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디좁은 병원 침대가 순식간에 넓어진 것 같았다. 민여진은 이마를 부여잡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지금이 몇 시일까? 박진성은 언제 나간 걸까?민여진은 어딘가 아쉬워졌다. 잠들기 전에 박진성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만약 그가 깨어난다면 박진성이 잠결에 한 그 미워하지 말아 달라는 말이 무슨 의미였는지 묻고 싶었다.그 순간, 병실 문이 열렸다. 민영미인 줄 알았던 민여진이 고개를 들어 환히 웃으며 말했다.“엄마? 지금 몇 시예요? 혹시 아침이에요? 이렇게 일찍...”“엄마? 설마 지금 부르는 사람이 정수향이야?”비웃는 듯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웃음이 어려 있던 민여진의 얼굴이 굳어버렸다. 그녀는 경계심 가득한 표정으로 병실 문 쪽을 바라보았다.“문채연, 네가 여긴 왜 왔어!”“여진 씨, 왜 이렇게 예민해요? 난 그냥 네가 꼭두각시처럼 놀아나는 게 안쓰러워서 좋은 마음으로 진실을 말해주려고 온 건데.”“좋은 마음에? 내가 네 수작이 뭔지 모를 것 같아?”민여진의 표정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그녀의 한 손은 무의식적으로 침대 시트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좋은 마음이라는 말로 나한테 온갖 지저분한 짓 한 게 한두 번이야? 한 번은 속아도 두 번은 절대 안 당해! 당장 꺼져!”“정말 날 그렇게까지 밀어내고 싶어요?”문채연의 말투가 순식간에 억울한 듯 움츠러들었다.“내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건 나도 인정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악인은 아니에요. 여진 씨 엄마는 이미 투신자살로 비참하게 죽어버렸는데, 그렇게 불쌍하게 죽어버린 엄마를 두고 다른 여자한테 엄마엄마 하고 있잖아요. 이게 말이 돼요? 죽은 엄마가 불쌍해서 찾아온 거예요.”“닥쳐!”민여진의 이마에는 핏줄까지 불거졌다. 가슴에서 엄청난 고통이 밀려와 숨이 거칠게 떨려왔다.“우리 엄마는 잘 살아있어! 다시 나 속이려고 들지 마. 당장 나가. 안 꺼지면 간호사 부를 거야.”민여진이 호출 벨로 손을 뻗자 문채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민여진, 나랑 어디 좀 가지 않을래?”“네가
얼굴을 감싼 채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민여진은 그 자리에 굳은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녀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눈은 물론 이제는 귀까지 먹어버린 듯 오장육부가 제 자리를 잃고 뒤틀리는 것 같은 고통에 소리조차 지를 수 없었다.그토록 익숙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계속 그녀의 곁에 있어 주며 이름을 불러주던 그 목소리가 지금 다른 여자아이에게 생명과도 같은 존재라고 말하고 있었다.“정말이야? 정말 날 버린 게 아니야? 그럼 그동안 왜 연락이 안 됐던 건데? 저기 안에 있는 장님 새끼는 왜 엄마한테 엄마라고 하고 있는 거냐고? 고작 40밖에 안 된 나이에 저렇게 큰딸이 어디서 나온 거냐고.”“그건...”정수향이 망설이며 말끝을 흐렸다.한수영은 흥분한 채 문 쪽을 흘끗거리며 발을 동동 굴렀다.“그건 뭐냐고! 빨리 말해! 설명 안 해주면, 앞으로 난 엄마 없는 아이로 살 거야.”“그러지 마! 수영아, 그러지 마...”정수향이 절망에 가득 찬 목소리로 외쳤다.“얘기해줄게, 내가 다 설명할게. 저 여자 엄마는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셨대. 그런데 내 목소리가 죽은 엄마랑 너무 비슷해서, 잠깐 엄마 역할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았어. 그리고 오늘이 그 마지막 날이었고. 곧 떠나려고 했어...”쿠궁!민여진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머릿속은 이미 새하얘져 귓가에 이명이 들려왔다.지금 민여진이 어디에 서 있는지도 잊은 채 심장과 폐가 바짝 조여왔다. 마치 누군가가 마음먹고 짓이겨 놓기라도 한 듯 가슴이 아파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황당한 상황에 눈물도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민여진, 날 미워하지 마.”희미한 기억 속에서 박진성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남자의 차갑고 무심한 표정, 모든 것을 자신의 발밑에 두고 사는 그 안하무인의 표정이 다시 선명하게 떠올랐다.그의 입에서 자주 나왔던 그 속죄라는 단어의 뜻, 미워하지 말라던 그의 말이 전부 이 사실을 덮기 위한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이 엄마의 죽음을 자신에게서
