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의 밤, 하 대표님이 첫사랑을 따라 죽었다의 모든 챕터: 챕터 1 - 챕터 10

100 챕터

제1화

“하 대표님, 사모님이 출산하셨는데... 지금 산모가 대량 출혈 중입니다.”“포기해.”“아기는요?”“죽으면 버려.”...송별아가 힘겹게 눈을 떴을 때, 자신은 차 안에 앉아 있었고, 재단이 주최하는 자선 만찬이 열리는 시내 특급 호텔로 향하는 중이었다.가을바람은 서늘하고, 햇살은 눈부셨다. 별아의 콧등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나... 분명히 수술대에서 죽었는데...’그때 피는 멈출 기미가 없었고, 의사와 간호사들이 정신없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배 속에 얼마나 많은 거즈가 들어갔는지도 알 수 없었다.그리고 의식이 서서히 멀어져 가던 순간, 별아는 하강준의 차갑고 무정한 목소리를 들었다.“응급처치 그만둬.”목이 막혀 소리조차 나오지 않았지만, 별아는 끝까지 강준에게 매달리고 싶었다.‘제발... 포기하지 마... 제발...’뒤이어 들려온 건, 더욱 잔인한 목소리였다.“애는 죽었어?”“아직 살아 있습니다, 대표님.”“보육원에 보내.”그는 자신의 친자식마저 버렸다.절망 속에서 별아의 죽음은 의사가 예상한 시간보다도 빨리 찾아왔다....“사모님, 도착했습니다.”운전기사가 공손하게 문을 열었다.“대표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별아는 마음을 다잡고 한참이나 호흡을 고른 후 차에서 내렸다. 이어서 멀리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강준을 바라봤다.맞춤 제작한 정장 차림의 강준은 키가 크고 날렵했다. 그는 깊은 눈매, 손짓 하나에도 품위가 묻어났고, 소매 끝에서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커프스 버튼은 더욱 눈에 띄었다.그건 별아가 결혼기념일 선물로 준 것이었다.하지만 지금은 강준의 뒤에 선 여자아이가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고 있었다.“여보.”성큼 다가와 별아 앞에 선 강준의 곁에는 어린 여자가 따라붙어 있었다.“이 친구는 소시정이라고 해. 우리 회사가 구조 활동 나갔을 때 알게 된 아이지. 지진으로 가족을 전부 잃고 불안장애까지 생겨서...”“내가 집으로 데려오려 해. 우리가 직접 돌봐주다가 상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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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별아는 연회장을 빠져나와 차에 올라탔다.운전기사에게 잠시 자리를 비켜달라 하고, 핸드폰을 들어 친구이자 변호사인 연민희에게 전화를 걸었다.“나... 하강준이랑 이혼할 거야.”민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진짜...? 장난 아니지?]“얼른 하강준 뒷조사 좀 해줘. 그리고 협의이혼 합의서도 빨리 초안 잡아. 최대한 빨리.”별아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차분했다.변호사로서의 민희는, 별아가 단순히 술김이나 다툼 때문에 충동적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걸 단번에 알아챘다.[알았어. 최대한 서둘게.]“고마워.”전화를 끊은 뒤, 별아는 핸드폰 화면을 멍하니 바라봤다. 화면 속 배경은 여전히 자신과 강준의 결혼사진이었다.그때 그렇게 환하게 웃었던 얼굴이, 지금은 참으로 비웃음 같았다.“별아, 평생... 아니, 다음 생까지, 그다음 생까지 널 사랑할 거야. 죽을 때까지.”“자기야, 널 아내로 맞은 건 내가 몇 생을 공들여 얻은 복이야. 널 매일 웃게 해줄게. 울게 하지 않을 거야.”“여보, 우리 아기 낳자. 우리 사랑의 증거.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아기가 될 거야.”“별아... 우리 여보...”“...”별아의 가슴은 한 치씩 갉아 먹히듯 아파왔다. 입꼬리가 서늘하게 휘어졌다.‘하강준, 벌써 네 맹세를 잊어버렸지. 