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성이 모든 것을 끝내자 민여진은 그가 눕기만을 기다렸다가 허리를 부여잡고 침대에서 내려왔다.약이 없었던 탓에 씻으러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 한 번으로 임신이 되지 않길 간절히 빌고 또 빌면서 말이다.그러자 침대에 누워 있던 박진성이 새카만 두 눈을 번쩍 뜨더니 야윈 민여진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어디 가?”그 말에 입술을 꽉 깨문 민여진이 대답했다.“씻으러.”그 말에 냉소를 흘린 박진성을 다시 물었다.“씻으러 가는 거야, 아니면 간호사한테 약 받으러 가는 거야?”뒷말은 마침 민여진이 날 밝는 대로 하려던 일이었다. 자신의 행동을 읽기라도 한 듯한 민여진의 몸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박진성은 그녀의 팔을 힘껏 잡아당겨 침대 위로 눌러버렸다. 깊은 연못 같은 그의 눈동자는 민여진을 단단히 가둬두었고 냉소 어린 잔인한 표정은 그녀의 온몸을 옭아맸다.“괜히 헛수고하지 마. 넌 임신하고 싶어도 못 하니까.”그 말에 잠시 멍해진 민여진은 확신에 찬 박진성의 목소리에 순간적으로 눈앞이 아득해졌다.“그게 무슨 소리야?”“말 그대로야.”민여진을 바라보는 박진성의 눈빛이 살벌했다.“전에 생겼던 우리 아이 낙태시키다가 자궁이 망가졌대. 안 그래도 한기만 가득 들어찬 몸인데. 너 평생 애 못 가진다고. 알겠어?”뭐라고?순간, 민여진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귀에서는 계속 윙윙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그 속에서 박진성의 잔인한 음성이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민여진, 이게 네가 받아야 할 벌이야. 그 아이를 잔인하게 버린 죄에 대한 벌. 아이는 이미 죽었고, 넌 엄마가 될 권리를 빼앗긴 거야. 이제 넌 다시는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된 거지. 그러니까 앞으로는 그 쓸데없는 약도 먹을 필요 없어.”민여진의 눈시울이 빨개졌다.“거짓말...”그녀의 입술이 사정없이 떨렸다. 눈가는 이미 촉촉해졌지만 괜한 오기에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거짓말이지? 박진성, 내가 더는 아이를 가질 수 없다니, 그게 대체
“구해?”얼굴에 새파랗게 질린 박진성은 민여진의 입에서 튀어나온 그 단어에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네가 언제 날 구했는데?”민여진은 절망 속에서 굳게 입을 다물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비릿한 냉소를 터뜨린 박진성이 말했다.“너는 너 자신도 구하지 못했잖아. 그런 주제에 나를 구했다고?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괜히 자의식과잉으로 그런 말 하지 마. 사람들이 비웃잖아.”말을 마친 박진성이 민여진을 놓아주었다. 술 냄새를 풍기며 들어온 주제에 화풀이만 하고는 바로 자리를 떠나버렸다.민여진은 떨리는 손으로 두 눈을 꼭 감았다. 머릿속에는 자신이 꿈속에서 몇 번이고 상상해봤던 아이의 얼굴만 희미하게 떠올랐다. 그녀는 언젠가 정말 자신의 아이가 태어난다면 잘 보살펴주리라 생각해왔다. 그랬는데 모든 건 단순히 자신의 헛된 망상이었던 걸까?이튿날 아침,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서원의 눈에는 잔뜩 어질러진 방 안이 보였다. 민여진은 침대 위에 힘없이 누워 있었고 표정은 잔뜩 지쳐 있었다. 목과 쇄골에서는 어젯밤을 증명하는 듯한 자국들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입안이 씁쓸해진 서원이 한마디 했다.“여진 씨, 설마 어제 대표님이 다녀가신 건가요?”민여진은 마음속에 남은 쓰라림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럼...”“너무 갑자기 와서 얘기할 틈이 없었어요.”민여진의 답변에 서원이 뭐라 더 덧붙일 수 없었다. 그는 얇은 입술을 한 번 쓱 훑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알겠어요. 그래도 최대한 빨리 준비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더 미뤄봤자 대표님 관심만 사그라들 테니, 그렇게 되면 여진 씨한테도 불리할 거예요.”“알겠어요.”민여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는 자신이 더 이상 임신이 불가능하다는 사실만 가득 차 있었다. 차갑게 얼어붙은 마음은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겨우 정신을 차린 민여진은 침대에서 일어나 말했다.“우선 가서 씻고 올게요. 방 정리 좀 해줄래요? 그리고 하는 김