정수향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너 손은 어떻게 된 거야!”그녀는 다급히 의사와 간호사를 호출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때, 뒤늦게 정신을 차린 민여진이 다른 손으로 얼른 상처를 가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괜... 괜찮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뭐가 괜찮아? 지금 붕대가 피투성이인데! 왜 이렇게 칠칠맞아! 오늘 나까지 돌아가면, 넌 대체 어떻게 살아가려고 그래!”정수향은 걱정과 화가 뒤섞인 표정으로 말을 쏟아냈다. 의사가 안으로 들어와 민여진의 손을 확인하더니 상처가 벌어져 재봉합이 필요하다는 말을 했다.의사가 꽤 심각한 표정으로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대표님이 제일 걱정하셨던 게 흉터였는데, 이렇게 재봉합을 하면 흉터는 무조건 남습니다. 아프실 거예요. 뭐라도 물고 계세요.”하지만 민여진은 이미 정신이 반쯤 나가 있는 상태였다. 상처를 다시 꿰매는 도안 고통에 이마는 이미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지만 비명 하나 내지르지 않았고 그저 눈가만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정수향은 그저 민여진이 고통을 참고 있는 줄로만 여기고 있었다. 의사가 병실을 나서자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며 민여진을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너무 아프면, 참지 말고 소리 질러도 돼. 그냥 울어도 괜찮고. 엄마 여기 있잖아.”민여진은 순간적으로 정수향의 옷자락을 꽉 움켜잡고 억눌려 있던 것을 토해내듯 울음을 터뜨렸다. 참을 수 없는 비참함을 토로해내는 울음소리였다. 그 소리에 정수향의 마음도 덩달아 아파왔다.“안 아파, 이제 안 아파. 우리 여진이 이제 안 아프다.”정수향은 민여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몸에서는 은은한 향기가 풍겼고, 목소리는 따뜻하고 다정했다. 정말 민여진의 기억 속에 살아있는 친엄마와 겹치는 것 같았다.매일 아이처럼 혼란스러워하며 세월을 보내던 민영미가 가끔씩 제정신일 때마다 민여진에게 말했다.“여진아, 미안해. 엄마 병 때문에, 너만 고생하네.”민여진의 얼굴은 이미 눈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 순간, 민여진은 간절히 바랐다.
정수향이 고개를 숙여 시간을 확인하더니 미간을 구기며 대답했다.“아홉 시 좀 넘었는데...”“열 사면, 가는 거죠? 맞죠?”정수향도 아쉽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녀는 민여진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민여진의 친엄마가 아니었고, 자신의 친딸은 자신을 필요로 했다.“응.”정수향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그래도 치료하러 가는 거잖아. 좋은 일이지, 뭐. 다음에 또 네 어릴 적 얘기 시작했을 때 기억 못 하면 곤란하지 않겠어?”민여진은 뒤늦게 입꼬리를 다시 올리며 눈을 감고 조용히 말했다.“엄마, 다시 한 번만... 여진아라고 불러줄 수 있어요?”정수향은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불렀다.“여진아?”민여진은 눈꼬리에 눈물을 매단 채 대답했다.“고마워요.”정수향은 갑자기 보이는 민여진의 눈물에 당황한 듯 손을 뻗어 닦아주었다.그렇게 정수향은 떠났다.민여진은 굳이 배웅해주지 않았다. 그 장면을 도저히 마주할 수 없었다.진실을 알기 전까지만 해도 그저 잠시 떨어져 있는 것이라고 굳게 믿어왔다. 더 좋은 다음 만남을 위한 희망이 담긴 이별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뜨거운 눈물을 머금어 왔다.하지만 이제는 알고 있다.이건 이별이 아니라 영원한 작별이었다.민여진은 멍한 표정으로 창가에 앉아 있었다. 얼굴은 차가운 바람을 맞아 무감각해졌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감이 오지 않았다. 그 순간, 문이 갑자기 열렸다. 박진성이 병실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민여진 홀로 창가에 있는 모습을 보자 박진성은 불만스럽다는 듯 외투를 벗었다.“환자가 창문을 열어두고 있으면 어떡해? 춥지도 않아?”박진성은 벗어둔 외투를 민여진의 몸에 둘러주며 자신의 체온으로 그녀를 녹여주었다. 이윽고 열려있던 창문이 다시 닫혔다.민여진의 시선은 여전히 창밖에 있었지만 사실 그녀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손목시계를 한 번 확인한 박진성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아주머님 열 시 비행기라던데, 왜 공항 배웅 안 갔어?”그는 민여진
