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역겹다고 느끼는 건 민여진이었다.아침부터 느껴지는 박진성의 숨결과 그의 몸에서 나는 은은한 향기에 민여진은 자신도 몰래 결혼 초기를 떠올리게 되었다.그때가 너무 황홀했어서 지금의 민여진은 더욱더 화가 났다.모든 걸 멈춘 당사자이면서 늘 이러한 야비한 수법으로 자신을 손아귀에 쥐고 흔들려는 박진성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다행히도 이번에는 그가 별말 없이 침대에서 내려가 줘 한시름 놓으려던 찰나, 박진성이 갑자기 이불을 들추더니 민여진의 옷을 벗겨내기 시작했다.몸에서 느껴지는 한기에 깜짝 놀란 민여진은 황급히 가슴을 가리며 소리쳤다.“지금 뭐 하는 짓이야!”이미 이렇게 망가졌는데도 왜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 건지, 갈비뼈라도 한 번 더 부러져줘야 그만둘 건지 민여진은 이 상황이 괴롭기만 했다.“그만해! 내 몸에 손대지 마!”창백해진 얼굴로 박진성을 밀어내려 손을 휘젓던 민여진은 느껴지는 고통에 금세 눈시울이 빨개졌다.아파서 몸부림치는 민여진을 보자마자 박진성은 그녀의 두 팔을 잡아 주며 소리쳤다.“너 미쳤어?! 그렇게 움직이면 안 된다는 거 몰라? 그리고 누가 널 만진다고 그래? 그냥 네 몸 좀 닦아주려는 것뿐이야.”자신의 몸을 가려주던 옷이 사라지자 눈은 안 보이지만 지금 자신의 상태가 어떤지 짐작은 갔기에 민여진은 빨개진 얼굴로 말했다.“필요 없어! 간병인 놔두고 왜 당신이 그런 일을 해? 정 안되면 간호사한테 부탁해도 되잖아. 당신이 해주는 건 죽어도 싫어!”“이제야 간병인을 찾는 거야? 그리고 간호사들은 바쁘거든.”사실 박진성이 굳이 직접 민여진의 몸을 닦아주려는 이유는 그녀의 몸을 다른 이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였다.그게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나는 뭐 좋아서 이러는 줄 알아? 내 손은 억 단위 계약서만 작성하는 손이야. 그런 내가 직접 해준다는 데 왜 싫다는 거야? 그리고 어차피 난 이미 네 몸 다 봤어. 네 몸에 내 손이 안 닿은 곳은 없다고.”치욕스러움에 입술을 떨던 민여진은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박진성은 그
박진성의 모든 말이 어이없게 느껴진 민여진은 정말 포기한 듯 말했다.“내가 문채연을 몰아간다고 느꼈으면 그냥 그런 거니까 이만 나가줘. 나 피곤해.”또 이러는 민여진에 박진성도 화가 났다.아무 증거도 없는 상황에서 자신이 가장 아끼는 문채연을 따로 불러 묻기까지 하며 그녀를 의심했는데 민여진은 여기서 뭘 더 바라는 걸까.“민여진, 선 넘지 마. 네가 목소리를 잃을 뻔한 건 내 불찰이야. 그러니까 그냥 내 탓만 해. 괜히 채연이한테 화살 돌리지 말고.”그 말에 민여진은 마침내 웃음을 터뜨렸다.눈이 멀어버린 민여진은 이제 그 누구도 원망할 수가 없었다.박진성을 상대하는 게 귀찮았던 그녀는 이불을 덮어쓰고 눈을 감았다.매번 자신만 전전긍긍하는 것 같아 화가 난 박진성도 그 길로 병실을 나가버렸고 이렇게 감정 기복이 심한 상사를 보며 서원은 한 번 더 당황했다.민여진이 나타난 이후로 박진성의 심경에도 많은 변화가 생긴 것 같았다.그 뒤로 한동안 박진성은 민여진의 병실을 찾지 않았고 그저 간병인만 붙여줬다.시답잖은 가십거리를 얘기하며 말동무를 해주던 간병인은 박진성의 근황도 종종 전하고 있었다.그가 문채연과 함께 자선 파티에 참석한 것부터 출장 간 것까지, 모든 상황에 문채연을 달고 다닌다고 알려주었다.별로 궁금하지 않은 근황이 자꾸만 들리자 민여진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그 사람 일은 굳이 안 알려줘도 돼요.”민여진의 차가운 태도에 언짢아진 간병인은 물을 뜨러 간다는 핑계를 대며 자리를 떴다.아마도 눈먼 민여진이 성격도 굽힐 줄 모르니 화가 난 모양이었다.피곤함에 눈은 감았지만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잠에 들지 못하고 있을 때, 누군가 민여진의 병실 문을 열어젖혔다.하이힐 소리가 또각또각 울리자 입구 쪽을 바라보던 민여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문채연?”제법 잘 맞추는 민여진에 문채연도 숨기지 않고 웃음을 흘렸다.“그래, 나야. 진성 씨가 두 달 동안 너를 신경도 안 쓰니까 하도 불쌍해서 내가 한 번 보러 와봤어. 좀 지낼만해?”자신
“당연히 네가 거슬려서지. 네가 우리 사랑에 자꾸만 훼방을 놓잖아.”“하지만 진성 씨가 아끼는 건 나야. 내가 싫다니까 너 혼자만 여기 남겨두고 나랑 같이 여행도 가주잖아. 매일 밤 진성 씨랑 한방에서 잘 수 있어서 난 너무 좋아.”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며 웃는 문채연에 민여진은 가슴이 찢기듯 아파왔다.박진성 대한 마음은 진작에 내려놓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감정도 다 함께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박진성의 무정함은 갈수록 더해졌고 그럴 때마다 민여진의 가슴도 아파왔다.“너랑 박진성이 서로 사랑한다는 걸 자랑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당연히 아니지. 