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아침부터 비가 내렸다.이도하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화면에는 어젯밤 해린에게서 받은 메시지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오늘은 꼭 쉬세요.]짧은 문장이었다. 그런데 도하는 그걸 몇 번이나 읽었다. 어제도 그랬다. 그저 자신을 걱정하는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다른 의미를 찾게 됐다.혹시 자신이 정말 괜찮은지 궁금한 걸까.혹시 오늘도 연락해도 되는 걸까.혹시…“미쳤지.”도하는 헛웃음을 흘리며 휴대전화를 뒤집어 놓았다. 그만해야 했다. 해린은 자신의 마음을 모른다. 그리고 모르기를 바랐다.그녀가 부담스러워하는 얼굴을 보는 건 싫었다. 지금처럼 자신을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린 뒤 조심스럽게 거리를 두는 건 더 싫었다.그런데도 어젯밤 태준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는 해린의 말을 떠올리면 속이 쓰렸다.그녀가 행복한 건 좋았다. 정말로 좋았다.그런데 그 행복을 만들어 주는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은 생각보다 훨씬 아팠다.도하는 휴대전화를 다시 집어 들었다. 해린에게 메시지를 보낼까 하다가 멈췄다.대신 회사에서 전달받은 자료를 확인했다. 폐업한 외부 협력사의 실질적인 운영자에 대한 정보였다.이름을 확인한 도하의 눈빛이 굳었다. 그가 예상했던 인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이름을 보자마자, 왜 윤정식 전무가 자신이 잘 아는 사람이라고 말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도하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은 감정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이 일이 끝나면. 모든 게 끝나면. 자신은 해린을 더는 만날 이유가 없어지는 걸까.그녀가 걱정해 줄 이유도, 자신이 그녀에게 연락할 이유도. 도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 생각이 싫었다.생각보다 훨씬 많이.***오후 네 시.해린은 사무실에서 마지막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발신자는 이도하였다.[변호사님. 지금 잠깐 뵐 수 있을까요?]해린은 메시지를 읽고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무슨 일이세요?]이번에는
오후 세 시 십 분.해린은 도하가 보내 준 주소 앞에 도착했다.소속사 건물도, 경찰서도 아니었다.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조용한 공유 오피스였다. 출입문 옆 안내판에는 여러 회사의 이름이 작게 적혀 있었지만, 도하가 만나자고 한 곳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해린이 휴대전화를 꺼내 메시지를 보내려던 순간이었다.“변호사님.”고개를 들자 검은 모자를 눌러쓴 도하가 건물 입구에 서 있었다.평소 촬영장에서 보던 화려한 모습과는 달랐다. 모자 아래로 드러난 얼굴은 조금 수척했고, 눈 밑에는 옅은 그늘이 내려앉아 있었다.해린은 그를 가만히 살폈다.“잠은 좀 주무셨어요?”“네. 뭐… 조금요.”“조금이라는 게 몇 시간인데요?”도하가 웃었다.“변호사님은 꼭 그런 걸 물어보시더라.”“잠을 제대로 못 자면 판단력이 떨어지니까요.”“그럼 오늘은 판단력 좋은 사람을 데려왔어야 했는데.”“이도하 씨.”“네. 잘 잤습니다.”그제야 해린이 작게 웃었다. 도하는 그 웃음을 잠시 바라보았다. 어젯밤, 자신을 안아 주던 사람. 오늘도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안부를 물어 주는 사람.그녀가 자신을 걱정하는 건 당연히 변호사로서의 책임감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도 도하는 그 다정함 앞에서 자꾸만 기대를 품으려 했다.그는 시선을 돌렸다.“안으로 들어가시죠.”작은 회의실에는 노트북과 서류 몇 장이 놓여 있었다. 도하는 문을 닫은 뒤 해린에게 의자를 권했다. 그리고 맞은편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오늘 전무님을 만나고 왔습니다.”“윤정식 전무님이요?”“네. 제 일정 관리 시스템을 변경한 건 전무님이 승인한 일이더군요.”해린의 표정이 진지해졌다.“변경 이유는요?”“해외 제작사와 협업하기 위해 일정 공유 범위를 넓혔다고 합니다.”도하는 화면을 해린 쪽으로 돌렸다.“그런데 여기 보시면 이상한 부분이 있습니다.”해린은 화면을 자세히 살폈다. 일정 공유 요청서. 승인 기록. 외부 협력사 담당자 목록.서류 자체는 특별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요청서에 기재된 담