우리 아이도...’별아는 눈을 감았다. 날카로운 손톱이 가죽 시트를 깊게 파고들었다. 그리고 입술이 떨리더니, 뜨거운 눈물이 두 줄기 흘러내렸다.그날 밤, 하늘이 완전히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린 뒤에야 별아는 집으로 향했다.그녀가 익숙한 집의 현관문을 열자 가사도우미들만 보였고, 강준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이모님, 대표님 아직도 안 들어왔어요?”강준이 돌아오지 않더라도, 적어도 마음을 빼앗긴 시정은 집에 데려다 줬어야 했다.“소시정 씨는요? 아직 안 왔나요?”가사도우미는 당황한 얼굴로 대답했다.“사모님, 대표님은 안 들어오셨습니다. 말씀하신 소시정 씨는... 본 적이 없는데요.”별아는 잠시 굳어섰다.이내 천천히 슬리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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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별아는 쓴웃음을 흘렸다. 자신은 전생의 별아는 그저 ‘질투 많은 여자’였다.강준은 별아를 그렇게 낙인찍었고,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들었다.별아가 임신 중이던 그 시절, 강준은 매일같이 그녀를 ‘질투녀’라며 몰아붙였다.심지어 어서 이 집을 떠나라고, 자기 인생에서 사라지라고.강준은 이혼이라는 단어만 꺼내지 않은 건, 자기 체면만큼은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비겁한 남편으로 불리는 건 원치 않았던 것이다.그때의 별아는 반쯤은 인간도 반쯤은 유령도 아닌 상태였으며, 끝내 비극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그래서... 날 아직 사랑하긴 해?”별아가 다시 물었다.강준은 이불을 걷어차고 침대에서 일어났다.“쓸데없는 소리 좀 그만해. 넌 지금 잠이나 푹 자. 난 객실에서 잘게.”그 말은 도망이었다.급하게 빠져나가는, 명백한 회피였다....아침.별아가 계단을 내려왔을 때, 시정은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에서 서툴게 조식 준비를 하고 있었다.강준은 문가에 팔짱을 낀 채 서서, 시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입가에 머금은 웃음은, 당장이라도 흘러 넘칠 듯했다.마치 이 집의 주인은 강준과 시정 단 둘인 듯, 별아는 잘못 들어온 제3자인 것만 같았다.시정이 만든 건 카레라이스였다.냄비가 뜨거워 손에 잡히지 않자, 강준이 대신 받아 들었다.시정은 얼떨결에 귓불을 만지며 수줍게 웃었다.그 화면은 보기 좋을 만큼 따뜻했다.별아의 존재 자체가 죄처럼 느껴질 정도로.시정은 고개를 돌리다 별아와 시선이 마주쳤다.당황이 스친 눈빛, 그리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별아 언니, 제가 아침을 조금 해봤는데...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어요.”별아의 시선은 식탁 위 두 벌의 수저로 옮겨갔다.그 자리엔 애초에 별아의 몫은 없었다.별아가 내려오는 소리를 듣고, 강준이 고개를 들었다.“시정이 아침 했어.”어젯밤과는 달리,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였다.“여보, 늘 위가 안 좋잖아. 밥은 잘 소화돼. 조금이라도 먹어.”강준의 온화함은 별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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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별아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녀가 신경 쓰는 건 강준의 재산을 얼마나 가져올 수 있느냐가 아니었다. 오직 강준이 얼마나 깔끔하게 이혼에 응할 수 있느냐였다.송씨 가문과 하씨 가문은 얽히고설킨 지분 관계로 묶여 있었다. 서로의 회사가 교차로 주식을 가지고 있었고, 이해관계는 단순히 부부 사이 문제로 정리될 수 없는 수준이었다.