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여진은 눈치를 채고는 말없이 차에 오른 뒤 안전벨트를 매었다.이동하는 내내 박진성은 끊임없이 기침을 했다. 때로는 숨이 넘어갈 듯, 마치 장기를 다 토해내려는 것처럼 거세게 쿨럭거렸다.서원도 듣다못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대표님, 약국에 들러 약이라도 사시는 게...”“운전이나 해.”박진성은 차갑게 잘라 말했다.“시간 낭비하지 마. 최대한 빨리 돌아가야 해.”서원은 어쩔 수 없이 페달을 더 깊이 밟았다.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탑승수속이 시작된 뒤였다. 서원은 민여진에게 항공권을 내밀며 말했다.“여진 씨, 좀 있다가 승무원에게 말씀드리면 퍼스트 클래스로 안내해 드릴 겁니다.”‘뭐지?’뜻밖의 말에 민여진은 멈칫했다.“그럼 두 분은요? 같이 안 타세요?”“그럴 리가요.”서원이 머뭇거렸다.“퍼스트 클래스 자리가 하나밖에 안 남아서요. 저와 대표님은 비즈니스석입니다.”너무나도 절묘한 우연이었다.민여진은 의아했으나 더 캐묻지 않았다. 그녀는 승무원의 안내를 받으며 자리에 앉았다. 눈을 붙이고 잠시 쉬다가 깨어나니 입안이 바짝 말라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퍼스트 클래스 구역은 텅 비어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그녀는 승무원에게 물을 부탁하며 물었다.“퍼스트 클래스는 꽉 찼다고 들었는데 사람이 왜 이렇게 없죠?”“꽉 찼다니요?”승무원은 부드럽게 웃었다.“빈자리는 많아요. 잘못 들으신 것 같아요.”‘잘못 들었다고? 분명 서원이 그렇게 말했는데.’민여진은 그제야 눈치챌 수 있었다. 그녀는 승무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창밖을 바라보았다.시야에서 뿌연 빛이 끝없이 번져갔다. 오래전부터 먹지 않은 약이 떠올랐다. 뇌 속의 혈전을 완화해 주는 약이었다.그녀는 숨을 들이켰다. 기내의 공기는 따스했지만 몸은 순간적으로 싸늘해졌다.박진성을 증오하고 그와 멀어지는 것, 이혼 서류를 손에 쥔 뒤 각자의 길을 가는 것, 이것이 가장 나은 결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그사이의 오해는 많은 원망 속 하나의 작은 파편에 불과할
“별일 아니에요. 애초에 이혼할 생각이었고 다른 일들 때문에 지금까지 미뤘던 거예요.”민여진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박진성을 둘러싸고 했었던 오해가 마음에 걸렸을 뿐이었다.“우리 사이에는 원래 사랑 같은 건 없었으니까요.”“그렇구나...”장정아는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그녀의 결정을 존중하기로 했다.“그럼 박진성 씨와 함께 가시는 건가요?”“네, 금방 돌아올 거예요.”“그럼 제가 병실 문 앞까지 모셔다드릴게요.”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병실 문이 열리며 외투를 걸친 박진성이 걸어 나왔다. 그의 얼굴은 생기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창백했고 끊이지 않는 기침에 붉게 물든 눈가는 버거움이 가득해 보였다. 민여진을 발견한 박진성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차가운 미소가 그의 얼굴에서 스치듯 지나갔다.“서원아, 가자.”그는 옆에 선 남자에게 짧은 지시를 내릴 뿐, 민여진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그 곁을 스쳐 지나갔다.민여진의 어깨가 잠시 흔들렸고 장정아가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여진 씨...”“괜찮아요.”이미 예상했던 일이라는 듯, 민여진은 무심한 얼굴로 대답했다.“병원까지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먼저 돌아가요. 저는 양성에 들렀다가 이혼 절차를 밟고 돌아올게요.”“그럼... 돌아오시면 꼭 전화해요. 공항으로 마중 나갈게요.”민여진은 평소와 다름없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알겠어요.”멀어져 가는 박진성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으며 그녀도 발걸음을 옮겨 엘리베이터에 함께 몸을 실었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숨막히는 침묵이 밀려들었다.기침을 참으려 애쓰는 박진성의 소리만이 좁은 공간을 메울 뿐이었다.민여진은 몸을 틀며 무심한 듯 물었다.“그렇게 서둘러서 양성에 가야 하는 이유가 있어? 어젯밤에 깨어난 걸로 아는데 며칠은 쉬고 가도 되잖아.”박진성은 손으로 피곤이 깃든 눈가를 가리며 중얼거렸다.“나 걱정해 주는 거야?”그는 민여진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아니지. 네가 날 걱정할 리 없지. 날 그렇게