아침 햇살이 커튼 틈으로 스며들었다. 해린은 눈을 뜨자마자 눈앞에 있는 얼굴을 발견했다.“…태준 씨?”“일어났어요?”잠긴 목소리가 귓가에 낮게 울렸다. 태준은 이미 깨어 있었다. 한쪽 팔로 머리를 괴고 누운 채, 해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나 오래 그렇게 있었던 건지 알 수 없었다.“언제부터 깨어 있었어요?”“조금 됐어요.”“왜 안 깨웠어요?”“자는 얼굴이 예뻐서.”해린이 이불을 끌어 올려 얼굴을 가렸다.“아침부터 그런 말 하지 마요.”“왜요. 사실인데.”태준이 웃으며 이불 위로 드러난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해린은 이불 속에서 손을 뻗어 그의 팔을 툭 쳤다. 그러면서도 입가에 번지는 미소까지 감추지는 못했다.“오늘 출근해야 하잖아요.”“알아요.”“그럼 일어나요.”“5분만 더요.”“어제도 그런 말 했어요.”“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오늘이죠.”태준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해린은 못 이기는 척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이렇게 평범한 아침을 함께 맞이하는 일이 좋았다. 누군가의 연인이라는 사실이 특별한 사건 없이도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태준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오늘 저녁에도 같이 먹어요.”“약속 있어요?”“없어요. 그러니까 약속 잡는 거죠.”“제가 늦으면요?”“기다릴게요.”너무 당연하다는 듯한 대답이었다. 해린은 그 말이 좋으면서도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찔렸다.어제 도하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도 태준은 자신을 기다려 주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꼬치꼬치 캐묻기보다 먼저 안아 주었고, 힘들었겠다는 말로 그녀의 마음을 헤아려 주었다.자신은 그 다정함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건 아닐까.“태준 씨.”“네.”“고마워요.”태준이 눈을 가늘게 떴다.“갑자기요?”“그냥요.”“그럼 저도 고마워요.”“뭐가요?”“제 옆에 있어 줘서.”그는 해린의 이마에 다시 한번 입을 맞췄다.“그러니까 오늘도 무사히 다녀와요. 저녁에 봐요.”해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몰랐다.
해린은 현관문을 열자마자 익숙한 향을 맡았다. 태준이 쓰는 우디 계열의 향수. 그리고 거실에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왔어요?”소파에 앉아 있던 태준이 고개를 들었다.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채 노트북을 보고 있던 그는 해린을 발견하자마자 화면을 덮었다.“아직 안 잤어요?”“해린 씨 기다렸는데요.”“늦는다고 연락했잖아요.”“알아요.”태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래도 기다리고 싶었어요.”별것 아닌 말인데도 해린의 마음이 이상하게 간지러웠다.오늘 하루, 도하의 무너진 얼굴을 마주하며 온 신경을 곤두세웠던 탓일까. 자신을 향해 아무런 의심 없이 웃어 주는 태준을 보자 긴장이 조금씩 풀렸다.해린이 가까이 다가가자 태준이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었다.“이리 와요.”“왜요?”“안아 주려고요.”해린은 작게 웃었다.“그런 걸 꼭 말해야 알아요?”“말 안 하면 안 와 줄 것 같아서요.”그 말에 해린이 먼저 그의 품으로 들어갔다.태준의 팔이 허리를 감싸 안았다. 익숙하고 편안한 체온이 온몸을 감쌌다. 해린은 그의 가슴에 이마를 기대고 가만히 숨을 내쉬었다.태준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오늘 힘들었어요?”그 질문에 해린은 눈을 감았다.“조금요.”“조금 아닌 것 같은데.”“…많이요.”솔직하게 대답하자 태준의 팔에 힘이 조금 더 들어갔다.“그럼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말아요.”“저녁도 안 먹었는데요.”“제가 해 줄게요.”“태준 씨가요?”“왜요. 저 요리 못 할 것 같아요?”“솔직히 조금요.”태준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사람을 뭘로 보고.”“유능한 변호사?”“그건 맞는데.”그가 웃으며 해린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오늘은 유능한 남자친구도 좀 해 봅시다.”해린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그 웃음소리를 들은 태준의 표정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하루 종일 그녀가 어떤 얼굴로 사람들을 상대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만큼은 웃게 해 주고 싶었다.그는 해린의 뺨을
