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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깼군." 낮고 묵직한 남자의 목소리에 나는 번쩍 눈을 떴다. 몇 초 동안은 모든 것이 흐릿하게 일그러져 보였다. 머리는 깨질 듯 욱신거렸고, 방 안은 천장에 매달린 희미한 전구 하나를 제외하면 온통 어둠뿐이었다. 그리고 현실이 밀려왔다. 숨이 멎었다. 나는 의자에 묶여 있었다. 거친 밧줄이 등 뒤로 묶인 손목을 파고들어 불에 덴 것처럼 쓰라렸고, 발목 역시 의자 다리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 순식간에 공포가 가슴을 집어삼켰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하루 동안 끔찍한 일들이 연달아 터져 머리가 따라가지도 못했다. 차라리 우주가 암보다 먼저 나를 끝장내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온통 검은 옷을 입은 키 큰 남자가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얼굴마저 검은 마스크로 가려져 있었고, 차가운 눈만 드러나 있었다. 그가 내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하자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의자만 바닥을 긁으며 거친 소리를 냈다. "진정해." 그는 차분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 침착함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이제 네 남편에게 전화해서 네가 납치됐다고 알려 줄 거야." 남편. 그 단어를 듣는 순간 가슴이 저려 왔다. 빈센트. 과연 그가 신경이나 쓸까? 속으로 씁쓸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일주일 전이었다면 그는 당장 나를 구하러 올 거라고 믿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 밤. 내가 그의 인생에서 영원히 사라져도 상관없다고 말한 사람을 보고 나니 더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여전히 어리석은 희망이 남아 있었다. 그가 나를 어떻게 대했든. 단 한 번만이라도. 나를 선택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만은 멈출 수 없었다. 복면을 쓴 남자는 휴대전화를 꺼내 빈센트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번째 신호음 끝에야 통화가 연결됐다. 그는 곧바로 스피커폰으로 바꿨다. "네 아내는 지금 내 손에 있다." 그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빈센트의 태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그게 전부였다. 그래. 당황도. 걱정도. 아무것도 없었다. 복면의 남자는 잠시 나를 힐끗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 "산 채로 돌려받고 싶으면 10억을 준비해." 빈센트는 차갑게 말했다. "사기인 거 다 알아." 가슴속 어딘가가 조용히 무너져 내렸다. 남자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갑자기 영상통화로 전환했다. 화면이 켜지는 순간. 나는 숨이 막혔다. 빈센트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는 상의를 입지 않은 채였다. 캐시아는 침대 시트를 몸에 두른 채 그의 가슴에 기대어 있었다. 섹스를 막 끝낸 듯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두 사람의 피부에는 땀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묶인 손이 저절로 움켜쥐어졌다. "내가 쟤 하나 때문에 그런 돈을 낼 것 같아?" 빈센트는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 "지금 진심이야?" "마음대로 해." "난 한 푼도 안 낼 거니까." "시간 낭비하지 마."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을 후벼 팠다. 그때 캐시아가 작게 웃으며 빈센트의 턱에 입을 맞췄다. "자기…." 그녀가 교태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한 번 더 하자." 곧이어 그녀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눈시울이 순식간에 뜨거워졌다. 나는 눈물이 떨어지기 전에 급히 시선을 화면에서 돌렸다. 남자는 천천히 휴대전화를 내리더니 통화를 끊었다. 그리고 다시 나를 바라봤다. "정말 저 남자가 네 남편 맞아?" 