나랑 진성 씨가 서로 사랑하는 걸 굳이 너한테 자랑할 이유는 없잖아? 내가 여기에 온 건 너한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서야.”“너 아직 진성 씨랑 이혼 안 했다며? 그때는 감옥 들어가느라 시간 끌었지만 2달 전에 진성 씨가 이미 나한테 약속했어. 너 퇴원하는 날 바로 이혼할 거라고. 그리고 나랑 다시 결혼할 거라고.”그 말을 들은 민여진은 이불을 꽉 잡아 쥐었지만 얼굴에는 큰 표정 변화가 없었다.“그래? 축하해. 그럼 앞으로 남편 관리 좀 잘해줘. 이상한 소유욕 나한테 안 쏟게.”민여진의 말이 끝나자 문채연은 얼굴에 있던 웃음기를 싹 거두며 표독스러운 눈을 하고 말했다.“그렇게 우쭐거릴 필요 없어. 진성 씨가 널 통제하려 드는 건 그저 네가 개 같아서야. 오랫동안 키우던 개를 다시 찾았으니 그동안 참아왔던 게 터질 수 있지. 진성 씨가 너를 질려 하면 그땐 네 인생이 더욱더 비참해질 거야.”민여진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비참할 리가, 박진성이 자신을 질려 하면 그때에야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건데.그게 지금보다는 백배, 천 배 더 나을 것 같았다.“만약 평생 안 질리면 어쩔 거야? 그럼 네 남편이 나까지 챙기는 걸 지켜봐야겠네?”“너!”민여진은 도발하려고 한 말이겠지만 문채연은 정말 거기까지 생각한 적이 있었기에 더 화가 났다.민여진을 다른 곳으로 보내자는 말만 꺼내면 자꾸만 회피하
“쟤는 신경 쓰지 마, 잘해줘봤자 고마운 줄도 모르니까. 그냥 너만 짜증 날 뿐이야.”“저녁에 집 갈 거니까 넌 먼저 가 있어.”문채연이 쑥스러워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민여진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박진성, 나 퇴원하는 날에 맞춰서 이혼하려 했다는 거 사실이야?”그 말을 들은 박진성은 바로 표정을 굳히고 문채연을 바라보았다.“그냥 언질만 해주려던 거였어요. 정말 다른 뜻은 없어요.”그녀의 말에 답을 하지 않은 박진성은 민여진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차가운 말을 내뱉었다.“사실이면 뭐? 어차피 난 너 안 사랑해. 그런데도 우리가 법적으로 부부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까?”2년 전에 들었다면 민여진을 한참 동안 눈물짓게 했을 말이지만 지금의 민여진은 저런 말을 들어도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이미 박진성한테 너무나도 많은 상처를 받아 마음이 재투성이가 돼버렸기 때문이다.“그럴 이유는 없지. 당연히 이혼할 거야. 단 조건이 하나 있어.”안 본 사이에 간이 더 부어올랐는지 고개를 들며 당당히 말하는 민여진에 박진성은 미간을 찌푸렸다.하지만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다.아니, 민여진이 조건을 들먹이면서 이혼을 막으려 한다는 생각에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조건? 민여진, 네가 뭐라고 감히 조건을 내걸어? 뭐 위자료라도 부르려고? 네가 얼마를 불러도 난 이혼할 거야.”하지만 박진성은 그런 마음을 티 내지 않고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코웃음을 쳤다.“채연이를 위해서라도 난 너랑 이혼해야 돼.”그 말에 문채연은 눈에 띄게 기뻐했지만 민여진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문채연 씨를 위하든 안 위하든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고 내가 원하는 건 하나뿐이야. 엄마를 직접 만나야겠어. 그렇게만 해주면 바로 이혼할게.”“뭐?”당황하는 박진성에 민여진은 두 주먹을 말아쥐고 아까 문채연이 했던 말을 곱씹으며 물었다.“아까 채연 씨가 나한테 정신 차리라고 그러더라. 안 그러면 우리 엄마처럼 만들어주겠다고. 그런데 우리 엄마는 당신이 해외로 보내서 치료받는 중
박진성의 따가운 눈초리에 문채연은 억지로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해외에 있는 엄마를 어떻게 만나냐는 뜻이었어요. 그렇게 빨리 오갈 순 없으니까요.”“그래?”마침내 안도한 민여진은 긴장이 풀어졌는지 그제야 자신의 손가락이 떨리고 있음을 알아챘다.하지만 불안감이 해소됐으니 그걸로 충분했다.“아무튼 난 우리 엄마만 보면 이혼할 거야. 박씨 집안 사모님 자리에는 관심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자신의 가정을 풍비박산 낸 박씨 집안 사모님 자리에 더 이상 남은 미련이 있을 리가 없어서 민여진은 말하면서도 우스웠는지 입꼬리를 올렸다.“엄마만 만나게 해주면 누가 말하지 않아도 내가 직접 법원 가서 이혼서류 제출할 거야.”“나중에 얘기하자. 채연아, 넌 내가 데려다줄게.”박진성이 짜증 난다는 듯 문을 열었고 나가자 문채연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진성 씨...”“설명해.”발걸음을 멈추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박진성이 풍기는 위압감에 문채연은 눈시울을 붉힌 채 말했다.