그녀는 박진성처럼 냉혈한이 아니었다. 온기와 감정을 지닌, 인간다운 사람이었다.그런 일을 전해 듣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면 오히려 더 이상할 터였다.“내일 갈 거예요.”민여진은 깊이 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내일 같이 가 줘요.”“그래요.”장정아는 곧장 민여진의 팔짱을 끼며 친근하게 말했다.“오늘은 푹 쉬어요. 내일 제가 운전해서 모시러 올게요.”“네.”하지만 이튿날 아침이 되자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민여진이 병원에 가기도 전에 박진성이 먼저 전화를 걸어온 것이었다.“나야.”민여진은 몇 초 멍하니 있다가 대답했다.“알아.”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박진성은 몇 번 기침을 하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병원에 와 줘. 양성으로 돌아갈 거야.”“응.”잠시 뜸을 들이던 박진성이 말을 이었다.“너도 나랑 같이 돌아가자, 이혼하러.”그 말과 함께 통화는 끊겼다.민여진은 침대 위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녀는 이혼이라는 말을 먼저 꺼낼 사람도, 누구보다 이 관계를 간절히 끝내고 싶었던 사람도 자신이라고 여겨왔다.“여진 씨! 여진 씨!”장정아가 코트를 털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밖에서 몇 번을 불러도 대답이 없어서 또 잠드신 줄 알았어요.”“아니에요.”민여진은 얼굴을 한 번 비비고는 침대에서 일어났다.“가요.”“네, 갑시다!”장정아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박진성 씨께서 깨어나셨대요. 이제 만나시면 얘기도 나누실 수 있겠네요.”민여진은 애써 입꼬리를 올리고는 장정아와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병원까지는 삼십 분도 걸리지 않았다. 꼭대기 층에 도착하자 장정아가 간호사 하나를 불러 세웠다.“안녕하세요. 저희 박진성 씨 친구인데요, 그분 병실이 어디죠?”간호사는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1208호요.”말을 마친 간호사는 무심히 민여진을 훑어보더니 약간 놀란 듯 물었다.“어?“무슨 일이에요?”장정아가 영문을 모르고 물었다.민여진도 간호사를
민여진의 머릿속은 하얗게 비어만 갔다. 진시우가 말을 이었다.“그 뒤의 일은 여진 씨도 다 알 거예요. 진시호는 박진성을 잡을 기회를 놓칠 리가 없죠. 그때 사람들이 말렸지만 박진성은 기어이 가겠다고 했어요. 1초라도 늦으면 여진 씨가 다칠까 봐 두려워서요.”“뭐라고요?”민여진은 바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내렸다. 가슴이 복잡한 감정으로 요동쳤고 불안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문득 진시호의 저택에서 박진성이 모든 걸 내려놓은 듯했던 말이 떠올랐다.“네 눈에는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보여? 이기적이고, 차갑고, 위험하면 널 버리고 도망가는 사람으로 보인단 말이야?”그리고 아픈 몸으로 침대에서 힘겹게 뱉었던 해명도 다시 한번 귓가에 울렸다. “네가 납치당한 일은... 내가 제대로 살피지 못한 탓이야. 하지만 진시호가 어떻게 널 찾았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미안해.”그때의 그녀는 뜨거운 분노만 느낄 뿐이었다.그녀는 박진성이 책임을 피하려고 둘러대는 거라고 여겼다. 그녀는 박진성에게 해명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가슴이 조여들며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혹시 내가 박진성을 오해했던 걸까?’“여진 씨, 여진 씨가 박진성을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 알아요. 여진 씨한테 그렇게 상처를 줬는데 저라도 용서 안 했을 거예요. 하지만 이번 일에서만큼은 여진 씨를 위해 최선을 다했어요. 일주일 내내 잠도 못 자고 여진 씨 때문에 두들겨 맞기까지 했으니까요. 거기 가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박진성이라고 몰랐을까요?”진시우는 길게 한숨을 내었다. 그 순간, 주머니 속 휴대폰이 울렸다. 전화를 받은 그는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자리를 비워야 한다고 했다.장정아가 서둘러 물었다.“무슨 일이에요?”민여진의 손끝에도 덩달아 힘이 들어갔다. 진시우는 안심하라는 듯이 말했다. “박진성에 관한 일은 아니에요. 다른 일로 급히 나가봐야 해요. 여진 씨, 오늘은 먼저 푹 쉬세요. 박진성 쪽은 마음이 내키시면 한번 가보세요. 억지로 가지 않아도 돼요. 어쨌든 빚은 그쪽이 먼저 진 거니까
