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Nyelle
그의 말에 순간 마음이 흔들렸지만, 애써 표정 하나 변하지 않으려 했다. 복면을 쓴 남자는 팔짱을 낀 채 내 앞에 서서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천천히 훑어봤다. 마치 내가 용감한 사람인지, 아니면 제정신이 아닌 사람인지 판단하려는 것 같았다. 아마 둘 다일지도 모른다. 하룻밤 사이에 너무 많은 일이 벌어진 지금, 나조차도 확신할 수 없었으니까. 나는 떨리는 손으로 휴대전화를 꺼내 재빨리 글자를 입력한 뒤 화면을 그에게 내밀었다. '원하는 건 뭐든 줄게.' '아니면 이제 그 대포폰은 거래할 생각이 없는 거야?' 마스크 아래로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내 대담함이 꽤 재미있었던 모양이었다. "화제를 돌리려는군." 그가 차분하게 말하며 한 걸음 다가왔다. "좋아." "하지만 한 번 시작하면 되돌릴 수는 없어." "네 정체가 들통난 뒤 벌어지는 일은 전부 네가 감당해야 한다." "난 책임지지 않아." 나는 천천히 침을 삼켰다. 순간 가슴속으로 두려움이 스며들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빈센트가 이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모든 것이 순식간에 최악으로 치달을 것이다. 빈센트는 배신을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참 아이러니했다. 그는 지난 5년 동안 단 한 번의 죄책감도 없이 나를 감정적으로 배신해 왔으면서. 하지만. 지금의 내게 잃을 것이 과연 남아 있기나 했을까?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주머니에서 작은 대포폰 하나를 꺼냈다. "목소리를 변조해 주는 기기야." 그가 내게 건네며 말했다. "누구도 네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할 거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약속한 돈을 그에게 건넸다. 거래가 끝나는 순간. 나는 몸을 돌려 창고를 빠져나왔다. 아주 오랜만에.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인생이 계속 나를 상처 입히려 한다면. 이제는 나도 조용히 당하고만 있지 않을 생각이었다.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 되돌려 줄 차례였다. --- 다음 날 아침. 계단을 내려오자마자 캐시아는 커피를 마시다 거의 사레가 들릴 뻔했다. 눈을 크게 뜬 그녀는 유령이라도 본 사람처럼 나를 바라봤다. "너…." 그녀가 충격에 휩싸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납치된 줄 알았는데." 나는 그녀를 완전히 무시한 채 식탁으로 걸어갔다. 빈센트는 그녀 옆에 앉아 태블릿을 넘기며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마치 그의 아내가 하룻밤 내내 사라졌던 일쯤은 걱정할 가치도 없다는 듯. 그는 단 한 번도 내가 괜찮은지 묻지 않았다. 어떻게 탈출했는지도. 걱정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이제는 실망조차 하지 않았다. 얼음으로 만들어진 사람에게 따뜻함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니까. 캐시아는 내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는 내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도대체 어떻게 빠져나온 거야?" 그녀가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두 사람을 지나쳐 조용히 집을 나섰다. 등 뒤에서는 캐시아의 답답함과 짜증이 그대로 느껴지는 것 같았다. ---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빈센트 대표님이 드디어 첫사랑이랑 결혼한대." "어머, 어제 인터넷에서 사진 봤어." "둘이 진짜 너무 잘 어울리더라." "근데 대표님 결혼한 거 아니었어?" "에이, 누가 신경 써." "솔직히 캐시아랑 훨씬 잘 어울리잖아." 생각보다 훨씬 깊게 가슴을 찔렀다. 숨이 답답하게 막혀 왔지만. 나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 서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그의 아내라는 사실조차 몰랐다. 눈물이 터질 것 같아 급히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 문이 닫히자마자. 나는 세면대를 꽉 붙잡았다. 거울 속 내 모습은 처참했다. 퉁퉁 부은 눈. 창백한 얼굴. 떨리는 입술. 