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바람의 이치를 따르던 가문이, 피의 바람에 스러졌다. 세상과 단절된 채 오직 바람의 도(道)를 탐구하던 풍(風)씨 가문. 어느 날, 절대마공의 부활을 노리는 혈교(血敎)의 급습으로 가문은 하룻밤 사이 멸문하고 만다. “살아남거라. 너는 우리 가문의 마지막… 바람이니라.” 부모님의 희생으로 간신히 살아남은 유일한 후계자, ‘풍진(風進)’. 세상 물정 모르던 순수한 소년의 품에 남은 것은 가문의 원한과 두루마리에 담긴 비전 신공(神功)뿐. [태허풍운공(太虛風雲功)] - 텅 빈 하늘에서 풍운을 일으키는 궁극의 심법. [천풍무상검(天風無常劍)] - 형태 없는 바람으로 만물을 베는 무상의 검술. 복수를 위해,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비정한 강호에 첫발을 내디딘 풍진. 그의 여정에는 차가운 칼날을 품은 무림맹의 여협과 돈과 술에 목숨 거는 괴짜 조력자와의 운명적인 만남이 기다리고 있다. 어수룩한 소년에서 강호를 뒤흔드는 절대자로! 슬픈 바람의 노래(悲歌)는 마침내 천하를 뒤덮는 무상의 노래(無常歌)가 된다! 바람의 후예가 펼치는 정통 성장 무협의 장대한 서사, 지금 시작됩니다!
View More가장 나이 많은 상인이 침을 삼키며 물었다."그, 그것을 어찌 아시오?"팽대협은 기다렸다는 듯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금세 천신만고를 겪고 살아 돌아온 사람처럼 눈가까지 떨었다."어젯밤에 길을 잘못 들어 그 산적 놈들의 야영지 곁을 지나치고 말았지 뭡니까. 칼 든 놈이 코앞을 지나는데 숨도 못 쉬고 낙엽 아래 엎드려 있었지요. 이 팽가가 하마터면 오늘 아침 해도 못 볼 뻔했습니다."그는 목을 길게 긋는 시늉까지 하며 몸서리를 쳤다."그러니 이 정보는 제 목숨값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믿고 말고는 어르신들의 뜻이지만, 재물은 다시 벌어도 목숨은 다시 살 수 없지 않겠습니까?"상인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잠시 뒤, 행수로 보이는 이가 품에서 은자 2닢을 꺼내 팽대협에게 건넸다."고맙소, 나그네. 덕분에 목숨과 재물을 구했소.""아이고,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부디 안전한 길로 가십시오. 산적 놈들이 쳐다보지도 못하게 아주 멀리 돌아가십시오."팽대협은 비굴할 정도로 허리를 굽혀 은자를 받은 뒤 유유히 자리로 돌아왔다.풍진은 그 모든 과정을 숨죽여 지켜보았다.강호에서 힘은 무공에만 있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정보가 때로는 날카로운 칼보다 큰 힘을 발휘했다. 길 하나에 대한 말이 여러 사람의 목숨과 재물을 지켰고, 팽대협은 칼 한 번 뽑지 않고 그 대가를 얻었다.그는 보이지 않는 칼을 다루는 법을 아는 사람이었다.팽대협이 은자를 흔들자 짤랑, 맑은 소리가 났다."봤나? 이것이 칼 한 번 안 휘두르고 돈 버는 기술일세. 자, 일어나게. 오늘은 고깃국에 흰쌀밥이다! 볶은 고기까지 한 접시 얹어도 되겠어!"풍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정말 어젯밤에 산적의 야영지를 지나셨습니까?"팽대협의 걸음이 찰나 멎었다."정보상에게는 남에게 말하지 못할 비밀이 있는 법이다.""대답을 피하시는군요.""따뜻한 밥을 앞두고 쓸데없이 총명해지지 마라."팽대협은 헛기침을 내뱉고 성큼성큼 다관을 빠져나갔다. 풍진은 그의 넓은 등을 바라보다가 말없이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여정은 고됐고, 끼니는 갈수록 초라해졌다. 팽대협이 가진 돈마저 바닥을 드러내자 산열매와 풀뿌리로 배를 채우는 날이 많아졌다. 풍진의 수련 역시 눈에 띄는 진전이 없었다. 수십 번, 수백 번 손을 뻗어도 지난밤과 같은 성공은 찾아오지 않았다.그럼에도 그는 묵묵히 시도를 거듭했다. 실패할 때마다 호흡이 흐트러진 지점과 기운이 새어 나간 순간을 되짚었다. 우연이 다시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대신, 그 우연에 이르는 길을 하나씩 찾아내려 했다.어느덧 해가 저물고, 두 사람은 작은 언덕 위에 앉아 붉게 타오르는 석양을 바라보았다. 풍진의 뺨은 며칠 사이 눈에 띄게 야위었고, 입술도 바싹 말라 있었다.팽대협은 빈 주머니를 뒤집어 탈탈 털었다. 먼지 한 줌만 야박하게 흘러나왔다."이봐, 꼬마 친구. 내일 저 산만 넘으면 제법 큰 고을이 나온다. 거기서 며칠 머물며 여비라도 벌어야겠어. 이대로 가다가는 하남 땅에 닿기도 전에 둘 다 굶어 죽은 귀신이 될 판이야.""여비를 어떻게 벌 겁니까?"팽대협은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강호에서 가장 비싸게 팔리는 게 뭔지 아나? 바로 정보일세. 칼은 휘두를 때마다 이가 나가지만, 이 머릿속의 정보는 팔아도 닳지 않지. 게다가 이 팽대협의 머리에는 은자로 바뀔 이야기가 아주 그득해."그는 텅 빈 배를 두드리면서도 목소리만큼은 부잣집 대문처럼 당당했다."내일이면 따뜻한 고깃국을 구경하게 해 주지. 흰쌀밥까지 배가 터지도록 먹여 주마. 그러니 오늘만 저 풀뿌리를 진미라고 생각하고 씹어."풍진은 풀뿌리를 내려다보았다."진미라고 생각해도 쓴맛은 같습니다.""이럴 때만 입맛이 정확하군."팽대협은 혀를 차며 남은 풀뿌리를 우적우적 씹었다.풍진은 다시 시선을 들어 허공에 검지를 세웠다. 조급함과 실망은 전보다 옅어져 있었다. 당장 결과를 얻으려 발버둥 치기보다 자신이 걸어야 할 길을 묵묵히 더듬는 고요함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이튿날 정오 무렵, 두 사람은 마침내 청풍