그가 무심하게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솔직히... 나조차도 이제는 의심스러웠다.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방금 저 남자가." "네 마음대로 하라고 허락했는데." 그가 한 걸음 다가오는 순간. 공포가 온몸을 덮쳤다. 그의 손이 내 얼굴을 향해 뻗어왔다. 나는 즉시 몸을 숙여 그의 손을 있는 힘껏 깨물었다. "젠장!" 그가 욕을 내뱉었다. 다음 순간. 짝! 강한 손바닥이 내 뺨을 후려쳤다. 의자가 그대로 옆으로 넘어졌고, 얼굴이 바닥에 세게 부딪혔다. 뺨이 타들어 갈 듯 아팠다. 의자에 묶인 채 바닥을 구르며 신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귀에서는 이명이 울렸다. "미친 여자." 그가 이를 악물었다. "네 남편도 마음대로 하라고 했으니." "차라리 널 팔아버리는 게 낫겠군." "그게 더 돈이 되겠어." 팔아버린다고? 심장이 미친 듯 뛰기 시작했다. 공포에 질린 나는 아픈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그가 의자를 풀어 나를 일으키는 순간. 나는 다급히 그의 다리를 붙잡았다.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번엔 또 뭐야?"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떨리는 손으로 재빨리 수어를 하기 시작했다. '당신이 더 원하는 걸 줄 수 있어.' 그는 잠시 멈췄다. 놀랍게도. 그는 내 수어를 알아들었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참 우스운 일이었다. 5년 동안 함께 산 빈센트보다. 처음 만난 낯선 사람이 내 말을 더 빨리 이해했다. "무슨 뜻이지?" 그가 천천히 물었다. 나는 침을 삼킨 뒤 다시 손을 움직였다. '당신이 원하는 것.'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내가 뭘 원하는데?"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다음 문장을 표현했다. '당신이 빈센트를 협박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어.' 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 마스크 너머로도 그의 놀란 눈빛이 선명하게 보였다. 지난 1년 동안. 빈센트는 익명의 협박 전화를 끊임없이 받아 왔다. 협박. 기밀 정보. 재정 관련 유출. 나는 그 배후에 있는 사람이 언젠가는 직접 움직일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 예상은 맞았다. 남자는 천천히 내 앞에 쪼그려 앉았다. 흥미로운 것을 발견한 사람처럼 나를 유심히 바라봤다. "그걸 어떻게 알았지?" 그가 낮게 물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빈센트와는 달리. 나는 사람을 제대로 관찰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는 마스크 아래에서 피식 웃었다. "흥미롭군." 고개를 살짝 기울인 그가 물었다. "그래서." "넌 내게 뭘 줄 수 있는데?" 나는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돈.' 그 말에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 대답은 마음에 드는데." 몇 분 뒤. 그와 거래를 끝낸 그는 마침내 내 몸을 묶고 있던 밧줄을 모두 풀어 주었다. 그리고 나를 보내줬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하지만 오늘 밤 벌어진 일을 정리할 틈도 없이. "아… 빈센트…." 캐시아의 큰 신음 소리가 집 안에 울려 퍼졌다. 곧이어 침대가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쾅. 쾅. 쾅. 온몸이 굳어 버렸다. …진심인가? 날 일부러 괴롭히려는 건가? 분노가 너무 갑작스럽게 치밀어 올라 나 자신도 놀랐다.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다시 집을 뛰쳐나갔다. 곧바로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납치범이 기다리고 있는 폐창고로 다시 차를 몰았다. 내가 들어서자 그는 놀란 듯 눈을 치켜떴다. "또 너야?" 나는 곧바로 수어를 시작했다. '당신이 남편을 협박할 때 쓰던 휴대전화를 빌려줘.' 남자는 몇 초 동안 이상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러더니 천천히 눈을 가늘게 떴다. "넌 벙어리잖아." 의심스러운 목소리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한 걸음 다가왔다. "설마…." 목소리가 위험할 정도로 낮아졌다. "사실은 말을 할 수 있는데." "지금까지 계속 못 하는 척했던 거야?"