민여진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박진성이 문채연이랑 같이 본가에 갔다고?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둘 사이에는 별 영향이 없었나 보다. 어쩌면 박진성은 문채연이 그런 잔인한 짓을 저질렀을 거라곤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자조적인 웃음을 지은 민여진이 말했다.“우선 별장으로 돌아가죠.”그녀는 박진성이 적어도 별장에는 돌아올 것이라 생각했다.민여진의 말에 대답한 서원이 곧장 차를 몰고 별장으로 향했다.별장에 도착한 민여진은 소파에 앉아 박진성이 돌아오기만을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혹시라도 민여진이 지루해할까 걱정되었던 서원은 텔레비전이라도 켜 보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서원의 말에 텔레비전을 켜자 박진성과 문채연이 다정하게 선물을 고르는 모습이 모니터를 가득 채웠다. 뉴스 매체는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보며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상황을 해석하고 있었다.“보스 그룹의 대표인 박진성 대표와 여자친구분이 2년 동안 안정적인 관계를 이어오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두 분이 따로 쇼핑하는 모습까지 목격되었는데요. 아마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화면에 뜬 두 사람의 모습에 민여진이 멈칫했다. 서원은 서둘러 리모컨을 빼앗아 채널을 돌리며 어색하게 말했다.“미안해요, 여진 씨. 저런 데서 막 떠드는 건 굳이 신경 안 써도 돼요. 대표님도 그냥 채연 씨랑 같이 쇼핑하러 나간 거겠죠.”“굳이 저한테 해명할 필요 없어요.”민여진이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덤덤한 미소를 지었다.“저 두 사람이 정말 연인 사이이든 아니든, 저랑은 아무 상관없는 일이잖아요.”서원은 혹시 몰라 민여진의 표정을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그녀의 얼굴에서 읽어낼 수 있는 감정은 없었다. 이에 마음이 어느 정도 놓인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러면서도 조금은 의아했다.어젯밤만 해도 두 사람은 함께 연인끼리만이 할 수 있는 은밀한 일까지 한 사이였다. 그랬던 남자가 불과 하루도 지나지 않은 바로 다음 날에 다른 여자와 함께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도 민여진은
박진성은 소파에 앉아 있는 여자를 발견하자마자 눈을 가늘게 떴다. 어젯밤, 그녀를 품에 안았을 때까지만 해도 몰랐는데 민여진은 불과 일주일 만에 눈에 띄게 야위어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뚜렷하게 드러나는 쇄골이 유난히도 두드러져 괜히 눈살이 찌푸려졌다.“신경 쓸 필요 없어. 그냥 없는 사람 취급해.”매정한 말을 내뱉는 박진성의 목소리는 아무 미련 없다는 듯 차가웠다. 그는 자신의 얇은 입술을 문채연의 귓가에 가까이 대더니 나지막이 속삭였다.“내 방으로 가자. 오늘부터 네가 내 와이프가 될 거니까.”그의 목소리는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거실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박진성이 한 말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무언가가 민여진의 가슴을 날카롭게 쿡쿡 찌르는 것만 같았다. 이미 기대를 잃은 마음속은 더욱 차갑게 식어만 갔다.사실 민여진이 놀랄 것도 없었다. 그녀는 눈앞의 광경이 오히려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민여진에게 출산을 강요해오던 박진성이었다. 그랬으면서 임신이 안 된다는 그 말 한마디에 이렇게 매정하게 버린다는 건가?문채연을 집까지 데려와서 함께 잠자리를 갖고, 저 여자에게 새로운 신분을 주겠다고?아마도 박진성은 이 순간을 오랫동안 손꼽아 기다려왔을지도 몰랐다.민여진은 혀끝으로 이빨을 가볍게 훑었다. 고개를 푹 숙인 그녀의 입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문채연은 다소 미안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진성 씨, 난 항상 진성 씨 믿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여진 씨도 있는걸요... 아무리 그래도 여진 씨는 진성 씨 와이프잖아요...”“오늘부터는 아니야.”박진성은 다른 사람의 입에서 민여진의 이름을 전해 듣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나는 것인지 목소리에는 알 수 없는 분노가 섞여 있었다.민여진에 의해 감정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롤러코스터를 타듯 오르락내리락했다. 이번 주 내내 병원에 있는 민여진을 찾아가고 싶다는 충동을 억누르기 위해 박진성은 최대한 일에만 집중하며 마음속에서 울컥 치밀어오르려는 감정을 참아냈다.도대체 왜