다음 날 아침, 두 사람은 동이 트자마자 허름한 객잔을 나섰다.밤사이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팽대협은 평소의 능글맞은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하품을 쩍쩍 해 대며 기지개를 켰고, 풍진은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공기는 전과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팽대협은 여전히 풍진을 '꼬마 친구'라 불렀지만, 더는 철없는 아이로만 여기지 않았다. 그가 풍진을 돌아볼 때마다 눈에는 경계와 호기심, 잘만 다듬으면 천하를 벨 보검이 될 원석을 살피는 듯한 기대가 한데 뒤섞였다.풍진 역시 팽대협을 이익만 따지는 장사꾼으로 치부하지 않았다. 그가 무심히 던지는 말과 행동 속에는 서책에서 배울 수 없는 강호의 생존법이 담겨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자인 것은 분명했으나, 지금의 자신에게 필요한 사람이기도 했다.두 사람은 큰길을 피해 산과 들을 가로지르는 험한 길을 택했다. 혈교의 추격망이 어디까지 뻗었는지 알 수 없는 만큼 사람들의 눈을 피해야 했다."발소리를 죽여라. 네놈 발자국 소리는 30리 밖에서도 들리겠다."바삭.풍진의 발밑에서 마른 가지가 부러졌다."30리 밖에서는 들리지 않습니다.""말대꾸할 기운이 있으면 발끝에나 줘. 뒤꿈치부터 내려놓지 말고, 앞쪽으로 땅을 살핀 뒤에 체중을 실으란 말이다."팽대협의 잔소리는 쉴 틈이 없었다."숨은 길고 가늘게 쉬어. 짐승들은 사람의 거친 숨소리를 귀신같이 알아듣는다. 그리고 숲에서는 바람을 등지지 마라. 냄새가 먼저 날아오도록 바람을 마주 보고 움직여야 해."그는 흔적을 적게 남기는 법과 위험을 감지하는 법, 독초와 약초를 구분하는 법까지 툭툭 던지듯 가르쳤다. 물을 마실 때는 상류부터 살폈고, 쉴 곳을 정할 때는 사방을 내려다볼 수 있으면서도 연기가 눈에 띄지 않는 자리를 골랐다."이 풀은 즙을 내어 상처에 바르면 피가 멎는다. 반대로 저 붉은 열매는 새가 먹는다고 따라 먹었다간 배를 움켜쥐고 황천길을 구경하게 되지. 잘 봐 둬. 강호에서는 의원보다 잡초 한 포기가 더 요긴할
팽대협은 그들이 완전히 등을 돌린 것을 확인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비굴한 웃음은 온데간데없고, 입가에는 싸늘함만 남았다.풍진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맞은 머리가 아픈 줄도 몰랐다. 다른 손님들의 시선도 느껴지지 않았다. 뼛속까지 스며든 굴욕감만 온몸을 짓눌렀다.아버지와 어머니가 죽었다.그런데 자신은 그 일을 비웃는 자들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팽대협이 건넨 은자 덕분에 겨우 화를 피했다."봤나, 꼬마 친구."팽대협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조롱도 능글맞은 웃음도 없었다."이것이 강호일세. 자네의 원한과 복수는 자네만의 것이지만 소문은 모두의 것이야. 저들은 자네 가문의 비극을 한낱 이야기로 소비하고, 자네 목숨을 현상금으로 계산하지."그는 젓가락으로 식어버린 족발 한 점을 가리켰다."아까 자네가 분노를 터뜨렸다면 어찌 됐을 것 같나? 저놈들을 쓰러뜨리기는커녕 자네 정체만 드러났을 거야. 그러면 자네 목숨은 저들의 하룻밤 술값이 되어 길바닥에 나뒹굴었겠지. 복수는커녕 이름 없는 객사로 끝났을 걸세."차가운 말이었지만 틀린 곳은 없었다.풍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으나 그 아픔조차 굴욕을 덮지는 못했다."강호에서 살아남으려면 때로는 돌멩이처럼 굴러다닐 줄도 알아야 해. 감정을 드러내는 건 그 감정을 책임질 힘이 있을 때나 하는 게야."풍진은 끝내 남은 탕면을 다 먹지 못했다.두 사람은 말없이 식사를 마친 뒤 객잔 2층에 방을 잡았다.창밖에서는 취객의 웃음과 점소이의 목소리가 늦도록 이어졌다. 풍진은 삐걱거리는 침상에 누워 눈을 감았지만 잠을 이룰 수 없었다.낮에 자신을 내려다보던 사내의 얼굴이 되살아났다. 머리를 때린 손의 감촉과 탁자에서 터진 웃음, 팽대협의 차가운 말도 귓가에 남아 있었다.'감정을 드러내는 건 그 감정을 책임질 힘이 있을 때나 하는 게야.'힘.그 한 글자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자신에게는 분노를 드러낼 힘도, 부모의 원수를 갚을 힘도 없었다. 낮에 입을 다물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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