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같았으면 평생 책임지겠다는 저 말에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뻤겠지만 지금은 그저 헛소리 같아 우스울 뿐이었다.그러고 보니 정말 그동안 많은 게 바뀐 것 같았다.민여진의 대답에 박진성의 눈길도 서늘해졌지만 그는 여전히 민여진에게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다만 아까의 그 온정은 온데간데없었다.“민영미 못 보면 네가 뭐 죽기라도 해?”비웃으려고 건넨 말이었겠지만 민여진은 확신에 찬 답을 했다.“응, 엄마 못 보면 난 죽어.”기분이 잡친 박진성은 화가 가득한 손길로 민여진을 일으켜 세웠다.아니, 그냥 떨궈버렸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갑작스러운 충격에 민여진은 카펫 위로 넘어졌지만 박진성은 원래 기분이 오락가락한 사람이라 그녀는 이런 일이 당황스럽지도 않았다.그저 그가 떠나가면 엄마를 만나지 못할까 봐 다급히 외칠 뿐이었다.“박진성! 엄마는 언제 만나게 해줄 거야! 약속했잖아.”“엄마엄마엄마! 넌 어떻게 말끝마다 엄마야! 방현수랑 민영미 빼면 다른 할 말은 없는 거야?”화를 주체할 수 없었던 박진성은 테이블 위에 있던 물건을 모조리 쓸어버렸다.“나한테 전화한 것도 그것 때문이야? 술 마시고 채연이 방에 가려고 했더니. 시간 내서 여기까지 왔는데 내가 그딴 소리나 듣고 있어야겠어?”왜 이렇게 화가 났나 했더니 아마도 문채연과의 좋은 시간을 방해받아서 그런 것 같았다.민여진은 그의 화가 두려워 얼굴이 창백해졌지만서도 참지 못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내가 엄마 보고 싶다고 한 게... 그렇게 큰 잘못이야?”“잘못은 아니지. 그냥 후회하지 말라고.”화가 극에 달한 박진성은 그 길로 문을 박차고 나갔는데 얼마나 세게 찼는지 온 거실에 울려 퍼질 정도로 큰 소리가 나자 민여진은 또 파르르 떨어댔다.혼자 남은 민여진은 아까 박진성이 남긴 말을 떠올리며 입술을 깨물었다.후회라니, 민여진이 후회할 리는 없었다.하지만 아까의 후폭풍 때문에 오늘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할 것 같았다.그녀와 마찬가지로 문채연도 잠을 이룰 수가 없
“그럴 리가요... 그게 아니라 사실...”문채연은 눈물을 머금으며 가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진성 씨가 어제 저랑 나가고 나서 어떤 여자 전화를 받더니 바로 나가버리더라고요. 그게 누군지 너무 궁금해서 진성 씨 측근한테 물어보니까...”“뭐라는데?”“별장에 다른 여자가 있대요.”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이정화에 문채연은 이제 와서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전 당연히 진성 씨 믿어요! 진성 씨는 그럴 사람 아니잖아요. 그 여자가 그냥 친구일 수도 있는 거고 아니면 그냥 잠깐의 쾌락을 느끼려고... 아무튼 전 상관없는데 그냥 마음이 좀 그러네요. 제가 친정도 없어서 어머니를 여태껏 친정엄마로 생각하고 따랐잖아요. 그래서 어디 말할 데가 없어서 털어놓는 거니까 어머니도 신경 쓰지 마세요.”“네 말이 사실이면 난 두고만 볼 수는 없어. 진성이가 밖에 여자를 두는 건 나뿐만 아니라 모든 박씨 집안 조상들이 용납 못 해!”말을 마친 이정화는 바로 문채연을 데리고 별장으로 향했고 문 앞에서 아까부터 통화를 하고 있던 서원은 차에서 내리는 이정화를 보고서야 큰일이 났음을 직감했다.“사모님.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대표님께서는 아직 회사에 계실 겁니다. 귀가 전이십니다.”“알아, 들어가서 기다릴게.”서원은 별장 안으로 들어가려 하는 이정화를 다급히 막아섰다.“사모님, 그... 그건 좀 곤란합니다. 대표님께서 최근 소장품 몇 개를 구매하셔서 거실에 먼지가 좀 많아요. 옷도 더러워질 텐데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시면 제가 빨리 정리하겠습니다.”“비켜!”이정화가 서원의 말을 무시한 채 안으로 들어가서 당황한 서원은 그 뒤를 따르면서 박진성에게 연락하려 했는데 그때 문채연이 그의 손을 잡으며 웃었다.분명 미소를 짓고 있는데도 어딘가 섬뜩한 그 얼굴로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진성 씨 바쁜데 이런 일로 연락할 필요는 없어요. 프로젝트 틀어지면 괜히 서원 씨 탓할까 봐 그래요.”이정화의 손을 빌려 민여진을 혼쭐내려는 문채연의 속셈이 너무나도 훤해서 서원