민여진은 아무 대답 없이 그저 자신이 할 말만 이어나갔다.“넌 우리 엄마가 살던 집을 뺏었고, 이름도 없는 이상한 정신병원으로 보내버렸지. 그걸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 우리 엄마 그때 고작 마흔이었거든. 거기서 냄새나는 음식을 억지로 먹고, 구타당하고, 짓밟혔어. 네가 너무 잔인하게 굴어서 어쩔 수 없이 굴복했던 거야...”박진성의 동공이 거세게 흔들리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되물었다.“잠깐만! 그게 지금 무슨 소리야? 맞아. 네 말대로 집을 빼앗긴 했어. 그런데 정신병원으로 보내진 않았어. 난 절대 그런 적이 없어. 네가 뭘 착각한 거 아니야?”“착각했다고?”민여진의 눈에서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1년 전에 목격했던 그 장면은 민여진이 악몽 속에서 수도 없이 되새겼던 기억이었다. 자존심 하나로 살던 엄마가 민여진 때문에 병든 몸으로 알 수 없는 병원 안에서 짐승 취급을 받고 있었다.‘그런데 이제 와서 하는 한 마디가 겨우 착각이라니... 그 말 한마디면 이미 벌어진 일을 다시 수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모든 걸 되돌릴 수 있는 줄 아는 걸까?’민여진은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울먹이며 말했다.“그래. 내가 착각했나 봐. 내가 어떻게 기억하든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너는 안하무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니, 나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겠지. 네가 무슨 짓을 하든 네 기억에 없는 건 당연해.”“민여진!”박진성이 참다못해 소리쳤다. 그의 얼굴은 분노로 한껏 일그러져 있었다. 갑자기 변해버린 민여진의 모든 말투,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갑자기 무슨 짓이야? 내가 안 했다잖아. 안 했다면 안 한 거지, 왜 못 믿어? 내가 너한테 거짓말을 왜 하는데? 난 정신병원이고 뭐고 무슨 상황인지 도저히 모른다고!”“그럼 우리 엄마 지켜주겠다고 했던 건 뭐야?”민여진이 이성을 잃고 소리쳤다. 고개를 홱 돌리자 눈물로 범벅이 돼 잔뜩 일그러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표정은 고통과 절망에 찌들어 있었다.“네가 그
민여진은 웃으면서도 눈물을 흘렸다.“박진성, 넌 나를 완전히 바보 천치로 만들었어. 어땠어? 재밌었어? 네가 해주는 그 따뜻한 말 한마디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서툰 그 거짓말에 사정없이 휘둘리는 날 보면서 진짜 우스웠겠다?”“어제 오후에 말이야...”민여진의 목소리는 이미 잔뜩 갈라져 있었다.“너한텐 이제 나밖에 없다고 하지 않았어? 그때도 조롱이었지? 난 그 한 마디만 믿고 얼마나 감동 받았는데. 정말 바보처럼...”“아니야!”박진성은 고통으로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다급히 반박했다. 배에 힘이 들어가자 피가 울컥 쏟아져 나와 뜨거운 피가 손바닥을 흠뻑 적셨다.그는 두려웠다. 자신이 과다출혈도 죽는 것보다 민여진이 이대로 무너져 버릴까 봐 두려웠다.“그 말들은 전부 진심이었어... 여진아... 미안해...”이 순간, 박진성이 할 수 있는 말은 미안하다는 말뿐이었다.이대로 죽으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그에겐 누군가를 되살릴 능력 따윈 없었다복부에서는 피가 미친 듯이 흘러나왔지만 그 고통은 박진성의 이성까지 앗아가지 못했다.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다정하게 말했다.“내가 잘못했어. 전부 다... 미안해. 나도 일이 이렇게 틀어질 줄은 몰랐어. 내가 다 보상해줄게. 내가 다 책임지도 원하는 거 다 해줄게. 뭐든지, 정말이야. 응?”민여진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박진성을 바라보다가 다시 차갑게 웃음을 터뜨렸다.“박진성, 그거 알아? 네가 나한테 보여줬던 그 온기들 말이야. 난 거기에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 알아? 한편으로는 넘어갈까 봐 두려운데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런데 너는 다 알고 있었잖아. 네 다정함 밑에 숨겨져 있던 게 우리 엄마 죽음이었어. 이제 널 보면 그냥 역겨울뿐이야.”웃고 있던 민여진의 눈에서 증오가 타올랐다.“다시는 너 안 믿어. 넌 살인자야.”민여진은 박진성을 힘껏 밀쳤다. 차마 버티지 못한 박진성은 바닥에 힘없이 꿇어앉았다. 피가 천천히 흘러나와 땅바닥에 고였다.민여진은 광기 어린 눈빛으로 주위를 샅샅이
서원은 박진성의 뒤를 따라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숨이 멎었다.차가운 눈빛의 민여진, 그리고 입술이 창백해진 채 바닥에 무릎을 꿇고 복부를 감싸고 있는 박진성이 보였다.게다가 박진성의 손 사이로 붉은 피가 끊임없이 스며 나오고 있었다.“대표님!”서원은 다급히 뛰어갔다.그러나 그 순간 민여진이 손에 쥔 과일칼을 다시 치켜들며 박진성을 향해 돌진했다.“박진성, 넌 이제 지옥 가서 죗값이나 치러!”“민여진 씨!”서원이 외치며 재빨리 그녀를 저지했다. 손에 힘을 주어 칼을 쳐내자 그것이 바닥에 떨어지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민여진을 바라보았다.“대체 뭘 하려는 겁니까!”“뭘 하냐고요?”민여진은 고개를 젖히고 그를 올려다보았는데 얼굴에 증오와 눈물이 뒤섞여 있었다.“우리 엄마 대신 복수하는 거예요!”“진정하세요...”서원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고 다급히 박진성의 상태를 확인했다. 