박진성은 모든 가능성을 차단하려는 듯 말을 마치자마자 몸을 돌려 위층으로 올라가려 했다. 팔을 뿌리치는 거센 손길에 민여진이 비틀거리다가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망고가 왜 죽었는지 알아도, 내가 하려던 말이 문채연이랑 관련된 거라고 해도, 정말 신경 안 쓸 수 있을까?”역시 예상했던 대로 박진성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너무 투명한 그의 반응에 민여진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박진성은 눈썹을 찌푸리며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민여진을 노려보았다.“그게 무슨 소리야?”민여진은 천천히, 또박또박 말을 이어나갔다.“망고를 죽인 그 노숙자 말이야. 네 옆에 있는 저 문채연이 사주한 거라고.”그 말에 문채연은 당혹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이내 민여진의 어리석음을 조롱하는 듯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상황이 원하는 대로 안 흘러가니까 이제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려는 건가? 고작 박진성과 문채연의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겨우 덮어뒀던 일을 다시 꺼내려 들다니.민여진이 직접 나섰으니 문채연도 더 이상 그녀에게 예의를 차릴 필요성을 느끼진 못했다.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던 문채연은 곧바로 눈시울을 붉히며 불쌍한 연기를 시작했다.“여진 씨,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여요? 지난번 일은 용서해준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날 계속 공격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에요! 왜 망고의 죽음까지 나랑 연관 짓는 거죠?”“왜 그쪽이랑 연관 짓냐고요...”민여진이 낮게 중얼거렸다. 분노를 억누르려 애쓰던 그녀의 눈가는 이미 빨개져 있었고 문채연을 향한 입에서는 차가운 비웃음이 흘러나왔다.“문채연, 아직도 모른 척할 거야? 박씨 가문 본가 휴게실에서 네 입으로 직접 망고를 죽였다고 인정했잖아. 내가 널 왜 끌어들이는지 정말 모르겠어?”문채연이 다시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전에 박진성은 지겹다는 듯 소리쳤다.“그만 좀 해!”민여진을 바라보는 박진성의 눈빛에는 끝없는 짜증만 남아 있었다.보아하니 민여진은 여전히 그 못돼 먹은 심보를 고치지 못한 것 같았다
다시 민여진에게 고개를 돌린 문채연이 울먹이며 말했다.“여진 씨, 내가 대체 뭘 잘못했다고 이런 식으로 날 죽이려고 드는 거예요? 정말 진성 씨를 좋아해서, 진성 씨한테서 날 떼어내고 싶은 거라면 정정당당하게 여진 씨 능력으로 나왔어야죠. 왜 자꾸 날 모함하지 못해 안달이에요?”예전이었으면 박진성은 문채연의 단순한 이 한 마디에 잔뜩 화난 목소리로 민여진을 쫓아냈을 테지만 오늘은 그저 이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그의 검은 눈동자에서는 망설임과 의심이 담겨 있었다.밀려오는 불안함에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진 문채연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진성 씨... 왜 그래요?”박진성은 자신의 손에 들려 있던 서류를 문채연에게 건네주며 말했다.“직접 확인해 봐.”문채연은 다급히 서류를 받아들고 한 장씩 넘겨보기 시작했다. 곧이어 그녀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버렸다.박진성의 매정하고 차가운 음성이 그녀의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문채연, 무슨 일인지 설명해. 그 노숙자의 손에 있던 그 많은 돈의 출처가 왜 하필이면 네 하인의 계좌인 걸까?”모든 계산을 철저히 마쳤다고 생각했던 문채연은 이런 식으로 민여진에게 꼬리가 밟힐 줄은 꿈에도 몰랐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문채연의 등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진성 씨... 나는... 그러니까 나도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요!”문채연이 다급히 변명했다.“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누군가가 날 속인 게 분명해요. 진성 씨도 알잖아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어떻게 그런 짓을 저지를 수가 있겠어요? 제발 나한테 한 번만 해명할 기회를 주세요. 지금 당장 희정이 불러서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보라고 할게요!”굳은 얼굴로 문채연의 변명을 듣고 있던 박진성은 저도 모르게 안심이 되었다.그 역시 이 일이 문채연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 아니면 사람을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봤다는 사실을 마주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는 그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그래, 믿어줄게.”박진
