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고우빈 씨 때문에 기쁜 거야?”그 말을 듣고 윤형우는 웃으며 다소 질투 섞인 어투로 말했다.“돈을 벌게 돼서 그런 줄 알았는데.”신지아는 그의 말투에서 느껴지는 시샘을 알아차리고 진지하게 남자를 바라보며 침대 옆에 앉았다.그러고는 고개를 기울여 윤형우의 얼굴을 바라보며 가볍게 웃었다.“질투하는 거예요?”“흐음.”윤형우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고고하게 화난 표정을 지었다.신지아는 웃으며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쌌다.“화내지 마요. 나한테 윤형우 씨와 선배는 달라요. 선배는 친구죠, 영원히 서로를 배신하지 않는 아주 좋은 친구. 그쪽은 가장 든든하고 믿음직한, 나를 위해 가시밭길도 헤쳐 나가는 내 반쪽, 남자 친구고요. 게다가 UME가 연성에서 자리를 잡고 성장해야 나와 선배가 이진이를 지켜줄 수 있어요. 이진이도 고씨 가문의 위협을 무시한 채 마음 편히 돌아올 수 있고요.”“그럼 만약 어느 날 나와 고우빈이 동시에 위험에 처하면 누구를 구할 거야?”“...”윤형우의 질문에 신지아는 말문이 막혔다.윤형우와 고우빈이 동시에 위험에 처한 상황이라면 구하고 싶어도 구하지 못할 수가 있었다.신지아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당연히 형우 씨를 구해야죠. 선배는 결혼하면 내가 형우 씨를 구하는 것처럼 선배를 구해줄 아내가 있을 테니까요.”윤형우는 그녀의 대답이 제법 만족스러웠다.신지아는 이 틈을 타 상의하는 어투로 말했다.“저쪽에선 계약서 작성할 때 나도 자리에 있기를 원해요. 일단 회사로 가서 거기 일 해결하고 나면 다시 여기로 올게요. 걱정하지 말아요. 절대 혼자 내버려두지 않고 경험 많은 간병인 불러줄 거니까.”말하면서 신지아는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윤형우의 표정을 살폈다. 그가 화낼까 봐 걱정스러웠다.자신을 위해 다친 건데 병원에 혼자 내버려두는 게 다소 무정하게 느껴질 수도 있었다.윤형우는 불안해하는 신지아의 모습을 보고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었다.“잊지 마, 나도 UME
윤형우는 묵묵히 죽을 삼키며 신지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신지아는 그런 그의 반응이 평소와 다르다고 느꼈다.평소 이런 상황에서 윤형우는 대개 그녀와 함께 분석하며 방향을 제시해 주곤 했다.신지아는 문득 자신이 너무 성급한 건 아닌지 생각했다. 윤형우는 아직 상처가 다 낫지 않아 몸이 허약한 상태인데 그런 그에게 이런 일까지 신경 쓰게 하는 건 무리일지도 몰랐다.신지아가 말을 돌리려던 찰나 윤형우가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지아야, 고이진 씨는...”말을 마치기도 전에 전화벨이 울리며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신지아도 소리에 이끌려 휴대폰을 꺼냈다. 낯선 번호임을 확인하고 잠시 생각한 뒤 발코니로 걸어가 전화받았다.UME의 최신 스마트 로봇 프로젝트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신지아가 이전에 배포한 명함들도 더 이상 무용지물이 아니게 되었다. 이 기간에 그녀는 끊임없이 협업 제의를 받았고 심지어 부성 그룹 쪽 고객들까지도 찾아왔다.신지아는 그들이 예전에는 다소 무례하게 굴고 그녀의 뒷담화까지 했던 걸 기억하고 있었지만 상업적 이익과 사적인 감정은 구분할 줄 알았다.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땐 협력 과정에서 가격을 합리적인 범위 내에 높게 책정하면 그만이었다.그들도 양심에 찔려 가격을 너무 깎지는 못했다.전화받은 신지아는 상대가 말을 꺼낸 뒤에야 해외 기업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옆에 있던 사람이 우리말로 통역하며 용건을 말했다.“최고 사양의 스마트 로봇 3만 대가 필요합니다. 반년 안에 공급 가능하신가요?”‘3만 대?’그 말에 신지아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이건 UME가 지금까지 받은 것 중 가장 큰 주문이었다.하지만 신지아는 기쁨에 취하는 대신 여전히 경계심을 늦추지 않으며 상대방에게 현장 실사가 필요하지는 않은지 물었다.그쪽도 그녀의 우려를 눈치챘는지 여자가 웃으며 말했다.“신지아 씨, 안심하셔도 됩니다. 저희는 이미 실사를 마쳤고 무엇보다 이 거래는 누군가의 소개로 이루어진 겁니다. 당사자의 이름은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대표님, 아니면 저희가 가서...”