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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Author: 윤은혜
유빈은 양심전에서 있었던 일로 속이 잔뜩 뒤틀려 진화궁에서 한바탕 크게 화를 냈다. 취영은 혹여나 유빈이 화병이라도 날까 봐 겨우 어르고 달래어 어화원으로 산책을 나가자고 설득했다.

하지만 고작 몇 걸음 나갔을 뿐인데 하필이면 여비와 마주쳤다. 마음이 풀리기는커녕 오히려 재수 없는 일을 끌어안은 셈이었다.

취영은 괜히 나섰다며 속으로 땅을 치고 후회했지만 그새 여비는 시녀의 손을 빌려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귀밑에 꽂힌 금상옥 비녀가 걸음마다 가볍게 흔들리며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은 얼굴을 한층 더 날카롭고 독하게 보이게 했다.

여비는 비스듬히 눈길을 주며 취영의 부축을 받는 유빈을 훑어보았다. 그러고는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아니 이게 누구신가? 진화궁의 유빈 마마 아니신가? 어제는 양심전 밖에서 서 있기조차 버거웠다더니 오늘은 힘이 넘쳐서 산책까지 나오셨군.”

유빈의 안색이 단박에 시퍼렇게 변했다. 궁중에 비밀이란 없는 법. 이 악녀가 그녀의 소문을 듣고 망신을 주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여비는 태후의 사람이었다. 미색도 총애도 없지만 태후의 비호를 업고 후궁에서 오래도록 입지를 지킬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겁낼 이유도 없었다. 여비 뒤에 태후가 있듯 자신 뒤에는 가 귀비가 있으니.

유빈은 물러서지 않았다. 곧장 취영의 손을 뿌리치고 허리를 곧게 세운 채 냉소를 지었다. 그녀의 말끝에는 서릿발 같은 비아냥이 스며 있었다.

“여비 마마 참 소식 하나는 빠르시군요. 맨날 궁문 앞에서 풍문이나 엿듣는 꼴이라니... 그렇게 한가하시면 차라리 태후마마께 올릴 경문이나 더 베껴 쓰시지요. 모르는 사람은 마마께서 제 총애를 질투하는 줄 알겠사옵니다.”

여비는 총애라는 두 글자에 유독 예민했다.

십 년 전, 가 귀비가 여비의 용모를 비웃었던 그날 이후, 여비는 여전히 여섯 궁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런데 감히 유빈 따위가 그녀의 상처를 건드리다니.

여비의 눈동자 속에 서늘한 그늘이 드리워졌다.

“입이 참 더럽군. 설탕에 절인 갈비보다 더 독하니 말이다.”

그녀는 곧장 유빈 소문을 꺼냈다.

“그 갈비, 페하께서 드시고 역정을 내셨다면서? 아마 음식 때문이 아니라, 네 향내 때문일 것이다.”

유빈의 온몸이 굳어지고 귀가 웅웅 울렸다.

황제의 환심을 사려고 그녀는 갈비에 꿀을 듬뿍 부었다. 하지만 황제는 그 단내를 몹시 싫어했다. 차라리 묻어 두고 싶었던 치욕이 오늘 여비의 입에서 허물없이 까발려지자 그녀도 표정관리가 되지 않았다.

“마마, 말씀이 지나치시옵니다.”

유빈은 손바닥에 손톱이 파고들 만큼 세게 움켜쥐었지만 겉으로는 더 요염하게 웃어 보였다.

“그래도 저는 마마보다는 낫지요. 마마는 폐하의 얼굴을 본 지가 언제이옵니까? 내무부에서 보낸 청구패도 먼지가 쌓였겠지요? 제게 좋은 먼지털이개가 있는데 빌려드리겠사옵니다.”

여비의 표정이 굳었다. 자신이 총애 받지 못한다고 해서 유빈 따위에게 헐뜯힐 이유는 없었다. 그녀는 깊은 숨을 들이쉬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필요 없다. 난 적어도, 제 새끼나 물고 오르락거리는 참새보단 낫거든.”

참새? 유빈의 안색이 확 굳었다. 그 얼굴로 감히?

