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10화

Author: 윤은혜
어선방에서 식재를 손에 넣은 소민이는 밖에서 오래 꾸물거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혹여 변고라도 생겨 이 귀한 양식마저 잃어버릴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나무 뒤에서 지켜보던 유빈의 입꼬리에 서늘한 웃음이 걸렸다. 며칠 눈을 떼었더니 서쪽 별전 쪽에서 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 모양이었다.

“취영, 가서 저 아이가 뭘 그리 숨기며 다니는지 보고 오너라.”

“예, 마마.”

잠시 후, 취영이 돌아와 아뢰었다.

“마마, 소민 그 계집아이가 어디서 구했는지 파 몇 뿌리와 밀가루를 들고 왔사옵니다.”

“뭐라고?”

유빈은 눈을 조금 치켜뜨며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정확히 본 게 맞느냐? 저리도 꽁꽁 숨겨간 것이 고작 그 몇 가지뿐이란 말이냐?”

“예. 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뒤를 밟았사옵니다. 소민의 품에 있던 건 평범한 파와 밀가루뿐이었지요.”

취영은 눈치를 보며 슬며시 덧붙였다.

“마마, 사람 몇을 데리고 서쪽 별전으로 가서 단단히 본때를 보여주는 게 어떠하옵니까? 요 며칠 마마께서 속이 편찮으신데 좋은 구실이 될 듯하옵니다.”

유빈은 비웃음을 흘렸다. 전에 일부러 강윤지의 분례를 끊으라 시킨 보람이 있는 듯했다. 머릿속에는 그녀가 부스스한 머리로 식은 빵을 씹는 모습이 떠올라 묘한 쾌감이 밀려왔다.

“필요 없다. 아무거나 주워 먹게 내버려두거라.”

“마마, 참으로 인자하시옵니다.”

취영은 곧장 그녀에게 아첨을 보탰다.

유빈은 가벼운 콧소리를 흘리며 돌아섰다.

강윤지는 이 모든 걸 까맣게 모른 채, 해가 저물 무렵 소민과 함께 저녁 준비에 나섰다. 덕준이가 준 식재는 가짓수는 적었지만 양은 넉넉해 며칠은 버틸 수 있었다.

쪽파를 볶아 향을 내고 면을 삶아 뜨거운 기름을 끼얹자 향긋한 파 기름 국수가 완성되었다. 강윤지는 그릇을 들어 식탁에 앉아 면을 후루룩 들이켰다.

그 작은 환관에게서 식재를 더 얻어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조금만 친분을 쌓는다면 그가 곧 조달 경로가 될 터였다.

후궁들의 암투 따위는 그저 뜬구름. 책 속으로 들어오기 전부터 강윤지는 그저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짐승 같은 삶이었다. 자기 집안이 대단한 것도 아닌데 어찌 이곳에서 경쟁할 수 있으랴? 그저 배 채우고 빈둥거리며 사는 게 제일이지.

그러나 유빈이 그녀를 가만둘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다음 날, 양심전.

하늘이 아직 밝아오기도 전에 하림은 조회 준비로 일찍 일어났다. 그가 세수하고 정돈을 마치자 환관이 다가와 옷을 입혔다.

옥대로 허리를 졸라매니 속이 텅 빈 것이 더욱 또렷하게 느껴졌다.

또 빈속으로 조회를 가야 하는구나. 조상들은 대체 규율을 어떻게 정한 것일까? 낙타도 아니고, 조회 전에 한술도 못 뜨게 하다니!

조복을 완전히 차려입은 하림은 문득 거울 속의 자신을 보았다.

순간, 머리 위로 큼지막하게 ‘대량 제일 굶주린 폐하’라는 글자가 아른거리는 것만 같았다.

“폐하, 출궁하실 시각이옵니다.”

왕덕의 목소리가 그의 잡념을 끊어 버렸다. 하림은 눈을 반쯤 내려 차갑게 입매를 다물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조정에서, 하림은 용좌에 앉아 아래 대신들이 쏟아내는 사소한 시비와 보고를 들으며 점점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다 갑자기,어사중승 유병중이 앞으로 나서며 그를 불렀다.

