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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강호의 쓴맛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5 00:40:08

밤은 추격의 시간이었고, 낮은 도주의 시간이었다.

어둠 속에서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밝은 해 아래에서는 자신을 쫓는 혈교의 환영이 풍진의 숨통을 조였다.

며칠을 굶었는지, 얼마나 먼 길을 달렸는지 감각조차 무뎌졌다. 차가운 계곡물을 마시고 질긴 풀뿌리를 씹으며 연명한 지 어느덧 사흘째였다.

팔다리는 납덩이처럼 무거웠고, 정신은 아지랑이처럼 흐릿했다. 나무 그늘에서 잠깐 눈을 붙일 때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모습이 나타났다. 그때마다 풍진은 비명을 삼키며 깨어났고, 혹시나 추격대가 가까이 왔을까 두려워 다시 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눈앞에 거대한 성벽이 나타났을 때, 풍진은 그것이 헛것이 아닌지 몇 번이나 눈을 비벼야 했다.

남양(南陽).

아버지의 서책에서 본 적 있는 지명이었다. 수많은 사람이 오가고 온갖 물산이 모여드는 활기찬 도시.

그러나 지금의 풍진에게 남양은 미지의 땅이자 낯선 맹수들이 우글거리는 소굴과 같았다.

성문 앞에 이르자 발걸음이 절로 멈췄다. 검문하는 병사의 날카로운 눈초리와 마주칠까 두려웠고, 사람들 틈에 섞였다가 남루한 행색 때문에 의심을 살까 겁이 났다.

그는 담장 그늘에 몸을 붙인 채 한동안 성문을 지켜보았다. 짐을 가득 실은 수레가 삐걱거리며 지나갔고, 등짐을 멘 상인과 먼 길을 온 여행객들이 두 줄로 늘어섰다. 병사들은 수레의 짐칸을 들춰 보거나 허리에 찬 병장기를 확인했지만, 어린아이에게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돌아서면 기다리는 것은 굶주림과 죽음뿐이었다.

풍진은 너덜너덜해진 옷깃을 여며 얼굴을 가렸다. 다른 이들의 어깨 뒤에 작은 몸을 숨긴 채 조심스럽게 성문 안으로 들어섰다.

다행히 병사들은 지친 기색으로 행인들을 건성으로 살필 뿐, 거지나 다름없는 몰골의 소년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성문을 통과하는 순간,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자, 싱싱한 물고기요! 오늘 아침에 막 건져 올렸소!"

"비단 사려, 비단! 하늘의 선녀도 울고 갈 항주(杭州) 비단이오!"

"거기 도련님, 최상급 필묵 한번 보고 가시지!"

귀가 먹먹할 정도의 소음과 정신이 아찔할 만큼 많은 인파가 풍진을 에워쌌다. 온갖 냄새까지 한데 뒤섞여 코를 찔렀다.

향긋한 과일 향, 비릿한 생선 냄새, 땀에 전 사람들의 체취와 가축의 분뇨 냄새까지.

풍월장의 고요하고 맑은 공기 속에서만 살아온 그에게는 모든 것이 혼돈 그 자체였다.

아이들은 웃고 떠들며 길을 뛰어다녔고, 상인들은 손님을 붙잡으려 목청을 높였다. 물건값을 두고 흥정하는 소리와 수레바퀴가 돌길을 구르는 소리, 멀리서 울려오는 대장간의 망치질이 쉼 없이 겹쳐졌다.

땅! 땅! 땅!

풍진은 그 모든 활기 속에서 홀로 멈춰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갈 곳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에게는 돌아갈 집도 찾아갈 사람도 없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저들처럼 평범한 아침을 맞았다는 사실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연무장에서 수련을 마치면 어머니가 차려 준 밥을 먹고, 아버지의 잔소리를 들으며 몰래 반찬을 더 집어 먹었다. 이제는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일상이었다.

그때였다.

복잡한 냄새를 뚫고 풍진의 본능을 정면으로 자극하는 향기가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고소한 기름 냄새와 잘 익은 고기의 진한 향이었다.