“여진 씨...”장정아는 말을 잇지 못했다. 언제나 온화하던 민여진의 안에 이토록 깊고 날 선 분노가 숨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민여진의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녀는 애써 숨을 고르며 말했다.“미안해요. 흥분했네요. 하지만 박진성의 생사 따위는 이제 저와 아무 상관 없어요. 다시는 그를 만나지 않을 겁니다.”진시우의 미간이 깊게 구겨졌다. 그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여진 씨가 박진성을 미워하는 건 이해합니다. 하지만 왜 박진성이 여진 씨를 진시호에게 넘겼다고 생각하는 거죠?”“그럼 아닌가요?”민여진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그날 난 진시호에게 끌려갔고 진시호는 직접 박진성에게 전화를 걸어 날 구하라고 했어요. 하지만 박진성은 곧장 양성으로 떠났죠. 내가 죽을힘을 다해 발버둥 치지 않았다면 아마 그때 이미 끝장났을 거예요. 나를 버린 사람인데 내가 왜 그의 안위를 걱정해야 하죠?”“그러니까 그 말은 여진 씨가 죽든 말든 박진성이 그냥 내버려뒀다는 건가요?”진시우의 목소리에는 혼란스러움이 깃들어 있었다. 잠시 숨을 눌러 삼킨 그는 힘없이 말했다.“민여진 씨, 그건 오해예요.”“그게 무슨 뜻이죠?”민여진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그녀는 절대 잊을 수 없었다. 차갑게 전화를 끊어버리고 차에 올라 양성으로 떠났다는 박진성의 소식을 경호원의 입을 통해 들은 적이 있었다. 거짓일 리가 없었다.“박진성이 그날 양성에 가지 않았다는 말이에요? 나를 구하러 오라는 진시호의 전화를 박진성이 끊지 않았다는 말인가요? 진시우 씨, 제가 앞을 못 보기는 해도 귀는 잘 들려요. 납치당했을 때, 박진성이 동진을 떠났다는 건 변명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에요.”“네, 그렇죠.”진시우는 부정하지 않았다.“박진성은 그때 동진을 떠난 게 맞았어요.”“그런데도 오해일 수가 있나요?”민여진의 마음은 빠르게 식어갔다. 그녀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대체 무슨 오해요? 날 저버린 게 아니라는 건가요? 겉으로는 나를 걱정하는 척하면서
세 사람은 조용히 식탁에 앉아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건 진시우였고 민여진이 맞장구를 쳤다. 장정아만 고개를 숙인 채 수저질을 이어갔고 가끔 곁눈질로 진시우를 훔쳐볼 뿐이었다.그가 눈치채기 전에 장정아는 황급히 시선을 거두었지만 같은 일이 반복되다 보니 결국 들킬 수밖에 없었다.진시우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물었다.“정아 씨, 왜 그래요? 아까부터 계속 저를 보던데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장정아는 헛기침을 했다. 변명거리를 찾을 수 없어 머뭇거리다 말했다.“아니요, 얼굴에 묻은 건 없는데... 오늘 헤어스타일이 좀 이상해서요.”“이상하다고요?”진시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평가받은 건 처음이었다.“어디가 이상하다는 거죠?”장정아는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며 애써 답을 짜냈다.“좀 나이 들어 보여요.”그 말을 들은 진시우는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사레가 들릴 뻔한 민여진은 얼른 물을 들이켰다. 장정아는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아니, 그 뜻이 아니고... 그냥 어울리지 않는 머리 같아요. 그래서 좀... 못생겨 보이는 거 같아요.”진시우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알겠어요. 의외의 대답이지만 틀린 말은 아닌 거 같네요. 정아 씨 의견 한 번 생각해 볼게요.”난처해진 장정아는 손등이 벌겋게 달아오를 정도로 손을 비볐다. 사실은 남자답고 세련되고 신사적으로 보인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막상 입을 열자 정반대의 말이 흘러나왔다.식사가 끝난 뒤, 장정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박진성 씨한테도 좀 가져다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도련님?”“아니요, 괜찮아요.”진시우의 눈빛이 가라앉았다.“박진성은 아직 깨어나지 못했어요. 깼다면 하 비서가 전화했을 거예요. 일단 박진성이 깨어난 뒤에 보죠.”장정아는 깜짝 놀라며 입을 틀어막았다.“벌써 이틀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못 깨어나셨어요?”“네.”진시우의 표정은 무거웠다.“2두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잤는데 매까지 맞았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거죠. 원래라면 입원해서 요양해야 했는데 동진에 머무르길 거부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