상처는 깊었고 흰 셔츠의 반이 피로 물들어 있는 데다가 그의 얼굴이 창백했다. 서원은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119에 전화를 걸었다.그러나 박진성은 이미 숨 쉬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고 침대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그리고 눈에 핏발이 선 채 울고 있는 민여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녀가 두 번째로 칼을 휘두를 때, 박진성은 그녀가 자신을 죽이려고 마음먹었다는 것을 확신했다.박진성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민여진, 미안해. 내가... 아주머니를 지켜주지 못했어.”민여진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고 눈물이 끝없이 쏟아졌지만 가슴은 오히려 무감각했다. 다만 후회가 온몸을 감쌌다.그녀는 두 눈을 감고 말했다.“박진성... 왜 내가 너와 엮였을까? 왜 하필 네 아내가 되어야 했을까... 난 내 인생만 망친 게 아니야. 우리 엄마까지 죽게 만들었어...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나는 도망쳤을 거야. 다시는... 널 만나지 않을 거야!”그녀의 단호한 말은 박진성의 가슴을 찔렀고 칼에 베인 상처보다 더 깊은 고통이 밀려왔다.
그 말이 떨어지자 서원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살인 미수라니요?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요?”경찰은 눈살을 찌푸렸다.“이 심각한 피 냄새를 맡고도 오해라고 하십니까? 그리고 밖에서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입까지 막을 수 있겠어요? 경고합니다. 경찰 수사를 방해하지 마세요. 민여진 씨는 범죄 혐의자이기 때문에 경찰서로 가서 조사를 받으셔야 합니다!”그렇게 말하며 경찰은 바닥에 앉아 있는 민여진을 바라보았는데, 그녀의 얼굴에 생긴 심각한 흉터를 보니 신고자의 진술과 일치했다. 그래서 더 이상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민여진 씨, 저희와 함께 가주시죠.”경찰들이 움직이려 하자 서원이 다급히 앞으로 나섰다.“경찰관님, 오해입니다! 정말 오해예요! 여기서 다친 사람이 있긴 하지만 절대 살인 미수 같은 건 아닙니다. 다친 분은 저 여성분의 남편이에요! 두 분은 부부 사이인데 어떻게 그게 살인 미수가 될 수 있겠어요? 믿기 어려우시면 대표님께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직접 설명을 들으시는 게 어떨까요?”하지만 경찰은 짜증이 난 듯 냉랭하게 말했다.“부부 사이에서도 살인 사건이 수없이 많이 발생합니다. 게다가 신고가 접수된 이상 조사를 해야 합니다.”서원이 다시 설명하려는 순간 민여진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섰다.“맞아요. 제가 찔렀어요. 데려가 주세요.”“민여진 씨!”서원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박진성이 아직도 응급 수술을 받고 있는데 그녀가 경찰서로 가 버리면 거기서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알 수 없었다.그러나 민여진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사람을 찔렀다면 죗값을 치러야죠. 안 그래요?”경찰은 그녀를 연행했고 서원은 도무지 어쩔 도리가 없었다.박진성과 연락을 시도하고 싶었지만 그는 여전히 수술 중이었다. 그래서 서원은 불에 던져진 개미처럼 안절부절못했다.그때 소식을 들은 박진성의 어머니가 병원에 도착했다.심장이 약한 이정화는 이미 두 번이나 실신했었는데 간신히 정신을 차린 그녀는 떨리는 손으
어떻게 대답할지 몰라 망설이던 민여진은 고개를 숙인 채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현준 오빠, 임재윤은 좋은 사람이에요. 저는 그를 한번 믿어보고 싶어요. 임재윤이 저를 해치지만 않는다면, 진짜 신분이 뭐든 상관없어요.”조현준은 할 말을 잃은 듯 한참 후에야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여진아, 이 결정을 후회하지 않길 바란다.”‘이 결정을 왜 후회할 거로 생각하는 거지?’민여진은 이유 모를 불안감에 사로잡혔지만, 조현준은 이미 전화를 끊은 후였다.그녀는 이 복잡한 감정이 조현준의 배려를 거절한 데서 오는 미안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침대에 앉아 멍하니 있던 그 순간, 문밖에서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민여진은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누구세요?”“민여진 씨, 저예요!”‘진시우?’흥분한 그의 목소리에 민여진은 당황하며 문을 열었다.“무슨 일이에요?”“임재윤한테 문제가 생겼대요. 지금 수술실로 들어갔다니까 우리 빨리 병원으로 가요.”민여진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앞을 볼 수 있는 상황이었어도 눈앞이 아득해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허둥지둥 탁자 위에 걸쳐둔 코트를 더듬어 입으며 물었다.