풍진은 홀린 듯 냄새의 근원으로 발을 옮겼다. 시선이 멈춘 곳은 길모퉁이의 작은 음식점이었다. 가게 앞에 쌓아 둔 대나무 찜기에서는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꿀꺽.

마른 목구멍으로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쪼그라든 위장이 뒤틀리며 쓰라린 통증을 호소했다.

풍진은 저도 모르게 가게 앞으로 다가갔다. 찜기 안에는 하얀 만두가 서로 몸을 맞댄 채 탐스럽게 익어 가고 있었다.

지금 그보다 아름답고 간절한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듯했다.

"저, 저기..."

모기만 한 목소리로 겨우 운을 떼자 우락부락한 인상의 주인이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남루한 옷과 흙먼지투성이 얼굴을 확인한 주인의 눈에 노골적인 경멸이 어렸다.

"어디서 굴러먹던 거렁뱅이 놈이야! 썩 꺼지지 못해? 재수 없게!"

쩌렁쩌렁한 호통이 채찍처럼 풍진의 뺨을 후려쳤다.

"아, 아닙니다. 저는 거지가... 돈이..."

풍진은 반사적으로 품을 더듬었다. 그러나 손에 잡히는 것은 차갑고 딱딱한 두루마리의 감촉뿐이었다.

돈.

그제야 자신에게 동전 한 푼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흘 동안 살아남는 데만 매달린 탓에 돈을 내고 음식을 사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돈도 없는 놈이 여긴 왜 기웃거려! 다른 손님들까지 내쫓기 전에 썩 꺼져!"

주인의 호통에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는 혀를 차며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고, 누군가는 냄새라도 맡은 듯 코를 찡그렸다. 대부분은 잠깐 구경한 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제 갈 길을 갔다.

그 무관심이 풍진에게는 멸시보다 더 아팠다. 풍월장에서는 가솔 하나가 손가락을 베어도 사람들이 몰려와 상처를 살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굶주린 아이 하나가 길가에서 쓰러진다 해도 누구도 걸음을 멈추지 않을 것 같았다.

얼굴이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수치심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이것이 아버지가 경계하라던 세상의 냉정함, 강호의 쓴맛인지도 몰랐다.

풍진이 도망치듯 돌아서려던 그때였다.

"허허, 주인장. 너무 박하게 굴지 마시오. 이 어린 친구가 사흘은 굶은 얼굴인데."

걸걸하면서도 능글맞은 목소리가 그의 발을 붙잡았다.

고개를 돌리자 가게 한쪽의 허름한 탁자에 앉아 닭다리를 뜯는 사내가 보였다.

헐렁한 무복에 허리춤에는 표주박 술병 하나만 달랑 차고 있었다. 아무리 뜯어봐도 돈 많고 의협심 넘치는 협객보다는 먹을 것을 찾아 떠도는 한량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사내는 남은 닭고기를 마저 해치운 뒤 손등으로 번들거리는 입가를 쓱 닦았다.

"여기 만두 두 판이랑 고기 국수 한 그릇 내주시오. 면은 넉넉히 담고. 값은 이걸로 충분하겠지."

탁!

그가 작은 은자(銀子) 한 조각을 탁자 위에 던졌다. 조금 전까지 사납던 주인의 얼굴이 대번에 누그러졌다.

"아이고, 물론입죠. 금방 내오겠습니다."

사내는 풍진에게 다가와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자, 꼬마 친구. 일단 먹고 이야기하자고. 사람이 굶으면 쓰나. 세상만사 배가 불러야 제대로 보이는 법이지."

경계심과 공포로 굳은 풍진의 눈동자가 사내의 사람 좋은 웃음과 마주쳤다.

그 호의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풍월장에 있을 때 아버지는 늘 당부했다.

'세상에 대가 없는 친절은 독(毒)일 수 있다. 그 뒤에 숨은 칼날을 경계해야 한다.'