금방이라도 무너질 사람처럼 보였다. 아니. 실제로 무너지고 있는 중이었다. --- 천천히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 가방 속 사직서가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수년 동안. 이 회사는 내 전부였다. 언젠가는 빈센트가 나를 인정해 줄 거라는 헛된 기대 하나만으로 그의 곁에서 쉼 없이 일했다. 정말 우스운 이야기였다. 그의 사무실 앞에 섰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안에서 들려오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내 발을 붙잡았다. "난 아직도 쟤가 집에 있는 게 싫어." 캐시아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 빈센트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곧 사라질 테니까." 손바닥을 손톱으로 파고들 만큼 세게 움켜쥔 나는 곧바로 문을 열었다. 두 사람 모두 동시에 나를 바라봤다. 캐시아는 어색하게 몸을 바로 세웠고, 빈센트는 내가 서류 봉투를 들고 있는 걸 보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나는 말없이 그의 앞으로 걸어가 봉투를 건넸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봉투를 열었다. 하지만 내용을 확인하는 순간. 표정이 완전히 굳어졌다. "이게 뭐야?" 그가 날카롭게 물었다. "사직서?"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봤다. "왜?" 그가 곧바로 따져 물었다. 씁쓸한 웃음이 나올 뻔했다. 5년 동안 사람을 망가뜨려 놓고. 이제 와서 이유를 묻는다고? 나는 그대로 돌아서려 했다. 하지만 빈센트가 갑자기 내 손목을 붙잡았다. "넌 일을 잘해." 그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난 이 사직서 안 받아." 그의 손이 내 피부에 닿은 감촉은 위로가 아니라 숨 막히는 족쇄 같았다. 순간. 정말 뺨을 때리고 싶었다. 왜 이제 와서 신경 쓰는 거냐고. 왜 그동안은 날 가구처럼 취급했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 없이 손을 거칠게 빼냈다. 캐시아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노려봤다. "다른 사람 구하면 되잖아." 팔짱을 낀 그녀가 말했다. "그냥 사표 받아." "오히려 잘된 일이야." 빈센트의 턱선이 단단하게 굳었다. "저 사람 같은 직원을 구하는 건 쉽지 않아." 그는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난 안 받아." "사직은 불가능해." 그 말을 들으면 기뻐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히려 더 아팠다. 5년 만에 처음으로. 빈센트가 나를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아내로서가 아니라. 그저 유능한 직원으로서. --- 나는 눈물이 떨어지기 전에 걸음을 재촉했다. 회사 밖으로 나오자 신선한 공기가 깊이 폐를 채웠다. 수년 동안. 나는 빈센트의 완벽한 침묵하는 아내가 되기 위해 내 모든 꿈을 묻어 버렸다. 하지만 이제는 끝이었다. 정말 죽어가고 있다면. 남은 시간만큼은. 한때 살아 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던 일을 하고 싶었다. 오토바이 레이싱. 신이시여. 정말 그리웠다. 속도. 아드레날린. 그리고 자유. 결혼하기 전. 레이싱은 내 세상의 전부였다. 그때의 나는 사람들이 동정하는 벙어리 딸이 아니었다.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살아 있다는 걸 온몸으로 느끼던 사람이었다. 죽기 전. 단 한 번만이라도. 그때의 나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나는 곧바로 몇 년 동안 한 번도 누르지 않았던 번호를 눌렀다. 니코. 신호음은 한 번도 길게 울리지 않았다. 그는 즉시 전화를 받았다. "니엘?" 숨을 삼키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상에…." "정말 너 맞아?" 아픈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 니코는 내가 말을 하지 못한다고 해서 단 한 번도 나를 다르게 대한 적이 없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오히려. 나를 위해 수어까지 배운 사람이었다. 나는 곧바로 영상통화로 전환했다. 그리고 떨리는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다시 레이스를 하고 싶어.'빈센트“당신 아들은 이제 위험한 고비를 넘겼습니다.”