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계약 미팅은 예상보다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유리는 작품 활동에 대한 의지가 확고했고, 계약 조건도 꼼꼼하게 확인했다. 모르는 부분은 솔직하게 질문했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이야기했다.도하는 그런 유리를 꽤 인상 깊게 바라봤다.처음 사무실에 들어왔을 때는 그저 밝고 긴장을 많이 하는 신인 배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눌수록 생각이 달라졌다. 자신의 연기를 어떻게 발전시키고 싶은지, 어떤 역할에 도전하고 싶은지, 배우로서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지. 유리는 그 질문들에 제법 진지하게 답했다."저는 오래 연기하고 싶어요.“마지막 질문에 유리가 말했다."잠깐 반짝하고 사라지는 배우보다는, 시간이 지나도 사람들이 제 이름을 기억해 주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어떤 작품에서든 믿고 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좋겠어요.“도하는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웃었다."좋은 목표네요.""정말요?""네. 다만 그만큼 오래 버텨야 할 겁니다. 생각보다 쉽지 않을 거예요.""알고 있어요.“유리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해 보고 싶어요. 제가 선택한 일이니까요.“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도하는 계약서를 덮으며 말했다."좋습니다. 앞으로 잘해 봅시다.“그 순간 유리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네! 잘 부탁드립니다, 대표님!“유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난 탓에 소파가 뒤로 밀렸다.끼익.유리는 그대로 굳었다. 도하는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들썩였다."...대표님.""네.""웃으시는 거 알아요.""아, 죄송합니다.“전혀 죄송해 보이지 않는 목소리였다. 유리는 민망한 얼굴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저 원래 이렇게 덤벙대는 사람 아닌데...""괜찮습니다. 긴장하면 그럴 수도 있죠.""대표님 앞이라서 그런가 봐요.“말을 내뱉은 유리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도하는 눈썹을 살짝 올렸다."제 앞이라서요?""...""제가 그렇게 무서운가요?""아니요!“유리가
이도하는 연애에 관심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관심을 두지 않은 지 꽤 오래되었다.한때는 누군가를 좋아했다. 상대가 다른 사람을 바라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쉽게 놓지 못했고, 마음을 접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한동안은 그러지 못했다. 하지만 결국 깨달았다. 아무리 진심이어도 모든 마음이 서로에게 닿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차해린은 강태준을 사랑했다. 그리고 강태준 역시 차해린을 사랑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도하가 감히 끼어들 수 없는 시간이 있었고, 서로를 향한 확신이 있었다. 그 견고한 사랑을 지켜보며 도하는 비로소 자신의 마음을 내려놓았다.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배우로서도, 온결 엔터테인먼트의 대표로서도 정신없이 바빴다. 새로운 작품을 검토하고, 소속 배우들의 일정을 조율하고, 회사의 규모를 키우는 일에 몰두하다 보니 누군가를 만날 시간도, 연애를 시작할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주변에서는 가끔 그를 걱정했다. 잘생겼겠다, 돈도 잘 벌겠다, 성격도 좋겠다. 그런데 왜 연애를 안 하느냐는 말은 이제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었다.그럴 때마다 도하는 똑같이 대답했다."귀찮아서요.“실제로 그랬다. 적어도 지금까지는.그날 아침에도 마찬가지였다."대표님. 오늘 열한 시에 신인 배우 계약 미팅 있는 거 아시죠?“비서의 말에 도하는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네. 알고 있습니다.""이번에 계약하는 배우분이 대표님 팬이라고 하시더라고요.""아, 그래요?""네. 대표님 출연작을 거의 다 보셨다고 하던데요.""그런 분들이 한둘이겠어요?“도하가 웃으며 서류를 넘겼다.온결 엔터테인먼트가 설립된 지 어느덧 5년. 처음에는 자신을 포함해 몇 명 되지 않았던 회사도 이제는 제법 규모가 커졌다. 함께하는 배우들이 늘었고, 작품 제작에도 참여하게 되면서 하루하루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오늘 계약을 앞둔 배우 역시 회사에서 꽤 오랫동안 검토한 인재였다. 연기 경력은 길지 않았지만, 오디션 영상에서 보여 준 감정 표현이 인상적이었다. 무엇
