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성은 고열로 인해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었다. 그는 민여진의 허리를 힘껏 끌어안고 전처럼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박진성은 더 이상 차갑고 지독한 폭군을 연기할 필요가 없었다.“여진아, 나 배고파.”호흡을 가다듬은 박진성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비빔국수 해줄래? 전에 해줬던 비빔국수 엄청 맛있었어. 또 먹고 싶어.”그 말에 민여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전에 해줬던 비빔국수라니? 이게 무슨 말이야? 내가 언제 박진성에게 국수를 해줬었지?’설사 있다고 해도 이미 2년 전의 일이었다. 박진성이 그때의 일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게다가 민여진을 부르는 박진성의 목소리와 말투는 왜 이렇게 익숙한 걸까...민여진은 심장이 불안하게 떨렸고 눈동자 역시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민여진의 머릿속에는 한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그럴 리 없어... 그럴 리가...’민여진이 아랫입술을 꼭 깨물며 애써 마음은 진정했다. 너무 터무니없는 생각인 것 같았지만 심장이 아프게 조여왔다. 그 탓에 민여진은 도무지 정신을 다잡을 수 없어 결국 박진성을 꾹 잡았다.“뭐라고?”따지듯 묻는 민여진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방금 날 뭐라고 부른 거야?”충격에 빠진 여자의 목소리에 박진성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흐릿하던 시선이 조금씩 또렷해지자 백지장처럼 창백해진 여자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순간적으로 느껴지는 극심한 두통에 박진성이 이불을 꽉 움켜쥐었다. 그가 차갑게 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민여진, 네가 왜 여기 있어? 난 어떻게 된 거야?”민여진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네가 왜 여기 있냐니... 설마 아파서 기억이라도 잃은 거야? 우리는 폭우 때문에 이 호텔에 왔고 넌 아파서 쓰러졌었어.”박진성이 깊은숨을 들이켰다. 온몸에 느껴지는 한기에 그가 이불을 잡아당겼다.“내 옷은?”“화제 돌리지 마.”민여진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최대한 진정하려 애썼다.“방금 날 뭐라고 불렀는지 기억해?”순간, 박진성의 차가운 얼굴이 굳
얼음을 만지는 것 같은 냉기에 눈을 커다랗게 뜬 민여진이 박진성을 흔들었다.“박진성? 일어나!”남자의 입에서 가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민여진이 남자의 얼굴을 만졌다.‘뜨겁잖아.’이건 고열 정도가 아니었다. 어쩌면 박진성은 이미 반혼수 상태에 빠진 것일지도 몰랐다. 이대로 방치했다간 큰일이 날 수도 있었다.민여진은 순간 머리가 하얘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억지로 정신을 가다듬고 방을 나서 벽을 짚으로 옆 방문을 두드렸다.상대방이 짜증스럽게 문을 열자 민여진이 다급히 설명했다.“죄송해요. 제가 앞이 안 보여서요. 친구... 친구가 열이 나서 그러는데 프런트에 직원을 보내달라고 대신 연락 좀 해주시겠어요?”다급한 여자의 부탁에 상대방은 곧바로 호텔 전화로 프런트에 연락하며 민여진을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세요. 이런 날씨에 감기가 오는 건 흔한 일이에요. 별일 없을 거예요.”곧이어 직원이 올라와 박진성의 상태를 확인했다. 열이 끓고 있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 뾰족한 수는 없었다.“밖엔 아직도 비가 오고 있어요. 병원도 꽤 멀리 떨어져 있어서 괜히 움직였다가 오히려 더 심해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제가 일단 해열제를 가져올게요. 에어컨 온도를 조금 더 높이세요. 오늘은 일단 여기 계시다가 내일 아침 비가 끊으면 병원에 가시는 게 어때요?”민여진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고마워요.”“아니에요.”호텔 직원은 곧바로 뜨거운 물과 해열제를 가져왔다. 그것을 받아 탁자에 올려놓은 민여진은 고민 끝에 박진성의 옷을 벗겼다.앞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감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곳은 최대한 피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손이 닿았다. 박진성은 곧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가 되었다.그 모든 과정 후 민여진의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하지만 또다시 샤워할 기분이 아니었던 민여진은 그저 침대맡을 지키며 창밖에 빗소리를 듣고 있었다.그러던 민여진은 순간 임재윤의 곁을 지키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정신을 차
