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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Author: 노지혜
박시언은 이 비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빨간색 드레스는 인파들 속에서 유난히 돋보였다.

김하린은 버건디 색상의 롱 드레스를 입고 혼을 쏙 빼놓을 것 같은 미소를 날렸다. 그녀를 향한 기자들의 플래시가 마구 터지고 한순간 그녀는 마치 레드카펫을 걷는 톱스타를 방불케 했다.

‘김하린?’

박시언은 한참 넋 놓고 있다가 뒤늦게 그녀를 알아봤다.

예전에 김하린은 항상 연한 화장에 수수한 치마를 입고 다녔다. 오늘 같은 모습은 전혀 본 적이 없다.

이때 소은영의 안색이 확 짙어졌다. 그녀는 오늘 처음 김하린을 보게 됐다.

섹시하고 여성미가 차 넘치는 김하린과 상반되게 그녀는 지나치게 평범하고 아직 미성숙한 학생 같았다.

“하린 언니... 진짜 예쁘네요.”

소은영의 말투에 은근 질투가 섞여 있었다.

김하린은 어느덧 박시언과 소은영을 발견하고 두 사람을 향해 걸어왔다.

소은영은 그녀가 아무것도 모른 채 나란히 팔짱을 끼고 있는 두 사람을 보고 매우 난감해할 줄 알았는데 정작 김하린은 일찌감치 알고 있다는 듯 담담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모님이 여기 계시는데 그럼 대표님 옆에 분은 누구시지?”

일부 기자들이 나지막이 의논했다.

김하린은 앞으로 나아가 박시언의 팔짱을 끼더니 소은영에게 손을 내밀며 가볍게 웃었다.

“시언이한테 얘기 들었어요. 소은영 학생 맞으시죠? 반가워요, 김하린이에요. 앞으로 사모님이라고 불러요.”

소은영은 난감한 표정으로 박시언에게 걸친 손을 빼내고 김하린과 가볍게 악수했다.

“안녕하세요, 사모님.”

그녀는 사모님이라는 세 글자를 내뱉기가 너무 어려웠다.

김하린이 말을 이었다.

“시언이가 후원하고 있는 빈곤 가정 학생이라고 들었어요. 2년 안에 출국할 계획이라고요?”

소은영은 살며시 박시언을 쳐다봤다.

박시언이 말했다.

“은영의 성적이 아주 높아서 올해 출국시킬 예정이야. 근데 애가 겁이 많다 보니 오늘 세상 구경 좀 시켜주느라고 데리고 왔어.”

그랬다. 이번엔 단지 소은영에게 세상 구경을 시켜주려고 데리고 나왔다.

이때까지만 해도 박시언은 완전히 소은영에게 빠지지 않았다. 그녀가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야 박시언도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하게 됐다.

하지만 그럼에도 박시언은 크고 작은 행사에 늘 소은영을 데리고 다녀서 모든 해성 사람들이 그가 여대생을 좋아하는 걸 알고 있다.

뭐 이것들은 이젠 김하린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녀가 경매장에 온 이유는 소은영한테서 박시언을 뺏기 위함이 아니라 더 중요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 은영 씨 잘 챙겨드려 시언아. 난 먼저 들어갈게.”

김하린은 박시언에게 걸쳤던 손을 내려놓았다.

박시언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김하린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했으니까.

정신을 차리고 보니 김하린은 어느새 경매장에 들어갔다.

박시언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항상 떼쓰고 난리 치던 김하린이 언제 이렇게 바로 순응하게 됐지?’

김하린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구석 자리에 앉았다. 경매장에 온 사람들은 해성의 거물급 인사들이었다.

그녀의 기억이 맞다면 이번 경매에서 아무도 픽하지 않은 황폐한 부지가 어느 한 소상인에게 팔리게 된다. 나중에 이 부지는 주변의 고급 매물 덕분에 가치가 급부상하여 땅값이 하늘을 치솟게 된다.

또한 전혀 존재감이 없던 그 소상인도 상업 거상으로 탈바꿈한다.

김하린은 이왕 박시언을 떠나기로 했으니 저 자신을 위해 뒷길은 마련해야 한다.

한편 자리에 앉은 박시언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김하린을 찾았다. 옆에 있던 소은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표님... 이따가 진짜 제가 팻말 들어요?”

박시언은 그녀의 목소리에 그제야 사색에서 빠져나왔다.

“그래. 네 안목 믿어.”

소은영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그녀는 학교에서 오랫동안 금융을 배웠는데 바로 오늘을 위해서였다.

