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여진은 옷을 이천호에게 내밀며 덤덤하게 말했다.“이 옷은 다른 사람이 준 건데 이제 입을 생각이 없어요. 눈에 안 보이면 마음도 편하잖아요. 딱 잘됐네요. 저 대신 좀 처리해 줘요. 좀 미안하면 팔아서 나온 돈 중에 70%는 이천호 씨가 가져요. 나머지 30%는 장 아주머니께 드리면 돼요.”이천호가 또 거절하려 하자 민여진이 다시 간곡히 부탁했다.“그냥 부탁 하나 들어줬다고 치면 안 될까요?”그러자 이천호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옷을 곱게 접으며 조용히 말했다.“그럼 돈은 안 받고 그냥 팔기만 할게요. 여자 혼자면 돈 좀 챙겨두는 게 좋잖아요. 나중에 뭐 사기도 편하고요.”민여진은 가볍게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실 받은 돈을 나중에 몰래 돌려주면 그만이었다.하지만 민여진의 미소를 보자 이천호는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였지만 이미 얼굴은 빨개져 있었다.민여진의 얼굴에 거의 아문 상처가 있어도 그 미소 하나로 전부 가려질 정도였다.이천호는 이렇게 예쁘고 다정하게 웃는 여자를 여태껏 본 적이 없었다.“저는... 제가...”이천호는 혀가 꼬이기 시작하자 허벅지를 꼬집어 정신을 차렸다.“약... 약을 바를게요.”“네.”민여진이 손을 내밀자 이내 약 바르기가 끝났지만 이천호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아직 할 말이 있어요?”민여진의 질문에 이천호는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그게...”“네?”“아니에요. 별거 아니에요. 저 갈게요.”이천호는 고개를 숙인 채 황급히 돌아섰다.사실 이천호는 어제 봤던 그 남자랑 민여진이 무슨 사이인지 묻고 싶었지만 자세히 생각해 보니 민여진이 여기 남기로 했다는 건 그 남자랑 얽히기 싫다는 뜻인 것 같았다.그러니 괜히 그 남자 얘기를 꺼내봤자 분위기만 망치는 격이었다.이천호는 코트를 들고 집으로 돌아갔다.집 앞에 도착하자마자 어제 봤던 그 고급 차가 여전히 주차돼 있었다.이천호가 미간을 찌푸리며 슬쩍 집 안을 들여다보자 어제 봤던 그 두 남자가 마당에 앉아 있
“맞다, 식탁 위에 약 하나 있던데, 누가 준 거야?”민여진은 장작을 불에 더 밀어 넣으며 대답했다.“이 선생님이 줬어요.”“이천호?”“네.”장 아주머니는 바로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걔네 집에 저런 약이 없을 텐데? 설마 어제 너 처음 보고 오늘 시장에 가서 사 온 거 아니야?”민여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머뭇거리다 물었다.“왜요?”“우리 마을에 차 있는 사람이 없잖아? 다들 자전거 타고 시장 가는데, 그게 왔다 갔기만 해도 최소 네 시간은 걸려. 게다가 오늘 시장에 특별히 볼 것도 없었는데... 너라면 안 이상하겠어?”그 말에 민여진은 말문이 막혔다.장 아주머니는 환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이천호가 너한테 꽂혔네.”민여진은 장 아주머니의 급발진에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설마요, 이 선생님은 그냥 착한 거예요.”“사람이 아무리 착해도 아무 이유 없이 저렇게까지 안 해. 내가 오늘 처음 안 사람의 약을 사러 시장에 가자면 다들 미쳤다고 할걸? 요즘 같은 초여름에 불가능한 일이야.”장 아주머니는 배시시 웃으며 마치 중매가 성사된 듯 흐뭇해했다.“근데 난 괜찮은 것 같아. 이천호는 진짜 착하고 배려심도 있는 애야. 너 시집가면 절대 고생은 안 할 거야.”민여진이 말없이 가만히 있자 장 아주머니가 뭔가 깨달은 듯 민망한 얼굴로 말했다.“어머, 내가 또 쓸데없이 네 생각도 물어보지 않고 그냥 막 정해버렸네. 너, 좋아하는 사람 있지?”“없어요.”“굳이 안 말해도 알아. 난 그때 너한테 남자친구랑 다퉜냐고 물어볼 때, 네 표정이 확 바뀌는 거 봤거든. 그 후로 틈만 나면 너 멍하니 있었잖아. 누군가 생각하고 있는 거 티 나더라.”장 아주머니는 국자를 들고 반찬을 덜어내며 말을 이어갔다.“그 남자랑 심하게 다툰 거야? 그래서 안 돌아가는 거야?”민여진의 눈빛이 복잡해졌다.“이젠 남자친구도 아니에요.”“헤어졌구나?”장 아주머니는 안타까운 듯 탄식했다.“그럼 그렇지...”민여진은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아 일어나