박진성은 이성을 잃은 듯 점점 아래로 내려가며 민여진의 몸을 탐했다. 어차피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 민여진은 더 이상 발버둥 치지 않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지막 한 방울의 눈물이 침대로 툭 떨어졌다.“얼른 끝내.”민여진의 눈빛엔 혐오만이 가득했다.“그리고 내일 아침, 법원에 이혼 신청하러 가. 그리고 이제 두 번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그 말은 마치 찬물처럼 뜨겁던 박진성의 열기를 완전히 식혀버렸다.행동을 멈춘 박진성이 아래에 누워있는 여자를 쳐다보았다. 분명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바로 그의 곁에 있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박진성은 민여진에게 다가설 수 없었다.박진성을 향한 민여진의 원망과 실망은 이미 끝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아무리 모르는 척 애써도 더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민여진.”민여진의 이름을 부른 박진성은 그녀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박진성이 입꼬리를 올려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만약 오늘 내가 여기서 널 안으면 넌 날 평생 원망할 거야, 그렇지?”민여진의 눈빛은 고요한 호수처럼 아무런 파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박진성의 말에도 그저 가만히 있던 민여진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오늘 네가 어떤 짓을 하든, 난 이미 널 원망해. 오늘 일은 그저 날 더 역겹게 할 뿐이야.”‘역시.’자조적인 웃음을 짓던 박진성이 몸을 일으켰다.자신을 누르던 무게감이 사라지자 민여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편으론 의아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민여진은 더는 도망칠 곳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었다.민여진이 아는 박진성이라면 갖고 싶은 것은 절대 포기할 리가 없었다. 박진성은 얼마든지 자신의 욕망을 위해 강제적으로 민여진을 안을 사람이었다. 게다가 박진성에게 민여진은 그저 자신이 소유한 물건일 뿐이었다.하지만 오늘의 박진성은...“계속 침대에 누워서 뭐 해?”민여진을 부른 박진성이 명령하듯 말했다.“씻어.”민여진이 휙 고개를 들고 박진성을 쳐다보았다.경계 가득한 민여진의 표정을
문을 열고 방을 확인한 박진성이 멈칫, 발걸음을 멈췄다.그러자 민여진이 물었다.“왜 그래?”박진성이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아무것도 아냐.”괜히 커플 전용 스위트룸이라고 강조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야릇한 조명과 향기로 인해 방은 무드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특히 이미 침대에 준비된 옷을 민여진이 입는다면 어떤 모습일지, 박진성은 차마 상상도 할 수 없었다.방으로 걸어 들어간 민여진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침대 몇 개 있어?”‘방은 하나밖에 없으니 어쩔 수 없지만 설마 박진성과 같은 침대를 써야 하는 거야?’그러나 불안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 법이었다. 박진성이 대답했다.“하나.”민여진이 안고 있던 옷을 꽉 잡았다. 괜히 긴장되는 마음에 민여진이 결국 박진성에게 경고했다.“약속했던 건 꼭 지키길 바랄게. 남자가 한 입으로 두말하지 마.”박진성은 머릿속에 차오르는 생각들을 이를 악문 채 떨쳐내고 있었다. 하지만 민여진의 말은 오히려 박진성이 끊어내던 생각을 상기시켰다. 욕망을 꾹 누른 박진성이 미간을 찌푸리고 되물었다.“내가 무슨 약속을 했는데.”민여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분명 약속했었잖아. 그건...”차마 직접적으로 얘기를 꺼내지 못하는 민여진의 모습에 박진성이 다그치듯 입을 열었다.“뭐가? 내가 같은 침대에서 안 잘 거라고 약속했어, 아니면 널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하길 했어?”민여진이 대답하기도 전에 박진성이 말을 이었다.“민여진, 내가 다시 알려줘야 해? 이혼하기 전까지 우린 여전히 부부야. 같은 침대가 아니라 내가 정말 널 안는다고 해도 그건 그저 부부 관계를 이행하는 것뿐이라고.”잠긴 박진성의 목소리에서 민여진은 뜨거워진 그의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민여진이 몸을 돌려 방을 나가려 했다.“난 로비 소파에서 잘게.”민여진이 방문을 나서던 그 순간, 남자가 민여진의 손목을 잡고 그녀를 잡아당겼다.순간 민여진의 몸이 그대로 푹신한 침대에 떨어졌다. 민여진이 숨을 돌릴 새도 없이 남자가 그녀의