“설마 민여진 씨 말 믿는 거예요? 여진 씨를 여진 씨 엄마처럼 만들겠다니, 내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하겠어요? 여진 씨는 지금 날 모함하고 있는 거라고요!”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박진성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며 말했다.“그럼 얘기가 어떻게 흘러갔길래 민영미까지 언급한 거야?”“그건! 그건...”빠르게 변명거리를 찾아낸 문채연이 눈에 눈물을 매달았다.“여진 씨가 당신이랑 이혼하면 더 이상 남은 가족도 없으니까 그게 안타까워서 한마디 한 거죠. 반응이 저렇게 클 줄은 나도 몰랐어요.”“민영미 씨 죽은 지가 언젠데 설마 진짜 몰랐겠어요? 딱 봐도 당신이랑 이혼하기 싫어서 거짓말하는 거죠...”문채연이 나지막하게 투정을 부렸지만 민여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박진성은 그녀가 정말 몰랐다고 확신하고 있었다.만약 민영미의 죽음을 진작 알았다면 혼자 속으로 삼켜낼 사람이지 이렇게 입 밖으로까지 꺼내며 오바할 사람이 아니었다.민영미의 죽음을 이미 다 알고 1년
서원을 시켜 문채연을 데려다주게 한 박진성이 병실 안으로 들어가자 민여진은 넋이 나간 채 아까 그 자세 그대로 앉아있었다.인기척을 느낀 건지 가만히 있던 그녀가 갑자기 조급해하며 물었다.“우리 엄마는 언제 만날 수 있는 거야? 진짜... 보고 싶어.”민여진 역시 이런 모습으로는 엄마를 만나고 싶지 않았기에 전에는 잘 참아왔었는데 문채연의 말을 들은 뒤로 이상하게 마음이 불안해져 엄마를 실제로 만나야만 진정될 것 같았다.“말했잖아, 해외에서 치료 중이라 보려면 시간 조절도 해야 한다고. 해외에서 사람 데려오는 게 그렇게 쉬운 줄 알았어?”자신의 마음과 다른 말을 하느라 박진성의 말투도 자연스레 퉁명스러워졌다.그의 언짢음을 느낀 민여진은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한층 더 부드러워진 눈을 하고 말했다.“당신이랑 이혼하지 않겠다는 게 아니야. 그냥 당신이 나랑 우리 엄마 못 만나게 하는 걸까 봐 그래. 엄마만 보면 바로 이혼할 거야. 사모님 자리 욕심도 안 나.”박진성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면 엄마를 하루라도 더 빨리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러는지 민여진의 말투는 나긋나긋했지만 말의 내용은 박진성의 화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가자.”하지만 그는 손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주먹만 쥘 뿐 그 화를 표출하지는 않았다.3개월 동안 쉬면서 몸을 많이 회복한 민여진은 별 어려움 없이 침대에서 내려와 신발을 신었다.그리고도 박진성에게 도움을 청하기 싫어 혼자 더듬거리며 입구로 향하고 있었는데 그게 또 짜증 난 박진성은 민여진의 손을 낚아채고 당황스러워하는 그녀를 또 한 번 비아냥거렸다.“너한테 무슨 감정이 남은 게 아니라 그냥 눈먼 애 때문에 괜한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거야.”“알아.”말끝마다 비웃는 사람에게 감정 따위가 있을 리 없음을 민여진도 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그저 웃음을 지어 보였다.그들이 엘리베이터 올라타자 많은 사람들이 이상한 눈길을 보내왔다.아마도 포지션이 뒤바뀐 미녀와 야수를 보니 당황스러워하는 것 같았다.게다
계단을 더듬으며 올라간 민여진이 박진성 방문을 열자 큰 손 하나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더니 순식간에 그녀를 푹신한 침대에 눕혔다.강한 입맞춤을 하며 자신의 옷을 벗기는 남자의 손길에 처음에는 당황하고만 있던 민여진이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싫어! 만지지 마!”“만지지 말라고?”하지만 힘을 주어 그녀의 턱을 잡아 올린 박진성은 민여진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며 말했다.“내가 왜 만지지 말아야 하는데? 이유라도 하나 말해봐. 나랑 이혼 안 하면 부부로서의 의무는 이행해야지.”“이혼을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 엄마를 보고 싶다는 거야. 엄마만 보면 바로 이혼해줄게. 진짜야.”“그 입 다물어.”민여진의 해명에도 박진성의 화는 풀릴 줄을 몰랐다.당장이라도 이혼하겠다는 그녀의 말이 오히려 더 귀에 거슬렸다.“똑같은 핑계를 뭐 두 번씩이나 대. 네가 뭘 원하는 지는 내가 더 잘 알아.”민여진이 원하는 건 언제나 도망이었다.그녀의 향기를 느끼기 위해 다가오던 박진성이 입술을 가져다 대자 민여진은 발작 버튼이 눌린 사람마냥 치를 떨었다.“저녁에 문채연 보러 간다고 약속한 거 아니었어? 걔랑 자 그냥. 부부의 의무 따위는 중요하지 않잖아. 다들 둘이 천생연분이라고 생각하는데 왜 걔가 아닌 나한테 와서 이러는 거야!”진심을 다해 자신을 밀어내는 민여진에 박진성은 자연스레 아까 병원 앞에서의 장면을 떠올렸다.다른 남자 옆에 앉는 한이 있어도 자신의 곁엔 절대 앉지 않으려 하는 모습.자신이 문채연과 자는 것을 정말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은 민여진의 모습에 박진성은 점점 가슴이 답답해졌다.“우리 아직 이혼도 안 했는데 내가 채연이랑 자면 다들 걔한테 뭐라고 하겠어? 걔한테 그런 오명이라도 씌우고 싶은 거야? 난 그렇게는 안 놔둬. 너 같은 애랑 자는 건 채연이도 별로 신경 안 쓸걸.”얼마 뒤, 문채연에게서 전화가 걸려와서야 박진성은 간신히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진성 씨, 언제 와요? 당신이 좋아하는 와인도 사 오라고 했는데, 음식도 한