“고마워요.”이천호는 뭔가 더 말하려다가 말끝을 흐렸다.너무 예의 차릴 필요 없다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꾹 삼키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자기 집으로 냅다 달려갔다.이천호는 집 앞에 도착하자마자 소리쳤다.“엄마, 우리 자전거는 어딨어요?”“왜 그래?”이천호 엄마는 손을 닦으며 주방에서 나왔다.“벌써 해지는데 자전거는 왜 찾아?”“몰라도 돼요. 시장에 급한 일이 있어서 그래요. 자전거는 어디 있어요?”“방 안에 넣어놨어. 오늘 밤 비가 많이 온대서 녹슬까 봐 안에 넣어뒀지.”이천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전거를 끌고 나왔다.시장에 가기 전, 이천호 엄마가 말했다.“얼른 들어와. 가는 김에 마을 어귀에 있는 네 아빠도 불러. 밥 먹게 일찍 오시라 해.”“알았어요.”이천호는 자전거를 타고 곧장 시장으로 향했다.마을 어귀를 지나는데 저 멀리 아빠가 보였고 그 옆에는 값비싼 외제 차 두 대가 나란히 서 있었다.이천호는 자전거에서 내려 아빠에게 다가갔고 그 순간, 차에서 내리던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처음 본 순간, 이천호는 남자의 싸늘한 시선에 숨이 턱 막혔다.남자는 병원복 위에 외투를 걸치고 있었지만 그가 풍기는 고압적이고 귀티 나는 분위기는 누가 봐도 범상치 않았다.남자의 얼굴은 종이처럼 새하얬고 몸 상태가 아직 정상이 아닌 듯했다.그 남자가 차 안의 누군가와 대화하는 사이, 이천호는 슬쩍 마을 이장인 아빠 옆으로 다가가 물었다.“아빠, 저 사람들 누구예요? 우리 마을에 웬 낯선 사람이에요?”“사람 찾는 중이래.”“사람이요? 누굴 찾는데요?”이장은 담뱃대를 물고 말했다.“스무 살 좀 넘은 여자를 찾고 있어. 여자 얼굴에 상처가 있고 많이 말랐대.”이천호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고 다급하게 물었다.“왜요? 그 여자가 저 사람들과 무슨 관계인데요?”“그건 나도 몰라.”이장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다만 사람만 찾으면 1억 원을 준다더라.”“1억이요?”이천호는 눈이 휘둥그레졌다.이 동네에선 그 돈으로 어지간한 집 한
“여진아, 나 산에 좀 다녀올게. 넌 뒷마당에서 채소를 좀 따와. 내가 돌아오면 바로 밥 먹자.”“알겠어요.”민여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문틀을 짚고 섰다.강하게 쏟아지는 햇살에 민여진은 편안히 눈을 감았다.이런 평범하고 느긋한 삶이 진행된 지 벌써 사흘째였다.민여진 손의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지만 몸에 나 있던 긁힌 자국은 거의 다 사라졌다.조금만 더 지나면 손에서 느껴지던 찌릿한 통증도 사라질 것이다.모든 게 다시 임재윤을 만나기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민여진은 바구니를 든 채 조심스레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아직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걸음걸이는 더뎠고 길도 자주 흐릿하게 느껴졌기에 늘 한 발 한 발이 신중했다.뒷마당에 도착해 채소를 다 따고 바구니를 들려는 순간 커다란 손이 툭 뻗어왔다.“제가 들게요.”민여진이 고개를 들어보니 까무잡잡한 피부에 선이 뚜렷한 잘생긴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어제 민여진이 넘어졌을 때 도와줬던 이장의 아들 이천호였다.“고마워요. 근데 괜찮아요. 몇 걸음만 가면 도착하니까요.”민여진이 미안한 듯 손을 뻗어 바구니를 다시 집으려 하자 이천호는 몸을 살짝 피하며 말했다.“눈이 잘 안 보이는데 무리하지 마요. 이거 생각보다 무거워요. 여자 혼자 들기엔 좀 벅찰걸요.”민여진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가볍게 웃으며 고마움을 전했다.이천호는 민여진의 얼굴을 슬쩍 보다가 귀까지 붉어진 채 고개를 숙였다.그리고 자기 난감한 모습을 들킬까 봐 서둘러 몇 걸음 앞서가며 말했다.“뒤에서 조심해서 따라와요.”집에 도착했을 때, 장 아주머니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이천호는 서둘러 돌아가는 대신 민여진에게 질문을 던졌다.“손은 좀 나아졌어요?”민여진의 손에는 여전히 붕대가 감겨 있었다.그 말에 민여진은 그제야 살짝 통증을 자각하며 말했다.“많이 나아졌어요.”이천호는 어색하게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연고를 꺼냈다.“이건 제가 시장에서 산 연고예요. 염증을 줄이고 통증에 좋다고 하더라고요. 손 좀 줘봐요.