“아니라니, 나 눈 안 멀었어. 네 목에 있는 흔적 아주 잘 보인다고.”화를 내자 갑자기 아파오는 머리에 이정화는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입을 열었다.“내 아들 문제라는 거 아니까 아들 관리 똑바로 할 거야. 그러니까 너도 당장 여기서 나가! 오늘 이후로는 우리 진성이랑 연락도 하지 말고!”“여자면 부끄러운 줄을 알아야지, 내연녀인 걸 알면서 어쩜 그렇게 떳떳해? 엄마가 그렇게 가르쳤어? 네 행동이 우리 채연이한테 얼마나 큰 상처가 될지는 생각 안 해본 거야?”이정화는 민여진이 엄마 다음으로 소중하게 여기던 사람인데 그런 사람에게서 저런 모진 말을 들으니 민여진의 눈시울도 점차 빨개졌다.왜 다들 문채연만 감싸고 도는지, 민여진은 가슴이 저릿하게 아파왔다.그리고 박진성과는 아직까지 법적인 부부인데 내연녀라니, 민여진은 자신이 그런 말을 들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사모님, 오해예요. 저는 내연녀가 아니라 진성 씨랑은 법적인...”“어머니!”그때 문채연이 당황한 듯 갑자기 이정화를 부르며 말했다.“저는 괜찮으니까 이제 그만 하세요. 진성 씨가 사랑하는 사람은 저잖아요. 저 여자는 그냥 잠깐 심심해서 만난 사람이니까 다시 저한테 돌아올 거에요. 이제 얼른 가요. 진성 씨가 알게 되면 저한테 뭐라고 할 것 같아요...”자꾸만 자신을 낮추는 문채연에 다시 화가 치밀어오른 이정화가 입을 열었다.“안돼! 남자가 돼서 이정도 책임감도 없는 건 말이 안 되지. 집에 여자를 숨기다니, 다른 사람들이 알면 얼마나 웃겠어. 우리 집안에 그런 치욕은 없어야 해.”다시금 민여진을 향한 이정화의 시선은 차갑기 그지없었다.“진성이는 채연이 남편이야, 나도 채연이만 며느리로 받아들일 거고. 그러니까 다른 생각 말고 뺏을 생각도 말고 떠나. 뺏는다고 네가 가질 수도 없는 자리야. 말해, 얼마 주면 떠날 건지.”이정화가 하는 말을 듣고 있던 민여진은 누군가 머리 위로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온몸이 차가워졌다.마치 자신의 뺨을 한 대 한 대 내리치며 이제 그만 꿈에서
그에 문채연은 말실수라도 한 사람처럼 다급히 입을 틀어막았다.“아니에요... 여진 씨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진성 씨를 너무 좋아해서... 전 용서하기로 했어요.”“저 여자 때문에 다리를 잃을 뻔했는데 용서라니, 어쩜 이렇게 착해.”이정화는 문채연을 감싸며 번뜩이는 눈으로 민여진을 쳐다보았다.“젊은 나이에 남의 가정을 파탄 내고 사람까지 다치게 해? 처음 봤을 때 너를 아주 좋아했는데, 네가 이런 애일 줄 몰랐네. 당장 나가! 그리고 다시는 우리 앞에 나타나지 마!”예전엔 유일한 민여진의 편이 되어주던 이정화가 자신을 내치자 민여진은 고개를 푹 떨군 채 손을 떨었다.“죄송해요...”이렇게 싫어하는 존재가 되어버려서 죄송하다는 의미의 사과였다.민여진은 이 와중에도 얼굴이 망가져 버려서, 이정화가 자신이 2년 동안 함께 하던 문채연이라는 사실을 모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죄송하다는 말 한마디로 다 끝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어차피 이렇게 될 거 그런 일은 왜 저질렀어!”눈시울을 붉힌 민여진은 한마디 해명도 없이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그런데 하필 그때 민여진에게 핸드폰을 빌려준 서원이 밖으로 나가 통화를 하는 바람에 민여진이 나가는 건 아무도 보지 못했다.서원이 별장에 도착했을 때는 박진성의 차도 별장 앞으로 오고 있었다.바로 별장 안으로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 가슴을 부여잡고 있는 이정화가 그녀에게 물을 따라주고 있는 문채연이 보였다.문채연은 돌아온 박진성을 보자마자 또 불쌍한 척을 하며 말했다.“진성 씨...”하지만 박진성은 그런 문채연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민여진의 행방부터 물었다.“민여진은 어디 있어?”주위를 둘러봐도 보이지 않는 인영에 조급해진 박진성이 2층으로 올라가려 하자 이정화가 그를 말렸다.“거기 없으니까 올라갈 필요 없어!”숨을 고르던 이정화가 박진성을 올려다보며 말했다.“회사에서 이렇게 급히 온 게 숨겨두던 여자 하나 때문이니? 너는 우리 집안을, 채연이를 도대체 뭐라고 생각한 거야! 항상 이성적
박진성의 태도에 멈칫하던 이정화가 또 화를 내기 시작했다.“이미 떠났어. 여긴 너랑 채연이의 별장이야! 이런 곳에 다른 여자를 들이는 게 애초에 말이 안되지 않니? 진작 나가버렸어.”“갔다고요? 보이지도 않는 애한테 어떻게 나가라는 말을 하세요!”정처 없이 흔들리는 박진성의 동공에 이정화도 너무했나 싶은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녀는 태연한 척 말을 이어나갔다.“보이지 않으면 뭐 어때? 바보도 아니고 다 성인인데 전화할 줄은 알겠지. 다른 사람 핸드폰 빌릴 수도 있고, 뭐 걔는 친구나 가족도 없대?”이정화의 말에 박진성은 눈앞이 캄캄해지고 심장이 떨려왔다.친구나 가족이라니, 민여진에게 그런 게 있을 리 만무했다.유일한 가족인 엄마는 이미 죽었고 그나마 기대던 이정화까지 그녀를 버렸으며 방현수와는 박진성 때문에 억지로 연락을 끊은 상태였다.그러니 그 성격에 밖에서 얼어 죽는다 해도 방현수에게는 절대 연락하지 않을 것이다.이미 모든 걸 잃은 상태에서 눈까지 먼 그녀가 밖에서 살아남는다는 건 그렇게나 어려운 일이었다.“먼저 집에 가세요. 전 일단 민여진부터 찾고 나중에 집으로 갈게요.”마음속에 두려움을 안은 채로 급하게 밖으로 나가는 박진성을 문채연이 또 불러세웠다.“진성 씨!”