빈센트“당신 아들은 이제 위험한 고비를 넘겼습니다.”의사의 말이 고요한 병원 복도에 울려 퍼졌다.“조금 더 안정을 취해야 하지만, 상태는 안정적입니다.”악몽이 시작된 후 처음으로, 다시 숨을 제대로 쉴 수 있는 것 같았다. 가슴을 짓누르던 무거운 압박감이 조금씩 사라지면서 다리에 힘이 풀릴 것만 같았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속으로 신에게 감사했다.대런은 무사했다.의사는 안심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인 뒤 자리를 떠났고, 나와 니엘은 병실 밖에 그대로 서 있었다.하룻밤 사이 너무 많은 일이 벌어졌다.나는 천천히 그녀를 바라봤다. 니엘은 지쳐 보였다. 울어서 눈은 부어 있었고, 머리는 흐트러져 있었으며, 불길을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옷소매에는 희미한 화상 자국까지 남아 있었다.그럼에도 그녀는 내가 본 그 누구보다 아름다웠다.살아 있었으니까.그때 불타는 집 앞에서 그녀가 고백했던 말이 다시 머릿속을 스쳤다.대런이…… 내 아들이었다.아직도 믿기지 않았다.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작게 웃다가 다시 그녀를 바라봤다.“그러니까…… 지금까지…….”목소리가 떨렸다.“정말 내 아들이었던 거야?”니엘은 내 시선을 피한 채 고개를 숙였다.“미안해.”그 짧은 두 마디에는 수년간 쌓여온 죄책감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정말 여러 번 말하고 싶었어.”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하지만 모든 일이 벌어지고…… 우리가 그렇게 끝나고 나서…… 이게 더 나은 방법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했어. 당신에게서 대런을 떼어놓으면, 당신이 나한테 준 상처를 당신도 똑같이 느끼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그녀의 뺨을 따라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하지만 매일…… 후회했어.”나는 몇 초 동안 그녀를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그녀의 두 손을 조심스럽게 내 손 안에 감쌌다.니엘이 놀란 듯 나를 올려다봤다.“괜찮아.”나는 눈시울이 따끔거리는 걸 느끼면서도 미소 지으며 그녀의 얼굴에 내려온 머리카락 한 가닥을 쓸어 넘겼다.“내가 받아야 할 벌이
니엘집에 돌아온 뒤에도 뉴스에 나온 카시아의 얼굴이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빈센트가 저녁을 차려주고, 유치한 농담을 늘어놓고, 심지어 “아무 생각도 안 나게 해줄 거야”라며 자신이 고른 영화를 틀어줬는데도, 배 속을 뒤틀어놓는 듯한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다.마치 우리 집 담장 너머 어딘가에 위험이 숨어서, 공격할 완벽한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5분째 같은 곳만 보고 있어.”빈센트가 소파 너머로 손을 뻗어 내 손가락 사이에 자신의 손가락을 끼워 넣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최악의 상황부터 생각하지 마.”나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지금 진심이야?”내가 물었다.“우리가 누구 얘기를 하고 있는지 기억해? 카시아야. 그 여자가 무슨 짓까지 할 수 있는지 당신도 정확히 알잖아.”그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그는 내 손을 들어 올려 손등을 천천히 쓰다듬었다.“알아.”그가 조용히 인정했다.“무시하자는 게 아니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두려움 때문에 우리의 평온까지 망치게 두지는 말자는 거야.”“분명 무슨 일이 생길 거야.”나는 목소리에 떨림을 감추지 못한 채 속삭였다.“그 여자는 사람을 용서하지 않아, 빈센트. 반드시 되갚아.”빈센트는 반박하지 않았다.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오더니 나를 품에 끌어안았다.나는 잠시 버텼지만 결국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자…….”그가 내 머리 위에 턱을 살짝 얹으며 낮게 속삭였다.“숨 쉬어.”그의 손이 내 등을 천천히 위아래로 쓸어내렸다.“들이마시고…….”나는 떨리는 숨을 들이마셨다.“그리고 내쉬어.”나는 숨을 내뱉었다.“다시.”나는 그의 말대로 했다.빠르게 뛰던 심장이 그의 일정한 심장 박동 소리를 들으며 조금씩 진정되기 시작했다.“넌 안전해.”그가 속삭였다.“내 곁에 있잖아.”“하지만 대런은…….”“우리 아들도 안전해.”그의 말은 나를 안심시켜야 했다.그런데 오히려 가슴이 더욱 조여 왔다.