박진성의 말에 민여진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민여진은 전혀 그런 뜻이 아니었다.하지만 민여진이 설명하기도 전에 또다시 강풍이 몰아쳤다. 해변가라 바람이 센 것은 물론 살을 에듯 차기도 했다. 아직 50미터만 움직였을 뿐인데 이미 체온이 잔뜩 내려가 버렸다.민여진이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그걸 느낀 박진성은 민여진을 또다시 품으로 끌어안았다.“아직 50미터 남았어.”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빗줄기는 종업원의 말처럼 점점 커졌다. 만약 계속 레스토랑에 남아있었다면 지금쯤 나오는 것 자체가 어려웠을 것이다.우산도 많은 것을 막아주지는 못했다. 겨우 도착해 차에 탄 민여진은 이미 온몸이 폭삭 젖어있었다.문을 닫은 박진성은 곧바로 히터를 켜고는 트렁크에서 수건을 꺼내 민여진에게 건넸다.“일단 이거로 물기부터 닦아.”“고마워.”민여진이 예의상 인사를 건넸다. 수건을 건네받으며 닿은 남자의 손끝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민여진의 손 역시 차가웠지만 박진성의 손끝 온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수준이었다. 생각해 보니 외투도 없이 셔츠만 입은 사람이 폭우를 지나쳐 왔으니 그 꼴은 당연히 민여진보다 나을 리가 없었다.잠시 머뭇거리던 민여진이 수건을 박진성에게 건넸다. “당신이 닦아. 당신 외투 덕분에 난 얼마 젖지도 않아서 필요 없어.”박진성은 그 수건을 받지 않았다.“나도 괜찮아. 어차피 수건으로는 어림도 없어.”온몸이 흠뻑 젖은 것이 분명했다.폭우로 인해 와이퍼가 쉴 새 없이 움직여도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좁은 차에 앉은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히터를 최대로 켰어도 비로 몸에 달라붙은 옷 때문에 민여진은 점점 더 추워졌다. 손으로 입을 막은 민여진이 재채기하며 몸을 떨었다.미간을 찌푸린 박진성이 말했다.“옷 벗어.”그 말에 고개를 홱 돌린 민여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다.그 반응에 박진성이 곧 민여진이 오해했음을 알아차리고 입술을 핥으며 설명했다.“그런 뜻 아냐. 옷을 벗어야 안 추워. 몸은 수
“재윤아, 나 이제 잘래.”임재윤이 종업원의 목소리를 듣기라도 할까 봐 민여진의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었다.하지만 임재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말했다.“그래. 일찍 쉬어. 잘 자.”“너도 잘 자.”통화를 끝낸 민여진의 마음이 한결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민여진이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오자 종업원이 그녀를 다시 자리로 안내했다.그녀가 다시 자리에 앉기 바로 직전, 박진성이 담배를 꺼버렸다.“음식이 다 식어서 다시 해달라고 했어.”민여진은 박진성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박진성은 개의치 않은 듯 종업원에게 말했다.음식을 다시 준비하는 사이, 박진성이 물었다.“화장실에는 왜 이렇게 오래 있었던 거야. 화장실에서 뭐 했어?”민여진이 차가운 눈으로 박진성을 쳐다보았다.“생리가 와서 안에서 조금 앉아 있었어. 설마 이것도 뭐라고 할 건가?”“너 생리일 10일이잖아.”멈칫한 민여진이 아닌 척 거짓말했다.“문채연 날짜와 헷갈렸나 보네. 나 아냐.”그러자 박진성은 말이 없었다.분명 로맨틱한 레스토랑이었지만 각자 앞에 놓인 음식만 먹는 두 사람의 분위기는 전혀 로맨틱하지가 않았다. 오히려 합석해 밥을 먹고 있는 낯선 사람 같았다.한참 밥을 먹고 있던 그때, 밖에서는 갑자기 바람이 불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보슬비가 폭우로 변하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비 와?”민여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박진성도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차는 레스토랑과 1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주차되어 있었다.“소나기라 곧 그칠 거야.”그칠 거라던 비는 식사를 마치고 나서도 여전히 미친 듯이 퍼붓고 있었다.종업원이 두 사람에게 다가와 말했다.“비는 아마 12시까지 계속 내릴 것 같아요. 지금은 비가 조금 그친 것 같은데 조금 있으면 아마 또 폭우가 쏟아질 거예요. 저희가 준비해 둔 우산이 있는데 필요하세요?”민여진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고마워요.”“우산은 몇 개로 드릴까요?”“두 개요.”“한 개.”거의 동시에 나온 대답에 박진성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