낯빛이 창백해진 문채연은 바로 박진성에게로 다가갔는데 잔뜩 긴장한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그깟 민여진이 뭐라고 이렇게 난리인지.“미안해요! 진성 씨가 내 탓이라고 할 거 알아요. 나는 막았는데 어머니가 꼭 오시겠다고 하셨어요. 어머니 몸도 안 좋으셔서 일단은 그냥 보내고 나중에 당신한테 연락하려고 했는데 당신이 이렇게 온 거예요. 그러니까 화내지 말아요.”이내 눈물을 터뜨리는 그녀를 보며 서원은 등골이 오싹해졌다.다정하고 너그러운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연기에 도가 튼 사람인 것 같았다.“네 탓한 거 아니야.”이미 어둑어둑해지고 있는 날에 민여진이 얇은 옷차림으로 바깥을 떠돌 생각에 한시가 급했던 박진성은 문채연의 손을 세게 뿌리쳤다.
누군가 얼굴에 찬물을 끼얹자 민여진은 힘겹게 눈을 떴지만 이미 그녀의 몸은 밧줄로 묶여있어 움직일 수는 없었다.그때 물을 끼얹던 여자가 민여진을 아래 우로 훑어보며 말했다.“어디서 이런 애를 데려왔어, 얼굴도 저 모양인데 몸도 바싹 말랐잖아. 이런 걸 좋아하는 손님이 어딨다고, 박 대표님도 너무하시네.”“누님, 이번에 대표님 도와드리면 대표님도 절대 안 잊으실 거에요.”“나도 돕고 싶지. 그런데 저 몰골을 봐, 돼지우리에 넣어도 거들떠보지도 않을 얼굴이잖아.”한 손엔 담배를 든 채로 민여진 앞으로 다가간 홍연이 미간을 찌푸렸다.“눈까지 멀었네. 진짜 재수가 없으려니까.”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민여진은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박 대표님이라는 걸 보니 박진성이 자신을 팔아넘기려는 것 같았는데 놔줄 때도 그냥 놔주는 법 없이 이런 방법으로 자신을 괴롭히려 하는 것 같았다.도대체 자신이 얼마나 싫으면 이런 방법을 생각해낼까 싶어 민여진은 뜨거운 눈물을 흘려보내며 입술을 깨물었다.그때 자세를 낮춘 홍연이 민여진의 옷을 벗기자 그녀는 당황하게 몸을 비틀었다.“뭐 하는 거야!”“아!”하지만 두 팔이 다 묶여있어 몸이 자유롭지 못했던 민여진은 실수로 홍연을 차버리게 되었는데 그것 때문에 치마가 더럽혀진 홍연은 화가 치밀어올라 옆에 있던 남자들에게 눈짓을 했다.남자들이 민여진의 머리채를 잡자 홍연은 그녀가 기절할 때까지 뺨을 때렸다.“됐어. 또 기절하면 돈만 더 깎이지.”그제야 화가 풀린 홍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그래도 목소리는 좋으니까 옷 갈아입히고 가면 씌워서 내보내자. 돈은 얼마 없으면서 밝히기만 하는 사람들은 좋아할 테니까. 이 일은 내가 맡을 테니까 대표님한테 앞으로 우리 일 좀 잘 봐달라고 말해줘.”“당연하죠!”“얘 옷부터 갈아입혀.”민여진은 쓰러지기 직전까지 뺨을 맞았지만 의식은 남아있어 그들의 말을 다 듣고 있었다.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흐른 눈물이 상처에 닿자 안 그래도 아픈 얼굴이 더 아려왔다.옷을 갈아입힌 남자들
여자의 말을 듣자마자 눈을 빛내던 남자는 이내 고민하며 말했다.“홍연이가 가면은 벗기지 말랬어.”“... 괜찮으니까 벗기고... 키스해줘요...”입안에 가득한 피 때문에 목소리가 더욱더 떨려오자 그게 더 애교 같아 보였다.목소리가 이렇게 좋은데 얼굴은 또 얼마나 예쁠까 싶어 온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한 남자는 가면 아래에 감춰진 모습이 너무나 궁금해서 참지 못하고 가면을 벗겨버렸다.“그럼 이쁜이 얼굴 한 번 볼까?”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벗긴 가면이었건만 그 아래 드러난 얼굴이 흉측하기 그지없어서 남자는 깜짝 놀라며 침대 아래로 굴러떨어졌다.“X발! 저 더러운 건 뭐야!”모든 흥분이 싹 가신 남자는 벌벌 떨며 민여진을 향해 손가락질했다.“지금 나랑 장난해? 나한테 저런 흉측한 걸 갖다 줘? 안 만지길 잘했지, 평생 잠도 못 잘뻔했잖아. 나 너 바로 신고할 거니까 각오해!”화가 난 남자가 베란다로 나가 홍연과 말다툼을 할 때 침대 협탁에서 뾰족한 물건 하나를 집어 든 민여진은 빠르게 그걸 손안에 감췄다.예리한 물건이 살을 파고들었지만 민여진은 힘겹게 침대에서 내려와 한 발 한 발 입구로 다가가더니 순식간에 문을 열어젖히고 달려나갔다.하지만 강력한 약효가 고통을 점차 뒤덮고 있어 달려나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민여진은 한 남자의 품으로 고꾸라졌다.그에 당황한 민여진은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흘렸다.“도와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여진 씨... 잠깐만...”한편 민여진에게 안겨버린 서원은 옆에서 느껴지는 박진성의 따가운 눈초리에 몸을 움직이지도 못하고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호텔 방에서 나오더니 그대로 서원에게 안겨 도와달라 울먹이는 그녀의 모습을 보는 게 달가울 리 없었다.온종일 모든 인맥을 다 동원하여 잠도 못 자고 민여진을 찾으러 돌아다녔는데, 실명한 상태로 무슨 변이라도 당했을까 봐 폭우도 뚫고 달려왔는데.잠깐 옷 갈아입으러 들어간 새에 저런 야한 옷을 입고 서원에게 안겨있는 민여진을 보고 어떻게 침착할 수 있겠는가.야