“그건 다 비겁한 네 변명일 뿐이야. 여진 씨가 아무리 나한테 모질게 대했다고 해도, 너한테 여진 씨를 해칠 권리는 없어.”눈이 벌겋게 충혈된 문채연이 말을 이었다.“여진 씨가 나한테 모질게 대한다고 해도 그건 다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이야. 언젠가 여진 씨도 내가 악의를 품고 있지 않다는 걸 이해해주겠지. 하지만 네가 이런 짓을 해 버리면, 난 여진 씨 앞에서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겠어?”“죄송합니다, 아가씨.”희정은 죄책감을 짊어진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조아렸다.“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다시는 안 그럴게요!”“나한테 미안하다고 해봤자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네가 나랑 여진 씨한테 준 상처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데. 정말 실망이야, 희정아...”문채연이 절망에 찬 소리로 말을 이어나가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박진성을 바라보며 흐느꼈다.“미안해요, 진성 씨. 다 내가 잘못 가르쳐서 그래요. 희정이가 이런 일을 저리를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어요. 다 내 탓이에요. 차라리 나한테 뭐라 하세요. 안 그러면 괜히 내 마음만 불편해질 것 같아서...”눈썹을 찌푸린 박진성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표정은 여전히 냉정하기 그지없었다.“이건 네 잘못이 아니잖아. 저 여자가 독단적으로 저지른 일이지, 너는 몰랐던 일이잖아.”“그래도...”문채연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눈물을 흘렸다.“내 주위 사람이 이렇게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고 생각하니까,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앞으로 여진 씨를 앞으로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모르겠어요...”뒤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민여진은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문채연의 눈물로만 가득한 연기는 누가 봐도 티 나게 가식적이었다.하인 주제에 민여진이 강아지를 키우고 있는지, 다른 생물을 키우고 있는지 알고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리고 일개 하인 주제에 무슨 돈이 있어서 강아지를 해하는 일에 굳이 돈을 써가며 사람을 구하려 들까?만약 박진성이 정말 문채연의 터무니 없는 변명을 믿는
적어도 오늘 밤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문채연은 입술을 꽉 깨문 채 자리를 벗어났다. 먼저 들어가기 전, 민여진을 바라보던 그녀의 눈에는 강렬한 증오만이 남아 있었다.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민여진이었다. 자신의 계획을 망친 것도 모자라 하마터면 박진성에게 의심받고 버려질 뻔하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절대 이대로 민여진을 용서할 수 없었다.문채연이 떠나자 넓은 방은 순식간에 텅 빈 것처럼 조용해졌다. 박진성이 계단을 두어 번 정도 걸어 올라가던 그때, 민여진이 이를 꽉 깨물고 말했다.“진성 씨도 잘 알잖아. 이 일이 문채연이랑 무관하진 않다는 거.”그 말에 박진성이 걸음을 멈추었다.그의 냉랭하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잔뜩 서렸다. 표정을 구긴 그가 몸을 돌려 민여진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하고 싶은 말이 뭐야?”“간단해.”민여진이 여전히 어금니를 꽉 깨문 채 말을 이어나갔다.“진성 씨는 아직도 문채연을 감싸주고 있잖아. 정말 단순히 그 여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러는 거야? 네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다른 사람이 어떤 상처를 받든 아무 상관 없다 이거야?”몇 초 정도 침묵을 유지하던 박진성이 미간을 힘껏 구기며 말했다.“그럼 네가 바라는 건 대체 뭔데? 문채연이 네 앞에서 무릎이라도 꿇고 사과하길 바라는 건가? 민여진, 네가 잊고 있는 게 있는 것 같은데, 채연이가 자살 시도를 한 건 너 때문이었어. 그러니까 너한테 원한을 품고 있는 건 당연한 일이야. 더군다나 채연이는 너한테 직접적으로 해를 가한 것도 아니고, 그냥 키우던 개새끼 하나 없앴을 뿐이잖아? 아무도 해친 적이 없다고.”“아무도... 해친 적이 없다고?”터무니없는 박진성의 말에 민여진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가슴 한구석에서 날카로운 무언가로 찔린 듯 둔탁한 통증이 느껴졌다.강제로 사냥개와 함께 단둘이 작은 창고 안에 갇혔을 때, 민여진은 이미 한 번 죽을 뻔했고, 문채연에게는 입에 다 담을 수도 없는 치욕과 고문을 당했다. 그런데도 감히 문채연이 아무
어떻게 대답할지 몰라 망설이던 민여진은 고개를 숙인 채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현준 오빠, 임재윤은 좋은 사람이에요. 저는 그를 한번 믿어보고 싶어요. 임재윤이 저를 해치지만 않는다면, 진짜 신분이 뭐든 상관없어요.”조현준은 할 말을 잃은 듯 한참 후에야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여진아, 이 결정을 후회하지 않길 바란다.”‘이 결정을 왜 후회할 거로 생각하는 거지?’민여진은 이유 모를 불안감에 사로잡혔지만, 조현준은 이미 전화를 끊은 후였다.그녀는 이 복잡한 감정이 조현준의 배려를 거절한 데서 오는 미안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침대에 앉아 멍하니 있던 그 순간, 문밖에서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민여진은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누구세요?”