“말하지 마요! 그냥 말 안 하고 사다주기만 하면 돼요.”낯빛이 창백해진 채 입술을 깨물며 말하는 민여진을 거절하기가 힘들어 일단 알겠다고는 했지만 서원은 결국 박진성에게 이 일을 보고했다.“대표님, 사드릴까요?”한참 동안 침묵을 유지하던 박진성이 분노 어린 말투로 대답했다.“사, 대신 피임과 관련된 건 일절 사지 말고 그냥 같은 크기의 영양제만 사다 줘.”전화를 끊은 서원은 박진성이 설마 민여진을 임신시키려는가 싶어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있었다.그리고 마침내 그렇다고 확신한 그는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이 상사의 말대로 민여진에게 영양제만 사다 주었다.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민여진은 고맙다며 그걸 받아먹고는 그제야 안심하며 잠자리에 들었다.잠이 든 민여진은 꿈속에서 해외에서 돌아온 엄마를 보았다.정상적인 사람처럼 말도 잘하는 엄마를 꿈에서라도 보니 기분이 좋은지 민여진은 오랜만에 웃으며 잠에서 깼다.마치 어둠 속에 한줄기 찬란한 햇살이 깃든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그 뒤로 며칠이 지나도록 박진성은 별장을 찾지 않았다.자신은 그저 도구일 뿐이니 당연히 문채연이랑 함께 있겠지만 박진성이 오지 않으니 엄마의 소식을 알려줄 사람도 없어 민여진은 답답한 마음에 밥도 제대로 넘기지 못했다.그러다 참다못한 어느 날, 그녀는 또 서원에게 부탁했다.“혹시 핸드폰 잠깐 빌릴 수 있을까요? 진성 씨한테 전화하려고요.”“네.”서원은 친절하게 다이얼까지 눌러준 핸드폰을 민여진 귓가에 가져다 댔다.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가 통했고 수화기 너머로 문채연의 웃음소리와 박진성에게 나쁘다며 투정을 부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함께 흘러나왔다.“왜 말을 안 해?”한참이 지나서야 들리는 박진성의 목소리에 민여진은 깊은숨을 들이마셨다.“나야.”“네가 왜 서원이 핸드폰으로 전화해?”자신의 핸드폰을 뺏어간 장본인이 저런 질문을 하는 게 어이가 없었던 민여진은 언짢은 듯한 그의 말투에 씁쓸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오늘 시간 있어? 한번 와줄 수
어떻게 대답할지 몰라 망설이던 민여진은 고개를 숙인 채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현준 오빠, 임재윤은 좋은 사람이에요. 저는 그를 한번 믿어보고 싶어요. 임재윤이 저를 해치지만 않는다면, 진짜 신분이 뭐든 상관없어요.”조현준은 할 말을 잃은 듯 한참 후에야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여진아, 이 결정을 후회하지 않길 바란다.”‘이 결정을 왜 후회할 거로 생각하는 거지?’민여진은 이유 모를 불안감에 사로잡혔지만, 조현준은 이미 전화를 끊은 후였다.그녀는 이 복잡한 감정이 조현준의 배려를 거절한 데서 오는 미안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침대에 앉아 멍하니 있던 그 순간, 문밖에서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민여진은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누구세요?”“민여진 씨, 저예요!”‘진시우?’흥분한 그의 목소리에 민여진은 당황하며 문을 열었다.“무슨 일이에요?”“임재윤한테 문제가 생겼대요. 지금 수술실로 들어갔다니까 우리 빨리 병원으로 가요.”민여진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앞을 볼 수 있는 상황이었어도 눈앞이 아득해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허둥지둥 탁자 위에 걸쳐둔 코트를 더듬어 입으며 물었다.“우리가 병원에서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잖아요. 갑자기 어떻게 된 거예요?”평소 유머러스하던 진시우의 목소리에도 긴장감에 섞여 있었다.“저도 자세한 건 모르겠어요. 하지만 임재윤의 병은 원래 갑작스러운 상황이 올 수도 있는 병이었어요. 병원에서는 지금 수술 중이라고만 알려줘서 일단 빨리 가봐야 할 것 같아요.”걸어서 갈 여유가 없던 두 사람은 즉시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응급실 복도에 도착하자, 임재윤은 아직 수술 중이었다.진시우는 민여진을 자리에 앉히고 의사를 찾아갔다. 막막함과 불안함에 민여진은 도저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 수술실 앞에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민여진은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 이상 없어 보이던 사람이 왜 갑자기 위중한 상태로 수술실까지 들어간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순간 손끝에서 차가움이 느껴지더니