“우리가 병원에서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잖아요. 갑자기 어떻게 된 거예요?”평소 유머러스하던 진시우의 목소리에도 긴장감에 섞여 있었다.“저도 자세한 건 모르겠어요. 하지만 임재윤의 병은 원래 갑작스러운 상황이 올 수도 있는 병이었어요. 병원에서는 지금 수술 중이라고만 알려줘서 일단 빨리 가봐야 할 것 같아요.”걸어서 갈 여유가 없던 두 사람은 즉시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응급실 복도에 도착하자, 임재윤은 아직 수술 중이었다.진시우는 민여진을 자리에 앉히고 의사를 찾아갔다. 막막함과 불안함에 민여진은 도저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 수술실 앞에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민여진은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 이상 없어 보이던 사람이 왜 갑자기 위중한 상태로 수술실까지 들어간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순간 손끝에서 차가움이 느껴지더니
민여진도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저도 같이 가도 될까요? 배가 조금 고파서 호텔 레스토랑에서 뭐라도 먹어야겠어요.”진시우는 거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민여진이 문 앞까지 걸어갔을 때, 뒤에서 휴대전화 소리가 전해졌다.“여진아, 얘기 좀 할까?”민여진은 깜짝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무슨 얘기?”임재윤은 눈썹을 찌푸리며 휴대전화를 두드렸다.“네가 알고 싶은 것들에 대해서.”“알고 싶은 게 없는데?”민여진은 자기 말이 너무 차갑게 들릴 것 같아 이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재윤아, 뭐 좀 먹으러 가는 거야. 곧 돌아올게. 그때 다시 얘기하자. 알았지?”임재윤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민여진은 진시우와 함께 병실을 나섰다.진시우는 무슨 재미있는 장면이라도 본 듯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내가 없는 사이에 분명히 무슨 일이 있었네요.”“별일 아니었어요. 그냥 대화를 조금 나눈 것뿐이에요.”민여진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말했다.“어서 가죠.”호텔 방으로 돌아오자, 서비스로 음식이 직접 배달되어 민여진은 레스토랑까지 내려갈 필요도 없었다. 진시우가 미리 말해둔 모양이었다.그녀는 조금씩 음식을 먹으며 생각에 잠겼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전화벨이 여러 번 울린 후였다. 급히 받아 들자, 조현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바빠? 왜 이렇게 전화를 늦게 받아?”“아니요. 휴대전화를 멀리 두고 다른 테이블에서 밥을 먹고 있었어요.”“그랬구나.”조현준은 잠시 침묵하더니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여진아, 그 일은 확인했어?”“무슨 일이요?”잠시 멈칫하던 민여진은 이내 무슨 일인지 알아차리고 말을 이었다. 임재윤의 신분에 관한 이야기였다.“네. 확인했어요. 임재윤은 원래 진씨 가문 운전기사의 아들이었대요. 선천성 심장병에 말도 못 하니까 자주 외출하지 못했던 거고, 나중에 치료를 위해 아버지와 함께 독엔에 갔대요. 아마 그래서 현준 오빠가 못 찾았나 봐요.”조현준은 긴 침묵 끝에 다시 물었다.“너는 그 말을 얼마나 믿어?”모든 걸
임재윤이 직접 말하지 않아도 민여진은 느낄 수 있었다. 평소 감정 기복이 거의 없던 임재윤이 여자 친구라는 말이 나오기 바쁘게 마치 다른 사람처럼 분위가 달라졌다.그 여자는 임재윤의 기분을 좌우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마음속에 중요한 존재인 것 같았다.민여진이 화제를 바꾸려는데 임재윤이 다시 물었다.“정말 궁금해?”“아니.”민여진은 얼른 부인했다. 처음엔 그냥 할 말이 없어서 꺼냈던 말이었고 더불어 임재윤이 왜 자신에게 그런 감정을 품게 되었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반응에 민여진은 자신이 선을 넘었음을 알아차렸다.임재윤은 민여진한테 다가가려다 멈춰서더니 고개를 숙이고 타자를 했다.“미안해. 많이 놀랐어? 나는 그냥 과거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서...”“괜찮아.”민여진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남이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함부로 꺼내는 걸 싫어하는 건 당연한 거야. 오히려 선은 내가 넘었으니까 사과해도 내가 해야지.”임재윤은 눈살을 찌푸렸다. 글을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더니, 오랜 침묵 끝에 타자했다.“넌 남이 아니야.”민여진은 미소를 지었다.“그래. 알았어. 너무 신경 쓰지 마. 누구나 털어놓기 싫은 비밀과 건드리면 안 되는 선이 있는 법이니까.