의사의 말이 고요한 병원 복도에 울려 퍼졌다.“조금 더 안정을 취해야 하지만, 상태는 안정적입니다.”악몽이 시작된 후 처음으로, 다시 숨을 제대로 쉴 수 있는 것 같았다. 가슴을 짓누르던 무거운 압박감이 조금씩 사라지면서 다리에 힘이 풀릴 것만 같았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속으로 신에게 감사했다.대런은 무사했다.의사는 안심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인 뒤 자리를 떠났고, 나와 니엘은 병실 밖에 그대로 서 있었다.하룻밤 사이 너무 많은 일이 벌어졌다.나는 천천히 그녀를 바라봤다. 니엘은 지쳐 보였다. 울어서 눈은 부어 있었고, 머리는 흐트러져 있었으며, 불길을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옷소매에는 희미한 화상 자국까지 남아 있었다.그럼에도 그녀는 내가 본 그 누구보다 아름다웠다.살아 있었으니까.그때 불타는 집 앞에서 그녀가 고백했던 말이 다시 머릿속을 스쳤다.대런이…… 내 아들이었다.아직도 믿기지 않았다.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작게 웃다가 다시 그녀를 바라봤다.“그러니까…… 지금까지…….”목소리가 떨렸다.“정말 내 아들이었던 거야?”니엘은 내 시선을 피한 채 고개를 숙였다.“미안해.”그 짧은 두 마디에는 수년간 쌓여온 죄책감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정말 여러 번 말하고 싶었어.”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하지만 모든 일이 벌어지고…… 우리가 그렇게 끝나고 나서…… 이게 더 나은 방법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했어. 당신에게서 대런을 떼어놓으면, 당신이 나한테 준 상처를 당신도 똑같이 느끼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그녀의 뺨을 따라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하지만 매일…… 후회했어.”나는 몇 초 동안 그녀를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그녀의 두 손을 조심스럽게 내 손 안에 감쌌다.니엘이 놀란 듯 나를 올려다봤다.“괜찮아.”나는 눈시울이 따끔거리는 걸 느끼면서도 미소 지으며 그녀의 얼굴에 내려온 머리카락 한 가닥을 쓸어 넘겼다.“내가 받아야 할 벌이
니엘집에 돌아온 뒤에도 뉴스에 나온 카시아의 얼굴이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빈센트가 저녁을 차려주고, 유치한 농담을 늘어놓고, 심지어 “아무 생각도 안 나게 해줄 거야”라며 자신이 고른 영화를 틀어줬는데도, 배 속을 뒤틀어놓는 듯한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다.마치 우리 집 담장 너머 어딘가에 위험이 숨어서, 공격할 완벽한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5분째 같은 곳만 보고 있어.”빈센트가 소파 너머로 손을 뻗어 내 손가락 사이에 자신의 손가락을 끼워 넣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최악의 상황부터 생각하지 마.”나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지금 진심이야?”내가 물었다.“우리가 누구 얘기를 하고 있는지 기억해? 카시아야. 그 여자가 무슨 짓까지 할 수 있는지 당신도 정확히 알잖아.”그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그는 내 손을 들어 올려 손등을 천천히 쓰다듬었다.“알아.”그가 조용히 인정했다.“무시하자는 게 아니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두려움 때문에 우리의 평온까지 망치게 두지는 말자는 거야.”“분명 무슨 일이 생길 거야.”나는 목소리에 떨림을 감추지 못한 채 속삭였다.“그 여자는 사람을 용서하지 않아, 빈센트. 반드시 되갚아.”빈센트는 반박하지 않았다.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오더니 나를 품에 끌어안았다.나는 잠시 버텼지만 결국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자…….”그가 내 머리 위에 턱을 살짝 얹으며 낮게 속삭였다.“숨 쉬어.”그의 손이 내 등을 천천히 위아래로 쓸어내렸다.“들이마시고…….”나는 떨리는 숨을 들이마셨다.“그리고 내쉬어.”나는 숨을 내뱉었다.“다시.”나는 그의 말대로 했다.빠르게 뛰던 심장이 그의 일정한 심장 박동 소리를 들으며 조금씩 진정되기 시작했다.“넌 안전해.”그가 속삭였다.“내 곁에 있잖아.”“하지만 대런은…….”“우리 아들도 안전해.”그의 말은 나를 안심시켜야 했다.그런데 오히려 가슴이 더욱 조여 왔다.