강준에게 새로운 여자가 생겼다고 해도, 그가 별아를 함부로 정리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이 문제는 결국 변호사가 개입해야만 정리가 될 것이다.“민희야, 우리 집안 이익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빨리 합리적인 재산 분할안 좀 만들어줘. 될 수 있으면 서둘러.”민희는 별아의 다급한 기색을 읽었다.“알았어.”이런 식의 이혼 소송은 상류층에서 드물지 않았다.그리고 어렵지는 않지만 시간이 좀 걸릴 뿐이었다.수지는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았다.“너 참 대인배다. 하강준이 네 뒤통수를 쳤으면, 대가를 치르게 해야지. 당장 패가망신까진 아니더라도, 최소한 살갗은 벗겨 놔야 해.”“그래야 좀이라도 고통을 알지. 네가 이렇게 대충 넘어가면, 그 인간은 내연녀랑 더 편하게 잘 살 거라고.”별아도 그 말이 틀리지 않다는 걸 알았다.하지만 사랑이 끝난 남자 앞에서, 울고불고 매달린다고 얻을 수 있는 건 자신의 체면이 무너지는 일뿐이었다.전생에 별아는 그걸 너무 많이 했다.그러나 울고 애원한들, 강준의 사랑은 이미 시정에게로 옮겨갔고, 그 사랑은 목숨조차 아깝지 않은 듯 절대적이었다.이번 생에서 별아가 바라는 건 단 하나... 질식 같은 결혼에서 벗어나는 것.“민희야, 난 그냥 빨리 끝내고 싶어.”수지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눈빛엔 못내 안쓰러움이 묻어났다.한참을 바라보다가 수지가 말했다.“그래. 민희는 그냥 별아 말대로 해. 어차피 그 인간은 언젠가 똑같이 벌을 받을 거야.”로펌을 나서자, 수지가 별아에게 술 한잔하자고 권했다.별아는 미소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수지야, 다음에. 오늘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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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시정의 생일 파티는 별아와 강준의 집에서 열렸다.넓은 정원에는 색색의 조명과 풍선, 끝도 없이 이어진 꽃장식과 하얀 천이 걸려 있었다.강준은 K시에 이름 있는 인사들을 대거 초청해, 시정의 생일을 성대하게 치렀다.불꽃이 터지자, 반짝이는 리본과 종이 조각들이 공중에 흩날리며 하늘을 가득 메웠다.시정은 강준의 팔에 팔짱을 낀 채, 수줍은 미소를 머금고 등장했다.모여든 손님들의 수군거림이 이어졌다.“이 파티, 사모님이 준비했다던데. 참 속도 깊네.”“소시정 씨가 하 대표님이 후원하는 아이라더라. 그런 사람을 위해 이렇게 정성 들이다니, 대단한 선행이지.”“원래 하 대표님은 자선 활동을 좋아하시잖아. 놀랄 것도 없지.”“...”별아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그 모든 칭찬을 들었고, 입꼬리가 서늘하게 휘어졌다.‘하강준의 위선에 사람들이 이렇게 쉽게 속아 넘어가네.’무대.강준과 시정은 함께 케이크 칼을 잡고 3단 케이크를 잘라냈다.환호가 터져 나오자, 강준의 비서가 준비한 선물이 나왔다.‘비너스의 눈물’이라 불리는 파란 다이아몬드 목걸이.사랑과 아름다움, 그리고 충절을 상징하는 보석이었다.전생에 별아는 그 목걸이를 갖고 싶다고 수없이 말했었다.강준도 번번이 꼭 사주겠다고 했지만, 끝내 지켜진 적은 없었다.강준은 잊은 게 아니었다. 그저 마음속엔 이 목걸이의 주인은 처음부터 별아가 아니라 시정이었다.강준이 직접 시정의 목에 목걸이를 걸어주자, 장내는 술렁거렸다.“저건 그냥 후원이 아닌데? 저 정도라니, 하 대표님 통이 크네. 근데 사모님은 괜찮을까?”“‘비너스의 눈물’은 그냥 보석이 아니야. 아무리 불쌍하다 해도, 저 정도면 선 넘은 거지.”“작년 사모님 생일에 준 목걸이도 비쌌다지만, 이건 비교가 안 되잖아.”“글쎄, 저 둘 분위기 보니까 그냥 후원은 아닌 듯? 저렇게 다정하게 팔짱까지 끼고선...”“사모님은 구석에 숨어 계시네. 아마 속이 많이 상했을 거야.”“...”