“폐하!”

“강주 지부 진독수의 제방 수리자금 삼십만 냥 착복을 탄핵하옵니다.”

순간, 전각 안은 숨죽인 듯 고요해졌다.

삼십만 냥이라니? 그 돈이면 도대체 몇 개의 찐빵을 살 수 있는 거지? 차곡차곡 쌓으면 진독수를 찐빵 무덤에 파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림은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 유병중을 바라보았다.

“증거는?”

“있사옵니다.”

유병중은 몸을 펴며 이미 조사된 증거를 그에게 올렸다. 하림은 그것을 한 장씩 넘기며 살펴보았다. 그의 표정이 점차 어두워지자 문무백관들은 고개를 숙인 채 숨소리마저 삼켜야 했다.

이게 바로 대량의 충신들이란 말인가! 황제인 자신은 하루 세 끼 뜨끈한 밥도 못 먹고 있는데 밑의 관리들은 향락을 누리고 있다니.

차라리 모조리 목을 쳐서 어선방에 보내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군.

하림은 차갑게 웃으며 면류관의 옥구슬 너머로 살기를 번뜩였다.

“금일부로 대리사경이 주관하여 조사하고 형부상서가 협조해 심문하거라. 만약 증거가 확실하다면 법대로 처단하겠다.”

대리사경과 형부상서는 즉시 앞으로 나와 아뢰었다.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하조 후, 왕덕이 어김없이 어선을 전했다. 하림은 자리에 앉아 백합연자죽을 바라보았다. 그는 한 숟가락 떠서 입안에 넣자마자 서늘한 기운이 목을 타고 내려가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방금 얼음굴에서 꺼낸 듯한 냉기가 그의 몸에 퍼지고 있었다.

또 백합연자죽!

어선방 사람들 눈에 자신은 얼마나 화를 잘 내는 사람으로 비치는 것일까? 매일매일 이렇게 화기 진정에 도움 되는 음식만 올리다니! 게다가 눈앞에 줄지어 선 건, 온통 초록빛 반찬들이었다.

이 사람들은 나를 토끼로 아는 게 분명하다!

매일같이 풀만 잔뜩 내오니 채소를 먹다 못해 눈알까지 초록빛이 도는 지경이었다.

허나 창자가 허전하니 하림은 결국 한 숟갈 한 숟갈 죽을 다 비울 수밖에 없었다.

강남의 부정 사건 탓에 그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기에 궁인을 불러들여 시중 받을 겨를조차 없었다. 그렇게 며칠이고 침전이 비자 후궁에는 벌써 새로운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가까운 사이의 빈과 첩들이 어화원 정자에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진 덕의는 둥근 부채를 흔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휴, 전에 폐하께서 장 상재를 부르신 데 이어 유빈마마까지 불러들이셨길래 드디어 마음을 여시고 후궁에 머무시려나 했는데 말이옵니다.”

그 말을 듣자 안빈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황상이 총애를 베푸시는 건 좋은 신호였는데 고작 시작만 하고는 끝이 나버린 것이다.

“다 유빈이 지난번에 시침 들 때 폐하의 비위를 완전히 거슬렀기 때문이다. 덕분에 온 후궁이 싸잡혀 미운 털이 박혔다니까!”

이 재인은 듣다 못해 입을 열었다.

“유빈마마께서 시중을 잘못 든 건 맞지만 장 상재는 오히려 작위가 올랐잖습니까? 설마 유빈마마 한 사람 때문에 우리 모두를 미워하시진 않겠지요?”

진 덕의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쳤다.

“그렇게 작위가 올랐다 한들, 이 많은 날 동안 폐하께서 다시 부르시지 않는 걸 보면 장 상재는 이미 총애가 식은 게 분명하옵니다.”

안빈이 비웃듯 말했다.

“장 상재는 유빈 궁의 사람이지 않느냐? 내 보기에는 분명 그 유빈의 화를 고스란히 입었을 것이다.”

그들은 정자 안에서 한마디씩 거들었다. 화제는 온통 유빈이 그날 시침을 들다 저지른 추문에 맞춰져 있었다.