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돼. 네 선을 알았으니까 두 번 다시 넘지 않을게.”그녀는 급히 소파에서 일어났다.“배 안고파? 간호사에게 음식을 언제 가져오는지 물어볼게. 금방 돌아올 테니까 잠깐만 있어.”병실 문을 나서는 민여진의 표정은 왠지 어두워 보였다. 정확한 이유가 뭔지도 모르게 마음이 불편했고 복잡했다.어쩌면 처음 느껴보는 임재윤의 냉담함 때문일 수도 있고, 그 여자가 임재윤의 아픔이었다는 진시우의 말 때문일 수도 있었다.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여자는 임재윤의 마음속에 중요한 사람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그럼... 나는 뭐지?’난데없이 튀어나온 생각에 민여진은 스스로에게 깜짝 놀라더니 마음을 다잡으며 중얼
임재윤은 민여진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물었다.“그냥 내가 아프기 때문이야? 만약 너 때문에 아픈 게 아니었다면, 아예 나를 보러 오지도 않았을 거야?”민여진이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다시 조용히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여진아, 인제 그만 돌아가. 진시우더러 돌아갈 차를 준비해달라고 할게. 지금쯤이면 안진 마을까지 가는 길도 뚫렸을 거야. 이모 집에서 편하게 지내. 병원에는 그만 오고.”“싫어.”민여진은 생각할 여유도 없이 말이 먼저 튀어 나갔다. 임재윤이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자, 민여진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을 이었다.“혼자 병실에 있으면 심심할 거 아니야. 게다가 수술 후 회복 기간도 긴데, 내가 옆에서 말동무가 되어주면 좋잖아.”민여진의 말에 임재윤은 천천히 타자했다.“괜찮아. 나는 늘 혼자였어. 이젠 익숙해.”늘 혼자였다는 임재윤의 말에 민여진은 문득 자신의 과거가 떠올랐다.감옥에서, 박진성의 별장에서, 도망치던 차 안에서조차 그녀는 언제나 혼자였다.고독을 즐기려고 노력했지만 항상 두려웠고, 언제라도 사라질지 모를 관심에 더욱 불안해했다.‘임재윤도 같은 마음이었을까? 고백할 때 우리가 같은 종류의 사람이라고 했던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을까?’“수술 끝날 때까지 기다릴게. 지금 돌아가도 신경 쓰여서 편하게 못 있어. 어쨌든 네가 아픈 건 나와 연관되어 있잖아. 무엇보다 지금은 네 곁을 지켜줄 사람이 필요하기도 하고.”민여진을 빤히 응시하던 임재윤은 그녀의 걱정과 고집에 표정이 차츰 누그러졌다.“여진아, 너 이렇게 착하면 누군가한테 이용만 당할 거야.”민여진이 웃으며 되물었다.“그럼 넌 나를 이용할 거야?”임재윤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답했다.“그럴 수도 있지.”예상치 못한 대답에 멈칫하던 민여진은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그때 휴대전화의 기계음이 다시 울려 퍼졌다.“나는 지금도 널 이용하고 있잖아. 내가 아픈 건 순전히 내 문제인데도 네 착한 마음을
‘마음속에 아직도 박진성이 있냐고?’민여진은 단지 자신이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박진성을 산 채로 가죽을 벗기고 뼈를 발라내고 싶었다.진시우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흐르고 분위기가 편안해지자 비로소 웃으며 말을 꺼냈다.“다행이네요. 난 임재윤이 마음에 다른 남자가 있는 여자와 함께하는 걸 원하지 않아요. 여진 씨가 박진성과 아무 관계도 없다면, 임재윤과 잘 시작해 봐요.”다시 임재윤의 이름이 나오자, 민여진은 표정이 달라졌다.“저와 임재윤은 아무런 사이도 아니에요.”“어떤 사이인지 여진 씨가 저보다 더 잘 알겠죠.”진시우는 잠시 멈추었다가 말을 이었다.“여진 씨가 임재윤의 신분에 대해 우려하고 있는 것도 알아요. 이해해요. 박진성 일 이후로 경계심을 갖는 건 당연하죠. 하지만 임재윤과 박진성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걸 여진 씨도 잘 알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임재윤은 절대 여진 씨를 다치게 하지 않아요. 임재윤이 이렇게까지 하는데 민여진 씨가 아직도 경계를 못 풀겠다면 대체 어떻게 증명해야 할까요? 그렇다고 마음을 꺼내 보여줄 수도 없는 일인데.”그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한 뒤, 민여진을 위해 마스크와 모자를 사러 갔다.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던 민여진은 진시우의 말이 계속 맴돌아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임재윤과 박진성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박진성은 차갑고 독단적이며, 항상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며 타인을 해치는 데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었다. 반면 임재윤은 부드럽고 세심한 사람이었다. 그는 모든 방면에서 민여진을 먼저 배려해 줬고, 아픈 몸으로도 민여진이 추울까 옷까지 벗어주는 사람이었다.성향이 이렇게나 상반된 두 사람인데, 왜 민여진은 자꾸만 임재윤이 박진성이라는 착각을 하고 의심하는 건지 본인조차 이해되지 않았다.‘나 왜 이러지? 박진성이 같은 병원에 있다는 말만 듣고 이렇게 의심하다니.’민여진은 머리가 아파 눈을 질끈 감았다. 이때 물건을 사