“전 순전히 마음을 다한 것뿐이옵니다. 마마는 늘 남의 뜻을 비틀어 해석하니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옵니다..”

여비도 물러서지 않았다.

“마음? 진심이었다면, 어젯밤 그렇게 난리를 피우진 않았겠지. 폐하께 민폐를 끼운 것도 모자라 본인 체면을 깎아먹었다는 걸 인정하기 싫은 것이냐?”

유빈은 말문이 막혔다. 사실 어젯밤 일은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수치심이 목까지 차오르자 이를 악물고 자리를 뜨려 했지만 여비의 목소리가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유빈, 벌써 가려고? 하나만 묻지. 어젯밤 폐하께 쫓겨날 때, 신발 한 짝 잃어버린 건 사실이냐?”

“그렇게 궁금하면 직접 양심전 문 앞에 가서 찾아보시지요.”

유빈이 콧방귀를 뀌었다.

“네 이…!”

여비는 손끝까지 부들부들 떨었다.

“입 하나는 참 사납구나. 두고 보거라. 가 귀비가 널 더는 감싸주지 않는다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궁금하구나.”

“그건 마마께서 신경 쓸 일이 아니지요.”

유빈은 귀밑머리를 가볍게 고쳐 쓸며 여비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두 사람은 씁쓸하게 갈라섰고 유빈은 취영과 함께 진화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반 시진도 안 되는 시간 만에 궁 안의 도자기 절반을 박살 내며 분을 삭였다.

같은 시각, 서쪽 전각.

강윤지는 부엌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아 밀가루 자루 바닥의 먼지를 손끝으로 집어 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총애 받지 못하는 것, 그리고 비웃음거리가 되는 것까지 모두 다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굶는 것만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아가씨, 쌀독도 텅 비었사옵니다.”

소민이가 빈 쌀독을 끌어안고 머뭇머뭇 다가오며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소민아, 하늘이 정녕 나를 버리려는 모양이구나.”

강윤지는 고개를 젖혀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더니 체념한 듯 소매를 걷어 올렸다. 벽 모퉁이에 있는 질항아리 뚜껑을 열어 연잎에 싸둔 절반 크기의 절육을 꺼내고 화분에서 기르던 파 몇 줄기까지 뜯어왔다.

일단 이렇게라도 버텨야 했다. 배라도 채워야 다음 방도를 궁리할 힘이 생기니까.

허름하게 모아놓은 재료를 바라보며 강윤지의 표정은 마치 천하의 원한을 짊어진 듯 무거웠다. 그러나 결국 냄비를 집어 들고 조리를 시작했다.

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김이 피어오르고 노릇하게 구워진 육전이 완성됐을 때 고소한 향이 퍼져 소민이는 군침을 삼키기에 바빴다.

“아… 냄새가 정말 좋사옵니다! 폐하께 올리는 어선방 음식보다 더 맛있을 것 같사옵니다!”

강윤지는 씁쓸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하림의 식탁 위에 놓이던 어선방의 호화로운 요리들을 떠올렸다. 그것에 비하면 이게 더 향긋한 게 당연했다. 다만, 재료가 바닥난 탓에 제 실력을 다 발휘할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밥 먹자구나.”

강윤지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육전을 담은 접시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예전 같았으면 온갖 장식과 기교를 곁들여 멋들어진 상차림을 꾸렸을 터였지만 지금은 바람이 숭숭 드나드는 창틀을 흘끗 보고 속으로 냉소하며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주인과 시녀는 차례로 손을 씻고 낮은 탁자 앞에 마주 앉았다. 입에 넣는 순간 바삭한 전병 껍질이 부서지고 짭조름하고 기름진 육즙이 입안 가득 번졌다.

소민이는 뜨거워 숨을 내쉬면서도 한입 물고는 도무지 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재료가 이미 동이 났다는 사실이 떠오르자 그녀의 표정이 금세 시들해졌다.

“아가씨께서 직접 재료를 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다음에 언제 이런 음식을 다시 맛볼 수 있는 것이옵니까?”

그 말이 강윤지의 귀에 맴돌았다.

순간, 눈빛이 번쩍이며 마음속에 하나의 계획이 떠올랐다.

“누가 못 산다고 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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