김하린은 2층에서 박시언과 소은영이 화기애애하게 있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묵묵히 시선을 옮겼다.

소은영은 확실히 이 방면으로 실력이 있다. 이 또한 이후에 박시언의 마음을 확 사로잡은 원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

전생에서 소은영은 박시언을 위해 아주 좋은 부지를 하나 골라주었고 나중에 박시언도 그녀를 다시 보게 됐다.

하지만 사실 그 땅은 원래 나쁘지 않은 데다 주변에 박씨 일가의 매물이 있고 소은영이 박시언의 돈으로 거침없이 가격을 올리다 보니 이 땅 주변의 박씨 일가 매물도 덩달아 가격이 올랐다. 어쨌거나 박시언은 결국 손해 볼 일이 없었다.

한편 이 부지는 소은영이 아니더라도 박시언이 똑같이 낙찰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경매가 시작되자마자 소은영이 팻말을 들었다.

처음 세 개의 고품질 부지를 소은영이 전부 휩쓸었다.

박시언은 마치 수호신처럼 그녀 옆에 앉아 있었다.

“자 이번엔 뉴 문입니다. 경매 시작가 2천억 원입니다!”

“4천억이요.”

경매가 시작되고 지금까지 김하린이 처음 입을 열었는데 모든 이가 충격의 도가니에 빠졌다. 다들 숨을 깊게 몰아쉬었다.

박시언도 미간을 확 구겼다.

‘이 여자가 미쳤나?’

소은영이 나지막이 말했다.

“저 땅은 별 가치가 없어요. 하린 언니 4천억이 수포가 될 것 같아요.”

박시언은 휴대폰을 꺼내 김하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김하린, 너 대체 뭐 하는 짓이야?]

“4천억 한 번...”

“4천억 두 번...”

...

“헐, 김하린 미쳤나 봐? 4천억으로 고작 저딴 걸 사?”

2층에 있던 배주원이 놀라서 입이 쩍 벌어졌다.

“6천억이요.”

이때 옆에 있던 서도겸이 천천히 말을 내뱉었다.

배주원은 하마터면 테이블을 엎을 뻔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되물었다.

“도겸아! 너도 미쳤어?”

맞은 편에서 김하린이 미간을 찌푸리며 대체 어느 정신 나간 놈이 그녀와 이 폐지를 뺏는 건지 궁금해하고 있다가 머리를 돌린 순간 서도겸을 보게 됐다.

‘그가 검은 산업에 종사하는 거로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는데 언제 부동산 개발에도 뛰어든 걸까?’

“8천억 할게요!”

김하린이 침착하게 가격을 올렸다.

아래층에서 박시언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그는 또다시 휴대폰에 타자했다.

[김하린, 닥쳐!]

이번에 그녀는 아예 휴대폰 전원을 꺼버렸다.

“1조 원 합니다.”

서도겸의 일부러 도발하는 눈빛에 김하린은 어금니가 부서질 정도로 꽉 깨물었다.

‘좋아,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거지?’

김하린이 대뜸 말을 꺼냈다.

“2조 할게요!”

“X발, 미쳤어. 저 여자 제대로 미쳤다고!”

배주원이 얼떨결에 소리가 튀어 나왔다.

아래층에 있던 박시언이 벌떡 일어났다. 늘 과묵하고 진중하던 그도 이젠 김하린의 속내를 파악할 수 없어 흥분하고 말았다.

그에게 이 부지는 2천억의 가치도 안 갔다.

그런 땅을 김하린이 2조에 낙찰하려 하다니?!

서도겸은 아무렇지 않은 듯한 김하린의 눈빛을 바라보며 가볍게 웃더니 양보한다는 손짓을 해 보였다.

“2조 원 한 번...”

“2조 원 두 번...”

“2조 원 세 번! 낙찰합니다!”

망치를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김하린을 애태웠던 걱정거리도 드디어 해결됐다.

부지를 끝내 손에 넣었지만 그녀는 억울하게 1조6천억을 더 써야만 했다.

이게 다 서도겸 때문이다!

김하린은 서도겸을 날카롭게 째려봤다.

배주원이 옆에서 서도겸을 콕콕 찔렀다.

“야, 김하린 너 째려봐. 내가 김하린이면 널 죽이고도 남았어!”

서도겸은 눈썹을 들썩거릴 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아래층에서 소은영이 박시언을 잡아당겼다.

“대표님, 하린 언니 때문에 엄청 손해 보겠어요.”

박시언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걔가 낙찰한 거야. 난 절대 돈 대줄 일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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