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별아는 격앙된 강준을 차분하게 바라보았다.강준의 얼굴은 숨이 막힌 듯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숨소리도 거칠었다.별아는 더 이상 말다툼을 하고 싶지 않아서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과거를 내려놓는 것도 하나의 성장이라고 생각해. 우리 모두 성장해야 해. 내 성장은 과거의 증오를 놓는 거고, 너의 성장은 그 집착을 놓는 거야.”“난... 놓을 수 없어.”강준이 눈시울을 붉히면서 말했다. 눈가에는 금방이라도 넘칠 것 같은 눈물이 고여 있었다.“별아, 딱 한 번만... 다시 한 번만 나를 선택해 주면 안 될까? 한 번이면 돼. 정말 한 번만...”강준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리면서 결국 눈물이 얼굴을 가득 적셨다.이토록 초라한 모습, 이토록 깊은 감정이 별아의 마음속 가장 여린 곳을 찔렀다.‘미련이 남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는 거겠지.’이번 생에서 별아는 더 이상 용감해지고 싶지 않았다. 불나방처럼 다시 불속으로 뛰어들고 싶지 않았고, 또다시 알 수 없는 오해와 차가운 외면을 겪고 싶지도 않았다.“하강준, 같은 길을 다시 걷는다고 해서 꼭 행복해지는 건 아니야. 우리도 이제 어리지 않아. 세 번의 생을 겪었으면, 이제는 내려놓는 법도 배워야 하지 않을까?”“어쩌면 지금 다른 어딘가에서는 송별아와 하강준이 여전히 사랑하고 있을지도 몰라. 아이들도 몇 명 낳고, 의심도 숨김도 오해도 없이 아주 잘 살아가고 있을 거야. 그걸로 충분해.”강준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그 다른 어딘가의 하강준은... 지금의 내가 아니야!’“별아... 그러지 마.”격한 감정 때문인지, 아니면 병세가 더 악화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강준이 갑자기 검붉은 피를 한 모금 토해냈다.그리고 그대로 별아 앞에 무릎을 꿇듯 쓰러졌다.별아는 눈앞이 하얘졌다.“괜찮아? 하강준, 이러지 마. 날 놀라게 하지 마. 왜 이렇게 무리해? 몇 마디 했다고 이렇게까지... 하강준, 하강준...”강준의 머리가 힘없이 떨어졌다. 의식을 잃은 건지, 아니면 더 나쁜 상태인지 알 수 없었다
별아의 눈빛에는 낯설면서도 익숙한 증오감이 서려 있었다.강준은 그런 감정을 끌어내려던 게 아니었다.그 순간 더 캐묻고 싶지 않고 그저 안아 주고 싶었다.별아는 한 걸음 물러섰다. 온몸에서 쉽게 다가설 수 없는 거리감이 흘러나왔다.“너도 피곤할 거야. 이제 그만 쉬어.”“별아야, 혹시 뭔가 오해한 거 아니야?”하태산이 직접 찾아온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정략결혼 이야기.돈과 지분을 내밀어, 별아를 치우고 길을 트겠다는 계산.강준은 설명하고 싶었다.그러나 별아는 단호하게 막아섰다.“오해는 없어. 우린 원래 아무 사이도 아니었어. 네 일도, 하씨 가문의 일도 나랑은 상관없어. 설명할 필요도 없고, 난 피곤해. 먼저 쉴게.”별아는 더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혼자 계단을 올라서 은준의 방으로 들어갔다.별아의 기색이 가라앉은 걸 본 노숙현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사모님, 하태산 어르신은 평생 강하게 살아오신 분이에요. 어르신이 하신 말씀,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별아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하씨 가문에서 여자의 쓰임은 늘 똑같았다.필요하면 쓰고, 불필요해지면 버리는 바둑판 위의 돌 신세.과거의 자신과 지금의 손영애, 그리고 오래전의 남정이 그랬다.상처받는 쪽은 늘 여자였고, 하씨 가문을 떠나는 쪽도 늘 여자였다.하씨 가문에 남아서 좋은 결말을 맞은 여자가 과연 있었을까?별아는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이제는 더 이상 하씨 가문의 사람이 아니니까.“이모님, 저 할아버님을 원망하지 않아요. 그분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에요. 저 때문에 하씨 가문의 백 년 계획이 무너진다면, 그건 분명 큰 죄겠죠. 기회가 되면, 하 대표에게 잘 이야기해 볼게요. 할아버님 말씀을 따르도록요.”“사모님... 정말로 두 분은 다시 함께하실 수 없는 건가요?”노숙현은 그동안 강준의 변화를 지켜봤다.사람은 실수할 수 있기에, 고칠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진전이다.게다가 두 사람 사이에는 아이가 있었다.은준은 아빠를 좋아하