이따금 깔깔대는 웃음소리까지 섞여 나왔고 그들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유빈은 그 모든 말을 똑똑히 들었다.

분노에 몸이 달달 떨렸지만 지금 그 무리 속으로 들어가는 건 스스로 욕을 얻어먹으러 가는 꼴이었다. 평소 같으면 위에서 귀비가 버텨주고 뒤에서는 강윤지 같은 물러터진 상대로 화를 풀었기에 이런 수모를 당해본 적이 없었다.

울분을 삼키다 못한 유빈은 곧장 가 귀비의 장악궁으로 향했다.

전갈을 넣고 들어선 그녀는 귀비의 침소 곁으로 다가가 입술을 떼자마자 울음부터 터뜨렸다.

“귀비마마, 부디 첩의 억울함을 풀어 주십시오!”

가 귀비는 가볍게 시선을 들어 무심한 눈길로 유빈을 훑었다.

“무슨 일로 이리 왔느냐?”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폭군의 마음을 읽는 황비의 후궁 평정기   제40화

    강윤지는 그저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고대 총관을 바라보았다.그녀의 입가에 걸린 웃음은 부드러웠지만 그 속에 깔린 뜻은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 미묘한 눈빛에 총관은 순간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다시 한번 느릿하게 감사를 표하자 그의 마음속에는 알 수 없는 불안이 스쳤다.궁궐은 경쟁이 치열하고 후궁 간의 암투는 한 치 앞도 내다보기 어렵다. 강윤지는 늘 겉으로는 한가로워 보여도 필요할 땐 단숨에 발톱을 드러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요리에 관해서라면 그녀도 물러서지 않았다.고대 총관은 코로 짧게 숨을 내쉬며 말을 아꼈다. 그러나 눈에 드러난 노골적인 불쾌함은 감출 수 없었다. 그를 비롯해 주방에 있던 다른 어수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낮게 오가는 속삭임이 공기 속을 스쳤다.“귀인이 요리를 해봤자지 뭐 별거 있겠는가?”“오늘은 꼭 보고야 말 것이오. 어떻게 망신을 당하는지.”강윤지는 그들의 수군거림에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그러나 주변의 시선은 여전히 싸늘했다.“저게 무슨 꼴인가? 계란을 저렇게 풀어 헤치면 도대체 누가 먹는단 말인가?”“게다가 저 하얀 설탕을… 저게 얼마나 단 건데 목이 막혀버리겠네!”“설마 단맛 나는 계란찜 같은 걸 하려는 건가?”조롱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주방 한편에서 피어오르는 향기가 공기를 바꿔놓았다.“어라… 이 냄새, 왜 이렇게 향긋한 것이지?”“다른 밀가루 음식 냄새랑은 또 다르군.”처음에는 무시하던 자들도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코를 벌름거렸다. 그러나 일부는 여전히 고집을 꺾지 않았다.그리고 황금빛이 도는 빵이 화로에서 모습을 드러낸 순간 그 달콤하고도 고소한 향이 단숨에 후방 전체를 휩쓸었다.강윤지는 작은 주머니에 든 부드러운 유지를 집어 들었다. 손끝에서 유지가 고운 곡선을 그리며 빵 속을 채워나갔다. 그 모습을 멀찍이 지켜보던 몇몇 어수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마마… 이건… 향도, 모양도 참 새롭사옵니다. 그… 혹시