풍진은 그 가르침을 되새기며 마음속 경계를 풀지 않았다.

그러나 사흘을 굶은 소년의 본능은 이성의 경고보다 강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만두와 진한 고기 향을 풍기는 국수가 눈앞에 놓이자, 저도 모르게 젓가락을 움켜쥐었다.

첫 만두를 한입 베어 문 순간, 뜨거운 육즙이 입안 가득 퍼졌다.

"읏!"

입천장이 델 만큼 뜨거웠지만 뱉을 수 없었다. 풍진은 입을 벌려 헉헉거리면서도 만두를 악착같이 씹어 삼켰다.

며칠 만에 처음 맛보는 따뜻한 음식이었다. 온기가 식도를 따라 내려가 텅 빈 위장을 채우자 참았던 설움까지 한꺼번에 북받쳐 올랐다.

풍진은 뜨거워진 눈시울을 감추려고 고개를 더 숙였다. 젓가락으로 만두를 집고, 국물을 마시고, 다시 면을 입안 가득 밀어 넣었다. 허겁지겁 먹다가 몇 번이나 목이 막혔지만 손을 멈추지 못했다.

사내는 그런 모습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며 술병을 기울였다.

그러나 능글한 미소 뒤에 숨은 예리한 눈은 풍진의 행색을 낱낱이 살피고 있었다.

'옷은 넝마가 되었지만 옷감은 최고급 비단이다. 손등과 얼굴은 흙먼지투성이인데도 피부에는 험한 일을 해 온 흔적이 없어. 게다가...'

사내의 시선이 풍진의 왼손에 머물렀다.

음식을 먹는 와중에도 왼손만큼은 가슴을 감싼 채 떨어지지 않았다. 어미 닭이 알을 품듯, 그 안에 든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지키려는 몸짓이었다.

'가문이 망했거나 쫓기는 신세겠군. 저토록 애지중지하는 것을 보면 가문의 비전이나 값나가는 물건이 틀림없어.'

사내는 짐짓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그의 이름은 팽대협(彭大俠).

성은 팽이고 이름은 대협이었다. 이름만 들으면 세상을 구할 협객 같았으나, 실제로는 강호의 온갖 소문과 정보를 팔아 은자를 챙기는 떠돌이 정보상이었다. 남다른 먹성 때문에 뒤에서는 대식협(大食俠)이라는 별호로도 불렸다.

팽대협의 눈에 지금 풍진은 굴러들어온 황금알이나 다름없었다.

"허허, 천천히 먹게. 체할라. 그래, 꼬마 친구. 어쩌다가 이런 험한 꼴이 되었는가? 집이 남양성 근처인가?"

음식에 정신이 팔려 있던 풍진은 질문을 듣자 움찔했다. 입안의 음식을 간신히 삼킨 뒤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냥... 길을 잃었을 뿐입니다."

"길을 잃었다고? 행색을 보니 보통 고생을 한 것이 아닌 듯한데. 혹시 집안에 무슨 우환이라도 생긴 겐가? 말해 보게. 이 팽가 아저씨가 강호에 발이 넓으니, 어쩌면 도와줄 수도 있지 않겠나."

질문은 다정했으나 거미줄처럼 촘촘하고 집요했다. 한마디씩 대답하다 보면 감추고 있던 사정까지 모조리 털어놓게 될 것 같았다.

풍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국수 그릇에 얼굴을 파묻은 채 대답을 피했다.

그 반응을 본 팽대협은 입맛을 다셨다. 화제를 바꾸는 척하며 더욱 교묘한 덫을 놓았다.

"요즘 강호가 하도 흉흉해서 말이야. 얼마 전에는 북쪽 하북(河北)의 사자문(獅子門)이 하룻밤 사이에 멸문했다는 소문이 돌더군. 금괴를 노린 산적 떼의 소행이라던데, 살아남은 어린 아들이 가보인 사자도(獅子刀)를 들고 달아났다는 말도 있고..."