“민여진 씨, 저예요!”‘진시우?’흥분한 그의 목소리에 민여진은 당황하며 문을 열었다.“무슨 일이에요?”“임재윤한테 문제가 생겼대요. 지금 수술실로 들어갔다니까 우리 빨리 병원으로 가요.”민여진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앞을 볼 수 있는 상황이었어도 눈앞이 아득해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허둥지둥 탁자 위에 걸쳐둔 코트를 더듬어 입으며 물었다.“우리가 병원에서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잖아요. 갑자기 어떻게 된 거예요?”평소 유머러스하던 진시우의 목소리에도 긴장감에 섞여 있었다.“저도 자세한 건 모르겠어요. 하지만 임재윤의 병은 원래 갑작스러운 상황이 올 수도 있는 병이었어요. 병원에서는 지금 수술 중이라고만 알려줘서 일단 빨리 가봐야 할 것 같아요.”걸어서 갈 여유가 없던 두 사람은 즉시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응급실 복도에 도착하자, 임재윤은 아직 수술 중이었다.진시우는 민여진을 자리에 앉히고 의사를 찾아갔다. 막막함과 불안함에 민여진은 도저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 수술실 앞에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민여진은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 이상 없어 보이던 사람이 왜 갑자기 위중한 상태로 수술실까지 들어간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순간 손끝에서 차가움이 느껴지더니
민여진도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저도 같이 가도 될까요? 배가 조금 고파서 호텔 레스토랑에서 뭐라도 먹어야겠어요.”진시우는 거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민여진이 문 앞까지 걸어갔을 때, 뒤에서 휴대전화 소리가 전해졌다.“여진아, 얘기 좀 할까?”민여진은 깜짝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무슨 얘기?”임재윤은 눈썹을 찌푸리며 휴대전화를 두드렸다.“네가 알고 싶은 것들에 대해서.”“알고 싶은 게 없는데?”민여진은 자기 말이 너무 차갑게 들릴 것 같아 이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재윤아, 뭐 좀 먹으러 가는 거야. 곧 돌아올게. 그때 다시 얘기하자. 알았지?”임재윤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민여진은 진시우와 함께 병실을 나섰다.진시우는 무슨 재미있는 장면이라도 본 듯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내가 없는 사이에 분명히 무슨 일이 있었네요.”“별일 아니었어요. 그냥 대화를 조금 나눈 것뿐이에요.”민여진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말했다.“어서 가죠.”호텔 방으로 돌아오자, 서비스로 음식이 직접 배달되어 민여진은 레스토랑까지 내려갈 필요도 없었다. 진시우가 미리 말해둔 모양이었다.그녀는 조금씩 음식을 먹으며 생각에 잠겼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전화벨이 여러 번 울린 후였다. 급히 받아 들자, 조현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바빠? 왜 이렇게 전화를 늦게 받아?”“아니요. 휴대전화를 멀리 두고 다른 테이블에서 밥을 먹고 있었어요.”“그랬구나.”조현준은 잠시 침묵하더니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여진아, 그 일은 확인했어?”“무슨 일이요?”잠시 멈칫하던 민여진은 이내 무슨 일인지 알아차리고 말을 이었다. 임재윤의 신분에 관한 이야기였다.“네. 확인했어요. 임재윤은 원래 진씨 가문 운전기사의 아들이었대요. 선천성 심장병에 말도 못 하니까 자주 외출하지 못했던 거고, 나중에 치료를 위해 아버지와 함께 독엔에 갔대요. 아마 그래서 현준 오빠가 못 찾았나 봐요.”조현준은 긴 침묵 끝에 다시 물었다.“너는 그 말을 얼마나 믿어?”모든 걸
임재윤이 직접 말하지 않아도 민여진은 느낄 수 있었다. 평소 감정 기복이 거의 없던 임재윤이 여자 친구라는 말이 나오기 바쁘게 마치 다른 사람처럼 분위가 달라졌다.그 여자는 임재윤의 기분을 좌우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마음속에 중요한 존재인 것 같았다.민여진이 화제를 바꾸려는데 임재윤이 다시 물었다.“정말 궁금해?”“아니.”민여진은 얼른 부인했다. 처음엔 그냥 할 말이 없어서 꺼냈던 말이었고 더불어 임재윤이 왜 자신에게 그런 감정을 품게 되었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반응에 민여진은 자신이 선을 넘었음을 알아차렸다.임재윤은 민여진한테 다가가려다 멈춰서더니 고개를 숙이고 타자를 했다.“미안해. 많이 놀랐어? 나는 그냥 과거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서...”“괜찮아.”민여진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남이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함부로 꺼내는 걸 싫어하는 건 당연한 거야. 