“제가 누군가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습니다.”도하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하지만 해린은 알 수 있었다. 그가 지금 얼마나 흔들리고 있는지.“누구를 만나러 가시는데요?”“…오래 알고 지낸 사람입니다.”“혹시 공범인가요?”도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휴대전화 화면에는 방금 도착한 사진이 떠 있었다. 사진 속 남자는 최민석과 마주 앉아 있었다. 얼굴도, 옷차림도, 심지어 테이블 위에 놓인 손까지 선명했다.차이점이 있다면 단 하나. 그 남자는 도하가 지금껏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이도하 씨.”해린이 조심스럽게 불렀다.“혼자 가시면 안 돼요.”“괜찮습니다.”“괜찮은 사람 목소리가 아닌데요.”그 말에 도하는 눈을 감았다. 해린은 늘 그랬다. 자신이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 넘어갈 법도 한데, 이상할 만큼 정확하게 그의 빈틈을 찾아냈다.그런 그녀에게조차 지금만큼은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변호사님,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말씀하세요.”“제가 확인할 때까지 오늘 받은 사진에 관해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 주세요.”“…알겠습니다. 대신 저도 부탁 하나 할게요.”“네.”“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하세요. 혼자 해결하려고 하지 마시고요.”도하는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약속하겠습니다.”전화를 끊은 그는 다시 사진을 바라봤다. 사진 속 남자의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속이 서늘해졌다.서강현. 도하가 배우 생활을 시작한 이후 줄곧 곁을 지켜 온 매니저. 처음 오디션을 보러 다니던 시절부터 함께했고, 아무도 도하의 가능성을 믿어 주지 않던 때에도 끝까지 그의 편에 서 있던 사람이었다.데뷔가 무산될 뻔했을 때도.악성 루머에 시달렸을 때도.연예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 몰라 방황하던 때도.강현은 늘 같은 말을 했다.‘도하야. 네가 연기만 할 수 있게 내가 옆에서 다 정리할게.’도하는 그 말을 믿었다. 그 사람이 자신의 일정과 연락처, 촬영장 위치, 이동 경로까지 알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도
엘리베이터 문이 완전히 닫히기 직전, 해린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여기서 말씀하세요.”남자의 미소가 희미해졌다.“경계가 심하시네요. 이도하 씨와 가까운 사이라서 그런 겁니까?”“업무와 관련된 이야기라면 여기서 못 할 이유도 없겠죠.”“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저도 오래 이야기할 생각은 없거든요.”남자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서른 중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단정한 셔츠에 검은 코트, 손목에는 고급스러운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어디서나 볼 법한 평범한 직장인의 모습이었다.하지만 해린은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처음 마주친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여유로웠고, 도하의 이름을 꺼내는 순간부터 그녀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성함이 어떻게 되시죠?”“최민석입니다. 이도하 씨 소속사에서 전략기획팀장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해린의 눈빛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소속사 전략기획팀. 배우의 외부 일정과 광고 계약, 촬영 관련 자료를 관리하는 부서라면 내부 일정에 접근할 수 있을 터였다.“김도윤 씨를 아십니까?”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압니다. 같은 회사에서 일했으니까요.”“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으셨나요?”“친한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 사람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는 알고 있습니다.”“어떻게요?”“회사 내부에서 소문이 돌았습니다. 이도하 씨를 노리고 접근했다는 이야기까지요.”해린은 그의 말을 가만히 들었다.“그런데 변호사님.”최민석이 목소리를 낮췄다.“김도윤이 혼자 움직였다고 생각하십니까?”해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반응을 확인한 남자가 작게 웃었다.“역시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질문에 답하기 전에 한 가지 여쭤보겠습니다. 팀장님은 왜 제게 이런 이야기를 해 주시는 거죠?”“진실을 알려 드리고 싶어서요.”“회사에 제보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그랬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커지지는 않았겠죠.”남자의 눈빛이 서늘해졌다.“하지만 이도하 씨를 아끼는 사람이라면 알아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 사람 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