민여진의 말에 이성이 끊겨버린 박진성은 옆에 놓인 양동이를 들어 그녀에게 물을 퍼부었다.온몸을 뒤덮는 한기에 민여진이 정신을 차리려 하자 박진성은 다시 그를 잡고 물었다.“정신 안 차려?! 내가 네 남잔데 나 말고 누굴 원하는 거야! 너 이렇게 천박한 애였어? 다른 사람 손이 닿아도 상관없는 거야?”‘네 남자’라는 말에 민여진은 웃음이 절로 나왔다.2년 동안 몸과 마음 다 바쳐 사랑한 결과가 이거라고 몸소 보여준 사람이 어떻게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지, 박진성에게 남은 건 이제 두려움뿐이라 민여진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악에 받쳐 말했다.“그래, 너 말고 다른 남자는 다 괜찮아. 그게 누가 됐든 상관없어. 박진성 너만 아니면 돼.”몸이 나른해지는 데도 민여진은 정신력으로 버텨내며 말을 끝마쳤다.“너!”말이 끝나자마자 손이 들리는 게 느껴져 민여진은 뺨을 맞을 줄 알고 눈을 감았는데 오래도록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미치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물을 거야. 똑바로 대답 안 하면 평생 다른 남자는 만나보지도 못하고 죽을 거야.”민여진의 낯빛이 점차 창백해질 때 방문이 열리더니 아까 그 남자가 아랫도리만 입은 채 밖으로 나와 두리번거리고 있었다.그러다 민여진을 발견한 남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녀에게로 다가갔다.“이 년이 언제 여기까지 나왔어? 도망간 줄 알았잖아! 얼른 들어와!”민여진의 팔을 낚아챈 남자는 자신이 손해라도 본다는 투로 말했다.“생긴 건 별론데 그래도 할 수만 있으면 됐지 뭐. 싸니까 내가 받아주는 거야.”남자가 힘을 주기도 전에 박진성이 그의 손을 뿌리치자 술김에 고개를 들어본 남자는 상대방도 남자인 것에 놀라며 물었다.“설마 이 여자가 마음에 들어서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어쩌나, 내가 만 원 주고 산 거라서 오늘 밤은 내 건데. 원하면 줄 서서...”남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한 파열음이 들려왔다.옆에 있던 경호원들이 반응하기도 전에 두 눈이 빨개진 박진성이 먼저 주먹을 휘둘러
어떻게 대답할지 몰라 망설이던 민여진은 고개를 숙인 채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현준 오빠, 임재윤은 좋은 사람이에요. 저는 그를 한번 믿어보고 싶어요. 임재윤이 저를 해치지만 않는다면, 진짜 신분이 뭐든 상관없어요.”조현준은 할 말을 잃은 듯 한참 후에야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여진아, 이 결정을 후회하지 않길 바란다.”‘이 결정을 왜 후회할 거로 생각하는 거지?’민여진은 이유 모를 불안감에 사로잡혔지만, 조현준은 이미 전화를 끊은 후였다.그녀는 이 복잡한 감정이 조현준의 배려를 거절한 데서 오는 미안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침대에 앉아 멍하니 있던 그 순간, 문밖에서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민여진은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누구세요?”“민여진 씨, 저예요!”‘진시우?’흥분한 그의 목소리에 민여진은 당황하며 문을 열었다.“무슨 일이에요?”“임재윤한테 문제가 생겼대요. 지금 수술실로 들어갔다니까 우리 빨리 병원으로 가요.”민여진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앞을 볼 수 있는 상황이었어도 눈앞이 아득해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허둥지둥 탁자 위에 걸쳐둔 코트를 더듬어 입으며 물었다.“우리가 병원에서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잖아요. 갑자기 어떻게 된 거예요?”평소 유머러스하던 진시우의 목소리에도 긴장감에 섞여 있었다.“저도 자세한 건 모르겠어요. 하지만 임재윤의 병은 원래 갑작스러운 상황이 올 수도 있는 병이었어요. 병원에서는 지금 수술 중이라고만 알려줘서 일단 빨리 가봐야 할 것 같아요.”걸어서 갈 여유가 없던 두 사람은 즉시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응급실 복도에 도착하자, 임재윤은 아직 수술 중이었다.진시우는 민여진을 자리에 앉히고 의사를 찾아갔다. 막막함과 불안함에 민여진은 도저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 수술실 앞에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민여진은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 이상 없어 보이던 사람이 왜 갑자기 위중한 상태로 수술실까지 들어간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순간 손끝에서 차가움이 느껴지더니