수군거림이 파도처럼 번져가며, 그 소리는 시정의 귀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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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생일 파티의 소란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손목에서 팔찌가 사라진 별아는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었다.원래 이렇게, 자신에게 아무 의미 없는 것을 버리는 게 이렇게나 후련한 거였구나.‘잘 버렸어.’별아는 스스로 다행이라 여겼다.바람이 불어왔다.마당에 걸린 얇은 커튼들이 흔들리며 펄럭거렸다.별아는 더 이상 자신과 상관없는 이 광란 속에 머무를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며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그 순간, 바람이 너무 세게 불어서였을까? 아니면 발을 잘못 디뎌서였을까?별아의 몸이 순간 휘청거리면서 그대로 샴페인 타워에 부딪혔다.샴페인 타워가 기울어지며 옆에 있던 사람에게 와르르 쏟아졌다.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시정의 몸 위로 샴페인과 깨진 유리 조각들이 쏟아졌다. 피가 번져 나왔다.이건 별아조차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시정은 피웅덩이에 쓰러졌다.시정의 눈빛이 별아를 향했다. 이해할 수 없는 듯, 서운한 듯,“별아 언니... 언니...”소리를 듣고 달려온 강준이 사람들을 밀치며 시정을 안아 올렸다.“야! 미쳤어? 불만 있으면 나한테 풀어! 왜 이런 비열한 짓을 해? 내가 괜히 철든 줄 알았네. 다 거짓말이었어. 이건 정말 악질이야.”강준의 목소리는 미쳐 날뛰듯 날카로웠다.별아는 그 자리에 굳어 선 채, 새하얀 얼굴로 손끝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만 바라보고 있었다.‘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그런데 누가 지금 그걸 들어주겠어.’강준의 눈에는 별아의 상처 따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분노로 별아를 몰아붙였다.“시정이 생일이야. 이렇게 중요한 날에 네가 한 짓을 어떻게 생각해? 시정이가 무사하길 기도해라. 아니면 절대 용서 안 할 거야.”강준은 시정을 안은 채 몇 걸음 가다가, 다시 별아를 향해 날카롭게 돌아섰다.“내가 널 괜히 착하게 본 거야. 넌... 넌 정말 나한테 큰 실망이야.”“강준아, 별아 씨도 다쳤잖아, 안 보여?”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말하자 강준은 잠시 멈칫했다.시선을 돌리자, 별아의 손끝에서 계속 피가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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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속았다고? 하강준이 어떻게 사랑에서 속을 수가 있어.’‘저 사람은 한 번 사랑하면 속을 틈도 없이 스스로 마음을 내어주는 남자인데.’“집사님, 저랑 하 대표는 이제 끝이에요.”별아가 관자놀이를 눌렀다.“사모님...”노숙현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사모님, 대표님하고 이혼하실 생각이신가요?”“제가 하 대표한테 버림받기 전에 먼저 이혼 얘기를 꺼내면 덜 초라하겠죠. 근데 저는 알아요. 제가 먼저 말하면 절대 깨끗하게 못 끝내요. 하 대표가 직접 이혼하자고 해야만 제가 온전히 나올 수 있어요.”별아는 노숙현이 이 말 속의 의미를 다 이해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변질된 결혼은, 설명할수록 더 복잡해질 뿐이야.’별아는 씁쓸하게 웃었다.“집사님, 이제부터는 소시정 씨한테 괜한 적대감 갖지 마세요. 앞으로 그 사람이 이 집의 안주인이 될 테니까요.”‘그저 시간문제일 뿐이지...’노숙현은 그 말에 가슴이 저려왔지만, 고용인인 자신이 뭔가 바꿀 수는 없다는 걸 잘 알았다.