  • 폭군의 마음을 읽는 황비의 후궁 평정기   제39화

    그때 강윤지의 머릿속에서 한 가지 좋은 수가 떠올랐다. 그녀는 곧장 소민이를 향해 낮게 말했다.“폐하께서 용서해 주셨다고 하지만 우리도 마땅히 보답을 해야 한다. 어서, 함께 어선방으로 가 보자꾸나. 혹시 폐하께 드릴만 한 것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그러자 소민이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곧장 발걸음을 옮겨 어선방으로 향했다.그 시각, 어선방은 마치 전쟁이 난 것처럼 분주했다. 매일 황상의 식사뿐 아니라 후궁 각처의 음식을 준비하는 곳이었기에 사람들은 쉬지도 않고 움직였다.인간의 신분이 품계로 나뉘듯 음식도 귀천이 갈린다. 겉으로는 모두 어선방이라 불리지만 각 처소의 부엌은 따로 있었다.그중 정중앙에 자리한 방에서만 황상과 태후의 수라상이 차려진다.그들의 우두머리, 고대 총관은 이 어선방의 주인이자 연륜과 위세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그는 지금도 목청을 높이며 얘기했다.“손놀림은 빠르게! 만에 하나 만수상과 귀인들을 굶기기라도 한다면 너의 목을 칠 것이다.”바쁘게 끓고 지지고 굽는 소리에 강윤지와 소민의 등장은 그대로 묻혀버렸다.강윤지는 재빨리 주위를 훑어보았다. 유일하게 비어 있는 곳은 면점 조리대.반죽과 소만 있으면 되는 이곳은 채소를 다듬고 육수를 고는 번잡한 과정이 필요 없었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을 만들까인데...이건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라 자신의 사죄의 예물이자 첫 투신장이었다. 그러니 허투루 할 수는 없는 노릇.그녀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흰 찐빵, 꽃 모양 만두 따위는 너무 평범하다. 이왕 한다면 색다르고 기억에 남는 음식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맞다! 달콤한 것은 기분을 부드럽게 풀어주는 법. 황상의 기분이 상한 지금 달콤한 것이 제격이다. 단, 너무 많이는 만들지 말아야 할 것이다. 후일을 위해 비장의 패는 남겨둬야 할 테니. 결심이 서자 강윤지는 곧장 면점대로 걸어갔다.“계란 몇 개, 우유, 그리고 설탕 좀 가져오너라.”손가락을 꼽으며 소민에게 재료를 불러주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부리나케 사

  • 폭군의 마음을 읽는 황비의 후궁 평정기   제38화

    강윤지는 속으로 이마를 짚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도대체 누가 세 살배기란 말인가.그러나 황상이 이번 일로 자신에게 선을 긋는다면 그동안 쌓아 올린 공든 탑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꼴이 될 것이다. 그건 절대 안 된다.“청컨대 폐하, 신첩의 잘못을 용서해 주옵소서. 앞으로는 반드시 조심하겠사옵니다.”그녀는 이번에 단정히 무릎을 꿇고 깊숙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그리고 마치 무심한 듯 엎질러진 국물에 데인 손등을 살짝 드러냈다.하림의 눈이 가늘게 좁혀지며 바늘처럼 예리한 시선이 그녀의 손등에 꽂혔다.희고 매끄러운 피부 위에 붉게 물든 자국이 유난히 도드라졌다.‘데인 건가? 장 귀인은 어찌 이리 덤벙대는 것이냐? 그 손은 앞으로도 내 밥을 지어야 할 손인데, 다치면 어쩌란 말인가! 가 귀비는 눈을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것이냐? 궁궐 길이 이리 넓은데 하필 부딪히다니! 게다가 내 밥까지 엎질러? 나도 똑같이 넘어뜨려야 정신을 차릴 테냐!’강윤지는 속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그 ‘넘어뜨릴’ 대상이 가 귀비인지 아니면 자신인지 헷갈렸다. 더 말머리를 풀어볼까 하던 순간 다시금 거침없는 속내가 쏟아졌다.‘곤장? 안 된다. 화는 나지만 이건 작은 일이다. 가 귀비는 그렇다 쳐도 장 귀인이 다친다면 밥을 지을 수도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넘길 수도 없는 법. 그래야 장 귀인이 앞으로 걸음걸이 하나까지 신중히 할 게 아닌가.’휴, 살았다.강윤지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무래도 황상의 위장이 자신의 변호를 대신해 준 듯했다.하림이 고개를 들자 강윤지는 잽싸게 경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그는 서늘한 눈빛을 던지며 낮게 꾸짖었다.“궁중 예법을 모르는 것이냐? 거칠고 서두르는 꼴이 제격이더냐.”그는 잠시 말을 끊고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첫 실수라 용서하겠다. 그러나 다시 그러면 성지(聖旨)를 무시한 죄로 엄히 다스리겠다.”하림의 표정만 보았다면 누구라도 얼어붙었을 것이다.그러나 강윤지는 이미 그의 속내를 들은 터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 폭군의 마음을 읽는 황비의 후궁 평정기   제37화