민여진도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저도 같이 가도 될까요? 배가 조금 고파서 호텔 레스토랑에서 뭐라도 먹어야겠어요.”진시우는 거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민여진이 문 앞까지 걸어갔을 때, 뒤에서 휴대전화 소리가 전해졌다.“여진아, 얘기 좀 할까?”민여진은 깜짝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무슨 얘기?”임재윤은 눈썹을 찌푸리며 휴대전화를 두드렸다.“네가 알고 싶은 것들에 대해서.”“알고 싶은 게 없는데?”민여진은 자기 말이 너무 차갑게 들릴 것 같아 이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재윤아, 뭐 좀 먹으러 가는 거야. 곧 돌아올게. 그때 다시 얘기하자. 알았지?”임재윤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민여진은 진시우와 함께 병실을 나섰다.진시우는 무슨 재미있는 장면이라도 본 듯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내가 없는 사이에 분명히 무슨 일이 있었네요.”“별일 아니었어요. 그냥 대화를 조금 나눈 것뿐이에요.”민여진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말했다.“어서 가죠.”호텔 방으로 돌아오자, 서비스로 음식이 직접 배달되어 민여진은 레스토랑까지 내려갈 필요도 없었다. 진시우가 미리 말해둔 모양이었다.그녀는 조금씩 음식을 먹으며 생각에 잠겼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전화벨이 여러 번 울린 후였다. 급히 받아 들자, 조현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바빠? 왜 이렇게 전화를 늦게 받아?”“아니요. 휴대전화를 멀리 두고 다른 테이블에서 밥을 먹고 있었어요.”“그랬구나.”조현준은 잠시 침묵하더니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여진아, 그 일은 확인했어?”“무슨 일이요?”잠시 멈칫하던 민여진은 이내 무슨 일인지 알아차리고 말을 이었다. 임재윤의 신분에 관한 이야기였다.“네. 확인했어요. 임재윤은 원래 진씨 가문 운전기사의 아들이었대요. 선천성 심장병에 말도 못 하니까 자주 외출하지 못했던 거고, 나중에 치료를 위해 아버지와 함께 독엔에 갔대요. 아마 그래서 현준 오빠가 못 찾았나 봐요.”조현준은 긴 침묵 끝에 다시 물었다.“너는 그 말을 얼마나 믿어?”모든 걸
임재윤이 직접 말하지 않아도 민여진은 느낄 수 있었다. 평소 감정 기복이 거의 없던 임재윤이 여자 친구라는 말이 나오기 바쁘게 마치 다른 사람처럼 분위가 달라졌다.그 여자는 임재윤의 기분을 좌우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마음속에 중요한 존재인 것 같았다.민여진이 화제를 바꾸려는데 임재윤이 다시 물었다.“정말 궁금해?”“아니.”민여진은 얼른 부인했다. 처음엔 그냥 할 말이 없어서 꺼냈던 말이었고 더불어 임재윤이 왜 자신에게 그런 감정을 품게 되었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반응에 민여진은 자신이 선을 넘었음을 알아차렸다.임재윤은 민여진한테 다가가려다 멈춰서더니 고개를 숙이고 타자를 했다.“미안해. 많이 놀랐어? 나는 그냥 과거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서...”“괜찮아.”민여진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남이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함부로 꺼내는 걸 싫어하는 건 당연한 거야. 오히려 선은 내가 넘었으니까 사과해도 내가 해야지.”임재윤은 눈살을 찌푸렸다. 글을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더니, 오랜 침묵 끝에 타자했다.“넌 남이 아니야.”민여진은 미소를 지었다.“그래. 알았어. 너무 신경 쓰지 마. 누구나 털어놓기 싫은 비밀과 건드리면 안 되는 선이 있는 법이니까.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돼. 네 선을 알았으니까 두 번 다시 넘지 않을게.”그녀는 급히 소파에서 일어났다.“배 안고파? 간호사에게 음식을 언제 가져오는지 물어볼게. 금방 돌아올 테니까 잠깐만 있어.”병실 문을 나서는 민여진의 표정은 왠지 어두워 보였다. 정확한 이유가 뭔지도 모르게 마음이 불편했고 복잡했다.어쩌면 처음 느껴보는 임재윤의 냉담함 때문일 수도 있고, 그 여자가 임재윤의 아픔이었다는 진시우의 말 때문일 수도 있었다.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여자는 임재윤의 마음속에 중요한 사람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그럼... 나는 뭐지?’난데없이 튀어나온 생각에 민여진은 스스로에게 깜짝 놀라더니 마음을 다잡으며 중얼