니엘결혼식을 올린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매일 아침 같은 기분으로 눈을 떴다.아직도 믿기지 않았다.“좋은 아침, 자기야.”눈을 뜨기도 전에 빈센트의 다정한 목소리가 침실에 울려 퍼졌다. 갓 만든 아침 식사의 풍성한 향기가 뒤따라 방 안을 가득 채웠다.나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잠에서 깨어났다. 빈센트는 한 손에 쟁반을 든 채 서 있었고, 우리의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이제야 일어나기로 마음먹었어?”그가 부드럽게 놀렸다.나는 졸린 신음을 흘리며 이불을 턱 끝까지 끌어올렸다. 어젯밤 그와 나눈 뜨겁고 열정적인 밤 때문에 온몸이 아직도 기분 좋게 나른했다. 전날 밤의 기억이 하나둘 떠오르자 얼굴이 금세 뜨거워졌다.빈센트는 내 얼굴에 번진 홍조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웃음을 터뜨리며 쟁반을 침대 옆 탁자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그 표정, 나 잘 알아.”그의 눈에 장난기가 어렸다.“아무것도 모르면서.”나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중얼거렸다.“그래? 그런데 왜 얼굴이 빨개졌을까?”“안 빨개졌거든.”“완전히 빨개졌는데?”내가 베개를 집어 들어 그를 가볍게 때리자 빈센트가 웃음을 터뜨렸다.지난 몇 주 동안 빈센트는 너무나 많이 변했다. 가끔은 내가 그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할 정도였다.한때 내가 결혼했던 차갑고 무심한 남자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지금의 빈센트는 매일 아침 직접 아침 식사를 만들겠다고 고집했다. 최근에야 겨우 배운 요리법이 절반이나 되는데도 말이다. 그는 내가 무거운 물건을 드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회사에도 정말 필요한 일이 아니면 거의 나가지 않았다. 회사는 자신이 몇 시간 자리를 비워도 잘 돌아가겠지만, 나와 떨어져 있는 자신은 견딜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우리의 신혼여행은 몇 년 전 처음 결혼했을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침묵 대신 웃음이 있었고, 오해 대신 대화가 있었으며, 우리 사이를 가로막던 벽 대신 입맞춤이 있었다.빈센트는 매일 새로
빈센트니엘의 속눈썹에 매달려 있던 눈물이 마침내 흘러내렸다. 눈물 한 방울이 그녀의 뺨을 타고 조용히 내려갔고, 홀 안의 모든 시선은 여전히 그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그리고 영원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흘렀지만, 그녀의 입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나는 숨조차 쉴 수 없었다.심장이 갈비뼈를 부술 듯 거칠게 뛰어대며 다른 모든 소리를 집어삼켰다. 살아오면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 앞에 서봤지만, 그 몇 초만큼 나를 두렵게 만든 순간은 없었다.내 미래, 내 결혼, 내 두 번째 기회……그 모든 것이 지금 그녀의 입에서 나올 다음 한마디에 달려 있었다.니엘은 잠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손에 든 부케를 어찌나 세게 움켜쥐었는지 하얀 장미들이 그녀의 손안에서 파르르 떨렸다.마침내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눈동자에는 아직 흘러내리지 않은 눈물이 가득 맺혀 있었다.수년 동안 그녀가 품고 있던 모든 감정이 한꺼번에 충돌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숨 막힐 듯한 침묵을 깨며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나는…… 이 남자를 선택할 거예요.”그녀의 목소리는 숨소리보다 조금 클 뿐이었다.“……수년 동안 나를 기다려줬으니까요. 한 번도 나를 사랑하는 걸 멈추지 않았어요. 오늘이 오기를 바라며 기도하는 것도 멈추지 않았고요.”내 입꼬리가 천천히 내려갔다.누군가 내 가슴속까지 손을 집어넣고 심장을 움켜쥔 것 같았다. 숨이 막힐 정도로 세게 조여 와 심장이 뛰는 것조차 힘겨웠다.주머니 속에서 손가락을 꽉 말아쥐었다. 떨리는 주먹을 숨긴 채 나는 그녀를 바라봤다.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붙잡고 있던 희망이 하나씩, 하나씩 무너져 내렸다.목이 고통스럽게 조여 왔다.설마…… 니엘이 니코를 선택하는 건가?수천 가지 생각이 한꺼번에 머릿속을 휩쓸었다.그럼 왜 나한테 키스한 거야?어제는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바라봤는데?그게…… 작별 인사였던 건가?나는 입술 안쪽을 세게 깨물었다. 모든 본능이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라고 소리