    소민이는 어찌할 바를 몰라 강윤지를 바라보았다.황상께서 겨우 아가씨를 눈여겨보기 시작하셨는데 하필 이런 때에 큰일이 터지다니.만약 황상이 그녀에 대한 총애가 변해버리면 그 틈을 노린 후궁들이 다시 그녀를 물어뜯을 게 뻔했다.“울긴 왜 우느냐. 아직 끝난 게 아니다.”강윤지는 속수무책으로 떨리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녀를 토닥였다.정작 당사자인 자신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렸는데 이 아이는 어찌 이리도 서럽게 우는 것일까?곰곰이 생각해 보면 애초에 자신이 자초한 셈이었다. 가 귀비의 속셈이 곱지 않음을 알면서도 방심했으니. 아직 고작 귀인에 불과한데 벌써 머리 위로 수많은 질투가 떨어지고 있었다.“어찌 망한 게 아니란 말이옵니까? 폐하께서 노하시고 다시 발길을 끊으시면 그땐 누구나 다 아가씨를 괴롭힐텐데요.”그 절절한 눈빛에 강윤지는 가슴이 찡해났다.그래, 진정하자. 지금은 흥분할 때가 아니다. 황상께 밥을 올린 것도 오늘이 처음이 아니지 않은가. 공은 없어도 그간의 정성은 인정받아야 한다.사람이라면 실수도 하는 법 오늘이 아니면 내일 다시 만회하면 될 일이다.그렇게 스스로를 달래자 부르르 떨리던 마음이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이제 와서 되돌릴 수는 없다. 가서 얘기해 보자구나.”강윤지의 말에 소민이는 눈가가 젖은 채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어서재 앞에 이르자 진희가 재빨리 황상에게 전했다.“장 귀인, 폐하께서 부르시옵니다.”강윤지는 침을 꿀꺽 삼키고 예를 갖추어 안으로 들어섰다.‘오늘 내 하늘이 무너졌구나, 장 귀인. 너는 왜 빈손으로 온 것이냐?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더냐? 종이에 적힌 건 뭐든 준비할 수 있다고!’한 번 더 그녀의 손을 올려다 본 하림은 아무것도 없음을 재차 확인하고는 표정 하나 변치 않은 채 입을 열었다.“용건만 말하거라.”‘좋다, 들어보자. 아무것도 안 들고 온 장 귀인이 무슨 변명을 할 것인지. 말 잘못하면 오늘 너를 어화원의 거북이 밥으로 던져버리겠다!’강윤지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한 끼