진시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민여진 씨를 위해 싫어하는 걸 참고 먹다니, 정말 진심으로 좋아하는 모양이네요.”예전이었다면 진시우의 말을 그저 농담으로 넘길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당황스럽기만 했다. 민여진은 한참 지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화제를 돌렸다.“진시우 씨, 임재윤하고 어릴 적부터 함께 지냈죠?”“네? 그렇다고도 할 수 없어요.”진시우는 과거를 회상하며 말했다.“재윤이가 한동안 독엔에 가 있어서 떨어져 지내다가 나중에야 다시 연락이 닿은 거예요. 왜요?”“궁금해서요. 임재윤 주변에는 여자가 별로 없었나요? 아니면...”아니면 어떻게 나 같은 사람에게 마음을 줄 수 있겠냐는 뜻이었다.진시우는 웃으며 말했다.“오해하고 있네요. 임재윤 주변에는 여자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임재윤을 좋아하는 여자도 적지 않았어요. 요즘 여자들은 차가운 이미지를 가진 남자를 좋아하잖아요. 임재윤은 말이 없으니까 딱 그런 이미지였고 성격도 세심하기까지 해서 더 인기가 많았죠. 예전에 사귀었던 여자 친구는...”진시우는 이 주제가 적절하지 않음을 깨달은 듯 급하게 화제를 바꾸었다.“어쨌든 외로워서 민여진 씨에게 관심을 가진 건 아니에요. 임재윤은 진심으로 민여진 씨를 좋아하는 거예요.”하지만 민여진은 다른 말이 더 궁금했다.“임재윤에게 여자 친구가 있었어요?”“네.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요.”“그 여자는 어떤 사람이었어요?”진시우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여진 씨, 제가 이 질문에 꼭 대답해야 하나요? 궁금하면 임재윤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어때요? 친구의 아픈 기억을 꺼내고 싶지 않아서요.”‘아픈 기억? 임재윤의 전 여자 친구는 그에게 아픔으로 남은 건가?’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민여진은 그 안에 수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음을 깨달았다.식사를 마치고 민여진은 진시우와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길을 가던 중, 민여진은 어제 박진성을 우연히 마주친 일이 떠올라 걸음을 멈췄다.“진시우 씨, 돈을 좀 빌려주실래요? 모자랑 마스크를 사려고요.
민여진의 얼굴을 본 문채연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여기 왜 나타난 거지? 누구 때문에 이 병원까지 온 거야?’답은 너무 뻔했다. 이제 겨우 박진성과의 관계가 돈독해지고 있는 시점에 민여진이 나타나자, 화가 치밀어 오른 문채연은 이를 악물었다.‘쓰레기 같은 년! 죽은 척 도망쳐놓고 이제 와서 후회라도 하는 거야? 다시 박진성 앞에 나타나서 그 사람 마음을 흔들어 놓을 생각이라면 꿈 깨! 일 초도 못 나타나게 할 거니까.’문채연의 눈에는 독기가 서렸다....민여진은 침대에 누웠지만 머릿속을 맴도는 의문에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임재윤이 어떻게 나를 좋아할 수 있지? 내가 뭐라고? 말을 못 하는 그와 같이 나도 앞을 못 보는 장애인이라서? 그런 거라면 너무 경솔한 결정 아닌가? 그리고 시각장애인도 많이 봤을 텐데 왜 하필...’어찌 되었든 민여진은 갑작스러운 그의 마음이 선뜻 받아들여 지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조현준도 그렇고 이제 민여진은 누구한테 마음을 줄 용기가 없었다.박진성이라는 사람 때문에 받았던 그 수많은 상처는 이미 그녀의 마음을 무너지게 했다.민여진은 억지로 눈을 감고 겨우 잠에 들었지만, 악몽을 꾸었다.병원에서 박진성을 마주치는 꿈이었다. 박진성은 그녀의 저항을 무시하고 사람들을 시켜 그녀를 묶은 채 양성으로 끌고 갔다.잠에서 깬 민여진은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박진성의 강압적인 태도와 차가운 얼굴이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정신을 차리자,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민여진이 문을 열자, 이번에는 직원이 아니라 진시우였다. 그는 웃으며 물었다.“민여진 씨, 혹시 제가 휴식을 방해한 건 아니죠?”“아니요. 방금 막 일어났는데, 마침 잘 왔어요.”“다행이네요. 같이 식사하러 갈래요? 병원도 가야 하고. 그런데 임재윤은 오늘 이상하게 문자를 여러 번 보내네요. 민여진 씨 상태를 계속 물어보던데, 혹시 싸우셨어요?”싸운 건 아니지만, 그것보다 더 어색한 상황이었다. 민여진은 설명하기 어려워 웃으며