임재윤은 민여진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물었다.“그냥 내가 아프기 때문이야? 만약 너 때문에 아픈 게 아니었다면, 아예 나를 보러 오지도 않았을 거야?”민여진이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다시 조용히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여진아, 인제 그만 돌아가. 진시우더러 돌아갈 차를 준비해달라고 할게. 지금쯤이면 안진 마을까지 가는 길도 뚫렸을 거야. 이모 집에서 편하게 지내. 병원에는 그만 오고.”“싫어.”민여진은 생각할 여유도 없이 말이 먼저 튀어 나갔다. 임재윤이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자, 민여진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을 이었다.“혼자 병실에 있으면 심심할 거 아니야. 게다가 수술 후 회복 기간도 긴데, 내가 옆에서 말동무가 되어주면 좋잖아.”민여진의 말에 임재윤은 천천히 타자했다.“괜찮아. 나는 늘 혼자였어. 이젠 익숙해.”늘 혼자였다는 임재윤의 말에 민여진은 문득 자신의 과거가 떠올랐다.감옥에서, 박진성의 별장에서, 도망치던 차 안에서조차 그녀는 언제나 혼자였다.고독을 즐기려고 노력했지만 항상 두려웠고, 언제라도 사라질지 모를 관심에 더욱 불안해했다.‘임재윤도 같은 마음이었을까? 고백할 때 우리가 같은 종류의 사람이라고 했던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을까?’“수술 끝날 때까지 기다릴게. 지금 돌아가도 신경 쓰여서 편하게 못 있어. 어쨌든 네가 아픈 건 나와 연관되어 있잖아. 무엇보다 지금은 네 곁을 지켜줄 사람이 필요하기도 하고.”민여진을 빤히 응시하던 임재윤은 그녀의 걱정과 고집에 표정이 차츰 누그러졌다.“여진아, 너 이렇게 착하면 누군가한테 이용만 당할 거야.”민여진이 웃으며 되물었다.“그럼 넌 나를 이용할 거야?”임재윤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답했다.“그럴 수도 있지.”예상치 못한 대답에 멈칫하던 민여진은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그때 휴대전화의 기계음이 다시 울려 퍼졌다.“나는 지금도 널 이용하고 있잖아. 내가 아픈 건 순전히 내 문제인데도 네 착한 마음을
‘마음속에 아직도 박진성이 있냐고?’민여진은 단지 자신이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박진성을 산 채로 가죽을 벗기고 뼈를 발라내고 싶었다.진시우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흐르고 분위기가 편안해지자 비로소 웃으며 말을 꺼냈다.“다행이네요. 난 임재윤이 마음에 다른 남자가 있는 여자와 함께하는 걸 원하지 않아요. 여진 씨가 박진성과 아무 관계도 없다면, 임재윤과 잘 시작해 봐요.”다시 임재윤의 이름이 나오자, 민여진은 표정이 달라졌다.“저와 임재윤은 아무런 사이도 아니에요.”“어떤 사이인지 여진 씨가 저보다 더 잘 알겠죠.”진시우는 잠시 멈추었다가 말을 이었다.“여진 씨가 임재윤의 신분에 대해 우려하고 있는 것도 알아요. 이해해요. 박진성 일 이후로 경계심을 갖는 건 당연하죠. 하지만 임재윤과 박진성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걸 여진 씨도 잘 알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임재윤은 절대 여진 씨를 다치게 하지 않아요. 임재윤이 이렇게까지 하는데 민여진 씨가 아직도 경계를 못 풀겠다면 대체 어떻게 증명해야 할까요? 그렇다고 마음을 꺼내 보여줄 수도 없는 일인데.”그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한 뒤, 민여진을 위해 마스크와 모자를 사러 갔다.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던 민여진은 진시우의 말이 계속 맴돌아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임재윤과 박진성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박진성은 차갑고 독단적이며, 항상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며 타인을 해치는 데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었다. 반면 임재윤은 부드럽고 세심한 사람이었다. 그는 모든 방면에서 민여진을 먼저 배려해 줬고, 아픈 몸으로도 민여진이 추울까 옷까지 벗어주는 사람이었다.성향이 이렇게나 상반된 두 사람인데, 왜 민여진은 자꾸만 임재윤이 박진성이라는 착각을 하고 의심하는 건지 본인조차 이해되지 않았다.‘나 왜 이러지? 박진성이 같은 병원에 있다는 말만 듣고 이렇게 의심하다니.’민여진은 머리가 아파 눈을 질끈 감았다. 이때 물건을 사