  • 폭군의 마음을 읽는 황비의 후궁 평정기   제36화

    모든 준비를 마친 강윤지는 소민이를 데리고 어서재로 향했다.하지만 그녀가 아직 문턱에 닿기도 전 어서재 앞에 늘어선 한 무리의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 선두에 선 이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가 귀비, 그리고 그녀의 시녀들.강윤지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삼켰다. 참으로 재수 없는 인연이군. 일찍도 아니고 늦게도 아니고, 꼭 지금?속으로는 쌍욕을 퍼부었으나 표정만큼은 물빛처럼 잔잔했다.“귀비마마를 뵙습니다.”가볍게 허리를 숙이며 평정한 음성으로 인사를 올렸다.가 귀비는 붉게 칠한 손톱으로 손목의 옥팔찌를 만지작거리다 미묘하게 눈썹을 치켜올렸다.“아침에 뵌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귀인으로 올랐더군. 폐하의 총애를 얻는 재주가 남다른 모양이구나.”“마마, 과찬이옵니다. 노첩은 그저 분수에 맞게 할 일을 다했을 뿐이옵니다.”강윤지는 한 치 굽힘도, 한 치 거만도 없는 목소리로 응대하며 눈동자를 굴렸다.“분수라…”가 귀비의 시선이 음식함 위로 향했다.아침 문안 인사 때, 강윤지가 이 음식은 몇 시각을 들여 만들어야 한다고 했던 말이 그녀의 기억에 생생했다.“이게 그 귀한 음식이더냐? 대체 무슨 별미길래?”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불쑥 앞으로 몸을 기울이며 뚜껑을 들어 올리려 손을 뻗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강윤지는 가슴이 철렁했다.대체 멀쩡한 뚜껑을 왜 열려는 것일까? 뻔하지, 해코지하려는 속셈이겠지.이대로 두면 안 된다!그녀가 손을 뻗어 막으려는 찰나, 가 귀비는 순식간에 손을 거두더니 오히려 몸을 비스듬히 던져 강윤지 쪽으로 넘어왔다.그녀의 시선은 오로지 음식함에 쏠려 있었기에 이 기습을 피할 수 없었다.다음 순간, 어깨로 세차게 부딪힌 충격으로 인해 중심이 무너졌다.“아가씨, 조심하십시오!”소민이가 비명을 지르며 강윤지의 팔을 붙잡았다.뚝!그러나 음식함은 이미 손을 떠나 바닥에 떨어졌고 그 안의 찬과 국물은 사방으로 흩날리며 참혹한 광경을 만들었다.강윤지는 땅에 널린 잔해를

  • 폭군의 마음을 읽는 황비의 후궁 평정기   제35화

    하림에게 전해줄 음식은 몇 시각을 들여야 완성된다던 강윤지의 말은 그저 핑계가 아니었다.그녀는 소민과 몇 마디 나누고는 곧바로 부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하림이 하사한 식재 중에서도 가장 빼어난 것만을 골라내 오늘은 새로운 몇 가지를 선보일 작정이었다.눈처럼 흰 두부를 맑은 얼음물에 담그고 칼을 손끝에 바짝 붙인 채 얇게 밀어내면 머리카락만 한 두부 실편이 맑은 물속에서 꽃처럼 풀어졌다. 마치 수면 아래서 서서히 피어오르는 백국 한 송이처럼 말이다.“와… 아가씨, 손놀림이 정말 대단하옵니다!”청자그릇을 두 손에 안은 소민이가 옆에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강윤지는 입가를 슬쩍 올리며 속으로 뿌듯해했다. 이건 겨우 시작에 불과하지. 무 한 뿌리만 주어도 용 한 마리는 새겨줄 수 있을 테니까.두부를 곱게 썬 뒤, 끓는 물에 잠시 데쳐내고 곧바로 찬물에 식혔다. 그렇게 해야만 부드러움 속에 단단한 결이 살아난다. 이어 진한 국물을 우려내기 위해 솥에 불을 올렸다.부엌 안은 금세 연기와 향기로 가득 찼다. 그 뜨거운 열기와는 반대로 먼 궁정의 조정은 차갑고 무거운 공기 속에 휩싸여 있었다.대궐 안, 장대한 전각에는 목소리가 물결처럼 몰아쳤다. 늙은 재상 이문박이 먼저 앞으로 나섰다. 백발 아래 깃든 목소리는 노쇠했으나 다급했다.“폐하, 오늘날 국태민안이 이루어졌으니, 후사를 이어받는 것이 백성들의 안위를 위한 길이 옵니다. 부디 서둘러 태자를 얻으시옵소서.”“그렇사옵니다. 황사(皇嗣)는 국본이오니 폐하께서 깊이 헤아려 주시길 바라옵니다.”다른 대신들도 목소리를 보태자 조정 안은 한순간에 북적거리기 시작했다.하림은 용좌에 앉아 날카로운 시선으로 전각을 훑었다. 이 이야기를 그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그렇게도 아이를 원하면 너희들이 낳든가.매일같이 정사를 처리하기에도 벅찬데 후궁의 자손 문제로 들볶이는 건 지겨웠다. 마치 자식이 없으면 참형이라도 당해야 하는 듯한 기세였다.예전 같았으면 벌써 끝났을 시각이었다. 하지만 황사라는 말만 나오면 이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