빈센트“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니코가 이를 악문 채 물었다. 목소리는 나에게만 들릴 만큼 낮았지만, 눈에 타오르는 분노만으로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나는 조금의 동요도 없이 그의 시선을 마주하며 태연하게 미소 지었다.“내가 뭘 하려는 것처럼 보여?”니코가 대답하기도 전에 홀 곳곳에서 퍼져나가던 속삭임이 점점 커졌다.사람들은 더 이상 모르는 척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잠깐…… 저 사람 빈센트 헤일 아니야? 신부의 남편?”“무슨 소리야?”“못 들었어? 니엘이 5년 전에 사라졌잖아. 다들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 있었대. 그리고 빈센트가 니엘이 보낸 이혼 서류에 아직도 서명하지 않았다는 얘기도 들었어. 법적으로는…… 아직 부부라는 거잖아.”그 사실은 순식간에 홀 전체로 퍼져나갔다.“세상에…….”“그럼 이 결혼식은 대체 뭐야?”“아직 결혼한 상태인데 다른 남자와 약혼한 거야?”“믿을 수가 없네.”“지금 가면 안 되겠다. 어떻게 끝나는지 꼭 봐야겠어.”“대체 누구를 선택할까? 자신의 남편…… 아니면 그동안 그녀 곁을 지켜준 남자?”“이런 건 처음 보는데.”수많은 시선이 나와 니코 사이를 오갔다.테이블 아래에서 몰래 휴대폰을 들어 올리는 사람들도 보였다.심지어 연주자들마저 연주를 멈췄다.지금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건 평범한 결혼식보다 훨씬 더 극적인 일이었으니까.결국 니코의 인내심이 끊어졌다.“당장 여기서 꺼져.”그가 으르렁거리며 위협적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지금.”나는 움직이지 않았다.대신 낮게 웃음을 흘렸다.“왜?”나는 여유롭게 물었다.“그녀가 나를 선택할까 봐 무서워?”니코의 턱 근육이 꿈틀거렸다.“무서워?”그가 차갑게 웃으며 되물었다.“내가 왜 무서워해야 하지? 네가 없는 동안 지난 5년을 내가 그녀 곁에서 보냈어. 그녀가 무너질 때 내가 붙잡아줬고, 대런도 그녀와 함께 키웠어. 난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정확히 알아.”나는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그를 바라봤다.그
빈센트“결혼식에 참석하겠다고?”로난은 내가 완전히 미쳐버린 사람이라도 된 듯 나를 바라봤다. 입까지 벌어진 채 몇 번이나 눈을 깜빡이며, 내가 농담이라고 말해주기만을 기다리는 눈치였다.하지만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는 답답하다는 듯 두 손을 허공으로 치켜들었다.“보스, 진심이에요? 그건 미친 짓이라고요! 5년 동안 보스는 죽은 사람처럼 살았잖아요. 제대로 잠도 못 자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매일 그녀를 잃은 걸 후회했으면서요.”그가 어이없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그런데 이제 그녀가 돌아왔는데, 그녀를 되찾으려고 싸우기는커녕 웃고 있잖아요? 혼자 앉아서 왜 그렇게 실실 웃고 있는 건데요…… 그리고 왜 자꾸 입술을 만져요?”로난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훑었다.“보스…… 비 맞고 쓰러졌을 때 머리를 너무 세게 부딪친 거 아니죠?”나는 대답하지 않았다.대답할 수가 없었다.내 정신은 이미 니엘의 집 앞에 세워둔 차 안으로 돌아가 있었다.아직도 그녀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닿았던 감촉이 생생했다.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녀가 입을 맞추며 나를 침묵시켰던 순간도 선명했다.그 기억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다.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손가락으로 입술을 쓸어보자 또다시 미소가 흘러나왔다.5년이었다.다시는 그녀를 품에 안을 수 없을 거라고 믿었던 시간.그녀를 영원히 잃었다고 스스로에게 수없이 되뇌었던 시간.그런데 그녀가 먼저 내게 입을 맞췄다.그녀가 스스로 나에게 키스하기를 선택했다.그 단 한 번의 순간만으로도 그녀의 죽음과 함께 완전히 꺼져버렸다고 생각했던 내 안의 무언가에 다시 숨이 돌아왔다.로난은 내가 위험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아니…… 이건 정상이 아니야.”그가 과장되게 얼굴을 쓸어내렸다.“보스, 아무래도 그 열 때문에 뇌가 익어버린 것 같은데요. 의사 불러요? 다시 검사라도 받아보는 게 좋겠어요. 뭔가 확실히 이상해요.”나는 작게 웃었다.“로난.”“네?”“내 제일 좋은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