팽대협은 일부러 다른 가문의 비극을 늘어놓으며 풍진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나 풍진은 묵묵히 국수만 먹을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호, 보통내기가 아니로군. 그렇다면...'

팽대협은 술을 한 모금 마시고는 방금 생각났다는 듯 무심히 말을 던졌다.

"아, 그러고 보니 이 근처에서도 끔찍한 일이 있었지. 남양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풍월장이라고 들어 봤는가? 바람의 이치를 연구하던 괴짜들이 모여 살던 곳이라던데, 사흘 전 혈교 놈들에게 깡그리 몰살당했다지 뭔가."

쿵.

풍진의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듯했다.

손에 들고 있던 젓가락이 힘없이 떨어져 탁자와 부딪쳤다.

달그락.

팽대협은 그 작은 소리를 기다렸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덫에 먹잇감이 정확히 걸려들었다.

"쯧쯧, 정말 잔인한 놈들이야. 살아남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더군. 가주의 어린 아들이 하나 있었다는데, 그 아이마저..."

풍진은 숨을 쉴 수 없었다. 눈앞이 아찔해지며 세상이 빙빙 도는 것 같았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는 것을 감출 방법도 없었다.

눈앞의 사내는 모든 것을 알고 자신을 떠보는 것이 분명했다.

"왜 그러는가, 꼬마 친구? 혹시 아는 곳이야? 얼굴이 말이 아닌데."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으나 눈빛은 먹잇감을 앞에 둔 이리처럼 날카롭게 번뜩였다.

풍진은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물렸다.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팽대협의 손이 번개처럼 뻗어 어깨를 짓눌렀다.

겉보기와 전혀 다른 강철 같은 힘이었다.

"어딜 그리 급히 가시나?"

팽대협의 얼굴에서 사람 좋은 웃음이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싸늘하고 계산적인 표정만 남아 있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지. 이 식삿값은 자네가 그토록 소중히 품고 있는 '재미있는 이야기'로 치르면 될 것 같은데. 안 그런가, 풍월장의 마지막 후계자 양반?"

따뜻한 김을 피워 올리던 음식은 어느새 식어 가고 있었다.

가게 안은 여전히 시끄러웠지만 풍진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어오지 않았다. 어깨에 얹힌 손과 품속으로 향하는 탐욕스러운 시선만이 또렷하게 느껴졌다.

그것이 풍진이 처음 마주한 강호의 진짜 얼굴이었다.

"자, 잠깐...! 무슨 말씀이신지..."

풍진은 본능적인 공포에 몸을 떨며 버둥거렸다. 하지만 팽대협의 손은 바위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깨뼈를 으스러뜨릴 듯 힘이 더해졌다.

"시끄럽고. 꼬마 도련님이 비단옷 속에 고이 모셔 둔 보물, 이 아저씨가 잠시 구경하자는 게 아니냐."

팽대협의 다른 손이 풍진의 품을 향해 뻗어 왔다.

부모님의 목숨과 맞바꾼 비급.

가문의 마지막 숨결이 담긴 유산.

저 더러운 손에 닿게 할 수는 없었다.

'안 돼!'

절체절명의 순간, 아버지의 가르침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쳤다.

'진아, 바람은 형태가 없기에 무엇에도 구속받지 않는다. 위기의 순간에는 모든 것을 비우고 바람의 흐름에 몸을 맡기거라. 그것이 우리 풍가 무공의 시작이자 끝이다.'

풍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가슴 깊은 곳에 의식을 집중하자 단전(丹田)에 자리 잡은 미약한 기운이 꿈틀거렸다.

아직 오랜 세월 쌓아 올린 내공(內功)은 아니었다. 아버지에게 태허풍운공(太虛風雲功)의 심법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아 단전에 모인 기운은 실낱처럼 가늘었다.

그러나 사흘 동안 산길을 헤매면서도 끊임없이 풍진의 숨과 함께 움직인 기운이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살고자 하는 본능에 반응하듯 전신의 혈도(穴道)를 타고 빠르게 퍼져 나갔다.