민여진도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저도 같이 가도 될까요? 배가 조금 고파서 호텔 레스토랑에서 뭐라도 먹어야겠어요.”진시우는 거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민여진이 문 앞까지 걸어갔을 때, 뒤에서 휴대전화 소리가 전해졌다.“여진아, 얘기 좀 할까?”민여진은 깜짝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무슨 얘기?”임재윤은 눈썹을 찌푸리며 휴대전화를 두드렸다.“네가 알고 싶은 것들에 대해서.”“알고 싶은 게 없는데?”민여진은 자기 말이 너무 차갑게 들릴 것 같아 이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재윤아, 뭐 좀 먹으러 가는 거야. 곧 돌아올게. 그때 다시 얘기하자. 알았지?”임재윤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민여진은 진시우와 함께 병실을 나섰다.진시우는 무슨 재미있는 장면이라도 본 듯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내가 없는 사이에 분명히 무슨 일이 있었네요.”“별일 아니었어요. 그냥 대화를 조금 나눈 것뿐이에요.”민여진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말했다.“어서 가죠.”호텔 방으로 돌아오자, 서비스로 음식이 직접 배달되어 민여진은 레스토랑까지 내려갈 필요도 없었다. 진시우가 미리 말해둔 모양이었다.그녀는 조금씩 음식을 먹으며 생각에 잠겼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전화벨이 여러 번 울린 후였다. 급히 받아 들자, 조현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바빠? 왜 이렇게 전화를 늦게 받아?”“아니요. 휴대전화를 멀리 두고 다른 테이블에서 밥을 먹고 있었어요.”“그랬구나.”조현준은 잠시 침묵하더니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여진아, 그 일은 확인했어?”“무슨 일이요?”잠시 멈칫하던 민여진은 이내 무슨 일인지 알아차리고 말을 이었다. 임재윤의 신분에 관한 이야기였다.“네. 확인했어요. 임재윤은 원래 진씨 가문 운전기사의 아들이었대요. 선천성 심장병에 말도 못 하니까 자주 외출하지 못했던 거고, 나중에 치료를 위해 아버지와 함께 독엔에 갔대요. 아마 그래서 현준 오빠가 못 찾았나 봐요.”조현준은 긴 침묵 끝에 다시 물었다.“너는 그 말을 얼마나 믿어?”모든 걸
임재윤이 직접 말하지 않아도 민여진은 느낄 수 있었다. 평소 감정 기복이 거의 없던 임재윤이 여자 친구라는 말이 나오기 바쁘게 마치 다른 사람처럼 분위가 달라졌다.그 여자는 임재윤의 기분을 좌우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마음속에 중요한 존재인 것 같았다.민여진이 화제를 바꾸려는데 임재윤이 다시 물었다.“정말 궁금해?”“아니.”민여진은 얼른 부인했다. 처음엔 그냥 할 말이 없어서 꺼냈던 말이었고 더불어 임재윤이 왜 자신에게 그런 감정을 품게 되었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반응에 민여진은 자신이 선을 넘었음을 알아차렸다.임재윤은 민여진한테 다가가려다 멈춰서더니 고개를 숙이고 타자를 했다.“미안해. 많이 놀랐어? 나는 그냥 과거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서...”“괜찮아.”민여진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남이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함부로 꺼내는 걸 싫어하는 건 당연한 거야. 오히려 선은 내가 넘었으니까 사과해도 내가 해야지.”임재윤은 눈살을 찌푸렸다. 글을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더니, 오랜 침묵 끝에 타자했다.“넌 남이 아니야.”민여진은 미소를 지었다.“그래. 알았어. 너무 신경 쓰지 마. 누구나 털어놓기 싫은 비밀과 건드리면 안 되는 선이 있는 법이니까.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돼. 네 선을 알았으니까 두 번 다시 넘지 않을게.”그녀는 급히 소파에서 일어났다.“배 안고파? 간호사에게 음식을 언제 가져오는지 물어볼게. 금방 돌아올 테니까 잠깐만 있어.”병실 문을 나서는 민여진의 표정은 왠지 어두워 보였다. 정확한 이유가 뭔지도 모르게 마음이 불편했고 복잡했다.어쩌면 처음 느껴보는 임재윤의 냉담함 때문일 수도 있고, 그 여자가 임재윤의 아픔이었다는 진시우의 말 때문일 수도 있었다.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여자는 임재윤의 마음속에 중요한 사람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그럼... 나는 뭐지?’난데없이 튀어나온 생각에 민여진은 스스로에게 깜짝 놀라더니 마음을 다잡으며 중얼