오히려 선은 내가 넘었으니까 사과해도 내가 해야지.”임재윤은 눈살을 찌푸렸다. 글을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더니, 오랜 침묵 끝에 타자했다.“넌 남이 아니야.”민여진은 미소를 지었다.“그래. 알았어. 너무 신경 쓰지 마. 누구나 털어놓기 싫은 비밀과 건드리면 안 되는 선이 있는 법이니까.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돼. 네 선을 알았으니까 두 번 다시 넘지 않을게.”그녀는 급히 소파에서 일어났다.“배 안고파? 간호사에게 음식을 언제 가져오는지 물어볼게. 금방 돌아올 테니까 잠깐만 있어.”병실 문을 나서는 민여진의 표정은 왠지 어두워 보였다. 정확한 이유가 뭔지도 모르게 마음이 불편했고 복잡했다.어쩌면 처음 느껴보는 임재윤의 냉담함 때문일 수도 있고, 그 여자가 임재윤의 아픔이었다는 진시우의 말 때문일 수도 있었다.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여자는 임재윤의 마음속에 중요한 사람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그럼... 나는 뭐지?’난데없이 튀어나온 생각에 민여진은 스스로에게 깜짝 놀라더니 마음을 다잡으며 중얼
임재윤은 민여진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물었다.“그냥 내가 아프기 때문이야? 만약 너 때문에 아픈 게 아니었다면, 아예 나를 보러 오지도 않았을 거야?”민여진이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다시 조용히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여진아, 인제 그만 돌아가. 진시우더러 돌아갈 차를 준비해달라고 할게. 지금쯤이면 안진 마을까지 가는 길도 뚫렸을 거야. 이모 집에서 편하게 지내. 병원에는 그만 오고.”“싫어.”민여진은 생각할 여유도 없이 말이 먼저 튀어 나갔다. 임재윤이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자, 민여진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을 이었다.“혼자 병실에 있으면 심심할 거 아니야. 게다가 수술 후 회복 기간도 긴데, 내가 옆에서 말동무가 되어주면 좋잖아.”민여진의 말에 임재윤은 천천히 타자했다.“괜찮아. 나는 늘 혼자였어. 이젠 익숙해.”늘 혼자였다는 임재윤의 말에 민여진은 문득 자신의 과거가 떠올랐다.감옥에서, 박진성의 별장에서, 도망치던 차 안에서조차 그녀는 언제나 혼자였다.고독을 즐기려고 노력했지만 항상 두려웠고, 언제라도 사라질지 모를 관심에 더욱 불안해했다.‘임재윤도 같은 마음이었을까? 고백할 때 우리가 같은 종류의 사람이라고 했던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을까?’“수술 끝날 때까지 기다릴게. 지금 돌아가도 신경 쓰여서 편하게 못 있어. 어쨌든 네가 아픈 건 나와 연관되어 있잖아. 무엇보다 지금은 네 곁을 지켜줄 사람이 필요하기도 하고.”민여진을 빤히 응시하던 임재윤은 그녀의 걱정과 고집에 표정이 차츰 누그러졌다.“여진아, 너 이렇게 착하면 누군가한테 이용만 당할 거야.”민여진이 웃으며 되물었다.“그럼 넌 나를 이용할 거야?”임재윤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답했다.“그럴 수도 있지.”예상치 못한 대답에 멈칫하던 민여진은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그때 휴대전화의 기계음이 다시 울려 퍼졌다.“나는 지금도 널 이용하고 있잖아. 내가 아픈 건 순전히 내 문제인데도 네 착한 마음을
‘마음속에 아직도 박진성이 있냐고?’민여진은 단지 자신이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박진성을 산 채로 가죽을 벗기고 뼈를 발라내고 싶었다.진시우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흐르고 분위기가 편안해지자 비로소 웃으며 말을 꺼냈다.“다행이네요. 난 임재윤이 마음에 다른 남자가 있는 여자와 함께하는 걸 원하지 않아요. 여진 씨가 박진성과 아무 관계도 없다면, 임재윤과 잘 시작해 봐요.”다시 임재윤의 이름이 나오자, 민여진은 표정이 달라졌다.“저와 임재윤은 아무런 사이도 아니에요.”“어떤 사이인지 여진 씨가 저보다 더 잘 알겠죠.”진시우는 잠시 멈추었다가 말을 이었다.“여진 씨가 임재윤의 신분에 대해 우려하고 있는 것도 알아요. 이해해요. 박진성 일 이후로 경계심을 갖는 건 당연하죠. 하지만 임재윤과 박진성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걸 여진 씨도 잘 알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임재윤은 절대 여진 씨를 다치게 하지 않아요. 임재윤이 이렇게까지 하는데 민여진 씨가 아직도 경계를 못 풀겠다면 대체 어떻게 증명해야 할까요? 그렇다고 마음을 꺼내 보여줄 수도 없는 일인데.”그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한 뒤, 민여진을 위해 마스크와 모자를 사러 갔다.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던 민여진은 진시우의 말이 계속 맴돌아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임재윤과 박진성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박진성은 차갑고 독단적이며, 항상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며 타인을 해치는 데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었다. 반면 임재윤은 부드럽고 세심한 사람이었다. 그는 모든 방면에서 민여진을 먼저 배려해 줬고, 아픈 몸으로도 민여진이 추울까 옷까지 벗어주는 사람이었다.성향이 이렇게나 상반된 두 사람인데, 왜 민여진은 자꾸만 임재윤이 박진성이라는 착각을 하고 의심하는 건지 본인조차 이해되지 않았다.‘나 왜 이러지? 박진성이 같은 병원에 있다는 말만 듣고 이렇게 의심하다니.’민여진은 머리가 아파 눈을 질끈 감았다. 이때 물건을 사
