭던 장원에 긴장감이 번졌다. 마당을 쓸던 가솔이 빗자루를 놓쳤고, 부엌에서 그릇이 깨지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쨍그랑!

풍월장의 무인들이 병장기를 챙겨 연무장으로 뛰어나왔으나 누구도 먼저 담장에 오른 자들을 향해 달려들지 못했다. 검은 복면인들에게서 흘러나오는 살기가 그만큼 짙었다. 풍계백은 슬쩍 손을 들어 가솔들이 나서지 못하게 막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담담한 몸짓이었지만, 소매 안에 감춰진 손은 이미 굳게 말려 있었다.

혈교의 악명 높은 살수단, 흑풍단이었다.

"풍계백. 태허풍운공을 순순히 넘기는 것이 좋을 것이다."

수장으로 보이는 자가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음산한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연무장 전체에 퍼졌다.

풍계백은 품에서 낡은 검 한 자루를 꺼내 들었다.

검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얇고 가벼워 보이는 세검이었다. 그러나 검집에서 검신이 빠져나온 순간, 그의 주위로 맑은 바람의 장벽이 펼쳐지듯 기운의 파동이 일었다.

"혈교의 잡배들에게 내어 줄 가문의 비전은 없다. 목숨이 아깝거든 당장 물러가라."

"어리석군."

흑풍단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수십 개의 그림자가 일제히 땅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단순한 경공이 아니었다. 검은 회오리가 되어 풍계백을 집어삼키려는 듯한, 기괴하고 파괴적인 기세였다.

콰아아아!

평화롭던 연무장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풍계백의 검은 눈으로 따라가기 어려울 만큼 빨랐다. 그의 몸짓을 따라 거대한 바람의 장벽이 솟구치며 흑풍단의 공격을 연달아 막아 냈다.

카가가강!

사방에서 떨어진 칼날이 바람의 장벽과 부딪치며 불꽃을 튀겼다. 풍계백은 몸을 반 바퀴 돌려 세검을 비스듬히 흘렸다. 그러자 한곳에 몰렸던 바람이 회오리처럼 터져 나오며 가까이 붙은 살수 셋을 담장까지 날려 보냈다.

"큭!"

살수 하나가 바닥을 구르며 피를 토했다. 그럼에도 흑풍단의 대열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앞선 자가 쓰러지기도 전에 뒤편에 있던 자들이 빈틈을 메웠고, 지붕 위에서는 암기가 빗발처럼 쏟아졌다. 풍계백의 검이 다시 한번 둥근 궤적을 그리자 암기들이 방향을 잃고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그러나 적들의 공세는 맹렬했다. 하나를 막으면 곧바로 두 개, 세 개의 칼날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풍진은 얼어붙은 채 그 광경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책에서나 보고 전설로만 들었던, 생사를 가르는 싸움이었다. 비릿한 피 냄새와 살기가 숨통을 조여 왔다.

"진아, 어서!"

화란이 아들의 팔을 잡아끌며 안채로 향했다. 끌려가는 와중에도 풍월장의 가솔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언제나 웃으며 간식을 건네주던 주방 아저씨의 가슴에 검붉은 칼날이 박혔다. 그 순간 풍진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 버렸다.

이것은 꿈이 아니었다.

지옥이었다.

퍼억!

"크헉!"

결국 수적 열세를 이기지 못한 풍계백이 흑풍단주의 장력(掌力)에 어깨를 얻어맞고 뒤로 밀려났다. 입에서 붉은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아버님!"

풍진이 절규하며 뛰쳐나가려 했지만, 화란이 필사적으로 막아섰다.

"안 된다, 진아! 네가 살아야 우리 풍가의 맥이 이어진다!"

풍계백은 피를 토하면서도 다시 몸을 일으켰다. 눈빛만큼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가 아내와 아들을 향해 외쳤다.

"부인! 진이를 데리고 서재로 가시오! 어서!"

외침과 동시에 풍계백은 남은 내력을 모두 끌어모아 흑풍단에게 몸을 던졌다. 방어를 위한 검이 아니었다. 오직 두 사람에게 달아날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한 처절한 공격이었다.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서재의 비밀 통로 앞에 선 순간, 풍진은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수십 개의 칼날이 아버지의 몸을 뒤덮고 있었다. 검은 바람이 한 점의 빛을 집어삼키는 듯한 광경이었다.

몸이 무너지는 순간에도 풍계백의 시선은 오롯이 아들을 향해 있었다.

그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살아남거라. 나의 아들아.'

'너는 우리 가문의 마지막... 바람이니라.'