양준명은 변도영의 기분을 눈치채고 뭔가 말하려 했지만 변도영은 이미 성큼성큼 문밖으로 나간 뒤였다.그는 방금 신지아가 있던 쪽으로 재빨리 걸어갔다.“죽 맛있으니까 한번 먹어봐요. 아침에는 만두로 든든하게 한 끼 먹는 것도 좋아요. 내가 일부러 아래에 있는 식당에서 사 왔는데 맛이 변함없더라고요. 형우 씨는 예전에 해외에서 유학할 때 아침엔 보통 뭐 먹었어요?”“...”문 앞에 다다르자 변도영은 병실 안에서 들려오는 수다스러운 대화 소리가 들렸다.다가가니 신지아가 병상 앞에 앉아 문을 등진 채 방금 사 온 김이 모락모락 나는 죽이 담긴 작은 그릇을 들고 있는 게 보였다.다른 손에는 숟가락을 들고 있었다.신지아는 숟가락을 입술에 가져가 후후 불면서 죽이 적당히 식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윤형우의 입가로 가져갔다.뒷모습뿐이었지만 변도영은 말투만 들어도 웃고 있는 신지아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그녀를 데려오고 싶었다.하지만 문 앞에 서자 왠지 모르게 발걸음이 저절로 멈췄다.가슴 한편에 다시 미세한 통증이 밀려왔다.한때 활발하고 수다스러웠던 익숙한 신지아의 모습이 얼마 만에 다시 눈앞에 나타난 건지, 하지만 지금 그녀 앞에 있는 남자는 자신이 아니었다.“변 대표님께서 여긴 무슨 일로 오셨어요?”윤형우는 고개를 들어 문 앞에 선 변도영을 발견하고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인사했다.“할 말 있어요?”신지아가 비로소 고개를 돌려 변도영을 바라보았을 때 그녀의 눈빛은 또다시 지난 몇 달 동안 봐왔던 차분함을 머금고 있었다.조금 전 그 모습은 혼자만의 상상이었던 것처럼.변도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신지아는 손에 들고 있던 죽을 내려놓고 의자에서 일어나 변도영 쪽으로 걸어갔다.변도영은 목이 메었다.“신지아...”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신지아는 손을 뻗어 병실 문 손잡이를 잡고 단호하게 닫아버리며 변도영의 시선을 차단했다.“...”뒤따라온 양준명은 이 모습을 보고 내심 상사가 불쌍하다는 마음이
탈출한 뒤 신지아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그녀와 윤형우는 당당한 연인 사이였다. 윤형우가 심하게 다쳤으니 걱정과 고마움에 키스 한 번 하는 게 뭐 대수겠나.게다가 단지 입만 맞춘 것뿐이고 다른 지나친 행동을 한 것도 아닌데 마치 몰래 바람이라도 피운 것처럼 민망해할 필요가 있을까.그렇게 생각하니 민망함이 다소 누그러졌다.하지만 얼굴은 여전히 살짝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그 시각 병원 위층.변도영은 창가에 선 채 온몸에 서늘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머릿속엔 어제 신지아가 말했던 아이로 가득 차 있었다. 불안한 생각들이 연이어 밀려와 그를 안절부절못하게 했다.양준명 쪽에서는 아직 소식을 알아내지 못했다.하지만 신지아가 윤형우의 아이를 가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불안하고 초조했다. 저도 모르게 자꾸만 이런 생각을 했다.‘만약 신지아가 정말 윤형우의 아이를 가졌다면 어떡하지?’변씨 가문은 그녀가 다른 남자와 아이를 낳는 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변도영 역시 받아들일 수 없었다.하지만 신지아가 어느 날 아이를 안은 채 윤형우 곁에 서서 윤형우의 여자가 되는 것 역시 허락할 수 없었다.변도영은 눈을 감은 채 잔에 담긴 고량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고농도 알코올이 가슴을 스치는 그 화끈거리는 감각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을 주었다.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멀리서 시야에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신지아?”변도영은 깜짝 놀랐다.신지아는 보온병을 들고 그가 있는 건물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얼굴이 살짝 붉어졌고 발걸음도 가벼웠다.‘기분이 좋아 보이는데? 병원에는... 양심의 가책 때문에 날 보러 온 건가?’그 생각이 들자 조금 전까지 불안하고 초조했던 변도영의 마음이 이상하게도 순식간에 누그러졌다.그는 고개를 숙여 몸에 걸친 환자복을 내려다보았다.손에 든 고량주를 다시 한번 바라보며 공기 중에 은은하게 퍼져나가는 술 냄새를 맡았다.변도영은 시간을 계산해 재빨리 커튼을 닫고 서둘러 정장으로 갈아입었다.병실에 향수가 없어