니엘결혼식을 올린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매일 아침 같은 기분으로 눈을 떴다.아직도 믿기지 않았다.“좋은 아침, 자기야.”눈을 뜨기도 전에 빈센트의 다정한 목소리가 침실에 울려 퍼졌다. 갓 만든 아침 식사의 풍성한 향기가 뒤따라 방 안을 가득 채웠다.나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잠에서 깨어났다. 빈센트는 한 손에 쟁반을 든 채 서 있었고, 우리의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이제야 일어나기로 마음먹었어?”그가 부드럽게 놀렸다.나는 졸린 신음을 흘리며 이불을 턱 끝까지 끌어올렸다. 어젯밤 그와 나눈 뜨겁고 열정적인 밤 때문에 온몸이 아직도 기분 좋게 나른했다. 전날 밤의 기억이 하나둘 떠오르자 얼굴이 금세 뜨거워졌다.빈센트는 내 얼굴에 번진 홍조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웃음을 터뜨리며 쟁반을 침대 옆 탁자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그 표정, 나 잘 알아.”그의 눈에 장난기가 어렸다.“아무것도 모르면서.”나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중얼거렸다.“그래? 그런데 왜 얼굴이 빨개졌을까?”“안 빨개졌거든.”“완전히 빨개졌는데?”내가 베개를 집어 들어 그를 가볍게 때리자 빈센트가 웃음을 터뜨렸다.지난 몇 주 동안 빈센트는 너무나 많이 변했다. 가끔은 내가 그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할 정도였다.한때 내가 결혼했던 차갑고 무심한 남자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지금의 빈센트는 매일 아침 직접 아침 식사를 만들겠다고 고집했다. 최근에야 겨우 배운 요리법이 절반이나 되는데도 말이다. 그는 내가 무거운 물건을 드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회사에도 정말 필요한 일이 아니면 거의 나가지 않았다. 회사는 자신이 몇 시간 자리를 비워도 잘 돌아가겠지만, 나와 떨어져 있는 자신은 견딜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우리의 신혼여행은 몇 년 전 처음 결혼했을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침묵 대신 웃음이 있었고, 오해 대신 대화가 있었으며, 우리 사이를 가로막던 벽 대신 입맞춤이 있었다.빈센트는 매일 새로
빈센트니엘의 속눈썹에 매달려 있던 눈물이 마침내 흘러내렸다. 눈물 한 방울이 그녀의 뺨을 타고 조용히 내려갔고, 홀 안의 모든 시선은 여전히 그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그리고 영원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흘렀지만, 그녀의 입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나는 숨조차 쉴 수 없었다.심장이 갈비뼈를 부술 듯 거칠게 뛰어대며 다른 모든 소리를 집어삼켰다. 살아오면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 앞에 서봤지만, 그 몇 초만큼 나를 두렵게 만든 순간은 없었다.내 미래, 내 결혼, 내 두 번째 기회……그 모든 것이 지금 그녀의 입에서 나올 다음 한마디에 달려 있었다.니엘은 잠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손에 든 부케를 어찌나 세게 움켜쥐었는지 하얀 장미들이 그녀의 손안에서 파르르 떨렸다.마침내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눈동자에는 아직 흘러내리지 않은 눈물이 가득 맺혀 있었다.수년 동안 그녀가 품고 있던 모든 감정이 한꺼번에 충돌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숨 막힐 듯한 침묵을 깨며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나는…… 이 남자를 선택할 거예요.”그녀의 목소리는 숨소리보다 조금 클 뿐이었다.“……수년 동안 나를 기다려줬으니까요. 한 번도 나를 사랑하는 걸 멈추지 않았어요. 오늘이 오기를 바라며 기도하는 것도 멈추지 않았고요.”내 입꼬리가 천천히 내려갔다.누군가 내 가슴속까지 손을 집어넣고 심장을 움켜쥔 것 같았다. 숨이 막힐 정도로 세게 조여 와 심장이 뛰는 것조차 힘겨웠다.주머니 속에서 손가락을 꽉 말아쥐었다. 떨리는 주먹을 숨긴 채 나는 그녀를 바라봤다.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붙잡고 있던 희망이 하나씩, 하나씩 무너져 내렸다.목이 고통스럽게 조여 왔다.설마…… 니엘이 니코를 선택하는 건가?수천 가지 생각이 한꺼번에 머릿속을 휩쓸었다.그럼 왜 나한테 키스한 거야?어제는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바라봤는데?그게…… 작별 인사였던 건가?나는 입술 안쪽을 세게 깨물었다. 모든 본능이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라고 소리
