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결혼한 지 5년, 강솔은 남편에게서 믿기 어려운 청을 받는다. “아연은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야. 네가 그 존재를 인정해 줬으면 해.” “네가 허락한다면, 본처의 자리는 언제까지나 너일 거야. 그건 변하지 않아.” 그가 사랑이라 부르는 방식은 강솔에게 배신과 다르지 않았다. 강솔이 가장 힘들었던 시절, 하중현이 손을 내밀었고 그녀는 그 손을 붙잡았다. 하중현은 아내를 맞이한 뒤, 아낌없이 사랑하고 모든 걸 내어주었다. 강솔은 믿었다. 세상에서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남편뿐이라고. 그러나 이제 안다. 그 믿음이 얼마나 어리석은 착각이었는지를. 하중현은 몰랐다. 부드러운 이름을 가진 여자가 얼마나 단단한 의지를 품고 있는지. 그녀는 단 한 번 물러섰고 그 한 번으로 모든 것을 끝냈다. 그리고 그의 세계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때 하중현은 처음으로, 진짜 두려움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다른 남자의 팔을 끼고 나타난 강솔이 그의 세계를 다시 뒤흔들었다. 하중현은 눈에 핏발을 세운 채, 문 뒤에서 그녀를 몰아세웠다. “강솔... 넌, 정말... 독한 여자야.”
View More“소담이는 솔이 친구니까.”중현은 담담하게 말했다.“내가 자금 지원은 막았어도... 그 아이가 솔이한테 주는 정신적인 힘까지 빼앗을 순 없지.”시후는 잠시 말을 잃었다가 바로 웃어버렸다.“야, 너 진짜... 별로 인간미가 없는 거 같으면서도, 이럴 때 보면 또 존X 사람 같다니까.”40여 분 뒤, 시후의 집 앞.그는 차에서 내려 문을 닫았다.동작 하나까지도 경쾌한 평소의 시후.중현이 떠나려 하자, 시후가 불렀다.“중현아.”중현은 엑셀 밟으려던 발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묻기도 전에 시후가 먼저 말했다.“과거에 머물지 마. 그 무게 안고 가면...너만 더 힘들어져.”시후는 한숨 섞인 어조로 덧붙였다.“그 아이가 살아 있었다면, 네가 지금 이러는 거... 절대 원치 않았을 거야.”중현의 손가락이 하나둘 차갑게 굳었다.핸들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얇은 입술은 아무 말없이 국 다물었다.“조심히 가라. 운전 천천히 하고.”시후는 일부러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가벼운 분위기라도 전해주려고.중현은 아무 말없이 그저 차를 출발시켰다.돌아가는 길에 머릿속은 자꾸만 과거의 시점으로 흘러갔다.한없이 밝았던 미소.세상 모든 걸 이길 것 같던 낙관.열일곱, 누구보다 찬란했고, 누구보다 단단했던 그 아이.근데... 거기서 멈췄다.빵!클랙슨 소리가 울렸다.중현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신호는 이미 초록으로 바뀌어 있었다.그는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출발했다.밤샘에다, 온갖 생각이 얽혀 정신이 몽롱했다.워터사이드 리조트에 도착했을 때, 그의 분위기는 평소보다 훨씬 냉랭하고 차가웠다.그때였다.딸깍-옆방 문이 열렸다.아연이 실키한 잠옷을 입은 채 걸어 나와 그를 보고 놀란 듯 말했다.“중현 씨...? 이렇게 일찍 들어온 적 없잖아. 지금... 여섯 시도 안 됐어.”“나 때문에 깼어?”중현의 눈은 공허할 만큼 차분했다.아연은 중현의 상태가 평소와 다름을 감지했다.하지만 모른 척했다.“아니.”“그럼 더 자.
“너 자러 간다며?”중현은 상반신을 세우며 앉았다.표정도, 말투도 평소와 다름없었다.겉으로만 보면 아무 일도 없는 사람 같았다.“자는 것보다 네 가십거리가 더 재밌지.”시후는 너스레를 떨며 웨이터에게 잔 두 개와 술 한 병을 가져오라 지시했다.술과 잔을 내려놓고 나가자, 그제야 다시 말을 이었다.“게다가 네 얘긴데 당연히 나와야지.”중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시후는 직접 병을 따서 두 잔에 술을 꽉 채웠다.그리고 하나를 중현 앞으로 밀었다.“자, 너한테 스토리가 있고, 나한테 술이 있으니... 풀어봐라.”중현은 그 잔을 내려다보았다.그 눈빛에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수많은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야, 그리 보지 마. 간담 서늘하다.”시후는 농담 섞인 말투로 분위기를 누그러뜨렸다.중현은 잔을 받아 들었지만, 입에 대지 않고 그대로 테이블에 내려놓았다.시후는 눈썹을 살짝 올렸다.“뭐지? 더 궁금해지는데.”“어제 지안이 나한테 질문을 두 개 했다.”중현은 단순히 사실을 나열하듯 말했다.“내가 대답하니까 화나서... 자기 없다고 생각하고 살라더라.”“어떤 질문인데?”시후의 표정이 단숨에 진지해졌다.지안이는 또래보다 어른 같고, 어른보다 더 어른 같은 애였다.상처받기 전엔 절대 그런 말을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중현은 시후를 쳐다보며,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그를 괴롭게 한 건 질문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질문들이 불러온 더 큰 생각들이었다.“말 안 해도 돼. 대충 감은 오니까.”시후가 먼저 말을 이었다.“소아연이지?”중현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근데 너도 알잖아. 그 여자가 순진한 사람 아니라는 거.”시후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그런데도 왜 끊지를 못하는 거냐? 최소한 멀리할 수는 있잖아.”그 여자의 계산된 행동, 과장된 순진함, 타인을 이용하는 방식...중현이 모를 리 없다.그런데도 중현은 아연을 제 손으로 밀어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약속 때문이야.”중현은 처음으로 그