팽대협의 손가락이 풍진의 가슴에 닿기 직전이었다.

스아아아-

닫힌 가게 안으로 들어올 리 없는 바람이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풍진의 몸이 그의 의지보다 먼저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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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팽대협은 그들이 완전히 등을 돌린 것을 확인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비굴한 웃음은 온데간데없고, 입가에는 싸늘함만 남았다.풍진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맞은 머리가 아픈 줄도 몰랐다. 다른 손님들의 시선도 느껴지지 않았다. 뼛속까지 스며든 굴욕감만 온몸을 짓눌렀다.아버지와 어머니가 죽었다.그런데 자신은 그 일을 비웃는 자들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팽대협이 건넨 은자 덕분에 겨우 화를 피했다."봤나, 꼬마 친구."팽대협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조롱도 능글맞은 웃음도 없었다."이것이 강호일세. 자네의 원한과 복수는 자네만의 것이지만 소문은 모두의 것이야. 저들은 자네 가문의 비극을 한낱 이야기로 소비하고, 자네 목숨을 현상금으로 계산하지."그는 젓가락으로 식어버린 족발 한 점을 가리켰다."아까 자네가 분노를 터뜨렸다면 어찌 됐을 것 같나? 저놈들을 쓰러뜨리기는커녕 자네 정체만 드러났을 거야. 그러면 자네 목숨은 저들의 하룻밤 술값이 되어 길바닥에 나뒹굴었겠지. 복수는커녕 이름 없는 객사로 끝났을 걸세."차가운 말이었지만 틀린 곳은 없었다.풍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으나 그 아픔조차 굴욕을 덮지는 못했다."강호에서 살아남으려면 때로는 돌멩이처럼 굴러다닐 줄도 알아야 해. 감정을 드러내는 건 그 감정을 책임질 힘이 있을 때나 하는 게야."풍진은 끝내 남은 탕면을 다 먹지 못했다.두 사람은 말없이 식사를 마친 뒤 객잔 2층에 방을 잡았다.창밖에서는 취객의 웃음과 점소이의 목소리가 늦도록 이어졌다. 풍진은 삐걱거리는 침상에 누워 눈을 감았지만 잠을 이룰 수 없었다.낮에 자신을 내려다보던 사내의 얼굴이 되살아났다. 머리를 때린 손의 감촉과 탁자에서 터진 웃음, 팽대협의 차가운 말도 귓가에 남아 있었다.'감정을 드러내는 건 그 감정을 책임질 힘이 있을 때나 하는 게야.'힘.그 한 글자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자신에게는 분노를 드러낼 힘도, 부모의 원수를 갚을 힘도 없었다. 낮에 입을 다물었던 것