이도하였다.얼굴을 가리고 있던 선글라스와 모자를 벗으며 들어오던 도하는 소파 앞에 서 있는 세 사람을 발견하자 환하게 웃었다.“어? 우리 이서도 있네?”그러자 태준의 품에 안겨 있던 이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도하 삼촌!”도하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어이쿠, 우리 공주님!”이서는 아빠에게서 내려오자마자 도하를 향해 달려갔다. 몇 번이나 만난 사이인 데다 만날 때마다 예뻐해 주는 삼촌이니, 낯을 가릴 이유가 없었다.도하는 한쪽 무릎을 굽혀 두 팔을 벌렸다.“이서야, 삼촌 보고 싶었어요?”“응!”“얼마나?”이서는 양팔을 최대한 크게 벌렸다.“이만큼!”“세상에. 삼촌도 우리 이서 보고 싶어서 잠도 못 잤는데.”태준이 곧바로 끼어들었다.“잠은 잘 주무셨잖아요.”“강태준 씨. 꼭 그렇게 분위기를 깨셔야겠어요?”“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도하는 혀를 차며 이서를 번쩍 안아 올렸다. 이서는 기다렸다는 듯 그의 목에 팔을 감고 볼을 비볐다.“삼촌!”“응, 이서야.”“삼촌 이뻐!”순간 도하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뭐라고?”“삼촌 이뿌다구!”도하는 감격한 얼굴로 해린을 바라봤다.“해린 씨, 들으셨어요?”“네. 저번에도 그렇게 말했잖아요.”“아니, 들을 때마다 새롭잖아요. 이렇게 예쁜 애가 저보고 예쁘다고 해 주는데.”그는 이서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춘 후, 등을 가볍게 토닥이며 소파 쪽으로 걸어갔다. 마치 제 집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은 그가 이서를 무릎에 앉힌 채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그나저나, 두 분은 여전하시네요.”“뭐가요?”해린이 묻자 도하가 턱짓으로 두 사람을 가리켰다.“결혼 5년 차면 슬슬 서로의 단점이 눈에 들어올 때도 됐을 텐데. 여전히 꿀이 떨어지시네. 아주 보기 좋습니다. 제가 다 배가 아플 지경이에요.”“그럼 병원에 가 보세요.”태준이 서류를 정리하며 무심하게 대꾸했다.“강태준 씨는 정말 한결같으시다니까요.”“칭찬으로 듣겠습니다.”“칭찬 아닌데요?”“그럼
강태준과 차해린 법률사무소.어느덧 개업한 지 3년이 지났다.두 사람의 이름은 함께 사무실을 차리기 전부터 법조계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서로 다른 강점을 지닌 두 사람은 각자 맡은 사건마다 탁월한 성과를 거두며 업계의 주목을 받아 왔다. 그런 두 사람이 손을 잡고 공동 법률사무소를 열었을 때, 업계의 관심은 자연스레 두 사람에게 쏠렸다.그리고 기대는 곧 현실이 되었다. 각자의 이름만으로도 의뢰인들의 신뢰를 얻었던 두 사람은 함께 일하면서 더욱 강력한 시너지를 발휘했다. 까다로운 사건일수록 두 사람의 협업은 빛을 발했고, 혼자였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 사건들도 놀라울 만큼 빠르고 정확하게 해결해 나갔다.두사람의 명성은 이전보다 빠르게 퍼져 나갔고, 어느새 그들의 공동 법률사무소는 업계에서 손꼽히는 곳으로 자리 잡았다.그리고 오늘.“…여보.”오전 열 시. 차해린은 사무실 책상에 앉아 서류를 검토하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에서 사건 기록을 읽던 강태준이 시선을 올렸다.“네.”“우리 사무실, 진짜 많이 커졌죠?”태준은 잠시 주변을 둘러봤다. 처음 두 사람이 개업했을 때보다 넓어진 사무실. 직원들이 사용하는 별도의 공간과 회의실, 빼곡하게 채워진 사건 기록 보관실까지. 그는 다시 해린을 바라봤다.“당신이 일을 너무 잘해서 그렇죠.”“오늘도 또 제 칭찬이에요?”“칭찬이 아니라 사실인데요. 예쁘고, 똑똑하고, 일까지 잘하고. 제가 아내 하나는 정말 잘 만났죠.”해린은 또 시작이라는 듯 고개를 저으면서도, 입가에 번지는 미소만큼은 감추지 못했다. 몇 년째 한결같은 태준의 팔불출 같은 칭찬이 이제는 익숙할 법도 한데, 여전히 기분 좋은 건 어쩔 수 없었다.“태준 씨는 정말 한결같네요.”“그럼요. 제 아내가 이렇게 멋진데 자랑은 해야죠.”“누가 들으면 제가 세상에서 제일 대단한 사람인 줄 알겠어요.”“저한테는 맞는데요?”해린은 결국 웃음을 참지 못했다. 태준은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똑똑.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해