“사모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노숙현이 물러난 뒤, 별아는 2층으로 올라가 강준이 없는 틈을 타 챙겨야 할 것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결혼 후 강준은 별아에게 값비싼 보석과 옷, 신발을 수없이 사주었다.별아 또한 답례처럼 강준에게 고가의 시계를 선물했는데, 하나같이 10억 원을 웃도는 것들이었다.강준이 준 것들은 남겨 두고, 별아가 준 것들은 챙겨 나가야 했다.딱 그 순간, 강준이 성큼 들어섰다.별아는 막 캐리어의 지퍼를 닫던 중이었다.강준의 미간이 잔뜩 구겨졌다.“뭐 하는 거야? 또 가출놀이야? 송별아, 너 진짜 끝도 없냐? 오늘 시정이 다친 거, 네가 잘못한 거잖아. 잘못은 네가 먼저 했으면서, 또 이렇게 성질을 부려?”별아는 고개를 들어 담담하게 강준을 바라보며 목소리는 평온했다.“네가 생각하는 거랑 달라. 며칠 뒤 출장이 있어서 미리 준비하는 거야.”강준은 더 묻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지금은 별아의 행동을 의심하거나 헤아릴 마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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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강준이 놀란 듯 별아를 바라봤다.예전의 별아라면, 모기한테 한 번만 물려도 질질 짜며 강준에게 달려와 투정을 부렸을 것이다.“자기야, 이 모기 진짜 짜증 나. 봐, 여기 이렇게 부풀었잖아. 간지럽고 아파 죽겠어.”그럴 때면 강준은 늘 부드럽게 달래 주곤 했다.“내가 당장 그 모기 잡아서 혼내 줄게. 감히 우리 자기를 물다니.”별아는 늘 그런 강준의 말에 웃음을 터뜨리며, 유치하다며 고개를 저었다.하지만 어제, 강준이 별아의 상처를 소독할 때 그는 분명히 보았다.살이 깊게 찢긴 상처. 그런데도 별아는 끝내 아프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강준은 복잡한 표정으로 별아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우리 여보... 많이 변했네.”“그래?”별아는 강준이 애써 관찰하고 있다는 게 오히려 마음 쓰였다.“사람은 원래 변하는 거 아니야? 성장하는 거고.”별아에게 성장이라는 건... 강준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이었다.강준 때문에 울부짖지 않는 법, 죽었다 살아난 뒤에도 다시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 법.한 번 죽고 살아난 별아는 이미 마음이 죽어버렸다.강준은 별아의 담담한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가 겨우 입을 뗐다.“성장은 좋은 거지. 전에는 우리 여보가 너무 아기 같았어.”별아가 아픔을 못 느끼는 게 아니었다. 열 손가락 깨물면 안 아픈 손가락 없듯이, 어찌 아프지 않겠는가?다만, 이제는 그녀가 안다. 아무리 아파도 자신을 한때 세상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던 남편은 더 이상 쳐다봐주지 않는다는 걸.그래서 지금의 별아는 굳이 연약한 척할 이유가 없었다.그때, 시정이 병실에서 몸을 반쯤 내밀며 불렀다.“오빠, 나 화장실 좀 가고 싶은데, 링거 좀 들어줄래?”별아는 고개조차 들지 않은 채 돌아섰다.“가서 시정이랑 있어. 난 먼저 갈게.”강준은 잠시 머뭇거리며 뒤돌아 시정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손을 뻗었지만, 별아의 손은 이미 강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있었다.“오빠...”시정이 강준을 불렀다.결국 강준은 병실 쪽으로 발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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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전생에도 강준은 별아를 주얼리 경매 행사에 데려갔다.하지만 그 자리는 둘이 아닌 셋. 시정까지 함께였다.그 기억만 떠올려도, 별아의 속은 뒤틀렸다.