진시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민여진 씨를 위해 싫어하는 걸 참고 먹다니, 정말 진심으로 좋아하는 모양이네요.”예전이었다면 진시우의 말을 그저 농담으로 넘길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당황스럽기만 했다. 민여진은 한참 지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화제를 돌렸다.“진시우 씨, 임재윤하고 어릴 적부터 함께 지냈죠?”“네? 그렇다고도 할 수 없어요.”진시우는 과거를 회상하며 말했다.“재윤이가 한동안 독엔에 가 있어서 떨어져 지내다가 나중에야 다시 연락이 닿은 거예요. 왜요?”“궁금해서요. 임재윤 주변에는 여자가 별로 없었나요? 아니면...”아니면 어떻게 나 같은 사람에게 마음을 줄 수 있겠냐는 뜻이었다.진시우는 웃으며 말했다.“오해하고 있네요. 임재윤 주변에는 여자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임재윤을 좋아하는 여자도 적지 않았어요. 요즘 여자들은 차가운 이미지를 가진 남자를 좋아하잖아요. 임재윤은 말이 없으니까 딱 그런 이미지였고 성격도 세심하기까지 해서 더 인기가 많았죠. 예전에 사귀었던 여자 친구는...”진시우는 이 주제가 적절하지 않음을 깨달은 듯 급하게 화제를 바꾸었다.“어쨌든 외로워서 민여진 씨에게 관심을 가진 건 아니에요. 임재윤은 진심으로 민여진 씨를 좋아하는 거예요.”하지만 민여진은 다른 말이 더 궁금했다.“임재윤에게 여자 친구가 있었어요?”“네.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요.”“그 여자는 어떤 사람이었어요?”진시우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여진 씨, 제가 이 질문에 꼭 대답해야 하나요? 궁금하면 임재윤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어때요? 친구의 아픈 기억을 꺼내고 싶지 않아서요.”‘아픈 기억? 임재윤의 전 여자 친구는 그에게 아픔으로 남은 건가?’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민여진은 그 안에 수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음을 깨달았다.식사를 마치고 민여진은 진시우와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길을 가던 중, 민여진은 어제 박진성을 우연히 마주친 일이 떠올라 걸음을 멈췄다.“진시우 씨, 돈을 좀 빌려주실래요? 모자랑 마스크를 사려고요.
민여진의 얼굴을 본 문채연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여기 왜 나타난 거지? 누구 때문에 이 병원까지 온 거야?’답은 너무 뻔했다. 이제 겨우 박진성과의 관계가 돈독해지고 있는 시점에 민여진이 나타나자, 화가 치밀어 오른 문채연은 이를 악물었다.‘쓰레기 같은 년! 죽은 척 도망쳐놓고 이제 와서 후회라도 하는 거야? 다시 박진성 앞에 나타나서 그 사람 마음을 흔들어 놓을 생각이라면 꿈 깨! 일 초도 못 나타나게 할 거니까.’문채연의 눈에는 독기가 서렸다....민여진은 침대에 누웠지만 머릿속을 맴도는 의문에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임재윤이 어떻게 나를 좋아할 수 있지? 내가 뭐라고? 말을 못 하는 그와 같이 나도 앞을 못 보는 장애인이라서? 그런 거라면 너무 경솔한 결정 아닌가? 그리고 시각장애인도 많이 봤을 텐데 왜 하필...’어찌 되었든 민여진은 갑작스러운 그의 마음이 선뜻 받아들여 지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조현준도 그렇고 이제 민여진은 누구한테 마음을 줄 용기가 없었다.박진성이라는 사람 때문에 받았던 그 수많은 상처는 이미 그녀의 마음을 무너지게 했다.민여진은 억지로 눈을 감고 겨우 잠에 들었지만, 악몽을 꾸었다.병원에서 박진성을 마주치는 꿈이었다. 박진성은 그녀의 저항을 무시하고 사람들을 시켜 그녀를 묶은 채 양성으로 끌고 갔다.잠에서 깬 민여진은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박진성의 강압적인 태도와 차가운 얼굴이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정신을 차리자,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민여진이 문을 열자, 이번에는 직원이 아니라 진시우였다. 그는 웃으며 물었다.“민여진 씨, 혹시 제가 휴식을 방해한 건 아니죠?”“아니요. 방금 막 일어났는데, 마침 잘 왔어요.”“다행이네요. 같이 식사하러 갈래요? 병원도 가야 하고. 그런데 임재윤은 오늘 이상하게 문자를 여러 번 보내네요. 민여진 씨 상태를 계속 물어보던데, 혹시 싸우셨어요?”싸운 건 아니지만, 그것보다 더 어색한 상황이었다. 민여진은 설명하기 어려워 웃으며