진시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민여진 씨를 위해 싫어하는 걸 참고 먹다니, 정말 진심으로 좋아하는 모양이네요.”예전이었다면 진시우의 말을 그저 농담으로 넘길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당황스럽기만 했다. 민여진은 한참 지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화제를 돌렸다.“진시우 씨, 임재윤하고 어릴 적부터 함께 지냈죠?”“네? 그렇다고도 할 수 없어요.”진시우는 과거를 회상하며 말했다.“재윤이가 한동안 독엔에 가 있어서 떨어져 지내다가 나중에야 다시 연락이 닿은 거예요. 왜요?”“궁금해서요. 임재윤 주변에는 여자가 별로 없었나요? 아니면...”아니면 어떻게 나 같은 사람에게 마음을 줄 수 있겠냐는 뜻이었다.진시우는 웃으며 말했다.“오해하고 있네요. 임재윤 주변에는 여자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임재윤을 좋아하는 여자도 적지 않았어요. 요즘 여자들은 차가운 이미지를 가진 남자를 좋아하잖아요. 임재윤은 말이 없으니까 딱 그런 이미지였고 성격도 세심하기까지 해서 더 인기가 많았죠. 예전에 사귀었던 여자 친구는...”진시우는 이 주제가 적절하지 않음을 깨달은 듯 급하게 화제를 바꾸었다.“어쨌든 외로워서 민여진 씨에게 관심을 가진 건 아니에요. 임재윤은 진심으로 민여진 씨를 좋아하는 거예요.”하지만 민여진은 다른 말이 더 궁금했다.“임재윤에게 여자 친구가 있었어요?”“네.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요.”“그 여자는 어떤 사람이었어요?”진시우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여진 씨, 제가 이 질문에 꼭 대답해야 하나요? 궁금하면 임재윤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어때요? 친구의 아픈 기억을 꺼내고 싶지 않아서요.”‘아픈 기억? 임재윤의 전 여자 친구는 그에게 아픔으로 남은 건가?’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민여진은 그 안에 수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음을 깨달았다.식사를 마치고 민여진은 진시우와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길을 가던 중, 민여진은 어제 박진성을 우연히 마주친 일이 떠올라 걸음을 멈췄다.“진시우 씨, 돈을 좀 빌려주실래요? 모자랑 마스크를 사려고요.
민여진의 얼굴을 본 문채연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여기 왜 나타난 거지? 누구 때문에 이 병원까지 온 거야?’답은 너무 뻔했다. 이제 겨우 박진성과의 관계가 돈독해지고 있는 시점에 민여진이 나타나자, 화가 치밀어 오른 문채연은 이를 악물었다.‘쓰레기 같은 년! 죽은 척 도망쳐놓고 이제 와서 후회라도 하는 거야? 다시 박진성 앞에 나타나서 그 사람 마음을 흔들어 놓을 생각이라면 꿈 깨! 일 초도 못 나타나게 할 거니까.’문채연의 눈에는 독기가 서렸다....민여진은 침대에 누웠지만 머릿속을 맴도는 의문에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임재윤이 어떻게 나를 좋아할 수 있지? 내가 뭐라고? 말을 못 하는 그와 같이 나도 앞을 못 보는 장애인이라서? 그런 거라면 너무 경솔한 결정 아닌가? 그리고 시각장애인도 많이 봤을 텐데 왜 하필...’어찌 되었든 민여진은 갑작스러운 그의 마음이 선뜻 받아들여 지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조현준도 그렇고 이제 민여진은 누구한테 마음을 줄 용기가 없었다.박진성이라는 사람 때문에 받았던 그 수많은 상처는 이미 그녀의 마음을 무너지게 했다.민여진은 억지로 눈을 감고 겨우 잠에 들었지만, 악몽을 꾸었다.병원에서 박진성을 마주치는 꿈이었다. 박진성은 그녀의 저항을 무시하고 사람들을 시켜 그녀를 묶은 채 양성으로 끌고 갔다.잠에서 깬 민여진은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박진성의 강압적인 태도와 차가운 얼굴이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정신을 차리자,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민여진이 문을 열자, 이번에는 직원이 아니라 진시우였다. 그는 웃으며 물었다.“민여진 씨, 혹시 제가 휴식을 방해한 건 아니죠?”“아니요. 방금 막 일어났는데, 마침 잘 왔어요.”“다행이네요. 같이 식사하러 갈래요? 병원도 가야 하고. 그런데 임재윤은 오늘 이상하게 문자를 여러 번 보내네요. 민여진 씨 상태를 계속 물어보던데, 혹시 싸우셨어요?”싸운 건 아니지만, 그것보다 더 어색한 상황이었다. 민여진은 설명하기 어려워 웃으며