결혼식은 생각보다 조용하게 준비됐다.하객 명단을 작성할 필요도 없었고, 누구를 먼저 초대해야 할지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축사를 부탁할 사람도, 양가 부모님이 앉을 자리를 정할 일도 없었다.차해린과 강태준. 두 사람의 이름만 있으면 충분했다.처음 결혼식을 둘만 치르겠다고 말했을 때, 태준은 잠시 해린을 바라봤다.“정말 우리 둘만요?”“네.”“후회하지 않겠어요?”해린은 고개를 저었다.“저는 결혼식에 많은 사람이 오는 것보다 태준 씨가 제 앞에 있는 게 더 중요해요.”“...”“그리고 솔직히 말씀드리면, 복잡한 결혼식은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피곤할 것 같아요.”태준이 웃음을 터뜨렸다.“차해린 씨답네요.”“왜요. 싫으세요?”“아니요.”그가 해린의 손을 잡았다.“저도 좋아요.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고 싶어요.”그 말에 해린은 작게 웃었다.두 사람은 그렇게 결혼식을 정했다. 누군가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결혼식이 아니라, 두 사람이 서로에게 약속하는 날. 그것이면 충분했다.결혼식 당일 아침. 해린은 거울 앞에 서서 한참 동안 자신의 모습을 바라봤다. 새하얀 드레스는 화려하지 않았다. 몸의 선을 따라 부드럽게 떨어지는 단정한 디자인에, 허리 뒤로 작은 리본이 묶여 있었다. 귀에는 태준이 골라 준 작은 진주 귀걸이를 착용했고, 손에는 크지 않은 꽃다발을 들었다.거울 속 여자는 조금 낯설었다.변호사로서 수많은 사건을 마주했고, 타인의 인생을 대신 변론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마음은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던 여자.누군가를 믿는 일이 두려웠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받는 것이 무서웠던 여자.그런 자신이 지금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그것도 강태준과.예식장은 작은 정원이었다. 나무 사이로 부드러운 햇살이 내려왔고, 길 양옆에는 흰 꽃이 소박하게 놓여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이 흔들렸고, 멀리서 새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누군가의 축하도, 음악에 맞춰 입장하는 하객들의 박수도 없었다.정원 끝에 태준이 서 있었다. 짙은 색 정장에 흰 셔
이도하의 사건 기록을 마무리한 날이었다. 해린은 마지막으로 사건 관리표를 확인하고 저장 버튼을 눌렀다. 화면에 뜬 저장 완료 문구를 확인한 뒤에야 길게 숨을 내쉬었다.“끝났다...”“고생하셨습니다.”옆에서 서류를 정리하던 태준이 말했다. 해린은 그를 돌아보며 웃었다.“태준 씨도요. 이제 정말 끝이네요.”“네. 오늘은 사건 생각하지 말고 편하게 쉬세요.”“저녁은 제가 살게요. 약속했잖아요.”“기억하고 있습니다.”“그리고 맛있는 거 먹을 거예요.”“그것도 기억하고 있습니다.”해린은 웃으며 가방을 챙겼다. 사건이 끝났다는 후련함 때문인지, 오늘따라 마음이 가벼웠다. 무엇보다 태준과 함께 고생했던 일을 무사히 마무리했다는 사실이 좋았다.두 사람은 나란히 사무실을 나섰다. 해린은 태준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그런데 오늘 어디 가요?”“저녁 먹으러요.”“그건 아는데요.”“일단 저녁부터 먹죠.”“또 비밀이에요?”태준이 웃었다.“오늘은 조금만 참아 주세요.”해린은 눈을 가늘게 떴다.“...진짜 수상해.”“그런가요?”“네. 그런데 제가 봐주고 있는 거예요.”“감사합니다.”능청스럽게 대답하는 태준을 보며 해린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그녀는 아직 몰랐다. 오늘 저녁 이후에 자신이 어떤 곳에 도착하게 될지. 그리고 그곳에서 태준이 어떤 말을 건넬지.저녁 식사를 마친 뒤, 태준은 차에 오른 해린에게 안전벨트를 매 주었다.해린은 익숙하게 그를 바라보았다.“이제 집에 가요?”“아니요. 한 군데만 더 가려고 합니다.”“어디요?”“보여 드리고 싶은 곳이 있습니다.”해린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그 말에 문득 예전에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함께 일할 수 있는 사무실을 구하면 좋겠다고 했던 이야기. 같은 공간에서 사건을 검토하고, 각자의 의견을 나누며, 퇴근 후에는 함께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던 이야기.하지만 태준이 실제로 사무실을 알아보고 있다는 건 알았어도, 언제쯤 구체적인 계획이 나올지는 몰랐다.“혹시...”해린의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