하태산이 내민 카드는 상당했다.의도는 분명했다.별아를 강준에게서 떼어내려는 것이다.조금 순화해서 말하자면, 강준의 정략결혼 앞길을 막지 말라는 뜻이었고, 하씨 가문의 앞길을 방해하지 말라는 경고였다.하씨 가문은 원래 그런 식으로 움직였다.별아는 한때 하태산만은 다를 거라고 믿었다.하지만 착각이었다.하태산 앞에서 주식양도계약서를 받아 든 별아는 바로 펼쳐서 지분율을 확인했다.전생에서의 하명식보다 훨씬 통이 컸다.이번에는 무려 하산그룹의 지분 8퍼센트였다.현금으로 환산하면, 평생 돈을 펑펑 써도 다 못 쓸 엄청난 금액이었다.집사 진차균이 다시 설명했다.“이 카드에는 현금 100억 원이 들어 있습니다. 사모님과 은준 도련님이 사는 데에는 충분한 금액이지요. 물론 아이가 짐이 되고 향후 재혼에 걸림돌이 된다면, 하씨 가문에서 책임지고 키우겠습니다.”이 정도 조건이라면, 대부분은 단번에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별아 역시 솔직한 심정으로는 시원하게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싶었다.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단순하게 결정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별아는 서류를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 하태산을 바라봤다.시선은 차분했고 목소리도 흔들림이 없었다.“할아버님 뜻은, 제가 지금 당장 떠나라는 말씀이신가요?”하태산의 눈동자를 곧바로 마주한 채, 별아가 말을 이었다.“강준 씨에게 약속했습니다. 다리가 나을 때까지 곁에 있겠다고요. 제가 지금 떠나면, 강준 씨가 치료를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 결과까지도... 할아버님께서 감당하실 수 있다면, 저는 상관없습니다.”말 그대로 한 수를 찔러 넣은 질문이었다.하태산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그러나 이내 입가에 다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당장 내쫓겠다는 뜻은 아니다. 네가 강준이에게 우리 가문을 먼저 생각하라고 설득해 주기만 해도, 할아버지는 충분히 고맙다.”“강준의 다리가 나을 때까지는 친구라는 이름으로 곁에 있어도 좋아. 그게 가장 이상적인 그림이지.”‘고맙다’는 말의 의미는 분명했다.별아가 이
별아의 일상은 아주 단조로웠다.출근하고, 강준의 다리 치료에 동행하고, 주말이면 은준을 어린이집에서 데려왔다.철저한 집과 회사만 반복하는 생활.은준이 집에 있을 때만 그 공간에 웃음소리가 흘렀다.그때 노숙현이 급히 들어왔다.“사모님, 하태산 어르신께서 오셨습니다.”‘할아버님?’별아가 잠시 멍하니 서 있는 사이, 하태산은 이미 진차균의 부축을 받으며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은준에게 하태산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별아의 뒤로 살짝 숨고는, 커다란 눈을 굴리면서 호기심 섞인 시선으로 바라봤다.“은준이가 얼마 전에 아팠다고 들었다. 그런데도 내가 시간이 나질 않아서 찾아오질 못했구나.”하태산이 은준을 향해 손짓했다.“은준아, 나는 증조할아버지란다. 이리 와서 얼굴 좀 보자.”은준은 낯선 기운이 무서웠다.앞으로 나가지 않고, 오히려 별아 뒤로 더 숨어버렸다.“무서워하지 마. 증조할아버지는 안 잡아먹어. 이리 온.”은준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별아가 몸을 돌려 은준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가서 증조할아버님께 인사드려야지. 예의 바르게.”“응...”고개를 끄덕인 은준이, 조심조심 하태산 앞으로 다가가서 작은 목소리로 인사했다.“증조할아버님, 안녕하세요.”“그래. 네가가 별아 아들이지? 이름이 뭐야?”“송은준.”그 순간, 하태산이 미간을 단번에 찌푸렸다.그리고 묵직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되물었다.“왜 송은준이냐?”놀란 은준은 곧장 별아 뒤로 달려가 숨어버렸다.하태산의 시선이 별아에게로 옮겨졌다.“별아야, 이건 네가 잘못한 거야. 이 아이는 하씨 가문의 핏줄인데, 왜 송씨를 쓰게 놔뒀어? 당장 ‘하은준’으로 이름을 바꿔.”별아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할아버님, 오늘 찾아오신 이유가 있으신가요?”하태산은 주변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물렸다.진차균만 자리에 남았다.“할아버지가 오늘 온 건, 네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어서다.”잠시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별아야, 이 할애비도 너