임재윤의 말에 민여진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서 있었다.“뭐라고?”잘못 들은 줄 알고 되물었지만, 임재윤은 단호하게 대답했다.“너를 좋아해. 첫눈에 반했어.”임재윤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손가락을 움직였다.“사실 병이 발작하지 않았다면 엊그제쯤에 이미 말했을 거야. 그때 너랑 만나자고 약속했던 이유가 널 좋아한다고 고백할 생각이었거든.”“나를 왜?”민여진은 머리가 멍해졌다.‘임재윤이 나를 좋아한다고? 어떻게? 이게 말이 돼?’“왜라니?”임재윤은 담담한 표정으로 반문했다.“너를 처음 본 순간부터 너여야만 한다는 느낌이 들었어. 이건 지난 20여 년 동안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야. 아마 이런 걸 첫눈에 반했다고 하겠지?”민여진은 주체할 수 없이 빨리 뛰는 심장에 호흡이 거칠어졌다.‘임재윤이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고? 너무 터무니없는 말이잖아.’“이런 내 모습에 반했다고? 너 같은 조건이면 더 좋은 여자를 만날 수도 있잖아.”“외모만으로 첫눈에 반했다면, 그건 첫눈에 반했다는 말을 모욕하는 거야.”임재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타자를 이었다.“널 처음 본 순간 그런 느낌이 들었어. 어쩌면 우린 같은 종류의 사람이겠구나. 교회에서 마주쳤을 때부터 줄곧 너를 지켜봤거든. 주변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는 네 모습이 좋았고 그럼에도 반짝반짝 빛나는 네가 예뻐 보였어.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내 시선은 온통 너한테 가 있더라. 여진아, 만약 네가 앞이 안 보이고 내가 말을 못하는 게 하늘이 정해준 거라면, 하늘은 아마도 나를 네 눈이 되게 하고 너를 내 목소리가 되게 하려고 그랬던 게 아닐까? 우린 아마 천생연분일지도 몰라.”차가운 기계음이 내뱉은 그 말은 왠지 모르게 뜨겁게 전해져 민여진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그녀는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임재윤, 농담하지 마.”임재윤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민여진이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 앞에 다가갔다. 뜨거운 그의 입술이 그녀의 얼굴
“넌 안 피곤해?”“아까 푹 쉬어서 괜찮아.”임재윤은 무언가 말하려다 멈추고는 간단히 알겠다고 답한 뒤 침대에 누웠다.이어서 민여진은 불을 껐고 깊은 밤이 되자, 병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민여진은 임재윤의 호흡이 평온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가 깊이 잠든 걸 확인하고 소파에서 일어나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방 안은 캄캄했지만, 그녀에게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던지라 호흡소리만으로도 임재윤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정신을 가다듬은 민여진은 임재윤한테 다가가 조용히 손을 뻗어 손끝으로 천천히 그의 눈썹과 눈을 쓰다듬었다.그녀는 조금씩 조금씩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만져봤다. 넓은 이마, 높고 곧은 코.민여진이 눈을 뜬 채 손가락을 입술 근처까지 가져가려던 찰나 임재윤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어둠 속에서 민여진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임재윤의 시선이 느껴졌다.손에 힘을 주던 임재윤은 민여진임을 알아차리고는 이내 힘을 풀더니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바닥에 글자를 썼다.[뭐 하는 거야?]민여진은 호흡을 가다듬었지만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임재윤, 너 도대체 누구야?”그녀는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임재윤은 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휴대전화를 꺼내 물었다.“여진아, 그게 지금 무슨 말이야?”민여진은 더 이상 속아 넘어가지 않으려는 듯 마음을 다잡으며 차분하게 말했다.“현준 오빠가 지금 동진에 있어. 오빠한테 너에 대해서 조사를 좀 해달라고 부탁했었거든. 그런데 동진에는 임재윤이라는 사람이 없대. 그러니까 너 대체 누구냐고.”임재윤은 한참 침묵하다 다시 타자를 했다.“조현준의 말은 믿으면서 나는 안 믿는구나.”“너를 어떻게 믿어?”민여진은 혼란스러웠다.“임재윤, 난 너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 신분이 뭔지, 집은 어디인지, 가족은 몇 명인지 심지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몰라.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건, 나 같은 여자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거야. 다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