임재윤의 말에 민여진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서 있었다.“뭐라고?”잘못 들은 줄 알고 되물었지만, 임재윤은 단호하게 대답했다.“너를 좋아해. 첫눈에 반했어.”임재윤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손가락을 움직였다.“사실 병이 발작하지 않았다면 엊그제쯤에 이미 말했을 거야. 그때 너랑 만나자고 약속했던 이유가 널 좋아한다고 고백할 생각이었거든.”“나를 왜?”민여진은 머리가 멍해졌다.‘임재윤이 나를 좋아한다고? 어떻게? 이게 말이 돼?’“왜라니?”임재윤은 담담한 표정으로 반문했다.“너를 처음 본 순간부터 너여야만 한다는 느낌이 들었어. 이건 지난 20여 년 동안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야. 아마 이런 걸 첫눈에 반했다고 하겠지?”민여진은 주체할 수 없이 빨리 뛰는 심장에 호흡이 거칠어졌다.‘임재윤이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고? 너무 터무니없는 말이잖아.’“이런 내 모습에 반했다고? 너 같은 조건이면 더 좋은 여자를 만날 수도 있잖아.”“외모만으로 첫눈에 반했다면, 그건 첫눈에 반했다는 말을 모욕하는 거야.”임재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타자를 이었다.“널 처음 본 순간 그런 느낌이 들었어. 어쩌면 우린 같은 종류의 사람이겠구나. 교회에서 마주쳤을 때부터 줄곧 너를 지켜봤거든. 주변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는 네 모습이 좋았고 그럼에도 반짝반짝 빛나는 네가 예뻐 보였어.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내 시선은 온통 너한테 가 있더라. 여진아, 만약 네가 앞이 안 보이고 내가 말을 못하는 게 하늘이 정해준 거라면, 하늘은 아마도 나를 네 눈이 되게 하고 너를 내 목소리가 되게 하려고 그랬던 게 아닐까? 우린 아마 천생연분일지도 몰라.”차가운 기계음이 내뱉은 그 말은 왠지 모르게 뜨겁게 전해져 민여진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그녀는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임재윤, 농담하지 마.”임재윤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민여진이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 앞에 다가갔다. 뜨거운 그의 입술이 그녀의 얼굴
“넌 안 피곤해?”“아까 푹 쉬어서 괜찮아.”임재윤은 무언가 말하려다 멈추고는 간단히 알겠다고 답한 뒤 침대에 누웠다.이어서 민여진은 불을 껐고 깊은 밤이 되자, 병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민여진은 임재윤의 호흡이 평온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가 깊이 잠든 걸 확인하고 소파에서 일어나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방 안은 캄캄했지만, 그녀에게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던지라 호흡소리만으로도 임재윤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정신을 가다듬은 민여진은 임재윤한테 다가가 조용히 손을 뻗어 손끝으로 천천히 그의 눈썹과 눈을 쓰다듬었다.그녀는 조금씩 조금씩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만져봤다. 넓은 이마, 높고 곧은 코.민여진이 눈을 뜬 채 손가락을 입술 근처까지 가져가려던 찰나 임재윤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어둠 속에서 민여진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임재윤의 시선이 느껴졌다.손에 힘을 주던 임재윤은 민여진임을 알아차리고는 이내 힘을 풀더니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바닥에 글자를 썼다.[뭐 하는 거야?]민여진은 호흡을 가다듬었지만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임재윤, 너 도대체 누구야?”그녀는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임재윤은 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휴대전화를 꺼내 물었다.“여진아, 그게 지금 무슨 말이야?”민여진은 더 이상 속아 넘어가지 않으려는 듯 마음을 다잡으며 차분하게 말했다.“현준 오빠가 지금 동진에 있어. 오빠한테 너에 대해서 조사를 좀 해달라고 부탁했었거든. 그런데 동진에는 임재윤이라는 사람이 없대. 그러니까 너 대체 누구냐고.”임재윤은 한참 침묵하다 다시 타자를 했다.“조현준의 말은 믿으면서 나는 안 믿는구나.”“너를 어떻게 믿어?”민여진은 혼란스러웠다.“임재윤, 난 너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 신분이 뭔지, 집은 어디인지, 가족은 몇 명인지 심지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몰라.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건, 나 같은 여자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거야. 다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