경찰이 현장 상황을 캐묻자 남자는 시큰둥한 태도로 대답하다가 민여진 얘기가 나오자 눈빛이 돌변하며 분노를 터뜨렸다.“그년 때문에 내가 죽을 뻔한 걸 알아요? 그 마당에서 진짜 거의 죽을 뻔했다고요.”“말조심하시죠.”경찰이 책상을 두드리며 엄숙하게 말했다.“죽을 뻔했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남자는 즉시 자기 머리를 가리켰다.“이거 보여요? 이 심각한 상처는 바로 그 여자가 낸 겁니다. 벽돌을 들고 와서 그대로 내리쳤다고요. 난 그 충격으로 기절할 뻔했어요. 내가 좀 튼튼한 체질만 아니었으면 다음 날 해 뜨는 걸 보지도 못했을 겁니다.”“그럼 민여진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도망갔죠.”남자는 씩씩대다 이내 싸늘하게 웃었다.“근데 난 똑똑히 봤거든요? 그 여자가 절벽 끝까지 달려가더니 내가 손 뻗기도 전에 그대로 굴러떨어졌어요. 뭐 다 제 팔자죠. 장님 주제에 여기저기 막 돌아다니다가 그렇게 된 거죠. 애초에 얌전히...”남자는 갑자기 입을 다물고 피식 웃었다.그 모습을 본 경찰이 눈살을 찌푸렸다.“얌전히 뭐요? 우리가 봤을 땐 민여진 씨를 묶었던 밧줄이 풀려 있었는데, 그건 어떻게 된 거죠? 민여진 씨가 스스로 푼 겁니까?”“아니요, 내가 풀었죠.”“왜요?”남자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더니 입맛을 다시며 대답했다.“그년이랑 한 번 하려고 그랬죠. 날 계속 유혹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밧줄을 풀고 그년 옷을...”남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재윤이 경찰의 제지를 뚫고 안으로 들이닥쳐 주먹을 꽉 쥔 채 그대로 남자의 얼굴에 날렸다.남자는 고꾸라져 바닥에 처박혔고 뺨이 화끈거리는 걸 느끼며 고래고래 소리쳤다.“봤죠? 이 자식이 날 때렸어요! 당장 이 자식을 잡아가야죠!”경찰들이 임재윤을 막아섰고 그제야 남자는 임재윤이 누군지 제대로 봤다.남자는 임재윤을 박진성으로 착각하고 임재윤이 분노한 원인도 당연히 그 때문이라고 생각했다.“너 박진성이지? 자기 여자를 지켜주지도 못하고 양다리나 걸친 놈이 바로 너지? 어쩐지 민여진이 네 이름 듣
여자는 민여진이 익숙하게 장작을 넣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어머, 이런 것도 할 줄 알아?”“저 요리 꽤 잘해요. 요리 솜씨가 좋다고 칭찬도 많이 받았고요.”민여진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웃음은 오래가지 않아 곧 차가워졌다.민여진이 직접 음식을 해준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그 사람을 위해 애써 비위를 맞추고 더 잘하고 싶어 꾸준히 새로운 요리를 배워왔다.그러다 눈이 멀고 나선 주방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그래?”여자가 웃으며 말했다.“그럼 내가 복덩이를 주운 거네. 몸이 좀 나아지면 자신 있는 요리를 한 번 해줘 봐. 기대할게.”“네, 물론이죠.”...“임재윤이 얼마나 저기 있었어요?”진시우가 병실 문 앞에 서서 안을 들여다봤다.창가 쪽에 선 임재윤은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했다.금서연이 진시우의 질문에 조심스럽게 대답했다.“돌아온 이후로 줄곧 저러고 있었어요. 밤새 한숨도 못 잤고요.”금서연은 이미 기진맥진이었지만 임재윤이 밖으로 나갈까 걱정돼 억지로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진시우는 그런 금서연의 모습에 안쓰러워하며 말했다.“수고했어요. 이제 들어가 쉬세요. 여긴 제가 대신 있을게요.”“네...”금서연은 한 번 더 임재윤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를 떠났다.금서연이 자리를 뜨자 진시우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미간을 찌푸린 채 입을 열었다.“너 설마 계속 이럴 생각이야? 민여진이 돌아온다 쳐도 네가 먼저 죽을 수도 있어.”임재윤은 아무 대답도 없이 병원 창밖만 응시했다.지금 이 순간, 민여진이 택시에서 내려 아무 일 없이 자기 앞에 나타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그런 희망 하나만 마음에 품은 채, 임재윤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대답 좀 해봐!”진시우가 임재윤에게 다가가 어깨를 붙잡았다.“이렇게 건강 관리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민여진이 무사할 거란 보장은 없잖아? 너 지금 민여진을 대신해 고통받는 줄 알아? 그냥 네가 자신을 벌주는 거잖아. 마음의 위안 따위는 구하지 마. 결국 널 관심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