중현은 이불을 살짝 잡아 지안의 숨이 막히지 않도록 조용히 정리해 주었다.눈을 꼭 감고 자기에게 등을 돌린 아들을 보며 억지로 깨울 생각은 하지 않았다.그저 예전처럼, 늘 하던 대로 부드럽고 인내심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편하게 자.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아빠랑 엄마 사이가 어떻게 되든... 우리가 널 사랑하는 건 변하지 않아.”지안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눈을 꼭 감은 채, 듣고 싶지 않다는 듯 철저히 무시하며 잠든 척했다.중현은 허리를 굽혀 작은 이마에 짧은 굿나잇 키스를 남겼다.“잘 자.”아들은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다.중현이 불을 끄고 문을 닫자, 어둠 속에서 지안의 눈이 천천히 떠올랐다.평소엔 맑고 깨끗하기만 하던 그 눈이 오늘은...어린아이답지 않게 복잡한 감정으로 뒤덮여 있었다.중현은 다시 강솔의 방으로 갔다.그녀는 여전히 아까 그대로의 자세로 누워 있었다.작고 잔잔한 호흡,조용한 얼굴.까딱도 하지 않고 자고 있었다.침대 옆에 앉은 중현은 강솔의 잔잔한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가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넓고 따뜻한 손바닥이 부드럽게 그녀의 뺨에 닿았다.‘우리 고집쟁이, 왜 평소엔 이렇게 말을 잘 안 들을까?’취해서 온순해진 강솔을 바라보며 잠시나마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중현은 바로 자리를 뜨지 못했다.취해 쓰러진 강솔이 밤새 문제없이 잘 잘지 걱정되었다.그래서 그는 셔츠 차림 그대로 침대 옆에 앉아 있었다.밤 9시부터 새벽 4시가 넘도록.그리고 강솔이 희미하게 얼굴을 찡그리며 깨어날 조짐을 보이자, 그제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러고는 거실에서 외투를 챙겨 조용히 집을 나섰다.지안의 말 때문인지 가슴 한가운데가 끊임없이 불편하고 무겁게 뒤틀려 있었다.미처 풀지 못한 매듭이 꽉 조이는 듯한 답답함이랄까?중현은 워터사이드 리조트로 바로 가지 않고 시후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를 불러내기 위해서였다.[여보세요.]시후는 다짜고짜 하품을 터뜨렸다.[지금 몇 시인지 봤어?][내가 새벽 네 시까지
지안은 당연히 거부하고 싶었다.엄마를 직접 돌보고 싶은 마음이 누구보다 컸다.하지만 그가 의지를 보이기도 전에, 중현은 한 손으로 지안을 번쩍 들어 올려 침실로 데려가며 차갑게 말했다.“지안이 얼른 안 자면, 내일 아침에 엄마한테 아빠가 어젯밤에 데려왔다고 말할 거야.”“하앙...!”지안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억울함과 당황함이 뒤섞인 소리가 터져 나왔다.“어서 자.”중현은 단호했다.지안은 문 앞에서 멈춰 서며 말했다.“아빠 끝날 때까지... 기다릴 거예요.”중현은 대답하지 않았다.그는 클렌징 워터를 들고 침실로 들어가 아주 능숙한 동작으로 메이크업을 지우기 시작했다.눈가, 입가 등 민감한 부분은 불편할까 조심스럽게, 정말 천천히.지안은 문짝 틈에서 그 모든 장면을 조용히 지켜보았다.그리고 어느새 떠오르는 기억들.예전에 엄마가 아빠와 함께 파티 갔다가 차 안에서 잠들어버린 날.그때도 아빠는 지금처럼 직접 메이크업을 지워주고 손수 얼굴까지 닦아주었다.“지안, 조용히 해. 엄마 깨면 안 돼.”라고 말하며.모든 것이 그대로인데, 왜 이렇게 달라졌을까?...중현은 지안이 멍하니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는 강솔에게 잠옷까지 갈아입힌 뒤 지안의 방으로 갔다.그는 의자에 앉아 꼬마 아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표정이 왜 그래. 꼭 늙은 영감탱이 같네.”“아빠.”지안은 작은 다리를 침대 위에 꼬고 앉아 있었다.“응?”중현이 대답했다.그리고 지안은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아빠... 아직도 엄마 좋아하죠?”중현의 손동작이 멈췄다.짧지만 분명한 정적.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아빠가 왜 다른 아줌마랑 있어요? 그리고 그 아줌마가 엄마보다 뭐가 좋은지도 모르겠고...”지안은 처음으로 아빠와 이 문제를 정면으로 이야기했다.작은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진중한 기색이었다.“근데 엄마를 아직도 좋아한다면서... 왜 엄마를 놓아요.”“나는... 엄마를 놓은 적 없어.”중현의 목소리가 낮게 흘렀다.처음도, 지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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