임재윤은 민여진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물었다.“그냥 내가 아프기 때문이야? 만약 너 때문에 아픈 게 아니었다면, 아예 나를 보러 오지도 않았을 거야?”민여진이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다시 조용히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여진아, 인제 그만 돌아가. 진시우더러 돌아갈 차를 준비해달라고 할게. 지금쯤이면 안진 마을까지 가는 길도 뚫렸을 거야. 이모 집에서 편하게 지내. 병원에는 그만 오고.”“싫어.”민여진은 생각할 여유도 없이 말이 먼저 튀어 나갔다. 임재윤이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자, 민여진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을 이었다.“혼자 병실에 있으면 심심할 거 아니야. 게다가 수술 후 회복 기간도 긴데, 내가 옆에서 말동무가 되어주면 좋잖아.”민여진의 말에 임재윤은 천천히 타자했다.“괜찮아. 나는 늘 혼자였어. 이젠 익숙해.”늘 혼자였다는 임재윤의 말에 민여진은 문득 자신의 과거가 떠올랐다.감옥에서, 박진성의 별장에서, 도망치던 차 안에서조차 그녀는 언제나 혼자였다.고독을 즐기려고 노력했지만 항상 두려웠고, 언제라도 사라질지 모를 관심에 더욱 불안해했다.‘임재윤도 같은 마음이었을까? 고백할 때 우리가 같은 종류의 사람이라고 했던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을까?’“수술 끝날 때까지 기다릴게. 지금 돌아가도 신경 쓰여서 편하게 못 있어. 어쨌든 네가 아픈 건 나와 연관되어 있잖아. 무엇보다 지금은 네 곁을 지켜줄 사람이 필요하기도 하고.”민여진을 빤히 응시하던 임재윤은 그녀의 걱정과 고집에 표정이 차츰 누그러졌다.“여진아, 너 이렇게 착하면 누군가한테 이용만 당할 거야.”민여진이 웃으며 되물었다.“그럼 넌 나를 이용할 거야?”임재윤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답했다.“그럴 수도 있지.”예상치 못한 대답에 멈칫하던 민여진은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그때 휴대전화의 기계음이 다시 울려 퍼졌다.“나는 지금도 널 이용하고 있잖아. 내가 아픈 건 순전히 내 문제인데도 네 착한 마음을
‘마음속에 아직도 박진성이 있냐고?’민여진은 단지 자신이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박진성을 산 채로 가죽을 벗기고 뼈를 발라내고 싶었다.진시우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흐르고 분위기가 편안해지자 비로소 웃으며 말을 꺼냈다.“다행이네요. 난 임재윤이 마음에 다른 남자가 있는 여자와 함께하는 걸 원하지 않아요. 여진 씨가 박진성과 아무 관계도 없다면, 임재윤과 잘 시작해 봐요.”다시 임재윤의 이름이 나오자, 민여진은 표정이 달라졌다.“저와 임재윤은 아무런 사이도 아니에요.”“어떤 사이인지 여진 씨가 저보다 더 잘 알겠죠.”진시우는 잠시 멈추었다가 말을 이었다.“여진 씨가 임재윤의 신분에 대해 우려하고 있는 것도 알아요. 이해해요. 박진성 일 이후로 경계심을 갖는 건 당연하죠. 하지만 임재윤과 박진성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걸 여진 씨도 잘 알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임재윤은 절대 여진 씨를 다치게 하지 않아요. 임재윤이 이렇게까지 하는데 민여진 씨가 아직도 경계를 못 풀겠다면 대체 어떻게 증명해야 할까요? 그렇다고 마음을 꺼내 보여줄 수도 없는 일인데.”그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한 뒤, 민여진을 위해 마스크와 모자를 사러 갔다.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던 민여진은 진시우의 말이 계속 맴돌아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임재윤과 박진성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박진성은 차갑고 독단적이며, 항상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며 타인을 해치는 데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었다. 반면 임재윤은 부드럽고 세심한 사람이었다. 그는 모든 방면에서 민여진을 먼저 배려해 줬고, 아픈 몸으로도 민여진이 추울까 옷까지 벗어주는 사람이었다.성향이 이렇게나 상반된 두 사람인데, 왜 민여진은 자꾸만 임재윤이 박진성이라는 착각을 하고 의심하는 건지 본인조차 이해되지 않았다.‘나 왜 이러지? 박진성이 같은 병원에 있다는 말만 듣고 이렇게 의심하다니.’민여진은 머리가 아파 눈을 질끈 감았다. 이때 물건을 사