별아는 핸들을 꺾어 친정으로 차를 몰았다.부모님은 여전히 바쁘게 일하고 있었고, 집에는 장난꾸러기 동생만이 있었다.전생에 별아와 강준이 가장 크게 싸웠을 때, 겨우 열여섯 살이던 동생 송별헌은 주먹을 불끈 쥐고 강준을 때려주겠다고 날뛰었다.그때 별아는 정신이 온전치 못했음에도, 키가 거의 일 미터 구십에 달하는 강준에게 혹여 별헌이 다칠까 봐 본능적으로 강준을 감싸고 나섰다.이미 별아를 마음에서 지운 남자였는데도...‘별헌이한테 그땐 정말 미안했지...’별아는 손을 뻗어 별헌의 머리칼을 헝클듯 쓰다듬었다.“오늘은 학교 안 갔어? 시험 얼마 안 남았잖아. 좋은 고등학교 못 들어가면 진짜 내가 가만 안 둔다?”별헌은 히죽거리며 누나 팔을 끌어안았다.“누나, 난 무조건 좋은 고등학교 붙을 거야. 걱정 마. 근데... 지금 좀 재정이 곤란해서 그러는데, 만 원만 주면 안 돼?”“돈 어디다 쓰게?”별아가 자리에 앉자, 별헌은 얼른 잘라놓은 과일을 내밀며 입을 열었다.“우리 반 애 생일이야. 나도 회비 좀 내야지.”“만 원으로 뭘 해?”“아니야, 우리 열 명이 모아서 내는 거라서, 합치면 한 십만 원 돼.”송씨 집안은 아들은 가난하게, 딸은 넉넉하게 키운다는 신조가 있었다.가정형편은 넉넉했지만, 별헌의 용돈은 늘 빠듯했다.결국 바깥에서의 원조는 대부분 누나 별아의 몫이었다.별아는 동생이 사고라도 칠까 싶어, 필요 이상은 절대 주지 않았다.“이따 줄게.”별헌은 갑자기 퍽 하고 무릎을 꿇더니, 장난스럽게 이마를 바닥에 쳐박았다.“은혜로우신 마마, 감히 감사의 큰절을 올립니다.”별아는 웃음을 터뜨렸다.전생에서 별아는 결혼 후 친정을 거의 찾지 않았다.부모님도 사위의 눈치를 보느라 딸에게 자주 오라 말하지 않았다.그래도 동생 별헌은 틈날 때마다 누나 집에 머물며 누나와의 정을 이어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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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강준은 결국 욱해서 별아 앞에서 당장이라도 테이블을 내리칠 기세였다.별아는 눈빛을 들어 남자의 불같은 얼굴을 마주했다. 그 눈동자 속엔 차디찬 냉기가 서려 있었다.“결혼할 때 네가 말했잖아. 누구 잘못이든 다 네 잘못이라고. 근데 지금은 억울해?”“나...”강준은 또다시 말문이 막혔다.그는 억눌린 화를 삼키며 셔츠 깃을 느슨하게 풀었다.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별아에게 인후염이 있어, 연기만 맡아도 기침을 멈추지 못했으니까.하지만 지금은... 별아를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두어 모금 빨아들이던 강준은 곧 담배를 꾹 짓눌러 재떨이에 꺼버렸다.“며칠 뒤에 준비해. 내가 B국 주얼리 경매에 가줄 테니까.”“됐어. 나 출장 가야 돼.”별아의 단호한 거절.강준의 불길은 단번에 치솟았다.“일부러 그러는 거야? 기분 나쁘게 하려고 작정했어? 너도 이제 나이 있는데, 좀 덜 고집 부리고, 좀 더 이해하고 참는 게 그렇게 힘드냐?”“결혼기념일, 해마다 챙기자고 한 게 누구야? 바로 너였잖아!”별아는 기억하고 있었다.그땐 별아가 강준을 사랑했고, 강준도 별아를 사랑했다.하지만 지금은?강준의 눈빛 속에 남아 있는 건 피로와 불만뿐.‘사랑? 그건 이미 오래전에 끝났어.’사랑이 없는 부부가 왜 서로 지긋지긋하게 마주 앉아, 억지로 행복한 척을 해야 할까?별아는 강준의 분노에 찬 얼굴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지금 이 순간, 별아 눈앞의 강준이 전생의 강준과 겹쳐졌다.‘소시정을 그렇게 사랑하니까, 이제 내 앞에서 가식조차 버린 거겠지.’“이혼하자, 하강준.”별아의 목소리는 놀라울 만큼 담담했다.“너...”강준은 분노에 사로잡혀 손에 잡히는 꽃병을 내던졌다.쨍그랑-오늘 별아가 막 꽂아놓은 꽃이 물과 함께 산산이 바닥에 흩어졌다.그 순간, 하씨 집안 본가에서 전화가 걸려왔다.한참을 울리는 벨 소리에 결국 강준이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어머니.”[오늘 또 너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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