  • 천풍무상가(天風無常歌)   11화 삼킨 분노 1

    마을은 작았지만 길목에 자리한 덕분인지 오가는 상인들로 제법 활기가 돌았다.두 사람이 들어간 주루 겸 객잔은 낡았어도 깔끔했다. 주방에서 흘러나온 음식 냄새와 손님들의 말소리가 한데 뒤섞여 실내를 훈훈하게 데우고 있었다.며칠간 도주와 노숙을 거듭한 풍진에게는 그 평범한 온기조차 낯설었다."주인장! 여기 술 한 동이하고 닭고기 냉채, 돼지 족발을 푸짐하게 내오시오! 고기는 얇게 썰지 말고 두툼하게!"자리를 잡자마자 팽대협이 우렁차게 외쳤다. 며칠 만에 제대로 된 음식과 마주한다는 기쁨이 얼굴 가득 넘쳤다.그는 맞은편의 풍진을 돌아보더니 인심이라도 크게 쓰는 사람처럼 손가락을 하나 세웠다."아, 이 친구에게는 따뜻한 탕면 한 그릇. 고명도 섭섭하지 않게 얹어주시오. 오늘은 내가 크게 베푸는 날이니."풍진이 조용히 되물었다."제가 알려드린 운기법의 이자입니까?""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척척 알아듣는군. 제자로 들인 보람이 있어.""제자로 들어간 적은 없습니다.""밥 나오기 전에는 말꼬리 잡는 법부터 잊어라."팽대협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잠시 뒤 음식상이 차려졌다. 윤기가 흐르는 닭고기와 족발, 김이 피어오르는 탕면이 탁자를 가득 채웠다.팽대협의 젓가락이 번개처럼 움직였다."크으, 이게 사람 사는 맛이지! 꼬마야, 잘 봐두게. 닭다리는 먼저 잡는 사람이 임자고, 족발은 식기 전에 먹어야 제맛이야. 이것도 강호의 생존법일세."풍진은 대꾸하지 않고 앞에 놓인 탕면을 바라보았다.맑은 국물 위에는 정갈하게 썬 고기와 푸른 채소가 얹혀 있었다. 풍월장에서 먹던 음식에 비하면 소박했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황제의 수라상보다 귀했다.숟가락으로 국물을 떠 조심스레 입에 넣었다.따뜻하고 진한 맛이 목을 타고 내려가 얼어붙은 속을 부드럽게 녹였다. 몸에 온기가 퍼지자 잊고 있던 기억 하나가 불쑥 고개를 들었다.어릴 적 감기에 걸려 앓아누웠던 날이었다.화란은 밤새 아들의 곁을 지키며 손수 끓인 탕을 한 숟가락씩 먹여주었다.'우리 진아, 이것

  • 천풍무상가(天風無常歌)   10화 바람의 값 3

    "풍가란 대체 어떤 곳이었나? 이런 심법을 지녔으면서도 강호에 이름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니 말이야."풍진은 한동안 불꽃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보다 바람의 도(道)를 탐구하던 곳이었습니다. 선조들께서는 무공의 끝이 자연을 굴복시키는 데 있지 않고, 그 이치를 닮는 데 있다고 믿으셨지요.""바람의 도라..."강호에는 검(劍)을 연마하는 자도, 도(刀)를 섬기는 자도, 권(拳)을 닦는 자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러나 붙잡을 수도, 가둘 수도 없는 바람을 평생의 길로 삼은 가문은 팽대협에게도 낯설었다.그는 모닥불 너머의 풍진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처음에는 비급을 품은 어린 도련님에 불과했다. 지금은 달랐다. 이 아이는 아직 다듬어지지 않았을 뿐, 강호가 탐낼 만한 가능성과 혈교가 두려워할 만한 씨앗을 함께 품고 있었다.그 가능성이 훗날 황금이 될지, 자신까지 태울 불씨가 될지는 알 수 없었다.'당분간은 지켜본다.'팽대협은 속으로 주판을 튕기듯 셈을 마쳤다.'적어도 지금 버리기에는 아까운 패야.'그는 본래 이익이 없는 위험에 뛰어드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풍진이 모닥불 앞에서 이를 악물고 호흡을 되찾는 모습을 볼 때마다, 손익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마음 한구석이 자꾸만 거슬렸다.두 사람은 번갈아 불을 지키며 짧게 눈을 붙였다. 운기행풍으로 따뜻한 공기를 돌리고 모닥불 곁에서 천천히 말린 덕분에, 새벽이 가까워질 무렵에는 옷의 축축함도 한결 가셨다.창틈으로 희끄무레한 빛이 스며들었다. 밤새 강 위에 내려앉았던 안개가 숲 가장자리까지 밀려와 나무 사이를 떠돌았다."일어나게. 날이 밝으면 나루를 지키는 놈들이 이쪽 흔적도 살필 거야."팽대협은 물을 끼얹는 대신 모닥불 위에 젖은 흙을 덮었다. 연기가 새지 않도록 재까지 꼼꼼히 헤집은 뒤에야 오두막을 나섰다.차가운 새벽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풍진은 품속의 두루마리가 무사한지 확인하고 팽대협의 뒤를 따랐다."큰길은 피한다. 우선 북쪽 숲을 가로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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