진시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민여진 씨를 위해 싫어하는 걸 참고 먹다니, 정말 진심으로 좋아하는 모양이네요.”예전이었다면 진시우의 말을 그저 농담으로 넘길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당황스럽기만 했다. 민여진은 한참 지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화제를 돌렸다.“진시우 씨, 임재윤하고 어릴 적부터 함께 지냈죠?”“네? 그렇다고도 할 수 없어요.”진시우는 과거를 회상하며 말했다.“재윤이가 한동안 독엔에 가 있어서 떨어져 지내다가 나중에야 다시 연락이 닿은 거예요. 왜요?”“궁금해서요. 임재윤 주변에는 여자가 별로 없었나요? 아니면...”아니면 어떻게 나 같은 사람에게 마음을 줄 수 있겠냐는 뜻이었다.진시우는 웃으며 말했다.“오해하고 있네요. 임재윤 주변에는 여자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임재윤을 좋아하는 여자도 적지 않았어요. 요즘 여자들은 차가운 이미지를 가진 남자를 좋아하잖아요. 임재윤은 말이 없으니까 딱 그런 이미지였고 성격도 세심하기까지 해서 더 인기가 많았죠. 예전에 사귀었던 여자 친구는...”진시우는 이 주제가 적절하지 않음을 깨달은 듯 급하게 화제를 바꾸었다.“어쨌든 외로워서 민여진 씨에게 관심을 가진 건 아니에요. 임재윤은 진심으로 민여진 씨를 좋아하는 거예요.”하지만 민여진은 다른 말이 더 궁금했다.“임재윤에게 여자 친구가 있었어요?”“네.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요.”“그 여자는 어떤 사람이었어요?”진시우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여진 씨, 제가 이 질문에 꼭 대답해야 하나요? 궁금하면 임재윤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어때요? 친구의 아픈 기억을 꺼내고 싶지 않아서요.”‘아픈 기억? 임재윤의 전 여자 친구는 그에게 아픔으로 남은 건가?’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민여진은 그 안에 수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음을 깨달았다.식사를 마치고 민여진은 진시우와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길을 가던 중, 민여진은 어제 박진성을 우연히 마주친 일이 떠올라 걸음을 멈췄다.“진시우 씨, 돈을 좀 빌려주실래요? 모자랑 마스크를 사려고요.
민여진의 얼굴을 본 문채연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여기 왜 나타난 거지? 누구 때문에 이 병원까지 온 거야?’답은 너무 뻔했다. 이제 겨우 박진성과의 관계가 돈독해지고 있는 시점에 민여진이 나타나자, 화가 치밀어 오른 문채연은 이를 악물었다.‘쓰레기 같은 년! 죽은 척 도망쳐놓고 이제 와서 후회라도 하는 거야? 다시 박진성 앞에 나타나서 그 사람 마음을 흔들어 놓을 생각이라면 꿈 깨! 일 초도 못 나타나게 할 거니까.’문채연의 눈에는 독기가 서렸다....민여진은 침대에 누웠지만 머릿속을 맴도는 의문에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임재윤이 어떻게 나를 좋아할 수 있지? 내가 뭐라고? 말을 못 하는 그와 같이 나도 앞을 못 보는 장애인이라서? 그런 거라면 너무 경솔한 결정 아닌가? 그리고 시각장애인도 많이 봤을 텐데 왜 하필...’어찌 되었든 민여진은 갑작스러운 그의 마음이 선뜻 받아들여 지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조현준도 그렇고 이제 민여진은 누구한테 마음을 줄 용기가 없었다.박진성이라는 사람 때문에 받았던 그 수많은 상처는 이미 그녀의 마음을 무너지게 했다.민여진은 억지로 눈을 감고 겨우 잠에 들었지만, 악몽을 꾸었다.병원에서 박진성을 마주치는 꿈이었다. 박진성은 그녀의 저항을 무시하고 사람들을 시켜 그녀를 묶은 채 양성으로 끌고 갔다.잠에서 깬 민여진은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박진성의 강압적인 태도와 차가운 얼굴이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정신을 차리자,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민여진이 문을 열자, 이번에는 직원이 아니라 진시우였다. 그는 웃으며 물었다.“민여진 씨, 혹시 제가 휴식을 방해한 건 아니죠?”“아니요. 방금 막 일어났는데, 마침 잘 왔어요.”“다행이네요. 같이 식사하러 갈래요? 병원도 가야 하고. 그런데 임재윤은 오늘 이상하게 문자를 여러 번 보내네요. 민여진 씨 상태를 계속 물어보던데, 혹시 싸우셨어요?”싸운 건 아니지만, 그것보다 더 어색한 상황이었다. 민여진은 설명하기 어려워 웃으며