“앉아.”별아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타박하면서, 알코올이 묻은 솜으로 강준의 코 주변에 남은 피를 조심스럽게 닦아냈다.“봐라. 밤에 늦게까지 안 자니까 이런 벌을 받는 거지.”알코올의 차가운 촉감에 강준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했다.별아는 고개를 숙인 채 상처에 집중하고 있었다.길고 곱게 말린 속눈썹이 조명 아래에서 그늘을 만들었다.부드럽고 지나치게 온화한 얼굴이었다.별아에게서 은은한 난초 향이 흘러나오면서, 계속 강준의 숨결을 파고들었다.더 치명적인 건, 몸을 숙이는 순간 실크 잠옷의 깃 아래로 드러난 매끄러운 피부였다.강준의 시선 한가운데로 정확히 들어왔다.겨우 멎었던 코피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다시 쏟아졌다.“하강준, 설마 백혈병 같은 거 아니지? 왜 이렇게 피가 안 멎어?”놀란 별아가 강준의 얼굴을 두 손으로 받치면서 물었다.억지로 강준의 고개를 젖히면서 별아가 말했다.“안 멎으면 그냥 삼켜. 기침하다가 더 다치면 안 돼.”급하게 휴지를 뽑아 코에 틀어막은 강준이 잔뜩 코가 막힌 목소리로 말했다.“병은 없어. 그냥 열 받은 거야.”“열 받았으면 물을 많이 마셔.”별아가 물을 가지러 가려고 돌아섰다.그 순간, 강준이 손목을 붙잡았다.그리고 가볍게 끌어당기자, 별아의 몸이 그대로 강준의 품 안에 들어왔다.강준의 몸은 뜨거웠다.얇은 잠옷 따위로는 이 열기를 가릴 수가 없었다.숨결 사이에 애매한 열기가 맴돌았다.“별아.”강준의 목소리는 심하게 잠겨 있었다.눈빛에는 별아가 너무도 잘 아는, 그래서 더 불안한 욕망이 일렁이고 있었다.“나 경계하지 마. 혼자서는 잠이 안 와. 같이 자면 안 될까?”강준의 팔이 별아의 허리를 단단히 감쌌다. 고개를 든 남자의 얼굴에는 체면도 자존심도 없는 애원만 남아 있었다.“안 돼.”별아는 단호하게 말했다.그러나 심장은 말과 다르게 뛰고 있다는 걸 별아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강준은 별아를 놓지 않은 채 그대로 별아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거절하지 마. 그러면... 나 진짜
“이제 그만 좀 해.”하명식의 시선에는 철없는 행동을 꾸짖는 기색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그 순간, 손영애 스스로도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하명식의 앞으로 성큼 다가간 손영애가, 주저 없이 손을 들고 따귀를 내리쳤다.“하명식 씨, 이건 당신이 나한테 진 빚이에요. 오늘로 끝이에요. 이제 우리는 남남이에요.”“하씨 가문의 체면이니 뭐니 하지만, 더 이상 당신 곁에 내가 머물 이유가 없어요. 잘 있어요.”손영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하명식은 숨을 들이켰다가 곧바로 뒤따라 나갔다.“멈춰. 거기 서! 손영애, 거기 안 서?”넓은 거실에는 결국 강준과 남훈만 남았다.같은 공간에 더 머무르고 싶지 않았던 강준이 지팡이를 짚고 몸을 돌리려는 순간, 남훈이 입을 열었다.“형님, 오씨 가문과의 혼인은 정말 흔치 않은 기회입니다. 조금만이라도 생각해 보실 수는 없으신가요?”눈썹을 미세하게 찌푸린 강준이 고개를 돌려 남훈을 노려봤다.“누가 네 형님이지?”남훈은 어깨를 으쓱하며 가볍게 웃었다.“그렇게까지 예민하실 필요 있습니까? 형제끼리 힘을 합치면 못 할 게 없잖아요. 제가 다 가져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형님이 필요 없는 몫만 조금 챙기겠다는 건데, 왜 그렇게 적대적으로 나오십니까?”강준은 짧게 웃었다.차갑고 조롱이 가득한 웃음이었다.금속 지팡이를 들어 올린 강준이 지팡이 끝부분으로 남훈의 가슴을 강하게 눌렀다.“내가 동의하지 않으면, 네가 말하는 그 ‘자투리’조차 손대지 못해. 고남훈, 내 아들한테 가짜 약 먹인 일... 난 아직도 안 잊었어. 계산은 천천히 할 테니까 서두르지 마.”남훈은 두 손을 들어 보이면서 항복의 제스처를 취했다.그러나 눈빛에는 도발적인 웃음이 가득했다.“알겠습니다, 형님.”지금의 남훈은 지나칠 만큼 대담했다. 혼인은 이미 자기 몫이라고 확신하는 표정이었다.강준은 하명식을 잘 알고 있었다.하명식이 먼저 나서서 남훈을 대신 세우자고 말할 인물은 아니었다.그건 하태산 앞에서 절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