빈센트“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니코가 이를 악문 채 물었다. 목소리는 나에게만 들릴 만큼 낮았지만, 눈에 타오르는 분노만으로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나는 조금의 동요도 없이 그의 시선을 마주하며 태연하게 미소 지었다.“내가 뭘 하려는 것처럼 보여?”니코가 대답하기도 전에 홀 곳곳에서 퍼져나가던 속삭임이 점점 커졌다.사람들은 더 이상 모르는 척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잠깐…… 저 사람 빈센트 헤일 아니야? 신부의 남편?”“무슨 소리야?”“못 들었어? 니엘이 5년 전에 사라졌잖아. 다들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 있었대. 그리고 빈센트가 니엘이 보낸 이혼 서류에 아직도 서명하지 않았다는 얘기도 들었어. 법적으로는…… 아직 부부라는 거잖아.”그 사실은 순식간에 홀 전체로 퍼져나갔다.“세상에…….”“그럼 이 결혼식은 대체 뭐야?”“아직 결혼한 상태인데 다른 남자와 약혼한 거야?”“믿을 수가 없네.”“지금 가면 안 되겠다. 어떻게 끝나는지 꼭 봐야겠어.”“대체 누구를 선택할까? 자신의 남편…… 아니면 그동안 그녀 곁을 지켜준 남자?”“이런 건 처음 보는데.”수많은 시선이 나와 니코 사이를 오갔다.테이블 아래에서 몰래 휴대폰을 들어 올리는 사람들도 보였다.심지어 연주자들마저 연주를 멈췄다.지금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건 평범한 결혼식보다 훨씬 더 극적인 일이었으니까.결국 니코의 인내심이 끊어졌다.“당장 여기서 꺼져.”그가 으르렁거리며 위협적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지금.”나는 움직이지 않았다.대신 낮게 웃음을 흘렸다.“왜?”나는 여유롭게 물었다.“그녀가 나를 선택할까 봐 무서워?”니코의 턱 근육이 꿈틀거렸다.“무서워?”그가 차갑게 웃으며 되물었다.“내가 왜 무서워해야 하지? 네가 없는 동안 지난 5년을 내가 그녀 곁에서 보냈어. 그녀가 무너질 때 내가 붙잡아줬고, 대런도 그녀와 함께 키웠어. 난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정확히 알아.”나는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그를 바라봤다.그
빈센트“결혼식에 참석하겠다고?”로난은 내가 완전히 미쳐버린 사람이라도 된 듯 나를 바라봤다. 입까지 벌어진 채 몇 번이나 눈을 깜빡이며, 내가 농담이라고 말해주기만을 기다리는 눈치였다.하지만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는 답답하다는 듯 두 손을 허공으로 치켜들었다.“보스, 진심이에요? 그건 미친 짓이라고요! 5년 동안 보스는 죽은 사람처럼 살았잖아요. 제대로 잠도 못 자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매일 그녀를 잃은 걸 후회했으면서요.”그가 어이없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그런데 이제 그녀가 돌아왔는데, 그녀를 되찾으려고 싸우기는커녕 웃고 있잖아요? 혼자 앉아서 왜 그렇게 실실 웃고 있는 건데요…… 그리고 왜 자꾸 입술을 만져요?”로난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훑었다.“보스…… 비 맞고 쓰러졌을 때 머리를 너무 세게 부딪친 거 아니죠?”나는 대답하지 않았다.대답할 수가 없었다.내 정신은 이미 니엘의 집 앞에 세워둔 차 안으로 돌아가 있었다.아직도 그녀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닿았던 감촉이 생생했다.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녀가 입을 맞추며 나를 침묵시켰던 순간도 선명했다.그 기억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다.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손가락으로 입술을 쓸어보자 또다시 미소가 흘러나왔다.5년이었다.다시는 그녀를 품에 안을 수 없을 거라고 믿었던 시간.그녀를 영원히 잃었다고 스스로에게 수없이 되뇌었던 시간.그런데 그녀가 먼저 내게 입을 맞췄다.그녀가 스스로 나에게 키스하기를 선택했다.그 단 한 번의 순간만으로도 그녀의 죽음과 함께 완전히 꺼져버렸다고 생각했던 내 안의 무언가에 다시 숨이 돌아왔다.로난은 내가 위험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아니…… 이건 정상이 아니야.”그가 과장되게 얼굴을 쓸어내렸다.“보스, 아무래도 그 열 때문에 뇌가 익어버린 것 같은데요. 의사 불러요? 다시 검사라도 받아보는 게 좋겠어요. 뭔가 확실히 이상해요.”나는 작게 웃었다.“로난.”“네?”“내 제일 좋은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