그리고 그것이 풍진이 본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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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은 작았지만 길목에 자리한 덕분인지 오가는 상인들로 제법 활기가 돌았다.두 사람이 들어간 주루 겸 객잔은 낡았어도 깔끔했다. 주방에서 흘러나온 음식 냄새와 손님들의 말소리가 한데 뒤섞여 실내를 훈훈하게 데우고 있었다.며칠간 도주와 노숙을 거듭한 풍진에게는 그 평범한 온기조차 낯설었다."주인장! 여기 술 한 동이하고 닭고기 냉채, 돼지 족발을 푸짐하게 내오시오! 고기는 얇게 썰지 말고 두툼하게!"자리를 잡자마자 팽대협이 우렁차게 외쳤다. 며칠 만에 제대로 된 음식과 마주한다는 기쁨이 얼굴 가득 넘쳤다.그는 맞은편의 풍진을 돌아보더니 인심이라도 크게 쓰는 사람처럼 손가락을 하나 세웠다."아, 이 친구에게는 따뜻한 탕면 한 그릇. 고명도 섭섭하지 않게 얹어주시오. 오늘은 내가 크게 베푸는 날이니."풍진이 조용히 되물었다."제가 알려드린 운기법의 이자입니까?""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척척 알아듣는군. 제자로 들인 보람이 있어.""제자로 들어간 적은 없습니다.""밥 나오기 전에는 말꼬리 잡는 법부터 잊어라."팽대협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잠시 뒤 음식상이 차려졌다. 윤기가 흐르는 닭고기와 족발, 김이 피어오르는 탕면이 탁자를 가득 채웠다.팽대협의 젓가락이 번개처럼 움직였다."크으, 이게 사람 사는 맛이지! 꼬마야, 잘 봐두게. 닭다리는 먼저 잡는 사람이 임자고, 족발은 식기 전에 먹어야 제맛이야. 이것도 강호의 생존법일세."풍진은 대꾸하지 않고 앞에 놓인 탕면을 바라보았다.맑은 국물 위에는 정갈하게 썬 고기와 푸른 채소가 얹혀 있었다. 풍월장에서 먹던 음식에 비하면 소박했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황제의 수라상보다 귀했다.숟가락으로 국물을 떠 조심스레 입에 넣었다.따뜻하고 진한 맛이 목을 타고 내려가 얼어붙은 속을 부드럽게 녹였다. 몸에 온기가 퍼지자 잊고 있던 기억 하나가 불쑥 고개를 들었다.어릴 적 감기에 걸려 앓아누웠던 날이었다.화란은 밤새 아들의 곁을 지키며 손수 끓인 탕을 한 숟가락씩 먹여주었다.'우리 진아, 이것

  • 천풍무상가(天風無常歌)   10화 바람의 값 3

    "풍가란 대체 어떤 곳이었나? 이런 심법을 지녔으면서도 강호에 이름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니 말이야."풍진은 한동안 불꽃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보다 바람의 도(道)를 탐구하던 곳이었습니다. 선조들께서는 무공의 끝이 자연을 굴복시키는 데 있지 않고, 그 이치를 닮는 데 있다고 믿으셨지요.""바람의 도라..."강호에는 검(劍)을 연마하는 자도, 도(刀)를 섬기는 자도, 권(拳)을 닦는 자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러나 붙잡을 수도, 가둘 수도 없는 바람을 평생의 길로 삼은 가문은 팽대협에게도 낯설었다.그는 모닥불 너머의 풍진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처음에는 비급을 품은 어린 도련님에 불과했다. 지금은 달랐다. 이 아이는 아직 다듬어지지 않았을 뿐, 강호가 탐낼 만한 가능성과 혈교가 두려워할 만한 씨앗을 함께 품고 있었다.그 가능성이 훗날 황금이 될지, 자신까지 태울 불씨가 될지는 알 수 없었다.'당분간은 지켜본다.'팽대협은 속으로 주판을 튕기듯 셈을 마쳤다.'적어도 지금 버리기에는 아까운 패야.'그는 본래 이익이 없는 위험에 뛰어드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풍진이 모닥불 앞에서 이를 악물고 호흡을 되찾는 모습을 볼 때마다, 손익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마음 한구석이 자꾸만 거슬렸다.두 사람은 번갈아 불을 지키며 짧게 눈을 붙였다. 운기행풍으로 따뜻한 공기를 돌리고 모닥불 곁에서 천천히 말린 덕분에, 새벽이 가까워질 무렵에는 옷의 축축함도 한결 가셨다.창틈으로 희끄무레한 빛이 스며들었다. 밤새 강 위에 내려앉았던 안개가 숲 가장자리까지 밀려와 나무 사이를 떠돌았다."일어나게. 날이 밝으면 나루를 지키는 놈들이 이쪽 흔적도 살필 거야."팽대협은 물을 끼얹는 대신 모닥불 위에 젖은 흙을 덮었다. 연기가 새지 않도록 재까지 꼼꼼히 헤집은 뒤에야 오두막을 나섰다.차가운 새벽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풍진은 품속의 두루마리가 무사한지 확인하고 팽대협의 뒤를 따랐다."큰길은 피한다. 우선 북쪽 숲을 가로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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