병원.신지아는 몽롱한 상태에서 팔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누군가의 손에 잡힌 듯했다.머리가 아직 제대로 돌아가지 않은 채 멍하니 눈을 뜨자 침대에 이미 깨어 있던 윤형우와 눈이 마주쳤다.“깼어?”윤형우가 가볍게 물으며 다소 안쓰러운 눈빛으로 신지아 팔에 감긴 붕대를 바라보았다.“아파?”신지아는 남자가 보내는 다정하고도 미안함이 담긴 시선을 마주하자 잠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다친 건 분명 윤형우인데 지금도 그녀의 상태를 걱정하고 있었다.“윤형우 씨.”“응?”“미안해요.”신지아는 그의 몸에 걸친 환자복을 바라보았다.남자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고 뚜렷한 상처와 붓기가 남아 있었으며 몸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허약해 보였다.그렇게 심하게 다쳤는데도 지금 신지아가 아픈지만 걱정하고 있었다.윤형우가 잠시 멈칫하다가 물었다.“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된 거야?”신지아는 그의 질문에 멍하니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곧이어 윤형우가 덧붙이는 말이 들렸다.“나는 네 남자 친구고 넌 지금 내 사람이야. 네 마음이 변해서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된 것 말고는 무슨 일이 생기든 나한테 미안하다고 말할 필요 없어.”윤형우는 살며시 신지아의 턱을 들어 올려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신지아가 입술을 달싹였다. “이렇게 심하게 다쳤는데...”‘죽을 뻔했잖아요.’뒷말은 도저히 입 밖에 내지 못했다.어제 봤던 윤형우 모습이 여전히 두려운 마음을 안겨주었기에 신지아는 ‘죽음'이라는 단어를 언급하고 싶지 않았고 그 단어는 생각조차 하기 두려웠다.윤형우는 그런 신지아의 생각을 읽은 듯 웃으며 말했다.“작은 상처일 뿐이야. 나는 이 정도만 다친 게 다행이라고 생각해. 네가 다치지 않아서, 내가 널 지킬 수 있어서 다행이야. 그리고 네가...”태연하게 말하며 이 정도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가볍게 넘기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신지아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제 윤형우는 상처의 고통으로 기절까지 했고 상처 때문에 자칫 죽을 뻔했다는 것
“게다가 정말 연성으로 돌아왔다면 왜 우리를 찾아오지 않았겠어?”이 점도 다소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었다.고우빈은 잠시 생각했다. “아니면 옆에 도와주는 누군가가 있는 걸지도.”신지아는 양민석을 떠올렸다.양민석과 많이 만나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믿음직한 사람이었다.양민석이 고이진을 대신해 일을 처리한 것도 제법 합리적인 추측이었다.하지만 왠지 모르게 어딘가 석연치 않았다.‘윤재혁이 그렇게 쉽게 놓아줬을까?’집착과 광기에 사로잡힌 사람이라 고이진이 없는 하루하루 그녀에 대한 증오는 쌓여만 갈 것이다.5년간의 원망을 한 통의 편지로 쉽게 내려놓을 리가.그렇게 내려놓기엔 그 증오와 집착이 절대 가볍지 않았다.도저히 영문을 알 수 없었던 신지아는 머릿속에 윤형우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고 결국 윤형우가 깨어난 후 몇 가지 물어보기로 결심했다.고이진이 한번 연락한 적이 있으니 어쩌면 그 뒤에 또 연락이 닿았을 수도 있었다....호화로운 차량이 윤씨 가문 저택 쪽으로 돌아가고 있었다.윤재혁은 차 안에 앉아 편지를 손바닥 위에 펼쳐 놓았다.손가락으로 편지의 한쪽 모서리를 쥔 채 시선은 편지에 적힌 몇 글자에 고정되어 있었다. 종이를 뚫어버릴 기세였다.송민기가 자외선램프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보라색 빛이 편지지를 비추자 ‘YOON’이라는 영문이 선명하게 드러났다.“사모님께서 윤씨 가문에 계신다고요?”송민기가 살짝 놀란 듯 말했다.윤씨 가문의 종이는 특별히 맞춤 제작된 것으로 겉보기엔 평범한 종이와 다를 바 없었지만 자외선 아래에선 특별한 마크가 나타났다.종이뿐만 아니라 윤씨 가문 본가의 거의 모든 곳에 특정적인 표시가 있었는데 이는 오직 윤재혁의 심복만이 아는 사실이었다.원래는 윤씨 가문 내 다른 속셈을 가진 자들을 걸러내기 위함이었는데 지금 고이진이 직접 쓴 편지는 윤씨 가문의 종이였다.이것은 고이진이 윤씨 가문에 있다는 뜻이 아니겠나.윤재혁은 아무 말 없이 윤씨 가문의 로고가 나타난 종이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