임재윤의 말에 민여진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서 있었다.“뭐라고?”잘못 들은 줄 알고 되물었지만, 임재윤은 단호하게 대답했다.“너를 좋아해. 첫눈에 반했어.”임재윤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손가락을 움직였다.“사실 병이 발작하지 않았다면 엊그제쯤에 이미 말했을 거야. 그때 너랑 만나자고 약속했던 이유가 널 좋아한다고 고백할 생각이었거든.”“나를 왜?”민여진은 머리가 멍해졌다.‘임재윤이 나를 좋아한다고? 어떻게? 이게 말이 돼?’“왜라니?”임재윤은 담담한 표정으로 반문했다.“너를 처음 본 순간부터 너여야만 한다는 느낌이 들었어. 이건 지난 20여 년 동안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야. 아마 이런 걸 첫눈에 반했다고 하겠지?”민여진은 주체할 수 없이 빨리 뛰는 심장에 호흡이 거칠어졌다.‘임재윤이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고? 너무 터무니없는 말이잖아.’“이런 내 모습에 반했다고? 너 같은 조건이면 더 좋은 여자를 만날 수도 있잖아.”“외모만으로 첫눈에 반했다면, 그건 첫눈에 반했다는 말을 모욕하는 거야.”임재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타자를 이었다.“널 처음 본 순간 그런 느낌이 들었어. 어쩌면 우린 같은 종류의 사람이겠구나. 교회에서 마주쳤을 때부터 줄곧 너를 지켜봤거든. 주변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는 네 모습이 좋았고 그럼에도 반짝반짝 빛나는 네가 예뻐 보였어.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내 시선은 온통 너한테 가 있더라. 여진아, 만약 네가 앞이 안 보이고 내가 말을 못하는 게 하늘이 정해준 거라면, 하늘은 아마도 나를 네 눈이 되게 하고 너를 내 목소리가 되게 하려고 그랬던 게 아닐까? 우린 아마 천생연분일지도 몰라.”차가운 기계음이 내뱉은 그 말은 왠지 모르게 뜨겁게 전해져 민여진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그녀는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임재윤, 농담하지 마.”임재윤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민여진이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 앞에 다가갔다. 뜨거운 그의 입술이 그녀의 얼굴
“넌 안 피곤해?”“아까 푹 쉬어서 괜찮아.”임재윤은 무언가 말하려다 멈추고는 간단히 알겠다고 답한 뒤 침대에 누웠다.이어서 민여진은 불을 껐고 깊은 밤이 되자, 병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민여진은 임재윤의 호흡이 평온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가 깊이 잠든 걸 확인하고 소파에서 일어나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방 안은 캄캄했지만, 그녀에게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던지라 호흡소리만으로도 임재윤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정신을 가다듬은 민여진은 임재윤한테 다가가 조용히 손을 뻗어 손끝으로 천천히 그의 눈썹과 눈을 쓰다듬었다.그녀는 조금씩 조금씩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만져봤다. 넓은 이마, 높고 곧은 코.민여진이 눈을 뜬 채 손가락을 입술 근처까지 가져가려던 찰나 임재윤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어둠 속에서 민여진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임재윤의 시선이 느껴졌다.손에 힘을 주던 임재윤은 민여진임을 알아차리고는 이내 힘을 풀더니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바닥에 글자를 썼다.[뭐 하는 거야?]민여진은 호흡을 가다듬었지만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임재윤, 너 도대체 누구야?”그녀는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임재윤은 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휴대전화를 꺼내 물었다.“여진아, 그게 지금 무슨 말이야?”민여진은 더 이상 속아 넘어가지 않으려는 듯 마음을 다잡으며 차분하게 말했다.“현준 오빠가 지금 동진에 있어. 오빠한테 너에 대해서 조사를 좀 해달라고 부탁했었거든. 그런데 동진에는 임재윤이라는 사람이 없대. 그러니까 너 대체 누구냐고.”임재윤은 한참 침묵하다 다시 타자를 했다.“조현준의 말은 믿으면서 나는 안 믿는구나.”“너를 어떻게 믿어?”민여진은 혼란스러웠다.“임재윤, 난 너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 신분이 뭔지, 집은 어디인지, 가족은 몇 명인지 심지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몰라.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건, 나 같은 여자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거야. 다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