임재윤의 말에 민여진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서 있었다.“뭐라고?”잘못 들은 줄 알고 되물었지만, 임재윤은 단호하게 대답했다.“너를 좋아해. 첫눈에 반했어.”임재윤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손가락을 움직였다.“사실 병이 발작하지 않았다면 엊그제쯤에 이미 말했을 거야. 그때 너랑 만나자고 약속했던 이유가 널 좋아한다고 고백할 생각이었거든.”“나를 왜?”민여진은 머리가 멍해졌다.‘임재윤이 나를 좋아한다고? 어떻게? 이게 말이 돼?’“왜라니?”임재윤은 담담한 표정으로 반문했다.“너를 처음 본 순간부터 너여야만 한다는 느낌이 들었어. 이건 지난 20여 년 동안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야. 아마 이런 걸 첫눈에 반했다고 하겠지?”민여진은 주체할 수 없이 빨리 뛰는 심장에 호흡이 거칠어졌다.‘임재윤이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고? 너무 터무니없는 말이잖아.’“이런 내 모습에 반했다고? 너 같은 조건이면 더 좋은 여자를 만날 수도 있잖아.”“외모만으로 첫눈에 반했다면, 그건 첫눈에 반했다는 말을 모욕하는 거야.”임재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타자를 이었다.“널 처음 본 순간 그런 느낌이 들었어. 어쩌면 우린 같은 종류의 사람이겠구나. 교회에서 마주쳤을 때부터 줄곧 너를 지켜봤거든. 주변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는 네 모습이 좋았고 그럼에도 반짝반짝 빛나는 네가 예뻐 보였어.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내 시선은 온통 너한테 가 있더라. 여진아, 만약 네가 앞이 안 보이고 내가 말을 못하는 게 하늘이 정해준 거라면, 하늘은 아마도 나를 네 눈이 되게 하고 너를 내 목소리가 되게 하려고 그랬던 게 아닐까? 우린 아마 천생연분일지도 몰라.”차가운 기계음이 내뱉은 그 말은 왠지 모르게 뜨겁게 전해져 민여진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그녀는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임재윤, 농담하지 마.”임재윤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민여진이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 앞에 다가갔다. 뜨거운 그의 입술이 그녀의 얼굴
“넌 안 피곤해?”“아까 푹 쉬어서 괜찮아.”임재윤은 무언가 말하려다 멈추고는 간단히 알겠다고 답한 뒤 침대에 누웠다.이어서 민여진은 불을 껐고 깊은 밤이 되자, 병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민여진은 임재윤의 호흡이 평온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가 깊이 잠든 걸 확인하고 소파에서 일어나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방 안은 캄캄했지만, 그녀에게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던지라 호흡소리만으로도 임재윤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정신을 가다듬은 민여진은 임재윤한테 다가가 조용히 손을 뻗어 손끝으로 천천히 그의 눈썹과 눈을 쓰다듬었다.그녀는 조금씩 조금씩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만져봤다. 넓은 이마, 높고 곧은 코.민여진이 눈을 뜬 채 손가락을 입술 근처까지 가져가려던 찰나 임재윤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어둠 속에서 민여진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임재윤의 시선이 느껴졌다.손에 힘을 주던 임재윤은 민여진임을 알아차리고는 이내 힘을 풀더니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바닥에 글자를 썼다.[뭐 하는 거야?]민여진은 호흡을 가다듬었지만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임재윤, 너 도대체 누구야?”그녀는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임재윤은 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휴대전화를 꺼내 물었다.“여진아, 그게 지금 무슨 말이야?”민여진은 더 이상 속아 넘어가지 않으려는 듯 마음을 다잡으며 차분하게 말했다.“현준 오빠가 지금 동진에 있어. 오빠한테 너에 대해서 조사를 좀 해달라고 부탁했었거든. 그런데 동진에는 임재윤이라는 사람이 없대. 그러니까 너 대체 누구냐고.”임재윤은 한참 침묵하다 다시 타자를 했다.“조현준의 말은 믿으면서 나는 안 믿는구나.”“너를 어떻게 믿어?”민여진은 혼란스러웠다.“임재윤, 난 너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 신분이 뭔지, 집은 어디인지, 가족은 몇 명인지 심지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몰라.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건, 나 같은 여자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거야. 다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